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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פקודי 페쿠데이" : 토라포션 알리야(Aliyah) in 5776
출38:21-40:38(To), 왕상7:51-8:21(Haft), 히1:1-14(Brit), 마27:1-28:20(신약)
화요일(셋째날)
출39:22-32(To), 마27:32-44(신약)
* 신약 마27:32-44
오늘 신약성경에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시는 장면들이 나온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나가는데는 법칙, 규범이 있고, 이 세상을 살아나갈 수 있는 진리라는 것을 필요로 한다
Ex ) 음식을 하기 위해서는 열이 필요한 것을 알아야 한다
이 세상은, 이 세상을 살 수 있는 진리들인 필요한데, 내가 혼자 살아남기 위해서 이 진리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이 진리라는 것은 모두가 함께 영원히 살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다 자기가 살아남기 위해서 진리를 필요로 하는데, 그런데 모두가 함께 잘 살기 위한 진리를 사람들은 찾아왔고 그것을 향해서 나아왔다. 만약에 그 진리를 발견하지 못하면, 사람들은 이 우주에서 사그라져 갈 뿐이다.
많은 인류가 이 진리를 발견하기 위해서 엄청나게 노력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꼐서 오셔서 이 진리를 인간으로 하여금 알게 하신다.
인간이 진리를 보지 못하는 이유는, 모든 것을 나를 중심으로해서 인식하기 때문이다. 인생의 목적을 나에 두기 때문이다. 그것은 곧 나를 살리는 길이기 때문에 진리를 볼 수 없다. 오직 나에 관한 진리만을 볼 뿐이다.
인간이 진리를 보게 되는 가장 중요한 방법을 십자가라고 한다. 진리는 결국 이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만이 가르칠 수 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자기를 위한 것 밖에 인식을 못하기 때문에, 진리를 볼 수 없다. 그러면 자기를 위하지 않는 진리를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받아들일 수가 없다. 자기를 위한 것으로만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간이 받아들일 수 있는 오직 하나의 방법이, 하나님이 자기의 죄를 위해서 죽으셨다는 것을 받아들이게 되면 인간에게는 새로운 길이 열린다. 이것이 인간에게 구원을 주는 유일한 방법이다
인간에겐 거절감정이 있다. 인간은 이 세상에 고아처럼 뚝 떨어졌다. 그래서 살아남아야 한다. 부모님의 돌봄을 받긴 했지만, 이 세상에 뚝 떨어진 것이다. 그래서 창조주가 자기를 버린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인간은 나를 창조한 창조주, 이 우주가 날 버렸고, 우주는 나의 공격 대상이다. 그래서 이 우주에서 나를 방어하고 살아남아야 한다.
기본적으로 인간의 깊은 곳에는 창조주와의 분리를 느낀다. 그렇게 때문에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나를 살리기 위해서 애쓴다. 그런데 인간이 만약에 창조주가 날 버린게 아니다. 창조주와 나와는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해서 죽으셨다. 그리고 나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 나를 다시금 영원한 세계와 합하게 하신다. 인간이 이것을 믿으면 이 지긋지긋한 자아로부터, 자기 중심에서, 살려고 발버둥치는데서 나올 수 있다. 진리, 우주 영원한 세계가 보이기 시작한다.
* 토라포션
창38:21 성막 곧 증거막을 위하여 레위 사람이 쓴 재료의 물목은 제사장 아론의 아들 이다말이 모세의 명령대로 계산하였으며
פקודי 페쿠데이 from פקד 파카드 : 방문하다, 계산하다, 물목, 임무
금, 은, 동에 대한 계산서이다. 얼마만큼의 돈이 들었는가? 그런데 주님이 우리의 삶 속에 오시기 위한 것인데, 이것은 사실 주님에 대한 계산서이다. 주님의 형상과 모양을 만드는데 얼만큼 돈이 들었는가?
계산이라는 것은 목적을 이루기 위한 임무를 의미한다. 파카드 자체가 임무라는 뜻이 있다. 군대에서의 작전이다. 이 임무를 이루기 위해서 얼마만큼의 가치를 두었는가? 너에게 있는 가치를 무엇을 위해서 사용했는가? 바로 주님을 위해서 사용했다. 너에게 있는 금, 은, 동을 무엇을 위해 사용했는가? 주님이 오시는 것을 위해서 사용했다. 이것이 페쿠데이에서 가장 핵심적인 것이다.
하나님이 이 땅을 건설하신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이 오셔서 거주하기 위해서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 그리고 하나님의 거주를 위해서 집을 건설하는 임무를 우리에게 주신다. 그러면 이 집을 건설하려면 어떻게 하는가? 하나님은 이 집을 건설하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제공하신다. 그래서 그것을 무엇을 위해 사용했는가? 하나님의 집을 위해 사용했다. 이게 페쿠데이이다. 하나님의 집을 위해서 금, 은, 동을 전부 사용해야 한다. 그것만이 우리가 창조된 목적이다.
하나님의 집을 건설한다는 것은 미쉬칸을 건설하는 것이다.
= 우리의 영과 혼과 육을 성전으로 건설하는 것이다.
내게 있는 모든 가치있는 것을 사용해서 영, 혼, 육을 건설한다. 육으로는 개념을 얻는다고 했다. 우리는 이 땅에 육신으로 살아가면서 계속해서 개념을 얻는다. 다른게 아니다. 우리는 개념없는 사람이 되면 안된다. 그래서 여기를 번제단이라고 한다. 가장 큰 개념은 번제단인데, 번제라는 말은 עלה 올라이다. 옛날부터 인류가 가졌던 가장 큰 개념은 이 세상이 끝이 아니고, 어떡하면 하늘에 올라가느냐이다. 어떡하면 영적 상승을 하느냐이다.
cf ) 사람이 돌아가시면, 입관예배를 하면 염을 하고, 싸서 입관을 한다. 한 입관예배에 갔는데, 형제들이 얼굴이 너무 밝은데, 예수님을 영접하신 후에 너무 천사같은 얼굴로 돌아가신 것이다. 부모가 어두운 지옥에 갔다면 얼마나 힘들겠는가? 실제로 죽는 사람중에 귀신 얼굴을 하고, 죽기 싫어서 죽는 사람이 많은데, 어머니가 천사같은 얼굴로 돌아가셨다는 것은, 좋은 곳에 가셨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자식들도 엄마가 좋은 곳에 갔으니 좋은 것이다.
옛날 사람들이 돌아가셨을 때 슬프고 어려운 것은, 어디 가셨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가져야 할 개념은 바로 이 개념이다. 이 세상에 다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좋은 곳에 가는가? 인류는 이것을 꿈꿔왔다.
또한 우리에게 그곳에 갈 수 있도록 번제가 오신 분이 있다는 것이다. 번제, 자기를 다 태우신, 죽이신 분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구세주라고 한다. 구세주, 즉, 그리스도에 대한 개념이 있는가? 나를 구원할 그리스도에 대한 개념이 있느냐이다.
우리에게 있는 금, 은, 동으로 얻어야 할 가장 큰 가치는 이 개념이다. 이 개념을 얻지 못하면, 주님의 방문을 받을 수 없다. 그러나 이 개념을 받는 즉시, 주님의 방문을 받는다.
우리는 또한 내 안의 혼을 건설해야 한다. 이것은 이해인데, 우리는 이해함으로 삶을 산다. 많은 사람들이 이해의 기능이 망가짐으로, 서로가 이해가 안된다. 그래서 서로를 죽이고 미워하게 된다. 이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떡상과 등대이다. 떡과 빛이다. 빛이 비춰져야 한다.
주님은 내가 생명의 떡이라고 하신다. 떡, 먹는 것이란 것은 내가 어떤 형상을 추구하고 훈련하느냐에 필요한 것이다. 인간은 내가 되려고 하는 삶의 형상이 없이, 그냥 먹기만하면 죽게 되어있다. 그래서 떡, 생명이라는 것은 내가 그리스도의 성품이 되기 위해서 필요한 훈련을 하는 것이다. 일곱 빛은, 단계를 알아 어떻게하면 그리스도의 성품이 되느냐, 이것을 이해하는 것이다. 영은 언약적 삶이다.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사는 것을 배워야 한다. 내 삶을 지배하는 힘이 여기서 나온다
cf ) 저는 삶을 잘 살고 싶었다. 저는 어린아이들에게 삶을 가르쳐주는 것이 꿈이었다. 나처럼 방황하기 않도록 하는 것이 꿈이었는데, 실패한 것은 오히려 내 삶을 다스리고 정복할 수 없다. 하나님이 온 마음을 정복하고 다스리라고 했는데, 내 마음의 음욕, 탐욕이 가득하고 어떻게 할 수 없다. 아이들을 가르칠 수가 없다.
왜냐면, 내 마음을 다스리고 정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영이 있어야 한다. 영은 다 무조건적인 사랑을 하는, 아버지의 사랑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언약적 사랑을 못하고 다 조건적인 사랑이다.
cf ) 여자친구도 나를 얼마나 사랑해주느냐로 판단한다. 어려서부터 무조건적인 사랑을 할 수가 없다. 아버지도 늘 조건적으로 사랑해서, 내가 살아남았어야만 했다. 언약적 삶이 뭔지 모른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리스도에 대한 개념이 생기니까, 이해가 생기고 언약을 배우게 되었다. 나에게 있는 모든 가치를 가지고 언약적 삶을 배우게 되었다. 내게 있는 모든 가치있는 것들을 가지고 내 삶을 성막으로 건축하자, 드디어 페쿠데이, 계산서가 나오게 되었다.
- 이거 하는데 얼마가 들었고, 저거는 얼마가 들었구나. 나는 드디어 주님을 건설하는데 나의 모든 가치를 사용했구나..
그래서 주님이 내 삶에 오시고, 주님이 사시자, 이제는 살맛나는 것이다.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다. 페쿠데이는 바로 이런 계산서를 할 수 있어야지 온다.
갈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페쿠데이는 뭐로 인해 가능한가?
-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여러분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은 주님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 것이다. 나는 하나님에 의해 Accept된 자이다. 그래서 자기 자신을 죽이신 것이다. 번제단에서 나의 모든 죄를 지고 죽으신 것이다. 번제단에서 나의 죄를 대신해서 그분이 불살라진 것이다. 이 개념을 반드시 얻으셔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내가 하늘에 올라갈 수 있는 길을, 자기 자신이 어떤 노력을 하면 가능하다고 했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다. 내가 올라갈 수 있는 길은, 하나님의 아들이 나를 위해서 죽으셨다는 것을 믿는 길 뿐이고, 그분이 나를 엄청 사랑한다는 것 뿐이다
cf ) 제가 가정을 꾸렸는데, 주님은 우리 아내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순간, 이 가정이라는 세상에 정말 희한하게 변하다. 거기서 모든 행동, 나의 삶은 다 딱딱해지고, 굳어지고 지옥으로 변했다. 정말 희한한 일이다. 집이 갑자기 괴물들이 산 곳을 변하지 않고, 변한 것은 아무 것도 없는데, 실제로 모든 것이 변한다
이 우주에서 인간은 하나님과 같이 살게 되어있다. 하나님이 계시니까, 법칙을 만들어놨으니 살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고 생각하지 않으면, 이 우주에서 딱딱해져서 살 수 밖에 없다.
cf ) 아내에게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자기가 나만 사랑하도록 하시니까 너무 감사하다고 했다. 그런 법이 어딨는가? 하나님이 그런 법을 만들어놓으셨으니까, 당신이 나만 사랑할 것 아닌가? 그게 어느날 깨달아지니까 하나님께 너무 감사한 것이다. 하나님이 우주의 그런 법을 안 만들어놨으면, 어떻게 사는가? 이렇게 이쁜 여자가 나한테 붙어있으란 법이 어딨는가? 내가 지킬 수 없다. 하나님이 이런 법을 만들어두셨다
결국 우리는 하나님과 같이 살 수 밖에 없다. 그런데 만약 그 하나님과 내가 아무런 관계가 없고, 떨어져 있다고 생각한다면, 이 우주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우리 아내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순간, 내 온 몸이 딱딱해진다. 그리고선 그냥 나만 살 수 밖에 없다.
하나님이 나를 위해서 죽으셨다고 하는 것, 그분이 나를 그토록 사랑한다는 것, 그분은 정말 우리를 너무 사랑하신다. 그렇게해서 우리는 페쿠데이, 그분의 방문을 받게된다. 그분이 여기 와서 사시게 되고, 그분과 결혼하게 된다, 그분을 받아들이게 된다. 그냥 그분과 같이 사는 것이다. 이 우주에서 그분과 같이 사는 것 만이 영원히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그분이 와서 결혼식하기 일보직전에, 출40장은 결혼식 장면인데, 이 전에 반드시 결혼식엔 웨딩드레스가 있어야 한다. 이것이 출39장이다. 출39장 전체를 할애해서 웨딩드레스를 만든다. 그것이 제사장 의복이다.
웨딩드레스라는 것은 그 신부가 어떤 존재라는 것을 이야기해준다. 우리도 하얀 웨딩드레스를 입는데, 이 신부가 이처럼 하얗고, 순결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하얀색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흰 옷 입은 것이다. 그래서 기본 제사장 복장은 흰 옷을 입은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민족을 백의 민족이라고 했다. 선교사님이 평양 대부흥때 모인 사람들의 사진을 보냈더니 다 하얀색, 흰옷 입은 무리가 있어서 얼마나 놀랐겠는가?
하얀색은 한 몸 되는 것, 하나됨, 모든 것을 다 포용하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다. 제사장 의복의 가장 핵심은 하얀색이다. 그래서 우리는 결혼할 때 웨딩드레스를 하얀색으로 입는 것이다.
이 하얀색 이외에 대제사장 옷, 신부가 더 깊이 들어가면 대제사장 옷을 입는다. 아마 서양에서는 하얀색이지만, 동양에서는 색동 저고리가 있다. 이런 것들이 하나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금실, 청실, 자실, 홍색실이 제사장 의복의 색깔의 가장 핵심이다. 그리고 제사장 의복에는 보석이 있다. 보석이라는 것은 언약적 사랑을 나타낸다. אבן 에벤, 보석이라는 말 자체가 아버지(אב)와 아들(בן)이 하나된 것이다. 그래서 언약적 사랑을 할 때, 결혼 프로포즈를 할 때 보석을 준다. 보석이라는 것은 딱 하나되어서,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되버리는 것이다. 보석이 중요한 것은, 흙이라는 것이 딱 하나되서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되버린 것이다. 보석은 언약적, 무조건적인 사랑을 나타내는 가장 핵심이다.
