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24일 [부활 제4주간 수요일]
요한 12,44-50
절대 내 생각에서 나온 명령을 해서는 안 됩니다
금쪽같은 내새끼, 188회 ‘엄마의 말을 따라야 사는 위기의 13세 영재 아들’에서 13세 아들은
영재 대안학교에 다니면서 검정고시로 이미 고등학교까지 졸업하고 대학교 시험 준비 중입니다.
대학도 안 다니고 대학원에 바로 진학하는 게 어머니의 목표입니다.
그런데 아이가 조금씩 비뚤어지기 시작합니다.
지나치게 스마트폰 게임을 좋아하는 것입니다.
어머니는 아이의 게임 중독을 고쳐 달라고 제보하였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문제는 어머니에게 있었습니다. 아이는 공부가 어렵고 친구도 없다 보니 쉬는 시간 잠깐만 게임을 하려는 것뿐이었는데 어머니가 지나치게 아이에게 욕심을 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엄마는 자신의 엄마에게 큰딸로서 희생을 강요받아 대학에 가지 못한 설움을 자신은 아들을 잘 키우려 영재로 만들려고 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이에게 공부시켜서 훌륭한 사람으로 만들겠다는 것이 무슨 잘못일까요?
왜 어떤 명령은 사람을 살리는데, 어떤 명령은 사람을 죽일까요?
나는 어떻게 사람을 살리는 명령을 하며 착한 목자처럼 자녀나 가족을 이끌 수 있을까요?
좋은 명령이라고 강요하기만 해서는 안 된다는 게 중요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이야기할 것인지 친히 나에게 명령하셨기 때문이다.
나는 그분의 명령이 영원한 생명임을 안다.
그래서 내가 하는 말은 아버지께서 나에게 말씀하신 그대로 하는 말이다.”
예수님은 우리를 이끄시기 위해 명령하십니다. 그러나 당신의 생각으로 하지 않으시고 아버지의 뜻을 그대로 전할 뿐입니다.
이 과정에서 예수님의 자아가 죽습니다.
당신의 생각대로 하지 않기 때문에 당신의 영광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내 생각으로 하는 말은 자아의 말입니다.
나를 위해 자기를 포기한 적이 없는 자아의 명령은 상대를 죽입니다.
반면 나를 위한 명령이 피와 함께 온다면 그 명령은 생명이 됩니다.
양식이 되기 때문입니다.
명령은 상대의 속으로 들어가는데 내가 살아있으면 그 속에서 상대의 피를 먹는 기생충처럼 됩니다.
반면 죽었으면 상대에게 영양분이 되는 것입니다.
정은표 김하얀 부부는 부모의 모델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아들 정지웅은 서울대 22학번이 됩니다.
그렇다고 부모가 아이에게 공부를 강요했을까요?
아버지는 자녀가 친구들과 잘 어울리기만을 바랍니다.
그런데 아들은 친구들 사이에서 인기가 이미 높습니다.
그렇더라도 아이의 공부를 방해합니다.
키 크려면 일찍 자라고 하고 주말엔 공부하지 말고 농장에 가서 고기 구워 먹자고 합니다.
아이들은 엄마에게 자신들의 공부 시간을 챙기려고 따집니다.
엄마 김하얀 씨는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아빠가 가자고 그러면 가는 거지, 이것들이!”
이런 엄마의 명령은 자아가 빠진 명령입니다. 남편에게 순종하는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명령은 아이들에게 생명이 됩니다.
내 생각을 강요하는 게 아니게 되기 때문입니다.
내 생각이 하느님 뜻인지 깊이 고민하고 그렇다는 느낌이나 확신이 있다면 밀어붙여야 합니다.
그러나 절대 내 생각에서 나온 명령을 해서는 안 됩니다.
내 명령이 상대 속으로 가서 기생충이 되거나 양식이 되거나는 나의 자세에 달려있습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4월24일 [부활 제4주간 수요일]
사도행전 12,24―13,5ㄱ
요한 12,44-50
우리 죄가 아무리 크다 해도 괜찮습니다.
