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산 정상에 용지(龍池)가 있었는데 이 연못 때문에 동경(지금의 경주)에서 맹인이 많이 태어난다는 소문이 돌았다. 이에 동경 사람들이 불에 달군 쇠와 모래와 돌을 용지에 집어넣자 이를 견디지 못한 용이 진교(辰橋) 아래 깊은 못으로 도망갔고 이후 동경에서 맹인이 사라지자 이맹산(理盲山)을 이명산(理明山)으로 개칭하였다”는 전설이다. 지금도 산 정상 부근에는 돌무더기와 연못의 흔적이 남아 있다. 특히 전설뿐만 아니라 산자락에는 이 지역의 문화와 역사를 말해주는 숱한 유적이 있어 볼거리도 많다.
등로는 신산마을에서 다솔사~봉명산~456m봉~깨사리재~이명산~계봉~477m봉~살티재~황토재까지 잇는 종주산행이다. 신산 버스정류장에서 다솔사까지는 약 2km로 40분 정도 걸어야 절집에 닿을 수가 있다.
삼복이 지났지만 아직도 한낮의 뙤약볕은 뜨겁기만 하다. 20~30년생 편백과 삼나무 숲을 지나 절집이 가까워지자 온통 소나무가 울창한 숲길이다. 푸른빛에 청정함을 자랑하는 적송 숲으로 빨려들자 더위를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시원하다.
다솔사는 현대 茶 문화의 산실
송림으로 우거진 길가에는 어금혈봉표(御禁穴封表)라 새겨진 커다란 바위가 있다. 이는 다솔사 역내(域內)에 묘지를 쓸 수 없도록 임금이 명을 내렸다는 입산금지의 뜻이다. 찻집을 지나쳐 꾸밈없는 돌계단을 올라서서 대양루(大陽樓) 왼편으로 절집 마당에 들어섰다. 웅장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초라하지도 않은 고고한 맛을 느낄 수 있어 좋다. 오랜 연륜만큼이나 전해지는 얘기도 많을 정도로 잘 알려진 절이다.
이 절은 일제강점기 항일독립운동의 거점지이자 현대 차(茶) 문화의 산실로 근대 역사에서는 빼놓을 수 없는 사찰이다. 효당 최범술과 만해 한용운이 이곳에서 깊은 인연을 맺으면서 청년승려비밀결사 ‘만당(卍黨)’을 조직, 항일운동을 이끈 장소다. 김법린, 허영호, 한보순, 김범부(소설가 김동리의 맏형), 변영로, 모윤숙 등 불교인뿐 아니라 당시 우국지사와 문인들의 발길도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특히 김동리의 대표적 소설인 <등신불(等身佛)>이 이곳에서 탄생했다는 사실은 너무나 잘 알려진 얘기다.
절집에서 되돌아 나와 찻집 앞을 지나쳐 해우소 쪽으로 발길을 옮기면 숲 사이로 넓은 산길이 열리면서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된다. 널찍한 산판도로를 따르면 곧이어 이정표와 벤치가 있는 쉼터다. 왼편으로 산판도로가 연결되지만 아름드리 소나무가 울창한 산길을 오르면 봉명정이란 전망대가 있는 봉명산(407m) 산정이다.
봉명산은 방장산(方丈山) 또는 주산(主山)이라고도 한다. 다솔사를 품고 있는 봉명산도 지리산에서 갈라진 낙남정맥의 한 지봉으로 지리산의 연장선상으로 본 것이 아닌가 싶다. 이는 다솔사 경내에 있는 ‘북지리산 영악사 중건비(北智異山 靈嶽寺 重建碑)’로 유추해 볼 수 있다. 봉명산(鳳鳴山)이라는 이름은 풍수지리학상 산세가 전설 속의 새인 봉(鳳)이 우는 형국이라 하여 붙여졌다. 서봉사(栖鳳寺)가 있는 봉암산(鳳巖山)과 마주보고 있어 쌍봉을 이룬다.
정상석을 지나 북서쪽 능선을 타고 내려선다. 보안암까지는 부드러운 산판도로에 안내 푯말도 있어 헷갈릴 염려는 없다. 보안암은 최근에 불사가 이뤄진 듯 새 건물이 보이고 적석총(積石塚)이나 석실 고분을 연상케 하는 보안암 석굴이 자리하고 있다. 석굴은 뒷산 언덕을 파내고, 바위로 석실을 쌓아 올린 형태가 마치 경주 석굴암과 비슷하지만 고려 말에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좁은 석굴 내부의 본존불은 돌을 쪼아 만든 석가모니 좌상이 안치되어 있고, 이 불상을 중심으로 뒤와 좌우에는 16구의 나한상이 배치되어 있다.
