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 회화
인류의 초기 활동에서 문자는 아직 형성되기 전에 이미 회화의 싹이 텄다.지금으로부터 8천년 정도 떨어진 신석기 시대에 우리 조상들은 여러 가지 문양의 무늬나 몇몇 동물의 형상을 채색토기에 그리기 시작했습니다.과거 기록과 근년의 고고학적 발굴에서 나온 유물을 비교해 보면 우리나라의 회화 예술은 전국시대에 이미 상당히 높은 수준에 이르렀다.1949년 후난(省南)성 창사(長沙)시 천자다산추(帼家大山楚) 무덤에서 출토된 만주백화(。)가 그 예다.몸을 옆으로 하고 서 있는 가는 허리의 장상을 그린 여자는 합장 경례를 하고, 왼쪽 위는 용을 타고 봉황을 타고 승천하는 상이다.화가는 섬세하고 힘 있는 선을 구사해 단정한 자태의 여자, 씩씩한 용봉을 실감나게 그려내며 작가의 뛰어난 예술적 재능을 표현했다.그러나 한나라 이전의 회화는 필묵이 간략하여 구도가 아직 복잡하게 되어 있지 않다.
진한 시대에는 화공과 화가에 대해 많은 기술을 했다.한원제 때의 어용화공 모연수는 인물의 용모와 나이를 특별히 사실적으로 그릴 수 있는 훌륭한 초상화가였다.또한 한대에는 석각석화석화상벽돌 같은 것이 많이 남아 있어서 한대에는 예술을 새길 수 있는 특징이 있습니다.또 랴오닝의 랴오양(。)영성자허베이(河北)망도(都都) 등에서 한묘 벽화가 다수 발견돼 한나라 벽화도 성행했음을 보여준다.한묘벽화의 표현기법과 특징을 보면 대부분 소박한 먹줄로 형상의 윤곽을 그려내고 주, 청, 황 등 명쾌한 원색으로 점을 찍는 등 기법이 우아하면서도 스타일이 뚜렷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동진(東晋) 때 恺의 '문사잠도(文史)'는 서진 시인 장화(西華)의 '여사잠(。)'을 위한 몇 단락의 삽화로 우리나라 최초의 두루마리 그림으로 중국과 세계화사에 의미가 있다.위진남북 시기는 중국 문화예술의 발흥기다.조불흥, 위협, 고우지, 육탐미, 장승서 등 대화가들이 울창하게 일어나 진한 예술의 전통을 계승하고 창조를 크게 발전시켰으며, 후세 사람들은 이들에 대한 평을 얻었다.세 사람 모두 독특한 그림 스타일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그림 속의 선을 고려하여 끊임없이 이어져 부드럽고 자연스러우며 매우 균일한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역대 화가들이 애용하는 붓은 '봄누에가 실을 토한다'거나 '청운부공유행지'다.육 씨는 그림의 선이 연면히 이어져 있어 '그림'으로 불린다.문헌 기록으로부터 장승이 그림을 그렸다는 것을 알았을 때, "필재는 이미 응한 것 같다."는 말은 나중의 속사법처럼 되어 있었는데, 후에 사람들은 이 화법과 돌봄, 육연이 끊이지 않는 한 획을 형성하였다.또한 불교가 전래되면서 그들은 외래예술의 영향으로 궁정, 전당, 사원의 벽화가 한대를 크게 능가했다.예술적 표현기법과 회화적 소재도 더욱 다양해졌다.화조화가 한창인 가운데 인물 형상 묘사는 이미 높은 성과에 이르렀다.산수화가 이미 나타나기 시작했다고는 하지만, 산수수석은 아직 앳되고 졸렬해서 그것들이 인물의 배경일 때는 비율과 처리에 적합하지 않다.장언원은 '역대 명화기' 권일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 산수를 그리면 군봉이 마치 코뿔소가 빗발치거나, 물이 넘치지 않거나, 사람이 산보다 크거나, 그 열식이 마치 팔을 뻗은 것처럼 보인다.
