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7일 오늘의 역사
2019년 디즈니 애니메이션 ‘겨울왕국 2’ 개봉 17일 만에 1,000만 관객 돌파(역대 27번째 외화 8번째),
한 해 최다 1,000만 영화 ‘극한직업’ ‘어벤저스:엔드게임’ ‘알라딘’ ‘기생충’ ‘겨울왕국 2’
2019년 민주화·통일운동가 오종렬 세상 떠남(82세)
2019년 손흥민(토트넘 홋스퍼) 영국 프리미어리그 번리FC와의 경기에서 70m 질주 골 성공, FIFA ‘2019년 10대 골’로 선정, 영국 스포츠매체 ‘디 애슬레틱’ 올해의 골 선정
2018년 덕수궁 돌담길 59년 만에 모두 열림
2018년 세월호 유가족 불법사찰을 총괄 지휘한 혐의 받던 이재수 전 기무사령관 투신 자살
2015년 유엔 인권이사회 2016년 의장국에 한국 선출
2013년 북한 억류 미국인 메릴 뉴먼 추방
뉴먼은 2013년 10월26일 북한 여행을 마치고 출국 비행기에 올랐다가 체포됐다. 중공군의 한국전 개입 당시 황해도 구월산 일대에서 후방 교란 작전을 펼쳤던 구월산유격대 고문관이었던 뉴먼이 동료 유격대원들의 북한에 남아 있는 가족과 친척을 찾아달라며 여행 가이드에게 집주소가 적힌 쪽지를 건넨 게 체포 이유였다.
북한에 억류됐던 한국전쟁 참전군인 출신 미국인 메릴 뉴먼(85)이 7일 추방 형식으로 풀려났다. 체포된지 42일 만이다. 북한은 조선중앙통신을 통해 “본인이 사죄하고 뉘우친 점과 그의 나이와 건강상태를 고려했다”며 뉴먼을 인도주의적 견지에서 추방했다고 발표했다.
2009년 12월 7일 세계 최초의 상업용 민간 우주 관광선 공개
스페이스십2. 2009년 12월 7일 영국의 버진 갤럭틱 우주항공사는 세계 최초의 상업용 민간 우주 관광선 ‘스페이스십2’를 공개했다.
20만달러(약 2억3000만원)를 내면 누구나 우주여행을 할 수 있는 날이 눈앞에 다가왔다.
미국 캘리포니아주 모하비 사막에서 공개된 스페이스십2는 선체 길이 18.3m에 날개 길이 8.2m의 소형 항공기 형태다.
조종사 2명과 승객 6명을 태우고 무중력 상태를 체험할 수 있는 110㎞ 고도(高度)까지 비행할 수 있다.
일반 우주선이 지상에서 로켓 방식으로 발사되는 데 반해 스페이스십2는 활주로에서 이륙하는 모선(母船)에 실려 올라간다.
15㎞ 상공에 이르면 모선 ‘이브(Eve)’와 분리되면서 자체 엔진을 점화한다.
시속 4000㎞ 속도로 110㎞ 고도에 올라 약 5분간 무중력 상태를 체험할 수 있다
. 이후 양 날개를 이용해 활강하면서 활주로에 착륙한다. 총 비행시간은 2시간 30분, 요금은 20만달러.
이 우주선을 제작한 미국의 항공기 디자이너 버트 루턴(Rutan)은 지난 2004년 세계 최초의 민간 우주선 ‘스페이스십1’을 개발, 두 차례나 무중력 고도까지 비행하는데 성공했다. ‘스페이스십1’의 후속 모델로 제작된 ‘스페이스십2’는 선체 길이가 2배로 길어지고 정원도 3명에서 8명으로 늘어났다.
