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1694
7월 9일 [연중 제14주간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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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우리는 절망하지만 주님은 희망하십니다!>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던 여인에 대한 치유뿐 아니라, 이미 완전히 죽은 열두 살 소녀를 소생시킨 사건을 통해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생명과 죽음조차도 주관하시는 전지전능하신 참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잘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열두 해’라는 표현이 특별하게 다가옵니다. 성경 안에서 12라는 숫자는 각별합니다. ‘완전함’ ‘꽉 찬’이라는 의미입니다.
혈루증을 앓던 여인의 증세는 그 어떤 명의(名醫)도 더 이상 손써볼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된 중증이었던 것입니다. 극에 달한 통증, 극단적 고통, 따라서 부족한 인간의 힘으로는 방법이 없는, 다시 말해서 완전하시고 전지전능하신 주님만이 치유하실 수 있는, 그런 상황임을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유다 장례식 때 등장하는 피리부는 이들까지 등장한 것을 봐서, 완전히 죽었다가 예수님의 손에 이끌려 생명을 되찾은 회당장 딸의 나이도 열두 살이었습니다. 여기서도 12라는 숫자가 등장합니다. 이것은 회당장의 딸 역시 사경을 헤맨 것이 아니라, 완전히 죽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의술로도 더 이상 어찌해 볼 도리가 없는 상태, 완전히 끝난 상태를 말합니다. 오직 생명의 주관자이자 완전하신 주님만이 소생시키 수 있는, 그런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오늘 치유와 소생 사화를 통해 우리는 구원자로 오신 예수님의 진면모를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끝났다고 생각하지만, 그분 앞에서는 아직 끝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절망하지만 그분은 희망하십니다. 우리는 포기하지만 그분은 다시 원점에서 다시 한 번 출발하십니다. 불가능을 가능케 하시는 분, 낡은 것을 새롭게 하시는 분, 말라 죽은 고목에서도 새싹을 돋게 하시는 분, 바로 우리 주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치유와 소생 사건 앞에서, 진정한 의미의 치유와 소생에 대해서 묵상해 봅니다. 우리가 이 지상에서 그리도 간절히 반복해서 원하는 육체적 치유는 다분히 제한적이고 유한한 것입니다. 이 땅 위에서의 끝도 없는 치유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따라서 더 가치있고 중요한 치유, 그래서 우리가 더 간절히 청해야 할 치유는 영적인 치유요, 내적인 치유입니다. 내면의 치유요, 마음의 치유입니다. 그릇된 사고방식과 가치관의 치유요, 고정관념의 치유입니다.
우리가 영원히 이 땅 위에서 살 것이라는 착각에 대한 치유가 필요합니다. 이 세상이 전부라는 오류에 대한 치유가 필요합니다. 하느님은 심판과 단죄의 하느님, 두려운 하느님이라는 그릇된 신앙에 대한 치유가 필요합니다.
언젠가 우리 모두에게 그날이 올 것입니다. 육신의 장막이 허물어지는 그날 말입니다. 그때 우리는 평생토록 그리워했던 자비하신 하느님의 얼굴을 뵙게 될 것입니다. 그 하느님과 더불어 수많은 성인성녀들, 의인들과 함께 하느님 나라에서 더 이상 병고도, 죽음도 없는 삶, 불사불멸의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오늘도 그런 희망을 안고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는 다양한 삶의 십자가 앞에 당당히 맞서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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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관계를 위한 무분별심>
문둥병자였던 승찬은 달마 대사의 제자인 혜가 스님을 만나 병도 치유되고 큰 깨달음을 얻어 중국 최고의 문자라 일컬어지는 ‘신심명’을 짓게 됩니다.
그는 병고에 찌든 얼굴과 남루한 옷차림으로 무조건 혜가 스님을 찾아갑니다. 그리고 그를 만나자 이름도 밝히지 않은 채 엎드리며 말합니다.
“스님, 저는 지금 이렇게 문둥병을 앓고 있습니다.”
혜가가 조용히 묻습니다.
“그래서?”
“제가 왜 이런 고통을 받아야 하는지 알고 싶습니다.”
혜가는 말없이 그를 내려다보고만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승찬은 다시 묻습니다.
“도대체 제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런 고통을 겪고 있는 것입니까?”
그러자 혜가는 부드럽게 말했습니다.
“그 죄를 나에게 가져오너라. 내가 그것을 없애 주마.”
잠시 침묵이 흘렀습니다. 승찬이 다시 말합니다.
“죄를 찾아보아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혜가가 빙긋이 웃으며 말합니다.
“그렇다면 네 죄는 다 없어졌다. 찾을 수도 없는 죄에 묶여 헛되이 고통 받는 일은 이제 그만 하라.”
승찬은 큰 깨달음을 얻습니다. 지금까지 자신을 병들게 했던 것은 자기 자신이었던 것입니다. 이 깨달음으로 병도 치유되고 은둔생활을 하며 무분별심을 주제로 한 ‘신심명’을 짓게 된 것입니다.
[출처: ‘무분별의 지혜’, 김기태, 판미동, ‘강의에 앞서’]
문둥병은 관계를 위한 장애가 되지 못합니다. 그것이 장애가 된다고 믿는 것은 스스로의 생각입니다. 그리고 그런 생각에 사로잡힌 사람들도 장애가 됩니다.
사실 분별심을 가진 이들은 관계를 맺을 준비가 안 된 사람들이니 그들을 신경 쓸 것은 없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이 그럴 자격이 있다고 믿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런 자격을 부여받기 위해 분별심 없이 자신을 안아주는 사람을 만나야만 합니다. 그러면 자격지심이란 병이 완전히 치유되고 누구라도 안아줄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사람을 만날 때 가끔 어색한 분위기가 연출될 때가 있습니다. 가만히 보면 그 어색함 사이에는 수많은 나의 생각들이 끼어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내가 그 사람을 즐겁게 해 주거나 말이 끊어지지 않게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도 자격지심입니다. 나는 그러지 않아도 충분히 존재 자체로 상대를 만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관계가 어색해지는 이유는 둘이 만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내 자아와 셋이, 어쩌면 상대의 자아와 넷이 만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아와 친한 사람은 상대를 만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만나고 있는데 상대가 끼어든 상태라 상대가 어색하게 생각되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서는 자신을 먼저 떠나야합니다.
자아는 ‘분별심’이라고도 합니다. 이는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알려주는 양심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양심은 옳고 그름은 알려주지만 그것으로 사람을 판단하지는 않습니다. 그것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것은 자아입니다. 자아는 죄를 짓게도 만들지만 죄를 지은 자신과 이웃을 심판합니다.
이렇게 자아에게 사로잡힌 상태에서 누군가를 만날 때 일어나는 감정은 ‘두려움’입니다. 먼저 자신을 심판했으니 자신의 부끄러운 면이 드러날까 걱정인 것이고, 그렇게 상대가 자신을 아프게 하지 않을까 두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미연에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만들기 위해 방어막을 치고 먼저 상대를 공격하게도 되는데 그런 모습이 상대에게 상처를 줍니다. 그래서 관계가 잘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랑엔 두려움이 없어야합니다. 자신을 심판하고 상대를 심판했기에 두려움이 생기는 것입니다.
어색함도 두려움의 일종입니다. 상대를 좋은 사람으로 여기면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려면 먼저 자신이 심판자가 되어 자신을 심판하는 일이 없어야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12년 동안 혈루증을 앓고 있던 여인은 그런 처지의 여자입니다. 피를 잃고 있다는 것은 누가 봐도 부정한 여인이 된 것입니다. 당시 피를 잃고 있는 여인과 스치기만 해도 부정해진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 여인은 자신이 누구도 만날 수 없는 처지임을 압니다.
그러나 그 여인은 그런 자격지심을 극복합니다. 그녀와 예수님 사이에는 자기 자신과 자기 자신처럼 자신을 심판할 수많은 사람들이 끼어있었습니다. 그들을 뚫는 방법은 자신에 대한 판단을 멈추는 일입니다. 그래야 다른 사람이 자신을 심판하는 것에도 무관해질 수 있습니다.
이런 무분별심을 가졌다는 말은 심판자인 자아를 버렸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자아가 계속 죄를 범할 때에는 그런 무분별심에서 벗어나기 힘듭니다. 왜냐하면 죄를 짓게 만드는 것 자체가 자아이기에 죄를 지으면서 동시에 자신을 심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여인은 비록 죄인이지만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겨 적어도 자신을 받아줄 수 있는 예수님께 손을 뻗을 수 있는 정도까지 된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러 왔다면 어느 정도는 자아의 속박에서, 즉 죄의 속박에서 벗어났다고 보아야합니다.