보안암을 지나면 활엽수로 뒤덮인 숲길 가에 쌓아 놓은 크고 작은 돌무더기 사이를 지난다. 여기서 조심해야 할 것은 돌무더기에서 100m쯤 지나 산판길을 버리고 왼편 잡목을 비집고 접어들면 능선길이 연결된다는 것이다. 곧이어 수목에 휩싸인 456m봉을 오른 직후 산길은 오른편으로 꺾어지며 급격하게 내리닫는다. 이어 자동차가 넘나드는 깨사리고개다.
도로를 건너면 임도 초입에 ‘이명산 1.5km’라는 표시목이 있다. 콘크리트 임도를 따르다가 모롱이를 돌면 오른편 숲속으로 오르는 산길이 열린다. 등줄기가 후줄근하게 젖을 무렵이면 정상에 이른다. 산정에는 전망대로 보이는 육각정자가 날아갈 듯 자리하고, 풀섶에 묻힌 ‘이명산 상사봉(理明山 想思峯)’이라 새겨진 정상석은 머리만 내밀고 있다. 정자 앞에는 이맹산을 이명산으로 바꾼 전설의 흔적인 양 커다란 돌탑과 주변에 흩어진 돌무더기도 보인다. 조망도 시원해 남쪽으로 쪽빛 바다가 열리고, 그 오른편으로 하동의 금오산이, 왼편에는 사천의 와룡산이 서로 마주보고 솟았다. 남해의 섬산을 비롯해 서쪽으로 광양 백운산이 긴 산릉을 이룬다. 서북으로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지리능선에 솟구친 볼록볼록한 봉우리들이며 그 앞쪽에 올망졸망한 작은 산, 이들 산자락에 붙은 농토와 터를 잡은 도시와 촌락들이 거침이 없고 막힘이 없다.
정상에서 갈림길 표시목이 가리키는 서쪽으로 발걸음을 옮겨 돌무더기를 지나면 가야 할 능선 끝에 계봉이 펼쳐지고 그 너머로 지리산의 산등성이가 시야에 들어온다. 잠시 후면 두 번째 이정표(황토재 5.5km, 마애불 0.1km, 이명산 0.5km)가 서 있는 갈림길이다. 여기서 마애불 쪽은 계명산이나 한솔수련원을 거쳐 1시간30분 정도면 북천면소재지에 다다를 수 있다. 특히 이명산 마애석조여래좌상은 암벽을 다듬어서 감실(龕室)처럼 만들어 높이 81㎝로 조각했다. 제작수법으로 미루어 통일신라시대 작품으로 추정된다. 그 아래쪽에 시루떡을 쌓은 것 같은 전설의 시루떡바위도 볼 수 있다.
갈림길에서 왼편으로 제법 경사진 내리막길로 곧장 내달으면 불당재. 쉼터가 있는 이 고개에서 왼편으로 떨어지면 하동군 진교면 월운마을이다. 직진하면 산릉을 따라 이어지는 산길은 사람이 다닌 흔적이 뚜렷해 큰 어려움 없이 490m봉을 넘어 안부에 이른다. 계봉으로 오르는 안부는 칡넝쿨로 뒤엉켜 있지만 그런대로 헤집고 나가기에 힘들지는 않다. 15분이면 계봉(549m) 산마루에 올라선다.
계봉은 정상석이 두 개다. 계봉은 한자로 닭 계(鷄)자를 쓰지만 경남지방에서는 닭을 ‘달구’라 부르는 까닭에 달구봉이라 이르는 것이다. 그런데 옆에는 ‘이명산 시루봉’이라 새겨진 표석이 자리하고 있어 어리둥절할 뿐이다. 계봉 정상에서의 조망은 이명산보다 좋아 지리산의 주능선은 물론이고, 이명산을 비롯한 인근의 풍경도 더욱 또렷하게 다가온다.
계봉에서 황토재까지는 서북쪽 능선을 따라 간다. 길이 넓고 뚜렷하며 큰 오르내림이 없는 부드러운 능선이다. 5분 정도 내려서면 오른편 길섶에 배안골이 표시된 조그만 안내판이 보인다. 이쪽으로는 배안골 또는 510m봉을 지나 직전마을로 내려서는 길이다. 그러나 산길이 확실하지 않아 조심해야 한다.
