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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영
김용길
2009년 10월
00번째
빈 칸 채우기
따로 또 같이
순 서
11월 김용길 2
단풍 김용길 3
나이 잘 먹는 법 이기영 4
다만, 그 차이 이기영 5
나이 이기영 6
자운영, 자운영꽃 이기영 7
자전거 도둑 이기영 8
미운 일곱 살 이기영 9
하찮은 것 이기영 10
머 그럴 수도 있겠지 이기영 11
와온에서 이기영 12
크기 이기영 13
가을 시편 이기영 14
내비게이션 네버 게이트(Navigation Never Gate)
안태운 15
계단에 앉아서 조덕연 17
-1-
11 월
김 용 길
저녁 10시
일찍 잠자리에 드신 아버지 오줌이 마려운지 일어나신다.
인삼차 한잔 할까요 아버지?
거 좋지
발에 때가많소이
내일 새벽에 목욕 가까요?
그라까
나도 때 좀 베끼야 겠십더.
밖에는 바람이 차갑게 부요.
그래 춥다야.
내일은
아버지 머리 처럼 서리 올랑갑소.
-2-
단 풍
김 용 길
가을비가 옵니다.
물감을 탄 가을비가 옵니다.
동정호엔
황금색 물감으로
햇살 꽃꽂이 하고
칸나꽃엔 빨강
은행나무는 노랑
빨강 주황 노랑 초록 핑크 핑크 핑크 핑크
그대는 물들고
나는
취합니다.
-3-
나이 잘 먹는 법
소 운
살다보면
살아온 내력이 얼굴에 나타나듯이
나무는 나이테로
배추는 켜켜한 배추 속으로
조개는 한 줄 한 줄 빗살무늬로
사람은 주름살로 나이를 먹는다
나이를 잘 먹는다는 것은 주름을 잘 잡아간다는 것
주름은
자갈밭이건 묵정밭이건 찰진 황토밭이건
삶의 고랑을 갈아놓은 텃밭에서 읽어내려 가는
경전이다
-4-
다만, 그 차이
소 운
모란이 피었다 지는 삼일
수련도 피었다 지는 삼일
봄, 작심하고 핀 삼일 동안
모란에 앉았다 가는 벌
수련에 앉았다 가는 나비
모란은 열매를 달고 수련은 열매가 없고
다만, 그 차이
-5-
나이
소 운
첫 아픔을 아는 나이가 있고
첫 아름다움을 아는 나이가 있고
산타를 믿는 나이가 있고
더 이상 믿지 않는 나이도 있고
한 살이라도 얼른 먹어버리고 싶던 때가 있었는데
이제는 한 살이라도 덜 먹고 싶은 나이가 되었다
사랑을 아는 나이는 있는데
사랑을 접어야 하는 걸 아는 나이는 없다
아이에서 소녀로 소녀에서 처녀로 처녀에서 어머니로 건너갈 적마다 시간은 정직하게, 정확한 보폭으로 소급되고 있다
-5-
자운영, 자운영꽃
소 운
내 약지 둘째 마디에는 막 눈을 비비고 깨어나는 초승달 같은 상처가 있어 그것은 내 어린 날 한 토막을 낫질한 기억
자운영이, 자운영꽃이 천지 사방 지천으로 피어 아버지는 소 먹일 풀로 베고 나는 자운영, 자운영꽃을 봄으로 베고 자운영, 자운영꽃 속으로 핏물이 봄물이 뚝 뚝 떨어져 나는 자지러지는 꽃 속으로 봄 속으로 자꾸만 잉잉거렸다
아픔이 아름다움이 무엇인지를 처음으로 알게 한, 봄 한철 지상에 머무르는 붉은 구름송이 자운영꽃 위를 지금도 봄만 되면 날아다니는 꿈을 꾼다
-6-
자전거 도둑
소 운
비토리오 데 시카의 안토니오와
김소진의 나(김승호)와
박완서의 수남이가
자전거를 끌고 간다
