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말리아(Somalia)
- 동아프리카 -
▶ 개관 : 공식명칭 - 소말리아 민주 공화국 (Somali Democratic Republic)
위치 - 아프리카 북동부
인구 - 약 17,026,329명 (2023년 추계)
수도 - 모가디슈 (한국과 -6시간 차)
면적 - 약 63만㎢ (한반도의 2.9 배)
기후 - 아열대성 기후, 열대성 기후
종족 - 소말리족(85%), 반투족(15%)
언어 - 소말리어, 아랍어
정부 - 과도정권 / 단원제 (대통령)
종교 - 수니파 이슬람교
화폐 - 소말리아실링 (SOS)
▶ 역사 : 예로부터 소말리아는 고대 세계의 상업 중심지였다. 고대 이집트, 페니키아,
미케네에서 유향, 몰약, 향신료는는 귀중품으로 여겨졌는데, 소말리아의 선원
과 상인들은 교역을 통하여 이를 공급하였다. 대부분 학자들은 고대 소말리아
땅에 고대 푼트 왕국이 있었다고 한다. 고대 푼트人들은 파라오 시후레와 하트
셉수트시대에 이집트와 밀접한 관련을 맺었다.
소말리아의 피라미드 건물, 신전, 돌로 지은 가옥도 이 시대의 것이라고 한다.
고전기에 사바 왕국과 경쟁하던 오포네(Opone), 모실론(Mosyllon), 말라오(Mala
o) 같은 고대 도시국가와 파르티아, 악숨은 부유한 인도-그리스-로마간의 교역
으로 소말리아에서 번성하였다.
소말리아에서 홍해 너머 아랍에서 이슬람이 발흥하면서 아라비아 반도에 살던
소말리아 상인, 선원, 거류민들이 점차 교역 상대인 아랍인 무슬림을 통하여 새
종교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이슬람이 발생하고 수백 년 동안 이슬람 세계에서
소말리아로 무슬림이 이주하고, 이후 소말리아의 무슬림 학자가 소말리아 사람
을 평화적으로 개종시키면서, 고대 도시국가는 이슬람화되어 베르베리(Berberi)
문명의 일부를 이룬 모가디슈, 베르베라, 제일라, 바라와, 메르카가 되었다.
모가디슈 市는 "이슬람의 도시"로 알려지게 되었으며, 수백 년간 동아프리카의
황금 무역을 장악하였다. 중세 시대에 여러 강력한 소말리아 제국들은 지역 교
역을 지배하였는데, 소로 공학과 요새 건축이 뛰어났던 아주란 왕국(Ajuuraan
State) 과 아흐메드 구레이(Ahmed Gurey) 장군이 에티오피아 제국을 정복하면
서, 아프리카에서 처음으로 대포를 쓴 바 있는 압달 술탄국, 소말리아인 술탄
아흐메드 유수프에 공물을 바쳐 라무(Lamu) 市 북쪽, 오마니 제국을 군사적으
로 지배한 겔레디 술탄국 등이 바로 그러하였다.
19세기 말 베를린 회의가 끝나자 유럽 제국주의 국가들은 아프리카의 뿔로 항해
하여 군대를 이끌고 왔다. 소말리아에 제국주의의 기운이 엄습하면서 데르비사
지도자 무함마드 압둘라 하산은 위기를 느끼고, 아프리카의 뿔 지역의 소말리아
병사를 모아 기나긴 반식민 투쟁을 전개하였다.
소말리아는 공식적으로 식민지화된 적이 없다. 데르비시 국가는 대영 제국을
네 번이나 격퇴하여 해안 지역에서 철수하게 하였다. 데르비시 국가는 중동과
유럽에서 명성을 얻어 오스만 제국과 독일 제국의 동맹이 되었으며, 제1차 대전
중, 아프리카 대륙에서 유일하게 독립한 무슬림 국가로 남았다.
