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 무임승차 하지 말자
숭보사 (서울시 종로구 성균관로7길 1, 명륜3가 15-3)
고려인으로 처음 문묘에 배향된 안향이 집안의 노비를 면천(免賤 : 천민을 면하고 평민으로 복속 시킴)시켜주자, 이에 면천된 성균관 노복들이 안향 의 은덕을 보은하기 위하여 안향이 죽은 후, 사우를 건립하여 안향 외 11위를 추향하는 사당이다
원래 성균관의 일원이었으나 20세기 중반 이후 개인소유가 되었는데, 한때는 집 소유자 이름 <명륜동 김종국가(家)>을 따서 문화재 명칭을 삼기도 하였다
엄연한 개인집이라 내부 관람은 불가하며 그저 굳게 닫힌 빛바랜 대문과 돌담, 돌담 너머로 보이는 한옥 의 지붕만 바라 볼 수 있다
크게 두 채로 이루어진 집으로 남쪽 집은 살림채로 사당 관리인이 살던 공간이며, 북쪽 집은 사당을 지닌 사랑채이다
살림채는 'ㅡ' 구조로 정면 4칸, 측면 2칸이며, 중앙에 대청을 중심으로 서쪽에는 안방, 동쪽에는 건넌방을 두었다
안방에는 부뚜막이 있고, 대청 앞은 잔면이 개방된 토방이 있으며, 건넌방 앞에는 부억이 있는데, 원래 골방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랑채는 정면 4칸, 측면 1칸 규모로 뒷쪽에 신주단 을 두어 위패를 봉안했는데, 단 위에 닫집이 있다
사당 전면에는 모두 열 수 있는 4짝의 문이 있고, 좌우와 뒤쪽은 막혀있다
사당 안에 닫집과 위패가 그대로 남아있는 점과 옛날에 성균관의 부속 건물이었던 점 때문에 지방문화재의 지위(서울시 민속문화재 제21호)를 얻게 되었다
♤ 안향
고려의 학자 겸 정치가
동국 18현의 한 사람이자 헌번도에 성리학을 처음으로 도입한 대학자로 본관은 흥녕(興寧)이며 사호는 문성공(文成公)이다
양현고 터 (서울 종로구 성균관로 55, 명륜동3가 2-1)
성균관의 유생들이 워낙 많았으니 매일 매일 식자재 를 조달하는 일이 큰 문제여서 성균관 유생들의 식량 · 물품 공급을 담당한 기관을 만들었는데 그 기관이 양현고(養賢庫)이다
양현고의 재원은 토지와 노비였는데, 이 재원으로 학생들의 식량·등유 등의 물품조달과 석전제(釋奠祭)의 비용을 충당하였다
그러나 실제운영에 있어 학생들의 식량도 제대로 공급하기 힘들어 어물을 별도로 공급해주기도 하고, 기거하는 학생이 많을 때는 자신이 식량을 가지고 와서 공부하기도 하였다
조선시대 최고의 교육기관인 성균관과 그 주변의 마을 반촌에 대해 알아 보면 반(泮)이란 글자는 국립학교라는 뜻으로, 반궁(泮宮)은 성균관의 별칭이며 반궁을 감싸고 흐르는 물길이 반수(泮水), 그 주변의 마을을 반촌(泮村)이라 하고 그곳에 사는 사람들을 반민(泮民)이라 하였다
특히 성균관에 납품하는 쇠고기를 독점적으로 도살 납품하는 권한을 천민인 반민들이 갖게 되면서 반촌 은 부촌(富村)이 되며 특권을 누리는 마을이 되었다
노무현 살던 곳 (서울시 종로구 혜화로9길 24, 명륜동1가 22)
노무현 전 대통령은 1997년 서울시 영등포구 여의도 미성아파트에서 살다가
이곳(현대 하이츠빌라)으로 이사한 후, 2002년 민주당 후보로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이 빌라는 45평 규모로, 지하 창고와 주차장 등을 합쳐 65평을 사용했었다
대통령 당선 후 이곳을 떠나며 "꼭 6년 전 이사와 15대 보선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되고 짧은 해양수산 부 장관을 거쳐 마침내 대통령이 됐다"며 남다른 감회를 피력하기도 했다
