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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아파트 층계를 걸어 올라갔다.
"난 아직 저녁 전이야. 당신은?"
"전 먹었어요. 먹고 다 치우고 오는
길이에요."
층계는 두 사람이 나란히 서서 올라가면
꽉 차도록 좁고 가파랐다. 저녁만 되면
활기를 띠기 시작하는 이 거리와는 달리
굳게 닫힌 문들 뒤로 각자의 생활로
숨겨지고 복도는 적당히 침침한 조명 속에
가라앉듯 조용하였다. 이층 층계 모퉁이에
검은 외투를 입고 스카프를 쓴 나이든
여자가 종이 쇼핑백을 벽에 붙이고 기와
진주를 지나가게 하였다. 그들은 그 여자
앞을 한 줄로 서서 걸어 지났다.
"저 여자가 어떤 여자인가 한번 상상을
동원시켜 봐."
뒤로 흘깃 돌아보고
"가정주부?"
"그래, 여자들은 가정 일을 오래하면
저절로 저렇게 참을성 있는 분위기를
풍기게 마련이지. 그리고?"
"우울하고, 참 우울해 보이는 것 같아요.
잘 모르겠어요. 왜 물어 봤어요?"
"저 여자는 말이요, 이혼해 버린 병든 전
남편을 찾아오는 거요. 죄의식에 사로잡힌
늙은 옛 와이프란 말이오. 일주일에 한
번씩 들려요. 와선 몸을 씻기고 약을 주고
침대를 바로 해 주고 수프를 만들고 방을
정돈하고 집으로 떠나. 진주, 생각만 해도
숨막히지 않아? 다른 사람의 심장에 한 발
박아 놓고 사는 그 전 남편이라는 인간이.
그 폭군이. 젊은 시절에는
삼 층 층계참에 이르렀을 때 기는 어느
집 닫힌 문 앞에서 발을 한 번 탁 굴렀다.
"죽어 버려."
사 층 계단을 오르며 기는 뱉듯 말했다.
"아까 거기가 그 벌레 같은 인간 집이야.
건강한 자는 병자 앞에 죄인이고 산 자는
죽은 자 앞에 죄인이야."
"알아요."
그를 그토록 성나게 하는 것이 무언지 잘
모르겠으면서 순하게 진주는 대답했다.
기는 그을음과 음식 넘긴 자국이
지저분한 알미늄 커피 주전자에 두 컵의
쌀을 얹었다.
"여기다 밥하면 물을 많이 부어도 밥물이
주둥이란 뚜껑구멍으로 적당히 빠져 나가서
밥이 잘 돼요. 학교 다니면서 하숙 할 때
기의 단칸 방은 한 눈에도 여러 기능을
발휘하도록 보이지 않는 선으로 적당히
나누어져 있었다. 왼쪽 벽은 작업장으로
커다란 책상과 램프가 있고 칼이니 붓
공예도구를 담은 통이 있었다. 책상 밑에는
프라스틱, 나무토막, 실 같은 것을 담은
나무상자들이 여럿 놓여 있었다. 냉장고가
세워져 있는 스토브 옆으로 두 사람이 앉게
된 네모난 식탁이 있고 다른 쪽 벽에는
튼튼한 생나무로 짠 큰 침대가 떡 버티고
있었다. 구겨진 시트와 담요가 보였다.
진주는 그 침대 때문에 방을 제대로
둘러보지 못하고 창 밖으로 시선을 주었다.
쉐이드를 조금 올린 창으로 보이는 건너편
길모퉁이에 한 청년이 서서 바이올린을
연주하고 있었다. 이탤리 레스토랑
식탁 위에는 개봉된 편지들이 신문지,
담배, 재털이 등과 함께 어질러져 있었다.
기는 파를 썰며,
"밥 먹고 왔다지만 진주도 좀 먹어요.
여자가 먹을 음식을 요리하는 게 좋거든.
아니면 여자가 나 때문에 요리하는 걸
보던가. 혼자 먹는 게 싫어.
마스터베이트하는 것도 싫고."
어마, 저이가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눈도 돌리지 않고 기는 썩둑썩둑 썰은
파를 고기와 함께 후라이판에 볶았다. 지직
기름타는 소리가 났다. 그릇이나 스토브
주위는 지저분했지만 기의 칼 쥐는 솜씨는
능숙했다.
"진주, 당신 남편에게서는 무슨 소식이
있는가?"
소식 전하나요?"
"그 친구는 지금 굉장히 아프다고 해.
벌써 몇 년째. 진주, 이봐."
갑자기 팔 하나 거리 앞까지 기가
다가왔다.
