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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강동철, 김정훈, 류정, 이신영, 최규민기자
[조선일보 2012 신년특집] 희망 은퇴 시점 평균 65.5세… 실제 은퇴 나이 평균 60.7세
많은 사람이 나이 들어서까지 보람 있게 일하면서 생활비도 버는 '평생 현역'을 꿈꾼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다. 통계청의 '2011년 가계금융조사' 마이크로데이터를 본지가 분석한 결과, 대한민국 은퇴자의 평균 은퇴 연령은 60.7세였다. 하지만 아직 은퇴하지 않은 사람들은 자신이 65.5세에 은퇴할 것으로 예상했다. 실제 은퇴 연령이 예상 은퇴 연령보다 다섯 살 정도 빠른 셈이다.
흥미로운 것은 나이가 들수록 스스로 예상하는 은퇴 시기를 늦춘다는 점이다. 20대의 경우 61.4세가 되면 은퇴할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50대 현역들은 자신의 은퇴 예상시기를 평균 65.4세로 전망했다. 30대(62.5세), 40대(63.6세), 60세(71.6세), 70대(79.7세) 식이다. 정민 현대경제연구원 연구원은 "은퇴할 시기가 가까워질수록 자신이 은퇴를 하기엔 너무 팔팔하다고 생각할 뿐만 아니라 은퇴 준비 또한 부족하다는 생각을 갖게 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아직 은퇴하지 않은 가구들은 은퇴 후 필요한 최소 생활비를 월 158만원으로 봤다. 하지만 어느 정도 여유를 갖고 적정한 생활을 유지하려면 한 달에 239만원은 있어야 한다고 응답했다. 이들에게 노후 은퇴 준비도를 물어봤더니 '최소 생활비는 충당할 수 있을 것 같다'(46.2%), '적정 생활비를 충당할 수 있을 것 같다'(21.9%), '노후 생활비는 충분할 것으로 예상한다'(6.4%)고 답해 4명 중 3명은 기본적인 생활은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이미 은퇴한 사람들의 절반 가까이는 '적정 생활비를 충당하고 있다'(44.6%)고 했고, 나머지는 충당하지 못한다고 했다.
서울 장충동 한국해비타트 본부에서 일하는 권이영(71)씨는 "은퇴는 죽을 때나 하는 거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사회 통념상 그는 한국전력기술 상무를 끝으로 1998년 퇴직한 은퇴자이다. 하지만 그는 퇴직 후에도 12년째 매주 월·화·목요일마다 경기도 분당 집에서 7시에 나와 서울로 출근한다. 해비타트는 세계 각지에 집이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 집을 지어주는 비영리단체다. 권씨는 이 단체가 외국에 보내는 각종 공문들을 번역하거나 꼼꼼하게 손보는 일을 한다. 여기서 받는 월수입 100만원은 그에겐 덤이다. 그는 환갑이 지나 늦깎이로 시집(詩集)을 냈고, 주말엔 성남 문화원에서 시와 수필 쓰는 방법을 가르친다. 그는 한 달 일정이 빼곡히 적힌 다이어리를 꺼내 보여줬다. 그는 "퇴직 후 여러 일에 시간을 쪼개 쓰면서 나도 모르던 잠재력을 발견하는 때가 많아 깜짝깜짝 놀란다"고 말했다.
사실 우리가 흔히 받아들이는 '60대=은퇴'라는 공식도 1930년대 미국에서 우연한 계기로 만들어진 것이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이 1930년대 뉴딜 정책을 입안하며 연금을 지급하는 은퇴 연령을 62세로 정했는데, 당시 미국인의 평균 수명이 63세였다. 수명은 계속 늘어 80세에 가까워졌는데, 사람들의 머릿속에 박힌 은퇴 연령만은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다. 공자(孔子) 시절에 평균 수명은 38세 정도였다. 공자가 말한 불혹(不惑·40세)은 지금으로 치면 80세 정도다. 김문혁·김수신·권이영씨는 아직 불혹 나이에 닿지도 않았다. 100세쯤 돼야 공자 시절의 지천명(知天命)이다.
은퇴 준비라고 하면 많은 사람이 은퇴 자금을 모으는 일만 생각한다. 하지만 그보다 훨씬 중요한 준비는 '관계'에 대한 준비이다. 현대인 대부분의 관계는 직장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가정은 잠시 쉬다가 출근하는 공간이 되어 버렸고, 다른 관계들도 엉성하다.
그러나 은퇴 후엔 가정과 사회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야 한다. 관계를 재정립하고 새로운 관계를 맺는 것은 이민(移民)을 가는 것과 같은 문화적인 충격을 줄 수 있다. 문제는 그 준비가 턱없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특히 남성이 그렇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은 최근 우리나라 여성 72%가 '늙은 남편 돌보는 게 부담스럽다'고 답했다는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한경혜 서울대 노화고령사회연구소 교수는 "모임·친척 등 주변과의 관계 중심으로 살아온 여성들보다 직장 중심으로 살아온 남성들의 준비가 부족하다"며 "가정과 사회에 신입사원의 마음으로 재취업한다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지난달 본지와 삼성생명이 공동으로 은퇴를 앞둔 전국 40~50대 남녀 500명에게 부부 간 평소 대화 시간을 물었더니 하루 30분 미만이라는 응답이 42%, 30분~1시간이라는 답이 29%였다. 하지만 은퇴를 하면 20년이 넘도록 매일 많은 시간을 부부가 함께 보내야 한다(본지 설문 결과 '부부가 함께 살아갈 시간이 얼마나 될 것 같은가'라는 질문엔 평균 21.8년이라고 답했다). 갑자기 닥친 20년을 어떻게 함께 보내야 할까.
우선 아내의 생각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본지는 대전여고 29회 동창생 15명의 모임을 취재해 은퇴하거나 은퇴를 앞둔 남편들에 대한 속내를 들어봤다.
"이번 달 환갑 누구야? 말 안 하면 안 챙겨 준다", "남편 돈 벌 때 예쁜 옷 사. 지금 안 사면 평생 새 옷 구경도 못 한다", "그래 그래 맞아 맞아. 까르르르." 지난 19일 대전 한 식당에서 이들 15명의 송년회가 열렸다. 동창생이지만 나이는 조금씩 달라 59~62세이다.
남편이 아직 일을 하고 있는 이희용(59)씨, 얼마 전 남편이 은퇴한 박옥순(61)씨, 남편과 함께 15년째 택시운전을 하고 있는 변명희(60)씨…. 식당 가장 안쪽 방인데도 왁자지껄한 소리가 식당 밖으로 새어 나왔다.