2008년 봉산탈춤 보유자 양소운씨 별세
중요무형문화재 제17호 봉산탈춤 보유자 양소운(梁蘇云·84)씨가 2008년 12월 7일 오후 별세했다. 황해도 재령 출신인 고인은 1945년 봉산탈춤을 배운 뒤 6·25 때 월남해 인천에 정착해서 봉산탈춤을 재현했다.
사당·미얄·무당 역을 맡아 왔으며, 1967년 보유자로 인정받았다. 봉산탈춤은 황해도에서 단오날 밤에 행해졌던 민속놀이다.
2007년 서해 태안반도 기름 유출 사고
2007년 12월 7일 오전 7시 30분께 충남 태안군 만리포 북서방 5마일 해상에서 항해중이던 홍콩선적 14만6천t급 유조선 ‘헤베이 스프리트’ 와 모 중공업 소속 해상크레인을 적재한 1만1천800t급 부선이 충돌하면서 유조선 왼쪽 오일탱크 3개에 구멍이 나 1만5천t의 원유가 해양으로 유출됐다.
이 사고로 인한 원유 유출량은 국내 최악의 해양오염 사고였던 1995년 ’씨프린스호 사고’ 당시 원유와 연료유 5천35t이 유출됐던 것과 비교하면 3배 규모다. 당초 이번 사고는 인천대교 공사작업을 마친 해상크레인을 2척의 바지선을 이용, 경남 거제로 예인하던 중 한 척의 바지선 와이어가 끊어지면서 중심을 잃고 유조선과 충돌, 발생한 것으로 알려졌다.
2002년 로또 복권 등장
2000년 2차대전때부터 작전에 참가했던 미국 전함 USS위스콘신호 퇴역
2000년 2000년 일본군 성 노예전범 국제법정, 일본에서 개막
일제 군대 위안부 동원에 대한 일본 정부와 일왕의 책임을 묻는 `2000년 일본군 성(性)노예전범 국제법정`이 2000년 12월 7일 일본 도쿄에서 개막됐다. 이날 `구단회관`에서 열린 전야제와 개막식에는 각국 대표단과 판사·검사단, 피해 여성들과 각국 시민단체 대표 등 1000여명이 참석해 일본 정부의 반성과 보상, 재판 참여를 촉구했다.
법정에 참석한 약 80명의 위안부 할머니들은 서로 아는 얼굴을 반갑게 맞으면서도 일본군의 만행에 대한 얘기가 나오면 흥분하며 일본을 규탄했다. 이 법정은 일본군이 자행한 군대 위안부 제도 운영을 `전쟁범죄`로 규정, 일본 정부와 일왕 등 가해자들에 대한 형사적 책임을 묻기 위한 상징적인 국제인권법정이었다. 특히 지금까지 전쟁책임에서 피해 있던 일왕을 직접 피고로 거명, 책임을 묻는다는 데 의의가 컸다. 옛 유고, 르완다 전범재판과 같은 강제성은 없지만 30개국 이상의 관계자들이 참석하는 이번 법정은 `법적 책임`을 강조한다는 측면에서 철저히 재판절차를 따랐다.
12일 폐막된 마지막날 법정에서 가브리엘 맥도널드(미국. 전유고전범국제법정 재판장)은 태평양 전쟁 당시 위안부 운영에 관한 히로히토 일왕과 일본 정부의 배상과 사죄를 판결했다. 이번 판결은 국가적 합의에 의한 공식 국제법정의 판결이 아니기 때문에 일본 정부가 이행해야 할 의무는 없으나, 50여개국의 권위있는 인권 전문가들이 참석했다는 점에서 큰 압력으로 작용했다.
1999년 초기백제 유일한 문자기록 풍납토성 토기에서 발굴
서울 송파구 풍납토성에서 1999년 12월 7일 ‘대부(大夫)’ 라는 명문이 새겨진 한성백제시대(서기 전후-서기 5세기 후반)의 토기가 발견됐다. 한신대 박물관은 ‘이 토기가 초기 백제시대의 유일한 문자 기록이고, 4~5세기경으로 추정되는 토기를 비롯한 각종 유물이 250상자 분량이 수습된 것으로 보아 이곳이 백제의 도읍지였으며, 풍납토성이 한성백제의 왕성이었음을 뒷받침하고 있다’ 고 전했다.