영국이 만(灣)을 점령한 지 25년 만에, 1920년 영국이 아프리카에서 최초로 비행
기를 이용하여 데르비시의 수도 탈레흐(Taleh) 폭격하여 결국 데르비쉬를 패퇴시
켰다. 이 폭격으로 과거 데르비시 영토는 영국의 보호령이 되었다.
이탈리아도 영국처럼 소말리아 술탄과 군대의 저항에 부딪혔는데 1927년 말
파쇼정권이 집권하고 나서야 오늘날 소말리아 땅의 일부 지역을 완전히 장악할
수 있었다. 이탈리아의 점령은 1941년까지 지속되었으며, 이후 영국의 군정하
로 넘어갔다. 남부 소말리아가 신탁통치를 받을 때 북부 소말리아는 보호령 상
태였다. 1960년 두 지역이 통합하여 소말리아 민주 공화국이 탄생하였다.
1960년에 영국과 이탈리아로부터 독립하였지만 1991년 내전 때문에 혼란이 발
생하였고, 아프리카에서 가장 못 사는 나라가 되었으며 UN 평화 유지군이 파견
되기도 하였다. 우리나라도 1993년에 평화유지군 파병으로 소말리아를 지원해
준 적도 있었다. 영국의 식민지였던 북부는 소말릴란드가 독립을 원하고 있으
나, 국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또한 현재 유일한 합법 정권인 과도 정부와
반군 세력의 대립이 계속되고 있다.
2012년 8월 20일 과도 정부 체제를 끝내고 헌법과 의회제도를 도입하여 소말
리아 연방 공화국으로 출범하였고, 9월 10일 하산 셰흐 마하무드가 대통령 선
거에서 당선되어 9월 16일 공식 취임하였다.
▶ 경제 : 소말리아의 경제는 주로 축산과 농업에 기반을 둔 개발도상의 혼합경제이다.
국민총생산(GNP)은 1980년에 약 11억 3,000만 달러에 달했으나, 1990년대 초
내전 발발 이후 경제가 급격히 무너지면서 1인당 GNP가 세계에서 최하수준으
로 추락했다.
주바·셰벨레 강 연변에서는 바나나 등의 과일이 자라며, 그밖의 작물로는 사탕
수수·목화·옥수수·수수 등이 있다. 한편 어업을 되살리려는 정부의 노력으로
1970년대 중반 이후로 어획량이 배가되고 있다.
공업은 주로 육류 및 어류 가공, 섬유공업, 피혁업 등인데, 종사 인구가 총노동
인구의 10%에도 미치지 못한다. 전기는 화력발전에 의존하며 도시지역에만
제한적으로 송전된다.
소말리아 국가예산은 크게 보통예산과 개발예산으로 나누어지는데, 보통예산
은 국내 재원으로 충당되며, 개발예산은 외국 자본으로 충당된다. 소말리아는
점증하는 국제수지 적자에 허덕이고 있으며, 그 적자를 메우기 위해 점점 더
많은 외국원조를 필요로 하고 있다.
소말리아에는 철도가 없으며, 철도를 대신해 트럭과 버스가 내륙 수송을 담당
하고 있다.
▶ 소말리아 해적 문제 : 소말리아에는 해적이 많은데, 소말리아 해적은 다른 나라에서
오는 배를 수 없이 납치를 한 적이 있다. 미국, 유럽연합, 러시아, 인도, 한국 등,
각국 해군이 수에즈운하를 통과하는 다른 나라에서 오는 배를 소말리아 해적으로
부터 지키려 노력하고 있으나, 소말리아는 사실상 무정부 상태이기 때문에, 소말
리아 해적 문제는 지금도 통제 할 수가 없다고 한다.
소말리아에서 오는 해적은 대부분 지방 출신이다. 소말리아는 경제 상태가 가장
나쁜 최빈국으로 분류되며, 주민들은 자신들 생계를 위해서 해적 활동을 하는 경
우가 많다. 다른 나라에서 소말리아 근처 해안에 산업 폐기물을 투기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때문에 어민들의 생계 위협을 받아 해적으로 활동하는 경우가 생기고
있다.
