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곳간
오종락
결실의 계절임에도 요즈음 나의 작은 곳간은 늘 텅 빈 느낌이다. 오곡이 넘실대는 풍요로운 황금들녘의 풍경과는 너무나 대조적이다. 이런 원인은 과연 무엇 때문 인지가 궁금하다. 지금 나의 신분이 백수白手 에다 직접 노동을 하여 돈 한 푼 벌지 못하는 처지에서 오는 현상인지? 아님, 다달이 제공되는 생계비에 목을 매고 생활해야 하는 입장이라 그런지 모른다.
가을의 짓궂은 심술 탓인지, 마음마저도 왠지 가을밤 북녘을 향하는 기러기 무리에서 떨어져서 쓸쓸함에 몹시 놀란 한 마리 외기러기의 심정이다.
다달이 일용할 생활비는 정해진 날에 계좌로 쏘아주는 보이지 않은 곳간이 있음에 다소 위안을 삼는다. 하지만 나라 살림살이가 점점 어렵고 대외 경제여건도 불확실하다는 뉴스를 접할 때면 마음은 왠지 몹시 불안하다. 이러다 일용할 양식마저 끊어지지나 않을까 하는 생각이 언뜻 들기 때문이다. 혹자는 앞서가는 부질없는 걱정이라 할지 모른다.
이럴 땐 젊은 날 나의 곳간을 제대로 채워놓을 걸, 하면서 후회를 하게 된다. 겨울을 앞둔 시점에 후회하는 게으른 배짱이의 심정이라고나 할까. 옛말에 따르면 사람은 누구나 일생에서 세 번은 곳간을 크게 채울 기회가 온다고 했다. 지난날들을 곰곰이 돌이켜 보면, 눈앞에 다가온 몇 차례의 호기를 모두 놓치고 인생의 가을을 맞이한 것 같아 많은 아쉬움이 남는다. 이제 와서 어찌하랴! 더 이상 큰 기대는 무리다. 마음의 곳간을 더 작은 데 맞추는 수밖에 도리가 없다.
다행스럽게도 근래에 와서 나의 이런 텅 빈 곳간을 채워주는 새로운 곡식들을 발견했다. 그 곡식은 다름 아닌 독서와 글쓰기다. 책을 읽고 글을 쓰다 보면 곳간의 재물은 빈약하여도 조용히 나를 지켜주고 있는 영혼의 곳간은 조금씩 채워지는 것 같다. 재물 곳간의 텅 빈 마음도 일부 걷어낼 수 있는 요술쟁이 같은 곡식들이다.
어느 젊은 여성 항해사의 말이 큰 울림으로 다가온 적이 있다. 그녀는 책 읽기와 글쓰기가 망망대해를 항해하는데 가장 큰 위로와 힘이 되었다고 고백했다. 항해사는 배 안에 갇힌 채 오랜 시간 외부와 철저히 단절되어 계절의 변화마저 느끼지 못한다고 한다. 칠흑 같은 어둠속에서 사방팔방 거센 파도와 싸우기도 해야만 한다. 얼마나 고독하고 힘이 들겠는가. 이런 고난의 시간들을 이겨낸 도구가 바로 독서와 글쓰기였다고 한다. 그녀는 독서와 글쓰기에 큰 마력이 존재함을 잘 말해주고 있었다.
독서는 시공을 초월하여 그 책 속의 주인공을 만나 가르침을 얻을 수 있고 사람의 마음까지 평온하게 다스려 준다고 했다. 이처럼 고독과 거센 풍랑을 이겨낸 힘이 바로 독서와 글쓰기에서 나왔다고 하니 마음 깊이 새겨들을 만하지 않은가.
책의 이런 힘 때문일까! 조선시대 실학자 이덕무는 가난과 배고픔의 고통과 서자 신분의 설움도 모두 책 읽기로 극복해 냈다고 한다. 그는 스스로가 아무것도 할 줄 모르고 책만 읽는 바보라며 ‘간서치(看書痴)’라고 칭했다. 그는 책 읽기로 어려움을 극복하며 영혼의 곳간을 채운 사람이 아닌가 싶다. 그의 삶을 드려다 보며 작고 보잘것없는 곳간에서도 은은한 향기를 내뿜는 그의 맑은 영혼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제 나도 나이를 먹었고 재물 곳간을 채울 특별한 재주는 없다. 영혼의 곳간을 채워 그 힘으로 재물의 곳간을 메꾸어 나가야 할 것 같다. 이럴 때는 아름다운 간서치 이덕무의 가르침은 큰 교훈이 된다. 재물의 곳간 못지않게 영혼의 곳간도 큰 힘이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19.11.03)
첫댓글 젊은 여성 항해사가 책읽고 글쓰는 것이 망망대해를 항해하는데 위로와 힘이 되었다는 말 공감이 갑니다. 독서와 글쓰기로 영혼의 곳간을 채우려는 문우님의 맑은 영혼이 느껴집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마음의 곳간, 영혼의 곳간이 가장 안전하고 보물스런 공간인 것 같습니다.