신부가 이런 삶을 건설하면, 이 집에 살 사람은 제사장과 주님이다. 이 제사장에게 의복을 입힐 때 이 의복은 제사장이 누구냐를 말해주는데, Selflessness, 완전히 이제는 자기 중심적이 아니라, 자기 중심에서 벗어난, 이기적이지 않은 것을 나타내는 것이 제사장 의복이다.
사람이 자아, 자기 중심적인 사고에서 나오게되면, 제사장 의복이 입혀진다. 그래서 이 제사장 의복을 입고 주님을 영접하게 된다.
* 오늘 토라포션 출39:22-32
26 방울과 석류를 서로 간격을 두고 번갈아 그 옷 가장자리로 돌아가며 달았으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하였더라
29 가는 베 실과 청색 자색 홍색 실로 수 놓아 띠를 만들었으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하였더라
31 그 패를 청색 끈으로 관 전면에 달았으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하였더라
32 이스라엘 자손이 이와 같이 성막 곧 회막의 모든 역사를 마치되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다 행하고
회막의 모든 역사를 준공한 것은, 바로 제사장 의복이 마지막이다. 결국 제사장 의복은 우리가 제사장이 되는 것을 말하는데, 자기 자신의 자아에서 완전히 나온 것이다. 자신이 어떠한 삶을 살 것인지를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다
Ex ) 도둑이 경찰관 의복을 입으면 거시기하다
사람은 자기의 어떠함을 표현하고자 할 때 의복에 신경을 쓴다
Ex ) 양반이면 양반의 의복을 입었다. 의관을 정제하였다. 그것이 굉장히 중요하였다.
자신이 어떠한 삶을 살 것인지는, 옷에서 드러난다.
cf ) 저도 옛날에 예수 믿기 전에는 늘 철학관 차릴거냐고 했다. 그러면 옷도 이상하게 그렇게 변한다. 후줄그레하게 입어야 한다. 그런데 주님을 믿고났더니 제 옷이 변화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제사장 의복을 입으시길 축복한다. 그럴 때 주님이 함께하실 것이다.
* 기도
페쿠데이라는 것은 사실 주님의 방문인데, 주님의 방문은 나에게 있는 모든 가치들, 금, 은, 동으로 무엇을 했느냐를 알아야 한다. 나에게 있는 모든 가치들로 내가 성막을 건설했느냐, 내가 그리스도를 아는 개념을 얻기 위해서 그것을 사용하고, 그리스도를 살아내고 이해하기 위해 내 혼을 건설하고, 언약적 사랑을 배우기 위해서 영을 건설하면, 사람은 가치있는 삶이 된다. 그곳에 주님이 방문하신다. 그리고 우리를 하나님 나라로 이끌어간다. 그리고 주님은 우리에게 웨딩드레스를 입히시고, 제사장 복장을 입히시고, 우리와 영원히 같이 사신다.
우리는 주님과의 영원한 삶을 꿈꿔야 한다. 그것만이 우리가 살아가는 길이고, 내 마음의 공허함을 채울 수 있는 길이다. 주님, 내가 모든 것을 가지고 주님의 성막을, 인간의 참된 형상을 건설하게 하시고, 주님과 결혼하게 하소서
페쿠데이 기간에 내가 계산할 수 있게 하소서. 내가 물목을 작성할 수 있게 하소서. 주님과 영원히 함께하는 그 삶으로 나아가게 하소서
주님, 이 페쿠데이 기간에 우리가 계산서를 만들어보기 원합니다. 내 삶에 있었던 많은 것을 가지고, 나는 무엇을 만드는데 사용했는지, 계산서를 만들어보기 원합니다. 내가 주님의 형상과 모양이 되는, 주님의 성품을 닮아가는데, 하나님이 주신 모든 가치들을 사용한 계산서를 만들기 원합니다. 내가 지금까지 그렇지 않았다면, 이후로는 반드시 주님의 영광이 임하는 그런 성막을 건설하는 계산서를 만들게되길 원합니다.
수요일(넷째날)
출39:33-43(To), 왕상7:51-8:21(Haft), 마27:45-50(신약)
20160309.mp3 49.71MB |
* 신약 마27:45-50
계속 신약성경에서 주님의 죽으심, 십자가를 보고 있다. 주님은 이 땅에 오셔서 아버지의 집을 향한 열심히 주님을 삼키웠다고 하셨다. 주님이 사흘만에 일어나신 것은 아버지 집을 다시 건축하겠다고 하시는 주님의 그 열심이 이루어진 것이다. 왜 그분의 다시 살아나신 육체의 부활을 아버지의 집이라고 했는가? 결국 아버지의 집, 아버지가 와서 거하기 원하시는 성막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삶을 의미하고 있다는 것을 주님은 증명하고 계신다
인간의 몸을 집이라고 한다. 이것을 성막으로 건축하는 것이 우리에게 가장 큰 중요한 이유인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것의 그림자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성막의 실제가 이런 건물이 아니라, 우리 몸,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와서 거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오심은 하나님의 갈망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내가 너희들 가운데 와서 살기를 원한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서 일차적으로 우리를 성막으로 건설하신다. 주님이 오셔서 토라를 해석해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자신을 성막으로 건설해 갈 수 있다. 주님이 오셔서 나를 위해서 더 이상 살지 않을 수 있는 길을 여셨기 때문이다
사람이 자기를 위해서 살지 않는 방법은 사실 없다. 아시겠지만, 절대 사람이 사람에게 가서 너를 위해서 살지 말라고 해서 되지 않는다. 딱 하나, 오직 피가 죄를 속죄하게끔 해놓았다. 피만이 인간의 생명을 속죄한다. 그 의미는, 이 생명이 자기를 위해 살지 않는 생명으로 만든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의 유일한 방법은 피라고 하나님이 정해놓으셨다.
그런 법이 왜 있냐고 말하면, 지구의 중력이 왜 있느냐는 질문과 비슷하다. 여기 있다. 그리고 그게 맞다는 것을 우리 삶을 통해서 증거한다. 많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증거하는 것은, 자기를 위해 살지 않는 것이다. 이게 주님을 증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דם 담 : 피, 문(ד)을 열어주는 사역(ם)
- 하나님의 손으로 문을 여는 것은 다윗이 하게 되어있다.
דויד 다비드 : 하나님의 손(ו)으로 못(ו)을 통해 하나님의 문(ד)을 여는 사역을 하는 것
하나님은 다윗의 후손으로 문을 여는 사역을 하시고, 피로 사역하신다. 모든 새 사람에 관한 지식도 דע 데아, 달릿을 보는 것(ע)이다. 예수님이 내가 문이라고 하는 것도 달릿을 보는 것이고, 피가 새 언약을 열었다는 것은, 생명의 문이 열렸다는 것이다. 주님을 증거하는 것도 뭔가를 본 눈이다. עד 에드, 증거, 이 피를 보고 주님을 증거하는 것이다. 피로 생명을 속죄했다는 것은 이 문들을 본 것이다
- 생명의 문이 열렸네, 문들아 머리 들어라
인간이 주님의 모양이 되는데는 444라고 했다. 이것은 דמת 드무트, 모양이란 뜻이다. 형상이 있으면 모양이 완성한다. 우리 주님은 달릿, 하나님의 모양으로 오셨다. דמ 담, 피는 달릿에 관한 진리이다. 그리고 주님의 십자가, 타브(ת)가 그것을 완성한다. 이게 드무트, 하나님의 모양이라는 단어이다.
피로 이것을 하신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를 위해 살지 않는 유일한 길은 다 이 달릿밖에 없다.
알렢, 베트, 김멜, 달릿
1) 알렢의 단계에서 구원을 얻는다
2) 베트의 단계에서는 다 주려고 한다. 왜냐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면, 하나님을 닮아가고 싶어한다. 사랑하면 다 닮아가고, 똑같이 되고 싶어한다.
Ex ) 아이들이 아빠를 사랑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하다. 그래야 아이들은 삶을 살 수 있다. 누군가 닮아가고 싶은 사람이 있어야 삶을 산다. 사실 제자를 삼는 것은 굉장히 심플하다. 엄청난 지식을 줘서가 아니다. 그냥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제자가 된다. 그리고 저 사람을 닮아가고 싶은 것이다. 이게 제자삼는 유일한 길이다.
- 하나님을 사랑하고 싶으면, 하나님의 특징이 다 주는 분이다. 그래서 다 주고싶어한다. 순교하겠다부터 다 주겠다고 한다.
3) 김멜 : 그런데 모든 것을 다 주고 싶은데, 주려면 받아들이는 것이 있어야 한다. 받는게 있고 주는게 있는 단계이다
4) 달릿 : 달릿의 단계에서 모든 것을 완성한다. 주님의 단계이다. 이 단계에서 깨닫는 것은, 100% 받기만 해야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분을 받아들이는 것이 유일한 길임을 깨닫는다. 그분을 받아들이는 것을 통해서, 그분이 내 안에 오시면 나는 주는 존재가 된다. 내가 주는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을 받아들임으로 주는 존재가 된다.
인간이 실패하는 가장 큰 이유는, 내가 주는 존재가 되려고 한다. 인간이 은사를 받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신유의 은사는 내 안의 성령이 하시는 것인데, 인간은 자기 자신이 벌인다고 생각한다. 인간에게 있는 가장 큰 Mistake는, 어떤 선이든지 다 자기 자신에게서 나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Ex ) 인간이 마음이 상하는 이유가 자기가 선을 베풀었을 때 돌아오지 않을 때이다
자기가 무엇을 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인간의 삶에는 고통이 찾아온다. 인간의 삶의 고통과 절망은 자기가 무엇을 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인간의 달릿의 단계에 이르면 최고의 단계에 이른 것인데, 그 때 인간에게 나온 고백은 내가 한 것은 아무 것도 없고, 모든 것은 주님으로부터 왔다는 것이다.
그래서 공로사상이라고 한다. 공로를 누구한테 돌릴 것인가? 인간의 가장 큰 타락은 공로를 자기에게 돌리고 싶은 것이다. 내가 뭘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모든 공로를 주님에게로 돌리는 것이 천국이다. 모든 것은 주님으로부터 왔고, 내가 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다. 그것이 달릿의 단계이다
그래서 인간이 자기를 위해서 살지 않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이 나를 위해서 피를 흘리셨다. 나를 위해서 죽으셨다고 믿는 길 뿐이다. 그래서 인간이 자기를 위한 삶에서 나올 수 있게 된다. 하나님이 자기를 위해서, 나를 위해서 죽으셨다. 그러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다.
이 길이 아니고는, 이것은 우주의 법칙이다. 내가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나를 위해서 죽었을 때 가능한 일이다. 애굽에서는 나 밖에는 사랑을 안한다. 우리는 많은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 같지만, 주님은 그게 사랑이 아니라고 또 증명해주신다. 조금만 찔러보면 또 그럴 수 있냐고 한다. 그래서 계속 주님이 증명해주신다. 사랑이 아니라고 한다. 그런데 나는 이 사람을 사랑한다고 주장한다
Ex ) 예슈아비전교회를 사랑한다? 예슈아비전교회가 서운하게 하면 또 그렇다. 다비드 목사를 사랑한다? 또 서운하게하면 아니다.
주님이 증명해주시는 것은 너는 너만 사랑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나오는 길은 딱 하나, 하나님이 나를 위해서 죽으셨다는 것이다. 이 문이 열려야한다. 오직 이것만이 문이다. 주님만이 길이라는 것은, 이게 우주의 정한 법칙이라는 것이다. 자기를 위해 사는 것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자기를 위해서 전혀 죄가 없는 자가, 전혀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자가 죽은 것이다.
나도 나를 위해서 죽을 수 있다. 인간은 사실 자기 의를 위해서도 죽을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전혀 죄가 없는 하나님이 나를 위해서 죽었다고 할 때 인간은 새로운 문이 열린다. 이게 토라에서 피가 죄를 속한다고 하는 것이다. 완전한 피, 흠없는 피가 죄를 속한다는 것이다. 피가 생명을 바꿔준다. 그래서 인간에게 새로운 문이 열려서 하나님께로 나아온다. 더 이상 자기를 위해 살지 않고, 하나님을 왕으로 모신다. 이 여정은 정말 놀라운 여정이다.
그런데 여기서 사람의 역할과 하나님의 역할이 있다. 우리는 보통 하나님의 역할만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사람의 역할도 있다. 모든 완성은 주님이 하시지만, 반드시 사람의 동역이 있어야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서 자기의 본분을 다 할 때, 하나님은 그것을 완성하신다.
Ex ) 나사로의 무덤에서 돌을 옮기는 것은 사람의 몫이다. 나사로를 살리는 것은 주님의 일이다. 그러나 돌을 옮기는 것은 참 희한하다. 제가 주님 같으면, 돌도 손가락으로 움직일텐데, 돌을 옮기는 것은 사람의 몫이다. 그리고 나사로의 수의를 풀어주는 것도 사람의 몫이다(풀어서 다니게하라), 그것도 휘리릭 자동으로 풀리게 하면 더 멋있었을텐데 말이다. 그런데 나사로를 살리는 것은 주님이시다
생명을 주는 것은 주님의 일이다. 죄로 죽었을 때 생명을 주는 것은 주님의 일이지만, 살아나는데 필요한 장애물들을 제거하는 것은 사람의 일이다.
- 사람이 주님의 생명으로 살기 위해서는, 나쁜 습관, 악한 영적 세력들에게 묶여있는 경우가 있다. 우리가 인카운터에서 왜 그것을 자꾸 제거하려고 하는가? 이것은 사람의 일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주님과 동역하지 않으려고 하면, 절대 하나님의 역사가 있을 수 없다. 히브리서기자가 그렇게 말한다. 너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 너희 마음을 강팍하게 하지 말라. 마음을 강팍하게 하면 하나님의 역사가 없다.
자유의지로 주님의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인간의 역할이다. 달릿으로 가기 위해서는 자유의지가 그것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에 최대한 순종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생명이 내려온다. 하나님의 영의 역사가 있게된다. 그래서 지금 페쿠데이에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명령대로 행했다는 것이다. 그럴 때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 가운데 방문하시는 것이다.
