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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18일 오늘의 역사
2023년 침몰된 타이태닉호 관광용 심해 잠수정 ‘타이탄’호 수중폭발 탑승객 전원 사망
타이탄호는 오전 잠수 시작 1시간45분 만에 연락이 두절된 지 나흘 만에 잔해를 발견 하였으며 이는 잠수정 내부 폭발 사고가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수색 과정에서 이틀에 걸쳐 쿵쿵거리는 수중 소음이 탐지돼 실종자들이 살아있는 게 아니냐는 희망어린 전망이 나오기도 했지만, 탐지된 소음과 타이탄 사이에는 아무 관계가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 잠수정에는 운영회사인 오션게이트 익스페디션의 스톡턴 러시 최고경영자(CEO)와 영국 국적의 억만장자 해미쉬 하딩, 파키스탄계 재벌 샤자다 다우드와 그의 아들 술레만, 프랑스의 해양 전문가 폴 앙리 나졸레가 타고 있었다. 이 타이탄호의 탑승요금은 3억4천만원이다
2023년 멕시코 서부 캘리포니아만에 규모 6.4 강진 발생
2022년 피아니스트 임윤찬(18) 미국 반 클라이번 국제 콩쿠르에서 역대 최연소로 우승
2019년 경기도 연천 생물권보전지역(DMZ 제외한 연천군 전역) 국내 7번째로 유네스코 등재
2015년 한국여자축구대표팀(감독 윤덕여) 2015 캐나다 여자 월드컵 스페인에 2-1로 역전승(조소현 김수연 골) 사상 첫 승 첫 16강.
2015년 황교안 국무총리 취임
2015년 프란치스코 교황 기후변화에 대한 회칙 발표, 기후변화에 맞선 행동 촉구
2015년 페이스북 창업자 마크 저커버그, 불법 체류 청소년에 55억원 기부
미국의 페이스북 창업자 마크 저커버그와 부인 프리실라 챈이 18일 미국 내 불법 체류 학생들의 대학 진학을 돕는 장학재단에 500만달러(약 55억원)를 기부했다.
미국은 어릴 때 부모를 따라와 본인 뜻과 상관없이 불법 체류자 신분이 된 청소년에 대해선 추방을 유예해주고 있다.
저커버그는 “미국은 이민자들이 세운 나라”라며 “똑똑하고 부지런한 젊은 이민자들이 잠재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고 말했다. 기부금은 앞으로 5년간 샌프란시스코 지역 학생 400여명의 학비 지원에 쓰인다.
2015년 하버드대 동문회 첫 한인 회장 나와
한인 변호사가 미국 명문 하버드대의 신임 동문회장으로 선출됐다.
하버드대 동문회는 신시아 토레스 현 동문회장의 후임으로 시카고의 법률회사 ‘시들리 오스틴’의 파트너인 폴 최(51·한국명 최정열) 변호사를 새 동문회장으로 선출했다고 하버드대 교지인 하버드크림슨이 18일 전했다. 하버드대 동문회장에 한인이 선출된 것은 최씨가 처음이다.
최 회장은 최홍영 전 위스콘신 의대 교수의 외아들로, 한국에서 태어나 세 살 때 부모를 따라 시카고로 이민 갔다. 그는 1986년 하버드대 경제학과, 1989년 하버드대 법학대학원을 졸업하고, 1990년부터 시들리 오스틴에서 기업 인수합병(M&A) 전문 변호사로 활동했다. 그동안 사모펀드인 KKR의 ‘퍼스트 데이터’ 인수, 모건스탠리와 ‘디스커버 파이낸셜’의 분할 등 여러 건의 M&A와 기업 분할에서 법률 자문을 맡았다.
2002년엔 시카고 경제 전문지인 크레인스가 뽑은 ‘성공한 40세 미만 40인’에 선정됐고, 하버드대 시카고 지역 동문회장을 지냈다. 최 신임 회장은 7월 1일부터 하버드대 동문회장으로 활동하며, 임기는 1년이다.
2015년 미국 지상파 메인 뉴스 첫 흑인 앵커 탄생
미국에서 처음으로 흑인이 단독으로 지상파 방송의 메인 뉴스 앵커를 맡게 됐다.