"윤마가 말이야. 아까 봤던 여자 있지?
쇼핑백 든 여자. 그 여자 남편보다 더
심하게 아프다고 해."
그들은 붉은 포도주와 함께 저녁을
먹었다. 반찬은 김치과 고기
볶음뿐이었으나 진주에게는 놀랍도록 맛이
있었다.
기와 함께 있으면 진주는 자기 자신이
아주 다른 사람이 되는 것 같았다. 언제나
진주 자신이 비밀스러이 희망했던 그런
사람으로 진주를 만드는 기는 그러니까
하기가 쉬웠다. 그는 진주의 말은 무슨
말이든 금방 다 알아 들었으며 처음 만났던
순간부터 그는 진주의 외로움과 꿈과
절망을 알아보았다. 기가 옆에 있으면
복잡다단한 이 세상은 진주에게 갑자기
단순해지고 아름다와졌다. 그는 숲이니,
꽃, 나무, 냇물, 하늘, 햇볕, 구름, 비,
바람,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즐기고 진주의
마음을 어루만졌다.
그들은 침묵 속에 차를 마셨지만 방
안에는 친밀한 따뜻함이 있었다. 진주는
찻잔을 차접시에 놓고 행복과 찬미의
눈길로 기를 바라보았다. 기가 문득,
"당신 첫인상이 아주 시원했어. 뭐라던가
저 닥터 송 와이프도 당신 인상이 좋다고
했지."
"그렇지만도 않아요. 당신 인상이 꽃
같아서 내가 당신 이름을 꽃이라고
기억했던가봐."
"내 한 가지 더 말할까. 처음 만난 순간
말이요. 난 당신이 내 타입의 여자라고
알았어요."
싱크대 수도꼭지에서 물방울이 소리를
내며 일정한 간격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기가 일어나 스테레오에 레코드를 한 장
얹었다. 느린 트럼펫이 정감 있는 선율로
흘렀다. 기가 진주에게로 와서 손을 잡아
일으켰다. 그들은 꼭 껴안고 춤을 추었다.
"모험을 안 하면 잃을 것도 없다. 이런
모토에서 벗어나 상처받아 위험을 무릅쓰고
마음을 열어 봐. 진주 당신은 좋은 게
많은데 전부 묻혀 있어."
매혹의 늪에서 헤어 나오려 애쓰며
진주는 물었다.
"아마 그럴 꺼야, 어느 날 갑자기 머리가
아프다며 혼수상태로 들어갔다고 해."
의견차는 많아지고 오가는 말은
사나와지고 침묵은 길어진 윤마와 결혼생활
칠 년째 되는 어느 날, 기는 집으로
들어가서 부엌에 있는 윤마에게 말하였다.
"저녁 짓느라 수고하지 마시오. 나는
떠날거요."
조그만 가방 하나 들고 목욕이라도 가듯
집을 나온 기는 그 길로 윤마의 친한
친구와 시골로 사랑의 도피행을 떠났다.
자기의 친구와 기가 떠난 것을 알고 윤마는
에고의 이중으로 타격을 받았다. 윤마가
병이 난 것은 그 이후 일이었다.
윤마의 친구라는 나중 여자에게 걷잡을
도리 없는 질투를 느꼈다. 그 여자에게도
기는 당신은 내 타입의 여자라고
말하였을까. 기의 앞을 꾸러미에 꿰듯
지나가는 여자들의 열 속에 자기는 줄을
서지 말아야겠다고 진주는 느슨해졌던
마음을 가다듬었다.
그러나 마음을 단단히 먹으려 하면
할수록 진주는 기에게 깊이 빠져 들어가고
기의 주위 모든 것에 질투를 느꼈다. 기는
진주의 뼈에 와 부딪는 듯 했다. 밤이면
베갯머리에 조그맣게 음악을 틀어 놓고
누워 진주는 기를 생각하였다. 기가 혼자
여행을 떠나면 진주는 안정을 잃고 밤의
반은 가슴이 아파 베개를 가슴에 대고
엎드려 있고 새벽의 반은 잠을 잤다.
속은 구름이 낀 것 같았다.
미스 오는 일부러 직장까지 진주를
찾아와 기를 심각히 생각하지 말라고
충고했다.
"사실을 말하면 한 때 나는 기씨하고
부부같이 지냈었어. 기씨는 요즘도
서울에서 온 사람들에게 첫부인과 두 번째
여자 얘기를 묻고 다녀. 왜 그러겠니? 그
여자들이 그저 행복을 찾았으면 해서
그러는 거다. 첫부인은 식물 인간이고 또
한 여자는 정신병원에 있단다. 그 두
여자가 그의 마음을 잡고 있어. 자기가
살인자같이 느껴지는 순간도 있다고 했어.