인간의 모든 고통은 인간의 반역적인 성질에서 나온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행복과 건강, 모든 지극한 행복을 주는 것이 하나님의 가장 큰 목적이다. 그런데 인간의 반역적인 성질들은 이것을 떠나가게 하고, 늘 번뇌와 고통이 오게 만든다
* 토라포션 출39:33-43
출39:33 그들이 성막을 모세에게로 가져왔으니 곧 막과 그 모든 기구와 그 갈고리들과 그 널판들과 그 띠들과 그 기둥들과 그 받침들과
- 성막 : 막, 기구, 갈고리, 널판, 띠, 기둥, 받침, 붉은 물 들인 숫양의 가죽 덮개, 해달의 가죽 덮개, 휘장, 증거궤, 채, 속죄소, 상, 기구, 진설병, 등잔대, 잔, 등잔대의 기구, 등유, 제단, 관유, 향, 장막 휘장 문, 놋 제단, 놋 그물, 채, 기구, 물두멍, 받침, 포장, 기둥, 받침, 문의 휘장, 줄,말뚝, 기구, 제사장 옷
cf ) 테루마부터 몇주간 했는데, 지금쯤이면 외워야 한다.
42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이스라엘 자손이 모든 역사를 마치매
כן עשו 켄 아쑤 : Yes / 그들이 행했다
- 이스라엘이 행했다. 이스라엘은 모든 신적인 것을 갈망하는 욕구들이다.
신성을 갈망하는 욕구들이 켄의 단계에 와야한다. 모든 인간들이 고통스러운 삶 속으로 들어가는 이유는, 반역적이고 아주 악한 성질 때문이라고 했다. 이게 반역적이고 악한 성질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에게 저주와 고통을 불러온다. 그런데 반역적이고 악한 성질의 특징은 켄을 안한다. 하나님이 무슨 이야기를 해도 나한테는 안된다고 한다.
반역이라는 것은 하나님에게 니가 날 이해하라는 것이다. 나는 이럴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Ex ) 나는 지금 동성애 할 수 밖에 없는데, 왜 하지 말라고 하는가? 날 이해하라는 것이다. 나는 이성을 사랑하는게 안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왜 나보고 이성을 사랑하라고 하느냐?
- 이게 인간에게 있는 반역적인 성질이다.
그런데 כן 켄 이라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는 Yes만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עשו 아쑤, 그들이 행하는 것이다. 이것이 인간의 역할이다.
인간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것인 켄 아쑤이다. 그런데 이 세상은 반대로 가르친다. 안된다고 한다.
Ex ) 아빠 나는 안되요. 그래서 아빠를 잘라버린다. 하나님 아버지를 잘라버린다. 나는 나로 살 것이라고 한다.
이스라엘 백성이 성막의 모든 것을 만든다. 성막의 모든 것은 무엇으로 만드는가? 테루마로 만든다. 그런데 테루마는 다 나한테서 나온 것이다. 내 성품을 금, 은, 동으로 바꾼 것이다. 내 욕구를 주는 사랑으로 방향을 전환했을 때 나온 것이다. 이것으로 성막의 모든 것들을 만든다.
그러면 이게 하나님의 생명인가 아닌가? 이것은 다 내게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또 하나의 나일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이 하나님의 생명이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페쿠데이, 오셔야 한다. 페쿠데이 하셔서 하나님이 거하실 때 이곳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이 된다. 이게 인간의 구원이다. 내 삶에 하나님이 오셔서,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이 되고, 하나님과 에하드가 되면 내 생명은 하나님의 생명이 된다. 그 생명이 곧 내 생명이 되고, 내 생명이 곧 그 생명이 되는 것이다. 이럴려면 반드시 페쿠데이, 주님이 방문하셔야 한다. 오셔서 주님의 영광으로 나를 채워야 한다.
주님이 오게 하시려면, 내 안의 모든 것으로, 주님의 명령대로 이것을 만들어야 한다. 이게 가장 중요한 포인트이다. 그래서 주님을 오시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인간의 역할이다.
주님이 오시게 하는데 있어서 주님의 명령이 없으면 모든 것은 불가능하다. 주님의 명령대로 모든 것을 다 만들어야 한다. 지성소, 성소, 뜰을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주님의 명령이 중요하다. 사람의 역할은 주님의 명령대로 자기 욕구들을 만들었을 때 주님이 오셔서 다 이루시는 것이다.
* 성소 건설
1) 막과 그 기구들
- 미쉬칸을 대표하는 것이 막이다.
(1) יריע 예리아 : 열폭 앙장 from רע 라아 : 이웃 = 이웃사랑
- 앙장은 성막을 덮고있는 것이다. (청색, 자주색, 홍색실, 가늘게 꼰 베실로 짜서 거기에 그룹을 수놓아서 둘러 싼다)
cf ) 사람이 이 개념을 가지는 것이다. 어떻게 내가 성막이 되느냐? 첫째는 다 개념을 가지는 것이다. 성막을 짓는다는 것은 이 개념을 가지지 않으면 행할 수 없다. 아싸라는 것은 개념을 행하는 것이다. 진리를 선으로 행하려면 반드시 개념이 있어야 한다.
- 열폭 앙장은 너에게 이웃 사랑의 개념이 있냐는 것이다.
(열폭 앙장의) 그룹 : 모든 지옥의 세력으로부터 지키는 역할을 한다. 모든 저주로부터 나를 어떻게 지키냐고 하지만, 이 이웃 사랑만이 모든 지옥의 세력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준다
(2) עזים 이짐 : 염소털
(3) 붉게 물 들인 숫양 가죽
ער 오르 : 가죽 -> רע 라아 : 이웃
איל 아얄 : 숫양, 신성(א)을 하나님의 손(י)으로 훈련(ל)한다.
אדמה 아다마 : 붉게 물들었다(보혈, 피)
이웃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붉게 물 들인 수양, 보혈로 신성을 훈련하는게 없으면 아무 소용없다. 자기가 생각하는 이웃사랑은 또 자기를 사랑하라고 이웃사랑을 이용하는 것이다.
cf ) 교회 와서도 이웃 사랑해야하니까 나를 사랑하라는 것이다. 맨날 자기를 사랑했네, 안했네로 결론난다.
- 그것이 아니라, 붉게 물 들인 숫양 가죽은 그 보혈을 가지고 신성을 훈련하라는 것이다
(4) תחש 탘하쉐 : 해달의 가죽, 십자가(ת)로 형상(ש)의 삶(ח)을 훈련하는 것이다
- 모든 외적인 바람, 돌풍등은 탘하쉬가 다 막아낸다. 가장 외적인 것을 막는 것인데,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삶과 같다.
cf ) מכסה 미크쎄 : 덮개 / תחש 타하쉬 : 네 삶의 목적(ת)가 뭐냐? 형상(ש)이다.
(5) קרס 케레쓰 : 갈고리 (앙장을 연결하는 것)
- 앙장은 금 갈고리, 위로가면 놋 갈고리이다
갈고리는 굽었다는 것이다. 우상이 구부러졌다고 할 때 갈고리라는 말을 쓴다. 우리에게 있는 탐심, 우상숭배이다. 탐욕, 탐심, 자기 사랑을 가지고 갈고리를 만드신다. 탐심을 구부러뜨려서 실제로 이웃사랑을 완성하신다. 그런데 구부러지지 않고 뻣뻣하면, 주님이 구부러뜨리게 역사하셔야 한다.
cf ) LTG할 때 제일로 많이 주님이 역사하시는 것은 구부러뜨리는 것이다. 그런데 여간해선 부러지면 부러졌지, 구부러지지 않겠다고 한다. 그러나 부러지면 그냥 버려진다. 구부러져야 성막의 갈고리가 될 수 있다.
2) 성막의 위한 벽
(1) קרש 케레쉬 : 널판지
- שטים 쉬팀, 조각목을 깍아서 만든다. 나의 쓸모없는 성품들을 깍아서 성막을 세우신다
- 기둥을 세우고 휘장을 치고 안에 있는 것을 만든다
3) 지성소
(1) 언약궤
- 언약궤는 조각목으로 만든다
Practical하게는 제단에서부터 들어가는데, 성막을 지으려면, 개념을 형성할 때는 언약부터 배운다. Practical한 삶은 제단부터 들어가는데, 성막을 지을 때, 개념을 배울 때는 언약부터 배워야 한다. 그래서 언약적 삶은 진짜 못 살아도, 언약으로 살고 싶다, 무조건적인 삶을 살고 싶다고 해야한다. 그래서 내 삶 속에 언약이 없다는 것, 언약적 삶이 없다는 것을 발견해야 한다. 맨날 조건적으로 사랑하다가 실패한 것을 발견해야 한다. 당최 언약이 없고 조건에 의해서 왔다갔다 한다.
언약적 삶을 살면 하나님을 만난다. 하나님은 언약에서만 만난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는 것을 조건적으로 알면 성막을 짓는게 아니다. 그런데 대다수의 크리스천은 하나님도 조건적으로 만난다. 하나님이 어떻게 축복하셨다고 엄청나게 이야기한다. 그런데 조건이 딱 사라지면, 하나님이 그러실 수 있냐는 것이다. 그러면 성막 근처에도 못 오는 것이다. 그것은 토후 바 보후, 창1:2이다. 그러다가 빛이 비추면 언약을 딱 알게된다
(2) 속죄소
- 내가 주는 사랑을 하겠다고 하면 금이 생긴다. 금이 생기면, 이것을 한 덩어리로다가 속죄소를 만든다. 속죄소는 서로 마주보고 있다. 이것이 전형적인 부부의 모습이다. 에하드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한 덩어리로 마주보고 있다. 어떤 모양으로 마주보고 있는지는 실제적으로 아무도 모른다.
저는 믿는 것이, 이것은 부부가 마주보는 것, 부부가 하나된 모습이다. 이쉬 엘 앜히브, 이샤 엘 앜호트, 전형적인 에하드의 모습이다. 부부의 개념을 가진다. 에하드의 개념을 가진다.
그래서 주님은 이 지성소를 침소라고 하는 것이다. 가장 내밀한 곳이다. 내가 거기서 너랑 이야기하겠다고 하신다. 침실에서, 에하드 속에서 이야기하시는 것이다. 이 개념을 배우지 않고는 성막이 건설이 되지 않는다.
cf ) 모든 개념을 언약부터 거꾸로 배웠다가, 실제 삶에서는 거꾸로 올라간다.
4) 성소
(1) 떡상
שׁלחן 슐한 : 형상(שׁ)을 훈련(ל)하는 생명(ח)
- 내가 형상을 훈련하는 생명이라고 할 때, 떡, 양식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다.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을 훈련하려고 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양식이 된다. 이 세상에서 살려고 하면 이 세상이 양식이 되어서, 이 세상을 얻으려고 난리를 핀다. 그런데 영혼이 거듭나려고 하는 사람은 그리스도가 양식이 된다
(2) מנרה 메노라
- 주려고 하는 신성이 금이 되어서 등대를 만든다. 그러면 사람이 어떻게해서 내가 완성되어가는지 단계를 안다. 단계를 모르는 사람들은 계속 힘들어한다.
ֵEx ) 등대, 빛이 없으면, 1학년에서 2학년으로 가는 것을 구원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2학년에 왔는데, 왜 안끝났냐고 버럭 화를 낸다. 한 단계 왔는데 자기가 다 된 줄 안다. 이게 빛이 없을때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빛이 있으면 이 단계를 나그네로 산다. 이 땅을 나그네로 산다. 이 땅에서 인정받으려고 하지 않는다. 그저 나그네로 산다. 그리고나서 주님의 나라에서 모든 것을 받는다. 이게 빛이다
cf ) 성소와 지성소, 뜰은 마싸크, 휘장이 구분짓는다.
(3) קטרת 크토레트 : 분향단, 기도
- 비로소 제단을 만들기 시작한다
제단은 분향단과 번제단 2개가 있다. 분향단은 성소에 있다고 하기도 하고, 지성소에 있다고도 한다. 이게 분향단의 신비이다. 분향단의 기도는 지성소로 간다
Ex ) 계시록 : 성도의 기도가 하나님에게로 올라간다
분향단, 기도는 성소와 지성소, 영과 혼의 세계를 통일하는 것이다.
- 언약궤, 떡상은 나무로, 속죄소 메노라는 금으로 만든다. 언약을 이루는 것이 상이고, 속죄를 이루는 것이 등대이다. 에하드를 이루는 빛이다.
- 그런데 이것을 통일시키는 것이 기도, 분향단이다.
5) 뜰
(1) 번제단(놋제단)
(2) 물두멍
(3) 뜰의 포장 및 기둥 받침, 휘장
- 기구, 성막을 세우는 가름대들이 필요한다. 그리고 뜰을 만든다. 뜰의 포장을 만들고, 말뚝을 세운다.
이것을 계속 배우지만, 우리가 이런 개념들을 배워 나갈 때 주님이 오실 수 있다.
골3:10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
-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에 따른 지식이다. 그리스도의 형상에 따른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았다.
인간은 이런 개념들을 가지면, 이 지식을 배우면, 자기의 형상을 만들게 된다. 이것이 영혼의 건축의 가장 핵심이다. 이 개념을 가질 때 주님이 이 개념, 지식 속에 오신다. 인간의 생명은 몸뚱아리가 아니라, 내가 어떤 지식을 가졌느냐가 그 사람의 생명을 결정한다.
인간이 뭐냐? 이 몸뚱아리가 내 삶을 결정하지 않고, 그 사람이 가진 지식, 삶이 그 사람을 결정한다. 인간이 성막을 기초로 한 개념, 지식을 가지지 않으면 하나님은 절대 오실 수가 없다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에게 이루신 일이 뭐냐? 우리가 영의 토라로 이 개념과 지식을 가질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신 것이다. 우리가 이 지식을 왜 못가지냐면, 자기 중심적인 삶을 살기에, 자기를 나라고 하는 한 인간은 절대 이런 삶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이런 지식을 알 수 조차 없다. 그래서 주님이 죽으시고, 나에서 나오게 하시고, 영의 토라로 인도하셔서 이런 개념을 갖게 하신다. 이런 개념을 가지게 되면 주님이 오시고 성막을 완성하신다.
* 스토리텔링 : 모세에게 가져간 것, 하나님이 명령하신대로 역사를 다 필하였다. 이 개념들을 다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그럴 때 주님이 페쿠데이 하실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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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백성이 모든 성막의 역사를 필해서 모세에게 가져온다. 모세는 우리 안에 하나님의 형상이 되고자 하는 강력한 갈망이며 욕구이다. 내 안의 욕구 중에 하나님의 형상이 되고싶은 욕구가 있다. 이게 모세이다. 누구나 다 그것이 있다.
cf ) 뭐가 되고 싶니? 훌륭한 사람 되고 싶다고 하지, 찌질이 되고 싶다는 사람은 없다. 우리 안에 모세는 다 있다.