그녀는 12년 동안 광야에서 자신 안의 뱀을 십자가에 못 박았을 것입니다. 심판자인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는 곳이 ‘광야’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주님께서는 “이제 나는 그 여자를 달래어 광야로 데리고 가서 다정히 말하리라.”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그 여자’란 이집트에서 종살이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킵니다.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던 백성은 파라오를 섬겼습니다. 자아를 섬기는 상태에서는 주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과 만나기 위해 먼저 그들을 자아의 종살이에서 벗어나게 해야 하셨던 것입니다. 자아를 상징하는 파라오를 가나안 땅에서는 ‘바알’이라고도 부릅니다. 바알은 우상입니다. 자아를 섬기는 사람이 하느님을 만들면 금송아지가 되는데 그것이 바알인 것입니다.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날에는 네가 더 이상 나를 ‘내 바알!’이라 부르지 않고 ‘내 남편!’이라 부르리라.”
자아의 종살이에서 벗어나 분별심이 사라졌을 때 자신을 구원해준 그리스도를 신랑으로 만나게 됩니다. 신랑은 머리이고 신부는 몸입니다. 그리고 신랑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신부입니다.
그렇게 상대를 진정으로 만나게 되고 상대와 한 몸이 됩니다. 이것이 만남입니다. 주님은 이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를 영원히 아내로 삼으리라. 정의와 공정으로써 신의와 자비로써 너를 아내로 삼으리라. 또 진실로써 너를 아내로 삼으리니 그러면 네가 주님을 알게 되리라.”
오늘 혈루증을 앓던 여인은 그리스도를 온전히 알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자신과 이웃들의 심판에 무관할 수 있는 마음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그리스도를 ‘자비’로 만나 뵙습니다. 자신이 자비로워야 하느님도 자비롭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알렉산더 대왕이 디오니소스에게 자신을 어떻게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당신은 좋은 사람이 아닙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이런 사람이 사람을 만날 준비가 된 사람입니다.
사람을 판단하는 사람은 많은 사람과 만나도 단 한 명과도 만난 게 아닙니다. 그런 사람은 누구도 제대로 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자아라는 유리창을 통해 자신의 집 안에서 사람들을 바라본 것뿐입니다.
그리스도교적 친교를 맺고 싶다면 분별심을 버려야합니다. 집에서 나와야합니다. 광야에서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아 그리스도를 만나 하느님의 성전을 완성한 사람만이 하느님은 물론 이웃도 (하느님이 인간을 만나듯이) 만날 준비가 된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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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9,18-26 : 예수의 옷에 손을 댄 여자, 살아난 회당장의 딸
오늘 복음에서는 회당장의 딸을 살리시는 것과, 12년 동안이나 혈루증을 앓던 부인의 치유기적의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다. 죽은 이에게는 생명이 돌아오고 아픈 사람은 온전하게 된다. 회당장이 예수님께 청하고 있다. 회당장은 율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백성, 그 딸을 위해 기도한다. 율법과 예언서는 그리스도에 관하여 그들을 양육하였고,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소녀를 살리신다.
“제 딸이 방금 죽었습니다. 그러나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면 살아날 것입니다.”(18절) 회당장은 갑자기 예수님께 나타나 예수님께서 곧 가 주실 것과 딸에게 손을 얹어주실 것을 요구한다. 우리는 시리아인 나아만이 엘리사 예언자에 대해 “나는 당연히 그가 나에게 나와 서서, 주 그의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며 병든 곳 위에 손을 흔들어 이 나병을 고쳐 주려니 생각하였다.”(2열왕 5,11) 하였다. 신앙이 없는 사람이 눈에 보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표징을 요구하는 법이다.
이때 혈루증을 앓고 있는 여인이 주님께서 걸어가실 때 그분께 다가간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소녀에게 가시는 길에 또 한 여인을 치유하셨다. 여자는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었다. 그러나 떳떳하게 주님께 다가가지 못하였다. 모세의 율법에 의하면 여인의 지속적인 하혈은 부정한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레위 15,25 참조) 그래서 여인은 자신을 감추었다. 여인은 모습을 숨긴 채 있었다.
“딸아, 용기를 내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22절)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눈길이 여인에게 가도록 여인을 내세우신다. 주님께서는 그 여인에게서 두려움을 없애주셨고, 그 여인의 믿음을 모든 이에게 본보기로 세우신다. 그러시면서 여인의 믿음을 칭찬하셨다. 이렇게 이스라엘을 위해 준비된 것을 이제는 평범한 이민족 사람들이 그것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회당장의 딸은 유대 민족을 상징하고, 여인은 다른 민족들의 교회를 상징한다.
“물러들 가거라. 저 소녀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24절) 예수님께서는 회당장의 집에 가셔서 죽은 소녀를 보신다. 믿음 없는 마음을 믿음으로 데려 오시기 위해, 회당장의 딸이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고 말씀하신다. 그러니까 그들이 예수님을 비웃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유대의 지도자들과 구경꾼들을 본다. 그들은 이 위대한 은총이신 주님까지도 비웃고 무시했다.
소녀는 예수님께서 살려 주신다. 이 소녀의 모습은 우리 구원의 신비 전체를 예시한다고 보아야 한다. 루카 복음에는 '아이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하신다. 이것은 신앙인이 성령을 받아 생명으로 돌아올 때, 주님께서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는 생명을 얻지 못한다.”(요한 6,53)고 하신 거룩한 빵을 먹어야 한다는 가르침도 받게 되어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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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오늘의묵상
회당장이 사랑하는 딸을 잃었습니다. 이미 죽은 딸을 살려 낼 방법은 없지만, 회당장은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기적들이 하느님의 능력에서 나온 것임을 믿었기에, 죽은 딸에게 손을 얹어 살려 달라고 청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회당장의 믿음에 응답해 주셨고, 죽은 소녀를 살리십니다. 만일 회당장이 예수님을 믿지 못했다면 사랑하는 딸을 두 번 다시 볼 수 없었을 것입니다.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던 여인이 예수님의 옷자락 술에 손을 대서라도 부끄러운 자기 병을 치유받고 싶어 하는 마음은, 남에게 말 못할 병을 앓아 본 사람이면 공감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이 여인은 예수님의 능력이라면 누구도 치유할 수 없는 혈루증을 치유해 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녀에게 “딸아, 용기를 내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말씀하십니다. 구원은 믿음의 결과이고, 진실한 믿음은 세상의 병에서 해방되는 선물까지 얻게 해 줍니다.
우리 세대를 불신의 시대라고 합니다. 서로 믿고 의지하며 사는 것이 인생인데 커지는 불신은 서로에게 너무 깊은 상처를 남기고 있습니다. 호세아 예언자가 이미 타락한 이스라엘을 회개시키고자 창녀를 자신의 아내로 맞이하여 그녀를 광야로 불러낸 것은, 하느님께서 이스라엘과 계약을 맺고 첫사랑을 나눈 장소로 초대하신다는 것을 보여 주려 했던 것입니다.
과학 기술과 첨단 문명이 발전해도 인간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신뢰입니다. 믿음은 상대의 완벽함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때로 상대의 불완전함을 채워 주려는 결단에서 생깁니다. 믿음은 치유의 시작임을 기억합시다.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사무국장/인천교구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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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밤송이 김기현 요한 신부님]
<딸아, 용기를 내어라>
《가정아 살아나라》라는 책에 보면, 무너진 가정이 다시 세워지는 여러 가지 체험담이 있는데, 그 중에 한 가지를 소개하려고 합니다.
【저는 어려서 주님을 만났지만, 대학에 진학하고 결혼한 후에는 교회를 소홀히 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어머니의 백혈병 투병과 함께 고난이 시작되었습니다. 2년간의 투병 생활 끝에 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 장례를 치르고 돌아오자 남편은 다른 여자가 있다며 집을 나갔습니다.
저는 상실감과 배신감으로 죽고 싶은 생각뿐이었습니다. 가장의 의무는 없고 명령과 요구만 하는 남편이 저의 인생을 어둡게 하고 있었습니다. 남편 없이 두 아들을 키우며 시댁과 친정에 얽힌 관계로 괴로워하고, 남편을 원망했습니다.