이미 지난 9월 조사에서 풍납토성은 늦어도 서기 3세기 중엽에 축조됐으며, 축성방식으로 미루어 강력한 중앙집권국가를 이뤘을 것이라고 학계의 검증을 받은 바 있다. 유적지에서는 백제시대 토기를 비롯 당시 제사용으로 쓰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말의 아래턱뼈, 청동기시대 유구석부, 대팻날이 출토됐으며 외래유물로는 중국제 도기, 자기편과 신라와 가야제로 판단되는 경질의 뚜껑이 발견됐다.
1999년 묘지법 개정안 통과-매장 및 묘지 등에 관한 법률 개정안 국회 법사위 통과
국회 법사위는 1999년 12월 7일 전체회의를 열고 2001년 1월부터 묘지의 사용기한을 최장 60년으로 제한하고, 개인묘지 면적을 대폭 축소하는 것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한 매장 및 묘지 등에 관한 법률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법안은 지금까지 사실상 영구적으로 사용할 수 있었던 개인묘지나 집단묘지(공동묘지)에 ‘시한부 매장제\’를 도입, 15년씩 3차례에 걸쳐 사용기한을 연장한 뒤 이후엔 반드시 납골당으로 옮기도록 했다. 법안은 또 지금까지 24평까지 사용이 가능했던 개인묘지는 9평으로, 공동묘지는 기당 9평에서 3평으로 최대 묘지면적을 축소했다. 개정안의 국회 법사위 통과는 그동안의 매장 중심의 장묘 문화를 화장 중심으로 바꿀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법안은 각 자치단체로 하여금 1채 이상의 납골당을 의무적으로 조성토록 하는 한편 납골당과 화장장 설치를 허가제에서 신고제로 전환했다. 법안은 이밖에 법적 묘지허용 면적을 지키지 않을 경우의 처벌규정도 현행 1년이하 징역이나 200만원 이하의 벌금에서 2년이하 징역 또는 1천만원 이하 벌금형으로 대폭 강화했다.
1999년 국내서 에이즈 치료 백신 개발 성공
국내 연구진이 에이즈(AIDS)를 예방하거나 치료할 수 있는 DNA 백신 개발에 성공했다.
이 DNA 백신은 에이즈 바이러스 중 병을 일으키지 않는 무해한 유전자를 인체에 주입해 체내에서 자연스럽게 항 에이즈 백신이 만들어지도록 만든 것이다.
포항공대 생명과학과 성영철(43) 교수팀은 7일 “이 백신법을 원숭이에 적용한 결과, 뛰어난 성과를 보였다”며 “앞으로 6개월 이내에 사람을 대상으로 한 임상실험에 들어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연구팀은 DNA 백신을 생쥐 실험을 거쳐 2년 전부터 독일 영장류동물센터(DPZ)에 의뢰해 11마리의 원숭이를 4개 그룹으로 나눠 실험을 했다.
이 중 백신 접종을 하지 않은 그룹과, 기존의 2종류 DNA 백신을 투여한 원숭이 그룹들은 에이즈 바이러스를 주입하자 모두 감염됐다.
반면 성 교수팀의 DNA 백신을 맞은 그룹은 보통 에이즈 실험 때보다 10배나 많은 에이즈 바이러스를 투입했으나, 4∼20주 사이에 에이즈 바이러스를 모두 퇴치하고 면역기능 지표인 CD4 T임파구가 정상으로 돌아왔다고 연구팀은 밝혔다.
성 교수팀은 사람에 대한 임상실험과 함께 제넥신, 동아제약 등 국내 제약사와 공동으로 실용화 연구와 차세대 에이즈 DNA 백신 벡터(운반체)를 개발할 계획이다.