그런데 이 모세는 대통령도 아니고, 그냥 훌륭한 사람도, 잘 살고 싶은 욕구도 아니고, 다 하나님의 형상이 되고 싶다는 인류 본래의 인생의 목적을 찾은 욕구이다. 이 모세가 태어나면 출애굽기가 시작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속에 모세가 태어나는 일은 정말 중요한 일이다.
이 모세에게 이스라엘은 무엇을 가져와야 하는가? 이스라엘이라는 것은 우리의 받으려는 욕구가 주려고 하겠다, 주는 것이 신성이란 것을 깨달은 욕구이다. 그래서 목적이 주려고 하는 것으로 바뀌는 것이다.
Ex ) 내가 먹으려는 욕구도 있다. 그런데 내가 음식을 만들어주고 싶다. 누군가를 먹이고 싶다. 유난히 그런 사람들이 많다. 그러면서 목장 할 때 그런 것들은 자기가 먹는 것보다도 더 먹이고 싶은 것이다. 이 욕구들을 바꾼 사람들을 내 안의 이스라엘이라고 한다
그 이스라엘이 다 모세에게 이 성막을 가져와야 한다. 이게 인간의 역할이다. 그러나 이 성막자체가 주님이 아니다. 종교는 이 자체를 우상시한다. 이것은 내가 켄 아쑤해야 하는 것이다. 삶의 중심에는 언약이 있어야 하고, 이것에 켄 해야하는 것이다. 이것은 내가 해야하는 것이다. 형상을 훈련, 이 빛이 있어야 하고, 번제단, 내가 죽어야 하는구나, 이것에 켄 아쑤해야 한다. 반역하지 않겠다가 켄 아쑤이다. 이것을 하게 되면 주님이 페쿠데이, 오신다. 주님이 오셔서 우리와 하나되어버린다.
그래서 이 자체, 성막이 주님의 몸인 것이다. 이 자체가 주님이시다. 그래서 주님과 결합이 일어나게 된다.
우리가 해야할 일이 너무 심하다? 너무 힘들다? 아니다. 뭐가 힘든가? 금방 그리지 않았는가? 이렇게 주님이 쉽게 만들어놨는데, 종교는 이것을 어렵게 만든다. 내가 금이 어딨냐고 하면서 거대한 것으로 만들어논다. 그렇지 않다. 이것은 다 개념이다. 이것이 영의 토라이다. 주님이 오셔서 토라를 해석하러, 완성하러 오셨다. 너희들이 만든 것처럼 종교적인 것이 아니라, 영의 토라이다. 내 멍에는 너무 쉽다. 여기에 동의만 하면 된다. 그러면 주님이 다 도와주신다.
이것을 만드는 것도 주님이 사실상 다 도와주신다. 다 애굽에서 가지고 나오게 하신다. 우리는 그냥 켄 아쑤만 하면 되는데, 그것도 못한다고 반역하는 것이 마지막 때의 인간이다. 우리는 켄 아쑤하자.
* 기도
우리가 켄 아쑤하겠습니다. 다른데 목적을 두지 마시기 바란다. 오직 성막을 건설하는데 목적을 두기 바란다. 모든 상황 가운데서 켄 아쑤하면서, 성막을 만드시기 바란다. 그 상황을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내게 좋은 환경을 만드는게 목적이지 말고, 성막을 만드는 것이 목적이기 바란다. 모든 환경 속에서 언약을 배우고, 형상을 훈련하는 것을 배우고, 주님의 빛이 더 강해지고, 내가 번제가 되는 것을 배우고, 성막 건설이 우리의 유일한 길일 때 주님이 오실 수 있는 것이다. 내가 성막을 완성할수록 주님이 오신다. 주님의 실제가, 주님의 영광이 내 삶 속에 있게된다
주님, 내 유일한 소망이 주님처럼 하나님의 집을 향한 열심이 나를 삼키게 하여 주십시요. 그것이 내 삶의 목적이게 하소서. 이게 뭔지 알게하소서. 헛된데 내 열정을, 에너지를 쏟지 않게 하소서
오직 주님이 오시는 것을 준비하게 하소서. 내가 이 땅에서의 삶이 주님을 영접하고, 주님이 오셔서 그 영광으로 나와 에하드되시는 그 삶으로 나갈 수 있도록, 내가 인간의 도리를 다하게 하시고, 인간이 해야할 그 모든 역할에 켄 아쑤하며 나가게 하소서.
주님, 내가 사랑하는 주님을 위해서, 내가 해야 할 나의 역할을 남겨두셔서 감사합니다. 나의 삶 속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 속에, 내가 성막이 되는 것만이 내 삶의 목적이게 하소서. 내가 성막을 세우기 위하여, 모든 상황과 모든 환경 속에서 오로지 성막을 세울 재료들을 만드는 일에 내 삶을 드리게하여 주십시요. 켄 아쑤하며 나아오게 하십시요. 이 문을 열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 이 문을 통하여 오실 주님을 내가 기다립니다. 주님을 사모합니다. 주님만을 갈구합니다. 주님 사랑합니다.
목요일(다섯째날)
출40:1-16(To), 마27:51-66(신약)
* 신약 마27:51-66
마27:51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 파로케트 : 휘장
영과 혼이 통일되는 것이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이다. 우리 안의 가장 중요한 것은 영과 혼의 통일이다. 영과 혼의 통일은 우리 안에 있는 거절 감정이 치유되면서 일어난다.
기본적으로 왜 우리는 상처를 입는가? 상처가 이미 있기 때문에 상처를 입는다. 우리는 왜 누군가를 미워하고 거절감을 느끼느냐면, 내가 하나님의 생명이면 상처를 입지 않는다. 인간에게 근본적으로 있는 이 상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의 창조주로부터 버림받았다는 상처이다. 이것은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지만, 나의 전 존재가 덩그러니 이 땅에 떨어진 것이다. 그래서 삶 속에서 누군가가 나를 버릴 때 계속 이게 체크가 되고, 계속 이 거절 감정을 어쩌지 못하는 것이다
이 거절감정에 관한 유일한 치유는 창조주만이 해결할 수 있다. 창조주가 나를 버린 것이 아니라 나를 지극히 사랑하사 나를 위해 죽으셨다. 나는 창조주에게 Accept되었다. 거절감정의 증상중의 하나는 누군가에게 계속 Accept되려고 한다. 거절감정에서 나온 핵심적인 것이 두려움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명령의 핵심을 두려움이라고 한다. 일년의 365일이 있는데,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이 매일 내리는 명령이 두려워하지 말라라고 안다. 이스라엘아 두려워하지 말라...!
이 두려움은 사실 귀신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받아들여지지 못할 것에 대한 두려움이다. 내가 거절될 것에 대한 지독한 두려움이다. 그래서 내가 혼자 될 것에 대한 두려움이다. 이 두려움 때문에 인간은 하나님을 거절하게 되어있다. 이 두려움의 근원에는 내 깊은 곳에 하나님이 나를 버렸다, 하나님이 나를 케어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내가 돌봐야 한다. 이게 어마어마한 두려움이다
- 그런데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한다. 내가 너를 버린 것이 아니다.
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유일하게 이것을 해결한다. 창조주가 나를 위해서 죽었다..! 창조주가 나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 돌아가셨다..! 창조주가 이렇게 나를 사랑한다..! 이 실제가 여러분들의 실제가 되시길 축복한다.
그렇게되면 인간은 드디어 영과 혼이 통일이 되어진다. 하나의 미쉬칸이 된다. 영과 혼이 통일되게 하는 것은, 그 전에는 분향단이 통일되게 했었다. 분향단은 특이하게 지성소에도 있고 성소에도 있다고 한다. 분향단의 위치는 아무도 모른다. 지성소의 신비함은 공간과 시간을 초월한다.
지성소의 가로세로는 10규빗인데, 가운데 언약궤가 놓여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사고는 너무나도 토라적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언약궤부터 벽까지 5규빗씩이라고 한다. 그러면 언약궤는 어디에 있는 것인가? 언뜻보면 유대인들은 정말 바보같다. 이런 사고를 어떻게 하는가? 그런데 얘들은 이것을 믿는다. 언약궤는 공간을 초월해서 있는 것이다. 이게 지성소의 기적중의 하나이다.
지성소라고 하는 것, 우리의 영이라고 하는 것은 원래 공간을 초월해서 있다. 원래 언약이라고 하는 것은 마콤, 공간을 초월한다. 만약에 언약적 삶이 무엇인가라고 이야기한다면, 공간을 초월하는 삶이 언약적 삶이다고 하는 것이다.
Ex ) Position, 땅, 명예, 권력, 이런 것은 다 공간을 점유하고자 하는 싸움이다.
모든 인간에게 있어서 내가 나를 돌봐야 한다고 하는 것은 다 공간에 해당하는 것이다. 언약적 삶이라는 것은 이것을 다 떠난다. 이게 정말 어마어마한 것이다. 정말 세상에서 이해 안되는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서 이것을 다 떠난다. 별로 중요하지 않다.
cf ) 어제는 굉장히 놀란 일이 있었는데, 하*이가 쿠웨이트에서 연락을 하더니, 어찌나 펑펑 울던지, 대성통곡을 하더라. 그런데 우는 이유가 아빠를 걱정시켰다고 울더라. 자기가 이스라엘에 있을 때 생각을 해보니까 히브리 학교 다니면서, 스트레스가 심하고 너무 힘들었던 것 같았다고 한다. 그래서 웃지도 않았다고 한다. 하*이는 항상 무표정하고, 웃지도 않고, 아빠 마음을 아프게해서 죄송하다고 대성통곡하면서, 자기를 용서해달라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또 자기가 힘들었을 때 아빠를 원망했던 것이 있었던 것 같다. 아빠도 용서한다고 하고 대성통곡을 한다고 한다. 제 마음에 정말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는 도대체 무엇인가 하면서, 생전 처음 있는 일이니 뭔일이나, 아무래도 성령을 받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잘 봐라. 이스라엘이라는 공간 속에서 내가 어떤 대우를 받고, 어떤 상처를 받았는지, 이런 것들, 나한테 아빠가 어떻게 했는지, 나를 사랑 해줬는지, 안해줬는지, 그런 것들이 다 공간적인 것이다. 그것은 증거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언약적 삶이라는 것은 그것을 초월한다. 그 아빠와 아들의 언약적인 것이 모든 것을 초월해버려서 공간이 사라져버렸다. 아빠가 상쳐줬던 공간, 시간들, 상처 받았던 모든 것들이 이제는 더 이상 존재하지를 않는다. 아빠와 아들이 지성소에서 서로 얼굴을 맞댄 것이다.
이게 언약적 삶이다. 우리에게 언약적 삶, 영이라는 것은 정말 놀라운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를 이 언약적 삶으로 인도하신다. 이 지성소 휘장이 찢어졌다.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것은 영과 혼을 통일해서 언약적 삶, 지성소로 우리를 인도하는 것이다. 이것이 영원한 삶인 것이다.
우리가 정말 이 영의 실제를 알면, 이 땅에 존재하는 공간, 시간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닌데, 그것을 기반으로 우리는 그것을 초월하는 삶으로 나갈 수 있는 것이다.
* 토라포션 출40:1-16
출40
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 너는 첫째 달 초하루에 성막 곧 회막을 세우고
ביום 베욤 : 어떤 날이 온다
- 모세가 살던 그냥 날이 아니라, 영원의 시간이라는 베욤, 이 있다. 그런 시간 속에서 성막을 세우는 시간을 말한다.
החדש 하호데쉬 : The New, 한 달
ראשון 리숀 from ראש 로쉬 : 머리
= 머리가 정말 새롭게되는 날이 있다.
머리가 완전히 새롭게되는 그 날이 있는데, 그 날은 어디에 있는가?
באחד 베에하드 : 에하드 안에 있다
- 에하드 안에서 머리가 완전히 새롭게 된다.
우리 모두에게는 머리가 완전히 새롭게되는 날이 이르른다. 이것은 모든 사고방식이 다 바뀌는 것이다. 그 사람의 머리가 새롭게 되었는지 아니었는지는 어떻게 아는가? 호데쉬, New, 우리는 달달히 새롭게된다. 실제로 하늘에 떠 있는 달이 한달마다 새롭게된다. 한 사이클마다이다. 그래서 이것을 월삭이라고도 한다. 한 달을 단위로 새롭게된다. 우리는 새롭게됨이 최종 목적이어야 한다. 베에하드 하호데쉬이다. 우리는 레크레카에서 출발해서, 계속해서 새롭게되는 것이 중생이다. 이것이 거듭남이다. 새롭게됨을 목적으로 하지 않으면, 사람은 넘어진다. 자기는 계속해서 새롭게됨이 목적이어야 한다. 이것이 머리가 바뀐 것의 특징이다
내가 가진 공간적인 것, Position, 물질을 가지는게 목적이면, 인간은 넘어진다. 그러나 영적인 것이란 것은 모든 상황 속에서 내 형상이 새롭게 됨이 목적이다. 이런 날들이 온다. 그래서 내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새롭게되는 것을 삶의 목적으로 놨을 때 그 사람이 그 날에 들어왔는지 아닌지를 알 수 있다.
그 날에 딱 들어오면, 성막과 회막을 세울수가 있게 된다. 세우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떨어진다
תקים 타킴 : 너는 세워라
from קוּם 쿰 : (동사) 일으킴, 부활
- 동사를 사용하는 것은 그 사람이 그 능력이 있을 때 가능하다.
Ex ) 갓 태어난 아기에게 바로 걸으라고 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세우라고 하시는 것은, 모세가 이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부활의 생명으로 사는 단계에 이르렀음을 가르친다. 부활생명, 쿰은 무엇이냐 쿠프(ק)이다. 너의 소망이 무엇이냐?
사람이 부활 생명으로 사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다. 이전에는 무슨 나에게 엄청난 파워풀한 삶이 임하는 것인 줄 알았는데, 부활 생명은 그 사람의 소망이 무엇인지에 달려있다. 너는 무엇을 원하고, 너의 소망이 무엇이냐?