집을 나간 남편으로 인해 여자로서 그리고 아내로서 자존심은 무너졌지만, 그러한 남편 때문에 교회에 나가게 되었고 기도를 하게 되었고 말씀을 읽게 되었습니다. 특히 매일 성경 묵상을 시작하면서 하느님이 저를 위로해 주심을 느꼈고, 남편의 구원을 놓고 눈물로 기도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세상의 안일함에 젖어 영혼 구원에 관심이 없었던 저의 죄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사야서를 읽으면서, ‘모든 나무가 베임을 당했어도 남아 있는 그루터기가 거룩한 씨가 된다.’(이사 6,13)는 말씀을, 우리 가정에 주시는 약속의 말씀으로 받았습니다.
육적으로는 베임을 당하고 무너져도 영적으로 거룩한 씨가 남아 회복될 것을 믿으며, 말씀을 붙잡고 기도드렸습니다.
그런데 기도한 지 얼마 안 되어 남편의 사업이 부도가 났습니다. 유능하고 강심장인 남편도 어찌할 바를 모르고 당황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부도로 무너진 남편을 위로하며 복음을 전하자, 도저히 교회에 나오지 않을 것 같았던 남편이 교회에 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교회를 다니기 시작한 남편은 여자를 끊었습니다.
부도로 인한 소송 끝에 남편이 구속되던 날에도 함께 말씀을 나누며 은혜를 입었습니다. 남편의 감옥생활을 지켜보면서, 힘들고 어려운 자에게 관심이 없던 제가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남편 역시 말씀을 깨달아 가며 감옥에 있던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삶의 목적과 현재의 이유를 깨닫게 하신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아직 가족들을 위해 기도해야 할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제까지 그랬던 것처럼 언제나 하느님의 언약을 붙잡고 기도하는 인생을 살고 싶습니다.】
체험담을 해 주신 분의 가정 문제가 다 해결된 것은 아니지만, 무너진 가정을 회복하는 방향으로 계속 나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체험담을 해 주신 가정에만 문제가 있고 갈등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대부분의 가정에 크고 작은 갈등들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이야기에 나오는 것처럼 남편이 바람을 필 수도 있고, 부부 중 누군가가 가정에 성실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또 남편의 사업이 잘 되지 않아서 경제적인 위기가 올 수도 있습니다.
그러한 위기와 갈등들이 잠깐 인내하고 버텨서 해결될 문제라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하루 이틀, 일 년 이 년 안에 해결된 문제가 아닌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더 큰 인내를 가지고 문제들을 극복해야 하지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포기하고 싶은 마음, 갈라서고 싶은 마음, 그리고 원망하는 마음이 수 없이 마음을 괴롭힙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의 말씀이 필요하고 하느님의 도우심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힘든 가운데서도 ‘다시 한 번 해보자...’ 하고, 절망 가운데서도 ‘다시 한 번 일어서 보자...’ 할 수 있는 것은 말씀이 나와 함께 할 때뿐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남편의 무책임만을 바라보고, 경제적인 어려움에만 신경을 쓰고, 내 몸에 아픔만 생각한다면 가정을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는 작은 노력은 시도조차 하기 어려울지도 모릅니다.
말씀을 읽고 기도를 해야, 그 안에서 위로를 얻고 희망을 바라보며 무너진 가정을 일으켜 세우기 위한 작은 노력들을 시작해 볼 수 있을 겁니다.
오늘 하루, 주님의 말씀을 마음에 간직하고 힘을 내어 봅시다.
"딸아, 용기를 내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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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절망, 희망, 기쁨>
“그때에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는 여자가 예수님 뒤로 다가가, 그분의 옷자락 술에 손을 대었다. 그는 속으로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 하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예수님께서 돌아서시어 그 여자를 보시며 이르셨다. ‘딸아, 용기를 내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바로 그때에 그 부인은 구원을 받았다."(마태 9,20-22)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는 여자’는 아마도 깊은 절망 속에서 살았을 것입니다. 마르코복음을 보면, “그 여자는 숱한 고생을 하며 많은 의사의 손에 가진 것을 모두 쏟아 부었지만, 아무 효험도 없이 상태만 더 나빠졌다."(마르 5,26)라고 되어 있습니다. 상태는 더욱 나빠지고, 재산은 모두 탕진되고, 치료해 줄 의사를 찾지도 못하고... 그런데 그런 절망 속에서 작은 희망이 생깁니다. 예수님의 소문을 들은 것입니다.(마르 5,27) 그 ‘소문’은 예수님은 말씀만으로 병자를 고치시는 분이라는(마태 9,6) 소문이거나,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해도 병이 낫는다는(마태 14,36) 소문일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믿음’과 ‘희망’의 관계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믿음’과 ‘희망’은 하나입니다. 만일에 믿음이 없다면 희망도 없습니다. 또 만일에 희망이 없다면 믿음은 아무런 쓸모가 없습니다. 그 여자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서도 그 소문의 내용을 안 믿었다면, 아무것도 희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소문을 믿었다고 해도 치유를 희망하지 않고 포기해버렸다면, 믿었다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고 쓸모도 없는 일이 되어버립니다. (희망하니까 믿고, 믿으니까 희망합니다.) 이것은 병의 치유에 관한 일만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주신다는 것을 믿어도, 그것을 받기를 바라지 않는다면 믿는다는 것이(신앙생활이) 의미가 없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안 믿는다면, 예수님으로부터 그것을 받기를 바라지 않을 것이고, 다른 누군가를 찾아 헤맬 것입니다.
여자의 말에서 “구원을 받겠지.”라는 말은 “병이 낫겠지.”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있는 ‘구원’이라는 말은 몸의 치유와 영혼 구원을 모두 뜻합니다. 여자는 몸의 병을 고치는 것만을 희망하면서 왔지만, 예수님께서는 ‘몸의 치유’와 ‘영혼 구원’을 모두 주셨습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는 말씀은, 여자의 믿음을 칭찬하시는 말씀인데, 여자의 믿음이 기적의 원동력이 되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기적은 여자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일으키셨습니다. 따라서 기적의 원동력은 ‘예수님의 자비’입니다. 여자는 예수님의 자비를 믿었을 뿐입니다.
“바로 그때에 그 부인은 구원을 받았다.”라는 말은, 몸의 병이 고쳐졌고, 또 영혼도 구원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이제 여자는 절망에서 완전히 벗어나서 ‘기쁨’ 속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절망의 반대말은 ‘기쁨’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 말씀을 하고 계실 때, 한 회당장이 와서 예수님께 엎드려 절하며, ‘제 딸이 방금 죽었습니다. 그러나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면 살아날 것입니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일어나시어 제자들과 함께 그를 따라가셨다."(마태 9,18-19)
“예수님께서 회당장의 집에 이르시어 피리를 부는 이들과 소란을 피우는 군중을 보시고, ‘물러들 가거라. 저 소녀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예수님을 비웃었다. 군중이 쫓겨난 뒤에 예수님께서 안으로 들어가시어 소녀의 손을 잡으셨다. 그러자 소녀가 일어났다. 그 소문이 그 지방에 두루 퍼졌다."(마태 9,23-26)
여기서는 회당장이 와서 ‘죽은 딸’을 살려 달라고 간청하고 있는데, 마르코복음과 루카복음을 보면, ‘죽어가는 딸’을 살려 달라고 간청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마르 5,23; 루카 8,41-42) 이것은 본질적인 차이는 아닙니다. 세 복음서 모두, 예수님께서 ‘죽어가는 소녀’를 고쳐 주신 이야기가 아니라, ‘죽은 소녀’를 살리신 이야기를 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이야기는 “예수님은 죽은 사람을 살리시는 분”, 또 “예수님은 생명의 주님이신 분”이라는 증언입니다.
딸이 죽었을 때 회당장은 깊은 절망에 빠졌을 텐데, 모든 것을 포기할 정도의 완전한 절망은 아니었고, 그에게도 희망은 남아 있었습니다. 그 희망은 바로 예수님입니다. 여기서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면 살아날 것입니다.”라는 회당장의 말을, “저는 주님께서 제 아이를 살리실 수 있다고 믿습니다.”, 또는 “저는 주님을 믿습니다. 제 아이를 살려주십시오.”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 말도, ‘믿음’과 ‘희망’은 하나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저 소녀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라는 예수님 말씀에는, 하느님 앞에서 ‘죽음’이란 끝이 아니라 ‘긴 잠’일 뿐이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다음 말씀들이 연상됩니다.