이 밖에도 양진남북조 때 회화예술이 번성하고 발전하면서 회화의 소장감상평론의 바람이 거세지면서 1차 계통의 회화 이론 저술이 생겨났다.그중에서도 남제화가 셰이크의 고화품록 <>은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최초의 회화 이론 저작이다.책에는 위진에서 남제에 이르는 27개 화가의 작품 6품에 대한 평론과 서전서에서 제시된 '육법론' 즉, 기품생성·골법용필·응물상형·종색채에 대한 비평이 있다.
우리나라 당송시대의 예술적 고조가 도래하는 데 깊은 기초를 다졌다.수당시대 우리나라 고대 회화 발전사는 눈부시게 빛나는 단계였다.특히 당나라 때 우리 문화예술사의 빛나는 한 페이지를 열어주면서 세계 문화사에 금빛이 반짝이고 있다.봉건사회의 상승기에 당나라의 국력이 강대해지고 경제발전과 함께 문화도 번영했다.문학에는 한유, 유종원, 시에는 이백, 두보 등이 있고 서예에는 오양문, 수양, 우세남, 안진경, 유공권, 장욱, 회소 등이 있다.수당 시기의 유명한 화가는, 200명 남짓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정말 많은 사람들이 배출하고, 많은 별들이 하늘에 가득하여 우리나라 고대 문화의 찬란한 시기를 이루었다.주요 표현에는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측면이 있다.
1.회화의 소재가 폭넓은 당대의 회화예술은 장르적으로 과거 종교의 틀을 크게 벗어난다.귀족 여성의 삶을 그린 사녀화, 특히 지배계급과 사대부의 심미적 재미에 적응한 산수화와 화조화가 발전했다.특히 산수화는 과거에 주로 인물의 배경이 됐던 것에서 독립적인 화과로 발전해 이사훈, 왕위 같은 걸출한 산수화가 탄생했다.동시에 화조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당시 화조를 그릴 수 있었던 화가는 20여 명.그중에서도 당나라 말기의 변기(鸾)와 간광윤(。光胤)이 가장 유명하다.한편으로 공작을 그리며 꺾은 가지와 꽃, 벌, 나비와 각종 진귀한 화훼금조를 잘 그린다.대나무와 돌, 새, 고양이, 토끼를 능란하게 잘 그리며 화조화가 가장 정교하고 아름답다.조패와 한간이 말을 잘 그리고, 소를 잘 그리고, 설직이 학을 잘 그리고, 이열이 호랑이를 잘 그리고, 노정이 고양이를 잘 그리고, 풍소정이 용을 잘 그린다.회화예술의 이런 테마분과 현상은 당나라 회화 장르의 확대와 작가의 실생활 묘사능력의 급속한 향상을 잘 보여준다.
2.회화예술의 풍격이 당대에 풍부하고, 같은 장르를 그려도 여러 가지 다른 풍격을 나타낸다.예를 들어 오도자의 산수화는 이사훈과는 확연히 다른 산수화가 있는데, 이사훈의 '청록산수(工山水)'는 세세하고 미세한 것이 '공필(。)'화이다.오도자의 산수는 초탈하고 단조로운 경지를 자랑하는 '。'화에 속한다.염리본과 장萱, 주昉의 인물화도 확연히 다르다.그들은 비록 스타일이 다르더라도 공통적인 시대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이런 특징은 주로 풍만하고 아름다운 이미지와 호화로운 짜임새, 화려한 색채의 조화, 눈썹과 볼이 풍성하고 다채롭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하는 것인데, 얼굴은 모두 뚱뚱하고, 영태공주묘, 장회태자묘.
3.당나라 회화는 창작방법이나 표현기법에 있어서 현저한 진보가 있기 이전에 그린 선이 인물이나 산나무에 있어도 붓을 많이 쓰지 않거나 아주 드물게 꺾인다.산돌나무 줄기도 트는 법이 없고, 대부분 청록중색으로 채색되어 있어, 고르게 물들고, 변화가 적다.만당손위 고일도 세트에서는 이미 촘촘히 도배된 수석이 보인다.동시에 많은 화가들이 사생에 신경을 쓰면서 한편으로는 대자연을 스승으로 삼고, 다른 한편으로는 대자연에 대한 자신의 체험에 의지한다.특히 성당 때 유명한 산수화가 장린이 말한 '외사조화, 중득심원'의 창작사상은 후대 화가들의 예술창조 잠언이 됐다.회화 표현기법은 인물화에 표현된 인체 해부지식, 산수화와 누각화에서 공간의 원근을 처리하는 방법, 오도자 등 명화가가 선을 긋고 형상을 그리는 특징 등이 당나라 회화예술의 일종이다.
