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 무임승차 하지 말자
혜화동 주민센터 (서울시 종로구 혜화로 12, 혜화동 74-30)
본래 1940년대 지어진 근대 한옥으로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 의사 한소제가 생전에 거주했던 곳이기도 하다
1961년 미국으로 이민가면서 나폴레옹제과점 주인에게 이전되었으나 관리가 어려워 매물로 나온 건물을 2005년 말 종로구청이 사들여 리모델링해 지난 2006년 주민센터로 재탄생했다
♤ 한소제
1899년 12월 27일 태어나 승동교회가 운영하던 승동남녀소학교와 정신여학교를 졸업하고 1919년 일본 도쿄여자의과대학[東京女子醫科大學]에 입학하였다
1923년 대학을 졸업한 뒤 일반의학과 의사자격증 을 취득하여 여의사가 되었다
1926년부터 2년간 미국에 유학하였으며 귀국 후에 는 전주·신의주·서울 등지에서 진료활동을 하였다
대한YECA연맹(대한기독교청년회연맹)에 보이 스카우트가 조직되자 스카우트 운동에 관심을 두고 1946년 한국걸스카우트의 전신인 대한소녀단을 창설하였다
이후 6개월간 미국을 방문하여 한국 최초로 걸스카우트 지도자 강습을 받고 돌아와 지도자 양성에 힘썼다
대한부인회장과 서울 대한YWCA연합회(대한여자 기독교청년회연합회) 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1961년부터 남편인 신동기 전(前)필리핀대사와 함께 미국으로 건너가 살면서 불우한 유학생들을 돌보는 데 힘썼다
1997년 3월 4일(현지 날짜 2일) 사망(98세)하였다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 터 (서울시 종로구 창경궁로 265, 명륜동2가 4)
1890년 10월 의료선교사 로제타 홀(Rosetta S. Hall) 여사가 보구여관에서 여성환자들을 돌보며 여성이 남자의사에게 몸을 보일 수 없는 유교적 관습 하에 여의사 양성의 필요성을 절감하여 5명의 여학생에게 의학교육을 시작했다
그 중 한 명인 김점동(박에스더)을 미국 볼티모어 여자의과대학에 유학을 보내 우리나라 최초의 여의사로 길러낸 것이 1900년의 일이었다
이후 로제타 홀 여사를 중심으로 1928년 9월 조선여자의학강습소가 만들어졌다
이는 우리나라 최초의 여자의학 교육기관이었으며,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의 모태가 됐다
1933년 로제타 홀 여사가 정년으로 귀국하게 되자 김탁원 길정희 부부가 조선여자의학강습소를 인수해 경영하며 경성여자의학강습소로 개명했다
1938년 5월 우석 김종익의 유지에 의한 결실로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가 설립됐다
1948년 5월 서울여자의과대학 부속병원, 1957년 1월 수도의과대학 부속병원으로 개칭과 증축을 통해 남녀의사를 배출하며 인술로 많은 환자들을 치료했다
이듬해 9월에는 광화문에 제2부속병원을 개원해 응급 및 중증 환자들을 돌봤다
1964년 종합대학인 우석대학교로 발전되었다
(전북 완주에 있는 우석대학교가 아니다)
1971년 12월, 학교법인 고려중앙학원이 우석학원을 합병함에 따라 고려대학교 의과대학 부속병원 시대를 열며 혜화병원에서 선도적인 진료로 국내 의료계를 이끌었다
여운형 서거지 (서울시 종로구 혜화로 1, 혜화동 111-3 혜화동우체국 앞)
1947년 7월 19일 아침(IOC 가입 축하기념으로 서울운동장에서 한국과 영국의 친선축구경기가 열린 날이다) 당시 체육부장관이던 여운형은 경기 참관 다음 남조선과도입법의원 민정장관 수락을 논의하는 약속예정을 잡았다
그 전에 여운형은 '옷을 갈아입겠다.'고 차를 타고 집으로 갔다
오후 1시, 서울 혜화동 로터리 근방에서 트럭 1대가 갑자기 들이닥쳐 여운형이 탄 자동차를 가로막았다
이어 한지근(韓智根)이 나타나 여운형이 탄 자동차 로 달려가 2발의 총탄을 쏘았다
