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9일 오늘의 역사
2022년 러시아 모스크바의 대형쇼핑몰 폭발사고 1명 사망 축구장 1개 면적 전소
오전 6시쯤 모스크바주 힘키시에 위치한 쇼핑몰 ‘메가 힘키’ 내 한 매장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당국은 소방관 70여명과 소방차 등 장비 20대를 현장에 투입했으나, 건물 구조 문제와 내부에 쌓인 가연성 제품 등으로 진화에 어려움을 겪었다.
큰 불길은 4시간40여분 만인 오전 10시40분쯤 잡혔다. 그러나 이날 화재로 7000㎡가량이 불에 타는 막대한 규모의 피해가 발생했다. 또 매장 경비원으로 추정되는 1명이 사망하였다
2022년 대구서 신호대기중인 차량 택시가 추돌하며 14중 추돌사고 발생
2021년 한국군 최초 여군 2성장군 탄생(정정숙 소장)
2016년 박근혜 대통령 탄핵소추안 찬성234, 반대56표로 국회 의결
2016년 12월 3일 오후 4시 10분, 더불어민주당, 국민의당, 정의당과 무소속 의원 171명이 헌법과 법률 위반을 이유로 "대통령(박근혜) 탄핵소추안"을 국회에서 발의했다. 더불어민주당 우상호, 국민의당 박지원, 정의당 노회찬 의원이 대표 발의했으며, 구체적인 사유로는 헌법과 법률 위반이 제시되었다.
헌법 위반 행위로는 최순실을 비롯한 측근들이 정책에 개입하고 국무회의에 영향력을 행사토록 했다는 점에서 대의민주주의 의무를 위배했으며, 이들이 인사에 개입하여 직업공무원제 위반, 사기업에 금품 출연을 강요하고 뇌물을 수수했다는 점에서 국민 재산권 보장·시장경제질서 및 헌법수호 의무를 위반했다고 지적했다.
또한 2014년 4월 16일에 발생한 세월호 침몰 사고에 대한 대응 실패로 헌법 10조인 '생명권 보장'을 위반했으며,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보호하기 위한 적극적 조치를 취하지 않아 직무 유기에 가깝다고 적시했다.
법률 위반 행위로는 재단법인 미르와 재단법인 케이스포츠에 삼성과 SK, 롯데 등의 기업이 출연한 360억 원 뇌물로 판단했고, 롯데가 70억원을 추가 출연한 것 등에 대해 뇌물죄와 직권남용, 강요죄를 적용했다.
국회는 2016년 12월 8일 대통령(박근혜) 탄핵소추안을 본회의에 보고하였다.
그리고 다음날(12월 9일) 표결에 들어갔다.
이 투표에서 투표자 299명 중 가(可, 찬성) 234명, 부(否, 반대) 56명, 기권 2명, 무효 7명으로 탄핵안을 가결시켰다.
예상보다 압도적인 표차로, 나머지는 반대(부) 56표, 무표 7표, 기권 2표다.
대통령 탄핵안이 국회에서 가결됨으로써 박근혜 대통령의 권한은 정지되고 황교안 국무총리가 대통령직 권한대행을 맡아 내치와 외교 안보를 총괄하게 되었다.
시민사회단체 관계자들로부터 장미꽃 한 송이 씩을 받아들고 입장한 여야 의원들은
오후 3시부터 정세균 국회의장의 사회로 탄핵안을 상정했다.
김관영 국민의당 원내수석부대표의 제안설명에 이어 오후 3시 23분부터
찬반(가부) 투표 끝에 정세균 의장이 4시 10분께 가결을 선포했다.
투표 불참가 1인은 새누리당의 최경환 의원이다.
이날 국회 방청석 266석중 106석이 새누리당 43석, 더불어민주당 40석, 국민의당 13석, 정의당 5석, 무소속 5석으로 할당되었으며 더불어민주당은 세월호 침몰 사고 유가족에게 방청석을 배정했다.
2014년 원전반대그룹(Who am I?) 한국수력원자력 해킹
2010년 롯데마트 저가치킨(‘통큰치킨’) 판매 논란
롯데마트가 2010년 12월 9일 전국 82개 매장에서 프라이드치킨 1마리를 일반 치킨 전문점의 1/3가격인 5000원에 판매하며 SSM과 프랜차이즈업체, 영세 사업자 사이에 역마진 판매 논란 및 제품원가·판매가 논란이 발생했다.