4 회화이론의 저술은 당나라 때 전해져 내려온 이론저술로 20여 종을 기록하는데, 중요한 저작은 장언원 《역대명화기》, 이사진 《후화품》, 언갈색의 《후화》 등이다.역대 명화기로는 가장 가치가 큰 우리 회화 이론의 중요한 저작이다.
5대의 회화 예술에서 당나라의 여맥을 이어 송나라의 새로운 기풍을 열다.세 지역으로 나누어 서술할 수 있다.
1. 중원지역은 전란이 잦은 지역이라 많은 화가들이 전란을 피해 깊은 산속으로 숨어 지내며 평생의 정력으로 산수를 그리며 삶에 대한 이해와 희망을 표현하고 있어 이 지역의 산수화가 특히 빠르게 발전하고 있다.형호와 관동(()이 대표적이다.그 두 사람이 붓으로 텄다.아울러 수묵의 활용은 어느 정도 성숙된 단계로 접어들었다고 할 수 있다.
2. 서촉지구는 경제여건이 비교적 우수하고 전란이 적으며 중원지구의 일부 화가들은 당말, 5대초에 서촉지구로 피난을 많이 가는 데다 서촉정권이 먼저 궁정에 '그림원'을 설치하여이런 이유들로 인해 서촉지역은 당시 회화예술활동의 중심이 되었다.산수화, 특히 화조화가 이곳에서 크게 발전했다.황기, 황거기 부자와 남당 서희가 이 분야에서 가장 크고 두드러진 성과를 거두어 우리나라 고대 화조화의 두 주요 유파가 되었다.황기의 회화 스타일은 줄곧 화려하고 정교함을 특징으로 한다.먼저 아주 가늘고 덜 진한 먹실로 물체의 부위와 윤곽을 그려내고 색을 채워라.이런 화법은 일반적으로 '그리기법'이라고 불린다.황기의 아들인 거보(筌寶)거철(讬)이 이 화법을 물려받아 화조화("。)에 나오는 이른바 '황체'를 만들었다.서희의 그림은 소박하고 자연스러우며 약간의 색채를 띤다.즉, 선묵색을 주안점으로 하여 색을 그리는 기법을 보조하고 선과 색의 상호 결합을 고려하여 선이 색을 가리지 않도록 한다.이런 화풍을 후세에 서체라고 부른다.이 때문에 당시 "황가부귀서희야일"이라는 평가가 나왔다.그러나 서희의 이 같은 붓놀림은 색채보다 가벼운 화법으로, 손자 숭사 등의 손에 들어가 황기화파의 영향을 받아 화조화의 그림을 그리는 무골법, 즉 먹칠을 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3.강남지역의 남당이라는 지역은 서촉과 같이 뛰어난 자연조건을 가지고 있고, 전란으로 파괴된 것도 적고, 일찍부터 문학예술가들이 모여있는 곳이고, 궁정에도 '그림원'이 있어서 인물화나 산수화나 화조화나 화조화나인물화의 경우, 주문직과 고서 중에서 대표로 할 수 있다.주문직의 '전(颤)(()필'의 옷자락은 인물화 기법에서 새로운 스타일을 개척한 셈이다.화조화의 경우 서희를 대표한다.산수화 쪽은 동원과 거연을 대표한다.그림사적으로는 '강남파'라 불리며 순진한 강남 풍경을 잘 표현하는데 특히 비바람을 잘 탄다.이 그림 파티 송원 이후의 산수화의 영향이 크다.
북송에 가서 통일로 돌아가다.그래서 송대는 당에 이은 또 하나의 문화예술 황금시대다.5대 왕립화원을 계승하여 창립한 한림화화원은 그림개과로 흙을 채취하고, 천하의 뛰어난 화가들을 중사생하고, 법리를 중시하며, 매우 근엄한 예술창작 태도로 세밀하게 기술하였다.그림을 배우려면 반드시 북송을 말해야 하며, 많은 가작들이 후세의 본보기가 되었다.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송대의 회화에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성과가 있다.