“아버지께서 죽은 이들을 일으켜 다시 살리시는 것처럼,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이들을 다시 살린다."(요한 5,21)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죽은 이들이 하느님 아들의 목소리를 듣고 또 그렇게 들은 이들이 살아날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 아버지께서 당신 안에 생명을 가지고 계신 것처럼, 아들도 그 안에 생명을 가지게 해 주셨기 때문이다."(요한 5,25-26)
딸이 살아난 뒤에 회당장은 깊은 절망에서 벗어나서 큰 기쁨을 얻게 되었을 것이고, 큰 기쁨 속에서 살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큰 기쁨은 궁극적인 구원과 생명에 대한 믿음과 희망으로 발전했을 것이고, 충실한 신앙생활로 이어졌을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서도 절망의 반대말은 기쁨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희망’이신 분입니다.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고장에 앉아 있는 이들에게 빛이 떠올랐다."(마태 4,16)
“민족들이 그의 이름에 희망을 걸리라."(마태 12,21)
바오로 사도는, “사실 우리는 희망으로 구원을 받았다.”고 말합니다.(로마 8,24) 믿음이 있고, 믿음을 바탕으로 한 희망이 있다면, 이미 구원을 받은 것과 같고, 시련과 고난 속에서도 ‘기쁨’을 잃지 않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절망은 ‘죽음’과 같습니다. 신앙생활은 믿음과 희망으로 그 죽음과 같은 절망에서 다시 일어서는 생활이고, 그래서 언제나 항상 기뻐하는 생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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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고흥 도화성당 조창현 클레멘스 신부님]
+ 조 두레박 신부의 영적일기
<다시 시작이다...>
한 자매가 시장에 나오면 작은 고기만 골라 삽니다.
주인이 “왜, 작은 고기만 사느냐?”고 물어보았더니, “우리 집 프라이팬이 작아서..”라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그 주인은 “자매님, 고기를 사기 전에 프라이팬을 바꾸시면 어떨까요?”라고 했다고 합니다. “내 생각을 바꾸면 세상이 달라진다.”고 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한 회당장이 자기 딸이 죽어가는 모습을 보고 안타까워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절망만 하지 있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절망과 죽음 가운데서 믿음으로 예수님을 붙잡았습니다. 그랬더니 예수님께서는 회당장의 믿음대로 죽었던 그의 딸을 다시 살려내시는 놀라운 기적으로 그의 집안에 축복을 주십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는 여자를 고쳐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딸아, 용기를 내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그때 그 여자는 자신의 믿음으로 병을 낫게 되는 구원의 은혜를 입게 됩니다.
“예수님의 겉옷만 만져도 자신의 병이 낫겠다.”는 믿음이었습니다.”
이 여자의 믿음 안에는 2가지 마음이 있습니다.
첫째는... 간절한 마음입니다. 예수님을 만나서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죽기 아니면 살기라는 사생결단의 심정으로 예수님을 붙잡았습니다. 여자의 마지막 소원이었습니다.
둘째는.. 확신 있는 마음입니다. 반드시 이루어지리라는 마음입니다. 그 마음이 “예수님의 옷깃만 만져도 낫겠다.”는 믿음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질병으로 12년이면 모두가 “이제 끝났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던 여자를 낫게 했던 것처럼, 예수님께서 은총을 베푸시면 12년 질병을 끝내고 “이제 시작이다.”라는 마음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될 때까지 한다.”는 마음의 다짐을 하고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고운님들!
어느 책에 보니까, “성공한 사람들은 몇 가지 공통점이 가지고 있다.”라는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의 성공한 공통점을 성장할 수 있도록 했던 길은 “믿음의 기도이었다.”고 합니다. 하느님은 저와 우리 고운님들에게 복의 근원이 되어 주셨습니다. 야고버서 5장 15절에서... 야고버 사도가 말씀합니다.
“믿음의 기도가 그 아픈 사람을 구원하고, 주님께서는 그를 일으켜주실 것입니다. 또 그가 지은 죄가 있으면 용서를 받을 것입니다.”
이제 2018년 올 한 해도 약 6개월이나 남았습니다. “지금까지 치유 받지 못한 것, 그리고 이루지 못한 것을 치유 받고, 그리고 바라는 일들이 이루어지는 날들이 될 수 있다.”는 믿음으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영적일기를 마무리 하면서...
저와 고운님 모두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사람들이 다 이제 끝이라고 해도 예수님께서 은총주시면 이제 시작이다.”라는 믿음으로, 고운님들의 삶의 자리에서 하느님의 섭리가 이루어지는 복된 날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강복합니다. 아멘. .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 전능하신 천주 성부와 (+) 성자와 성령께서는 고운님들께 강복하시어 길이 머물게 하소서.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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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박재구 시몬 신부님]
<구원의 유일한 희망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회당장이 죽은 자기 딸을 살려 달라는 간청과 12년 동안이나 하혈병을 앓던 어떤 여자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의 많은 기적 사화가 나오는데, 모두가 예수님의 사랑과 용서로 치유되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치유 차원에서가 아니라 그 구성원들의 모습을 잠시 묵상해 볼까 합니다.
먼저 회당장입니다. 그 당시 회당장이라고 하면 유대교의 정통주의의 우두머리와 같은 위치에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율법주의자나 바리사이파, 사두가이파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하느님 나라가 다가왔다. 회개하라'고 하시는 구원자 예수님의 행동과 말씀을 경멸하고 미워하며, 이 세상에서 사라져 주기를 바라는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자기 딸이 병들어 있을 때 모르긴 해도 모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 병을 고쳐 보려고 약이란 약은 다 써보고 치료라는 치료는 다 받게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다 헛수고였습니다. 더 이상 손써 볼 방법이 없고 자포자기한 상태에서 이제 남은 방법은 한 가지 뿐이었습니다.
회당장 자기 자신이 경멸하고 미워하고 이 세상에서 사라져 주기를 바라던 예수님을 찾아가 매달릴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인간적으로는 부끄러운 치욕의 순간이었겠지만 자기 딸을 살리고 싶은 사랑의 마음은 그 모든 것을 극복해 낸 것이었습니다.
회당장이 예수님을 찾은 것은 예수님의 모든 것을 인정하고 따르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자기 딸을 살리기 위한 한 가닥 희망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 동기는 순수하지 못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마음 자세를 가지고 온 회당장을 일언지하(一言之下)에 내치시지 않으시고 그의 청을 들어주십니다.
두 번째로 하혈병에 걸려 고생하는 여인의 모습입니다. 이 여인도 당시 유대인들이 부정하다고 해서 멀리하는 자신의 병을 고쳐 보려고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에는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 쏟았지만 허사였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예수님을 보면서 즉시 나을 수 있다는 희망에 찬 믿음을 가지게 됩니다. 그런데 이 여인이 회당장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것은, 이 여인은 예수님을 증오하지도 반대하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소문으로 듣던 그분을 한 번 만나 보고 싶어 하였을 것입니다. 그에게 모든 것을 의지하고 싶어 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가련한 여인의 믿음을 칭찬하시면서 그의 청을 들어주십니다. 우리들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어떤 때는 회당장과 같은 마음을 가지고 예수님을 외면하면서 살아가다가도 급하면 예수님을 찾을 때도 많습니다.
그리고 아직도 예수님을 잘 알지 못하거나, 알면서도 섣불리 그 앞에 서기를 두려워하는 여인의 모습을 가지고 살아갈 때도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가 어떤 처지에 있든지 마지막 희망을 당신에게 가지고 온다면 잘 받아 주신다는 사실을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옛 속담에 '물에 빠지면 지푸라기라도 잡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구원의 유일한 희망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은 우리가 당신에게 오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아니 그 분은 지금 우리 옆에 와 계십니다.
그 분의 사랑은 어떤 사람에게도 예외일 수 없습니다. 과거의 모습이 어떠했을지라도 희망을 가지고 가면 됩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더 이상 허우적거리고 있을 수만은 없습니다. 더 이상 체면치레도 필요 없습니다. 자신의 모습을 주님께 보이고 또 하나의 치유의 기적을 몸소 느끼며 그분과 함께 새롭게 태어납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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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교구 송동림 레오 신부님]
<할머니의 손>
지난해 돌아가신 할머니가 살아 계실 때의 이야기입니다. 거동이 불편하신 할머니는 누워 계실 때가 많았는데, 제가 방학 때 인사를 드리면 가만히 웃으며 제 손을 잡아주셨습니다. 그리고 한동안 놓지 않으셨습니다.