부활생명과 아닌 것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 부활 생명이 아닌 것은 항상 육신의 생각을 가져와서 나에게 항상 사망이 임한다. 사망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일을 하지 못하는 것을 말한다.
- 부활 생명은 영의 생각을 가져온다. 생명과 평안을 가져온다.
그래서 내 소망이 무엇인가? 많은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새로운 것들을 가지면 그게 소망인 줄 안다. 그 전에는 세상적인 지위를 원하다가, 선교사가 되겠다고 하면 소망이 바뀐 줄 안다. 세상에서 돈을 많이 벌기 원하다가, 교회 일을 열심히 하면 소망이 바뀐 줄 안다. 그 전에는 하나님을 안믿었다가, 잘 믿고 천국가기를 소망하면 소망이 바뀐 줄 아나, 그게 아니다
소망이 바뀌었다는 것은 호데쉬이다. 머리가 새롭게 되는 것인데, 모든 관점이 다 바뀌는 것이다. 자기 중심에서 그리스도 중심으로 바뀌는 것이다. 생각의 모든 패턴이 바뀌는 것이다. 자기가 혼자 살려고 하다가 이제는 한 몸으로 사는 것으로 소망이 바뀌는 것이다
이전에는 공간 안에 있는 것들이 자기의 가장 핵심적인 소망이었다. 공간 안에서 내가 무엇이 되느냐, 이전에는 두려움, 거절감정을 극복하는 것이 최고의 목적이었는데, 소망이 바뀌었다는 것은 공간 안에서의 문제가 아니라, 공간을 초월하는 영의 언약적인 관계로 들어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에게 완전히 Accept되었기에, 삶의 목적이 Accept되는 것이 아니라 에하드 되는 것이 목적이다. 이것이 소망이 바뀌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소망이 바뀌면 전혀 자기의 외적 환경이 변하거나, 누군가가 어떻게 되는게 중요하지 않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정확히 측정할 수 있어야 한다. 내가 창1:2인지, 몇째날인지 측정하지 못하면, 자기가 셋쨰날인 줄 알면 굉장히 큰 혼동에 빠진다. 측정이 정확하게 되지 않으면, 예를들면 한글을 배우지 않았는데 초6교실에 가있으면 계속 힘들어지고 중학교에 진학한다.
Ex ) 한글을 못 떼서 중1에 온 아이가 있었다. 이 아이에게 유일한 방법은 중1을 다니면 안되고, 특별반을 만들어서 따로 한글부터 가르쳐야 한다. 계속 올라가면 굉장히 심각한 문제가 온다.
우리는 왜 토라를 통해서 주님이 이것을 말씀하시냐면, 네가 어디에 있는지를 주님은 계속 측정하게 해주신다. 주님이 겸손을 이야기하시는 이유가, 우리는 겸손하게 측정을 계속 받아야 한다
이 측정을 받을 수 있는 길은 증상을 보고 측정한다. 우리 삶의 모든 일들은 다 증상이 보인다. 이것은 오토, 사인이라고 한다. 우리 삶에 일어나고 있는 기적과 이사들은 다 증상이라고 한다. 그래서 주님이 보이는 사인이 있으면 우리는 이것을 측정할 수 있는 것이다
내가 과연 하나님이 קוּם 쿰이라고 하는 것을 할 수 있는가? 그것은 쿰이라는 것이 일어나보면 알 수 있다. 육신의 생각, 영의 생각으로 인한 증상들이 있느냐를 체크해 볼 수 있다.
부활 생명은 다 성막을 세운다. 나를 세우는가 성막을 세우는가? 쿰, 소망에 있어서의 증상은 다 그것이다. 내가 되느냐, 성막이 되느냐가 내 삶 속의 핵심 이슈이다.
משכן 미쉬칸 : 성막, 언약적, 영에 속한 삶
- 이것은 다 보이지 않는다. 이것은 다 나의 성품을 가지고 건설한다. 사실은 아무 것도 아니다. 성막을 건설한다고 하는 것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하나님이 부자, 가난한 자를 상관하지 않는 이유가, 돈이 얼마 있는가는 아무 필요가 없다. 그런 것들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내가 성막을 세울 마음이 있는가? 그것이 핵심이다
משכן אהל מועד 미쉬칸 오헬 모에드
- 오헬 : 막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에 있어서, 미쉬칸이 형상이라면, 오헬 모에드는 모양과 같다. משכן 미쉬칸이 하나님의 본질적인 형상(ש)을 적용(כ)하는 것이라면, 오헬 모에드는 그것을 있게 하는 모양과 같다.
3 또 증거궤를 들여놓고 또 휘장으로 그 궤를 가리고
cf ) 이번 년도에는 봐야크헬과 페쿠데이랑 보통은 같이 있는데, 이번엔 떨어져 있어서 여유가 좀 있다. 그래서 계속 반복한다. 중요하기 때문이다.
세우는데 있어서 맨 먼저 무엇을 갖다놓는 것이 필요한가? 언약궤, 증거궤이다. 또 장으로 그 궤를 가리운다. 위아래가 찢어졌다는 파로케트, 장, 휘장을 이야기한다.
증거궤를 들여놓으려면, 먼저 성막을 세운다. 성막은 조각목, 널판지로 세운다. 우리 삶에 있는 모든 것들은 쓸모없어 보이지만 성막을 세우는 재료가 된다. 그리고나서 그 가운데 언약궤를 들여놓는다. 증거궤를 들여놓는다.
עדות 에두트 : 증거궤
עד 에드 : 증인, 달릿(ד)을 보는 것(ע)
- 달릿은 문이다. 달릿은 내 인생을 주님이 들어와서 사시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내 안에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다. 내가 주는 사랑이 되려면 그리스도를 얻어야 한다. 인간은 사랑 받으려고 하는 것 덩어리이다. 모든 피조물은 저것 덩어리이다. 받지 않으면 죽고 살 길이 없다.
그런데 인간을 왜 받는 것으로 창조했는가? 그리스도, 주님을 받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주님을 받는 이 증거궤, 그 삶의 가장 깊은 곳에 주님을 받아야겠다는 것이 놓여져야 한다. 주님을 받는 것이 내 삶의 최고의 깊은 것이라고, 그것을 가져다놓아야 한다. 왜 사니? 주님을 받기 위해서, 주님이 내 안에 들어오시게 하기 위해서 살겠다고 한다
- 그래서 정말 주님을 만난 사람은 날아갈 것 같다. 세상이 정말 아름다워보이고, 미워하던 사람도 허허 하면서 사랑합니다고 하는 일이 벌어진다. 그렇게 미워하다가 그냥 끌어안는다. 그렇게되면 주님은 그 증거를 온 세상에 선포하시는 것이다.
모든 삶의 목적이 주님에게 딱 Focus되면, 이게 증거궤이다. 이 날은 정말 중요한 날이다. 내 영을 세우는 날이다. 이 날에 가장 내밀한 곳에, 가장 깊은 곳에 딱 갖다놓는 것이다. 쌈타 샴이다.
여러분의 가장 귀한, 가장 깊은 곳, 좋은 곳에 이 증거궤를 갖다 놓으실 의향이 있는가? 거기에 지금 뭐가 들어가있는지 한번 살펴보시기 바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거절감정이 들어가있다. 상처가 들어가있어서, 이상한 기억들은 다 여기, 가장 깊은 곳에 가져다놓았다. 절대 안까먹는 기억들이다. 여기에는 뭐가 들어있는지 어떻게 체크하냐면, 절대 안까먹는 기억들이다. 그게 여기 들어있는 것이다
Ex ) 예슈아비전교회와서 뭐가 제일 깊은 곳에 들어가있는가? 절대 안까먹는 기억들이 다 뭔가? 누가 날 무시했다? 이런 것들 아닌가? 작년 페쿠데이 기억나는가? 이런건 다 까먹었다. 그런데 작년에 날 무시했던 인간은 절대 안까먹었다. 그런데 그것을 빼내야 한다
저는 그런 이야기를 참 많이 듣는다. 목사님은 왜 이렇게 기억력이 없느냔 것이다. 기억력의 부재라고 한다. 그런데 뭘 기억을 못하느냐? 많은 사람들은 무엇을 기억하냐면, 상처받은 것을 겁나게 잘 기억한다. 그래서 수년전에 상처받은 것을 들고 나에게 찾아온다. 그것을 왜 거기에 집어넣어놓고 있었는가? 이것은 지성소에서 아무도 못 건드린다.
그런데 이 지성소에 오늘 언약궤를 들여놓으시기 축복한다. 주님이 내 안에 오시는 것을 보는 것(에드)만 들여놓는 것이다. 그래서 제가 자주 질문하는 것이 있다. 네가 한 그것을 통해서 주님이 오시냐? 그러면 하라는 것이다. 네가 발작 한번 해서 주님 오시는게 앞당겨지면 하라는 것이다. 모든 기준이 주님이 오시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에, 주님 오시는 것이면 가장 깊은 곳에 들여놓는다. 내 안에 주님이 사시는 것에 해당되면, 나는 기꺼이 받아들인다. 그것이 증거궤이고, 증인의 삶이다. 그게 에덴에서의 삶이다.
- 증거궤를 들여놓으면, 그 사람이 사는 곳은 즉시 에덴동산이 된다. 주님이 함께 거닐면서 함께 말씀하시고, 함께 일하기 시작하신다.
4 또 상을 들여놓고 그 위에 물품을 진설하고 등잔대를 들여놓아 불을 켜고
- 상을 들여놓는다.
cf ) 오늘은 정말 너무 기쁜 날이다. 신혼살림 차릴 때, 이 기쁨이 있지 않는가? 이거 들여놓고, 저거 들여놓고, 우리가 살게 될 삶이다. 지금 주님하고 같이 살게되는 것이다. 주님이 여기 오시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에 우리가 안방에다가 딱 플레이보이?잡지? 들여놓고, 음란한 것, 더러운 것 들여놓으면 이게 될까? 안된다. 그것은 정말 말도 안되는 소리이다. 무엇을 들여놓을 것인지, 주님과 같이 하는 것이다
(1) 떡상
שׁלחן 슐한 : 상
- 테이블에 앉아보자, 테이블에서 상의하고, 내 삶에 존재하는 모든 테이블은 슐한이어야 한다. 형상을 훈련하는 생명에 신실하자..!
cf ) 그런데 제가 정말 미치도록 앉기 싫어하는 테이블이, 맨날 다른 이야기하는 테이블이다. 뭐가 어떻다느니, 맨날 다른 이야기만 한다. 교회의 전력을 80%이상을 삭감시켜서 교회가 허덕대게 하는 것이 테이블이다. 가십, 누가 어떻다, 나에게 어떻게 했다는 이야기이다. 이 테이블이 교회에 가득하다
오늘날의 문제는 이 슐한의 문제이다.좋다는 것이다. 언약궤는 둘째치고라도 다 그리스도 사랑한다는 것이다. 맨날 슐한에 앉는데, 그 형상이 내 형상이다. 제자삼는 테이블에 앉는 적이 없다. 앉아서 어떻게 하면 생명을 줄까, 어떻게하면 제자삼을까가 아니라, 나를 인정했네, 내가 어떤 지위에 올랐네, 목사가 나를 어떻게 했네 등. 맨날 이 테이블에 앉아서, 자기 테이블이 더 많은 사람을 모이게 하려고 한다.
슐한을 얻으시기 축복한다. 어떤 테이블에만 앉아야 하는가? 어떡하면 제자삼을까, 내 생명을 줄까? 이 테이블에 앉으면 된다. 다른 테이블엔 주님이 생명의 떡, 진설병으로 올라오시지 않는다. 주님이 제자삼으라고 하는 것은 그것이다
원수의 테이블에 가서 앉아있지도 말라. 사람이 무서워서 덜컥덜컥 앉아있다. 정말 제자삼는 테이블이 아니다. 생명을 주는 테이블이 아니라, 가서 그 이야기를 다 듣고 앉아있다. 그것은 겸손이 아니다. 벌떡 일어나야 한다. 나는 이제 더 이상 나로 살지 않고, 주님으로 사는 사람이기 때문에, 주님이 계시는 그 집에는 그런 소리가 들리게 하면 안된다고, 벌떡 일어나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대부분 사람들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그런 소리를 듣고 앉아있다. 다른 사람이 어떻다고 하고, 자기가 어떻다고 하는 것을 다 듣고 앉아있다. 벌떡 일어나길 축복한다. 슐한이다
(2) מנרה 메노라
- 사람은 다 빛을 발한다. 이 빛이 사람을 다르게 한다
시뻘겋고 이상한 불빛 가운데 들어가면 마음이 완전 이상해진다. 어떤 빛이 비추냐에 따라서 사람은 완전히 달라진다. 다 이 빛의 문제이다. 그런데 7의 빛이 있어야 한다. 사람이 일곱 단계를 거쳐서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계속 거듭나야 한다. 사람은 계속 영혼의 상태가 바뀌어야한다. 영혼의 상태가 바뀌어서 부활에 이르른다. 영혼의 상태가 안 바뀌면 그것은 큰 문제이다. 영혼의 상태가 안 바뀌어도 예수만 믿으면 천국간다? 나 되었다고 앉아있다.
이것은 가장 큰 문제이다. 그런데 이런 빛은 가장 악한 빛이다. 가장 악한 빛이 비춰지면, 인간을 다 파괴되어진다. 이 빛을 계속 쏘이고 있으면 안된다. 내 삶에 생명을 주는 것은 빛인데, 이 빛은 계속해서 인간의 영혼은 거듭나야 한다. 상태가 자꾸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Ex ) 내 영혼의 상태가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은 문제로 고민하고 있고, 똑같은 일이 반복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당신은 그래도 괜찮다, 우리는 다 천국에 간다고 하면, 그 사람을 망하게 하는 것이다. 헛된 빛, 잘못된 빛을 쪼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상태가 변하지 않았을 때, 부활의 삶, 거듭남의 삶을 살지 못한다고 이야기해줘야 한다. 많은 경우에 상태가 변하지 않았는데도 교회 안에서 Position을 가지고 있으면 그 사람은 망한다. 이 일곱 빛을 우리는 항상 쬐야한다.
그래서 등대를 들여놓고 불을 켠다. 이 불이 여러분들에게 켜지시길 축복한다. 그래서 몇몇 분들은 저에게 와서 묻는다. 제가 몇째날이냐고 묻는 경우가 있다. 이런 경우는 굉장히 착한 경우이다. 이것을 물으러 왔다고 하면, 제가 늘 대답을 안해주는데, 이것을 물으러 왔다고 하면, 날에 속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면 된다.