◇프라이팬으로 그냥 확
―난 남편이 아프면 뭐라도 하나 해 먹이려고 가져다 바치는데. 자기는 전혀 그런 게 없어. 아프다고 하면 인상부터 팍 쓰면서 "왜 아프냐"고 물어본다니까. 요즘 남편이 잠에서 깰 때 프라이팬으로 눈을 눌러 버리고 싶을 때도 있다니까. 일어나지 말라고.
―퇴직한 우리 남편은 종일 집에서 TV만 봐. 새벽 2시까지 드라마, 스포츠 이리 돌리고 저리 돌리고. 26살 아들은 취업 준비하고 있는데. 내가 맨날 "와이프가 싫어하는 걸 덜 하고 사는 게 잘사는 것"이라고 이야기하는데 안 변해. 자기가 그동안 돈 벌어 왔으니 그 정도는 참으라 이거야.
―솔직히 나중에 70 넘어서 황혼이혼당하면 남자들만 손해지. 안 그래? 어차피 60 넘어가면 부잣집 마나님이나 사장님도 전부 다 중고품이라고. 남자들이 위기의식이 없어.
◇선행 학습이 필요하다
―최소한 남자가 국 세 가지 정도는 끓일 줄 알아야지. 그래야 나 없어도 밥이라도 먹을 거 아냐. 근데 아주 그냥 생각도 안 해. 내가 이렇게 침대에 누워서 "콩나물국 한번 끓여 봐요"라고 하면 5분도 안 돼서 "콩나물 어디 있는데" 물어보고, 또 조금 있다가 "젓갈은 또 어디 있어" 물어보고. 이렇게 몇 번 물어보다가 "나 안 해, 뭐 이리 귀찮아"라면서 소리를 빽 지른다니까.
―집에서 노는 사람 매일 밥해 주는 건 좀 불공평하지 않아? 그래서 난 5년 전부터 남편한테 "일요일 점심은 나 휴무다"라고 선언했거든. 선행 교육인 거지. 안 해주는데 지가 어떡해. 굶든지, 해 먹든지, 짜장면 시켜 먹든지, 알아서 해야지.
―은퇴 후라도 자기 밥값만 제대로 하면 우리 중에 구박할 사람이 누가 있겠어. 어떤 마누라도 다 반기지. 은퇴하고 난 뒤에 밥만 먹으면 안 돼. 자기 밥값은 해야 집에서 밥 준다고.
오후 11시, 김재민(60)씨는 두꺼운 침낭을 여미며 잠에 든다. 해발 1300m 네팔 둘리켈의 겨울 밤은 춥다. 건기(乾期)라 수력 발전할 물이 없어 하루 중 절반은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서다.
오전엔 네팔 카트만두 국립대학 컴퓨터학과 학생들에게 IT 기술을 강의하고 오후엔 대학 내 원격 학습 시스템을 구축하는 일을 하는 그는 한국국제협력단(KOICA·대외 무상협력사업을 하는 정부출연기관) 봉사단원이다. 3년 전까지만 해도 그는 사장님이었다. 1997년부터 2년 동안 한국마이크로소프트 대표이사를 지냈고, 그 뒤엔 다른 IT 업체 두 개의 CEO를 지냈다.
본지와 삼성생명이 은퇴를 앞둔 40~50대 전국 남녀 500명에게 물었더니 '은퇴는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시간'(70.4%, 복수응답)이라는 대답이 가장 많이 나왔다.
그들에게 '죽기 전 꼭 해보고 싶은 일'을 물어봤다. 영화 제목으로 유명해진 '버킷리스트(bucket list)'를 작성해 보라고 한 것이다. 주관식 질문에 '북극의 오로라를 보고 싶다', '해탈하고 싶다', '고아원을 운영하고 싶다' 등 예상치 못한 답변들이 쏟아졌다.
가장 많이 나온 응답은 역시 여행(35%)이었다. 이어 종교·봉사활동(18.5%), 공부(6.5%), 스포츠(6.3%)가 뒤를 이었다.
환갑이 넘는 나이에 인터넷으로 공부하기 위해 경희사이버대학에 등록한 재학생이 65명이나 된다. 이들에게 '공부'는 버킷리스트의 첫 번째 항목이자 다른 버킷리스트를 실천하기 위한 디딤돌이다.
본지는 이들 중 40명을 전화로 인터뷰했는데(40명 중 27명은 은퇴자), "왜 환갑 넘어서 공부를 하느냐"는 질문에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이 많아서"라는 대답이 18명으로 가장 많았다.
외식농수산경영과 09학번 박종훈(61)씨는 "비누 공장을 하다가 사양산업이라 접었는데, 나에게 시간이 앞으로 25년 더 남아 있다는 생각이 들어 학교를 다니면서 다시 사업계획서를 만들고 있다"고 했다.
지난해 말 주민센터 공무원으로 정년퇴직한 신순호(61)씨는 동남아에서 온 다문화가정 민원인들과 말이 안 통해 쩔쩔맸던 경험이 많아 퇴직 후 그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쳐 보자는 맘으로 한국어문화학과를 택했다.
최고령자인 미국학과 11학번 유한옥(74)씨는 퇴직 후 12년 지나서야 대학 신입생이 됐다. 그는 "은퇴해 보니 가장 중요한 게 삶의 질이더라"며 "관(棺) 속에 들어갈 때까지 공부하는 게 삶의 질을 높이는 가장 좋은 길인 것 같다"고 했다.
이금룡 상명대 교수(가족복지학)는 "버킷리스트 10개를 만들어 보는 것이 은퇴 설계를 향한 첫 단계"라고 말했다.
후원 : 삼성생명 은퇴연구소
올해 중학교 들어갈 딸 하나를 둔 아빠이며 제2금융권에서 일하는 이동빈(40)씨에게 지난 연말 국민연금공단에서 안내문 한 장이 왔다. '60세까지 불입할 경우 고객님의 예상 연금액은 매월 100만7000원입니다.' '국민연금은 물가 오름폭이 수령 연금액에 반영되기 때문에 안심해도 된다'는 설명도 눈에 띄었다. 이씨는 "그나마 월 100은 되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찬찬히 통지서를 살펴보던 이씨의 눈에 만 65세가 돼야 비로소 연금을 받을 수 있다는 설명이 들어왔다. "내가 언제까지 회사에 다닐 수 있을까?" 이씨는 불안해졌다. 55세에 은퇴한다면 국민연금을 받기까지 이씨는 10년을 기다려야 한다. 이씨의 재산은 은행 대출 1억7000만원을 끼고 산 시가 4억원짜리 아파트 한 채와 3000만원 정도의 펀드가 전부이다.
◇'5565 마(魔)의 10년'
'직장에서 은퇴하고, 가진 재산이라곤 집 한 채, 국민연금은 10년 뒤에나 받는다.' 바로 현재의 30~40대가 55세가 되면 정면으로 맞닥뜨리게 될 현실이다.