흥덕사 터 (서울시 종로구 성균관로17길 20, 명륜1가 2-13)
태조가 상왕이 된 후 동부(東部) 연희방(燕喜坊)에 새로 궁전을 짓고 거처하였다
1401년(태종 원년) 1월 이곳에 있던 태조의 궁전을 절로 만들고 도통승(都統僧) 설오(雪悟)를 주지로 삼고 토지 200결과 노비 50명을 하사하고 절 이름 을 흥덕사(興德寺)라 하였다
1424년(세종 6년) 불교의 종파(宗派)를 정리하여 황화방(皇華坊)에 있던 흥천사(興天寺)는 선종 (禪宗)의 교종소(敎宗所)로, 연희방의 흥덕사는 교종(敎宗)의 교종소로 삼아 국가적인 성대한 의식 을 자주 치르게 되어 도성 안의 대사찰(大寺刹) 로 손꼽혔다
연산군 때 성균관과 흥덕사 일대를 폐쇄하여 짐승을 기르는 장소로 사용하였다
성종 때 월산대군(성종의 형), 강희맹, 서거정, 이승소, 성임 등이 한양의 아름다운 풍경 열개를 정해 한도십영(漢都十詠)을 지었는데, 그 중 하나가 흥덕상련(興덕賞蓮, 흥덕사의 연꽃 구경)이었다 하니 아름다운 절이었을 것이다
♤ 북묘 터 (서울시 종로구 성균관로17길 20, 명륜1가 2-13)
1882년 임오군란이 터지자 명성왕후가 장호원으로 줄행랑 치면서 답답한 마음에 도중에 만난 이씨 무녀(이성녀, 후에 진령군이 됨)에게 환궁시기를 물었고, 과연 무녀의 말대로 그 시기에 환궁하게 되자 왕후가 너무 기뻐 무녀가 바라는대로 이곳에 관우의 사당을 지어(1883년) 방향에 따라 북묘라고 하였다
북묘터(송시열 집터)에는 진령군의 권위를 보여주 는 하마비가 남아있다
1908년 순종의 칙령에 따라 전국의 국립 사당과 제단을 정리하면서 동묘(숭인동)에 모두 통합시키 고, 일제시대 때 비어 있던 북묘 건물과 토지를 민간 에 팔면서 이곳에 불교중앙학림과 동광학교가 들어 섰다
(동광학교는 불교계열 교육기관으로 후에 보성고등 보통학교에 통합되었다)
1894년(고종 31) 청일전쟁에서 일본의 승리로 친일 내각이 들어서자 개화파 새 정부는 진령군을 잡아 들여 옥에 가두었다가 진령군이 모아 놓은 억만금을 모두 몰수한 뒤 풀어 주었다
그녀는 북묘인 관우 사당에서도 쫒겨나 삼청골 오막살이에서 숨죽이고 근근이 살다가 이듬해 8월 을미사변 때 일본인들 손에 강력한 후원자였던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그 충격인지 따라 죽었다고 전해진다
(조선왕조실록을 기준으로 진령군이 어떤 최후를 맞았는지 정확하게 기록된 바가 없다)
1887년(고종 24)에 북묘에 비를 세웠다
비문에는 우리나라에서 관우를 기리게 된 경위, 북묘를 세우게 된 내력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글은 고종이 직접 짓고, 글씨는 민영환이 썻다
♤ 송시열 집터 (서울시 종로구 성균관로17길 37, 명륜1가 5-99)
조선 후기(효종 때)의 관료이자 학자인 송시열이 한성에서 벼슬 생활을 할 때 머물던 곳이다
송시열은 충청도 옥천군 태생으로, 일생을 주로 충청도에서 보냈기 때문에 한성에서 머문 기간이 그리 길지는 않았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송시열의 집이 있던 일대를 송시열의 성을 따서 '송동(宋洞)'으로도 불렀으며 송시열 집터임을 알리는 비석 '우암구기(尤菴舊基)' 가 남아있다
현재 그가 살았던 건물은 남아있지 않지만, 그가 '증주벽립(曾朱壁立)'이란 글씨를 새긴 바위가 남아있는데, '증주벽립(曾朱壁立)'은 '증자와 주자의 사상을 계승하여 우뚝 세우겠다'는 의미로, 글자 크기는 세로 약 60cm이다
(집터는 현재의 올림픽기념 국민생활관과 서울과학 고등학교를 포함하는 어마무시하게 넓다)
