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디오와 같이 사랑을 끄고 켤 수 있다면
장정일
내가 단추를 눌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라디오에 지나지 않는다.
내가 그의 단추를 눌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전파가 되었다.
내가 그의 단추를 눌러 준 것처럼
누가 와서 나의
굳어 버린 핏줄기와 황량한 가슴 속 버튼을 눌러 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전파가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사랑이 되고 싶다.
끄고 싶을 때 끄고 켜고 싶을 때 켤 수 있는
라디오가 되고 싶다.
(시집 『길 안에서의 택시 잡기』, 1988)
[작품해설]
이 시는 사물로서의 ‘꽃’이 이름과 그 의미에 대한 관계의 고찰을 바탕으로 존재론과 인식론이라는 철학적 접금을 통해 시적 의미를 형상화한 김춘수의 「꽃」을 패러디한 작품이다. 패러디(parody)란 어떤 작가의 시(詩)의 문체나 운율을 모방하여 그것을 풍자적으로 꾸민 작품 또는 그러한 기법을 말한다. 보통 어떤 인기 작품의 자구(字句)를 변형시키거나 과장하여 익살 또는 풍자의 효과를 노린 경우가 많다. 결국 패러디란 어떤 작품에 대해 비판적 거리를 가지고 모방하여 새로운 것을 창조해 내는 기법이라 할 수 있다. 세계적 명작인 「돈키호테」도 사실은 중세의 ‘기사담(騎士譚)’을 패러디한 것이고 보면, 패러디라는 행위 자체를 부정적으로 볼 것은 아니다. 문학에서 가장 중요한 창조성이 내재되어 있기만 하면, 패러디 작품 역시 새롭고 독립적인 작품으로의 가치와 의미를 충분히 얻게 되는 것이다.
김춘수의 「꽃」이 사물의 존재 의미를 부여하고 이해하는 행위를 ‘이름 불러주기’라는 호명 행위로 보고 있다면, 이 시는 그곳이 ‘버튼 눌러주기’로 대체어 있다. 앞의 두 연에서는 무의미한 존재[라디오]에 지나지 않았던 대상[그]이 ‘단추[버튼]’를 누르는 주체[나]의 행위에 의해 비로소 참된 의미를 띤 존재[전파]로 변화되는 과정을 형상화한다. 뒤의 두 연에서는 주체인 ‘나’ 또한 다른 누구[너]로부터 자신의 본질[빛깔과 향기]에 맞는 이름이 불려짐으로써 ‘나’와 ‘너’를 의미 있는 관계로 만들고 싶다는 소망을 표출한다. 즉 기·승·전·결의 형식으로 구성된 이 시에서 1연은 인식 이전의 무의미한 존재인 ‘라디오’를, 2연은 인식 이후의 의미 있는 존재인 ‘전파’를 그리고 있는 데 비해, 3연은 상대방에게 의미 있는 존재가 되고 싶은 인식 주체인 ‘나’를 4연은 그러한 관계의 확장 속에서 의미 있는 존재가 되고 싶은 모두의 소망을 보여 주고 있다. 그러므로 이 시는, 이러한 양방향의 상호적 관계를 통한 의미부여 행위로 진실한 인간관계가 이루어져 ‘나’와 ‘너’만이 아닌 우리 모두가 다 함께 세상의 중심이 될 때 진정 아름다운 세상이 될 것임을 말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만 본다면, 이 시는 「꽃」과 차별화되지 않는, 이른바 「꽃」의 모작(模作)으로 평가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의 묘미는 4연의 마지막 두 행에 보이는 반전에 있다. 김춘수는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고 노래했지만, 장정일은 이것을 ‘끄고 tv을 때 끄고 켜고 싶을 때 켤 수 있는 / 라디오가 되고 싶다’고 뒤집음으로써 영원한 사랑이 아닌 즉흥적이고 순간적인 현대인들의 인스턴트 사랑을 풍자한다. 끄고 싶을 때 언제든지 끄고, 켜고 싶을 때 언제든지 켤 수 있는 라디오처럼 순간의 선택에 의한 일회적인 만남과 헤어짐이 횡행하는 오늘날의 사랑법을 풍자한 것이다. 김춘수가 「꽃」을 빌어 진지하고 묵직하게 인간의 존재론적 의미를 노래했다면, 장정일은 「꽃」에서 드러나는 형식정 특성과 사물 사이의 관계성을 기발한 착상과 가볍고 감각적인 어투를 통해 일회적 사랑이라는 현대 도시 산업 사회의 한 단면을 예리하게 비판한 것이다.
[작가소개]
장정일(蔣正一)
1962년 경상북도 달성 출생
대구 성서중학교 졸업
1984년 무크지 『언어의 세계』 3집에 시 「강정 간다」 등을 발표하여 등단
1987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희곡 「실내극」 당선
1987년 제7회 김수영문학상 수상
1988년 『세계의 문학』 봄호에 단편소설 「펠리컨」 발표
『시운동』 동인
1990년 소설 「아담이 눈뜰 때」를 발표
1996년 소설 『내게 거짓말을 해 봐』가 음란물로 판정되어 구속
시집 : 『햄버가에 대한 명상』(1987), 『길안에서의 택시 잡기』(1988), 『서울에서 보낸 3주일』(1988), 『상복을 입은 시집』(1989), 『천국에 못 가는 이유』(1991), 『지하인간』(19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