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초골 공소(성지)
수원교구에서 가장 오랜 한옥 공소
고초골공소의 과거
용인대리구 원삼본당 고초골공소가 정확히 언제 생겼는지는 알 수 없지만
옛 문헌에 따르면 박해시대 때부터 이 고초골(현재 지명 학일리)에
교우촌이 형성돼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병인치명사적」에 따르면 1866년 12월 신(안드레아)와 박(바르바라)가
이 지역에 거주하다 체포된 기록이 있고
또 1867년 2월에는 유군심(치로) 부부와 제수(弟嫂)가
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미리내본당 관할 공소로 공소의 신자 통계가
처음 나타난 것은 1900년부터다.
1900년 78명으로 나타나는 공소 신자는 1910년에는 140명,
1920년에는 232명으로 나타나는 등
꾸준히 증가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고초골공소의 신자들은 대부분 토박이가 아니다.
미리내, 광주 등지에서 신앙생활을 이어오던 신자들이
생활고 등의 이유로 농토가 넓은 고초골로 이전해 온 것이다.
그래서 당시 고초골의 신자들은 경제적으로 넉넉한 편은 아니었지만
신자들은 신앙생활을 함께할 공간이 필요했다.
그래서 정조 때의 무신(武臣) 이주국 장군 소유의 건물 중 하나를 해체할 때
자재를 가져와 공소 건물을 지은 것이 지금의 공소 건물이다.
고초골 신자들은 공소 건물이 세워진 지 150년가량 됐을 것으로 여기지만
건물 자재는 더 오래된 것이다.
공소는 그 자체로 신앙공동체의 따뜻한 보금자리였다.
사제도 없고 성당도 없는 이 지역에서
신자들은 매주 이 공소에서 기도했다.
지금은 공소예절이 이뤄지지 않지만
공소 앞 작은 철탑에 달린 종이 그 시절을 상상하게 해준다.
고초골공소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원삼본당 김상열(비오) 총회장은
"교통이 좋아져 주일마다 성당을 갈 수 있게 되면서
공소예절을 더 이상 하고 있지는 않지만
1970년대까지만 해도 이 공소에서 공소예절을 바쳤다"면서
고초골공소에서 기도 소리가 울려퍼지던 시절을 회상했다.
또 공소공동체는 넓은 공소터를 외지에서 온
가난한 신자들에게 내어 살 수 있게 해줬다.
공소 인근에는 초가 3~4채가 들어서 신자들이 살았다.
미리내성지에 김대건 성인의 시신을 수습한
이민식(빈첸시오)의 후손이기도 한 이선행(요아킴·76)씨는
"선조들은 미리내에 살았지만 박해가 끝나면서 미리내에
많은 사람이 모여 먹고살기 힘들어 고개를 넘어 고초골에 오셨다"면서
"고초골공소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공소에서 살았다"고 전했다.
첫댓글 완행버스 속에서도 고초골 공소를 다녀 온 듯~~♡
감사합니다!
난 내가 천주교 신자다 !라고 항상 자각을 하고 살겠습니다
글 올려주심에 감사를 드립니다^^
음악이 좋으네요 ㅎ
감사합니다.
고초골 피정의 집ᆢ
친구와 다녀왔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가 작년에
갑자기 주님나라로ᆢ
마음이 아픕니다.샬롬❣
그렇군요.
친구분의 영원한 안식을 누리시길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