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전쟁사 다이제스트 100 - 아드리아노플 전투고트 기병대가 로마군 격파(378년)
영원한 인간사랑 ・ 2024. 2. 17. 2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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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전쟁사 다이제스트 100
아드리아노플 전투
고트 기병대가 로마군 격파(378년)
요약 로마 제국이 쇠퇴기에 빠지자, 게르만 족이 서서히 침투하기 시작했다. 게르만 족은 정착지에서 세력을 형성했고 결국 서고트 족과 로마군 간에 전투가 벌어졌다. 로마의 기습 공격에도 고트 기병대는 맹렬하게 반격하여 아드리아노플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로마군, 이민족 침입이 잦아지자 후방 예비대를 운용하고 기병을 양성하다
이민족과 로마군의 싸움
3세기 중엽, 다뉴브 강 하구지방에 침입한 게르만 인과 싸우는 로마군. 대리석. 길이 273㎝, 너비 137㎝, 높이 153㎝. 로마 델루나 국립박물관 소장.
제정로마 전반기 약 200여 년 동안 로마군은 공격보다는 방어목적의 국경수비대 위주로 편성되었다. 그러나 그 후 이민족 침입의 횟수가 잦고 그 규모가 커지면서 제국 방어에 허점이 나타나기 시작하자, 갈리에누스(253~268), 콘스탄티누스(307~337) 등 황제들은 군사개혁을 단행했다.
갈리에누스는 외적들의 급증하는 장거리 무기 사용과 기병습격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후방에 예비대를 운용하도록 했고, 콘스탄티누스는 기병을 양성하여 보병의 약점을 보완했다.
콘스탄티누스1세
기병을 양성하여 보병의 약점을 보완한 콘스탄티누스 황제.
이제 로마군은 전방 수비대보다 기동 예비대의 역할을 중시하는 개념의 방어체제를 택했다. 적 침공이 있으면 작전 목적상 일단 국경지역을 포기하고 후퇴하여 후방의 전략 예비대와 합세한 다음에 다시 전방으로 진격하여 탈환하는 방법을 구사했다.
로마 후반기 군대가 이민족으로 구성되면서 전술의 퇴보가 발생하다
중세시대를 상징하는 기병의 모습이 벽화에 나타나 있다.
사실상 1개 로마 군단 규모가 6,000명에서 2,000명으로 감소된 상태에서 국경지역을 고수하기란 불가능했다. 따라서 전투를 벌일 때는 몇 개 군단들을 한 곳에 집결하여 그리스 방진처럼 운용했다. 한편 기동부대를 활용하여 밀집보병 대형의 핸디캡인 기동성 둔화를 극복했다. 콘스탄티누스 때의 전투방식은 마치 알렉산드로스 대왕 때로 돌아간 것처럼 기병부대가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이와 같이 기동 예비대를 이용하고 또한 보병과 기병의 협력을 바탕으로 하는 전법을 사용하게 된 것은 상당히 발전된 전술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로마 군단이 그리스 방진과 같은 형태로 돌아가 싸운 것은 엄연한 퇴보였다. 이는 제정로마 후반기 군대가 주로 이민족으로 구성되면서 사기저하 및 군기이완 등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는 데 따라 어쩔 수 없이 취한 조치였던 것이다.
변방지역의 게르만족이 로마의 땅을 침식하기 시작하다
한편 로마제국이 군사적 · 경제적으로 쇠퇴기에 빠지자, 변방지대의 게르만 족(로마인들은 '야만족'이라고 불렀다)들이 꿈틀거리며 서서히 제국 땅을 침식하기 시작했다. 특히 3, 4세기에 로마는 심각한 인구감소 문제를 겪고 있어서 게르만 족들에게 변방지대 경작권을 부여하고 그 대가로 그들에게 국경을 수비하는 군역을 치르도록 했다. 이는 과거 외인 보조부대를 고용하던 제도와는 크게 차이가 있었다. 게르만 족들은 정착지에서 점차 세력을 형성했다. 또한 수비대 임무를 수행하는 무장단체들은 비록 로마에 순종적이었으나, 나중에 상황이 바뀌면 언제든지 반란을 일으킬 위험이 있었다.