18일(현지 시각) 앤드루 랙 NBC방송 회장은 저녁 메인 뉴스인 나이틀리뉴스의 진행자로 흑인인 레스터 홀트(56)를 정식 임명했다고 발표했다. 홀트는 종전 메인 앵커였던 브라이언 윌리엄스(55)가 이라크전쟁과 관련한 무용담을 늘어놓았다가 거짓으로 들통나 지난 2월 하차한 뒤 임시 앵커로 활동해왔다. 흑인이 미국 지상파 메인 뉴스의 단독 앵커가 된 것은 처음이다.
캘리포니아주 출신인 홀트는 방송 경력 34년의 베테랑이다. 1981년부터 19년간 CBS의 뉴욕, LA, 시카고지국에서 근무했다. 이후 2000년 NBC로 옮겼으며, 2007년부터 주말 나이틀리뉴스의 앵커를 맡았다
2015년 116세 세계 최고령 할머니 별세… 19세기 출생자 둘 남아
116세 세계 최고령자인 제럴린 탤리 여사가 미국 미시간주 자택에서 평온한 상태로 숨을 거뒀다고 현지 언론이 18일(현지 시각) 보도했다.
1899년 5월 태어난 탤리는 지난 4월 당시 기준 세계 최고령자였던 미국 아칸소주의 거트루드 위버(여·1898년 7월생)가 숨지면서 세계 최고령자가 된 지 두 달 만에 숨졌다.
탤리의 사망으로 세계 최고령자 타이틀은 역시 미국인인 뉴욕의 115세 수재나 무샤트 존스(여·1899년 7월생)에게로 넘어갔다. 미국의 민간 연구기관인 노인학연구그룹(GRG)은 1800년대에 태어나 생존한 사람이 존스를 포함해 세계적으로 2명뿐인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역대 세계 최고령자로 기네스북에 오른 사람은 프랑스 여성 진 칼망이며, 122년 5개월을 살고 1997년 숨졌다.
2013년 『난중일기』와 ‘새마을운동기록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확정
2013년 한국축구 8회 연속 월드컵 본선 진출 확정
2012년 독일의 ‘한국학 대부’ 브루노 레빈 교수 별세
레빈 교수는 독일과 유럽에 한국학 뿌리를 내리게 한 한국학 1세대 학자로 연구와 저술, 후진 양성 등 다방면에 걸쳐 큰 족적을 남겼다. 독일 뮌헨대에서 일본어문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독학으로 한국학을 공부했다.
청년 시절 연구차 일본을 방문했을 때 직접 배를 타고 부산으로 건너와 경주까지 답사했다. 대부분 서구학자가 한국을 ‘일본의 뒷마당’ 정도로 여기던 시절이었다.
그 후 ‘한국어 동사 형태론’ ‘한국어 입문’ 등 한국어와 한국사에 관한 연구는 물론, 한국 문화가 일본 문화 발전에 미친 역할에 관한 수많은 논문과 저서들을 발표했다. 백제어가 고대 일본어 형성에 미친 영향을 밝혀낸 연구는 지금도 학계에서 회자된다.
2011년 한국 미술 시장 이끈 '인사동 터줏대감' 김창실 선화랑 대표 별세
1957년 이화여대 약대를 졸업하고 결혼한 후 부산으로 간 새댁은 약국 개업 기념으로 평소 좋아하던 도상봉의 10호짜리 '라일락'을 샀다. 1977년 4월, 서울 인사동에 화랑을 열고 수집가에서 화랑 주인으로 변신했다.
황해도 황주 출신인 그는 그림 수집이 취미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릴 때부터 미술을 좋아했지만 부모님 권유로 약대에 갔다.
개관기념전인 '김동수·송수남·하태진'전으로 시작해 30여년간 400여회의 전시회를 기획했다. . 1979~ 1992년 미술교양지 '선(選) 미술'을 냈고 1984년 상업화랑으로는 처음으로 유망 작가들을 지원하는 '선 미술상'을 제정해 매년 시상했다. 한국화랑협회장을 두 차례 지냈고 2009년엔 문화예술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화랑 경영자로는 처음으로 옥관문화훈장을 받았다.