2발은 여운형의 복부와 심장을 정확히 관통했고, 병원으로 호송 중에 그는 절명하였다
(사형 구형을 받은 한지근은 미성년자라고 나이룰 속여 무기징역형을 선고 받아 사형을 면하였다
그러나 곧바로 일어난 한국전쟁 때 인민군에 의해 끌려간 뒤 그의 생사는 아무도 알 수 없게 되었다)
당시 여운형의 옆에 있던 고경흠은 '그가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내뱉은 말은 "조국..." 그리고 "조선..." 이었으며, 미소를 띤 얼굴로 죽었다.'고 전한다
1947년 7월 19일 여운형이 피습, 절명하여 암살되 었을 당시 갑작스런 그의 죽음은 많은 사람들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1947년 8월 3일 광화문 인민당사 앞에서 발인식이 거행되었다
그의 영결식은 인민장으로 치러졌다
영결식에 약 60만명의 수 많은 추모인파가 몰렸다
영구는 영결식장인 서울운동장(현 동대문 역사문화 공원)으로 향해 서서히 갔고, 장례 행렬은 11시 40분에 서울운동장에 도착하여 영결식이 치러졌다
서울운동장에서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리스 트 손기정과 역도선수 김성집 등 체육인들이 그의 관을 운구하였다
1974년 2월4일, 몽양 암살의 공범을 자처하는 네 사람의 남자가 등장한 깜짝쇼가 벌어져 세인을 놀라게 했다
이 사건의 공범이라며 나타난 일당은 김흥성(54), 김훈(49) 김영성(49), 유순필(49) 등 네 명의 중년 남자였다
범행의 총지휘자는 김흥성이었고 한지근은 제1저격수, 김훈은 제2저격수, 나머지 두 사람은 저격 후의 현장 확인, 수사상황 파악 및 도피로 등을 맡는 확인조 등으로 각자 범행을 분담했노라고도 했다
한지근은 본명이 이필형으로 범행 당시 나이도 19세가 아닌 21세였다는 말도 나왔다
이들은 ‘민족의 분열과 공산화를 막기 위해서’ 암살계획을 세우고 실행했으며, 범행 직후 한지근의 체포과정 및 진술은 사전 각본에 따른 연출이었다고 했다
(공소시효가 지나 더 이상 처벌이 불가능한 상황 이다)
♤ 생가 터, 계동 집터, 묘소, 몽양기념관
동성중.고등학교 (서울시 종로구 대학로 156, 혜화동 90-7)
1907년 9월 인재 양성을 통한 국권회복을 목적 으로 전경현(全景鉉)·민강(閔橿)·장경관(張敬寬) 등이 주민들과 뜻을 모아 한성 서소문 밖 조개골[蛤洞]에 초등 교육기관인 소의학교(昭義學校)를 설립하였다
초대 교장에 전 외부대신 이하영(李夏榮)이 취임하였다
설립 당시 수업연한은 4년이었고, 7∼8세에서 20세 전후의 학생 90여 명이 재학하였다
1920년 봉래동(지금의 서울 중구 만리동)으로 교사(校舍)를 신축하여 이전하고, 3년제 을종(乙種) 상업학교로 개편하여 소의상업학교로 교명을 변경 하였다
1922년 4월 지역 유지와 천주교회의 후원을 받아 수업연한 5년의 갑종상업학교로 개편하면서 교명을 남대문상업학교로 변경하였다
1923년 3월 소의상업학교로 전환 이후 제1회 졸업생 32명을 배출하였으며, 당시의 교원 수는 11명이었다
1928년 예수성심학교의 중등과를 흡수하여 신학과 를 병설했다
1929년 서울시 종로구 혜화동 현재의 위치에 교사 를 신축하여 이전하였으며, 1931년 동성상업학교 로 개칭하고 5학급을 설치했다
1938년 11월 재단법인 경성구 천주교회 유지재단 이 설립되어 학교의 운영을 맡게 되어 노기남 대주교가 이사장으로 취임하였고, 1944년 일제의 교회탄압에 의해 신학과가 폐지되었다
1946년 9월 6년제 인문계로 개편하면서 동성중학 교로 교명을 변경하였고, 1951년 9월 1일 교육법 개정에 따라 3년제 동성고등학교와 동성중학교로 개편되었다
초기의 교명인 ‘소의(昭義)’는 시대를 앞서가는 밝음과 의로움을 상징하며, ‘동성(東星)’은 동녘의 샛별로 세상을 일깨우고 광명으로 인도함을 나타내 고 있다
♤ 민강(閔橿)
1884년 충북 청주 출신으로, 활명수(活命水)를 개발한 궁중 선전관 민병호의 아들이다
당시 궁중에서 쓰이는 생약 비방을 서양의학과 접목해 탄생한 활명수는 우리나라 제약사의 기원이기도 하다