▶ 대한 관계 : 소말리아와 1987년 9월 26일 공식적인 외교관계 수립하고 대사관을 설치
했으나, 1992년 3월 공관 폐쇄, 2008년 현재 주 케냐 대사가 업무 겸임하고 있다.
양국의 인사 교류는 1981년 최초로 소말리아의 교수가 제10차 국제과학통일회의
참가차 우리나라를 방문함으로써 이루어진 이래, 양측의 외교관·정부인사·실업인
등이 수교 교섭, 각종 회의 참가 및 경제교류를 목적으로 상호 방문하였다.
이 밖에 경제기술협력 차원에서 1980년 유엔대표부를 통해 소말리아 난민구호에
2만 달러를 지원하였다. 또한 1984년 우리나라의 6개 회사 소속 19척의 원양어선
이, 1985년에는 11개 회사 소속 20척의 원양어선이 소말리아 연안에 진출하여 조
업하였다.
1993년 6월∼1995년 3월에는 한국 공병 상록수부대가 유엔평화유지군의 일원으
로 소말리아에 파견되기도 했으며, 이후 2006년과 2007년에 우리나라 선원들이
소말리아 해적에게 피랍돼 곤욕 치른 사건을 계기로, 국제적 승인을 받아 2009년
3월청해부대를 소말리아 해역에 파견하여 해적에 대비하고 있다.
2015년 현재 소말리아 수출액은 551만 5000달러, 수입액 651만 5000달러이다.
제24회 서울올림픽대회에는 13명의 선수단 참가, 2007년 현재 한국 교민이나 체
류자는 없다. 한편, 북한은 1967년 4월 13일 이 나라와 국교를 수립하였으나,
1991년 1월 철수하고, 2007년 현재 주 에티오피아 대사가 업무 겸임하고 있다.
▶ 여행 정보 : 여행 경보-여행금지(2007.8.7 ~ 2017.1.31)
전압 : 220 / 230 / 240V 콘센트 2구
1:57
감동이야기#5 소말리아 비극 실화 - 길이: 1:57
NEWstory 뉴스토리
[출처] 소말리아 해적의 유래|작성자 신정
소말리아(Somalia)
- 동아프리카 -
▶ 개관 : 공식명칭 - 소말리아 민주 공화국 (Somali Democratic Republic)
위치 - 아프리카 북동부
인구 - 약 1,061만명 (세계 85 위)
수도 - 모가디슈 (한국과 -6시간 차)
면적 - 약 63만㎢ (한반도의 2.9 배)
기후 - 아열대성 기후, 열대성 기후
종족 - 소말리족(85%), 반투족(15%)
언어 - 소말리어, 아랍어
정부 - 과도정권 / 단원제 (대통령)
종교 - 수니파 이슬람교
화폐 - 소말리아실링 (SOS)
▶ 역사 : 예로부터 소말리아는 고대 세계의 상업 중심지였다. 고대 이집트, 페니키아,
미케네에서 유향, 몰약, 향신료는는 귀중품으로 여겨졌는데, 소말리아의 선원
과 상인들은 교역을 통하여 이를 공급하였다. 대부분 학자들은 고대 소말리아
땅에 고대 푼트 왕국이 있었다고 한다. 고대 푼트人들은 파라오 시후레와 하트
셉수트시대에 이집트와 밀접한 관련을 맺었다.
소말리아의 피라미드 건물, 신전, 돌로 지은 가옥도 이 시대의 것이라고 한다.
고전기에 사바 왕국과 경쟁하던 오포네(Opone), 모실론(Mosyllon), 말라오(Mala
o) 같은 고대 도시국가와 파르티아, 악숨은 부유한 인도-그리스-로마간의 교역
으로 소말리아에서 번성하였다.