2004년 피아니스트 안수진씨, 한국인 첫 슈만콩쿠르 3위 입상
2004년 영생교주 조희성씨 사망
서울구치소에 수감 중이던 영생교 승리재단 총재 조희성(曺熙星·72)씨가 18일 오후 4시30분쯤 식은땀을 흘리며 호흡곤란 증세를 호소, 인근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증세가 악화돼 19일 오전 5시10분쯤 사망했다.
양봉태 법무부 교정국장은 “서울구치소측은 응급실로 이송된 조씨의 증세가 악화되자 구속집행정지를 신청했으며 대법원의 승인을 받아 18일 오후 8시50분쯤 가족에게 조씨의 신병을 인도했다”고 말했다. 만성 신부전증을 앓아온 것으로 알려진 조씨는 5명이 생활하는 노인방에 수감돼 있었다.
조씨는 지난 90년 교단을 배신했다는 이유로 신도 6명을 살해하도록 지시한 혐의로 작년 8월 구속 기소돼 올해 2월 1심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러나 지난달 24일 2심에선 주요 증인이 진술을 번복, 범인도피 혐의만 인정돼 징역 2년을 선고받고 상고심에 계류 중이었다.
한편 올해 초 항소심 과정에서 조씨는 “6·25 당시 북한군에 잡혀 총살을 당했지만 시체더미에서 깨어난 뒤 삶과 죽음에 대해 연구를 정진한 끝에 지난 80년 불치병을 치유하는 능력이 생겨났다”고 주장한 바 있다.
2002년 한국, 이탈리아 상대로 2대1 승, 꿈의 8강 달성
그것은 기적이었다. ‘사상 첫 16강’에 만족하지 않고 열띤 응원을 보낸 온 국민과 23명의 축구대표선수들이 함께 만든 드라마였다. 한국이 안정환의 연장 골든골로 유럽의 강호 이탈리아에 짜릿한 2대1 역전승을 거두며 2002 한·일월드컵 8강에 진출했다. 8강 진출을 호언장담했던 일본은 빗속에 열린 16강전에서 터키에 일격을 당하며 울었다.
2002년6월18일 대전 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한국―이탈리아의 16강전에서 한국은 설기현의 동점골에 이어 연장 후반 12분에 터진 안정환의 골든골로 이탈리아를 2대1로 꺾었다.
한국은 출발이 좋지 않았다. 전반 4분 얻은 페널티킥 득점 기회를 날린 것. 안정환의 오른발 슛이 너무 약했고, 방향을 잡은 상대 GK 잔루이지 부폰이 몸을 날려 막아냈다.
선제골을 내준 것은 전반 18분. 토티가 왼쪽에서 코너킥을 올리는 순간, 골문 앞에서 기다리던 비에리가 한국 수비를 밀쳐내며 헤딩 슛, 왼쪽 네트를 흔들었다.
한국은 후반 A매치(국가대표간 경기) 100회 출장을 기록한 황선홍, 이천수, 차두리를 투입하며 반격을 폈다. 극적인 동점골은 후반 43분 터졌다. 황선홍이 오른쪽에서 올려준 공이 상대 수비 파누치의 몸에 맞고 튕기는 순간, 설기현이 왼발 슛으로 상대 네트에 꽂아넣은 것.
전국을 열광의 도가니로 몰아 넣은 것은 연장 후반 12분. 이영표가 좌중간에서 올린 공을 안정환이 달려들며 헤딩 슛, 천금의 골든골을 뽑아냈다. 전반 페널티킥 실수를 깨끗이 씻어낸 멋진 골이었다.
1999년 1960년대 농구스타 박신자, 미국 ‘여자농구 명예의 전당’ 에 헌액
1960년대 한국 여자농구 최고스타였던 박신자씨가 1999년 6월 18일 미국 ‘여자농구 명예의 전당’에 올랐다. 박신자씨는 세계 여자농구 107년 사상 위대한 선수 및 지도자 25명에 포함되어 사진과 국제대회에서 획득한 메달 등이 영구전시되는 이같은 영예를 안았다.