1998년 김대중 대통령이 주재한 정-재계 간담회서 5대 재벌 구조조정 합의
1995년 수도권신공항고속도로 착공
1995년 갈릴레오호, 최초로 목성탐사 성공
1989년 발사된 이후 37억㎞를 비행한 우주선 갈릴레오호가 1995년 12월 7일 목성 궤도에 진입, 우주탐사의 새 시대를 열게 됐다. 목성 대기권에 진입한 3백38㎏짜리 원추형 탐사정이 목성주변을 돌고 있는 모선 갈릴레오호에 보낸 데이터는 우주생성의 신비를 알려줄 수도 있는 자료들이었다. 목성대기에 대한 탐사가 마침내 시작된 것이다.
이 순간 미캘리포니아주 패서디나의 제트추진연구소(jpl) 과학자들은 일제히 환호성을 지르며 박수를 쳤다. 목성 탐사계획이 수립된 지 18년, 갈릴레오호가 발사된 지 6년만의 일이었다.
약 2시간뒤 목성대기권에 19만㎞지점까지 근접했던 갈릴레오호도 엔진을 점화하고 원래 위치로 안전하게 이동했다. 탐사정은 이날 시속 17만6백㎞(민간 항공기의 약 2백배) 속도로 목성 대기권에 진입한뒤 낙하산을 펴고 다시 시속 2백㎞로 목성대기권으로 낙하했다. 갈릴레오는 75분동안 탐사정으로부터 데이터를 수신했다.
임무를 마친 탐사정은 지구대기보다 20배 높은 목성대기와 마찰하면서 발생하는 1만5천도의 열에 의해 장렬하게 녹아 사라졌다. 무게 3t, 높이 6m의 갈릴레오는 지난 1989년 10월 18일 발사된 이래 쉴새없이 우주를 여행했다. 목성탐사에 참여한 과학자는 1만명, 16억달러의 자금이 투입됐다. 강력한 자기장과 방사능으로 둘러싸이고 대기층도 수소 헬륨 등 태양과 유사한 원소로 구성된 목성을 탐사하는 것은 화성과 금성탐사와는 달리 매우 어려운 프로젝트였다.
1994년 정부,삼성그룹의 승용차산업 신규진출을 허용키로 발표
1994년 서울 아현동 도시가스 폭발사고
서울 마포구 아현3동 도로공원 지하 도시가스 중간공급기지에서 1994년 12월 7일 가스배관이 폭발하면서 화재가 발생, 인근 주택가 일대가 불바다로 변하는 최악의 가스폭발사고가 발생했다.
폭발음과 함께 불기둥이 50m이상 치솟으면서 주변 50m내의 가옥 1백50여채가 전소되거나 파손됐다. 또 차량 17대가 전소되고 반경 300m내 빌딩의 유리창 1백여장이 폭발에 따른 충격으로 깨졌으며 불길은 누출된 가스를 따라 순식간에 확산, 왕복 8차선의 마포로 건너편까지 번졌고 아현동-노고산동 일대가 검은 연기와 유독가스로 뒤덮여 주민들이 긴급히 대피했다. 소방차 60여대가 출동, 진화작업을 벌였으며 119 응급구조단 차량 10여대와 구조헬기 2대가 현장에 도착, 구조작업을 벌여 불길은 3시53분쯤 진화됐다.
이날 인명피해는 사망4명, 실종9명, 부상65명으로 집계됐고 재산피해는 가옥 90여채, 차량 17대가 전소됐다. 이번 사고는 한국가스기술공업 직원 3명과 서울도시가스 직원 2명 등 7명의 시설안전 점검팀이 가스배분역할을 하는 밸브를 점검하는 작업을 한 후 발생, 40여분전부터 가스가 누출되고 있었으나 제대로 안전조치를 하지 않은 채 차단작업을 하다 일어난 것으로 드러났다.