건강에 관한 이야기 등 이러저러한 이야기를 건네면서 제가 방을 나설 때까지 손을 잡고 계셨습니다. 이러한 모습을 제가 찾아뵐 때마다 변함없이 보여주셨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그 느낌이 남아 있는데, 아흔이 지난 할머니의 손이 거칠어도 저는 그 손에서 늘 할머니의 따스한 마음을 읽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한 회당장이 예수님께 와서 “제 딸이 방금 죽었습니다. 그러나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면 살아날 것입니다.”라고 간청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회당장의 집으로 가 누워 있는 소녀의 손을 잡으시자 소녀가 일어납니다. 예수님의 손길이 소녀를 살린 것입니다.
죽음으로 인해 힘없이 축 늘어진 연약한 손에 예수님의 생명의 손길이 닿자 소녀가 살아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손을 잡는 행위를 통해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어 주십니다. 인간에 의해 십자가에 못 박히실 그 손으로 인간을 치유하십니다.
손은 능력입니다. 사랑을 전달하고 눈으로 보지 못하는 것을 느끼게 해주며 말을 못하는 사람에게는 언어가 되어줍니다.
영국의 과학 잡지 「네이처」는 ‘어머니의 따뜻한 손길과 손은 자녀의 신경조직을 자극하여 정서적 안정과 신체적 발육을 촉진한다.’고 했습니다. 특히 어머니가 아이의 머리나 얼굴 등 몸을 쓰다듬는 신체적 접촉이 피부의 신경세포를 따라 대뇌에 전달되어 아이들의 정상적인 발육에 긍정적인 도움을 준다고 합니다.
태초의 하느님의 손을 생각해 봅니다. 아담과 하와는 그들의 손으로 생명나무 열매를 따먹음으로써 세상에 죄를 가져왔고, 카인은 아우 아벨을 그의 손으로 죽임으로써 이 땅에 폭력과 살인이 발생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손을 들어 자손을 축복하셨고, 모세의 손을 들어 전쟁에서 승리하게 하셨으며 사무엘의 손을 들어 기름을 부어 왕을 세우게 하셨습니다. 종종 인간의 손은 상처를 주지만 하느님의 손은 상처를 치유해 줍니다.
주님의 따스한 손길이 사람들의 폭력적인 손을 붙잡아 주시고, 우리 손을 축복의 도구가 되게 하시며 우리 손이 주님의 손처럼 쓰일 수 있도록 우리의 손을 만져주시기를 간구합니다. 그리고 그 누구의 손이 아닌, 주님의 손에 의지하며 사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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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박상대 마르코 신부님]
<안심하여라, 네 믿음이 너를 낫게 하였다>
오늘 복음은 마태오가 마르코복음의 5,21-43에 보도된 복합기적사화를 옮겨 쓰면서 흥미거리 일화는 모두 삭제하고 그리스도론적 요점만 간추려 전하고 있습니다. 즉, 총 23절을 단 9절로 줄인 것입니다.
사실 많은 내용을 간단히 줄이는 데는 요약하는 방법도 있지만 그것으로 부족할 때는 수정하는 방법을 쓰는데, 물론 무턱대고 수정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편집의도에 따르게 됩니다.
오늘 복음을 마르코복음과 비교해 보면, 마태오는 마르코가 야이로라고 하는 회당장(5,22)의 이름을 거명하는 대신 그냥 한 사람의 회당장으로, 회당장의 딸이 다 죽게 되었다(5,23)는 부분을 "방금 죽었다"고 바꾸었고, 하혈증을 앓던 여인이 예수의 옷자락에 손을 대는 순간 병이 나았다(5,29)는 대목을 여인이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을 대고 난 뒤 "안심하여라, 네 믿음이 너를 낫게 하였다"(21절)는 예수님의 말씀이 떨어지자 대뜸 여인의 병이 나았다고 바꾸는 등 여러 부분을 자신의 편집의도에 맞게 축소 수정시켰습니다.
사건의 진상을 비교적 상세히 보도하는 마르코복음사가는 기적사화의 주체인 예수님과 대상인물을 동시에 부각시키면서 기적을 유발시키는 "믿음"을 촉매제로 활용하고 있는 반면에, 마태오는 기적의 주체인 예수님만 부각시키고 있으며, 예수님께서 기적을 수행하실 수 있도록 그 마음을 움직여 주는 동기를 대상인물과 관계없이 중요하게 보고 있습니다.
즉 회당장의 경우에는, 아이가 이미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살려달라는 "간청"(기도)이 중요한 동기가 되고 있으며, 하혈증을 앓고 있는 여인의 경우에는, 예수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해도 나으리라는 "생각"(믿음)이 중요한 동기가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마르코는 회당장의 간청과 여인의 생각 자체에 상당한 가치를 부여하고 있으나, 마태오는 간청과 생각 자체가 기적을 유발하는 중요한 동기는 되지만 기적의 결정적인 요소가 아니라는 점에 유의해야 합니다.
마태오는 결국 기도나 믿음 자체보다 예수님의 권능을 더 강조하려 하고 있으며, 이로써 예수의 그리스도론적인 측면을 부각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구원받기 위해 기도와 믿음을 누누이 강조하셨습니다. 그러나 기도와 믿음 자체가 구원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기도하고 믿는 대상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행위가 구원을 가져다준다는 것입니다.
즉, 예수께서 "안심하여라, 네 믿음이 너를 낫게 하였다"(21절) 하고 말씀을 내리시자 여인은 즉시 치유되었고, "다들 물러가라. 그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잠들어 있다"(24절) 하신 예수께서 소녀를 잡아 깨우시니 소녀는 다시 삶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이렇게 구원행위의 주체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흔히 방향을 잃어버린 채 그저 강렬한 기도와 믿음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접하게 됩니다.
그러나 모든 기도와 믿음의 방향은 철저하게 그리스도 예수를 향해 있어야 합니다.
당시 유대사회에서 제법 높은 지위를 가진 회당장이 예수의 발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마르코에 의하면 회당장 야이로는 가파르나움의 회당장이었을 가능성이 크며, 그렇다면 이미 예수를 잘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예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서 마귀 들린 사람을 치유하실 때(마르 1,21-28),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주었을 때(마르 3,1-5) 바로 그 자리에 있었을 것이고, 예배를 주관하고 감독하는 직책을 맡은 회당장 야이로가 다른 바리사이파와 헤로데 사람들과 함께 예수를 제거하려는 모의에 가담했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아무튼 오늘은 그가 예수께 자기 딸을 살려달라고 간곡히 부탁을 하고 있습니다. 사실 죽은 딸을 앞에 두고 아버지의 체면이 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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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손>
마태오 9,18-26 (야이로의 딸을 살리시고 하혈하는 부인을 고치시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고 계실 때, 한 회당장이 와서 예수님께 엎드려 절하며, “제 딸이 방금 죽었습니다. 그러나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면 살아날 것입니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일어나시어 제자들과 함께 그를 따라가셨다. 그때에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는 여자가 예수님 뒤로 다가가, 그분의 옷자락 술에 손을 대었다. 그는 속으로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 하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예수님께서 돌아서시어 그 여자를 보시며 이르셨다. “딸아, 용기를 내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바로 그때에 그 부인은 구원을 받았다. 예수님께서 회당장의 집에 이르시어 피리를 부는 이들과 소란을 피우는 군중을 보시고, “물러들 가거라. 저 소녀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예수님을 비웃었다. 군중이 쫓겨난 뒤에 예수님께서 안으로 들어가시어 소녀의 손을 잡으셨다. 그러자 소녀가 일어났다. 그 소문이 그 지방에 두루 퍼졌다.
<손>
하느님이 너무 멀리 느껴진다면
두 손 정갈하게 모아보세요
맞닿은 손바닥 사이의 온기를
함께 느끼는 마음 안에서
하느님의 숨결을 느낄 수 있을 거예요
삶이 고단하게 느껴진다면
두 손 힘차게 꽉 잡아보세요
세상 그 무엇도 감히 무너뜨릴 수 없는
당당하게 삶의 역사를 써내려 가는
솟구치는 힘을 느낄 수 있을 거예요
사람이 사무치게 그립다면
옆에 있는 벗의 손을 살며시 잡아보세요
홀로 걸어가는 외로운 인생길에서
또 다른 나와 하나 되어
한결 가볍게 한 걸음 내딛을 수 있을 거예요
지치고 슬픈 눈빛 지닌 벗이 있다면
조용히 다가가 어깨를 곱게 감싸 주세요
손끝에서 전해지는 따스한 마음이
힘겨워하는 벗의 생기를 북돋아
다시 일어서게 할 수 있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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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만약 여러분의 자녀가 대학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말하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것도 좋은 대학에 들어갈 수 있는 실력을 가지고도 입학하지 않겠다면 말이지요. 아마 극구 말릴 것입니다. 대학도 나오지 않으면 너는 이 사회에서 살아갈 수 없다는 식의 반 협박의 말을 써가면서 말이지요.
