은행장들의 취미생활
책읽는 '재미'… 등산의 '묘미'에 빠졌어요
`은행장'이라는 직함은 모든 은행원들의 꿈이다. 위성복 전 조흥은행장(현 조흥은행 이사회의장)이 젊은 행원시절 매일 출근할 때마다 거울앞에 서서 자신을 보고 "행장님, 이제 출근하십니까"라고 자문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지난 97년말 IMF 외환위기이후 은행권이 살벌한 구조조정을 겪으면서 은행장들도 예전의 `황제'와 같은 고전적 권위에서 이제는 `CEO'라는 실무형 최고경영자로 자리의 성격이 많이 바뀌었다. 하지만 은행장들은 아직도 최고의 예우와 존경을 받는 금융계의 별로 통한다.
은행장이 되는 것은 아직도 하늘의 별따기만큼 힘들다.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도 운이 따라주지 않으면 될 수 없다. 천신만고 끝에 지위에 올랐다 하더라도 자신과의 뜻과 무관하게 능력 발휘를 못하고 단명하는 경우도 많다. `관치 금융'의 잘못된 유산이 완전히 청산되지 않은 탓이다.
역할도 막중하다. 누구에게나 그렇지만 은행장들도 매일 매일 무엇을 힘들게 `선택'해야 한다. 특히 은행장들의 선택은 수천명 직원들의 운명과 함께 한다는 점에서 몇십배의 인간적 고뇌가 뒤따른다. 아무리 잘나가는 대형 은행이라도 거래 기업이 부도나면 하루아침에 부실은행으로 전락하고 만다.
특히 가뜩이나 경기가 침체된 요즘, 북핵리스크의 증가, SK글로벌 분식회계파문, 카드채문제 등 은행의 경영기조에 악영향을 미치는 대형 현안들이 놓여 있으면 은행장들은 `불면의 밤'을 보내지 않을 수 없다.
은행장들은 일상의 심한 스트레스를 벗어나 인간적인 여유로움을 찾기 위해 무엇에 심취하는지 궁금했다. 이들은 어떤 취미를 가지고 있을까. 하지만 한국의 은행장들은 겉으로는 `황제'의 지위지만, 그에 걸맞는 여유로움을 즐기고 있는지 발견하기가 쉽지 않았다.
◆은행CEO, 독서광 많아
최근 몇년새 골프가 국내기업 CEO들의 대중적 취미로 바뀌었다고 하지만 아직도 은행장들은 독서, 등산을 즐겨하는 여가활동으로 꼽는다. 독서를 정적인 것, 등산을 동적인 것으로 굳이 분류할 수 있지만 두 가지 모두 `사색'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코드'는 일치한다고 볼 수 있다.
은행장들의 독서에 대한 취미는 `독서광'으로 표현할 수 있을 만큼 조예가 깊다.
김정태 국민은행장은 독서를 제 1의 취미로 꼽았다. 김 행장은 취임이후 `독서 프로그램'을 완전히 국민은행의 기업문화로 정착시켰다. 한달에 한번씩 직원들이 읽고 싶은 책을 읽도록 비용을 지원하고, 김 행장 자신도 수시로 직원들에게 권장도서를 추천한다. 김 행장은 `2020년 기업의 운명' `앞으로 50년' `핵심에 집중하라' `겅호' 등 주로 경영과 미래를 주제로 한 책들을 직원들에게 권한다.
국민은행 관계자는 "김 행장이 잭 웰치 GE 회장의 `인재양성소'에 감명을 받아 현재 운영중인 국민은행연구소(국은연구소)에 이를 직접 벤치마킹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 행장은 다른 은행장들에 비해 취미의 범위가 다소 넓은 축에 속한다. 주말에는 가족들과 경기도 화성에 있는 주말농장에 가서 직접 농사짓는 것이 큰 즐거움이다.
한국개발연구원(KDI) 출신인 이덕훈 우리은행장은 학구적이고 조용해 보이는 외모답게 독서와 등산 등 사색적인 것이 취미다. 하지만 겉모습과 달리 빠른 판단력과 강한 업무추진력을 높게 평가받고 있다. 우리은행 관계자는 "조용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직원들과 격의없이 어울리기를 좋아하고, 직원들과 등산을 함께 하려고 노력한다"고 말했다.
지난해 40대의 나이에 조흥은행장으로 승진, 대단한 화제를 모았던 홍석주 행장은 즐겨하는 여가생활로 독서와 음악감상을 꼽았다. 홍 행장은 런던지점 과장, 리스크관리실장을 역임했고 2000년 2월 부장으로 승격된 지 2년여만에 은행장에 발탁된 `성공신화'의 주인공. 그는 자신이 읽은 책을 직원들에게 스스럼없이 추천해 줄 정도로 온화한 성품의 소유자다. 특히 음악에 대한 관심이 대단해 바쁜 와중에서도 틈틈이 시간을 내서 음악회에 참석할 정도로 섬세한 면도 갖췄다는 평가를 받는다.