송시열은 자신의 뜻에 맞지 않으면 무조건 배척하여 서인 내부에서도 적을 많이 만들었다
♤ 중앙학림 터 (서울시 종로구 명륜1가 2-16)
1915년 11월 개교한 불교계의 고등교육기관으로 3·1운동을 비롯한 불교계 민족운동의 산실이다
과거 명륜당 북묘 자리로서 1915년 11월 개교 당시부터 1922년 4월 전문학교 승격을 요구하는 동맹휴학으로 휴교할 때까지 중앙학림의 교사로 사용되었다
중앙학림(中央學林)이 불교계 민족운동의 거점 으로 떠오른 것은 3·1운동 전야인 1919년 2월 28일 밤 한용운이 계동 43번지 유심사(唯心寺) 자신의 처소로 신상완 · 백성욱 · 김대용 · 오택언 · 김법린 · 김규현 등 중앙학림 학생들을 불러 독립선언서 3천매를 전달하고 시내를 비롯한 각처에 배포할 것을 지시하면서부터였다
한용운의 지시를 받은 학생들은 인사동 범어사 포교당으로 자리를 옮겨 구체적인 실행방안을 협의하고, 중앙학림 기숙사에 모여 독립선언서를 분배하였다
그리고 3월 1일 당일 서울시내 각 처에 독립선언서 를 배포하는 한편, 범어사 · 해인사 · 통도사 · 동화사 등으로 내려가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특히 신상완 · 백성욱 · 김대용 · 김법린 등 4명은 상해로 건너가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참여하였는데, 이들 가운데 신상완과 백성욱은 국내특파원으로 5월 중순 다시 귀국하여 불교계를 거점으로 지하신문『혁신공보』를 발행하고 자금을 모아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전달하는 등의 활동을 벌였다
뿐만 아니라 중앙학림 학생들은 1920년 창립된 조선불교청년회와 불교유신회에 참여하여 불교개혁운동에 앞장서기도 하였다
중앙학림 자리에는 그 뒤 1928년 4월 불교전수 학교가 2층 양옥 벽돌교사를 신축하고 문을 열었다
불교전수학교는 1930년 4월 중앙불교전문학교로 승격, 1940년 6월 혜화전문학교로 개칭, 1946년 9월 동국대학교가 되었는데, 이 자리는 1947년 9월 동국대학교가 중구 필동3가 26번지로 이전할 때까지 교사로 사용되었다
보성 옛터 (서울시 종로구 혜화로 63, 혜화동 1-1)
보성학교는 1906년 9월 23일 지금의 수송동에 해당하는 전동(현 조계사 터)에 조선인이 세운 근대적 고등교육이다
당시 대한제국 대장원경, 즉 황실의 재정을 담당 하는 대신인 이용익(李容翊)이 고종황제의 재정적 후원과 '보성(普成)'이라는 교명(校名)과 황실문장 인 '이화문(梨花紋)'을 교표(校表)로 하사받았으며, 이는 보성(普成)이라는 이름의 기원이 된다
[흔히 보성학교가 선교사의 도움 없이 민족자본으로 세워진 한국 최초의 민립사학이라고 하는데, 민족자본으로 세워진 최초의 사학은 양정의숙 (양정고등학교 전신)으로 보성학교 개교 1년 전인 1904년 2월에 세워졌다
다만 같은 재단이었다가 분리된 보성전문학교 (1905년 5월 5일 설립 - 고려대학교 전신)는 최초 의 민립대학이라고 할 수 있지만 보성중고등학교는 해당되지 않는다]
1917년 보성고등보통학교로 개칭되고 1924년 재단법인 조선불교 중앙교무원으로 소유가 이전되 어, 1927년 혜화동 1번지(현 서울과학고등학교 자리)로 이전하였다
1932년 보성전문학교(현 고려대)와 재단이 분리되 었다
1938년 조선교육령 개정으로 교명을 보성중학교로 개칭하고, 1945년 동성학원(설립자 전형필)에 이전 되어 1950년 5월 1일 신교육령에 의하여 보성고등 학교가 되었다