본지와 삼성생명이 지난달 은퇴를 앞둔 전국 40~50대 남녀 500명에게 '은퇴 후 생활비를 어디서 조달할 계획인가' 물었더니 절반 이상(56.2%)은 연금으로 생활하겠다고 답했다. 근로소득(17.2%), 부동산 임대소득(14.0%)이 뒤를 이었다. 이자소득(6.0%), 투자소득(2.4%), 자녀의 지원(1.8%)은 답이 많지 않았다.
문제는 국민연금이 퇴직 후 바로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내년부터 국민연금 수급 연령은 5년마다 한 살씩 늦춰지게 된다. 1953~1956년생은 만 61세부터 연금을 받을 수 있고, 1957~1960년생은 62세, 1961~1964년생은 63세, 1965~1968년생은 64세부터 받을 수 있다. 1969년 이후에 출생한 연금 가입자는 만 65세가 되어야 연금을 받게 된다.
1969년 이후 태어난 사람이 55세에 퇴직한다면 연금을 받을 65세가 되기까지 '5565(55~65세)'의 '마의 10년'을 넘겨야 한다. 더구나 100세 시대의 5565시기는 아버지 세대의 5565시기와 다르다. 만혼(晩婚) 추세 때문에 오랫동안 함께 살아야 하는 자녀를 뒷수발하고 80~90대 부모 부양도 해야 한다. 우재룡 삼성생명 은퇴연구소장은 "은퇴 후 40년을 준비하는 가장 첫 단추는 바로 이 마의 10년의 재무 계획을 미리 탄탄히 세우는 것"이라고 말했다.
◇족쇄를 채워라
은퇴 예비자들이 생각하는 은퇴 후 월 적정 생활비는 239만원이다(통계청 '가계금융조사'). 그 절반도 안 되는 100만원이라도 매달 손에 쥐려면 은퇴 전에 매달 어느 정도 저축해야 할까. 55세부터 10년 동안 매달 100만원을 받기 위해선 현재 40세라면 월 73만원, 45세라면 122만원, 50세라면 270만원을 매달 저축해야 한다(물가상승률 3%, 투자수익률 4% 가정). 〈표 참조〉
40세에 시작하면 50세에 시작하는 것보다 월 부담액이 200만원이나 줄어든다. 미리부터 은퇴자금을 적립하면 55세 이후 마의 10년을 버티기가 한결 수월해지는 것이다.
은퇴자금은 어떤 경우에도 손대지 않는 게 좋다. 아예 중도 인출이 어렵거나, 중도 인출 시 불이익이 많은 연금상품에 가입하는 방법도 있다. 퇴직연금·연금저축(펀드)·변액연금보험이 대표적이다.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퇴직연금이다. 다니는 회사에서 직접 금융회사에 돈을 맡기는데다 원칙적으로 중간정산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없는 셈치고' 회사에 다니다 보면 어느새 상당한 노후자금이 쌓이게 된다. 연금저축(펀드) 또한 10년 이상 가입하지 않고 중도 환매할 경우 최종수령액의 22%를 기타소득세로 내야 하기 때문에 도중에 깨기가 쉽지 않아 '족쇄' 역할을 한다. 연 400만원 한도에서 소득공제도 받을 수 있다. 10년 이상 넣어야 비로소 세제 혜택이 주어지는 변액연금보험 또한 강제로 노후 자금을 모으는 방법 중 하나다.
물론 자기 나름대로 주식이나 부동산 투자 등으로 돈을 굴려 목돈을 만든 뒤 은퇴 이후 알뜰하게 빼쓸 수도 있다. 다만 이때도 '은퇴 때까지는 절대 건드려서는 안 되는 돈'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자녀 교육비나 결혼비용 등의 목돈은 별도의 꼬리표를 붙여 관리하는 것이 좋다. 예를 들어 미성년자 자녀 명의로 펀드에 가입하면 심리적으로 손대기가 쉽지 않은 데다, 10년간 총 1500만원 한도 내에서 증여세가 면제된다.
김기홍 대한생명 강남FA센터장은 "월 소득의 일정 부분을 무조건 은퇴자금으로 저축하고, 은퇴 후 제2의 직업까지 준비한다면 마의 10년을 어렵지 않게 넘길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 1일 새해 아침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의 한 아파트. 집 안에서 색소폰 소리가 흘러나왔다. "사랑은 언제나 오래 참고…." 기홍철(69)씨의 연주에 맞춰 큰아들 봉철(42)씨를 비롯한 삼남매와 손자들이 한목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할아버지, 색소폰 짱!" 손자 현빈(11)군이 엄지손가락을 세웠다.
어디로 보나 화목한 가정인데, 1년 전만 해도 기씨는 불안했다고 한다. 1998년 보험감독원(현 금융감독원)에서 은퇴한 뒤 보험 손해사정사로 일하며 받는 수당(150만원)과 국민·개인연금을 포함해 한 달 수입이 225만원이었다. 세금 내고, 아파트 관리비 넣고 경조사(慶弔事)에 생활비까지 하면 한 달에 59만원 적자였다. 수십 년을 더 살아야 할 텐데 불안하기만 했다.
그가 택한 방법은 주택연금(일명 '역모기지론')이었다. 주택을 담보로 맡기는 대신 수십 년 동안 안정적으로 연금을 타는 방법이다. 지난해 1월 그는 자녀 3명을 불러 모았다. "너희들에게 용돈을 안 받겠다. 대신 집을 물려받을 생각은 하지 말아 줬으면 좋겠다." 장남 봉철씨는 "아쉬운 마음이 아주 없지야 않았지만, 자녀들도 흔쾌히 동의했다"고 말했다. 그는 5억3000만원(주택금융공사 감정가)짜리 아파트를 담보로 지난해 2월부터 매달 167만원의 연금을 받고 있다. 주택연금을 받은 뒤 그의 삶은 확 달라졌다. 남는 돈으로 색소폰 레슨을 다시 받기 시작했고, 민요교실에도 등록했다.
①집 담보로 연금 받기(주택연금)
통계청의 '2011년 가계금융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전체 가구 자산의 74%가 부동산에 잠겨 있다. 가구주가 50대인 경우 부동산 자산 비율이 76%, 60대 이상인 경우 83%에 달했다. 이럴 경우 은퇴 후엔 현금 흐름이 급격히 나빠질 가능성이 크다. 은퇴 전문가들은 '부동산 다운사이징(downsizing)'을 해법의 하나로 제시한다.
이미 은퇴했거나, 은퇴가 임박한 세대들은 1980~90년대 '부동산 자산=차익 실현=최고 재테크'를 공식처럼 머리에 새기고 다닌다. 하지만 100세 시대에는 생각을 바꿀 필요가 있다. 강창희 미래에셋 부회장 겸 투자교육연구소장은 "100살에 죽을 때 70살 자녀에게 집을 물려 주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며 "차라리 집을 연금화하고 자식에게 손을 벌리지 않는 게 진짜 상속"이라고 말했다.