생각해봐라. 3학년 짜리가 아빠, 나 몇학년이냐고 묻는 경우 봤는가? 자기가 학년에 속해있으면, 몇학년인지 모르는 경우 보았는가? 괜찮다.
우리는 마치 내가 밑에있다고 하면, 이 세상에서 살기 힘들어진다. 이게 제일 큰 두려움이다. 그러나 하나님나라에서는 그렇지 않다. 어린아이라고 할수록 최고이다. Family안에서는 아기가 제일 사랑받는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아기라고 하면 얼마나 좋은지 모른다. 100% 무료공급이다. 왜 안하려고 하는가? 그것을 안하려고, 그냥 나는 아닌 것 처럼한다. 그러면 다 내 생명을 주어야 한다. 실제로 다 주고, 생명을 주고, 십자가에 달리고, 내게 있는 모든 것을 줘야한다. 그것은 안하려고 하고, 나는 6학년이라고 한다. 다 주라고 하면, 나도 사랑 받아야 한다고 한다. 어떻게 하자는 것인가?
cf ) 우리 하*이가 이제부터 내가 다 할거라고 하고, 맨날 초콜릿 사달라고 한다. 뭐하자는 것인가? 진짜 하*이에게 너가 다 하라고 그랬더니, 자기가 1학년이라고 하더라.
자기가 하나님 나라에서 어떤 단계에 있는지를 보는 것은 굉장히 큰 축복이다. 그런데 내가 몇학년인지 모른다면, 창1:2, 토후 다 보후이다. 괜찮다. 토후 바 보후는 엄마의 자궁 안에 있는 것과 비슷하다. 하나님의 영이 감싸시고, 이 때 시작, 잉태, 탄생이 일어난다. 정말 놀라운 것이다. 괜찮다. 그러면 새 날이 시작되는 것이다. 하다쉬가 시작되는 것이다. 새로운 창조가 시작된다.
창1:2을 무시하는 사람들이 있다. 아니다. 창1:2는 모든 새 창조의 시작이다. 잉태되지 않고 태어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가 제일로 기쁠때가 Family에서 잉태했을 때이다.
5 또 금 향단을 증거궤 앞에 두고 성막 문에 휘장을 달고
금 향단은 증거궤 앞에 있다. 증거궤 앞이 성소인지, 지성소인지 성경은 정확하게 이야기하고 있지 않다. 증거궤 앞이면 지성소인가 성소인가? 아무튼 분향단, 기도의 신비함인 것이다. 그리고 분향단은 향품을 필요로 한다.
סם 쌈 : 향품
- 싸멕이 가장 중요하다. 하나님의 측정이 아니면 이것은 정말 불가능한 이야기이다.
영과 혼을 통일하는 것은, 이해와 의지를 통일하는 것이다. 이해한 것을 의지로 살아내고, 그 의지로 사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지 모른다. 100% 주님의 형상이다. 이것을 통일시키려면 싸멕, 측정, 평가가 있어야 한다. 측정과 평가가 잘못되면 다 아작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싸멕의 가장 핵심적인 것이 뭔가? 어떻게 측정하고 평가하는가? 싸메크(ס)를 훈련(ל)하는 삶(ח)을 סלח 쌀랔흐라고 한다. 어떻게 하나님의 측정과 평가를 하는가?
- 쌀랔흐 : 용서
용서를 모르면, 분향단은 건너가는 것이다. 분향단, 기도란 없다. 제가 많은 사람들이 기도를 배우기를 원한다. 그런데, 정말 진정한 기도는 주님이 십자가상에서 하셨다
- 저들을 용서하십시요
용서라는 것을 모르면, 결코, 불가능하다. 이게 분향단이다. 그러면 용서는 무엇이라고 했는가? 누군가를 용서하는 형태로 일어나지만, 실제는 자기 속에서 일어난다. 주님이 왜 다 용서할 수 있는가? 십자가상에서 그 모진 고통을 다 받고, 그냥 살점을 찢어내고, 침뱉고, 주먹으로 치고, 창으로 찌르고, 손에다가 못을 박는데 과연 용서할 수 있을까?
저는 어떤 경우에, 저에게 와서 그런 제자들이 가끔 있다. 목사님, 용서가 안된다고 한다. 저를 용서 못하겠다는 것이다. 제가 상처를 줘서 말이다. 그래서, 그럼 한번 생각을 해본다. 내가 도대체 뭘 했을까? 사실 제가 해봤자 뭘 했겠는가? 침이라도 한번 뱉었겠는가? 물론 저도 잘못하긴 했다. 내가 잘못 안했다는게 아니다. 내가 무슨 완벽한 천사인가? 내가 잘못하고 실수 투성이이고 그렇다. 그런데 정말 우리 주님이 정말 용서한다는 말은 우리랑 차원이 다른 것이다. 그런데 왜 주님은 그 상황 속에서 용서를 꺼내시고, 가르치실까?
주님은 내 생명에 대한 평가다라고 하는 것이다. 이 측정은 다른 사람을 측정하고 평가하는 것이 아니다. 내 생명을 평가하고 측정하는 것이다. 내 생명이 주님에게 받아들여진 생명이다. 주님이 나를 위해 죽으실 정도로, 주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주님이 나를 Accept하신 것이라는 내 존재에 대한 측정과 평가이다. 내 존재에 대한 측정과 평가가 나는 죽지 않는다는 것이다
cf ) 어린 아이가 아빠를 막 때렸다. 그런데 저게 날 죽이려고 한다면서 패대기를 치면 이상한 아빠일 것이다. 왜 아빠들은 그 때 왜 기쁘고, 딸보고 살살 하자고 하면서 같이 장난치는가? 내가 죽지 않는 생명이기 떄문이다. 얘가 나한테 하는게 날 못죽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그들을 용서하라는 소리는, 사실은 나는 죽지 않는 생명이다라는 소리이다. 무슨일을 했던지 상관없다. 그래서 너희들도 나와 같은 존재라는 것이다. 나와 같은 생명으로 나를 만들겠다는 것이다. 하나님, 저들을 용서하십시요라는 것의 진정한 의미는, 나랑 같은 생명으로 만들 것이라는 것이다.
우리 삶에 모진 고통과 상처가 찾아와도 괜찮다. 그 생명으로 그 사람이 나오기 위해서는, 마치 자기 속에 박힌 가시들을 일단 다 빼내야 한다. 빼내려면, 그러면 그것을 맞아주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누군가가 나를 미워해도 괜찮다. 맞아도 괜찮다. 누군가가 살아나기 위한 하나님의 역사이다. 그렇게해서 측정하고, 용서하시기 바란다. 이게 분향단의 가장 위대함이다
마지막 계시록에서 일곱 나팔이 울려지기 전에 분향단의 기도가 올라간다. 온 땅에서 자기의 생명은 상처받지 않는 생명이라고 하고, 자기에게 상처줬던 모든 사람을 용서했던 향기가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다. 이게 주님의 모든 역사를 완성한다.
이 위대한 향단을 언약궤 앞에 놓으시길 축복한다. 그러면 밖으로 나올 수 있다. 용서를 배우지 않고는 밖으로 못나온다. 용서를 배워야만 번제단으로 나올 수 있다.
* 스토리텔링 : 순서, 여러분의 영혼의 구조이기 때문에 헷갈리면 안된다. 영혼의 구조들을 잘 인식하고 보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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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 하나님의 나라는 언제 생기는가? 언약궤가 그 장소에 놓여질 때 우주가 생겨난다. 우리는 우주, 하나님의 세상이 언제 생겼는지 알 길이 없다. 그런데 언약궤가 그 장소에 놓여질 때 우주가 생긴다. 사람이 내가 세상을 사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고 허상 속에서 계속 산다. 우리가 인카운터를 하다보면 정말 그것을 알 수 있다. 내가 만든 거절감정의 상처에서 나온 허상의 세계를 만들고, 거기서 계속 허우적대고 있다. 누구를 만나던 그것으로 해석하고, 그런 인간이라고 사는데, 그것이 세상인 줄 안다
그런데 언약궤가 우리의 영 안에 딱 놓여지면 하나님의 세상이 생긴다. 그것을 첫 달, 초일일이라고 한다. 그제서야 비로소 New World가 시작된다. 정말 놀라운 일이다. 이것이 새 창조이다
우리는 모두, 주님이 언약이 무엇인지, 그분이 오셔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피를 흘리심으로, 새 언약을 이루셔야지 우리는 언약궤를 들여놓을 수 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나, 모세가 언약궤를 만들고 들여놔야한다. 이것은 인간의 언약이다. 언약을 이루시기 위해서, 새 언약을 맺으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달리시고 피를 흘리신 것은 주님의 역할이다. 그러나, 그것을 내 삶에 받아들이는 것은 내 역할이다. 언약궤를 만들고, 언약궤를 지성소에 두는 것이다
언약궤를 왠 사과궤짝이냐고 뜰에다가 버려놓는 것이 아니라, 지성소, 가장 깊은 곳에는 나에게 상처준 인간을 넣어 놓아야지 왜 십자가에 달린 그분의 피는 상관없다고 한다. 그게 아니라, 이 언약궤를 사람의 가장 깊은 곳에 들여놓는 것은 사람의 역할이다. 페쿠데이 기간에 꼭 들여놓아서, 주님의 영광이 여러분을 가득 채우시길 축복한다. 주님이 페쿠데이 하시길 축복한다
* 기도
여러분들에게 오늘 정월 초일일, 완전히 머리가 새롭게되는 첫 날이 되기를 축복한다. New World가 펼쳐지길 축복한다. 한번도 본 적이 없는 하나님 나라는, 언약궤가 내 안에 갖다 놓여질 것이다. 영 안에 있는 다른 더러운 것들은 다 치우고 갖다 버리라. 그리고 영 안에 이 언약궤만이 놓여지길 축복한다. 완전히 새로운 세상이 펼쳐지고, 주님의 영광이 덮을 것이다.
우리의 가장 깊은 곳에 주님의 이 언약궤를 가져다 놓습니다. 내 영이 이제 주님의 언약궤에만 반응합니다. 주님의 언약에만 반응합니다. 내 영이 이제 주님과 하나되는 것, 주님과 에하드 되는 것에만 반응합니다. 이제 내 영을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오직 주님 뿐입니다. 이제 나는 주님과 얼굴을 맞대며, 한 덩어리에서 나온 그룹처럼, 이미 하나인 존재임을 받아들입니다. 나의 모든 거절감을 주님 가져가 주시옵소서.
주님, 이쉬 엘 앜히브, 주님과 내가 이미 한 덩어리였음을, 케뎀에서부터 하나, 에하드 였음을 내 영이 깊이 받아들입니다. 하나님, 이게 그룹이고, 이게 모든 지옥의 저주를 막는, 지옥을 물러가게 하는, 새로운 세상을 오게하는 가장 핵심임을 내 영이 받아들입니다. 주님과 에하드, 주님만이 나의 신랑, 주님만이 나의 모든 것, 이것을 내 영이 받아들입니다.
주님 이제 내 영을 거룩하게 하고, 정결케 합니다. 주님 내 영 안에 언약궤를 들여놓습니다. 내 깊은 곳에 그 동안 헛된 것을 들여놓게 했던 모든 악한 사단의 궤계가 파해졌음을 선포합니다. 십자가의 능력으로 모든 것이 파해지고, 주님의 피가 지성소에 뿌려졌습니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금요일(여섯째날)
출40:17-27(To), 히1:1-14(Brit), 마28:1-15(신약)
20160311.mp3 51.90MB |
* 신약 마28:1-15
13 이르되 너희는 말하기를 그의 제자들이 밤에 와서 우리가 잘 때에 그를 도둑질하여 갔다 하라
15 군인들이 돈을 받고 가르친 대로 하였으니 이 말이 오늘날까지 유대인 가운데 두루 퍼지니라
복음이 아니라 이 말이 두루 퍼졌다고 한다. 이런 된 일을 가서 전했는데, 돈을 많이 주면서 도적질하여 갔다고 하라고 이야기하니까, 그 말들이 유대인 가운데 두루 퍼진다.
그래서 실제적으로 우리가 살아가면서 어려움을 겪는 것은, 복음은 두루 안퍼지고 돈에서 나오는 거짓이 두루 퍼진다. 이 금송아지에서 나오는 거짓이 두루 퍼진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나오는 것은 금송아지가 처리되지 않으면 거의 불가능하다. 복음이 내 온 몸 가운데 퍼지는 것은 금송아지가 처리되었을 때만이 가능하다.
내가 예수를 믿는 것 같지만, 내 목적은 사실 예수 믿는게 아니라, 나를 끌고가는 금송아지가 목적이다. 나를 어떻게하는게 주된 목적이다. 내가 교회 다니는게 예수님 때문인 것 같지만, 나 때문에 다니는 것이다. 여기서나오는 많은 거짓들은 어찌나 빨리 퍼지는지, 나 때문에 문제가 생긴다고 하면 온 몸에 거짓이 퍼진다. 그래서 자기 자신에게만이 아니라, 두루 온 세상에 거짓을 퍼뜨린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살게끔 만든다.
* 토라포션 출40:17-27
- 뭔가가 계속 반복되는 것 같아 보인다. 세우고, 모세가 가져오고 등이다.
1 그들은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청색 자색 홍색 실로 성소에서 섬길 때 입을 정교한 옷을 만들고 또 아론을 위해 거룩한 옷을 만들었더라
- 짜바 : 명령
테짜베에서 보았지만, 우리의 삶의 체계는 명령에 따라서 몸이 움직여진다. 그래서 몸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명령이 중요하다. 성막을 만든다는 것은 다 עשה 아싸라고 하는 행함의 문제이다. 주님이 오셔서 심판하시는 것은 행한대로 갚아주겠다고 하신다.
그런데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행함 자체가 절대적인 줄 안다. 그래서 어떤 행함은 좋고, 어떤 행함은 악이라고 생각한다.
- 행함을 놓고 판단하려고 한다. 너는 왜 이렇게 행하냐? 나는 왜 이렇게 행햐냐? 네가 잘못했다, 내가 잘못했다, 이것을 가지고 계속 판단한다.