하느님 자비는 더욱 크기 때문입니다!
밥먹듯이 죄를 짓고 살아가는 우리에게 참으로 위로가 되는 예수님 말씀이 있습니다.
“나는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러 왔다.”
심판자가 아니라 구원자! 생각만 해도 마음이 따뜻해집니다.
사실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의 머릿속에 각인되어 있던 하느님 상은 피도 눈물도 없는 심판관으로서의 모습이 우세했습니다.
그래서 유다 백성들은 자신들의 우상숭배 앞에 크게 진노하시며 벌주시는 심판과 단죄의 하느님이 그리도 두려웠습니다.
저지른 잘못이나 악행의 경중에 따라 처벌하시는 징벌의 하느님 얼굴을 피하고만 싶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모습은 전혀 딴 판이었습니다.
그분께서 공생활 기간 내내 입에 달고 다니신 말씀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심판이 아니라 구원!”
은혜롭게도 육화강생하신 예수님께서는 심판자나 처벌자의 모습이 아니라 한없이 부드럽고 자상한 아버지의 모습으로, 때로 더없이 섬세하고 다정다감한 어머니의 모습으로, 여행길의 절친한 동반자로, 끝도 없이 기다리고 용서하는 그런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유는 ‘단죄가 아니라 구원’ 때문이라는 사실, 얼마나 감사해야 할 일인지요.
오늘도 제 삶 안에 길게 드리워진 짙은 죄의 뿌리를 슬픈 얼굴로 바라봅니다.
밥 먹듯이 지어온 숱한 죄와 과오 속에 살아온 제 지난날을 돌아봅니다.
정말 부끄럽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으로 인해 다시금 희망을 갖습니다.
우리의 죄가 진홍빛 같을지라도 죄질이나 죄 값은 뒷전이신 예수님, 오직 우리들의 해방, 구원, 영원한 생명에만 관심이 지극하신 자비의 예수님 때문에 오늘 다시 한 번 힘차게 일어서야겠습니다.
아무리 우리 죄가 크다 할지라도 결국 우리는 모두 구원될 것입니다.
우리 죄가 아무리 크다 해도 괜찮습니다.
하느님 자비는 더욱 크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스스로를 단죄하고 속박하지 않는 한, 결국 우리는 무상으로 베푸시는 하느님 은총의 나라로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심판이 아니라 구원하시는 예수님 앞에 오늘 우리 각자가 취해야 할 태도가 한 가지 있습니다.
오늘 우리 스스로를, 그리고 우리 교회 공동체를 유심히 바라보면 성(聖)과 속(俗)이 뒤범벅되어 있습니다.
어제 천국을 살았지만 오늘은 지옥 체험을 합니다.
어제 천사의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오늘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사탄의 얼굴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 각자 개별 그리스도인들은, 그리고 우리 교회 공동체는 시시각각으로 늘 새롭게 태어나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다해야 하는 것입니다. 부단히 예수님께로 나아가야합니다. 그분께서 매일 건네시는 생명과 구원의 복음을 듣고 살아야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심판받지 않고 구원되는 지름길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부활 제4주간 수요일 강론>
(2024. 4. 24. 수)(요한 12,44-50)
<내가 한 바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그를 심판할 것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나를 믿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보는 것이다.
나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왔다.
나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어둠 속에 머무르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누가 내 말을 듣고 그것을 지키지 않는다 하여도, 나는 그를 심판하지 않는다.
나는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러 왔기 때문이다.
나를 물리치고 내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를 심판하는 것이 따로 있다.
내가 한 바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그를 심판할 것이다.
내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이야기할 것인지 친히 나에게 명령하셨기 때문이다.
나는 그분의 명령이 영원한 생명임을 안다. 그래서 내가 하는 말은 아버지께서 나에게 말씀하신 그대로 하는 말이다(요한 12,44ㄴ-50).”
1) 여기서 “나를 믿는 사람”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는 신앙인”입니다.
