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 26일 밤 8시,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IFC쇼핑몰 내 CGV 영화관. 여름방학 기대작 중 하나인 ‘드래곤 길들이기 2’ 상영관 앞에는 애니메이션을 즐기는 초·중등학생 관객이 상당수 섞여 있었다. 엄마 손을 잡고 영화관으로 나들이 나온 초등학교 5학년 이윤수군은 “집에 있으면 더워서 엄마 아빠와 함께 나왔다”고 말했다. 이 영화의 러닝타임은 101분. 영화가 끝나면 밤 10시에 가깝다. 초등학교 5학년에게는 너무 늦은 시간이 아닐까. 이군은 “평소에도 11~12시 사이에 잔다”면서 “오늘은 금요일이니까 더 늦게 자도 된다”며 신난 표정을 지었다. 이군의 평소 기상시간은 아침 7시30분이다.
7월 28일 오후 1시, 서울 성동구의 한양대 중앙도서관. 방학이지만, 취업이며 시험을 준비하는 학생들로 도서관 안이 꽉 차 있었다. 막 점심때를 넘겨서인지 잠을 쫓는 학생들도 여기저기서 보였다. 잠시 동안 엎드렸다가 고개를 흔들면서 잠을 깨려고 노력하다가 결국 밖으로 걸어나온 대학생 최재현(가명·22)씨를 만나 물어보았다. 최씨는 이날 새벽 2시에 잠들었다고 했다. “여자친구랑 카톡을 하다가 2시쯤 잠들었어요. 평소에도 이르면 새벽 1시, 늦으면 새벽 3~4시에 잠듭니다.” 주변 친구 중에서도 그 시간에 잠드는 친구들이 꽤 많단다. 그렇지만 최씨는 방학에도 ‘규칙적인 생활을 위해서’ 아침 7시에 일어나 오전 9시 수업을 듣는다. “저번 겨울방학 때는 계절학기 수업을 안 들었는데, 정말 해가 중천에 떠야 일어났어요. 좀 성실하게 살아보려고 아침 수업을 듣는데, 많이 피곤합니다.”
- 지난 7월 30일 자정 무렵에도 서울 마포구 홍대앞 번화가는 잠을 잊은 사람들로 붐볐다./사진=한준호 영상미디어 차장대우
7월 29일 오후 7시 서울 중구 북창동 먹자골목. 저녁을 먹으러 온 직장인들로 꽉 차 있는 한 한식집에서 보통 저녁식사를 몇 시에 하는지 물어봤다. 직장인 김지혜(29)씨는 “저녁 7시가 가장 평균적인 식사시간”이라고 대답했다. 옆에 앉아 있던 김정균(41)씨는 “퇴근하고 집 밥을 먹으면 밤 8~9시, 회사에서 먹으면 아무리 빨라도 6시 반”이라고 답했다. 저녁을 먹고 나서는 몇 시쯤 잠이 들까. 김지혜씨는 “아주 피곤한 날이 아니면 12시는 넘어야 잠이 든다”고 대답했다. 같은 식탁에 앉아 있던 직장동료 5명 중에 보통 자정 전에 잠든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 직장의 출근 시간은 아침 9시였다.지난 7월 21일 영국신문 파이낸셜타임스가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통계를 인용해 보도한 바를 보면 한국인의 평균 수면시간은 7시간49분으로 18개 조사 국가 중 최하위를 기록했다. OECD 평균 수면시간은 8시간22분이다. 성인들의 평균 수면시간은 더 짧다. 한국갤럽이 지난해 2월부터 12월까지 전국 성인 남녀 1만2959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평균 수면시간은 6시간53분인 것으로 드러났다. 6시간 미만으로 자는 사람도 43%에 달했다.구체적으로 보면 월별로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지난해 6월을 기준으로 한국인은 평균 밤 11시36분에 잠들어 오전 6시26분에 일어났다. 밤 9시에 깨어 있는 사람은 전체의 96%이고 점차 줄어든다. 하지만 자정이 돼서도 53%의 사람들이 잠을 자지 않았다. 자정에서 새벽 1시 사이에 잠든다는 사람이 32%에 달해 새벽 1시가 되면 79%의 사람이 잠들기는 하지만, 10%의 사람은 새벽 2시가 되어도 잠들지 않았다. 60세 이상 노인은 평균 7시간이 넘게 잠을 잤지만, 경제활동이 가장 활발한 30~40대의 경우는 각각 6시간49분, 6시간30분 정도밖에 자지 않았다.