이 전당은 1999년 6월초에 미국 테네시주 녹스빌에 건립됐다.명예의 전당측은 박씨가 1960년대 아시아 최고의 선수로 전당에 헌액된 유일한 아시아계라고 말했다. 박씨는 1963년 제4회 페루세계선수권대회에서 유일한 동양선수로 베스트5로 선정됐고, 1967년 제5회 체코대회에서는 최우수선수(MVP)로 뽑히며 한국 구기종목 사상 첫 준우승의 주역이 됐다.
1967년 은퇴한 그는 1982년 신용보증기금 창단감독을 맡아 한국 스포츠사상 첫 여성사령탑 기록을 세웠다. 1983년에도 여성으론 첫번째로 여자 청소년대표팀 감독을 맡았다. 박씨는 1971년 미8군 문관 스티븐 브래드너씨와 결혼했다
1998년 원로배우 김진규씨 별세
원로 영화배우 김진규(75)씨가 1998년 6월 18일 골수암으로 별세했다.
1923년 충남 서천에서 출생한 그는 연극무대에서 연기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다 1955년 이강천 감독의 권유로 `피아골`에서 주연을 맡아 영화계에 데뷔, 빨치산으로 귀순하다 총을 맞고 죽어가는 애절한 라스트 신 연기로 단번에 스타로 발돋움했다.
이듬해인 1956년 사극 `옥단춘`을 찍으면서 신인 여배우 김보애씨와 결혼한 그는 가정적 안정을 바탕으로 멜로 드라마와 문예영화에서 주연을 도맡으며 한 시대를 풍미했다. 이후 `로맨스 빠빠(1960년)`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1961년)` `새 엄마(1963년)`로 절정의 인기를 구가했고 1970년대 이후에도 `삼포 가는 길` `불꽃`에서 주연을 맡았다. 김씨가 성실하게 일에만 매달리면서도 가족들의 불행을 막지 못하는 맏이 철호 역을 맡아 열연한 유현목 감독의 `오발탄(1961년)`은 한국영화 사상 최고작으로 손꼽힌다.
1970년 사재를 털어 직접 제작,감독한 `성웅 이순신`이 실패한 뒤 1978년 같은 소재로 `난중일기`를 제작했으나 이 역시 흥행에 참패, 가정이 풍비박산 났다. 연기생활 40여년 동안 출연한 작품만도 7백여편에 이르며 청룡상, 부일영화상, 한국연극영화 예술상, 대종상, 서울시문화상 등 거의 모든 영화상의 남우주연상을 한 차례 이상씩 받았다.
1989년 이효상 국회의장 사망
1989년 차범근, 서독에서 축구선수 은퇴
차범근 선수가 1989년 6월 18일 서독에서의 축구선수 생활을 마감하고 은퇴했다. 서독 분데스리가 기록은 3백8게임 출장에 98득점이었다. 차범근 선수가 서독 축구계에 발을 디딘 것은 1978년 12월 30일이었다. 서독 프로팀인 다름슈타트클럽에 단신으로 건너가 테스트를 받은 것이 그때였다. 그러나 차의 본격적인 서독생활은 1979년 7월 12일 프랑크푸르트팀과 입단계약을 맺으면서였다. 당시 연봉은 22만마르크(6천6백만원)였다.
그는 입단 첫 해 12골을 터뜨리며 소속팀을 UEFA(유럽축구연맹)컵 우승팀으로 끌어올렸으며, 덕분에 다음 시즌 연봉 40만 달러(1억 1천만원)의 ‘갈색 폭격기’로 자리잡았다. 그의 서독생활은 1983년 7월 레버쿠젠으로 이적하면서 진가를 더했다. 당시 레버쿠젠에는 차의 서독진출을 시기, 고의적인 파울로 척추뼈를 다치게 한 ‘독일 병정’ 겔스돌프가 있었지만 차범근은 모든 것을 화해하며 이적에 동의했다.
이적료 1백35만 마르크(4억 5백만원)에 연봉 52만6천 마르크(1억6천만원)도 동양인 선수에게는 엄청난 액수였지만, 적을 용서하는 차의 태도에 서독 축구팬들은 열광적인 박수를 아끼지 않았다. 차는 은퇴후 쾰른체육대에서 본격적인 축구 정교사 코스를 밟아 자격증도 땄다.