1948년 이탈리아의 안토니오가 1996년 서울의 나(김승호)에게 자전거를 선물했지만 함께 보낸 한 보따리의 가난은 결코 반길 수 없는 까끄라기처럼 불편했고 마침내 나는 슬픔의 덩어리들을 피처럼 토하며 아버지라는 존재는 결코 되지 않겠노라고 절망했다 1999년 시골에서 서울로 올라와 세운상가에서 잔심부름 하는 열여섯 수남이가 그 자전거를 넘겨받았다 수남이의 자전거는 수남이도 모르는 사이 도둑질의 두려움을 마취시킨 채 수남이가 가는 반대쪽으로 굴러 가고 있었다
우리들의 상처가 아물기 위해서는
곪아터진 맑은 장국 같은 몇 방울의 아픔쯤은 한 번 더
흘러가게 두어야 한다 흐르던 아픔 멈추고
난공불락의 딱지를 훈장처럼 달아야만
상처는 마침내 추억이 된다
-7-
* 안토니오 : 1948년 ‘비토리오 데 시카’ 감독의 이탈리아 영화 ‘자전거 도둑’의
주인공
* 나(김승호) : 1996년 소설가 김소진이 ‘비토리오 데 시카’ 감독의 영화 ‘자전거도둑’을 보고 쓴
단편소설 ‘자전거 도둑’의 주인공
* 수남이 : 1999년 소설가 박완서가 발표한 단편 동화모음집 ‘자전거 도둑’의 주인공
-8-
미운 일곱 살
소 운
손톱만한 흰 꽃들 가지 끝까지 매달고 있던 옥매화나무가 연한 잎들 낱낱이 세우고 봄을 듣고 있을 때
순한 잎냄새 맡은 풀쐐기들이 가지 끝 여기저기에서 부른 배를 밀며 느릿느릿 이 가지에서 저 가지로 옮겨갈 때
보리알 톡톡 익어가는 소리가 마당 너머에서부터 들리고 여벌달 뜨는 윤사월 따끈한 햇볕에 한껏 늘어지던 복실이가 긴 하품으로 나를 슬쩍 바라볼 때
그날따라 승주군 어느 절인가로 불공드리러 가는 엄마를 따라 가고 싶었던 나는 한사코 떼어놓으려는 서러움에 지쳐 아무리 악다구니를 써도 터 팔아 남동생 하나 데려 오너라 일러놓고 엄마는 내 울음소리 못 들은 척 동네 어귀를 가뭇없이 사라져버렸다 나는 총총한 엄마의 뒷모습에 힘없는 돌팔매질만 날리다 눈물 콧물 범벅으로 내 미운 일곱 살의 봄을 타작했다
-9-
하찮은 것
소 운
그림자를 앞세우고 가는, 빛을 등진 사람의 뒷모습과
그림자를 뒤따르게 하는, 빛을 안은 사람의 앞모습
네 무거운 발뒤꿈치가 질질 끌고 가는 것이 무엇이냐고 그대가 나에게 물었을 때
입도 없이 표정도 없이 언제나 겸손하게 결코 발끝에 차이는 법 없이 밟히는 법도 없이 다만, 조용히 떠올랐다 잠시 출렁거린 것뿐이라고 단지 그것뿐이라고
안개와 비에 젖어 불쾌한 냄새를 배양하는 뒷골목
아무도 관심 없는 길바닥에 붙어있는 껌처럼
우울한 샹송 한 소절이 나지막이 흐르는
그림자, 하찮은 것
그러나, 사람의 눈을 앞질러간 빈 그물의 촘촘한 의식
-10-
머 그럴 수도 있겠지
소 운
참, 세상에나
거미는 자신의 몸에서 줄을 뽑아 집을 짓고 나중에 그 줄을 먹은 뒤에
다시 또 줄을 뽑아 집을 짓는다
머, 그럴 수도 있겠지
제 몸을 양식으로 집을 짓는 거미는 허공에 산다
이른 봄 얼었다 녹은 들뜬 보리 뿌리가 바람을 맞아 말라 죽지 않도록
틈틈이 꼭꼭 밟아 주어야 하는 것처럼,
아무리 오랜 세월을 견디고 살아온 통나무 같은 아름드리나무도
발이 흙에서 떨어지면 죽게 마련이니
발은 늘 땅을 밟고 단단히 서 있어야 하는 것처럼
거미가 허공에 살며
달떠가는 짜가운 사연들을 포획하여 먹이로 삼는 것은 단지,