의사들이 권고하는 적정 수면시간이 7시간30분 정도라는 점을 감안하면 우리나라의 평균 수면시간은 이에 미치지 못해 ‘잠이 부족한’ 사회라고 볼 수 있다. 밤 10시, 11시에 잠드는 성인은 극히 적을 뿐더러 이때부터 “하루가 시작”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많다.서울 강남역 역세권에서 술집을 운영하는 임영균(37)씨의 매출 기록을 보면, 지난 7월 26일 토요일의 경우 가장 많은 매출을 올린 때는 밤 11시에서 새벽 1시 사이였다. “보통 두 시간은 앉아 있다가 간다. 그걸 생각해 보면 손님들은 저녁 9시에서 11시쯤 많이 찾아온 거다.” 임씨가 운영하는 술집은 새벽 5시까지 영업한다. 그리고 다시 오후 5시에 문을 연다. “밤 12시, 오전 1시에 집에 가는 손님들이 ‘출근 어떻게 하느냐’라고 걱정하는 것을 들으면서, 저도 하품을 해요. 늘 잠이 부족한 건 손님들이나 저나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왜 우리는 늦게 자고, 적게 잘까. 쉽게 꼽히는 원인은 과다한 업무량과 긴 근무시간이다. 파이낸셜타임스 역시 우리나라 평균 수면시간이 OECD 전체 국가 중 꼴찌라는 사실을 보도하면서 원인을 긴 근무시간으로 꼽았다. 그리고는 “한국은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일하지만, 노동생산성은 OECD 평균의 66%로 미국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지난해 우리나라 직장인의 평균 근무시간은 연 2090시간으로 OECD 국가 중 2위다. 일 평균 근무시간으로 따지면 10시간30분씩 근무하는 셈이다. OECD 평균 근무시간은 1776시간이다.이 통계대로라면 오전 9시에 출근하는 직장인이 퇴근하는 시간은 점심시간 1시간을 포함해 밤 8시가 되는 셈이다. 우리나라 직장인의 평균 통근시간이 55분이라는 조사 결과를 감안하면 밤 9시가 돼서야 집에 도착하게 된다. 잠시 휴식이라도 취할 참이면 자정이 가까워 오니 기껏 해봤자 6~7시간밖에 잘 수 없다는 결과가 나온다. 업무 시간이 길어지는 이유는 단순하다. ‘오래 일하는 것=성실함’으로 인식돼 왔기 때문이다. 또 경쟁에서 살아남으려면 ‘부지런히 일해야 한다’는 인식이 있기 때문이다.강승훈 LG경제연구원 책임연구원은 “우리 기업은 부지런한 비효율에 빠져 있다”며 “비효율은 성실하다”고 지적했다. “우리는 경쟁력을 갖춘다는 명목 아래 오랜 시간 일하는 습관을 길러왔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속도가 빠른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열심히 일하면서 속도는 더딘 경우가 많은데, 의사결정을 미루는 와중에도 끊임없이 보고서를 고치고 회의를 반복하면서 의미 없는 업무만 늘어나는 것입니다.” 만약 한 직장인이 할 일만 하고 일찍 퇴근해 집에서 충분한 수면을 취하면 어떻게 될까. “그 사람이 얼마나 효율적으로 일하는지 따지기보다 ‘농땡이를 부린다’고 지적할 테지요. 충분한 수면은 게으름과 동의어입니다.”학생 시절 오래 공부하고 늦게 자는 생활 습관이 성인이 되어서까지 이어진다는 것은 충분히 추측 가능한 이야기다. 김영선 서울과학종합대학원 학술연구교수는 저서 ‘과로사회’를 통해서 “장시간 노동은 능력, 지위, 자긍심, 우월감, 유능함, 안정감, 아버지다움, 남편다움의 상징으로 연결되기도 한다”고 말했다. 