1.회화의 소재 범위가 더욱 넓어진 송대 회화의 소재는 도시생활과 농가생활의 묘사, 인물의 초상부터 고대사적을 그린 역사화, 이공린의 토끼의 제왕도, 진거 중의 문희 등입니다.종교적인 소재의 인물화는 송대 초년에 이르러 아직 크게 발전하고 있지만, 앞으로는 과거처럼 신선귀신이나 귀족생활을 주로 묘사하는 대신 현실을 묘사한 민간생활과 사회풍속 등에 위치한 풍속화를 명선화한다.
2. 산수화와 화조화는 봉의 발전을 이루었고, 여러 가지 스타일의 화파가 생겨났으며, 내대 회화에서 가장 두드러진 부분인 북송초기의 산수화를 이성과 범관에 으뜸으로 꼽았는데, 그들은 형호의 수묵을 만하다.그의 '임천고치'는 산수화 이론의 중요한 저작이다.남송 이당 유송년과 마원 하규를 합쳐 남송 4대 산수화가로 불린다.산천의 형세의 완전성을 더 이상 추구하지 않는 것은 종종 어떤 국부를 부각시켜 집중하고 강화하는 묘사이다.북송 초년의 화조화는 황벽화파의 영향을 받았다.100년 가까이 지난 뒤에야 조창, 이원길, 최백 등이 나와 황파의 화조화가 통치지위를 상실했다.송휘종 조길이가 집권한 시기는 송대 화조화가 전성기를 구가하던 시기였다.왕립의 화원을 크게 발전시키고 화조화를 적극 제창하여 화조화의 발전을 촉진하는데 한몫을 하였다.화조화는 남송으로 발전했으며 화풍은 대부분 정밀하고 섬세하며, 화려하고 생동감이 있어 그림이 소폭으로 가장 많이 나온다.임춘, 리디, 모익 등을 대표로 한다.
3.회화의 형식과 스타일이 더욱 다양해진 두루마리 그림의 형식이 빠르게 발전하여 우리나라 회화의 주요 형식이 되었다.병풍과 부채, 장식의 소폭, 청명상하도처럼 규모가 큰 두루마리, 화려하고도 세련된 화조화, 서정적인 수묵의 활용도 있다.정사초가 그린 난초는 모두 뿌리가 드러나 있다.왜 이렇게 그려야 하느냐는 질문에 정씨는 "땅을 빼앗겼다"고 답했다.그의 망국의 아픔을 화초로 전하는 '우의성'도 특징이다.
그 외에도 새로운 경향들이 나타나고 있다.북송 말 남송초의 화매 명가, 양보지의 사매도 권, 미개, 만개, 개잔 4단 묵매, 소담 청유, 시와 글씨도 정묘하고 회화를 설명하였다.일찍이 북송 후기에 미구의 "진묵" 운산이 있었던 것은, 당시에는 새로운 기법일 수도 있고, 남당산 수화가 동원화파에 이르러서"심초로", 근시안적으로는 "물상"(().또 문동묵죽화나 쑤퉁의 '구구불구(不轼)'가 붓고 튼 듯한 '고목괴석도(。石图)'를 보는 등 이른바 '문인화'가 범람하기 시작한 흐름을 짐작할 수 있다.남송 '문인화'가 되면 발전하기 시작한다.량차오의 매우 조촐한 '감필화'는 남송 말기의 일부 승려들에게 전해져 원명 이래 수묵광종로의 인물에게 화조화가 '선로'를 열어 준 영향이 크다.원나라에서는 송나라의 성대했던 화원을 폐지하였다.많은 화가들이 원대의 통치자들을 위해 봉사하기를 꺼리고, 산림에 은거하며, 예술로 현실에 대한 자신의 불만을 표출하는 것이 원대의 회화 예술에 중대한 변화를 가져왔다.다음 세 가지로 표현됩니다:
1.회화예술과 실생활의 관계를 보면 풍속화가 갈수록 약해지고, '문인화'가 예단을 둘러싸고 회화의 소재 범위가 크게 축소되어 산수화가 원나라 회화예술의 주요 부문이 되었다.이것과 관련된 것이 '사군자'(매, 난, 죽, 국화)라는 장르가 유행하고 있다.조맹식 그레이브러시 9. 호기사...어디서 아버지의 갈등과 벌레를 토벌할 것인가...울타리 단소 C. 찌꺼기를 털어내길...