실을 뽑아 제 집을 짓기 위해서라니 제 집에서 연명하기 위해서라니
머, 그럴 수도 있겠지
이른 아침 막 현관문을 열고 나서는데
확, 얼굴을 덮치는 거미줄 한가닥
-11-
와온에서
소 운
와온 바다가 한 눈에 다 들어오는 ‘나루’찻집에 앉아 차를 마셨다
창문 너머에는 손바닥만한 접시에 구절초가 피어 있었다
바다는 흘러나간 지 한참이 지나도록 돌아오질 않았다
나는 바닥이 훤히 보이는 우물 같은 와온을 나갔다 돌아올 바닷물을 기다리며
마중물로 앉아 있었다
하루의 가장 잘 익은 열매빛 한 동이를 와온 하늘에 쏟아 놓을 때까지
퍼뜩 정신 든 구절초가 느릿느릿 피어나듯이
나도 한없이 뭉기적대며 그 자리에서
그 하루의 모든 빛들이 텅 빈 갯벌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걸 보고 있었다
그리고는 와온의 갯벌에서 낮 동안 첨벙대던 산그림자를 따라
골똘한 저녁이 걸어 나오는 것을 지켜보았다
와온은
깊은 주름을 켜켜이 포개놓은 채
숨어드는 모든 것들을, 노곤한 육체를
젖을 빨리는 어미처럼 쓰다듬었다
-12-
크기
소 운
.
만년필로 점 하나 찍으니
아주 짧은, 명랑한 스타카토 같습니다
크기가 없군요
점 오른쪽 적당한 거리에 다른 점을 찍습니다
. .
두 점은 서로 바라보는 섬 같습니다
그것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섬이 섬에게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는 낮은 목소리로 하는 말 듣습니다
말은 섬과 섬 사이를 오가며 즐겁습니다
즐거운 섬을 바라보며 더 많은 점들이 촘촘히 생겨납니다
어깨와 어깨를 기댄 채
선이 되고
선이 또 선을 세워 각을 맞추면
삼각형이 되고 사각형도 되고
비로소 크기를 갖습니다
보이지 않던 점 하나에 섬들 다가와
살가운 크기를 만들었습니다
덩치를 갖게 된 점들 시끌벅적 야단입니다
그러나 크기 속에 갇힌 많은 말들 제각각 떠돕니다
부딪히고 채이고 뒹굴며 비좁다고 답답하다고
어깨만 기대는 줄 알았다가
-13-
쭉쭉 늘어나는 선의 즐거움에 빠져서 그만
열리는 문 하나 내는 걸 깜빡 잊은 게지요
수도 없이 많은 점들이 제 모습 지우고 만든
바벨탑일런지 모릅니다
어쩌면, 점 하나 혹은 두 개로 만족했어야 했는지 모르겠군요
-14-
가을 시편
소 운
매미소리 쩌렁쩌렁한 무더운 여름
그 여름의 끝 물고 한 계절이 다시 온다
다 태울 것 같던 마음도 잦아들어
멀어질수록 허기를 버리는 강처럼
잔돌로 남은 내 마음을 그 강가 어딘가에 내려두면
그러면 허기도 버려질까
그렇게 모든 것을 버리고 나면
흐르지 않는 듯 흐르는 깊은 강물처럼
아무도 찾지 않는 적막한 절간처럼
그렇게 고요히, 흔들리지 않고
길섶 무심하게 핀 구절초같이 살아갈 수 있을까
-15-
내비게이션 네버 게이트(Navigation Never Gate)
안 태 운