롯데마트는 9일부터 매장당 일일 최대 400마리까지 저가치킨('통큰치킨')을 판매하였다. 이에 대해 한국프랜차이즈협회는 롯데마트를 부당 염매 행위로 공정거래위원회에 신고하기로 결정하고, 정진석 청와대 정무수석이 자신의 트위터에 롯데마트의 판매에 대해 부정적인 내용을 등록하는 등 논란이 확대되자, 롯데마트 측이 16일부터 '5000원 치킨'의 판매 중단을 선언했다.
롯데마트의 저가치킨 판매 중단 선언 이후 기업형 수퍼마켓(SSM)과 소규모 영세 사업자 간의 역마진 논란은 사그러들었다. 그러나, 이에 대해 소비자들의 저가치킨 재판매 요구와 공정거래위원회의 치킨 프랜차이즈업체 판매가격 담합조사 등 소비자의 권리에 대한 논의로 논란이 확산되었다.
2010년 ‘금융 외길’ 양재봉 대신증권 창업주 별세
1925년 전남 나주에서 태어나 1943년 목포상고를 졸업하고 한국은행의 전신(前身)인 조선은행에 들어가면서 금융계와의 인연이 시작됐다. 1973년 대한투자금융을 설립했고, 1975년 중보증권을 인수해 대신증권으로 상호를 바꿔 증권거래소에서 상장했다. 1980년대에는 대신생명보험·대신경제연구소·대신개발금융·대신투자자문 등을 잇따라 세우며 대신증권을 종합금융그룹으로 성장시켰다.
한국의 후진적 증권업계에서 신념과 돌파력으로 새로운 증권거래 기법을 개발, 1980년대부터 온라인거래 시스템을 구축했다. 이 때문에 ‘대신증권 최초는 곧 증권업계 최초’라는 이야기가 나오기도 했다. 2001년 명예회장으로 물러나면서 일선에서 은퇴한 뒤로는 사회공헌 활동에 전념했다. 대신송촌문화재단을 설립해 장학사업, 소년소녀가장 지원, 사회복지시설지원사업 등 공익사업을 펼쳤다.
2008년 소설가 박연희 예술원 회원 별세
소설가 박연희(朴淵禧·90)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이 2008년 12월 9일 오전 10시15분 노환으로 별세했다. 고인은 1946년 문예 종합지 '백민'에 기자로 입사한 후 '대조', '문학' 등의 편집국장, 동아일보 문화부 차장, 한국 소설가협회 고문 등을 역임했다.
'쌀' '부르조아지의 후예' '분쟁 탈출기' '집행유예' '주인없는 도시' 등의 단편 소설과, '청색회관' '가면의 회화' '황제'(전 5권) '여명기' 등의 장편을 썼다. 보관문화훈장, 대한민국예술원상, 은관문화훈장 등을 받았다.
2000년 나와즈 샤리프 전 파키스탄 총리, 사면으로 풀려나 사우디아라비아로 출국
군부 쿠데타로 축출돼 수감생활을 해온 나와즈 샤리프(51) 전 파키스탄 총리가 9일 사면으로 풀려나 사우디 아라비아로 출국했다. 샤리프 전 총리는 이날 총리직에서 밀려난 지 14개월 만에 풀려나 사우디가 제공한 특별기편으로 출국했으며, 샤리프의 아버지와 아내, 아들, 수감 중이던 동생 등 친·인척 19명도 이날 함께 파키스탄을 떠났다.
군부는 이날 짧은 성명을 통해 “군부 지도자인 페르베즈 무샤라프 장군의 권고로 무하마드 라피크 파키스탄 대통령이 법에 따라 샤리프 전 총리의 잔여형량을 사면했다”고 밝힌 뒤 “국가와 국민을 위해 가장 이롭다고 생각해 내린 결정”이라고 덧붙였다. 또 사면으로 종신형은 면제됐지만, 5억루피(약 8300만달러)의 재산 몰수, 21년간 정치 재개 금지 등은 유효하다고 밝혔다.
샤리프의 실각 이후 샤리프가 이끌던 파키스탄 무슬림동맹(PML) 재건을 추진해온 아내 쿨숨은 이날 공항으로 떠나며 “우리는 도망가는 것이 아니라 쫓겨나는 것”이라며 사면을 위해 군부와 뒷거래했다는 소문을 부인했다. 그러나 파키스탄 정부는 샤리프가 심장병 치료문제로 무샤라프 장군에게 선처를 호소했다”고 밝혔다.