1991년 미국NBC, 소련 러시아방송국(RTR)과 방송협정 체결
1990년 소콜로프, 초대 한국주재대사로 부임
1989년 라디슬라브 아다메치 체코슬로바키아 총리 사임
1988년 아르메니아 스피타크 대지진으로 2만5천명 사망
1988년 12월 7일 남부 아르메니아공화국 북부산악지역과 터키동부지역에 리히터 지진계로 진도 9가 넘는 강진이 강타, 2만5천명이 사망하는 것을 포함해 10만명이 넘는 사상자를 내는 대참사를 빚었다.
이번 지진은 80년만의 최악의 지진으로 진원지는 인구 30만의 아르메니아 제2도시 레니나칸시에서 50km 떨어진 지점에서 발생했으며 피해지역은 아르메니아 그루지아 아제르바이잔공화국 등 코카서스 일대로 이날 지진으로 인한 사망자들 중엔 아제르바이젠에서 인종박해를 피해 온 난민들이 많아 비참함을 더했다.
1987년 고르바초프, 1973년이래 소련 지도자로선 첫 미국 공식방문
1984년 여성산악인 김영자, 안나푸르나봉(해발 8,091m) 정복
한국여성산악인이 1984년 12월 7일 세계에서 9번째로 높은 히말라야의 안나푸르나봉(해발 8천91m)을 정복했다. 축산협동조합 직원인 김영자씨는 이날 제4캠프를 떠난 후 10시간여의 사투 끝에 정상을 정복했다.
김씨와 4명의 셰르파는 6일 안나푸르나 북서면 7천7백m 지점에 제4캠프를 설치하고 밤을 보낸 뒤 정상정복에 나섰다. 1983년 가을에 도전해 실패한 후 두 번째 시도끝에 성공, 약 10분간 정상에 머무르며 태극기와 네팔국기를 꽂았다. 그러나 하산도중 강풍이 몰아쳐 여성셰르파 2명이 제3캠프 부근인 해발 7천2m 지점에서 추락해 사망했다.
이번 등정으로 김영자씨는 동계등반시즌에 안나푸르나봉을 세계최초로 정복한 여성 산악인의 기록을 세웠다.
1983년 스페인서 두 여객기 충돌. 104명 사망 23명 중상
스페인 국영 ‘이베리아’ 항공사 소속 보잉727 국제선 여객기와 국영 ‘아비아코’ 항공사 소속 DC9 국내선 여객기가 12월 7일 오전 9시 45분 짙은 안개가 낀 마드리드의 바라하스 국제공항을 이륙하려다 서로 충돌, 두 여객기의 탑승자 135명 가운데 93명이 사망하고 23명이 중상을 입었다.
이날 두대의 여객기는 짙은 안개 속을 헤치고 바라하스 공항 활주로를 이륙하려다 충돌, 화염 속에서 폭발했는데 이 사고는 마드리드에서 181명의 사망자를 낸 대형항공기 추락사건이 발생한지 10일도 안돼 발생한 항공기 참사였다.
‘이베리아’와 ‘아비아코’ 항공사 직원들은 이 충돌사고로 DC9기에 타고있던 승객 37명과 승무원 5명 등 42명 전원이 사망했으며 ‘이베리아’ 항공의 보잉727기에 타고있던 93명 가운데 승객 50명과 승무원 1명 등 51명이 사망했다고 밝혔다.
이들은 또 ‘이베리아’ 항공기에는 일본인 관광객 42명와 이탈리아인 11명, 서독인 2명, 폴란드·모로코인 각 1명 등 다수의 외국인들이 탑승하고 있었으며 사망자 중에는 6쌍의 일본인 신혼부부를 비롯한 일본인 승객 31명이 포함되어 있다고 말했다.