②작은 집으로 옮기기
평수 넓은 집을 팔고 작은 집으로 옮기는 것도 방법이다. 항공사 국제선 승무원을 하다 1998년 퇴직하고 웨딩홀 주례와 복지관 영어강사로 일하고 있는 정모(70)씨는 매달 150만원 정도를 벌지만 언제 일이 끊길지 몰라 불안했다. 그는 은행과 지인들에게 불안한 맘을 털어놓았다. 그랬더니 모두들 "집값이 더 오를 텐데 집은 팔지 말라"고 말렸다.
그럼에도 그는 4년 전 광진구 자양동의 158㎡(48평)짜리 아파트를 7억원에 팔아 강동구에 있는 99㎡(30평)짜리 아파트를 3억원에 주고 샀다. 남은 돈 4억원 중 2억원으론 빚을 갚고, 나머지는 펀드에 가입했다. 집을 줄이니 매달 내는 아파트 관리비와 재산세도 절반으로 줄었고, 소득에서 일부분 적금을 부어 1년에 2차례씩 여행을 갈 여유도 생겼다.
2007년 강원도의 고교 교사를 끝으로 은퇴한 박부희(66)씨도 자신의 경기도 분당 아파트(158㎡)를 최근 내놓은 뒤 용인에 있는 한 아파트(109㎡)를 분양받았다. 그는 "흔히들 명절에 자녀와 손자들이 찾아오기 때문에 큰 집에 살아야 한다고 하는데 요즘은 와서 자지도 않더라"면서 "얘들 때문에 집이 커야 한다는 것은 구닥다리 생각"이라고 말했다.
③상가·오피스텔로 갈아타기
집을 팔고 역세권 중심의 상가나 오피스텔 등 '수익형 부동산'에 투자하는 것도 방법이다. 6년 전 신협에서 은퇴한 김모(51)씨는 공인중개사 사무실을 개업했지만, 한 달에 채 200만원을 못 벌었다. 그는 자신의 3억원짜리 아파트를 팔아 서울 강남 역삼동에 20평짜리 상가 건물을 얻었다. 김씨는 "매달 월세가 170만원씩 나온다. 투자만 잘하면 '연금 생활자'가 부럽지 않다"고 말했다.
그러나 은퇴자들이 수익형 부동산으로 갈아탈 때 꼭 염두에 둬야 할 몇 가지가 있다. 리모델링비 등 초기 투자비용을 회수하는 데 시간이 걸리고, 재산세·관리비 등이 만만치 않고, 급하게 팔고 싶을 때 잘 팔리지 않아 애물단지가 될 수 있다는 것. 유영곤 신한은행 PB 팀장은 "무조건 역세권 수익형 부동산으로 선택해야 하고, 세입자들과 법적인 다툼이 날 수도 있으니 공부를 철저히 한 뒤 투자해야 한다"고 말했다.
은퇴 후엔 싸워야 할 게 많다. 질병, 부족한 소득, 남아도는 시간과 싸워야 한다. 그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인플레이션과의 싸움이다.
직장인 박영철(38)씨는 지난 2005년부터 월 20만원씩 개인연금을 넣고 있다. 총 20년간 납입하면 만 55세부터 5년 동안 매월 164만원(현재까지 수익을 기준으로 한 추정치)을 받는 상품이다. 총액으로 하면 9800만원 정도로 납입 원금(4800만원)의 두 배 이상 받는 셈이라 내심 뿌듯했다. 직장을 55세에 그만둔다 해도 국민연금이 나오는 만 65세까지 어느 정도 버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웬걸 그 돈을 미래 가치로 계산해 보니 얘기가 달라진다. 앞으로 매년 4%씩 물가가 상승한다고 가정할 때, 박씨가 55세가 되는 2029년의 164만원은 현재 가치로 따지면 84만원 수준이다. 물가가 5% 상승한다면 월 70만원 정도밖에 안 된다. 박씨는 등골이 서늘해졌다.
◇인플레이션, 은퇴자금의 복병
박씨만의 고민은 아니다. 1982년 이후 30년 동안 우리나라 물가는 230% 올랐다. 같은 돈으로 살 수 있는 구매력은 3분의 1로 떨어졌다. 연평균 4.3% 정도씩 올라 지난해 물가상승률(4.0%)과 비슷한 수준이다. 더 중요한 것은 체감 물가 상승률은 정부가 발표하는 공식 물가 상승률을 늘 웃돈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30년 전 보통 라면 한 개가 100원이었는데, 지금은 700원으로 올랐다. 이 같은 추세로 오르면 30년 뒤 라면 한개가 4900원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우재룡 삼성생명 은퇴연구소장은 "간병비나 요양시설 이용료 등 은퇴자들과 밀접한 개인서비스 요금은 인건비가 반영되는 특성 때문에 일반적인 소비자 물가 상승률보다 더 가파르게 오를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흔히 연금 3종세트(국민연금·퇴직연금·개인연금)를 제대로 활용하면 은퇴자금을 준비하는 데 큰 문제가 없을 거라고 한다. 하지만 물가 상승이라는 복병이 있다. 연금 3종 세트 중 미래의 물가 상승을 반영하는 것은 국민연금밖에 없다. 국민연금 의무가입 대상자가 아닌 사람 중에 최근 국민연금에 '임의가입'하는 사람이 급증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국민연금은 통계청이 발표하는 전년도 소비자물가지수를 반영해 매년 4월 연금 급여액을 조정하도록 법에 못박고 있다. 예를 들어 지난해 국민연금을 월 50만원씩 받았던 사람이라면, 올해 4월부터는 연금액이 52만원으로 오르게 되는 것이다. 지난해 물가가 4% 올랐기 때문이다. 현재 국민연금을 붓고 있는 사람들도 물가가 오르는 만큼 나중에 받는 연금액이 오른다. 직장인 이모(39)씨는 만 65세 때부터 월 110만원(현재 가치)의 국민연금을 받게 될 예정인데, 연 4%씩의 물가상승률을 감안했을 때 65세가 되면 월 293만원이 나온다.
물론 국민연금의 경우도 한 가지 불확실성은 있다. 연금을 내는 사람보다 타는 사람이 너무 많아져 연금 고갈 가능성이 생기면 국민연금이 연금 지급 시기를 더 늦추거나 지급액을 줄일 수도 있다.
◇물가 못 따라잡는 연금상품 수익률
'이자에 이자가 붙는 연복리, 연 최고 400만원까지 소득공제, 만기 유지시 원금 보장….' 한 금융사의 개인연금 홍보문구다. 어디에도 물가 리스크를 막을 수 있다는 얘기는 없다.