샤리프 전 총리는 지난해 10월 육군 참모총장 무샤라프가 이끄는 쿠데타로 축출된 뒤 테러 음모와 여객기 납치 등의 혐의로 기소돼 종신형을 선고받고 수감돼왔다.
2000년 바라크 이스라엘 총리 사임
바라크는 TV로 생중계된 가운데 “이스라엘은 비상사태을 맞고 있다”며 “폭력사태 완화와 평화협상 재개가 필요하기 때문에 국민의 신임을 다시 구하겠다”고 밝혔다.
바라크 정권은 팔레스타인과 유혈충돌 지속 의회의 조기 총선 추진 등 난국에 봉착해있고, 이를 정면돌파하기 위해 전격 사임을 택한 것으로 보인다고 외신은 전했다.
특히 현직 의원이어야 총리 선거에 출마할 수 있는 특별법 규정을 이용, 바라크는 우익 강경파 지도자인 네타냐후 전 총리의 출마 봉쇄를 노리고 있다는 지적이다. 작년 5월 선거에서 패배, 의원직을 사임했던 네타냐후는 최근 여론조사에서 48% 대 28%로 바라크에 앞서 있다.
우익 야당 리쿠드당은 “바라크는 실패자일 뿐 아니라 비겁자”라고 사임조치를 비난했다.
1999년 5월 취임한 바라크는 지난 9월 말 이후 팔레스타인의 유혈 저항으로 평화협상이 교착에 빠지면서 입지가 약화됐다. 특히 연정을 구성했던 3개 정당이 “팔레스타인측에 지나치게 양보한다”며 탈퇴, 바라크 총리는 5개월여간 소수파 내각을 이끌어왔다. 바라크 총리는 우익 리쿠드당에 거국 연정을 제의했으나, 거부당했었다.
1997년 4자회담 1차 본회담 제네바서 개최
1996년 북한을 탈출해 홍콩을 경유 우리나라에 망명을 신청한 김경호씨 일가족
17명이 김포공항 도착
1994년 김영삼 대통령, 폴란드 바웬사 대통령과 정상회담
1992년 경남 거창 덕유산 상공서 훈련 중이던 F4D팬텀기 추락
1992년 미군 해병대, 유엔평화유지군의 일원으로 소말리아에 첫상륙
기아에 허덕이는 소말리아에 미군을 중심으로 한 다국적군이 투입됐다. 1991년 1월 바레 독재정권이 무너진 후 시작된 내전 속에서 35만명이 기아와 질병, 전쟁으로 죽어갔고 2백만명이 아사 직전에 놓여있었다. 유엔 안보리가 12월 초 소말리아에 대한 병력파견을 만장일치로 결의한 데 이어 12월 9일 미 해병대가 수도 모가디슈에 상륙하면서 ‘희망회복’ 작전이 시작됐다.
다국적군의 주임무는 구호물자의 안전한 수송, 구호반원 및 민간인들의 안전을 확보하는 일로, 인도적 차원에서의 군사개입이라는 점에서 기존의 군사개입과 구별됐다.
1991년 한국, 국제노동기구(ILO)에 151번째 회원국으로 가입
1991년 소비에트연방 소멸 선언, 러시아-우크라이나-벨로루시 등 독립국가연합 결성 합의
1991년 「웅진여성」 12월호 ‘에이즈 복수극’ 허위기사로 판명되어 파문
1991년 서울방송(SBS) TV 개국
새민방 서울방송(SBS)이 1991년 12월 9일 오전10시 첫 전파를 발사, 11년만에 TV 3국시대가 열렸다. 채널 6,50㎾의 출력으로 서울 경기와 충청, 강원 일부지역을 시청권으로 하는 SBS TV는 개국특집 첫 프로그램으로 ‘탄생 SBS TV’ 라는 10시간짜리 기획물을 방송했다.