황공망은 산수를 전문으로 하며 묵필(绛) 스케치와 옅은 착색(琬) 등 다양한 화법으로 조씨를 계승하여 발전하였으며, 그 추종자는 육광(陆廣), 말총(。) 등이다.오진산 수학동, 거원윤의 붓.예봉은 측면 공격수를 많이 써서 산수 구도가 복잡하다.이 네 사람은 '원계사대'라고 불린다.이들 외에도 유명한 원나라 화가로는 돈선, 왕기, 이구, 커구스, 왕관 등이 있다.화사에서 특히 왕관(王冕)이 묵매(。)에 능한 것으로 유명하다.
2. 회화예술의 창작 경향을 보면 작의의 바람이 특성은 화조화든 산수화든 다 그런 것이 원대의 주요 유파의 공통된 특색이다.시서화의 결합을 따지는 풍조도 유행하고 있다.이러한 스타일은 이후의 문인 화가들 중 수많은 추종자들이 있다.
3.원대의 벽화예술도 노동자민과 민간연예인이 창작한 것이 흥성하다.예를 들어 산서 홍동 현 광승사 명응왕전 내 원나라 벽화는 종교적인 소재뿐만 아니라 원나라 연극 공연의 상황을 극명하게 묘사하고 있다.산시 영제현 영락궁의 벽화는 원나라 벽화의 걸작이다.
명대에 송제를 계승하여 화원을 중립하다.홍무영락부터 선덕성화홍치시기까지 원나라 수묵화법을 계승한 문인화, 궁정원체화, 강저장 일대 민간화단에서 활약하는 저장파의 3대 체계가 기본적으로 형성되어 있다.이 세 부분의 회화에서는 둘째 부분이 주도적 역할을 하여 영향이 크다.그러나 이 시기의 지배계급은 극단적으로 전제되어 화가가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타격을 받는다.'추강독낚시도(。江独)'에 들어가 낚시꾼이 붉은 가운을 입는 것과 같이, 벼슬아치에 대한 모독으로 몰려 박해를 받았다.이에 지배계급은 의식적으로 복고를 주창했고, 보통 화가들은 대부분 송인을 모방한 것으로 만족해 현실을 반영한 인물화와 풍속화가 더 쇠퇴했고, 문인의 그림은 사의, 수묵 쪽으로 계속 발전했다.하지만 민간의 회화 예술은 아직도 건전하게 발전하고 있다.유서 깊은 벽화 예술 외에도, 지면 삽화와 민간 연화는 무명 2대의 희곡, 소설의 성취로 인해 그것의 발전과 번영에 유리한 조건을 만들었기 때문에, 활기찬 발전을 이루어 명대의 회화 예술에 수송되었다.
명대의 인물화는 만력년 동안 정운붕 오빈이, 그 뒤에는 수사년 동안의 진홍준 최자충이 있다.진 씨는 공산수화(工山水画)를 겸하고 있으며, 인물 조형이 기고(奇)적이고 필법이 원건하여 일가를 이루었으며, 최씨와 함께 '남진북최(南陈北"。)'로 불렸다.민인은 일찍이 고래의 채색 초상화를 그렸는데, 유파가 매우 넓고 심원하다.특히 진홍준은 당송화의 명적을 베끼는 데 베테랑이자 고수여서 감정 전문가라도 분간하기 어렵다.