소말리아에서 홍해 너머 아랍에서 이슬람이 발흥하면서 아라비아 반도에 살던
소말리아 상인, 선원, 거류민들이 점차 교역 상대인 아랍인 무슬림을 통하여 새
종교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이슬람이 발생하고 수백 년 동안 이슬람 세계에서
소말리아로 무슬림이 이주하고, 이후 소말리아의 무슬림 학자가 소말리아 사람
을 평화적으로 개종시키면서, 고대 도시국가는 이슬람화되어 베르베리(Berberi)
문명의 일부를 이룬 모가디슈, 베르베라, 제일라, 바라와, 메르카가 되었다.
모가디슈 市는 "이슬람의 도시"로 알려지게 되었으며, 수백 년간 동아프리카의
황금 무역을 장악하였다. 중세 시대에 여러 강력한 소말리아 제국들은 지역 교
역을 지배하였는데, 소로 공학과 요새 건축이 뛰어났던 아주란 왕국(Ajuuraan
State) 과 아흐메드 구레이(Ahmed Gurey) 장군이 에티오피아 제국을 정복하면
서, 아프리카에서 처음으로 대포를 쓴 바 있는 압달 술탄국, 소말리아인 술탄
아흐메드 유수프에 공물을 바쳐 라무(Lamu) 市 북쪽, 오마니 제국을 군사적으
로 지배한 겔레디 술탄국 등이 바로 그러하였다.
19세기 말 베를린 회의가 끝나자 유럽 제국주의 국가들은 아프리카의 뿔로 항해
하여 군대를 이끌고 왔다. 소말리아에 제국주의의 기운이 엄습하면서 데르비사
지도자 무함마드 압둘라 하산은 위기를 느끼고, 아프리카의 뿔 지역의 소말리아
병사를 모아 기나긴 반식민 투쟁을 전개하였다.
소말리아는 공식적으로 식민지화된 적이 없다. 데르비시 국가는 대영 제국을
네 번이나 격퇴하여 해안 지역에서 철수하게 하였다. 데르비시 국가는 중동과
유럽에서 명성을 얻어 오스만 제국과 독일 제국의 동맹이 되었으며, 제1차 대전
중, 아프리카 대륙에서 유일하게 독립한 무슬림 국가로 남았다.
영국이 만(灣)을 점령한 지 25년 만에, 1920년 영국이 아프리카에서 최초로 비행
기를 이용하여 데르비시의 수도 탈레흐(Taleh) 폭격하여 결국 데르비쉬를 패퇴시
켰다. 이 폭격으로 과거 데르비시 영토는 영국의 보호령이 되었다.
이탈리아도 영국처럼 소말리아 술탄과 군대의 저항에 부딪혔는데 1927년 말
파쇼정권이 집권하고 나서야 오늘날 소말리아 땅의 일부 지역을 완전히 장악할
수 있었다. 이탈리아의 점령은 1941년까지 지속되었으며, 이후 영국의 군정하
로 넘어갔다. 남부 소말리아가 신탁통치를 받을 때 북부 소말리아는 보호령 상
태였다. 1960년 두 지역이 통합하여 소말리아 민주 공화국이 탄생하였다.
1960년에 영국과 이탈리아로부터 독립하였지만 1991년 내전 때문에 혼란이 발
생하였고, 아프리카에서 가장 못 사는 나라가 되었으며 UN 평화 유지군이 파견
되기도 하였다. 우리나라도 1993년에 평화유지군 파병으로 소말리아를 지원해
준 적도 있었다. 영국의 식민지였던 북부는 소말릴란드가 독립을 원하고 있으
나, 국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또한 현재 유일한 합법 정권인 과도 정부와
반군 세력의 대립이 계속되고 있다.
2012년 8월 20일 과도 정부 체제를 끝내고 헌법과 의회제도를 도입하여 소말
리아 연방 공화국으로 출범하였고, 9월 10일 하산 셰흐 마하무드가 대통령 선
거에서 당선되어 9월 16일 공식 취임하였다.