개국에 앞서 SBS는 이날 오전 서울 여의도 서울방송 사옥 1층 로비에서 최창윤 공보처장관, 송언종 체신부장관, 이민섭 국회문공위원장, 고병익 방송위원장, 서기원 KBS 사장, 최창봉 MBC 사장, 존 아고글리아 미국 NBC 제작담당사장, 사사키요시오 일본 NTV 사장 등 국내외 방송계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개국테이프 커팅행사를 가졌다. 윤세영 SBS 사장은 오전 10시 TV 전파 발사버튼을 누른 후 개국인사에서 “서울방송의 등장으로 공영방송 체제는 종언을 고하고, 경쟁을 통한 방송발전시대가 열렸다”며 “시청자의 채널선택권을 존중, 맞대응을 지양하고 건강한 방송을 추구해나가겠다”고 말했다.
서울방송은 1990년 7월 민방도입 방송법 통과, 10월 민방지배주주선정, 11월 서울방송 창립주총, 1991년 3월 라디오 개국. 그리고 이날 TV 개국 순(順)으로 숨가쁘게 달려왔다. 서울방송은 세계에서 유래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짧은 기간인 1년 1개월만에 첫 전파를 발사했다.
1990년 바웬사, 폴란드 대통령 당선
1990년 12월 9일. 바웬사가 폴란드 대통령선거에 출마해 당선됐다. 바웬사는 폴란드의 자유노조 지도자로 1967년 그다니스크의 레닌조선소에 취직, 노동운동에 참여하게 됐다.
1976년 파업 때 노동자들의 진정서를 만들어 돌리다가 해고된 것을 계기로 직업적인 노동운동가가 됐다. 1980년 8월 14일 식료품값 인상으로 시작된 파업 당시에 파면된 그다니스크 레닌조선소에 들어가 그곳의 노동조합을 이끌고 대정부 투쟁에 나서 승리로 이끌었다.
1983년 노동자로는 처음으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했으며 1989년 4월 자유노조 합법화와 개혁을 정부로부터 약속받는 등 폴란드의 정치지도자로 부상했다.
1983년 버마, 두 아웅산테러범에 사형 선고
1982년 소련 두 우주인. 211일간의 우주 체공 기록을 세우고 귀환
1981년 나토 국방상회의, 최초로 공동성명 없이 폐막
1981년 북한군, 중부전선 아군초소에 총격
1981년 미국, 폴란드사태로 전군에 비상경계령
1981년 소련 사하로프 박사 18일 만에 단식 중단
사하로프는 소련 정부가 며느리의 미국행을 허가하지 않자, 자신의 인권활동 때문이라며 11월22일부터 단식투쟁에 돌입했었다.
1975년 노벨평화상 수상자이자 ‘소련 수소폭탄의 아버지’로 소련 내 인권투쟁의 상징적 인물이던 사하로프의 단식은 세계적 핫뉴스였다.
소련 과학아카데미 최연소(32세) 정회원, 최고 영웅들에게만 수여하는 스탈린상·레닌상 수상 등 화려한 경력을 지닌 그가 ‘반(反)체제’로 돌아선 것은 핵무기의 윤리성에 대한 회의 때문이었다. 미소 긴장완화와 협력을 촉구하면서도 소련의 민주화를 선행요건으로 주장한 그를 크렘린은 ‘반체제학자’ ‘인민의 적’으로 비난했다.
소련 인권위원회 발족(1970년), 사형제 철폐와 정치범 사면 요구(1971년), 소련 민주화를 배제한 동서데탕트의 무용론(1973년) 등 인권을 위한 그의 발언이 계속될 때마다 크렘린은 강제추방으로 대응했고, 사하로프는 5번의 단식으로 항거했다. 2001년 러시아의 여론조사에서 사하로프는 ‘20세기 러시아인’ 가운데 레닌·스탈린에 이어 3위에 올랐다.
1976년 정부, 미국의 청와대 도청 비난
1976년 조치훈 7단 일본 왕좌전 타이틀 쟁취
1975년 유엔총회 고문금지선언 채택
1975년 대법원, 염재만의 소설 ‘반노’에 무죄판결
대법원은 그동안 예술성과 음란성 시비로 세인들의 비상한 관심을 끌었던 소설 `반노`의 작가 염재만씨에 대해 1975년 12월 9일 상고심공판에서 무죄판결을 내렸다.
1969년 4월 수원시상공회의소 조사진흥과장으로 근무하고 있던 염재만씨는 변태적인 남녀가 동거생활을 하면서 벌이는 정사장면을 노골적으로 묘사한 소설 `반노`를 1천5백권 팔았다는 혐의로 검찰에 불구속기소돼 1심에서 벌금 3만원의 유죄판결을 받았다.