1998년 금감위, 55개사 퇴출대상 기업 발표
1998년6월18일 은행권이 1차로 확정한 55개 퇴출대상 기업 명단을 발표했다. 전체 판정대상기업 3백13개사의 17.6%인 55개기업을 부실기업으로 판정했다.
5대그룹의 퇴출기업 명단을 보면 ▲현대그룹의 경우 현대리바트, 현대중기산업, 선일상선, 현대알루미늄 등 4개사 ▲삼성그룹은 삼성시계, 이천전기, 대도제약, 한일전선 등 4개사가 각각 포함됐다.
또 ▲대우그룹은 한국산업전자, 한국자동차연료, 오리온전기부품, 동우공영, 대창기업 등5개사 ▲LG그룹은 LG전자부품, 원전에너지, LG오웬스코닝, LG ENC 등 4개사 ▲SK그룹은 마이TV, SK창고, 경진해운 등 3개사가 각각 퇴출기업에 들어갔다. 이와 함께 이번 퇴출기업 판정에는 한화, 동아건설, 고합, 해태, 신호, 뉴코아,한일, 우방 등 11개 협조융자그룹 중 8개그룹의 계열사 21개가 포함됐으며, 64대그룹에 포함되지 않은 개별기업으로 대한모방, 양영제지, 우정병원 등 3개사도 퇴출대상기업으로 판정됐다.
1994년 김일성 방북한 미국 카터 전 대통령 통해 남북정상회담 제안
1990년 안보정책 실무대책단, 남북군비 통제원칙 제시
한반도 군비통제의 방향=정치적 신뢰구축을 위해 남북정상회담, 남북군사위원회 구성, 전진 배치된 기갑병력을 우선으로 3단계에 걸쳐 남북한 각각 20만 명으로 병력감축 등 9개항 제시
1986년 호주 백호주의 포기선언, 인종과 국적에 관계없이 이민 문호 개방
1983년 중국 전인대, 국가주석에 이선념, 국가중앙군사위주석에 등소평 선출
1983년 6월 18일 중공 전인대 국가중앙군사위 주석에 등소평이 선출됐다. 쓰촨성 출생 등소평은 고급중학졸업 후, 1920년 프랑스에서 고학하였다. 젊어서는 모택동을 지지했으나 1978년 3차 당 중앙위원회 총회에서 모택동을 비판하고 경제의 현대화 건설·사상 해방·문호 개방책이라는 대전환을 가지며, 1979년 미국과의 국교 수립으로 공식적으로 미국을 방문하기도 했다.
1983년 제6기 전인대에서 등소평을 국가중앙군사위원회 주석으로 선출함에 따라 중국의 권력기관의 하나인 국가중앙군사위원회의 주석으로서 등소평은 군권을 장악하게 된다. 그후 등소평은 1989년 6월 민주화를 요구하는 천안문사태를 무력으로 진압하고, 11월 공산당 13기 5중전회에서 당중앙군사위원회 주석직을 장쩌민 총서기에게 물려주고 정계에서 은퇴했다.
1983년 미국 첫 여성우주인 샐리라이드 태운 유인우주왕복선 챌린저호 발사
1981년 국제기능올림픽서 4연패
1981년 건설의 날 제정
1980년 한국-아랍에미레이트연합, 국교수립
1980년 계엄사 권력형 부정축재자 수사결과 발표
1979년 카터, 브레즈네프 전략무기제한협정(SALT II) 서명
미국 카터 대통령과 소련 브레즈네프 서기장이 1979년 6월 18일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제2차 미소전략무기제한협정(SALT II)에 조인했다.
SALT II는
1.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비롯한 각종 미사일 총수 제한
2. 다목적유도복수탄두(MIRV)미사일과 전략폭격기 총수 제한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조인된 SALT II도 1979년 12월말에 소련군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자 미국 의회가 비준을 거부했다.