살티재에는 산등성이 아래로 경전선 철길이 지나는 이명터널이 뚫려 있다. 왼편 산길로 내려서면 하동군 양보면의 경전선 양보역에 이른다. 30분이 지날 무렵 넓은 산판도로를 만난다. 여기서 왼쪽으로 들면 황토재에 닿는다. 황치재, 수우재라고도 부르는 고갯마루이며 주유소와 청솔휴게소가 있다.
인근 북천면 직전마을에는 ‘코스모스, 메밀꽃 축제’가 준비되고 있다. 지난해 30만㎡ 면적에 코스모스와 메밀꽃이 활짝 피어 관광객 70만 명이 찾아온 명소가 됐다. 올해는 더 넓은 면적에서 섶다리를 체험할 수 있고 오두막도 있어 향수를 자극할 것이란다. 주렁주렁 매달린 수세미와 조롱박터널은 가을을 만끽하게 한다. 막걸리, 메밀묵 등 토속음식이 준비돼 있어 저렴하게 맛볼 수 있다. 축제는 9월 18일부터 10월 4일까지다.
소설가 나림(那林) 이병주(1921~1992년)는 하동이 배출한 대표적인 문인으로 이명산 자락에 그의 문학관이 세워져 있어 한 번 들러 볼 만하다. 이병주문학관을 돌아보면 나림의 문학세계는 물론 그의 삶 자체가 한 편의 소설임도 알게 될 것이다.
>> 산행길잡이
○신산마을 버스정류장~다솔사~봉명산~보안암~456m봉~깨사리재~이명산~계봉~477m봉~살티재~황토재(6시간30분 소요)
○신산마을 버스정류장~다솔사~봉명산~보안암~456m봉~깨사리재~이명산~마애불~계명봉~직전마을(4시간30분 소요)
○신산마을 버스정류장~다솔사~봉명산~보안암~456m봉~깨사리재~이명산~계봉~510m봉~직전마을(5시간30분 소요)
>> 교통
이명산은 하동, 사천에 소재하지만 대중교통편 이용시 진주를 경유하는 것이 편리하다. 산행 들머리인 다솔사 입구의 신산마을까지는 진주 시외버스터미널에서 곤양을 경유하는 옥종행 시외버스를 이용한다. 버스 시간이 여의치 않으면 곤양까지 간 다음 곤양 시외버스정류장 옆에서 택시를 이용할 경우 다솔사까지 요금은 6,000원 안팎. 산행 날머리인 황토재에서 북천면 소재지인 직전마을까지는 1일 3회(10:10, 14:20, 18:40) 운행되는 시외버스 시간을 맞추기 힘들 경우 하동 북천개인택시(011-868-1077)를 부르면 된다. 요금은 8,000원 안팎. 북천면에서 진주까지는 시외버스나 기차를 이용한다. 축제기간에는 진주까지 임시열차, 전세열차도 운행된다.
서울→진주 강남고속버스터미널(ARS 1688-4700)에서 15~70분 간격(06:00~00:10) 운행
서울→진주 남부터미널(02-521-8550)에서 10~30분 간격(06:00~00:00) 운행
부산→진주 서부터미널(ARS 1577-8301)에서 8~10분 간격(05:40~21:30) 운행
부산→진주 노포동종합터미널(ARS 1688-9969)에서 30~60분 간격(06:00~20:40) 운행
대구→진주 서부시외버스터미널(053-656-2824)에서 1일 19회(06:30~19:30) 운행
진주→곤양 경유 옥종행(신산 하차) 시외버스터미널(ARS 1688-0841)에서 1일 9회(07:50~20:00) 운행
>> 숙식 (지역번호 055)
산행 들머리인 다솔사 인근에는 숙박시설이 없다. 곤양면에 곤양파크여관(854-5366)이 있지만 숙식은 진주시내에서 해결하는 것이 좋다. 진주는 서부 경남의 중심도시로 깨끗한 장급 여관과 다양한 먹거리집이 많다. 맛집으로는 천황식당(741-2646)의 진주비빔밥과 육회, 아리랑한정식(748-4556)은 진주 전통 교방한정식이 유명하다. 남강변에 위치한 유정장어(746-9235)는 장어구이와 메밀냉면이 별미다. 북천면 옥정리의 옥정식당(882-9345)은 허름하고 볼품없는 식당이지만 산행 후 출출한 배를 막걸리 한 사발에 국수나 정식으로 부담 없이 달랠 수 있는 주막 같은 집이다. 다솔사 들머리 신산마을의 자연산 메기탕(854-9842)이나 추어탕도 괜찮은 편이다.
/ 글·사진 황계복 전 부산산악연맹 부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