얼리어답터는 새로 나온 말이다. 그 뜻은 새로운 전자기기가 나오면 제일 먼저 사용해 보는 사람을 일컫는 말로 오래 전 노무현 전대통령의 방북 때 수행한 SK그룹의 최태원 회장이 만찬회 등에서 디카를 사용하여 현장을 기록하는 사진이 신문에 실리면서 그룹총수 얼리어답터로 특별히 주목을 받으며 또 다시 세간의 시선을 끈 단어이기도 했다. 그룹 총수가 디카를 사용한다고 해서 뭐 특별할 것도 없겠지만 명색이 4대 그룹의 총수가 채신없이 디카를 사용하여 직접 사진을 찍는 것이 신선해 보였다는 뜻이리라. 디카 뿐 아니라 핸드폰에다 전자사전 mp3 PMP DSLR 등등 사실 일일이 열거하기조차 힘든 신종전자기기들이 매일처럼 쏟아져 나오지만 지천명을 바라보는 나이 쯤 되면 세상 돌아가는 이치에는 제법 밝으나 이런 저런 전자기기 다루기란 영 젬병이요, 게으른 두뇌 또한 쉽게 거부반응을 일으키는 터에 얼리어답터 되기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내가 사용하는 전자기기는 대략 디카와 핸드폰과 노트북 컴퓨터, 그리고 요즘은 일상화된 내비게이션과 PMP 정도. 물론 이 기기들도 기본적이고 필요한 기능만 겨우 알 뿐이다.
내비게이션은 설치 후 테스트도하고 사용방법을 익힐 겸 부산 코엑스에 갈 때 처음 사용했었다. 최단 코스로 경로를 설정하고 출발을 하자 갈림길마다 친절하게 안내를 해주었다. 그런데 가다 보니 내가 평소 알던 길과 달라서 이 길이 맞나 하는 의구심도 있었지만 어쨌건 내비게이션 걸이 안내하는 대로 따라가다 보니 목적지에 정확하였다. 내가 알던 길과 내비게이션이 안내하는 길이 달랐던 것은 어쩌면 내가 알고 있던 길이 정확한 길은 아니었을 수도…. 사람들은 누구나 습관적으로 다니는 길이 있기 마련이다. 내가 가는 길의 옳고 그름이나 과정의 멀고 가까움을 떠나 몸에 밴 익숙한 길 말이다.
-16-
돌아오는 길에는 목적지를 집 주변의 건물 이름이 생각나지 않아 편의상 장유면 사무소로 입력하였다. 안내에 따라 복잡한 부산 시내를 쉽게 통과한 다음 고속도로를 따라 장유에 도착한 후 톨게이트에서 목적지와는 반대 방향인 창원터널 쪽으로 길을 잡았다. 그러자, 내비게이션 걸의 친절한 길 안내가 시작되었다.
“경로를 재탐색합니다. 잠시 후 율하 방면으로 진입하시기 바랍니다. …삐, 잠시 후 율하 방면으로 진입하시기 바랍니다. 삐, 삐, 삐,…계속 직진하시기 바랍니다.”
갈림길을 빠져 나온 후 두 번째 교차로에서 유턴을 한 다음 또 다시 내비게이션 걸의 안내와는 반대 방향으로 핸들을 돌렸다. 그러자 예의 그 말투로,
“…삐, 경로를 재탐색합니다.…200미터 앞에서 좌회전하시기 바랍니다.…”
운전 중이어서, 또 내비게이션 사용이 그다지 익숙하지 않아서 그냥 그렇게 계속 내버려 두었는데 그녀의 안내는 내가 집에 도착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잘 알다시피 내비게이션은 GPS(Global Position System :전지구 위치 파악 시스템) 라는 위성 추적 시스템을 활용하여 현재의 내 위치를 알 수 있도록 한 장치다. 저 높은 하늘 위에서 지상의 움직임을 모두 관찰하고 각각의 위치를 파악하여 모두가 제 갈 길을 제대로 가고 있는지, 진행방향을 살펴 안내하고 통제하며 바로잡아 주는 역할을, 입력된 데이터에 따라 아주 정확하게 수행한다. 우리가 안심하고 내비게이션의 안내에 따를 수 있는 것은 이와 같은 과학적 데이터에 대한 검증된 믿음 때문이다. 믿어도 잘못되지 않을 거라는….