당시 이 소설에 대한 대법원의 무죄판결은 `채털리부인의 사랑`을 음란문서로 본 일본최고재판소의 견해보다 훨씬 진보적인 것이었으며 예술작품에서 허용되는 남녀 성애묘사 표현의 한계를 넓혔다는 점에서 크게 주목받았다.
1974년 유엔총회, 남북대화 촉진 결의
1971년 파월(派越) 국군 첫 철수부대 부산항에 도착
1968년 12월 9일 이승복군 무장공비에 의해 피살
1968년 12월 9일, 울진 삼척지구에 투입된 무장공비에 의해 9살난 이승복군이 “공산당이 싫어요”를 외치다 입이 찢겨진 채 무참히 살해됐다. 이 사건은 당시 조선일보 기자가 이튿날 10일, 이를 특종 보도함으로써 이슈화됐다.
그 내용인 즉, 9일 오후 6시경 식량 조달 차 무장공비가 이군의 집에 들이닥쳤고 그중 한 무장공비가 “야, 너는 북한이 좋니? 남한이 좋니?”하고 묻자 이군이 서슴없이 “우리는 북한이 싫어요. 공산당은 싫어요”라고 대답, 이에 공비가 이군의 입속으로 칼을 들이대 살해하는 천인공노할 짓을 저질렀다는 것이었다. 이후, 일명 ‘이승복 사건’은 그의 용기있는 죽음을 기리며 초등학교 도덕 교과서에 실렸고 그의 고향인 강원도 평창군 용평면에는 이승복기념관이 건립됐다.
그러나, 이 사건은 그 진위를 둘러싸고 30여년에 걸쳐 안티조선 세력과 조선일보사간 끊임없는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던 2002년 9월 3일, 이 끝없는 논쟁에 종지부가 찍혔다. 무장공비에 의한 이승복군의 용기 있는 죽음이 역사적 사실이며, 이를 특종 보도한 당시 조선일보의 기사는 소설이나 작문이 아니라 ‘사실 보도’라는 법원의 판결이 나온 것이다. 조선일보사 내 자료실에서 발견된 당시 현장 사진 15컷과 승복군의 형 학관씨와 주민들의 증언이 큰 증거가 됐다.
법원은 조선일보의 당시 보도에 대해 1998년 ‘오보(誤報)전시회’와 ‘미디어오늘’ 등 일부 언론을 통해 “기자가 현장에도 가지 않고 작성한 소설”이라는 허위 사실을 유포, 조선일보의 명예를 훼손한 혐의로 관련자들에게 실형을 선고했다
1964년 한국 최초의 TV일일연속극인 `눈이 나리는데` 매일 저녁 7시 40분에 20분씩
방영.
1963년 UN정치위원회, 한국단독초청안 가결
1961년 콜롬비아, 쿠바와 단교
1961년 탄자니아, 영국으로부터 독립
1960년 라오스 퓨마 수상 망명
1957년 서울대 문리대학보 논문 필화 사건
1957년 12월 9일자 서울문리대학보 `우리의 구상`에는 `모색-무산대중 체제로의 지향`이라는 제목의 논문이 실렸다. 필자는 학생 유근일군. 이 글은 한국 사회 성격을 분석하고, 소수 지배층과 광범위한 대중의 대립의 극복 방법으로 민주 사회주의를 주장했다. 논문의 맨 마지막에는 "무산대중은 단결하자" "새로운 조국을 갈구한다"는 결론도 들어있었다.
이 글을 읽은 이희승 학장은 즉각 사태의 심각성을 감지하고 관계 교수회의를 소집했다. 학보를 즉각 회수하라고 지시했으나 1천부 중 3백부는 회수할 수가 없었다. 학보 발행기관인 `신문연구회`는 즉각 해산되고 편집책임학생 2명은 무기정학 당했다. 필자에 대해서는 좀더 신중히 고려하기로 했다.
그러나 사태는 갈수록 악화됐다. 5일 뒤인 12월 14일 문교부 차관이 이 사건에 대해 기자들에게 답변하면서 `서울문리대에 좌익교수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했고 이 말은 신문에 크게 보도됐다. 그리고 이날 밤 유근일은 퇴학처분을 당하고 구속됐다. 학계와 언론계 등에서 학문의 자유를 짓밟는 처사라는 비난이 쏟아졌고 문리대 구내에는 좌경 유인물이 붙었다. 유근일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기소되었으나 재판결과는 무죄였다. 유근일은 4·19혁명 이후에야 복교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다음해 일어난 5·16 군사정변은 그를 다시 교도소에 갇히게 했다.