1977년 물리학자 이휘소 세상 떠남
1976년 제4차 경제개발5개년계획 발표
1974년 국민윤리 역사 한문 교련 등 새 학과로 독립
1973년 미국-소련 백악관에서 정상회담
1972년 영국 BEA소속 여객기 런던 히드로우 공항 이륙 직후 추락 사망118명
1971년 석모도 침투 공비 사살 및 생포사건
경찰이 강화 석모도에서 북한장비를 발견, 수색중 공비 3명을 발견, 교전 끝에 2명 사살하고, 1명 생포. 피해(부상 1명)
1969년 신상옥-김지미, 제15회 아시아영화제 감독상-여우주연상 수상
1968년 서울서 제2차 세계대학총장회의
1966년 장창선 선수 사상 처음 세계레슬링선수권대회(미국) 금메달(자유형 플라이급) 땀
1964년 한국-버마 무역협정 체결
1964년 뉴욕시 할렘에서 흑인폭동
1963년 소련 첫 여성우주인 테레시코바가 탄 보스토크 6호 발사
1962년 건설부 신설
1962년 박정희 내각수반 취임
1960년 소련-쿠바 모스크바에서 석유협정 조인
1954년 과테말라 내란
1953년 이승만, 반공포로 전격 석방
1953년 6월8일, 유엔군ㆍ공산군 양측간의 포로송환문제가 2년 만에 타결됐다.
조기 종전을 원한 유엔군측의 대폭적인 양보가 돌파구였다.
송환을 원하는 포로들은 2개월 내에 맞바꾸고 송환을 거부하는 포로들은 체코ㆍ폴란드ㆍ인도 등 5개국으로 구성된 ‘중립국송환위원회’가 4개월동안 이들의 귀환을 설득한다는 것이 주요내용이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휴전협상 자체를 맹렬히 반대해온 정부와 국민들의 분노는 절정에 달했다. 송환위원회가 친공적인데가 반공포로들이 6개월동안이나 이들의 설득공작을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6월18일 새벽2시, 미군이 경비중인 부산ㆍ대구ㆍ광주ㆍ논산 등 포로수용소의 전원이 끊기고 철조망이 뚫렸다. 유례가 없는 반공포로들의 대탈출이 시작된 것이다.
세계는 이승만 대통령의 이 대담한 조치에 경악을 금치못했다.
미군이 탱크와 헬기까지 동원했지만 주민들이 이들에게 옷을 갈아입히고 침식을 제공하며 돕는데는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3만5600여명의 반공포로들 가운데 자유를 찾은 포로가 2만7400여명이나 됐다. 그러나 8000여명은 다시 철조망 신세를 져야했다.
1953년 나기브 이집트 초대 대통령 취임. 왕제에서 공화제로 변경
1952년 국회, 임시의장에 신익희, 부의장 조봉암 김동성 선출
1951년 프랑스 총선서 드골파 제1당 진출
1950년 북한군, 정찰명령 제1호 하달
1942년 원폭 제조 ‘맨해튼 프로젝트’ 가동
독일이 우라늄의 원자핵 분열을 성공시켰다는 소식이 미국에 전해지자 헝가리에서 망명한 물리학자 질라드는 아인슈타인을 설득, 핵분열이 군사목적에 이용될 수 있다는 사실을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알리도록 했다.
지지부진하던 원자력 연구가 급물살을 탄 것은 1941년 12월 미국 과학연구개발청 장관 바네바 부시가 루스벨트로부터 최종승인을 얻어내면서였다. 전쟁 중인 데다가 실험실·제조시설 등을 비밀리에 건설하려면 군대를 동원하는 것이 적합하다는 판단하에 육군부가 실무책임을 떠맡았다.
1942년 6월 18일, 이를 위한 공병대가 발족됐고 9월에는 그로브스 공병대 준장이 최고 책임자로 임명됐다. 발족 당시의 이름은 ‘대용품개발연구소’ 였으나 8월에 ‘맨해튼 관구’ 로 바꿨다. 20억달러나 투입된 이른바 ‘맨해튼 계획’ 이 시작된 것이다. 초기 연구를 주로 컬럼비아대에서 진행해 이 대학이 위치한 맨해튼이 암호명으로 쓰였다.