그런데 미국의 대표적 잡지라고 할 수 있는 포브스 잡지에서 발표한 세계 부자 400명을 보면 그 중 58명은 대학문 근처에도 가지 않았거나 중간에 학교를 그만뒀다는 것입니다.
전체의 약 15%정도가 되는 이 58명의 순 재산은 평균 48억 달러로, 전체 400명의 순 재산 평균보다 167%나 더 많은 것이며 아이비리그 대학을 나온 부자들의 순 재산 평균보다 두 배나 더 많다고 합니다. 이 사실은 공부가 전부가 아님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공부가 전부라고 생각하면서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남이 시키는 것을 하는 데에만 익숙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시켜서 공부를 했고, 좋은 성적을 맞아야 한다고 해서 공부를 했고... 그러다 보니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에 반해서 자기만의 삶을 만들어가는 사람은 누가 뭐라 해도 자신의 주관을 굽히지 않습니다. 꿋꿋하게 자신이 세운 길을 쫓아서 자신의 삶, 자신의 행복을 만들어가기 때문에 더 높은 곳까지 거뜬하게 오른다는 것이지요.
물론 정반대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없는 것은 아님을 밝힙니다. 아무튼 공부를 하지 않으면 무조건 실패의 삶을 산다는 것은 지나친 억지라는 것입니다. 그보다 자기 자신만의 삶을 위해 살아갈 수 있도록 그를 향한 계속된 응원과 지지가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그 사람의 가능성을 더 크게 열어주는 길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남에 대한 자신의 판단을 내려놓을 수 있는 용기입니다.
한 회당장이 죽은 딸을 살려달라는 부탁을 하지요. 그런데 회당장의 집에 있던 사람들은 어떻게 판단했습니까? 이미 죽은 사람에게 불가능하고 쓸데없는 행동을 한다고 비웃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판단을 뛰어넘는 주님의 손길로 소녀를 살리십니다.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았던 여인의 믿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인간적인 판단을 내세운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는 불가능한 것이 없다는 믿음으로 옷자락 술에 손을 대었던 그 행동이 그녀를 구원으로 이끌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시지요. “용기를 내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인간적인 판단을 뛰어넘을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이 용기는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만이 용기 있게 주님 뜻에 자신의 모든 것을 맡길 수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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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 탓?}
에이브러햄 링컨, 간디, 미켈란젤로, 마크 트웨인.
이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요? 이들 모두 16세가 되기 전에 부모 중 한 쪽을 잃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었다는 것은 아이에게 세상의 전부를 잃은 것과 같은 느낌을 받게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영향으로 인해서 부정적인 모습을 간직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고 하지요. 또 실제로 끊임없이 주위 탓을 하면서 힘들게 살기도 합니다.
그러나 앞선 사람들은 어떠했습니까? 부정적인 모습을 세상에 보인 것이 아니라, 세상을 변화시킨 놀라운 업적을 남깁니다. 결국 내 자신의 환경이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그 환경을 어떻게 받아들이냐가 문제 아닐까요? 부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삶이 아닌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삶을 통해 우리는 세상에 커다란 한 획을 그을 수도 있습니다. 그 주인공이 되시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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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교구남궁민 루카 신부님]
<저 소녀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
"제 딸이 방금 죽었습니다. 그러나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면 살아날 것입니다."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
부활하신 주님을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길" 원했던 토마스처럼 신앙은 믿는 분과의 만남, 영원하신 분과의 접촉을 갈망한다. 딸의 죽음 - 인간의 절대적 한계에 직면한 아비도 손을 얹어주시는 예수님을 통해 딸을 살리길 갈망한다. 혈루증을 앓던 여인 - 피와 같은 생명력을 소진한 인간은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이라도 대길 갈망한다.
외적인 실재만 본다면, 타인의 옷자락을 만진다고 병이 치유지 않는다. 더욱이 손을 얹는다고 죽은 사람이 살아날 수는 없다. 혈루증을 앓던 여인은 옷자락을 만지는 외적 행위를 넘어서서 내면에서 구원 가능성을 신뢰하였다.
딸의 죽음 앞에서 아비는 생명을 주관하시는 분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보였다. 이처럼 신앙의 접촉은 외적으로는 보이지 않는 새로운 가능성을 내면에서 신뢰할 때 이루어진다.
"딸아, 용기를 내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저 소녀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
인간의 질병과 죽음 등의 사건 앞에서, 예수님은 외적인 실재뿐 아니라 내부의 가능성을 보신다. 생명의 주인이신 창조주 하느님의 눈으로 병들고 죽어가는 이들 내면의 생명력을 보신다. 하느님 아버지의 눈으로, 하느님 자녀로서 본래 모습을 보셨기에 나이 든 여인을 딸이라고 부르신다.
하느님 아버지의 눈으로 보실 때 죽음은 아버지 품에 잠든 것이기에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라고 이르신다.
"예수님께서 안으로 들어가시어 소녀의 손을 잡으셨다. 그러자 소녀가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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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스마트 폰과 컴퓨터를 연결하려고 하였습니다. 몇 번 시도했는데 잘 안 되었습니다. 보통은 잘하는 분에게 물어보거나, 직원에게 부탁하면 해결이 되었습니다. 차분하게 시간을 내서 방법을 찾으면 되지만 급한 성격에 번번이 포기하곤 했습니다. 이번에는 시간을 내서 인터넷 검색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초보자도 쉽게 할 수 있는 스마트 폰과 컴퓨터의 연결 방법이 있었습니다. 30분 정도 시간을 내서 따라 하니 드디어 스마트 폰과 컴퓨터가 연결되었습니다. 남의 도움을 받아서 해결하던 때와는 다른 기쁨이었습니다. 직원이 도와주어서 해결하던 때와는 또 다른 감동이었습니다.
적성성당에 있을 때입니다. 한 자매님이 매주 수요일이면 서울에서 미사참례를 오셨습니다. 서울에서 오려면 3시간은 걸리는 거리입니다. 자매님은 남모르는 아픔이 있었고, 적성성당에 오셔서 기도하면서 마음이 편해졌다고 합니다. 자매님의 언니는 동생이 매주 어디론가 간다는 말을 듣고 어느 날 동생을 따라서 적성성당까지 왔습니다. 약간의 오해가 있었지만, 동생이 미사에 오는 것이었고, 저와 이야기를 하면서 안심을 하였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자매님은 몸도 마음도 건강해졌고, 더는 제가 있는 성당으로 오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부족한 저를 통해서 치유가 이루어지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매주 왕복 6시간 거리를 오려고 했던 자매님의 의지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회당장의 죽은 딸을 살려 주셨습니다. 죽은 이들까지도 살리시는 하느님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혈루증을 앓던 여인을 깨끗하게 치유해 주셨습니다. 살아 있는 이들을 돌보시는 하느님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손뼉은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고 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드러나기 위해서는 죽은 딸을 살리려는 아버지의 사랑이 있었습니다. 주님의 옷자락만 만져도 병이 치유될 것이라는 여인의 믿음이 있었습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청하는 사람들에게 많은 힘을 주셨습니다. 목적이 있는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셨습니다. 원하는 사람들에게 표징을 보여주셨습니다. 소경은 이렇게 외쳤습니다. ‘다윗의 후손이신 예수님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베짜다 연못의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십니다. ‘낳기를 원하느냐?’ 돌아온 탕자인 둘째 아들도 결심했습니다.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자.’ 베드로 사도도 물속에서 이야기했습니다. ‘주님 구해 주십시오.’ 오늘 복음에서 회당장도 주님께 청합니다. ‘주님께서는 하실 수 있습니다.’ 하혈하는 여인은 더 적극적으로 행동합니다. ‘주님의 옷자락이라도 만져 보자.’ 한 바가지의 마중물은 엄청난 양의 물을 퍼 올릴 수 있습니다. 주님을 향한 우리의 청은 우리를 은총의 바다, 축복의 세상으로 안내 해 줄 것입니다.
우리가 만든 내비게이션은 우리를 목적지로 안내합니다. 우리를 창조하신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바라는 것을 들어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내비게이션의 말을 잘 들으면 원하는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듯이, 우리가 하느님께 의지하고, 하느님의 말씀을 따른다면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영원한 생명에로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의 역사이고, 이것이 신앙이며, 이것이 진리의 길입니다.