사실 이번 휴가 때도 내비게이션의 덕을 톡톡히 보았다. 담양의 죽녹원과 가사문학관 무안의 회산백련지 전주의 한옥마을을 거쳐 무주를 지나 덕유산을 휘감으며 나제 통문을 통과하여 무흘구곡을 돌고 돌아 성주 경산으로 꾸불꾸불 이어지는 코스에서 나는 가능하면 도로비를 내지 않는 국도를 이용하였는데 내비게이션은 ‘길 안내자’라는 자신의 임무를 아주 잘 수행하였다. 이제는 내비게이션이 없는 여행은 상상하기도 어렵다.
-17-
살면서 종종, 또 때때로 내가 가고 있는 이 길이, 내가 정한 목표가 옳은지를 생각해 본다. 성능 좋은 내비게이션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 싶지만, 그러나 사는 일은 과학이 아니다. 그러므로 내가 의지 할 수 있는 것은 내 눈과 귀의 취사선택에 의한 여러 가지 정보들과 살면서 몸이 스스로 체득한 이런 저런 습관들이다. 다만 그 정보와 습관들이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친 것이거나 게으름과 타협을 방편으로 얻어진 그릇된 습관이 아니기를 바랄 뿐이다.
-18-
계단에 앉아서
조덕연
빨간 벽돌은 오래되었다. 덕지덕지 붙은 먼지 때 페인트는 색이 바래 거의 회색이다
세를 준 마당은 이리저리 정리 되지 않은 채 흩어져있다.
근 30여년을 잘 버티며 우리를 지켜 주고 있는 집은 집 짓는 업자와 많은 실랑이를 하며 지은 집이다.
가로등 불빛이 은은하다. 불빛은 마당 한 귀퉁이를 비추고 있다. 얼마 전 요란한 고양이의 울음소리가 잠을 깨우더니만 새끼를 낳았나 보다.
제법 자란 새끼 고양이 두 마리가 빠르게 지나간다. 아카시아 향이 그윽하다. 그러고 보니 바로 뒤에 있는 정병 산에 올라 간지가 몇 달이나 지났다. 하얀 아카시아 꽃들이 주렁주렁 열린 향의 숲속에서 누군가가 어설프게 만든 그네를 타고 고개를 뒤로 젖혀 하늘을 보면 하늘은 하얗게 눈부시다. 그러면 하늘에서 향이 내려온다.
나는 지금 계단에 앉아 있다.
옥상으로 올라가도록 좁다랗게 벽에 붙여서 만든 계단이다.
이런 일은 오늘이 처음이 아니다. 이 집이 지어지기 전부터 작은 흙집이었을 때부터 여기쯤에 앉아 밤공기의 시원한 바람을 불렀었다. 그때 내 아이는 걸을 때마다 삑삑 소리가 나는 운동화를 신고 아장아장 마당을 걸었었다. 서너 발을 걷다가 아니 걷는 다기 보다는 거의 날았었다. 노랑 병아리가 엄마를 좇아 뛰 날아 가다가 뒹굴듯이 말이다. 그때는 증
-19-
조 할머니도 살아 계셨었다. 마당 가득 쏟아지는 햇볕 속에서 우리 모두는 내 아이의 걷는 모습에 푹 빠져 있었다. 그 아이는 이제 다 자라 쿵쾅거리며 뛰어 다닌다. 엄마! 난 그 아이의 엄마이다. 아이가 삼십이 다 되었는데도 나는 엄마라는 호칭이 어색할 때가 있다. 그래서 스스로를 매번 확인한다. -엄마 말 잘 들어. 엄마 예쁘지. 엄마 시장 간다. 엄마 여기 있다.― 난 내 아이에게 말을 할 때마다 엄마를 붙였다. 그러면 난 진짜 엄마가 되었다. 밥도 하고 빨래도 하고 간식도 만들어 주고 공부도 봐 주고 업어도 주고 혼내기도 하고. 월남치마를 입고 장도 보고 . . .