그런데 주님은 행함을 문제 삼는 것 같은데, 행함을 문제삼지를 않는다. 행함을 심판하신다. 행함을 심판하면, 행함 자체에 선악이 있는 것 같은데, 그런게 아니라, 행함을 심판하는 기준은 어떤 명령에 의해서 행하냐는 것이다. 이것이 비밀이다. 네가 뭔가를 했는데, 그것은 누구 명령에 의해서 한거냐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까지 계속 배우는 것이, 명령에는 2가지 종류의 명령이 있다 ( 나의 명령 / 여호와의 명령 )
우리가 인생에서 공허함을 느끼는 이유가 뭔가? 인생을 돌아봤는데, 누구나 행함은 있으나 이 행함의 명령이 누구에서 왔는가? 나한테서 왔는가? 아니면 주님으로 부터 왔는가? 이게 문제이다. 그래서 계속해서 나오는 소리가 여호와의 명령대로 이스라엘 백성이 다 만들었다. 여호와의 명령대로 다 행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성막의 핵심이다.
-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다 행하고, 다 만들었다.
여러분들이 LTG를 통해서 계속 훈련하는게 뭔가? LTG를 통해서 내가 내 삶을 겁나게 좋게 만드는데 도움을 얻는게 LTG인 줄 안다. 내가 막 하나님 앞에서 행하고, 하나님이 보기 좋고, 먹음직한 그런 삶을 만들려고 내가 막 하다가, 잘 안되면, 그런 도움을 얻으려고 예슈아비전교회 오고, 다비드한테 배우니까, 이거다라고 해서 자기가 또 그 방법으로 행하려고 한다. 이거 LTG가 아니다. 내가 행할 수 있는 것을 가르쳐주는 것이 LTG가 아니다
LTG는 내가 명령하는 시스템 자체를 부인하는 것이다. 삶이 있으면, LTG리더의 명령이 정말 희한하게 내려온다. 명령 시스템이 완전히 달라지는 것이다.
첫째날에는 빛이 비춰져서 에하드, 구속의 삶을 배우는 것은 정말 중요하다. 창1:2에 땅, 우리의 마음이 혼돈과 공허하다. 이 시스템은, 내가 삶의 명령권자이다. 자기 위에는 명령권자가 없다. 그래서 주로 이 삶이 좋아하는 것은, 그리스도에게 Direct로 받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제자만 된다. 말은 좋은 것 같지만, 이것은 어떤 명령 시스템도 없다.
사람이 여기서 느끼게 되는 큰 혼돈과 공허는 어둠이 다 덮히는데, 이 어둠은 내가 무엇을 해야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을 사실 모른다. 아싸에 대해서 어둠이 온다. 우리는 이것을 잘 알아야 한다.
- 그래서 인생에 있어서 어떤 것은 되고, 어떤 것은 안된다. 어떤 것은 할 수 있고, 어떤 것은 할 수 없다고 한다. 명령권자가 나이기 때문이다. 내가 할 수 있고, 없는 것을 늘 내가 결정한다.
cf ) 제자들을 훈련시킬 때 측정할 때, 쓰는 방법중의 하나가, 이거 해보라고 한다. 그러면 늘 그 입에서 나오는 말이, 저는 못한다고 한다. 그러면서 저를 가르친다. 항상 명령권자가 나이기 때문에, 내 삶에서 되는게 있고, 안되는게 있다. 이것은 하나님도 못 고친다. 하나님이 뭐 하라고 해도 안된다고 한다.
자기가 할 수 있는 것만 한다는 것은 신앙이 좋아보이나, 사실은 아무도 명령권자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토라의 인간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가장 큰 뜻은 명령을 하신다. 명령을 하면 다 된다. 우리는 뭘 할 수 있고 할 수 없는 삶으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그런 존재가 된다. 그래서 테짜베라는 것은 다 그것을 이야기한다
출39:32 이스라엘 자손이 이와 같이 성막 곧 회막의 모든 역사를 마치되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다 행하고
כן עשו 켄 아쑤 : 이스라엘 자손이 다 행한 것이다
우리가 애굽에서 출발 지점에서의 이스라엘 백성의 상황을 기억해보자. 출애굽기 시작점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노예였다. 노예는 뭘 안 행하는 것이 아니라, 하루 종일 행하고, 아싸한다. 그런데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내가 못한다는 것이다. 노예생활을 한다.
그런데 출애굽기 마지막에 와서도 하루 종일 또 성막 만드는 일 하고 있다. 그런데 표현은 완전히 다르다. 어차피 하루 종일 일하는 것은 똑같다. 그런데 출애굽기 마지막에 와서는 여호와께서 명하신대로 다 행하였다고 한다.
우리 안에 있었던 이스라엘 자손, 신성은 뭔가를 하려고 하는데, 하려고 할수록 노예 상태이다. 그래서 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러나, 켄 아쑤, 여호와의 명령대로 다 행하였다는 것이 페쿠데이에 와서 이루어진다. 이게 왜 계속 반복되는가?
42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이스라엘 자손이 모든 역사를 마치매
- 모세에게 다 가져와야 하고, 모든 역사를 필하였다. 켄 아쑤는 칼라가 된다.
כלה 칼라 : 필하였다, 신부, 완성
우리 삶의 중요한 형태이다. 우리의 행함은 반드시 칼라, 완성, 신부를 가져와야 한다. 이것이 명령에 있어서의 핵심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행함, 삶이라는 것은 완성을 가져오는 것이지, 행함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행함이 완성을 가져오는 것은 둘중 하나이다
- 자기 자신
- 그리스도의 신부
이것 때문에 행함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명령이 나로부터 나오면, 행함이 나를 위한 것이고, 나, 바로를 완성한다.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의 상태이다. 그래서 주님은 계속해서 명령권자가 나인 것을 처리하려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데리고 나온다.
이스라엘 백성이 처음으로 이것을 처리한 것이 뭔가? 출16장에 와서 홍해 데리고 나와서 있었던 사건이, 만나 사건이다. 만나 사건은 하나님의 명령대로 행하는지를 테스트하는 것이다. 테스트했더니, 결과가 하나님의 명령대로 안한다. 그래서 계속해서 하나님의 명령대로 행하지 않는, 그 명령 시스템을 하나님은 기어이 드러내신다. 금송아지에 올 때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은 나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행하고, 문제가 없고, 좋은 크리스천이고, 나는 쎄굴라라고 한다. 그래도 하나님은 계속 끌고오신다. 금송아지를 드러낼 때 까지다. 결국 너희들은 자신을 위해서 나를 이용했을 뿐이라고 하면서, 그것을 드러낸다
그 칼날의 맛을 보셨는가? 반드시 맛보셔야 한다. 그것을 드러내야 한다. 그리고 레위 지파가 그것을 칼로 죽여야 한다. 죽지 않겠다고 레위지파랑 총격전이 벌어진다. 그러나 항상 레위 지파가 이긴다.
내 안에 레위 지파가 일어나는 때가 있다. 그 때 레위 지파가 일어나야 한다. 이게 하나님의 큰 복이다. 반드시 레위 지파가 일어나서 죽여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제사장의 삶으로 나오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그것을 다 하신다. 그분이 명령권자이다. 우리는 켄 아쑤이다. 그 전까지 우리의 삶은, 내가 이것은 할 수 있고, 저것은 할 수 없다고 한다. 인류의 비극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뭘 이야기해도 난 할 수 없고, 이것만큼은 나는 고칠 수 없고, 나는 이렇다고 한다. 이게 인류의 비극이다. 맨날 나는 할 수 있어, 없어,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것 붙들고, 이거 없어지면 죽는 줄 안다. 여기서 이것좀 축복해달라고, 이것의 노예가 되어있다.
- 하나님이 너 이런 것좀 고치라고 해도, 못한다고 한다. 이게 인류의 비극, 아싸의 비극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출애굽기의 마지막에 오면 명령권자를 완전히 바꿔버린다. 그래서 하나님의 명령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것은, 명령의 시스템을 주라는 것이다. 이 명령이라는 것 끝나지 않고 출40장오면 또 성막을 세운다.
출40:16 모세가 그같이 행하되 곧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령하신 대로 다 행하였더라
그리고 또 모세가 행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 전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행했다. 이스라엘 자손의 명령권자가 먼저 세워지는게 중요하다. 이스라엘 자손이 하나님의 명령대로 행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 다음에는 모세가 여호와의 명령대로 행한다. 이스라엘 자손의 역할과 모세의 역할이 있다. 모세만으로도 안된다. 이스라엘 자손이 먼저 주님의 명령권 안으로 들어와야 한다.
그 이스라엘 자손을 명령권안으로 들어오게 하는데 시간이 이렇게 오래 걸린 것이다. 여호와꼐서 모세에게 그러신다. 그냥 너랑 하자, 얘들은 진짜 안되겠다고, 다 죽여버리자란 말이다. 그런 의미는 죽여버리겠다는 의미보다, 그냥 둬도 죽는다. 자기에게 명령해봤자, 그 머리에서 뭐가 나오겠는가? 다 죽음의 길을 간다. 영원한 명령을 내릴 수 있을 줄 아는가? 하나도 못 내린다. 영원한 것을 이루는 명령은 단 하나도 못 내리고, 맨날 죽을 것에 대한 명령만 내린다. 다 죽는다. 그래서 얘들을 죽게 두자고 한다. 명령권자를 바꾸려고 하지 않는다. 맨날 금송아지만 섬긴다고 한다.
그런데 모세가 안된다고 한다. 모세가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이스라엘 자손이 금송아지 사건 이후에 명령권으로 들어오고, 모세도 명령대로 행한다. 이스라엘 자손을 데리고 다니는게 모세의 행함인 것 같지만, 그렇지 않고,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이 가져온 성막을 최종적으로 조립하고 완성하는 역할을 한다.
우리의 신성 하나는 완성을 도저히 못한다. 이스라엘 백성은 신성 하나 하나를 만든다. 우리 자신은 하나 하나의 신성을 만든다. 그게 중요한 것이다.
지성소 안에 언약궤가 몇개 있는가? 하나 있다.
- 하나 : 에하드
그러면 에하드는 몇개인가? 지성소는 공간을 초월한다고 했다. 셀 수가 없다.
( 에하드 ) <--- ( 에하드 ) : 너희들은 하나가 되라고 한다
그런데 에하드를 하나로 번역하지 않는다. 신6:4의 번역, 아도나이는 한 분이시다라는 것은 최악의 번역이다. 아도나이는 Unity라는 것이다. 하나인 것 같지만 60만개이다.
출40:3 또 증거궤를 들여놓고 또 휘장으로 그 궤를 가리고
- 오늘 토라포션에게 모세에게 주님이 언약궤를 들여놓으라고 한다.
모세가 실제적으로 이 역사를 완전히 필할 때, 오늘 토라포션에서 또 성막을 세운다. 그런데 이게 다르다. 모세가 행하는 것이다.
20 그는 또 증거판을 궤 속에 넣고 채를 궤에 꿰고 속죄소를 궤 위에 두고
- 채를 궤에 꿰고..! 가 들어간다. 그 전에는 나오지 않는다
모세만이 할 수 있는 것이 채를 꿰는 것이다.
בד 바드 : 채, 개별
Ex ) לבד 레바드
언뜻 보면 하나님께서 에하드만 중요시 여기는 것 같은데, 에하드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개별이 중요하다. 이게 헷갈리는 것이다. 하나님은 넌 죽으라고 하고,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가 사시면, 나는 완전히 없어져야 할 것 같은데, 하나님은 왜 나를 개별로 존재하게 하시는가? 개별이 없으면 에하드도 없다. 없어져야될 개별은 암세포, 나 혼자가 개별이다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세포가 없으면 몸이 없다. 하나 하나가 정말 중요하다. 전체 몸의 개념을 가지고 있는 개별은 너무 중요하다
이스라엘 백성이 행한다고 하는 것은, 각 사람의 개별의 삶 속에서 자기에게 있는 Destiny가 있고, 자기가 완성해야 하는 삶이 있다. 모세가 다 못 만든다.
- 어떤 사람은 널판지, 싯딤나무, 성막 배울 때 어떤 사람은 슈트..! 에 대해서 느낌이 팍 오는 사람이 있다. 그게 이해가 된다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널판지 만드는 사람이다.
- 어떤 사람은 떡상, 그것에 느낌이 팍 온다고 한다. 정말 떡을 올려놓는 사람이 되고 싶다.
- 어떤 사람들은 번제단에서 활활 태워버리자고 한다.
- 물두멍이라고 하면, 여인들의 거울로 만드는데, 내가 맨날 거울 보고, 이 옷 이쁜가, 나를 맨날 보았던 그 거울을 녹여서 물두멍을 만든다. 거기에 하나님의 진리를 담아서, 성막에 들어갈 때 손과 발을 씻으면서 나를 비추는데, 옛날의 나를 비추면 죽는다. 오직 거기에 하늘, 타켈레트가 비춰진다. 하늘이 나의 모습이다. 이것을 알 때 성소에 들어갈 수 있다. 그런 나의 삶을 통해서 물두멍이 된다.
이것을 바드라고 한다. 모든 이스라엘의 개별들이 다 모여야지 에하드가 된다. 모세의 역할은 모든 이스라엘의 개별들을 다 하나의 목적으로 모이게 하는 것이다. 만약에 모세가 없다면, 모든 개별들은 그것을 가지고 각자 가 있다
- 광야에 언약궤가 중요하다고, 저기에 가 있고, 누구는 물두멍이 중요하다고, 누구는 널판지가 중요하다고, 다 그렇게 되어있다. 자기가 경험한 것이 최고이다
모세가 나타나야, 모세를 중심으로 각 바드를 성막으로 만든다. 모든 신성을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조립하는 것이다. 이게 모세이다. 그래서 채를 꿴다고 한다
언약궤도 한 사람이 만드는 것이 아니다. 언약궤에 바드를 꿴다는 것은, 언약궤는 사실 60만개이다. 각 사람이 체험하는 언약도 다 다르다. 우리가 언약이라고 말하지만,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는 이해의 정도와 그 진리의 정도가 다 다르다. 그런데 어느 누구 하나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그게 다 모여야 한다.
cf ) 우리 토*이 동생이 인카운터에서 은혜를 겁나게 많이 받았다. 성령의 역사를 받고 보니까, 토*이 옆에 와 있다는 것이다. 막 붙들고 엉엉 울었다고 한다. 이산가족 상봉하는 것처럼 울었다. 그런데 이 토*에게 나를 여기 데려와줘서 고맙다고, 안 그러면 어떻게 될 뻔 했냐고 했다. 토*은 왜 얘를 데려왔는가? 얘는 언약적 관계를 동생과 배운다. 왜 그렇게 기도해주는가? 언약을 거기서 배운다.
cf ) 다른 애들은 친구끼리 붙들도 그렇게 운다. 친구를 위해서 기도한다. 언약적인 것이 다 다르게 들어온다. 누구는 또 날 붙들고, 아버지라고 하면서 운다. 아버지와 자녀의 언약적인 관계이다. 또 누구는 내 아내를 붙들고 엄마라고 운다. 언약적 관계이다.