▶ 경제 : 소말리아의 경제는 주로 축산과 농업에 기반을 둔 개발도상의 혼합경제이다.
국민총생산(GNP)은 1980년에 약 11억 3,000만 달러에 달했으나, 1990년대 초
내전 발발 이후 경제가 급격히 무너지면서 1인당 GNP가 세계에서 최하수준으
로 추락했다.
주바·셰벨레 강 연변에서는 바나나 등의 과일이 자라며, 그밖의 작물로는 사탕
수수·목화·옥수수·수수 등이 있다. 한편 어업을 되살리려는 정부의 노력으로
1970년대 중반 이후로 어획량이 배가되고 있다.
공업은 주로 육류 및 어류 가공, 섬유공업, 피혁업 등인데, 종사 인구가 총노동
인구의 10%에도 미치지 못한다. 전기는 화력발전에 의존하며 도시지역에만
제한적으로 송전된다.
소말리아 국가예산은 크게 보통예산과 개발예산으로 나누어지는데, 보통예산
은 국내 재원으로 충당되며, 개발예산은 외국 자본으로 충당된다. 소말리아는
점증하는 국제수지 적자에 허덕이고 있으며, 그 적자를 메우기 위해 점점 더
많은 외국원조를 필요로 하고 있다.
소말리아에는 철도가 없으며, 철도를 대신해 트럭과 버스가 내륙 수송을 담당
하고 있다.
▶ 소말리아 해적 문제 : 소말리아에는 해적이 많은데, 소말리아 해적은 다른 나라에서
오는 배를 수 없이 납치를 한 적이 있다. 미국, 유럽연합, 러시아, 인도, 한국 등,
각국 해군이 수에즈운하를 통과하는 다른 나라에서 오는 배를 소말리아 해적으로
부터 지키려 노력하고 있으나, 소말리아는 사실상 무정부 상태이기 때문에, 소말
리아 해적 문제는 지금도 통제 할 수가 없다고 한다.
소말리아에서 오는 해적은 대부분 지방 출신이다. 소말리아는 경제 상태가 가장
나쁜 최빈국으로 분류되며, 주민들은 자신들 생계를 위해서 해적 활동을 하는 경
우가 많다. 다른 나라에서 소말리아 근처 해안에 산업 폐기물을 투기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때문에 어민들의 생계 위협을 받아 해적으로 활동하는 경우가 생기고
있다.
▶ 대한 관계 : 소말리아와 1987년 9월 26일 공식적인 외교관계 수립하고 대사관을 설치
했으나, 1992년 3월 공관 폐쇄, 2008년 현재 주 케냐 대사가 업무 겸임하고 있다.
양국의 인사 교류는 1981년 최초로 소말리아의 교수가 제10차 국제과학통일회의
참가차 우리나라를 방문함으로써 이루어진 이래, 양측의 외교관·정부인사·실업인
등이 수교 교섭, 각종 회의 참가 및 경제교류를 목적으로 상호 방문하였다.
이 밖에 경제기술협력 차원에서 1980년 유엔대표부를 통해 소말리아 난민구호에
2만 달러를 지원하였다. 또한 1984년 우리나라의 6개 회사 소속 19척의 원양어선
이, 1985년에는 11개 회사 소속 20척의 원양어선이 소말리아 연안에 진출하여 조
업하였다.
1993년 6월∼1995년 3월에는 한국 공병 상록수부대가 유엔평화유지군의 일원으
로 소말리아에 파견되기도 했으며, 이후 2006년과 2007년에 우리나라 선원들이
소말리아 해적에게 피랍돼 곤욕 치른 사건을 계기로, 국제적 승인을 받아 2009년
3월청해부대를 소말리아 해역에 파견하여 해적에 대비하고 있다.
2015년 현재 소말리아 수출액은 551만 5000달러, 수입액 651만 5000달러이다.