명대의 산수화의 특징은 여러 화파가 잇따라 탄생했다는 점이다.초기 절강 화가 다이진(戴江。)으로 대표되는 '저장파' 산수화가 주류를 이루었고, 작품 대부분이 웅장하고 힘차고, 분방하며 기백이 있었다.멤버로는 오위와 왕신도 있다.명대 중반 심주와 제자 문정명 등은 주로 원사가의 그림 전통을 계승해 비슷한 스타일의 소주 출신들로 오파("。)라고 부른다.내년 중반 이후 저장파 대신 '오파(吴)'가 자리를 잡았다.오파는 제자도 많고 영향도 크다.동치창은 명대 후반에 중요한 '오파'인 산수화가이자 서예가로 서법을 썼기 때문에 명대 후반에는 많은 화가들이 그의 영향을 받았다
명대의 화조화 스타일도 다양한 화파보다 많다.연리파는 명대의 전기에 큰 영향을 받다가 갈수록 쇠퇴해 수묵사의파로 자리 잡았다.송원 시대부터 시작된 수묵 사의파의 발전은 명대 중후반에 이르러 일종의 풍상이 되었다.또 '사군자'라는 장르가 명대에 유행했다.문인 화가들 사이에서는 수묵으로 뜻을 쓰는 방법으로 난을 그리고 대나무를 그리는 것이 일반적인 풍상이 되었다.
벽화 예술은, 명대에는 과거만큼 번창하지 않지만, 노동 인민의 근면한 노력과 창조에 의해 계속 발전하고 있다.베이징 서교(西寺) 법해사(法海。)의 종교를 소재로 한 벽화가 가장 유명하며, 공려하면서도 분방한 특징을 지니고 있어 역대 벽화 예술의 훌륭한 전통을 계승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청대 초기, 즉 순치, 강희 시기의 회화는 사승과 지역 관계 때문에 파벌이 많았다.왕시민과 왕감은 명말 화가 동치창의 영향을 받아 회화 스타일이 비슷하고, 기품이 창윤한 것을 특징으로 하여 '루동파'라고 불렀으며, 왕현은 왕시민과 왕감의 제자로 잘 모사하였다.오력과 장수평도는 왕멍과 가까워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휘핑은 이후 화조화를 전문으로 그리며 섬세하고 단정한 스타일로 일가를 이루며 '상주파'로 불린다.사왕오구의 회화는 풍격이 각기 다르긴 하지만, 공통적인 경향이 있는데, 바로 그들은 옛 사람들의 회화를 배우는 것을 위주로 하고, 필묵 기술을 중시하고, 공력이 매우 깊고, 통치자의 눈도장을 받아, 청종으로 추앙되는 것이다.누동파와 우산파의 전포는 청대에 널리 퍼졌다.
청대 초기 화단에서는 '사왕오정(四王恽)' 외에도 독특한 업적을 이룬 명화가로 주하(——), 석도, 석계(石溪), 홍인(。)이 있다.그들은 모두 명대의 황실이나 유민으로 모두 한 집에서 출가하여 중이 되었다.석계산수는 대부분 붓으로 뭉툭하고 학원적으로 변화가 심하며, 석파구도는 더욱 기묘하고 필치가 준엄하다.두 돌을 모두 자기 것으로 만들다.석파는 또한 화훼와 난죽을 겸하고 있어 붓을 놓는 데 있어서 격식에 얽매이지 않고 매우 제멋대로이다.팔대산 사람들은 축 늘어지고, 아주 간소한 필치로 화조를 그리고, 석도의 묵법은 기본적으로 서위의 유법을 받아들였다.팔대산인의 산수는 또 동치창을 배워 구도상 동보다 조금 더 기이하고 험해졌다.이들 네 사람은 예술 창작에 있어 혁신과 창조, 전속으로 '사왕오정(派王的画)'파의 화풍과 싸우며 근대의 제백석 등 유명 화가들에게 영향을 미쳤다.'4승'과 함께 유명한 화가 공현, 푸산 등도 자신만의 격식을 갖추었고, 기성법에 얽매이지 않는 창조적 정신을 지녔다.