앞서 ‘엘리케 바론’ 스페인 운수상은 사망자 수가 104명이라고 발표했으나, 이는 일본인 승객의 명단을 잘못 계산했기 때문인 것으로 밝혀졌다.
1982년 미국 하원 MX미사일 생산계획 부결
1980년 미국-중국간 민간항로 31년 만에 재개
1978년 사상 최초로 남빙양에 어로 출항
1978년 오히라 마사요시, 일본 수상에 당선
1976년 작곡가 정율성 작고
1975년 포드 미국대통령 신태평양독트린 발표
1975년 울산 밀양 가뭄 68일간(-1976.2.12까지) 눈 비 안 옴
1972년 남녀탁구팀 자카르타 대회 우승
1971년 파키스탄 인도와 단교
1970년 서독-폴란드, 바르샤바 조약 조인
폴란드를 방문한 서독 수상 브란트와 폴란드 수상 치란키에비츠가 1970년 12월 7일 바르샤바의 라치빌 궁전에서 서독-폴란드 조약에 조인했다. 양국은 2차 대전 후 25년 동안 외교관계가 단절된 상태였다.
전문과 5개항으로 구성되어 있는 조약에는 오데르-나이세 강을 양국 국경선으로 한다고 명시했을 뿐만 아니라 영토불가침, 주권존중 및 영토요구 포기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폴란드 국경 확정문제는 전후 유럽 최대의 영토문제를 해결해, 유럽의 긴장완화를 향해 한걸음 나아간 것으로 평가받았으나 브란트가 땅을 싸게 팔았다고 비난하는 여론도 있었다.
브란트 정권은 1969년 10월, 발족후 2차 대전의 전후 처리와 유럽의 현상유지를 위해 `동방외교`에 착수했다. 1970년 3월에는 서독 수상으로는 처음으로 동독을 방문했고, 8월에는 소련과 평화유지, 긴장완화 조성 등을 담은 조약을 체결했다. 오슬로의 노벨상위원회도 `동서의 긴장완화에 많은 노력을 했다"며 1971년 노벨상 수상자로 그를 선정했다.
1970년 청와대에 특별보좌관실 신설
1970년 빌리 브란트 서독 총리, 폴란드에 사죄
빌리 브란트 서독 총리는 폴란드의 한 유대인 위령탑 앞에서 애도를 표하다가 갑자기 차가운 대리석 위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과거 나치독일에 상처받은 폴란드 국민들에게 용서를 빌었다. 독일 총리으로는 2차 대전 후 25년 만에 처음 폴란드를 방문한 브란트는 국교정상화 조약에 서명한 뒤 바르샤바의 한 유대인 위령탑을 찾은 길이었다. 1943년 4월 19일에 바르샤바 게토에 거주하던 7만의 유대인들이 나치에 저항하다가 5만 6,000명이 사살되거나 체포된 곳이었다.
브란트의 이처럼 파격적인 사죄는 동방정책과 함께 훗날 독일 통일의 밑거름으로 평가됐다. 하지만 독일인들의 당시 반응은 냉담했다. 국민의 41%는 “적절했다”고 했고 48%는 “심했다”는 반응을 보였다.
폴란드는 독일이 일으킨 2차 세계대전으로 600만명의 국민과 40%의 국부(國富)를 잃은 피해국이다.
1968년 정부, 유엔에서의 한국문제 연례자동상정을 재량상정으로 변경
1965년 로마교황과 그리스정교회 총주교 911년만에 화해
1964년 한-독 경제협정 체결
1964년 동양 텔레비전 (DTV) 서울국 개국(채널 7)
1964년 박정희 대통령 서독 방문
박정희 대통령이 1964년 12월 7일 한국 대통령으로는 처음 서독 쾰른공항에 발을 내디뎠다. 전세기가 없어 서독에서 보내준 루프트한자 여객기를 60명의 일반승객과 함께 타고 일곱 곳이나 경유하며 서독에 도착하는 데 28시간이나 걸렸다. 말이 국빈방문이지 숙소는 10평에 불과했고 연도에 걸린 태극기도 스무 개 남짓이었다.