1907년 서소문 밖 조갯골에(蛤洞) 소의학교(昭義學校)를 세우고 후세교육에 힘을 쏟았다
국운이 기울던 1909년 안희제(安熙濟)·김홍량(金鴻亮)·김동삼(金東三)·오상근(吳尙根) 등 80여 명과 함께 대동청년당(大東靑年黨)을 조직하여 지하공작을 통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19년 3·1운동 때는 이에 참가, 활동하였다
또 한남수(韓南洙)·이규갑(李奎甲)·홍면희(洪冕熹) 등과 함께 서울·인천 등지에서 대조선 임시정부의 조직을 위한 국민대회에 관한 구체적 방안을 토의 하고, 이에 따른 연락 및 준비를 맡아 활동하였다
그런데 같은 해 4월 23일 국민대회(세칭 한성임시 정부선포대회)를 개최함으로써 일본경찰에 잡혀 곤욕을 치렀다
또한, 김가진(金嘉鎭)을 총재로 하는 대동단(大同團)을 조직하여 포고문·선언문의 인쇄를 책임맡아 활동하였다
대동단은 그 해 11월경 이강(李堈 - 의친왕, 義親王) 을 상해(上海)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참여시키기 위하여 망명계획을 추진하였는데, 이 사실이 일본 경찰에 발각됨으로써 1년6월간의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상해로 건너가 1924년 교민단의사회(僑民團議事會)의 학무위원(學務委員)으로서 교포계몽과 후세교육에 전념하였으며, 같은 해 3월부터는 항일투쟁의 선봉에서 활약하다가 일본경찰에 잡혀 옥고를 치르던 중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더욱 대단한 사실은 민강 사장의 사망 이후 경영권 을 잡게 되었던 동화약방의 경영자들이 초대 민강 사장의 정신을 이어받아 5대 사장이었던 보당 윤창식은 조선산직장려계 라는 조직의 총무활동을 하다 옥중 생활을 하게 되었고, 추후 신간회와 보린회에 대한 금전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또한 7대 사장이어떤 윤광열 명회회장은 보성전문학교(현재 고려대학교) 재학 시절, 일본에 강제징집이 되었지만 탈출하여 상하이로 넘어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광복군 중대장을 맡았다
♤ 4.19의 횃불 바로 여기에서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사실이지만 4.19 당일 맨 먼저 시위에 참가한 것은 의외로 대학생이 아닌 고등학생 들이었다
신설동 로터리에 있는 대광고등학교 학생들이 오전 8시 30분경 로터리를 점거한 후 동대문 쪽으로 행진을 시작했고, 혜화동의 동성고등학교 학생들, 경기고등학교 학생들 또한 합류하였다
이 대열에 점차 대학생들이 합류하면서 학생시위대 가 형성된 것이다
4.19 때 희생된 사망자 186명 중 학생 수는 77명 이다
(대학생 22명, 고등학생 36명, 중학생과 소학생이 19명)
1960년 4월 11일 김주열(당시 17세)의 시체가 왼쪽 눈에 최루탄이 박힌 처참한 모습으로 마산 앞바다에 떠오른 것이 4.19의 기폭제가 되었다
서울시는 2018년 4월 16일 4.19 혁명 58주년을 맞아 청와대의 협조로 그동안 설치가 어려웠던 4.19 최초 발포 현장인
청와대 사랑채 앞(분수대)에 국가 폭력에 대한 저항을 상징하는 동판을 설치했다
♤ 대한조국주권수호일념비
일제는 태평양전쟁 시기(1943년 10월 20일)에 '육군특별지원병 임시채용 규칙(조선인 학도지원병 제도)'를 공포하였고, 이 제도에 의해 지원병 대상 6,203명 중 4,385명을 동원하여 훈련을 시켜 1944년 1월 20일 부로 일본군 부대에 배치하였다
그때 희생된 학도지원병들을 추모하기 위하여 건립 된 비가 바로 이 대한조국주권수호일념비다
그리고 이곳에 세워진 까닭은 바로 뒤에 있는 동성 고등학교가 학도지원병 훈련장소였기 때문이다
흥사단 (서울시 종로구 대학로 122, 동숭동 1-28)