제24회 서울올림픽대회에는 13명의 선수단 참가, 2007년 현재 한국 교민이나 체
류자는 없다. 한편, 북한은 1967년 4월 13일 이 나라와 국교를 수립하였으나,
1991년 1월 철수하고, 2007년 현재 주 에티오피아 대사가 업무 겸임하고 있다.
▶ 여행 정보 : 여행 경보-여행금지(2007.8.7 ~ 2017.1.31)
전압 : 220 / 230 / 240V 콘센트 2구
1:57
감동이야기#5 소말리아 비극 실화 - 길이: 1:57
NEWstory 뉴스토리
5:39
미군 군함을 상선으로 오해하고 공격하는 소말리아 해적 - 길이: 5:39
- <소말리아 해적>
- 1990년대 초반, 소말리아는 내전으로 인해 국가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정부 상태였다.
- 소말리아 해역에는 다른 나라 어선들이 거리낌 없이 들어와 물고기를 잡았지만,
- 소말리아에는 불법 조언 어선들을 쫓아낼 해군이나 해경이 없었다. 어획량은 눈에 띄게 줄었고,
- 정상적인 조업으로는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웠다. 나라 경제가 엉망이라 다른 일자리를 구하는 것도 쉽지 않게 된 어부들은 외국 어선을 공격하는 쪽으로 눈을 돌렸다. 오늘날 소말리아 해적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 2008년, 푼틀랜드 지방 정부가 붕괴되면서 병사들에게 월급 지급할 수 없자 푼틀랜드의 무장
- 군인들이 소말리아 해적 행위에 가담했다. 참고로 푼들랜드 지방은 아프리카와 아시아를 오가는
- 화물선들이 꼭 거쳐야만 하는 항로에 위치해 있었는데, 이 지역 무장 군인들의 합류는 해적단이
- 빠르게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들은 초보 해적들에게 항해법과 나포법, 배에 오르는 법을
- 가르쳐 주었고, 이는 곧 해적들의 전문성을 크게 향상시켰다.
- 해적의 우두머리는 벤처 기업 사업가처럼 투자자를 찾아 사업 자금을 끌어왔다. 해적의 우두머리
- 들은 그 돈으로 소말리아 해병대 창설 조직원들을 훈련시켰고, 오합지졸 해적 떼를 작전에 따라
-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군사조직으로 만들었다. 해적질이 성공하면 인질들의 몸값으로 받아낸
- 돈은 최첨단 장비를 사고, 해적들을 훈련하는 데 재투자되었다.
- 해적 산업이 성장하자 이들은 새로운 혁신을 준비했다. 바로 모선을 제작하는 것이었다.
- 모선을 활용하면 기지를 바다 한가운데 둘 수 있어 먼 바다 다니는 대형 화물선을 사냥
-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훨씬 큰돈을 벌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해적들은 모선을
- 항로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띄워 둔 후 목표물 나타날 때까지 잠복해 있다가 두 세척의
- 소형 보트 사용해 큰 화물선들을 나포하기 시작했는데, 해적들의 이러한 행동은 각국의
- 해운사들을 공포로 몰아넣었다. 소말리아 해적들이 모선을 활용한 이후,
- 이들의 활동범위가 소말리아 해역을 넘어 아라비아 해까지 확장되었기 때문이다.
2013년 11월 월드뱅크, 인터폴, UN이 공동으로 낸 보고서에 따르면 2005년 4월 첫 해적 행위가 시작된 이후, 179척의 선박이 나포되었고, 몸값으로 약 4300억 원이 지급되었다
- 고 한다. 하지만 몸값보다 더 큰 손실은 보안 강화, 선박 투자, 운송 일정 지연 등으로
- 발생하는 불필요한 비용이다. 전문가들이 추산한 간접적인 피해 비용은 무려 20조원에
- 육박한다. 오늘날 각국의 정부들은 해군 파견하여 소말리아 해적들에 대한 감시를 강화
- 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이 얼마만큼 효과를 거둘지는 아직 미지수이다.
[출처] 소말리아 해적의 유래|작성자 신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