1945년 7월 16일, 뉴멕시코주 앨러모고도 북쪽 사막에서 인류 최초의 원폭 실험이 성공함으로써 ‘맨해튼 프로젝트’ 도 비로소 결실을 보게 됐다
1940년 드골 런던에서 독일에 대한 레지스탕스 선언, 자유프랑스군 조직
1936년 프랑스 인민전선내각, 주40시간 노동제 가결
1936년 사회주의 리얼리즘 창시한 러시아 작가 막심 고리키 세상 떠남 『어머니』
1935년 영국,독일 해군함선협정에 조인, 독일은 영국의 35%의 함대를 보유
1929년 제5차 공산당 사건
1928년 아멜리아 에어하트, 여성최초로 대서양횡단 비행에 참가
미국의 여성비행가 아멜리아 에어하트가 1928년 6월 18일 여성최초로 대서양 횡단비행에 참여했다. 그녀가 탄 `우정호`는 미국 뉴퍼들랜드를 이륙해 20시간 40분 만에 영국 웨일즈 파리항에 도착했다. 신문들은 그녀를 `레이디 린디`(여성 린드버그)로 불렀다.
1897년 미국 캔자스주 애치슨에서 태어난 에어하트는 1차대전후 캐나다 토론토에서 곡예비행을 처음 보고 비행기에 매료됐다. 대학 2학년 여름방학때 조종을 배운뒤 몇년 안되어 비행기록 500시간을 돌파할 정도로 비행에 열심이었다.
이번 비행에 자신이 조종하지 못한 것을 못내 아쉬워 한 에어하트는 마침내 1932년 5월 20일 단독으로 대서양 횡단비행에 성공해 꿈을 이뤘다. 거센 바람과 연료탱크가 새는 등의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그는 3,241Km를 13시간 30분만에 돌파했다. 에어하트는 이후에도 로스앤젤레스에서 뉴욕까지 미국 대륙을 단독 횡단했고 하와이에서 미국 본토까지 논스톱 비행했다.
1928년 극지탐험가 아문센 사망
노르웨이 출신의 극지탐험가 아문센이 비행선 사고로 추락한 친구 노빌레를 구출하려다 1928년 6월 18일 북극권에서 조난당해 운명을 달리했다. 54세였다.
보르게에서 선원의 아들로 태어나 북극탐험을 꿈꾸며 자란 아문센은 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하고 1895년 1등항해사가 됐다. 북극점 정복의 제1인자를 꿈꾸던 아문센은 1909년 미국인 R.E.피어리가 그보다 먼저 북극점에 도달하자 목표를 남극으로 바꾸어 1910년 ‘프람호’ 로 남극탐험을 떠났다. 로스해의 고래만 대빙벽에 기지를 설치하고 동료와 52마리의 개썰매로 남극점을 향해 출발한 지 55일 만인 1911년 12월 14일, 인류사상 최초로 남극점 도달에 성공했다. 이것은 영국의 스콧 일행보다 35일 앞선 것이었다.
1925년 아문센은 비행정에 의한 북극비행을 시도했으나 실패, 다시1926년 엘즈워스와 이탈리아인 항공기술자였던 움베르토 노빌레와 함께 비행선을 이용해 북극을 횡단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그들의 북극 횡단 비행에 대한 신빙성의 논쟁은 죽기 전까지 아문센을 괴롭혔다.
1928년 노빌레 일행의 북극탐험대 비행선이 스피츠베르겐 근처에서 추락했다는 소식을 듣고 구출하기 위해 비행정으로 날아가던 중, 비행정와 함께 아문센의 소식이 끊겼다.