내 엄마는 날 마당에 꽃고무신을 어렵게 장만하여 신기고 뛰 날아가는 모습을 보고 흐뭇해 하셨다지. 점점 어려워지는 살림살이 속에서 아주 사소한 욕구도 엄마는 들어주지 못하게 되었었다. 난 그런 엄마에게 이렇게 외쳤지. “왜 날 낳았어. 누가 낳으래. 차라리 고아원에 버렸으면 부잣집에 입양이나 갈 수 있었을 것이 아냐.”난 소리 소리쳤지. 그게 어떤 것인지도 모르고 . . .
그렇다. 그런 내가 지금 엄마다. 내 아이의 뛰는 모습 . 공부하는 모습.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좋아하는 엄마다. 내 아이의 옆에서 내 엄마가 날 보고 웃고 있다. “니 새끼 예쁘지?”.
“언니! 엄마가 바지에 . . .”
동생은 다급하게 소리쳤다
전화기를 붙들고 있는 내 손은 나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그래? 어떻게 이럴 . . .”
-20-
난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전화기만 들고 있었다. 엄마는 동생의 아이가 자궁에 생긴 물 혹을 제거하려 병원에 입원하였었는데 수발을 들러 갔었다.
“하루 종일 잠만 자고 . . . 언니! 엄마 다시 대전에 보내야 되겠다. 치매끼가 있는 것 같아. 언니야 엄마 불쌍해서 어떻게!”
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말을 더듬었다. “아닐 거다. 네가 의사도 아니면서, 아닐 거다. 잠시 실수일거다.”
“아니다. 아무래도 이상하다. 몰라. 끅.” 동생은 두려움에 울고 있었다. 스스로가 여자이면서 남존여비를 철두철미하게 신봉했던 엄마. 그 엄마는 남동생들의 눈 밖에 나 혼자 살고 계신다. “내 늙으면 너하고 살 거다.” 했던 엄마. 그럴 때 마다 난 그 사랑하는 아들들 다 놔두고 왜 나하고 살려하느냐고 나는 시어머니 하나로도 버겁다고 절레절레 손사래를 쳤다. 그리고 정말로 모시고 살고 싶지도 않았다. 엄마는 내가 결혼을 일찍 했다고 원망했었다. “좀더 벌어 큰 남동생 학교라도 마치면 하지 ,무엇이 그리 바빠서 . . .” 엄마는 내가 결혼을 하고 십년이 넘도록 동생들 앞에서나 남들 앞에서나 혼자 있을 때나 곱씹었다. 그리고 그 말 뒤에는 한숨을 회오리처럼 내 쉬어 집안 공기를 뒤집어 놓았다. 당연히 어린 동생들 가슴에도 멍으로 남아 있었다. 그럴 때 마다 난 생각했다. ‘내가 낳은 아이들도 아닌데 왜 내게 짐을 져 주는지 당신이 지고 가야 할 짐이 아닌가. 그만큼 했으면 나도 할 만큼 했다. 나도 지쳐서 더 이상은 못 버텨.’ 그렇게 가슴 가득 할말은 죽지 않고 있었다.
벽돌 건물 사이로 삐죽이 얼굴을 내민 하현달은 별도 없는 밤을 지키고 있다.
-21-
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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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제 글이 너무 많이 올라가 있어요....지금 수정 중에 있는 글도 있고 하니....미운 일곱 살...와온에서...자운영...이 세편만 이번 달 빈 칸으로 편집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단디 선배....수고 많으셔요...
소운님 특집인데............................ 아쉽군. 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