홍승철 가톨릭대 교수는 이 말에 동의하며 “수면은 습관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며 “장시간 학습, 장시간 노동이 장려되는 우리 사회에서는 ‘잠을 줄여서 일한다/공부한다’는 것은 칭찬받는 일”이라고 비판했다. 효율성보다 성실성이 강조되는 우리 사회에서는 ‘자는 것’은 나쁜 일이고 ‘잠을 줄이는 것’은 좋은 일이다.그러면서 밤에 깨어 있는 것이 바람직하고 더 좋은 일로 여겨지기 시작했다. 아예 24시간 영업하는 가게가 생기고, 밤에 움직이는 사람을 위해 심야버스가 등장했다. 벌써 등장한 지 7~8년이 되는 ‘호모 나이트쿠스(Homo Nightcus·밤에 주로 활동하는 사람)’라는 말은 ‘남들보다 긴 하루를 쓰는 사람’ ‘시간을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사람’이라는 뜻처럼 통하게 됐다. 취업준비생 이재련(26)씨는 매일 밤 10시에 서울 강남구 논현동의 24시간 영업하는 카페에서 영어 스터디 모임을 가진다. “처음에는 온라인으로 출석 체크, 과제 체크하는 스터디 모임으로 시작했는데 3개월쯤 운영하다 보니 ‘직접 만나서 문법 공부도 하자’는 말이 나왔어요. 아직 졸업을 안 한 친구도 있고, 직장에 다니는 사람도 있어서 자연스럽게 밤에 모이게 됐죠.” 한 시간 공부하고 집에 가는 길이 피곤하지 않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이재련씨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운동하고 돌아오는 기분 있죠? 그것처럼 밤에 공부하고 돌아가는 기분도 상쾌해요”라고 답했다.수면전문가인 사이먼 윌리엄스 영국 워웍대학 교수는 지난해 학술지 ‘사회과학과 의학(Social Science&Medicine)’에 ‘의료화인가 맞춤화인가? 24시간 깨어있는 사회의 수면, 기업 그리고 향상(Medicalisation or customisation? Sleep, enterprise and enhancement in the 24/7 society)’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기고하며 ‘잠’은 이제 해결하고 관리해야 할 문제로 바뀌었다는 점을 짚었다. 8월부터 서울시는 공무원들의 낮잠 시간을 한 시간 허용하기로 방침을 정했다. 윌리엄스 교수는 기업이 낮잠을 허용하는 것과 각성제 사용이 증가하는 것 모두 수면은 ‘밤이 되었으니 잔다’는 단순한 차원을 넘어서 통제할 수 있는 영역이 됐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사례라고 설명했다. 유희를 즐기는 사람이 늘어났다고만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 자정이 가까운 시각. 새벽까지 영업하는 카페에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는다./사진=한준호 영상미디어 차장대우