1923년 이탈리아 시칠리아의 에트너 화산 폭발, 카스틸리오네 지방이 괴멸
1922년 이라크, 독립을 요구하는 반영국 무장봉기 발생
1920년 조선 사설철도령 공포
1918년 토지조사사업 완료
1918년 미국의 경제학자 모딜리아니 출생 - 1985년 노벨경제학상 수상
1903년 프랑스 작가 레몽 라디게(1903-1923) 태어남 『육체의 악마』
1891년 여성 독립운동가 김마리아 출생
1845년 프랑스의 의사. 병리학자 라베랑 출생 - 1880년 말라리아 기생충 발견
1815년 나폴레옹, 워털루 전투에서 패배
1814년 3월 영국-프로이센-오스트리아-러시아의 유럽 연합군에 패해 엘바섬으로 유배됐된 나폴레옹이 1815년 3월 엘바섬을 탈출하고 황제에 즉위하자, 이를 저지하기 위한 연합군과 나폴레옹이 벨기에의 워털루에 진을 쳤다. 영국군 9만 5천명과 블뤼허가 이끄는 프로이센군 12만 명 등 모두 20여만명이 넘는 연합군을 영국의 웰링턴이 지휘했다. 이에 맞선 나폴레옹군도 12만 5천명에 달했다.
워털루에 집결하기 전 웰링턴은 북쪽으로부터 진군해 왔고, 프로이센 군대를 지휘하는 블뤼허는 측면을 보조하며 웰링턴과의 합세를 시도했다. 라인강에는 오스트리아의 슈바르첸베르크가 그리고 러시아 연대들이 예비군대로서 독일영토를 가로질러 프랑스로 진군해 왔다. 이들이 모두 집결하기 전 이들을 분열시켜야 했던 나폴레옹은 서둘러 벨기에 국경을 넘었다. 6월 16일 프로이센 군대의 일부를 격퇴시킨 나폴레옹은 17일 워털루로 진군했다.
6월 18일 나폴레옹은 휘하의 평범한 그루쉬 장군에게 프로이센 군대를 추격하라고 명령하고 자신은 워털루에서 기다리고 있던 웰링턴을 공격했다. 1만명의 희생자를 내며 네 번이나 공격했으나 승기를 잡지 못했다. 그루쉬가 쫒았던 블뤼허의 프로이센 군대는 그루쉬를 따돌리고 워털루로 무사히 집결, 웰링턴과 합류하고 나폴레옹을 기다렸다. 프로이센 군대가 다가온 것도 모른 채 내려진 나폴레옹의 공격 명령으로 결국 나폴레옹군은 전투에서 패했다.
나폴레옹은 항복해 다시 세인트 헬레나 섬에 유배됐고 그곳에서 죽었다. 워털루 전투는 유럽 역사의 한 분수령이었다. 나폴레옹의 패배로 유럽에는 이른바 빈체제가 성립했다. 오스트리아의 재상 메테르니히가 주도한 빈체제는 민주주의에 반대하고 군주제를 옹호하는 완고한 복고체제를 유럽 전역에 다시 확산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1812년 영국, 미국 전쟁 개전
1769년 영조, 난장형 폐지
1426(조선 세종 8) 수성금화도감 설치
1408(조선 태종 8) 조선 세운 태조 이성계 세상 떠남(음력 5월 24일)
1086(고려 선종 3) 흥왕사 교정도감 불경 44권 외국에서 수입 간행
68년 제6대 로마제국 황제 갈바 즉위
68년 6월 9일 5대 황제 네로가 자살하자 로마제국 원로원이 68년 6월 18일 에스파니아 속주 총독 갈바를 제6대 로마제국 황제(제일인자)로 인정했다. 에스파니아 주둔군이 황제로 옹립한 갈바와 함께 군단을 이끌고 로마로 진군해 올 것이라는 소문에 황급히 결정된 것이었다. 그의 나이 72세였다.
역사가 타키투스는 로마 출신의 명문 귀족 갈바를 당시로서는 황제가 되기에 적합하다고 생각한 유일한 사람으로 평가했다. 네로 타도의 선봉장이었던 갈리아 총독 빈덱스도 네로를 대신할 황제로 갈바를 천거했을 정도였다.
갈바는 공직에 나설 자격이 있는 30세부터 티베리우스 황제에게 등용되어 갈리아(프랑스)의 아퀴타니아 속주에서 공직생활을 시작했다. 라인강 방위군 사령관, 아프리카 속주 총독, 원로원 의원을 역임한 후 서기 60년에 황제 속주인 에스파니아 타라코넨시스 속주 총독에 임명됐다. 8년동안 속주총독으로 근무했으나 한번도 속주민에게 고발을 당하지 않을 정도로 정치를 잘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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