지금 주어진 아픔, 갈등이 있다면 그것을 걸림돌로만 생각하지 말고, 새로운 기회가 되는 디딤돌로 생각 할 수 있는 한 주간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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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영원한 반려자>
-주님과 우정友情의 여정
요즘 새삼 깊이 깨닫는 것이 돌아갈 집 내 수도원이, 돌아가 편히 쉴 내 방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하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돌아갈 곳을 잃은 난민들을 최대한 선처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들의 환대는 주님의 환대에 직결되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 약 두 주간 미국에서의 일을 끝내고 귀원한 원장수사의 기뻐하는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벌써 한국이 그립습니다. 사진 감사합니다.”
“이제 사흘 뒷면 돌아간다고 생각하니 신납니다.”
“비행기 막 착륙했습니다.”
“잘하면 끝기도 전에 들어갑니다.”
귀국 전 전송받는 원장 수사의 메시지입니다. 돌아갈 그리운 집에, 기다려주는 그리운 사람이 있다면 저절로 마음도 안정되고 평화로울 것입니다. 반대로 돌아갈 집도, 기다려는 주는 이도 없다면 얼마나 마음 황량하겠는지요.
즉시 인생사 끝내고 사후死後 돌아갈 주님의 집에 대해 묵상했습니다. 돌아갈 주님의 집과 기다려 주는 주님과 그리운 이들에 대한 믿음이 있다면 주님의 집에 귀가歸家라는 죽음도 반갑고 기쁘게 맞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여 살아 생전 영원한 반려자인 주님과의 우정이 참으로 소중합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죽음의 귀가준비요, 하여 평상시의 주님과의 우정입니다. 날로 주님과의 깊어지는 앎과 믿음의 관계에 우정인지요.
오늘 복음에서 주님과 만남으로 구원받은 회당장의 딸과 열두 해 혈루증을 앓던 여자의 두 경우가 참 감동적입니다. 예수님 앞에 엎드려 절하며 청하는 회당장의 간절한 기도입니다.
“제 딸이 방금 죽었습니다. 그러나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면 살아날 것입니다.”
회당장의 간절한 믿음이 감동적입니다. 이런 믿음이 주님을 감동시키고 주님을 알게하며 주님과 우정관계를 날로 깊게 합니다. 복음의 마지막 부분도 깊은 묵상감입니다.
-“물러들 가거라. 저 소녀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하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예수님을 비웃었다. 군중이 쫓겨난 뒤에 예수님께서 안으로 들어가시어 소녀의 손을 잡으셨다. 그러자 소녀가 일어났다.(마태9,24-25)-
파스카의 예수님과의 만남이 영원한 생명의 구원임을 깨닫습니다. 이런 딸의 부활체험을 통해 회당장은 주님을 더 깊이 알게 되었을 것이며 믿음도 깊어졌을 것입니다. 열두해 혈루증을 앓던 여자 역시 간절한 믿음으로 주님을 만나 치유의 구원을 받았습니다.
“딸아, 용기를 내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주님의 말씀과 더불어 즉시 그 부인은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런 치유의 구원체험을 통해 그 부인 역시 주님을 깊이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런 체험을 바탕으로 영원한 반려자인 주님과의 우정도 날로 깊어져 갔을 것입니다.
영원한 반려자인 주님과 함께하는 삶의 여정에서 ‘믿음-앎-우정’은 하나로 직결되었음을 봅니다. 깊어가는 믿음에, 깊어가는 주님과의 상호 앎에, 깊어가는 주님과의 우정이라는 것이지요. 과연 살아갈수록 주님께 대한 믿음도, 앎도, 우정도 깊어가는 것이지요.
사랑할 때 압니다. 살아간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것’이며 ‘알아간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알고 나를 알고 이웃을 알아간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서로 알아갈 때 자유롭고 편안합니다. 앎의 관계와 함께 가는 믿음이요 우정입니다. 특히 영원한 반려자 주님과의 관계는 더욱 그러합니다.
제1독서 호세아서 역시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이해가 확연해 집니다. 마지막 부분의 ‘아내’란 말은 ‘반려자’로 바꿔 읽어도 무방합니다. 인생 광야 여정중 다정히 말씀하시는 주님과 친교의 우정을 깊이하는 것이 참으로 중요한 일임을 깨닫습니다.
“나는 너를 영원히 아내(반려자)로 삼으리라. 정의와 공정으로써, 신의와 자비로써, 너를 아내(반려자)로 삼으리라. 또 진실로써 너를 아내(반려자)로 삼으리니, 그러면 네가 주님을 알게 되리라.”
주님의 핵심 말씀은 “네가 주님을 알게 되리라.”입니다. 우리가 사랑하고 우리를 사랑하는 영원한 반려자인 주님의 성격이 잘 드러납니다. 정의와 공정, 신의와 자비, 진실의 참 좋은 반려자 주님이십니다. 참으로 ‘주님과 우정의 여정’과 더불어 이런 주님과의 앎과 믿음과 우정이 깊어가면서 우리도 주님을 닮아 정의와 공정, 신의와 자비, 진실의 사람이 될 것입니다.
영적지도자의 바람직한 다섯 역할, ‘1.치유자healer, 2, 상담자counsellor, 3.간구자intercessor, 4.중재자mediator, 5.후원자sponsor’도 생각납니다. 그대로 우리의 영원한 반려자, 파스카의 예수님을 닮은 모습입니다. 영원한 반려자인 주님을 닮아갈 때 저절로 우리 역시 영적지도자 역할도 잘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당신을 깊이 알게 하시며 영원한 반려자인 당신과의 믿음과 우정도 날로 깊게 하십니다.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너희는 맛보고 깨달아라. 행복하여라, 주님께 바라는 사람!”(시편34,9).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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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믿음은 새로운 나로 살게 합니다>
어느 한 수도원이 있는 깊은 산속에 한 은수자가 머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수도원의 원장이 그를 찾아왔습니다. 그 이유는 한창 번성하였던 수도원이 쇠퇴의 길로 들어섰기 때문입니다. 원장은 수도원을 어떻게 다시 일으킬 수 있을까 은수자에게 조언을 구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은수자는 “죄송합니다. 저는 아무런 조언도 드릴게 없습니다. 다만 한 가지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당신들 가운데 구세주가 계시다는 것입니다."
수도원장은 이 수수께끼 같은 말의 의미를 도무지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겨우 다섯 명 밖에 남지 않은 수도원에 “구세주가 계시다”는 은수자의 말을 모두가 곰곰이 생각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우리들 중에 구세주가? 구세주가 있다고?’ 다섯 중에 누가 구세주란 말인가? 그 날부터 수도자들은 구세주일지도 모르는 서로를 깊은 존경심과 사랑을 가지고 대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자 이 수도원의 분위기는 전과는 사뭇 다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더욱 놀라운 것은 점차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그 수도원을 찾아와 그 수도자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했고 수도자가 되겠다고 지원하는 젊은이들도 많아져 옛날처럼 번창한 수도원이 되었답니다. 서로를 인정하고 이웃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알아 볼 수 있는 눈이 열렸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던 여자가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개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하는 생각을 가지고 당신의 옷자락에 손을 댄 것을 아시고 “딸아, 용기를 내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마태9,22). 하고 이르시며 구원을 허락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능력으로 불치병을 낫게 하셨지만 ‘내가 너를 낫게 하였다.’고 하지 않으시고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하셨습니다. 육적인 치유도 중요하지만 궁극적인 것은 주님을 통해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그리고 구원의 완성에는 인간의 협력이 필요합니다. 물론 우리의 공로를 통해서 구원을 얻는 것은 아니지만 자유의지에 의한 협력을 기다리십니다. 여인은 감히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졌습니다. 당시의 율법으로는 부정을 탄 여인이 그렇게 할 수 없는 처지입니다. 그러나 그는 용기를 내어 믿음을 표현하였습니다. 이제 그는 과거에 매여 있지 않고 새로운 구원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주님의 능력의 손길에 협력하면서 ‘내 믿음이 나를 구원 하였다.’고 하지 않고, ‘주님께서 저를 구원해 주셨습니다.’하고 말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가지고 계시면서도 결코 인간을 무시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인간의 협력을 간절히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께 대한 믿음은 새로운 나로 살게 합니다.