물론 우리 사회 특유의 ‘밤에 놀며 마시는’ 음주 문화도 적은 수면시간을 부채질한다. 서울시가 지난 1월 지역사회건강조사 통계를 토대로 발표한 자료에 의하면 서울 시민 중 월 1회 이상 술을 마신 경험이 있는 월간 음주율은 59.1%로 나타났다. 주 2회 이상 맥주 5캔(여자는 맥주 3캔) 이상 마신 남성도 16.4%에 달했다. 음주 횟수가 많은 이유는 대인관계 혹은 사회생활 때문이다. 삼성경제연구소가 조사한 결과를 보면 음주 이유의 가장 큰 부분은 “사회에서 모임이 있기 때문”(남자 74.5%, 여자 69.9%)이다. 회식 역시 음주 이유로 꼽혔다. 남자 직장인의 77.4%, 여자 직장인의 70.4%가 “회식 때문에 술을 마신다”고 답했다.수요와 공급 중 어느 것이 먼저인지에 대한 문제는 있겠지만, 600만명에 육박할 정도로 많은 자영업자 수 역시 불야성의 풍경을 만드는 데 일조했다. 자영업자의 사업소득은 2012년 4425만원에서 지난해 4397만원으로 줄어들었다. 현대경제연구원이 조사한 바로는 소득 감소의 가장 큰 원인은 ‘동종 업종 간의 경쟁’(41.8%)이고 ‘대형 및 온라인 업체와의 경쟁’(22.9%)이 뒤를 이었다. 소득이 줄어들면서 부채 규모는 점점 커지고 있는데, 2012년 1327만원이던 자영업자의 평균 대출액은 지난해 1678만원으로 크게 늘었다. 특히 혼자 운영하는 영세 자영업자의 금융대출은 6987만원에 달했다.네덜란드 델프트공대 OTB인공환경연구소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강빛나래씨에 따르면 네덜란드에는 가게의 영업시간을 오전 6시부터 밤 10시까지로만 제한하는 유통업 영업시간법(Winkeltijdenwet) 개정안이 있다. 네덜란드의 경우가 아니라도 유럽 여러 국가에서는 도심 번화가가 아니면 밤에 불빛이 환한 곳이 없다. 강빛나래씨는 이 차이를 “우리나라 영세 자영업자는 먹고살기가 어렵기 때문에 생기는 일”이라고 설명했다. “24시간 해장국집에 들르는 손님은 또 다른 곳에서 24시간 일을 하는 근로자입니다. 쉽게 말하면 네덜란드를 비롯해 유럽 국가에서 자영업자들이 밤늦게까지 일하지 않는 이유는 우선 밤늦게까지 일하는 근로자가 적고 연장 영업을 하지 않아도 자영업자가 먹고살 수 있는 환경이 있기 때문입니다.”그러나 우리 사회에서 늘어나는 부채와 줄어드는 소득 문제를 타개하기 위해 자영업자들이 선택한 방법의 하나가 영업시간을 늘리는 것이다. 서울 강남구 논현동에서 24시간 영업하는 카페를 운영하는 윤정희(가명·41)씨는 “처음 가게 문을 열 때만 하더라도 24시간 영업할 생각은 없었다”고 말했다. “1년 전쯤에 100m 떨어진 카페가 24시간 영업을 시작했는데 지나갈 때마다 봐도 손님들로 차 있더라고요. 신기한 것이, 밤 11시까지 영업할 때는 10시만 돼도 가게가 한산해졌는데요. 저희도 24시간 영업을 시작하고 나니 손님이 끊이지 않았어요.” 윤씨는 24시간 영업 이후 매출액이 20% 정도 늘었다고 한다. “월세를 내고 나서도 돈이 조금 남는 수준이 되니 좀처럼 24시간 영업을 포기하지 못하겠어요.”새벽 1시 윤씨의 카페에는 회식을 마치고 커피 한잔하기 위해 찾은 직장인 네 명과 밤늦게까지 토익 책을 붙잡고 씨름하는 대학생, 잠이 오지 않아 친구와 만나 수다 떨고 있다는 40대 주부 두 명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었다. 주부 서정선(43)씨는 “잠 못 자는 건 별문제가 아니다”고 말했다. “내일 아이들, 남편 아침밥 차리려면 새벽에 일어나야 해요. 3~4시간 자려나? 많이 자면 뭐해요. 게을러지기만 하지.”
[출처] 본 기사는 프리미엄조선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http://premium.chosun.com/site/data/html_dir/2014/08/08/2014080802276.html?csma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