1913년 5월 13알 안창호가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결성한 민족 운동 단체이다
흥사단의 탄생은 1911년에 발생한 105인 사건에서 비롯된다
이 사건으로 신민회가 해체되고 서북 지역의 항일 인사들이 대거 투옥되었다
사건이 일단락된 뒤 관련자들은 크게 두 방향으로 항일 운동을 전개하게 되었다
이승훈과 안창호 등은 준비론에 입각하여 실력양성 을 시작하였고 이시영, 이동휘 김좌진 등은 만주로 이동하여 무장 항쟁을 준비하였다
이때 안창호 등이 실력 양성론을 실현시킬 목적으로 창단한 단체가 흥사단이다
흥사단은 미국내 한인 교민들의 사회 활동, 권익 보호, 언론 활동, 교민 사회 단결과 사회 활동 등을 적극 지원하였다
1919년에는 흥사단 원동 지부가 결성되고, 1922년에는 이광수 등에 의해 흥사단 원동 지부 조선 지회가 조직되고, 흥사단 조선 지회의 측면 지원 단체로 김동원에 의해 동우구락부, 이광수에 의해 수양동맹회가 조직되었다
수양 동맹회와 동우 구락부는 다시 통합하여 수양 동우회로 개편, 흥사단 조선 지회의 활동을 보조, 지원하였다
흥사단 조선 지부는 1937년 수양 동우회 사건을 계기로 해산되었다
1948년 본부를 국내로 옮기고 재조직되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적극 지지하였고, 새 정부 수립 후 사회 개혁 운동, 교육 사업, 장학 사업, 언론 감시 활동 등 다양한 정치, 사회 활동을 주관하거나 동참하였다
1977년 본부를 명동에서 동숭동으로 옮겼다
흥사단 강당은 민주화 운동 인사들의 집회장소로 유명했는데 1984년 5월 민청련에서 주최한 5.18 민주화운동 희생자 추도식이 열리기도 했다
(이는 당시 운동권에서조차 ‘쉬쉬했던’ 1980년 민주화운동을 수면 위로 끌어올린 최초의 집회 였다)
♤ 글을 마치며 대학로에 대한 고찰
한성부 중부 교동 29통 2호(현 종로구 낙원동 280번지)는 서북학회 출범 당시 회관이 있었던 곳이다
서북학회는 1908년 4월 이곳의 옛 건물을 헐고 회관을 신축하는 공사에 들어가, 순수한 민간의 힘으로 이듬해인 1909년 10월 3층 양옥의 회관을 준공하였다
서북학회가 일제에 의해 강제 해산당한 이후 회관 건물에 보성전문학교(고려대학교 전신)가 1918년 9월 수송동(조계사 터)에서 이전해와 1922년 9월 송현동으로 이전 할 때까지 있었고, 해방 후 장형이 1947년 11월 단국대학을 설립하고, 신익희의 국민대학교 설립 기성회는 1948년 8월 국민대학을 설립하고, 유창식의 조선정치학관은 1949년 9월 건국대학을 설립하였다
세 대학이 모두 서북학회화관에서 대학으로 설립 하였다
서북학회회관 건너편에 1950년 5월 덕성여자초급 대학이 들어섰다
당시 네 개의 대학이 모여있었던 낙원동 서북학회 회관 일대는 우리나라 최초의 대학로였다
서북학회회관은 1977년 해체하여 1985년에 지금 의 건국대학교 서울캠퍼스로 이전복원하여 박물관 으로 사용 중이다
마로니에공원을 출발하여 한 바퀴 돌아 흥사단까지 오늘도 일정을 무사히 마쳤습니다
우리 님들 모두모두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ㅁ^
첫댓글 4.19 최초 발포 현장 동판이 보이는군요. 그날의 순간들이 생각납니다. 경무대로 가는 선두는 동국대학교였지요. 그리고 소방차 세대 중 한 대는 고장이 나있었고, 소방차 두 대를 앞세워 경무대로 향하다가 첫 발포 소리에 처음에는 공포로 알았지만 한 명씩 쓰러지는 광경을 보고 뒤돌아 뛰던 생각이 납니다. 결국 효자동 종점 어느 민가에 들어 갔다가 붙잡혀 서대문 구치소에서 3박을 하고 풀려났던 것이 지나고 나니 엊그제 같습니다. 추억의 사진들 잘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4.19세대 이시군요
존경합니다 ^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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