이것을 모세가 바드를 꿰었다고 한다. 채를 꿰었다고 번역하지만, 그게 아니다. 모든 성막은 다 60만개이다. 떡상도, 다 60만개이다. 그것을 꿰는 것이 모세가 하는 것이다.
מש 모쉐, 모든 진리(מ)를 그리스도의 형상(ש)으로 꿰어간다. 이게 이스라엘 백성과 모세의 차이점이다.
- 우리는 하나님의 신성을 하면 그게 전부인 줄 안다. 이스라엘 백성, 내 안의 신성은 그것을 성취하면 다 될 것 같다. 이것만 고치면 될 것 같다. 그렇게 나를 고치는데만 하나님의 명령대로 집중한다. 그런데 모세는 다르다. 그 전체를 하나님의 형상대로 가져가는 것이다. 칼라, 형상으로 다 꿰어간다.
출40:33 그는 또 성막과 제단 주위 뜰에 포장을 치고 뜰 문에 휘장을 다니라 모세가 이같이 역사를 마치니
이스라엘 자손도 행하였다는 것이 필하였다는 것은, 이게 신부되기 위한 것이구나를 깨달아야 한다. 역사를 필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스라엘 백성이 막 만들어놓고, 아간 같이 되면 안된다. 쌓아놓고, 괜찮다고 자기가 가져가면 안된다. 이것은 신부, 칼라, 완성을 위한 것이구나, 그리스도의 형상을 완성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이 역사를 필하면, 그것을 가지고 모세에게 가져다 주는 것이다. 우리는 안에서 내 신성이 행한 모든 것을 모세에게 가지고 나와야한다. 그거 가지고 한몫 가지려고 하면 안된다
Ex ) 언약궤, 조각목이었는데, 금이 씌워지고, 금덩어리로 속죄소가 만들어지고, 천사들이 있으니까, 또 그것을 집에 가져다놓고 섬긴다. 에봇도 우상으로 섬긴다. 이게 최고라고 하면서 말이다. 아니다.
역사를 행하기만 하면 안된다. 칼라, 필해야 한다. 최종 목적은 신부이고 성막이구나 하면서, 내 안의 모세에게 가져와야 한다. 내 안의 최종 목적이 그리스도의 형상이 되는 것이다라는 모세이다. 그러면 많은 사람들의 신성이 모이게된다.
많은 사람들이 영적 공격을 받는 이유가 이것이다. 모세에게 안가져오기 때문이다. 그러면 모세에게 가져오면, 모세도 가져온 모든 것을 가지고 역사를 필해야 한다. 모세가 역사를 필하면 이제 끝이다. 모세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져온 것을 가지고 떼먹으면 안된다.
주님의 이 마음이 얼마나 크냐면, 여러분들이 제자의 비전만이 우리를 가게하는 이유가, 제자의 비전은 뭘 했다고 해서, 절대로 그것이 끝이 아니다. 얘가 완성에까지 갈 때까지, 그 모든 것을 완성의 관점에서 바라봐야만, 그것을 헛된데 안 쓴다. 한 단계 더 가야한다.
- 여기선 이러고 있는가? 기다려줘야 한다. 타협해 들어가면 안된다. 기다려줘야 한다. 이것이 칼라이다. 모세가 살아나야 하는 것이다
출40:17 둘째 해 첫째 달 곧 그 달 초하루에 성막을 세우니라
- 엊그저께부터 계속 나온 소리인데, 계속 세우고 있다. 그런데 다른 것을 오늘 배웠다
18 모세가 성막을 세우되 그 받침들을 놓고 그 널판들을 세우고 그 띠를 띠우고 그 기둥들을 세우고
- 받침, 기초를 주었다
אדן 아돈 : 받침, 주님
- 주님이 모든 성막의 기초가 되고 받침이 되신다.
우리가 주님이라고 하는 것의 가장 핵심적인 뜻은 뭔가?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하는데, 주님은 다 성막을 세우는 기초이다. 그분을 주님으로 받아들여야지만 성막이 세워진다. 한 널판지당 기초 2개가 있다. 아돈, 에덴이라고도 한다. 이 기초는 반 세겔로 만든다. 은, כסף 케쎄프로 만든다. 오늘날 돈이라고 한다.
돈으로는 성막의 기초를 놔야한다. 그래서 주님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하면서, 돈과 나를 두 주인이라고 예로 든다. 맘몬을 주님과 같은 레벨로 둔다. 어떻게 돈을 주님과 같은 레벨로 놓는가? 그런데 이 기초에서 같은 레벨이다. 너는 도대체 뭘 세우려고 하는가? 자기가 가진 돈을 어디에 쓰느냐에 따라서, 뭘 세우려고 하는가가 결정된다
주님의 형상 되는 것, 성막을 세우는 것이 돈인가? / 내 육신이 살아가는 것을 돈이라고 생각하는가?
- 우리는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도 돈이고, 성막을 세우는데 필요한 것도 돈이라고 하면서 성막을 세울 수 없다.
창2:16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명하여, 이게 출애굽기의 핵심 주제이다. 하나님이 명령하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것에 의문을 가진다. 선악과가 문제라고 한다. 그러나 선악과는 문제가 하나도 없다. 이것의 전체 이름은 선악의 지식나무라고 한다. 원어에서는 사실 열매라는 말은 없다. 의역해 놓은 것이다. 그런데 각종 나무로부터 네가 먹으라고 하니까 열매라는 말을 집어넣은 것이다. 선악의 지식으로부터 먹게 되어있다.
이것은 잠언에서 주님이 제일로 주시고자 싶은 것이 지식이다. 선악의 지식나무로부터 먹게 하고 싶은 것이 하나님의 갈망이다. 선악의 지식이 있어야 살 것 아닌가? 이것은 못 먹게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명령권자를 먼저 가르쳐야 한다. 선악의 지식나무를 먹으려면, 명령권자가 누구냐가 필요하다. 누구 명령에 따라서 네 몸이 움직이느냐, 어떤 명령으로 네 몸이 움직이느냐이다. 인간이 거듭났다고 하는 것은, 다 이것이다.
나 이외에는 명령권자가 없는 것이 인간의 죄악이다. 이것으로 딱딱해져있다. 그러면 주님의 전공은 이거 부수는 것이다. 이거 부서질 때까지 주님은 절대 타협 안하신다. 이게 금송아지 사건이다.
이 명령권자가 바뀌면 삶이 달라진다. 이게 바뀌기 전까지는 제자사역으로 못 들어오고 이해도 못한다. 우리가 진짜 제자사역을 하면 엄청난 반발이 온다. 정말 제자사역에 대해서, 그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한다. 왜냐면 이것을 절대 포기 안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딨냐부터 엄청난 반발이 온다. 사실은 예슈아비전교회는 좀 부끄럽다. 진짜 제자사역을 안하고 있기 때문이다. 반발이 별로 없다. 미사일 3-4개 밖에 안 떨어지고 있다. 미사일 100개정도 떨어져야한다. ㅎㅎ
이게 인간이 얼마나 딱딱해져있는지 모른다. 이것을 바꾸는 지진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창세기에서 시작이, 주님의 명령에 따라서 이것이 움직여지는 것이다.
창3:11 이르시되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알렸느냐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
- 무엇을 먹었느냐에서 중요한 것이, 먹었느냐 안먹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명령이 중요한 것이다. 너는 지금 누구 명령에 따라 움직였느냐이다. 너에게 바이러스가 먹혔는데, 내 명령에 따라 움직이게 되었는데, 도대체 누구 명령으로 그것을 했는가? 이게 인간이 먹은 바이러스이다.
17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들었다.
내 아내는 내 안에서 내가 원하는 것, 내 욕망, 내 탐심이다. 내 탐욕의 말을 들었다. 그래서 행함이 나왔다는 것이다. 누구 말을 들은 것에서 행함이 나왔다는 것이다. 그러면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는다. 그러면 특징이 황폐해서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한다
제자사역에서 열매를 보는 것이, 열매가 없으면 우리는 즉시로 내 명령 시스템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것을 회개라고 한다.
-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 평생 수고가 끊이지 않는다.
창세기에서 노아의 방주를 보면, 창1:2의 토후 바 보후, 혼돈과 공허를 테바라고 한다. 혼돈과 공허에서 우리를 빼낼 수 있는 것은 방주이다. 노아의 방주를 어떻게 만드느냐? 혼돈과 공허 가운데서, 그 깊은 어둠의 물 가운데서 내가 떠오를 수 있고,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뭐냐? 방주이다. 방주는 어떻게 만드는가?
창6:22 노아가 그와 같이 하여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 우리가 방주를 어떻게 만드냐고, 나무를 깍을 줄도 모르고, 성경엔 방주 설계도도 너무 엉성하다. 방주는 기술로 만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아싸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해? 라고 하지만, 하나님이 명령권자가 되는 것이다. 그것을 의인이라고 한다
창7:5 노아가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 이게 지금 페쿠데이 이야기랑 다 똑같은 것이다. 방주, 성막이 드러나는 것이다.
모든 동물들을 암수 한 쌍씩 방주에 넣는다. 이거 할 수 있겠는가? 어떻게 넣을까? 나는 못한다. 이게 인간의 타락이고, 인간의 죄악이다.
16 들어간 것들은 모든 것의 암수라 하나님이 그에게 명하신 대로 들어가매 여호와께서 그를 들여보내고 문을 닫으시니라
하나님이 명하신대로 들어간 것이다. 하나님의 명령아래로 명령 시스템을 바꾸면, 우리는 이 땅에 존재하는 이유가 성막이 되기 위해서이다. 성막이 되기 위한 모든 삶에는 불가능이란 없다. 내가 원하는 삶을 내가 살려고 하기 때문에 맨날 수고해도 소산이 없다. 내가 원하는 것을 얻으려고 하니까, 맨날 수고해도 되지를 않고, 저주만이 있다.
그런데 하나님의 원함이 내가 되는 것은, 명령권자가 하나님으로 완전히 바뀌는 것이다. 그 세계에는 켄 아쑤만 있다. 모든 것을 내가 다 만들어낼 수 있다. 단, 하나님이 원하는 것, 켄 아쑤만 있다. 그 속에는 놀랍다. 주님의 모든 뜻이 다 칼라이다. 다 완성이 된다.
cf ) 내가 원했던 것들을 하나라도 완성할 수 있는 줄 아는가? 육체적인 사랑? 인간들은 육신의 사랑을 완성하려고 그 난리를 핀다. 최고의 경지를 이루려고 한다. 그래서 결국은 다 미치고, 동성애하고, 이제는 수간까지 한다.
cf ) 내가 원하는 욕망 하나라도 이룰 수 있는가? 먹는 것, 명예, 돈? 하나라도 이룰 줄 아는가? 얼마까지 벌어야지 완성, 칼라가 될까? 하나도 못 이룬다. 내가 원하는 행복? 뭐가 행복인가? 주말마다 펜션가면 행복인가? 하나라도 이룰 줄 아는가? 내가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것, 명예, 어디까지 인정받아야 하는가? 하나라도 칼라가 올 줄 아는가? 단 하나도 오지 않는다. 마지막엔 저주가 온다. 못 이룬것이 원통해서 죽지도 못하는게 인간의 마지막 모습이다.
그런데 인간은 칼라 할 수 있다. 명령권자만 바뀌면 말이다. 그래서 주님의 지상 대명령이 그것이다
마28: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우리가 제자삼는 것은 분부한, 명령을 가르쳐 지키게 하는 것이다. 모든 명령을 가르쳐 지키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예슈아 비전교회가 제자의 삶을 살아간다. 제자의 삶은 여러분들이 원하는 것을 도와줄 마음은 하나도 없다. 명심하기 바란다. 여러분들이 원하는 삶을 도와줄 마음이 없고, 절대로 안 도와주고, 오히려 그것을 파괴한다. 딱 하나, 여호와의 명령대로 살도록 도와줄 뿐이다. 자기의 명령 시스템에서, 여호와의 명령 시스템으로 나오도록 가르치고 지키게 하는 것이다. 그것을 가르치는 것이다. 여기 와서, 자기가 잘 되려고 했다면 큰 오산이다. 여기선 절대로 그런 일 안한다. 절대 타협하지 않는다
* 기도
주님, 이 페쿠데이에 왜 이렇게 명령한대로 다 가져왔는가요? 이게 창세기에서의 하나님의 갈망이다. 인간의 모든 죄와 타락은 나의 명령으로 사는 것이었군요. 그런데 주님이 그것을 회복하시는군요. 우리를 회복시키자, 금송아지를 레위 지파의 칼에 죽고, 금송아지를 섬기는 자들을 다 죽이시고, 이제 주님의 명령대로 사는 삶으로 우리를 이끄셨군요. 모세가 완성하고, 내 삶에 완성이 오는군요. 나는 이제 모든 것을 할 수 있군요. 나는 정말 무엇인가를 완성할 수 있는 그런 존귀한 존재이군요. 그런 한 개별이군요.. 주님의 명령대로 살겠습니다..!
여호와의 명령 시스템으로 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명하신대로 다 행하였다. 켄 아쑤, 칼라..! 주님 감사합니다.
하나님, 정말 제 삶에서 내가 원하는 것을 행하기 위해서 너무나 많이 노력했고, 그리고 거기서 완성을 하고자 너무 많은 방황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도 완성된 것이 없고, 결론은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고, 진짜 내가 하고 싶은 것은 못하는 자가 되었고, 오히려 죄를 사랑하고, 엉뚱한 일만 자꾸 벌어지고, 오히려 자꾸 미워하게 되고, 엉망으로 삶이 되었습니다.
하나님, 그 원인을 우리에게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여호와의 명령대로 다 될 것입니다. 이제 여호와의 명령으로 사는 그런 개별이 될 것이고, 여호와의 명령에 의해서 에하드로 완성되어져 갈 것입니다. 내 삶의 모든 목적이 성막의 건설에 있음을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다비드리 목사
작성자 Joshu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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