게르만족
로마인들에게 야만족으로 불렸던 게르만족.
4세기 후반기에 들어서자 변방지역 게르만 족의 인구는 점차 팽창하여 남으로 동으로 정착지를 확대해갔다. 그러던 중 중국 한나라에서부터 쫓겨 온 훈족이 흑해 지역을 침입하면서 게르만 족은 연쇄적으로 대이동하여 로마제국 땅을 본격적으로 침입했다.
서고트 족 무장집단이 로마에 반란을 일으키다
결국 발칸반도에서 오늘날 불가리아 지역을 침입한 서고트 족(게르만 족의 하나)과 로마군 간에 큰 전투가 벌어졌다. 378년 로마제국을 위해 복무하던 서고트 족 무장집단은 반란을 일으켜 로마군 수비대가 방어하는 아드리아노플 성을 공략하고 주위를 약탈했다.
로마군은 발렌스 황제가 콘스탄티노플에서부터 지원군을 이끌고 와 전투를 벌였지만 이 전투에서 로마군은 대패하고 발렌스는 전사했다. 이 전투에 대해 통상 서고트 족 기병이 로마 보병에 대해 승리를 거두어 기병의 우위를 입증함으로써 전사상 큰 전환점을 이룬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나, 사실은 승리가 그렇게 단순하게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발렌스황제
아드리아노플에서 서고트족에게 패해 전사한 황제.
발렌스, 적의 병력 규모를 모른 채 기습공격을 감행하다
발렌스는 6만 명의 로마군을 중앙에 보병을, 양익에 기병을 배치하고 공격을 개시했다. 그러나 그는 사륜마차로 둘러싸인 대원형 진지 안의 고트 족의 병력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를 모른 채 공격했다.
서고트족의 이동경로
서고트족의 이동경로.
고트 족은 높은 지역을 차지하고 로마군보다 결코 적지 않은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그 절반에 가까운 병력이 기병이었다. 마침 고트 기병은 마초를 획득하기 위해 진지를 떠나 있었기 때문에 로마의 기습공격은 성공할 수 있는 것처럼 보였다.
로마 보병, 고트 기병대에 포위되어 무참히 살육되다
그러나 전투 소식을 입수한 고트 기병대는 신속하게 복귀할 수 있었으며, 마차진지 가까이 접근한 로마 기병대를 향해 맹렬한 반격을 실시, 그들을 일시에 섬멸했다. 그러자 섣불리 공격한 로마 보병들은 대혼란에 빠졌다. 고트 기병대는 로마 보병 양익을 포위하고 마차진지로부터도 고트 보병들이 무수한 화살을 날리고 일제히 돌격을 실시했다. 로마군은 자유로운 이동이 불가능한 상태에서 칼이나 투창을 사용하지도 못하고 또한 도망가지도 못한 채 포위망 안에서 무참히 살육당했다. 이 싸움으로 로마군은 약 4만 명의 손실을 입었다.
고트 기병대의 대승으로 유럽에서 기병의 시대가 열리다
아드리아노플 전투에서 고트 족은 무기력한 로마군에 대해 기병대의 신속한 기동력으로, 그리고 보병과 기병 간의 훌륭한 팀워크를 통해 대승을 거두었다. 또한 고트 족 민병들은 무너져가는 로마의 직업적 상비군에 비해 애국심과 정신력 면에서 훨씬 우세하여 승리를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싸움 이후 유럽에서 주요 전장 장면은 기병대가 주력부대로 나서고 보병은 보조부대로 물러서는, 이른바 기병의 시대를 맞게 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아드리아노플 전투 - 고트 기병대가 로마군 격파(378년) (세계전쟁사 다이제스트 100, 2010. 7. 16., 정토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