믿음은 인간의 능력이상을 체험케 합니다. 인간은 끝이라고 생각할 때 하느님께서는 시작하십니다. 사람들은 회당장의 딸이 죽었다고 소란을 피웠지만 예수님께서는 소녀의 손을 잡아 일으키셨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이 곧 하느님이심을 드러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몰아내시고 슬픔을 기쁨으로,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어 놓으십니다. 그러나 그 주변에는 믿음을 가진 사람도 있었지만 그를 비웃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마음이 한 번 비딱해지면 기적을 보고도 또 비웃을 것이며 쓸데없는 소문을 퍼뜨리게 됩니다. 주님의 능력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 이웃 안에 계신 주님을 섬기고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이 가득한 오늘이기를 희망합니다. 예수님께서 회당장의 딸의 손을 잡아주셨듯이 우리의 손을 잡아 주시고 일으켜 주십니다. 우리도 누군가의 손을 잡아 줄 수 있는 날이 되기를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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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란치스코 교황님 말씀
{인간을 다시 살리는 힘}
예수님의 자비는 단순히 어떤 감정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생명을 주고 인간을 다시 살리는 힘입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인간에게 생명을 줍니다. 그리고 그를 죽음에서 다시 살려냅니다.
주님은 항상 자비로이 우리를 바라보십니다. 그분은 자비로이 우리를 바라보시며 기다리신다는 것을 잊지 맙시다.
그리고 그분께 다가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맙시다! 그분은 자비로 가득한 마음을 갖고 계십니다! 우리가 우리의 내적 상처들과 우리 죄들을 그분께 보여드릴 때 그분은 우리를 항상 용서하십니다. 그분은 정녕 온전한 자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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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파주분원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은 회당장 야이로의 딸의 소생 이야기와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은 여인의 치유 이야기입니다.
야이로는 회당 장으로서 명예와 존경을 받는 자였지만, 죽어가는 어린 딸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그 어떤 것을 가졌다 하더라도 죽음 앞에서는 어쩔 수 없을 뿐입니다. 그 속수무책의 슬픔과 절망 속에서 모든 희망이 무너져 버린 참담한 순간입니다.
또한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고 있었던 여인은 그 병을 고치기 위해 많은 의사를 찾아가 치료를 받느라 고생하였지만, 가진 것마저 모두 탕진해 자포자기에 빠져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여인이었습니다.
바로 이 절망의 순간, 억울함과 원망이 밀어닥치는 이 순간, 하염없이 넘어지는 이 순간이 그들에게는 더 깊은 데서 물을 길어 올리게 하였습니다. 바로 이 순간이 더 깊은 곳으로부터 믿음을 퍼 올리는 기회의 순간이 되었습니다. 바로 이 순간이 믿음의 시련의 순간이기도 하지만, 또한 기회의 순간이기도 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 순간이 그를 더 깊은 믿음에로 이끄시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회당장 야이로도, 혈루증 여인도 예수님께 희망을 두고 믿었지만, 사실 그들의 믿음은 황당하기까지 합니다. ‘옷에 손을 대기만 하면 구원을 받으리라’는 혈루증을 앓던 여인의 믿음은 언뜻 보기에는 미신적이기까지 합니다, 어찌 보면 주술적이고 마술적이기 까지 합니다. ‘이미 죽은 아이에게 손을 얹어주면 다시 살아나리라’는 회당 장의 믿음 역시 억지 부리는 것으로 보이기까지 합니다. 어찌 보면 참으로 어리석고 바보짓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끝났다고 여길 때, 바로 그때 하느님께서는 일을 시작하실 때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절망적이라고 여길 때, 바로 그때가 구원의 때요, 은총의 때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합니다.
“그분을 밀쳐대는 이는 많지만, 믿음으로 만지는 이는 적습니다.”
바로 이 순간 주님을 밀쳐내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주님의 옷깃을 만지는 일이 필요합니다. 만약, 만져도 만져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우리의 믿음이 약한 까닭일 것입니다.
베다 성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단순한 마음이 아니라 의심과 이중성으로 주님께 다가가기 때문에 만져도 만져지지 못합니다.”
그들의 믿음은 단순히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거나, 예수님이 손을 얹어주는 것에 대한 믿음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상황을 바꾸실 수 있는 분에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예수님께 대한 믿음이요, 예수님의 권능에 대한 믿음과 자비에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따라서 이 두 이야기는 예수님의 신성과 메시아, 곧 예수님께서 구세주이시고 하느님이심을 드러내 줍니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절망에 빠지는 일이 없이, 끝까지 믿고, 오로지 예수님께만 희망을 두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전부입니다. 그러기에 생명으로 이끄시는 그분의 전능한 손길에 우리의 손을 맡겨드려야 할 일입니다. 믿음의 손으로 그분의 옷을 부여잡고 그분의 권능과 자비가 우리들 안에 흘러들도록 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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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이병우 루카 신부님]
"제 딸이 방금 죽었습니다. 그러나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면 살아날 것입니다."(마태9,18)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마태9,21)
사랑하는 어린 딸을 잃은 한 회당장이 예수님께 보여 드린 믿음입니다.
열두 해 동안이나 하혈을 하고 있던 여자가 예수님께 보여 드린 믿음입니다.
이 믿음으로 구원이라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죽었던 사람이 다시 살아나고, 인간적인 노력으로 도저히 고칠 수 없었던 병이 낫습니다.
오늘 복음을 함께 묵상하면서 믿는 나 자신에게 다음과 같은 뻔한 질문을 한번 던져보았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누구를 믿고 있고, 무엇을 믿고 있고, 왜 믿고 있는가? 그리고 나의 이 믿음은 고통, 그것도 극단적인 고통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그런 믿음인가?'
믿겠다고 약속한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떠나서 살아가고 있는 오늘의 현실입니다. 한국 교회 안에서 약 40% 정도의 신자가 냉담신자라는 놀라운 통계가 있습니다.
왜, 그들은 교회를 떠나 있을까? 아마도 그들이 겪고 있다는 이런저런 크고 작은 고통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믿었는데도 하느님께서 축복을 주시지 않고 오히려 시련을 주셨다는 고통! 신부님이나 수녀님 또는 어떤 신자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고통! 더 큰 이유는 믿음의 열정이 약해 신앙이 무의미하게 다가오는 고통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사람을 믿지 않고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믿습니다. 우리는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믿고, 영원한 생명을 믿습니다.
우리가 믿는 이유는 오늘 축복 받기 위해서 입니다. 오늘 죽지 않고 살기 위해서, 그것도 잘 살기 위해서입니다. 오늘 우리가 하는 일들이 하느님 뜻 안에서 이루어지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마침내는 영원한 축복인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우리는 믿습니다.
믿음의 결과인 구원이 항상 오늘 나에게 주어질 수 있도록 항상 오늘 제대로 믿는 우리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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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소보둥지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용기를 내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병이 들어 아픈 사람은 어떻게든
낫고 싶다는 생각에 약도 먹어 보고
좋다는 것은 다 해보려는 마음이 듭니다.
병자를 치유해주시는 예수님~
그분의 옷자락을 만지기만 하여도
나을 수 있겠지!라는 생각은 용기내어
그분을 향해 걸어갈 수 있게 되고
만짐으로 병이 낫는 기적을 체험합니다.
어떠한 행위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원의가 있고 그 원의에 용기를 내야 하고
그 용기는 실행에 옮기는 에너지가 됩니다.
해보십시오! 주저앉아 시간 보내기보다
마음 다 잡아서 뭐라도 해본다면,
그 근처에라도 다다를 수 있게 됩니다.
용기는? 내는 것입니다!
믿음은? 지니는 것입니다!
사랑은? 하는 것입니다!
인심은? 베푸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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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딸아, 용기를 내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마태 9, 22)
소중한
우리 자녀들에게
필요한 것은
용기입니다.
용기와 용서의
여정을 걸어가고 있는
우리들 삶입니다.
우리 자신에게
필요한 것은 단연코
용기입니다.
슬픔을 딛고
일어설 용기와
아픔을 딛고
일어설 용기가
필요한 우리들
시간입니다.
믿음없이 구원에
이를 수 없듯이
용기없이 믿음으로
결코 나갈 수 없습니다.
우리가 향해야
할 곳 또한
예수 그리스도라는
믿음이고 믿음은 용기로
충만해지고 용기는
치유라는 구원으로
더욱 풍요롭습니다.
믿음에도 용기가
필요합니다.
용기 없은 믿음은
실천으로
이어질 수 없습니다.
나약한
우리들이기에
예수님께서는
용기와 믿음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용기로 예수님께
나아갑니다.
용기와 믿음
치유와 구원은
뗄 수 없는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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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정리/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눠드립니다■
[이름, 본명, 지역(본당), 축일, 연락처]를
문자로 보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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