`승부사'로 통하는 김승유 하나은행장은 최근 사마천의 `사기'를 읽었다. 김 행장은 지난 1997년 취임 당시 총자산 23조원에 불과했던 하나은행을 5년만에 자산 87조6000억원을 가진 3위 은행으로 끌어올린 인물. 하지만 그는 요즘 취미생활을 여유롭게 즐길 형편이 못된다. SK글로벌의 주채권은행이다 보니 "몇주일째 주말을 반납하고 일에만 매달려 있다"는 것이 직원들의 전언이다.
김종창 기업은행장은 자신이 탐독한 서적을 직원들에게 추천해 업무에 반영할 수 있도록 `독서경영'을 실천에 옮기고 있다. 김 행장은 취임한 지 2년여 동안 평균 2, 3달에 한 번꼴로 꼬박 꼬박 도서를 추천한다. 최근에는 `누가 내 취즈를 옮겼을까'를 추천했다.
`독서광'이라면 지난해 취임한 이강원 외환은행장도 빼놓을 수 없다. 주로 주말을 이용해 독서하는 이 행장은 외환은행 게시판을 통해서 직원들에게 권장도서를 추천해준다. 최근 그는 `굿 투 그레이트', `겅호', `한가지에 승부해라' 등의 책을 추천했다.
역대 은행장들을 살펴보면 독서광의 수준을 뛰어 넘어 `프로'에 가까운 수준 높은 실력을 갖췄던 은행장들도 있다. 대표적인 이가 김경우 전 평화은행장이다. 그는 특히 격조높은 한시(漢詩)를 손수 지을 정도로 이 분야에 남다른 일가견이 있었다. "김 행장을 보면 은행장이 아니라 시인을 만나는 즐거움이 느껴진다"는 것이 그를 아는 사람들의 회상이다. 또 외환은행장을 지냈던 홍세표씨도 대표적인 독서광에다 글 잘쓰기로 소문난 인사이다.
◆산사나이들
지난 3월 주총에서 이인호 행장의 바통을 이어받아 은행장에 선임된 신상훈 신한은행장은 `산사나이'로 불릴 만큼 등산 마니아다.
최근 신 행장은 전국 개인고객영업점포장 300명을 불러 회의를 주재한 직후 점포장들을 이끌고 북한산에 올라 당당히 1등으로 등반을 마쳐 주위를 놀라게 했다. 마침 당일 비까지내린 상황임을 감안하면 범상치않은 실력이다.
신 행장이 영업부장시절 같은 부서에서 근무했던 김정훈 대리는 "지금은 연세가 들어 잘 모르겠는데 영업부장시절에도 젊은 사람들이 따라잡기 힘들 정도로 산을 잘 탔다"고 회상했다. 신한은행장을 역임했던 신한금융그룹의 라응찬 회장도 역시 유명한 등산애호가다.
지난 2001년 5월 국내 은행권에서 가장 먼저 은행장에 오른 하영구 한미은행장은 등산을 가장 좋아하는 여가활동으로 꼽았다. 하 행장이 외국계 금융회사에서 근무했고, 한미은행도 BOA등 외국의 지분이 많은 `서구화된' 조직문화를 감안하면 다소 의외다.
한편 다른 은행장들에 비해 눈에 뛸 만큼 특이한 취미를 가진 이도 있다. 국내 은행장들중에 유일한 외국인인 제일은행의 로버트 코헨 행장의 취미는 `사진찍기'다. 제일은행 김풍호 과장은 "코헨 행장은 카메라에 대해서는 일반인의 상상을 뛰어넘을 정도로 기술적인 면에서 조예가 깊다"며 "심지어 제일은행의 사보촬영 작업에도 개인적인 견해를 밝힐 정도"라고 말했다.
◆왜 독서와 등산을 좋아할까
이유없이 즐기는 취미란 없다. 어떤 취미든지 분명히 자신의 성격적인 코드와 맞기 때문에 좋아하게 되고 몰입한다. 은행장들의 경우 우연의 일치일지 모르겠지만 대부분 독서라는 취미에 코드가 맞았다.
왜 그럴까. 은행장이라고 해서 반드시 독서를 좋아할 이유는 없겠지만 그나마 `이유같은 이유'를 꼽자면 "은행 특유의 업무문화에서 자생했다"는 설명이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국민은행의 최인석 차장은 "은행원들은 업무특성상 관련 규정이 `백과사전'만큼이나 방대하다"며 "책하고 가까이 안할 수가 없고 그렇다보니 자연스럽게 독서광이 된다"고 말했다.
등산도 같은 맥락이다. 은행권의 독특한 기업문화에서 비롯됐다는 분석. 예전에는 저렴하면서도 여가생활과 팀워크를 동시에 기를 수 있는 유일한 놀이문화가 주말 등산이었다. "행원시절에는 아무 생각없이 등산을 하다가도 어느 시점부터 산을 알고 결국 산을 좋아하고 몰입하게 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