박 대통령이 서독행을 결심한 것은 차관을 받기 위해서였다. 정부는 외자로 수출산업을 육성하려 했지만 달러를 주겠다는 곳이 없었다. 미국조차 무상원조를 받는 나라에 차관을 줄 수 없다고 했고 일본과는 국교수립도 안된 상태였다. 외자도입은 ‘매국(賣國)’으로 비판받던 시절이었다.
10일 오전, 박 대통령은 1963년 12월부터 서독에 파견한 광부들과 1964년 11월부터 서독에 파견한 간호사들을 찾아 위문했다. 1인당 GNP가 87달러(1962년)에 불과하던 시절 외화를 벌기 위해 머나먼 이국땅으로 떠난 이들이었다.
박 대통령은 서독 의회에서도 대한민국의 성실한 국민성을 강조하며 서독을 설득했다. 한국이 광부와 간호사를 보내준 덕분이었는지 서독은 4,000만달러 차관을 약속했다.
경부고속도로 건설도 이때 구상된다. 박 대통령은 독일이 자랑하는 고속도로 아우토반을 직접 주행해보고 고속도로의 필요성을 실감한 것이다. 박 대통령은 귀국 직후 '수출진흥회의'를 만들어 이듬해 1월 첫 회의를 연 이래 1979년 사망할 때까지 꾸준히 회의에 참석하며 수출을 독려했다.
1963년 최고회의, 새 정부기구를 확정 (1원13부3처5청, 부총리제 신설)
1961년 10개 사범학교 교육대학으로 승격
1961년 강원도 거진에서 버스가 바다로 추락 사망 14명
1956년 유엔총회 한국재건원조 결의안 채택
1954년 볼리비아 대표 유엔총회서 남북한연방제 구성 제의
1953년 유엔총회 강제노동폐지에 관한 결의안 가결
1950년 유엔 정치위, 한국서 중국군철수 결의안 가결
1950년 대한신문기자협회(회장 오종식) 결성
1949년 자유중국 수도를 성도로 부터 대만의 대북으로 이전
1949년 세계자유노동조합연맹 발족
1948년 소련, 북한서 완천철수 발표
1941년 일본, 진주만 기습공격
1941년 11월 26일 오후6시. 일본 북단 미나미치시마 에토로프섬 히토카프만에서 일단의 함대가 하와이를 향해 동진하기 시작했다.
항공모함 6척, 전함 2척, 순양함 3척, 구축함 9척, 잠수함 3척에 전투기 등 비행기 423대로 편성된 최정예 기동부대였다.
한편에선 미일 교섭이 긴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중국-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서의 철수를 요구하며 석유 등 주요물자의 무역 봉쇄를 강행한 미국과, 기득권을 주장하는 일본 사이엔 타협의 여지가 없어 보였다.
마침내 일본 어전회의는 12월 1일 미국에 대한 개전을 결정했다. 태평양을 항해하던 기동대는 다음날 저녁 예정대로 12월 8일(일본시간) 미국 태평양함대 본거지인 진주만 공격을 결행하라는 암호를 수신했다.
호놀룰루 시간 12월7일 오전 6시. 오아후섬 북서 25km지점에 결집해 있던 6척의 일본 항공모함에서 183대의 폭격기 전투기 등이 발진했다.
1시간 15분후엔 다시 167대의 비행기가 남쪽 진주만을 향했다.
오전 7시45분. 일요일 느지막한 잠에 빠져있거나 식사를 하던 미국 병사들은 요란한 폭음에 혼비백산이 됐다.
불과 2시간에 걸친 무차별 폭격으로 정박중이던 8척의 전함과 순양함 8척, 유조함 2척, 비행기 188대 등 주요 장비가 속수무책으로 파손됐다.