“나를 믿는 것이 아니라”는, “인간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라”이고,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것이다.”는, “하느님을 믿는 것이다.”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을 믿는 것은 곧 하느님을 믿는 것이다.”,
즉 “예수님은 하느님”이라는 우리 교회의 신앙을 나타냅니다(요한 1,1).
히브리서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아드님은 하느님 영광의 광채이시며 하느님 본질의 모상으로서, 만물을 당신의 강력한 말씀으로 지탱하십니다.
그분께서 죄를 깨끗이 없애신 다음, 하늘 높은 곳에 계신 존엄하신 분의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히브 1,3).”
이 말에서 ‘하느님 본질의 모상’이라는 말은, “예수님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보이는 모습이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나를 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보는 것이다.” 라는 말씀도, “예수님은 하느님 본질의 모상”이라는 말과 같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외모’가 예수님과 같다는 뜻은 아닙니다.
지금까지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기 때문에(1요한 4,12), 하느님의 외모가 어떤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어떻든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들은 ‘하느님의 사랑’을 나타내고, “예수님의 사랑은 곧 하느님의 사랑”이라고 우리는 믿고 있습니다.
2) “예수님은 하느님이신 분”이라는 신앙이 왜 그토록 중요하냐고 물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수난, 죽음, 부활이 우리에게
대단히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만일에 예수님이 하느님이신 분이 아니라 한 인간일 뿐이라면,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은 하느님을 섬기다가 억울하게 죽은 어떤 순교자의 희생일 뿐이고,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 라는 ‘어떤 사람의 일’로 그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느님이신 분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은 하느님이신 분이 인류 전체의 죄를 대신 속죄하기 위해서 당신의 목숨을 속죄 제물로 바치신 일이 되고, 그 속죄의 효과는 전 인류에게 미치게 됩니다.
또 예수님의 부활은 메시아께서 죽음이라는 것을 완전히 정복하신 일이 되고,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으면 예수님처럼 부활할 수 있다는 희망을 주는 일이 됩니다.
3) “나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왔다.”는 “나는 사람들을 구원하려고 왔다.”입니다.
요한복음서 저자는,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이 세상에 왔다(요한 1,4.9).” 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빛’은 구원과 생명을, ‘어둠’은 죽음과 멸망을 상징합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어둠 속에 머무르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라는 말씀은, “나는 사람들을 죽음에서 해방시켜 주려고 왔다.” 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나를 믿는 사람”이라는 말은 중요한 말입니다.
죽음에서 해방되기를 바란다면, 그리고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바란다면,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4) 47절의 말씀은, 앞의 3장에 있는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요한 3,17).” 라는 말씀을 다시 확인하신 말씀입니다.
48절의 “내가 한 바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그를 심판할 것이다.” 라는 말씀은, “내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곧 심판받기를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구원받지 못하는 것 자체가 곧 심판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심판받은 상태가 되는 것은, 마지막 날이
되기 전에, 즉 ‘지금’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지금’ 예수님 말씀을 믿고 받아들이면 ‘지금’ 구원이 시작되고, 반대로 ‘지금’ 거부하면, ‘지금’ 심판받은 상태가 됩니다.>
여기서 ‘내 말’, 즉 예수님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복음과 예수님의 가르침들을 가리킵니다.
5) 49절은, ‘예수님 말씀’은 곧 ‘하느님 말씀’이라는 것을 다시 강조하신 말씀인데, 당신의 말씀을 거부하는 것은 곧 하느님 말씀을 거부하는 것이며,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을 거부하는 일이라는 것을 강조하신 말씀입니다.
50절의 “나는 그분의 명령이 영원한 생명임을 안다.” 라는 말씀은, 사람들을 구원하고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라는 것과 그 뜻을 실현하기 위해서 당신이 세상에 오셨음을 나타내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베드로 사도의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요한 6,68).” 라는 신앙고백에 연결됩니다.
“그래서 내가 하는 말은 아버지께서 나에게 말씀하신 그대로 하는 말이다.”는 “그래서 나는 아버지의 뜻을 그대로 실현하기 위해서 말한다.”인데,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바란다면
당신의 말을 믿고 받아들이라는 ‘권고 말씀’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