청나라 중기인 옹정(隆正)건륭(乾) 시대는 청 왕조의 소위 '성세(盛)'로, 한편에서는 더욱 엄밀한 통치와 문자가 쏟아져 나오고, 다른 면에서는 도시 상공업이 명대의 기초 위에서 계속 발전하고 활성화되어 회화 예술이 새로운 도시에서도 발전하였다.주로 청대 건륭년을 가리키며 양주 화단에서 활약한 비슷한 스타일의 화가 8명, 즉 왕토신, 황신, 김농, 고상, 이선, 정섭, 이방응, 나포 등을 가리킨다.이 여덟 화가는 대부분 화조화를 그리는 것을 위주로 하여 황라 두 사람이 가장 높은 성과를 거두었다.비록 성과는 다르지만 당시 정통적 지위에 있던 '사왕(王王)'의 그림에 구속받아 독창성과 개성을 강조한 표현들이 대부분이다.그래서 정통 화가에게 양저우팔괴(양저우팔괴)로 여겨졌다.
또 각 지역에는 금릉의 공현과 같은 유명한 산수화가들이 있어, 먹으로 길이를 볼 수 있고, 진미한 층이 매우 많아 남달랐다.당시에도 번린, 쩌우저, 오총, 고잠, 예힌, 후안, 셰빈 등 7명이 함께 있어 '금릉팔가'로 불렸다.7인의 화법은 비교적 짜임새가 뛰어나서 대부분 공 씨와 완전히 다르다.신안산수화가들은 대부분 마른 붓으로 텄지만, 약간의 물들임은 없고, 정오함, 다이모토타카, 히로히토, 매청 등은 대부분 황산의 풍경을 그리는 것을 좋아한다.가경도 광간의 산수화가로는 단도파라 불리는 장전崟, 반공수 등이 있고 항저우의 첸두가 모두 명오문 심문파에서 변하여 장 씨는 세세하고 중후하다.잠시 후 쑤저우 류옌중, 항저우 다이시의 산수화가, 전자는 우문에서, 후자는 우산에서, 다이씨 유화 소경, 류씨 인물화는 상당한 솜씨를 보였다.함풍동치 이래 임곰의 인물, 산수, 화훼학은 천홍완이 변했고, 조지겸은 화훼를 전공하고, 창창함을 진하게 가꾸고, 승허곡은 역필로 화훼를 그리는 등 이색이다.임이는 곰의 전파로 말년에 더욱 종횡무진하며 인물, 화조가 뛰어나다.오창석 화훼는 창력으로 유명하다.이들은 대부분 상하이에 거주하며 그림을 팔아 '해파(海派)'로 불릴 정도로 완전한 시스템이 아니다.
청대에 영향을 미친 화가들 중에는 위에 말한 사람들 외에도 유명한 화조화가인 장정석, 추일계가 있다.고봉한은 만년에 오른쪽 팔이 병폐되어 왼손으로 서화를 그리는 또 하나의 스타일이다.고치시역인으로 그림의 인물, 사녀, 불상에 능하며 화풍이 아름답고 기골이 있는 지금 우리가 볼 수 있는 홍루몽 인물도가 그의 대표작이다.우지정조병정페단욱은 초상을 잘 그리며 특히 사녀화에 능하다.이들은 대부분 깔끔한 서양화법, 중색, 중광영(。光影)을 구사하는 데 비해, 붓질을 중시하지 않아 중서융합의 새로운 국면을 보여주고 있다.
민간의 연화는 명대에 새로운 발전이 있어 청대 강희, 옹정, 건륭 연간에 이르러 절정에 이르렀다.쑤저우(桃州)의 도화마오(坞)와 톈진(天天津)의 류칭(。)과 산둥(山東)현의 양자(潍)는 청대 민간 연화의 주요 생산 중심지였다.연화의 제재 내용은 주로 봉건 지배계급을 위해 봉사하고 봉건사상과 봉건 미신을 선양하는 문신, 조왕신 같은 두 가지이다.다른 하나는 농사를 지어 생산, 춘우도, 인형화 등 현실 생활을 반영하고 인민 대중의 사상적 감정과 소망을 표현하는 것이다.후류는 우리 민족의 예술 스타일과 대중의 감상 습관을 잘 나타내기 때문에 대중들에게 가장 인기가 있다.
청대 회화 예술은 전반적인 추세로 보아 대부분 산수화와 화훼화에 편중되어 인물화가 현저하게 쇠퇴하였다.인물화에서는 초상화가 일반 인물과 단도직입적으로 구분돼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