일본측 피해는 전투기 29대, 특수잠수정 5척, 전사자 64명에 불과했다.
여세를 몰아 일본은 10일 말레이 해전에서 영국 최강의 전함 웨일스 오브 프린스호를 격침시키고 필리핀 루손섬, 괌을 점령했다.
1928년 미국 언어학자 노암 촘스키 출생
1928년 조선공산당 해체
1917년 러시아 체카(KGB 전신) 설립
현재의 FSB(러시아 연방보안국)와 구소련의 KGB(국가보안위원회)의 전신인 체카(반혁명과 파괴행위를 다루는 전 러시아 비상위원회)가 폴란드 출신의 볼셰비키 혁명가 펠릭스 제르진스키에 의해 1917년 12월 7일 설립됐다. 당시로서는 불안했던 러시아 혁명에 대한 반혁명을 경계한 레닌의 지시에 따른 것이었다.
체카란 명칭은 시대에 따라 KGB로, 다시 FSB로 바뀌었지만 이곳에서 근무했던 사람들은 주로 `체키스트`라 불렸다. 체키스트는 누구라도 재판없이 체포, 투옥, 처형할 수 있었기에 구소련 시절 사람들에게 공포와 증오의 대상이었다. 구악(舊惡)의 대명사 체카와 KGB가 무너진 것은 1991년 발생한 소련 쿠데타와 함께 체카 설립자 제르진스키의 동상이 무너지면서부터였다
1889년 프랑스 철학자 가브리엘 마르셀 출생
1884년 대한광복회 총사령 박상진 선생 출생
1842년 크리스마스카드 첫선
영국 삽화가 호슬리가 크리스마스를 즐기는 한 가족의 모습 그려 넣고 “당신에게 즐거운 크리스마스와 행복한 새해를”이란 글귀로 카드 만들어 판매한 것이 크리스마스카드의 시초
1817년 ‘바운티호’ 의 선장, 윌리엄 블라이 사망
그는 타고난 항해사였다. 7세 때 이미 선실 급사로서 선원이 되었고, 1770년 영국 해군에 입대했다. 1787년, 새로운 항로 발견과 기타 과학적 탐사를 위한 영국 죠지 왕의 어명을 받잡고 215t급 ‘바운티호’ 의 함장으로 임명됐다. 특히, 이 배는 서인도 제도에 이식할 빵나무를 타히티에서 채집해 실어나르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타히티에 도착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1789년 4월 28일, 평소 사나운 입심으로 선원들을 다스리던 그의 태도에 불만에 품은 선원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결국, 블라이와 그에게 충성하는 18명의 선원들은 배에 있던 대형 보트에 실려 쫓겨났다.
반란의 원인에 대해서는 원주민 여자문제와 관련해 여러가지 설이 있으나 평소 귀족 선장으로서 망망대해에서 절대 권력을 행사하려 했던 그의 지휘방법에 선원들의 원망이 적지 않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의 놀라운 항해력은 여기에서도 십분 발휘돼, 약 5,800㎞를 헤맨 끝에 네덜란드 령 티모르에 도착한다. 결국, 미처 도망가지 못한 ‘바운티호’ 의 반란자들은 영국으로 압송되어 교수형에 처해졌다.
이후, 블라이는 1792년에 다시 타히티를 방문해 더 많은 빵나무를 서인도제도로 운반하는 데 성공하는 등 많은 항해 업적을 남겼지만, 이후 ‘디렉터호’ 의 선장으로 있던 1797년에 노어 반란에 가담한 부하 선원들에 의해 해변에 버려지는 수모를 당하는 등 지휘관으로서의 그의 자질은 부족했던 듯 싶다.
1732년 영국 로열 오페라 하우스 첫 공연,
43년 로마의 철학자 마르쿠스 톨리우스 키케로 암살
BC43년 로마 정치가 키케로(BC106-) 세상 떠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