1989년 2월 서울시 송파구 방이동으로 교사(校舍) 를 이전하여 이곳은 옛터가 되었다
혜화동의 옛 보성고등학교 자리의 반은 서울과학 고등학교가, 반은 올림픽기념국민생활관이 차지하 고 있다
혜화초등학교 (서울 종로구 혜화로 32, 혜화동 13-1)
갑오개혁을 계기로 노비 신분에서 벗어난 반인층 (泮人·성균관에서 일하는 노비)은 근대 교육을 통한 신분 상승의 기회를 만들고자 1910년 1월 25일 종로구 명륜동2가 13번지(현 극장 동국 자리, 혜화로터리 근처)에 서울혜화초등학교의 전신인 사립 숭정의숙을 세웠다
(규모는 목조 건물 교실 2개와 명칭상 교무실인 방 1개 건물의 규모였고, 한 학년이 약 20명이었으며 그 당시 보통학교가 4년제 수업이었으므로 4학년 까지 있었고 수업 형태는 복식 수업으로 이루어졌 다)
1923년 1월 1일에는 사립숭정학교로 학교명을 변경하였고 1925년 6월 16일에는 사립숭정보통 학교로 정식 인가받았다
학생 수의 증가와 가중되는 운영난으로 허덕이다가 1926년 6월 30일 숭이공립보통학교로 인가받았다
1928년 4월 1일, 경성혜화공립보통학교로 학교명 을 바꾸었으며 당시의 규모는 총 6개 학급이었다
(이로써 '혜화'란 이름이 처음 등장하게 된 것이다)
1930년 교사(校舍)를 현 위치로 이전하였다
1941년 4월 1일 다시 개칭되어 경성혜화공립국민 학교로 변경되었다
해방이 되고 얼마 후인 1947년 9월 서울혜화국민 학교로 학교명을 변경하였으며 1950년 6월 25일 북한 남침으로 휴교하였다
1951년 7월 11일 미수복지구인 본교 교사(校舍)를 사용하여 혜화, 효제, 창경국민학교를 합한 동부종합국민학교로 개교하였다
1952년 10월 20일 창경국민학교가 분리되어 나갔고 두달 후인 1952년 12월 29일 효제국민학교 도 분리되어 나가게 되어 혜화국민학교 단일학교가 되었다
1969년 현 국제고등학교 자리를 확보하고 공사를 시작하여 1972년 3월 1일 신교사로 이전하였다
(이곳에는 전농동에 있던 동대문여자고등학교가 1973년 3월 1일 이전하여 와서 혜화여자고등학교 로 개명하였다)
1996년 3월 1일 서울혜화초등학교로 교명을 변경 하였고 혜화여자고등학교가 2000년 4월 1일 강북구 수유리로 이전하여 간후 2002년 3월 1일 현 위치로 다시 이전하였다
장면 가옥 (서울 종로구 혜화로5길 53, 명륜1가 36-1)
1937년에 신축해서 장면 전총리가 사망할 때까지 살았던 가옥으로 장면의 부인 김옥윤의 넷째 오빠인 건축가 김정희(金貞熙)가 설계한 집이다
안채, 사랑채, 뒷방채, 경호원실 등 4채 건물이 있다
경호원실은 지하실만 있던 것을 지상부분을 증축한 것이고, 안채 화장실 쪽도 나중에 증축한 것이다
안채가 처음에는 ‘ㄴ자’형태였으나 화장실 쪽이 증축되면서 ‘ㄷ자’형태가 됐다
그러나 집 형태나 구조는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
부속 건물로는 경호원실과 뒷방채가 있다
경호원실은 지하층이 있다
보고서에 의하면 과거 방공호 용도로 썼을 것이라 한다
한식과 일식 그리고 서양식의 건축 양식이 혼합되어 있는 매우 독특한 양식을 보여주는 보기 드문 가옥 이다
장면은 일제강점기에 천주교의 교육운동과 문화운동을 이끌었고
해방 후에는 대한민국 건국에 일익을 담당하였으며,
국무총리(2대, 7대) 및 부통령을 역임한 정부요인 으로,
장면이라는 역사적 인물의 발자취가 남아 있고
해방 이후 정치사의 중심지였다는 점과 1930년대 주거양식을 보여주는 보기 드문 건축물이다
♤ 장면의 창씨개명은 다마오카 쓰토모(玉岡勉)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