연금 3종세트 중 개인연금과 퇴직연금은 기본적으로 인플레이션을 방어하지 못한다. 게다가 요즘은 수익률마저 물가상승률 아래에서 찰랑거린다. 은행권의 대표적인 연금상품인 '연금신탁(채권형)'의 지난해 수익률을 보면 그나마 가장 높았다는 기업은행도 3.3%에 머물러 물가상승률(4%)에 못 미쳤고, 물가를 감안한 수익률은 마이너스였다. A시중은행 관계자는 "지난해 유럽재정 위기 등으로 주가는 하락하고 채권수익률도 낮아 기대했던 수익률을 거두지 못했다"고 말했다.
증권사들이 팔고 있는 연금저축 펀드의 경우 명목 수익률도 마이너스였다. 펀드 평가업체인 에프앤가이드에 따르면 주식형 연금펀드의 지난해 수익률은 평균 -9.7%였다. 수익률이 물가상승률+��여도 아쉬운 판인데 말이다.
◇여유 자금 일부 공격 투자에 할애
물가와 효과적으로 싸우기 위해서는 투자 포트폴리오의 일부를 공격적인 투자에 할애하는 것도 방법이다. 김진영 삼성증권 은퇴설계연구소장은 "은퇴 전 모아놓은 돈 일부를 은퇴 후 5년 안에 주식 등에 투자해 돈을 불리는 방식으로 조금 더 공격적으로 재테크하는 방법도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물론 여유자금이 어느 정도 있는 사람들에게 해당하는 경우다.
흔히 은퇴자들은 자신의 은퇴자금을 리스크가 전혀 없는 예금에 묵혀 놓든지, 반대로 리스크가 주식보다도 훨씬 큰 자영업에 왕창 털어 넣든지 하는 양극화된 투자 패턴을 보인다. 이를테면 '모 아니면 도 식' 재테크인데 이를 벗어나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주문하신 세트 나왔습니다. 운전 조심하시고요, 고맙습니다."
3일 오전 서울 서초구에 있는 한 패스트푸드점. 머리 희끗희끗한 이승화(60)씨가 자동차에 탄 손님에게 햄버거를 건네며 허리 숙여 인사했다. 그는 '실버 알바(아르바이트)생'이다. 시급 5300원. 주 5일간 오전 7시부터 오후 2시까지 일해 한 달에 80만원 정도 번다. 원래 그는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에서 일하던 컴퓨터 프로그래머였다. 우리나라에 컴퓨터 자체가 생소하던 1978년 KIST에 입사해 기업체, 병원, 군(軍)에 컴퓨터 프로그램을 설계해 주는 일을 했다. 1998년 외환위기 때 명예퇴직한 뒤 다른 은퇴자들처럼 여행하며 봉사활동하며 지내다가 지난해 10월부터 이 매장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그는 "캐나다 여행 가서 전직 의사였던 백발노인이 서빙해주는 햄버거를 먹으면서 '이런 일이라면 나도 즐겁게 할 수 있을 텐데'라는 생각이 들어 시작한 일"이라고 했다. 부인 엄희자(56)씨도 같은 매장에서 함께 알바로 일하고 있다.
◇월급 80만원이 국민연금 30년 가치
이씨는 "알바 하며 돈도 벌고, 번 돈으로 친구들 만나니 집에서 눈칫밥 먹지 않아도 되고, 규칙적으로 몸쓰는 일을 해 저절로 운동까지 되니 일석삼조"라고 말했다. 그는 "남들 보기 부끄러워서 일 안 한다는 사람이 제일 창피하고 바보 같다. 나이 먹고 어디든 자기를 써주는 곳이 있다는 점에 감사해야 한다"고 했다.
재고용의 기회가 있다면 월급이 아무리 적어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것이 좋다. 현금흐름이 극적으로 개선되기 때문이다. 사람은 놀다가 한번 일하기로 결정하면 '자산'이 된다. 자신의 의사에 따라 '인적(人的) 자산(human capital)'의 가치는 0이 되기도 하고 높아지기도 한다. 이승화씨가 패스트푸드점에서 받는 월 80만원을 국민연금으로 받으려면 매달 25만원씩을 30년 이상 넣어야 했을 것이다. 25만원은 지난해 국민연금 의무가입자의 평균 납입액 17만원을 웃도니 결코 적은 돈이 아니다.
◇"나이·체면·시선을 버리니"
이종석(68)씨는 '실버 주유원'이다. 경기도 의왕의 현대 오일뱅크 주유소에서 일한다. 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다가 2006년 은퇴했고, 2009년부터 주유기를 손에 잡았다. 그는 "나이, 체면, 남들의 시선 세 가지를 버리니까 돈과 건강, 가정을 모두 얻을 수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통계청의 '2011년 가계금융조사'에 따르면 대한민국 은퇴자의 평균 은퇴 연령은 60.7세인 반면, 아직 은퇴하지 않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자신의 예상 은퇴연령은 65.5세였다. 은퇴 예비군의 바람대로라면 5년 동안 어떤 식으로든 일하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얘기다. 강창희 미래에셋 퇴직연금연구소장은 "정년 후에 일을 하려면 화려하고 권한 있는 일은 젊은 사람들에게 양보하고, 어떻게 보면 허드렛일에 가까운 일도 즐겁게 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현역 때 잘나가던 은퇴자들이 모여 어찌 보면 허드렛일을 하는 사업장을 꾸리기도 한다. 지난해 말 서울 강남구청역 앞에 문을 연 '싱그로브'라는 이름의 실버 카페. 16명의 은퇴자들이 오전 7시부터 오후 10시까지 4개조로 돌아가며 하루 4시간 정도씩 일하고 한 달 50만원 정도를 받는다. 카페 주인 황경연(59)씨는 전직 건설회사 CEO이다. 지난해 8월 말 과천외국어고 교장으로 정년퇴임한 류재희(61)씨는 좁은 주방에서 주먹밥·샌드위치 등을 만드는 조리 담당이다. 류씨는 "주위에서 '격(格) 떨어지게 무슨 그런 걸 하냐'는 말을 많이들 하는데 개의치 않는다"고 말했다.
◇눈을 낮춰 이직하는 것도 방법
조영학(51)씨는 2010년 4월까지 LG그룹 계열사인 LG하우시스의 본부장이었다. 지난해 4월 희망퇴직한 뒤 퇴직금과 저축 3억~4억원을 털어 건축자재 쪽 사업을 하려고 10개월 동안 검토하다 생각을 접었다. 눈높이를 낮춰 중소기업에 취직하기로 한 것이다. 지난해 그는 욕실자재를 만드는 직원 25명의 중소기업 임원이 됐다.
예전 직장에 비해 직원은 100분의 1, 매출은 200분의 1로 줄었다. 하지만 그는 "번듯한 명함만 따져서는 늙어서도 지속가능한 일자리에 남아 있을 수 없다"고 말했다.