판결은 문제의 글이 민주 사회주의에 기조를 둔 순수 학문 연구에 불과하다고 보았으나, 이 사건으로 인해 극단적인 반공주의가 지배하던 당시 큰 충격을 받았으며 사건에 대한 학교와 정부의 과잉 대응을 비난하는 여론이 높아졌다. 또한 학문의 자유, 대학의 자유 문제가 공론에 붙여지는 계기가 되었다.
1955년 서독 할슈타인 독트린 발표
1954년 자유당 12의원 탈당
1954년 공군 첫 제트기 조종훈련 시작
1952년 영남지방 50년 만에 대폭설
1950년 그리스군 한국전 참전 부산항 도착
그리스군은 1950년 12월 9일 부산항에 도착했다. 낯선 한국 땅 적응을 마친 뒤 여러 전투에 투입됐다.
'381고지' 전투 참전한 그리스군 이 가운데 그리스군이 처음으로 벌인 가장 큰 전투가 바로 이듬해 1월 29일 이천 서북쪽에서 치러진 ‘381고지’ 전투다. 지금의 여주휴게소 인근이다. 그리스군은 이 381고지 전투에서 전과를 올렸다. 이후 다른 지역에서도 중공군과 수없이 맞붙었다. 특히 휴전을 앞에 둔 1953년 7월 15일 중공군의 포격으로 그리스군의 사상자가 속출했다. 이런 불리한 상황에서도 진지를 굳건히 지켜냈다. 중공군은 병력을 증강해 2차 공격을 가했지만 결국 패하고 말았다. 그리스는 한국에 5532명의 군인과 8명의 간호장교를 파병했다. 이 가운데 186명이 전사하고 610명이 부상했다.
1948년 제3차 유엔총회에서 제노사이드협약 채택
1946년 국립대학설립안 반대, 동맹휴학 시작
1945년 아놀드 군정장관 해임. 후임에 러치 소장
1941년 임시정부, 태평양전쟁 발발 하루 만에 대일 선전포고
일본의 진주만 기습으로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41년 12월 9일 대일(對日) 선전포고를 발표했다. 개전 하루 만에 김구 주석과 조소앙 외교부장 명의로 일본에 전쟁을 선포한 것이다. 1951년 9월, 48개국 연합국과 일본간 강화조약(講和條約)이 샌프란시스코에서 체결될 때 이승만 대통령이 이 선전포고를 근거로 “우리도 연합국 일원으로 조인에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했을 만큼 임시정부 26년사에 중요한 사건이었다. 조인 참여는 일본의 반대로 무산됐다.
선전포고는 광복군이라는 무장병력을 갖췄기에 가능했다. 1940년 9월 17일 창설된 광복군은 출범 당시 부대원이 30여명에 불과했지만, 조선의용대 일부 세력과 중국 국민당의 군사원조를 받아 체계를 갖춰갔다. 1943년 8월 13일에는 인도·버마 전선에서 9명의 광복군 공작대가 연합군 일원으로 활약했고, 전쟁 막바지인 1945년 5월부터는 미국 전략정보기구(OSS)와 합작해 유격전 특수훈련을 받으며 한반도 침투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일본의 무조건 항복은 광복군이 조국해방전선에 뛰어들 기회를 날려버렸다. 김구 주석은 그 실망감을 백범일지에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일”이라고 기록했다.
현재 대만정부가 보관 중인 것으로 알려진 대일선전포고 원본에는 포고 일자가 12월 10일이어서 지금까지 9일과 10일 양론이 분분하지만, 광복군동지회는 해마다 12월 9일을 기념하고 있다. 오늘이 그 날이다.
1937년 스웨덴의 발명가 달렌 사망. 솔벤틸 발명으로 1912년 노벨물리학상 수상
1930년 조선총독부, 국세조사결과 발표. 10월1일 현재 한국인구 2105만 7969명
1905년 프랑스 정교(政敎)분리법 제정
1868년 노벨화학상(1918년) 수상한 독일 화학자 프리츠 하버 출생
1868년 일본 천황제 수립
1636년 병자호란 발발
1608년 영국 시인 존 밀턴 출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