몇 년 전 읽은 정민 작가의 "미쳐야 미친다(不狂不及)"라는 책 생각이 납니다.
마음의 곳간에 풍성한 수확이 있기를 기대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선생님의 말씀처럼 채워도 채워도 끝없이 더 채울 공간을 만들어 주는 큰 곳간, 영혼의 곳간이 저에게도 있음이 다행스럽게 느껴집니다. 그런데 저는 요즘 곳간이 있고 채우려고는 하나 밑빠진 독처럼 고이는 것이 없어 걱정입니다. 열을 보고 듣고 읽었으나 고이고 채워지는 것은 하나, 둘이 고작인듯 합니다. 거기다 더해 이미 채워진 것도 알게 모르게 빠져 나가는 것 같아 불안하지만, 채울 수 있는 곳간이 있음을 다행으로 여기고 채우기를 게을리 하지 않겠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시대가 아무리 급변해도 연금제도가 그리 쉽게 변모하리라고 생각지는 않습니다. 젊음의 씀씀이를 넘어서 지금의 형편에 익숙해 지도록 노력하면 평화가 찾아오지 않을까요? 서서히 모든 것을 버릴 준비를 해야 할 때에 영혼의 곳간에 가득 채워두면 누구도 빼앗아가지 못하겠지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독서와 글쓰기는 영혼의 곳간을 채우는 힘이라는 말씀에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돌아보면 빈약하기 그지없는 저의 곳간을 조금이라도 더 채워야겠다고 다짐해봅니다. 설득력있게 풀어내신 글, 잘 읽었습니다.
영혼의 곳간은 작은 곳간이 아니고 큰 곳간. 책과 독서륽 통하여 무한정 채울 수 있는 곳긴을 궂이 작은 곳간이라 표현한 작가의 겸손을 읽을 수 있습니다. 곳간의 의미를 새로운 각도에서 다시 보게 합니다. 우선 작은 곳간부터 가득 채워 보시기 바랍니다. 잘 읽었습니다.
알곡이 가득한 곡간, 내가 필요하고 갖고 싶은 물건이 가득한 곳간, 이런 곳간은 채우면 채울수록 욕망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지만 내마음의 곳간, 영혼을 살지우는 곳간은 채우면 채울수록 보람과 향기로 나의 삶을 윤택하게 할 것이라 생각하며 독서와 글 쓰기로 허전한 마음의 곳간을 채워보시려는 선생님의 글에 공감과 경의를 드립니다. 좋은 글 좋은 생각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지금 우리들에게 재물 곡간은 내려놓는것이 채우는길 이라고 생각됩니다. 다 내려놓은 삶이 참 삶이라 믿고 싶습니다. 글쓰고 책읽는것이 앞으로 채워야할 곡간이 맞는것 같습니다. 저도 할일이 많은데 아쉬움이 많아서 망설릴 때가 있습니다. 공감하면서 촣은글 잘 읽었습니다.
지금 처럼 연금 동결이 반복될 수도 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영혼의 곳간에는 그럴일이 없을테니 독서와 글쓰기로 영혼의 곳간을 채우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잘 읽었습니다.
성당에서 교장 출신인 한 분이 휴대폰을 보여주면서 연금에 손을 댈것이다 라는 기사를 보여주었습니다. 5 년 동안 묶어둔것이 끝날무렵 어떻게 변화될지 모른다는 내용이다.공무원, 군인, 사학연금에 해마다 나랏돈을 많이 퍼붓는다는 뉴스를 심심찮게 들으면서 믿을건 연금밖에 없는 나의 곳간인데 살짝 걱정도 되었습니다. 독서 곳간, 점점 비어져갑니다. 읽었던 책의 내용은 잊어버리고 읽고싶은 책은 미루게 됩니다. 선생님 글을 읽고 저도 영혼의 나를 좀 더 살찌우고 싶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영혼의 곳간이라는 말이 무척 공감이 갑니다. 독서, 여행,사색 등 여러방법으로 빈약한 나의영혼 곳간을 채워야겠다고 다짐해봅니다. 재물의 곳간에 집착할수록 영혼의 곳간은 텅빈 곳간이 되어 잡초만 무성해집니다. 선생님의 수필에서 가을 꽃, 영혼의 곳간 등 신선한 어휘들을 사용하시는 필력이 돋보이십니다.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교수님의 깊은 철학 강의를 들은 느낌입니다. 저도 늘 ' 행복은 내 안에 있다'는 말을 생각 하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