"퇴직 첫날, 부인이 차려주는 밥을 세 숟갈 급하게 떠먹은 뒤 평소처럼 바쁘게 지하철을 타고 회사 앞까지 아무 생각없이 갔어요. 회사 앞에 가서야 '아, 일 그만뒀지' 생각이 들더라고요. 다시 집으로 와 보니 집은 텅 비어 있고, TV 보고 책 읽다가 잠들었어요."
금융관련 협회에서 일하다 1년 반 전 정년 퇴직한 최모(57)씨가 회상하는 퇴직 첫날 모습이다.
"둘째날은 토요일이었습니다. 아침에 자동반사적으로 집을 나와 2시간 정도 산책했습니다. 오후에도 다시 나가 집 주변 철길을 내내 걸어다녔어요. 넷째날은 월요일이었는데 그날도 양복 입고 회사 앞까지 갔다 왔어요. 회사 앞에 가서야 '이러면 안 되는데, 난 은퇴했는데'라는 생각이 확실히 들더군요. 집에 와 난초 50개를 꼼꼼히 돌보며 2시간을 보냈습니다. 다음날부턴 아침에 회사에 가지 않았어요. 대신 자식들 학교 가는 것 배웅하고, 케이블TV에서 경제프로그램을 보다가 라면도 끓여 먹고…."
퇴직 후 1년 반이 지났지만 그의 생활 패턴은 여전하다. 책 보고, TV 보고, 인터넷 하고, 난초에 물 주고, 강아지 밥을 주며 보낸다.
평생 회사에 매여 있던 사람이 은퇴를 하게 되면 남는 시간이 주체할 수 없이 많아진다. 강창희 미래에셋 투자교육연구소장은 "은퇴 후 시간은 회사 다닐 때보다 더 느리게 가는 경향이 있다"며 "은퇴 후 시간을 어떻게 보낼지 미리 따져 보지 않으면 은퇴 직후 공황 상태에 빠지기 쉽다"고 말했다.
◇퇴직 후 1주일을 연상해 보라
평생을 24시간이라고 가정해 보자. 남성 평균 수명이 63세이던 30년 전의 경우 55세에 은퇴하고 집으로 돌아온 시간이 시계에 비유하자면 '오후 8시'쯤이었다고 할 수 있다. 씻고 TV 조금 보다가 잠들면 적당한 시간이다. 하지만 평균 수명이 77세로 늘어난 요즘은 '오후 5시'에 은퇴하는 셈이다. 그만큼 시간이 길어졌다. 그때부터 TV 채널만 돌리며 시간을 보내기엔 너무 길고 아깝다.
방하남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은 "앞으로 은퇴하는 사람들은 은퇴 후 시간을 관리하는 방식을 아버지 은퇴 세대와 완전히 다르게 가져가야 한다"고 말했다. 지금의 은퇴 세대에게는 은퇴 후 남는 시간의 절대량이 아버지 세대와 비교해 적어도 3배 늘었기 때문이다.
우재룡 삼성생명 은퇴연구소장은 "은퇴 직후 6개월 동안 시간 관리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나머지 은퇴 기간이 좌우된다"고 말했다. 그는 "은퇴가 준비 없이 닥치면 조바심만 가지고 시간을 보내기 쉽다"며 "많은 은퇴자들이 대책 없이 자영업에 뛰어드는 것도 자신이 남아도는 시간을 컨트롤하지 못하고 있다는 조바심 때문"이라고 말했다.
◇"은퇴후 시간표 3개 만들어 실천"
신정모(70)씨는 은퇴 후 시간을 잘 관리해 쓰는 모범 케이스이다. 그는 2002년 전주 중산초등학교 교장을 끝으로 은퇴했다. 그는 자신의 인생을 세 개의 기간으로 나눠 관리했다고 한다.
1기는 교직에 몸담았던 20세부터 61세까지의 41년이고, 2기는 은퇴 후 70세까지의 8년, 3기는 85세까지의 마지막 기간이다. 그는 자신의 은퇴 후 꿈을 '저소득층 상담'으로 정했다. "내 경험을 살려 가장 잘할 수 있는 게 상담 아닌가 생각했어요."
그가 정한 '인생 2기'는 자신의 꿈인 상담원이 되기 위한 준비 과정이었다. 은퇴 8개월 뒤 퇴직한 다른 교장 몇 명과 힘을 모아 현역 교사들에게 수업을 잘하는 노하우를 컨설팅해 주는 컨설팅센터를 꾸렸다. 그는 해마다 독학으로 상담과 관련된 자격증 10개를 땄다.
그는 일일계획표, 주간계획표, 인생계획표 세 가지 표를 항상 만들어 호주머니에 넣고 다닌다. 그는 "단 1분도 허비해 본 적이 없는 것 같다"고 말했다. 친목회를 꾸려 매월 4차례는 반드시 산행(山行), 매월 1차례 서점 가기, 매일 1시간 30분씩 부인과 걷기, 아침에 시 10편씩 읽기 등 일상 생활도 시간표에 맞춘다.
부인은 "40년 바쁘게 살았는데 늙어서도 이 생활이 질리지 않느냐"는 구박도 한다. 그럴 때마다 그는 부인에게 "쓸모있게 오래 살려면 어쩔 수 없다"며 웃어 준다고 한다.
대기업 차장 홍모(43)씨는 1년 전 아내와 초등학교 4학년 딸을 뉴질랜드에 보냈다. 어렸을 때 영어를 잘 배워놓지 않으면 원어민 영어를 구사하기 힘들다는 생각에 '기러기 아빠'를 자처했다.
월급 500만원 중 300만원은 뉴질랜드로 송금한다. 전(前) 직장에서 받은 퇴직금 1200만원도 딸의 1년 학비에 털어 넣었다.
그의 생활비는 아파트 관리비와 식비 등 모두 합쳐 100만원. 남은 월급 100만원 중 50만원은 보험료로 나간다. 남은 50만원을 개인연금과 펀드에 넣는 것이 노후 준비의 전부다.
그나마 개인연금을 부을 수 있는 건 그에게 대출이 없어서다. 그는 빚내서 집 사는 대신 인천 92㎡(28평) 아파트를 전세 9000만원에 세들어 살고 있다.
◇100세 시대엔 '자식 교육=든든한 노후' 공식 안 통해
그는 앞으로도 1년간 이 생활을 하기로 했다. 그의 총 2년간의 기러기 아빠 생활을 기회비용으로 따지면 얼마나 될까. 총 4800만원이란 계산이 나온다. 2년간 학비로 2400만원이 들어가고, 월 150만원이던 저축이 50만원으로 100만원 줄어든 게 2년치면 2400만원이기 때문이다.
