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침에 읽는 오늘의 詩 〈1135〉
■ 속리산에서 (나희덕, 1966~)
가파른 비탈만이
순결한 싸움터라고 여겨온 나에게
속리산은 순하디 순한 길을 열어 보였다
산다는 일은
더 높이 오르는 게 아니라
더 깊이 들어가는 것이라는 듯
평평한 길은 가도 가도 제자리 같았다
아직 높이에 대한 선망을 가진 나에게
세속을 벗어나도
세속의 습관은 남아 있는 나에게
산은 어깨를 낮추며 이렇게 속삭였다
산을 오르고 있지만
내가 넘는 건 정작 산이 아니라
산 속에 갇힌 시간일 거라고,
오히려 산 아래서 밥을 끓여 먹고 살던
그 하루하루가
더 가파른 고비였을 거라고,
속리산은
단숨에 오를 수도 있는 높이를
길게 길게 늘여서 내 앞에 펼쳐 주었다.
- 1997년 시집 <그곳이 멀지 않다> (민음사)
*장마가 다시 시작되는 것인지 여기는 어제부터 계속 비가 내리는 관계로 습도가 높아, 낮시간에 조금만 움직이면 땀이 촉촉이 흐를 만큼 무덥고 몸도 무기력해지는 요즘입니다.
그런데 어떤 분들은 이렇게 무더운 날씨일수록 ‘이열치열’식으로 대처해야 한다며 가장 좋은 방법으로 깊은 산에 오르는 것을 적극 권장하더군요. 한여름의 산에는 보통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매력적인 그 무엇이 존재할 지도 모를 일이라 생각되면서도 그분들의 열정과 도전의식이 부럽기도 합니다.
이 詩는 요즘 같은 한여름은 아니겠지만, 모처럼 시간을 내어 속리산을 오르면서 지나온 자신의 삶을 성찰하며 새로이 깨달음을 얻고 있는 작품입니다. 속리산은 높이 1,058M로서 1,095M의 월악산과 더불어 충북을 대표하는 산이며, 매우 난코스입니다만 산이 깊고 완경사가 많은 곳이기도 합니다.
이 詩에서는 속리산이 가파르지 않고 완경사로서 높이보다는 깊이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려주듯 시인은, 그간 높이 중심의 성취욕만을 추구하던 자신의 삶을 반성하게 됩니다.
그리고 인식을 전환하여 빨리 높은 자리에 오르려는 것보다, 깊이 있게 겸손하고 여유 있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더욱 풍요로운 삶이 된다는 사실을 속리산을 통해 깨닫고, 우리에게도 조용히 알려주고 있군요. Cho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