이 4800만원을 노후 연금(年金)으로 환산하면 어느 정도 가치가 있을까. 이 돈을 쪼개 국민연금 한 달 납입최고액(33만7500원)씩 매달 넣는다면 12년을 넣을 수 있고, 그렇게 하면 홍씨가 65세가 된 후 죽을 때까지 월 38만원의 연금을 받을 수 있다. 기러기 생활 2년이 월 38만원 노후 연금과 맞먹는다는 뜻이다. 홍씨는 "애한테 투자하는 게 노후 대비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홍씨처럼 아이에게 투자하는 것이 곧 은퇴 준비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그러나 강창희 미래에셋 퇴직연금연구소장은 "100세 시대에 자녀들이 노후를 보장해 줄 거라고 믿는 것은 어리석은 생각"이라고 말했다.
은퇴 후 많으면 100세까지, 최고 45년 동안을 소득 없이 살 수도 있는데, 그 오랜 기간 동안 자녀들이 늙은 부모를 부양해 주리라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20년 전 결혼해서 첫 아이를 낳는 나이는 평균 26세였다. 앞으로 40년 뒤, 환갑이 되는 큰 자녀가 86세 부모를 부양할 수 있을까. 우재룡 삼성생명 은퇴연구소장은 "어릴 때 국영수 한 과목 과외시켜 주는 부모보다 늙어서 자식에게 손 벌리지 않는 부모가 자식에게 훨씬 더 좋은 부모라는 식으로 인식이 바뀌어야 한다"고 말했다.
◇사교육비 절반 줄이면 월 25만원 연금 받을 수 있다
자녀 사(私)교육에 은퇴 준비를 저당잡히는 것은 홍씨 같은 기러기 아빠만의 문제는 아니다. 이 시대 부모들의 보편적인 문제다.
서울 노원구에 사는 은행원 김모(45)씨가 올해 5학년·2학년에 올라가는 딸 2명에게 한 달에 쏟아붓는 학원비는 월 180만원이다. 큰딸은 영어·수학·피아노·미술·논술·학습지 2개(총 120만원), 작은딸은 영어·미술·태권도·학습지 1개(60만원)를 한다.
두 딸은 사립초등학교 학비로도 1년에 800만원씩 낸다. 1년 교육비로만 3760만원이 드는 셈이다. 연봉 9000만원 중 42%가 들어간다.
그의 노후 준비는 월 70만원씩 개인연금신탁을 드는 것이다. 그는 "지난해 마이너스 통장 빚이 1000만원 늘었다"며 "따지고 보면 교육비에 '몰빵'하고 노후 준비는 빚내서 한 셈"이라고 했다.
통계청에 따르면 우리나라 학생 1인당 평균 사교육비는 월 24만원(2010년 기준)이다. 만약 아이 한 명의 초·중·고 사교육비를 반으로 줄이면 국민연금 최소가입액(8만9100원)을 16년 정도 납입할 수 있고(총 1728만원), 노후에 매달 25만원 정도씩을 손에 쥘 수 있게 된다.
후원 : 삼성생명 은퇴연구소
"사장님, 우리 점주님들은 무조건 월 500씩은 가져갑니다."
지난 2008년 대기업에서 명예퇴직한 강모(51)씨는 2년 전 치킨 프랜차이즈 본사 영업사원의 말에 귀가 솔깃했다. 그는 곧바로 서울 구로구에 치킨점을 열었다. 주변 상권이나 소비 트렌드, 주민 성향도 제대로 파악하지 않았다. 나중에 보니 반경 1㎞ 안에 치킨집이 5곳이나 있었고, 그가 택한 브랜드는 인지도가 현저히 낮았다.
가게는 파리만 날렸다. "월세 내고 프랜차이즈 로열티 떼고, 아르바이트생 월급 빼고 나면 남는 게 거의 없더라고요." 나중에는 아르바이트생도 해고하고 배달을 직접 했지만, 하루 주문이 10마리에도 못 미치는 날도 있었다. 지난해 5월 그는 가게를 정리했고, 투자금의 절반인 4000만원을 날렸다.
나이가 들수록 귀가 엷어지고, 잘 속기 쉽다. 은퇴 후 40년을 잘 보내기 위해선 남의 말을 가려 듣고, 속지 않도록 의도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나이 먹으니 판단력 흐려져…"
"서울중앙지법 판사입니다. 선생님 계좌에 범죄자금이 입금돼 있습니다. 국고(國庫) 환수해야 합니다."
지난해 7월 광주광역시에 사는 김모(68)씨에게 전화를 건 사람은 김씨의 주민등록번호·카드번호·계좌번호와 집 주소까지 모조리 꿰고 있었다. '압류' '기소중지' 같은 법률 용어도 현란하게 섞었다.
김씨가 급히 자신의 계좌를 확인해보니 무려 1250만원 모르는 돈이 입금돼 있었다. 그는 돈을 인출해 전화 발신자가 불러 준 계좌로 서둘러 넣었다. 미리 김씨의 계좌로 신용카드 대출을 받아놓고, 다른 계좌로 돈을 보내라고 요구하는 신종 보이스피싱(전화금융사기) 수법에 당한 것이다.
그는 시중 은행 지점장 출신이다. 10년 전 퇴직한 뒤 여전히 아파트 관리소장으로 일하고 있다. 그는 "내가 생각해도 한심하긴 한데, 나이 먹으면서 판단력이 흐려지고 겁도 많아져 속수무책 당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경찰청에 따르면 2006년부터 지난해 9월까지 발생한 보이스피싱 피해자 중 45%는 50대 이상이었다. 후순위채가 뭔지 제대로 설명도 듣지 못하고 영업정지된 부산저축은행 후순위채를 샀다가 돈을 날리게 된 사람 1118명(작년 8월 말 기준)의 절반 가까운 519명도 60대 이상이었다. 이들은 금감원으로부터 제대로 설명을 못 들었다는 정상이 참작돼 투자액의 일부는 회수하게 됐지만, 상당 부분은 날려야 한다.
한국투자자보호재단이 작년 말 전국 남녀 2576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 금융사기를 당했거나 당할 뻔했다는 응답자 비율은 60대(27.9%)에서 가장 높게 나타났다. 20대(13.2%) 응답률의 2배가 넘는다.
은퇴자를 대상으로 한 판매사기도 은퇴 자금을 갉아먹는 함정이다. 원가 4만∼5만원 상당의 물건을 노인에겐 10배 이상의 가격에 팔아넘긴다. 성분이나 효능이 검증되지 않은 의료기기나 건강기능식품을 주로 취급한다. 경찰 관계자는 "처음에는 점심도 공짜로 주고 노래도 가르쳐 주면서 몇 주 동안 '정'을 쌓은 후 물건을 떠안기니 나이 드신 분들이 당해낼 재간이 없다"며 "금칠한 달마도를 '집안의 액운을 없애 준다'며 한 장에 300만원 넘는 가격으로 팔아넘기는 것이 요새 유행"이라고 말했다.
◇창업 프랜차이즈·기획 부동산 조심해야
본지와 삼성생명이 지난달 은퇴를 앞둔 전국 40~50대 남녀 500명에게 "은퇴 이후 누가 당신을 속일 것 같은가" 물었더니(복수응답) '창업 프랜차이즈나 기획부동산 업체'라는 응답(63.8%)이 가장 많았다. 금융회사(32.8%), 친척이나 지인(22%)이라는 답이 뒤를 이었다. 우재룡 삼성생명 은퇴연구소장은 "부족한 은퇴자금을 조금이라도 늘리고 싶은 조바심이 앞서면 사기에 넘어가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응답자들은 그러나 사기에 걸려들지 않기 위해 정보를 적극적으로 획득하는 데는 소극적이었다. "노후 사업이나 투자에 대한 정보를 어디서 얻는가"라는 질문에 인터넷(36.4%)이나 친구(22.8%)에게서 얻는다는 답이 가장 많았고, 관련기관(13.8%)을 통해서 얻고 있다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임춘식 한남대 교수(사회복지학)는 "나이가 들면 사기 등 피해를 당하기 쉬운 것은 가족과의 유대 관계가 옅어지면서 자문을 구할 곳이 없어진 것이 큰 원인"이라며 "판단력이 떨어지는 노인들이 사회·가족과 연대를 회복하는 것이 무엇보다 절실하다"고 말했다.
후원 : 삼성생명 은퇴연구소
"올해 목표가 뭐니?"
"게임 시간을 줄이는 거요."
"목표를 이루기 위해 뭘 할 거니?"
"밤 11시엔 무조건 잘 생각입니다."
지난 1일 서울 종로구에 있는 이용태(79) 삼보컴퓨터 전(前) 회장의 자택. 이 회장이 새해 인사 온 손자·손녀 5명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할아버지와 손주들이 정한 이날의 이야기 주제는 '인생 목표를 세우자'였다. 가장 어린 손자인 고3 성빈(19)군은 "게임을 줄이고 그 시간에 의미 있는 일을 하겠다"고 했다. 이 전 회장은 자신이 대학교 다닐 때 유학 갈 돈을 마련하기 위해 수학 강사를 했던 이야기를 들려 줬다. 세계에서 가장 준비를 많이 한 수학 강사가 되겠다는 목표를 세운 뒤 각종 참고서를 오려 모으고, 수학과 관련된 이야기를 수집했다는 내용이다.
1980년대 PC(개인컴퓨터) 대중화를 주도한 그는 지난 2005년 은퇴했다. 그러던 어느 날 집에 찾아온 손자에게 말을 걸었는데 대화가 잘 이어지지 않았다. "몇 학년이니?" "고3이요." "수영 잘한다며?" "학교 선수예요." 이야기들은 이렇게 단답형으로 끝났다.
그는 그때부터 손자·손녀들을 한 달에 한 번 모아놓고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했다. 이야기를 통해 한 달에 한 가지씩 좋은 습관을 길러주는 것이 목표였다. 그는 지난 5년간 손주들의 변화가 놀라웠다고 했다. "윈윈 하는 법을 알았고, 솔선수범하기 시작했어요."
그는 "자녀에게 물려줄 가장 중요한 자산은 돈이 아니라 '가치'"라고 말했다. "세상 사는 법을 모르면, 공부도 돈도 간판도 다 소용없어요. 서울대·하버드대 나온 바보들이 얼마나 많은가요?" 잘나가던 회사를 아들에게 맡긴 지 몇 년 만에 부도가 나면서 인생무상을 경험한 것도 그가 '가치를 남기는 일'에 천착하게 된 이유다.
그는 요즘 학부모나 교사들에게 이야기를 통한 인성 교육법에 대해 강의하러 전국을 다닌다. 2005년부터 14만명이 그의 강의를 들었다고 했다. "돈은 먹고살 정도만 있으면 되고, 그 이상은 부담이지 축복은 아닙니다. 인성 교육이야말로 위대한 유산입니다."
은퇴를 준비하고 있는 사람 대부분이 이 전 회장의 생각에 동의하고 있다. 지난달 본지가 삼성생명과 은퇴를 앞둔 전국 40~50대 남녀 500명에게 "자녀에게 남길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가"라고 물었더니 '삶에 대한 가치관'(81.2%), '추억'(5.3%)이라는 대답이 대다수였다. '돈에 대한 철학'(4.9%)이나 '돈'(2.2%)이라는 대답은 많지 않았다.
은퇴 후 20만 시간을 하고 싶은 일을 다 하고 떠나기 위한 첫 단계는 목록을 작성하는 것이다.
이금룡 상명대 교수는 "아직 못해 봤고, 앞으로 꼭 하고 싶고, 지금보다 잘하고 싶은 일을 정리해 보라"고 조언했다.
'고향에서 농사짓겠다', '자서전 쓰겠다', '봉사활동 하겠다' 등 곰곰이 생각하고 가족과도 상의해 목록을 써보자.
다음은 실천이다. 그 일을 어떻게 할 건지 은퇴 전부터 계획을 세우고 준비해야 한다. 자서전을 쓰기로 했다면 매일 조금씩 일기를 쓰고, 해외여행을 가기로 했다면 어느 나라에서 뭘 볼지 공부하고 돈도 모아야 한다.
봉사 활동도 마음만 먹어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구호단체인 기아대책의 두상달 이사장은 "은퇴 후 보람있는 일을 하겠다며 갑자기 찾아와 강의할 자리나 봉사할 자리를 달라고 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며 "아무런 관련 경력이나 지식, 자격도 없이 되겠느냐"고 말했다.
나름대로 열심히 준비했다고 했는데 막상 실행에 옮기면 현실이 기대에 못 미치는 경우가 많다. 그러지 않으려면 경험자들의 얘기를 듣거나 책을 읽고 시행착오를 줄여야 한다.
한 부부는 은퇴 후 그토록 꿈꾸던 지중해 크루즈 여행을 떠났는데, 기분만 상해 돌아왔다. 드레스 코드도 모르고, 의사소통도 안 되고, 춤도 못 추다 보니 비싼 돈 주고 외국인들 틈에서 꿔다놓은 보릿자루 신세가 됐기 때문이다.
은퇴 후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사는 데 꼭 필요한 또 한 가지는 '같이 할 사람'이다. 은퇴를 하고 나면 직장 생활을 할 때 그 많던 인맥과 친구들이 하나둘씩 사라지면서 삶의 행복도가 급격히 떨어진다.
노년 컨설팅기업인 시니어파트너즈 김형래 상무는 "동창회·종교모임·운동모임·취미모임·이웃모임 등 서로 성격이 다른 5개 이상의 모임에 정기적으로 참여하라"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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