너는 정섭 씨를 기다리고 있는 게 좋아.
진주야 어찌된 게 나는 언제나 가능성이
없는 남자에게 끌린다. 결혼한 남자,
고립된 남자."
미스 오는 곱게 한 화장이 얼룩이 지도록
눈물을 닦았다.
"그래도 말이에요, 기씨하고는 이상하게
운명적인 그런 느낌이 들어. 기씨도 나를
자기 타입이라고 그랬어요."
"기씨가 진주를 좋아하는 건(미스 오는
적당한 말을 찾다가) 아마 진주가 미인이기
때문일거야. 기씨가 좋아하는 타입의
미인."
진주는 거울을 들여다 보며 미스 오의
말을 생각했다. 지금의 모습은 잠시이고
꽃잎지듯 기운이 없이 시들고 기가
돌아보지 않을 날을 두렵게 생각했다. 오
년이면 늙을 거야. 서른 셋이 될테니까.
그리고 그는 바람둥이가 아닌가, 미스
미워지겠지만, 진주는 지금 현재도 자기가
기를 속이고 있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매력
있는 여자의 게임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매력 있는 여자의 게임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당분간은 그의 마음에
드는 말과 행동을 계속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조만간 껍질은 벗겨질 것이고,
속을 보게 되면 기는 실망하고 떠나가리라.
나중에 버림을 받느니 지금 그를 떠나는
것이 옳을 것 같다. 그런 결혼에 진주는
도달했다. 기에게 더 이상 만나지 말자는
편지를 보내고 심장에 구멍이라도 난 듯
마음이 안 잡혀 멍하니 앉아 있는 진주에게
기는 전화하였다. 내가 바로 앞에 와
있어요. 현관까지 좀 내려와 봐요.
편지가 하루만에 들어갔을까 생각하며
정다운 기의 모습이 길 건너편 공중전화
박스에서 나와 진주의 아파트쪽으로 길을
건너고 있었다. 차 한 대 오가지 않는 길에
신호등이 그 빛깔을 바꾸었다.
"누가 왔니?"
텔레비젼 앞에 웅크리고 앉아 있던
모친이 물었다.
"응."
"또 그 늙은 녀석이냐? 안 만나겠다고
하더니."
진주는 대답 않고 스웨터를 걸치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기는 현관벽에 등을
기대고 서 있었다. 어린 남자 같았다. 기는
걸어나오는 진주에게 다가와 진주의 가는
팔을 아프게 잡아 쥐었다.
"그래 도망간 남편이라도 들어왔단
"아니요."
"이봐 진주, 그럼 이게 뭐야?"
기는 진주의 편지를 포켓에서 꺼내어
놀리듯 진주 눈 앞에 흔들어 보였다.
"밑도 끝도 없이 이게 뭐야?"
코 앞에서 달랑거리는 자기의 편지를
수치감으로 얼굴을 붉히며 진주는
잡아채었다.
"편지에 쓴대로예요."
"읽어 봐도 무슨 소린지 모르겠던데."
"기씨 생활과 나는 맞지가 않아요. 너무
힘들고 감당할 수가 없어요."
"뭘 감당 못하겠단 말이야."
"나는 말이에요. 지속적이고 안정된 게
좋아요. 기씨는 기분 내키는대로 하지만
나는 뭐든지 중대해요."
지나갔다.
"너같이 좋은 애가 또 어디 있니."
혼잣말 같은 그 말에 진주는 무엇 때문에
기와 다투고 있는지 그 이유를 잊어
버렸다. 훨씬 풀죽은 목소리로 진주는
말했다.
"그러니 이제 공연히 전화하고 그러지
마세요. 그게 서로 편해요."
"절대로 안 될 걸, 진주. 평생 안 놓아
줄 걸."
부지중 말한 기도 그 말을 들은 진주도
두 사람 다 쇼크 속에 서로를 바라보았다.
주위에 무거운 정적이 왔다.
유월에 진주는 기의 아파트로 거처를
옮겼다. 겨울에 수정 같은 고드름을 달았던
기와 진주는 서로의 생활을 전혀 간섭
않고 자기의 인생은 오로지 자기의 책임인
그런 생활을 시작하기로 하였다. 기는
다시는 이런 가까운 인간관계는 안 맺으려
했지만 진주 때문에 아무 일도 못하겠고
그래서 함께 지내는 수밖에 없겠다고
하였다. 아파트 세도 반씩 내고 전기세,
전화 값도 반씩, 식료품도 같이 사기로
하였다. 기가 제의하고 진주는 알아들으려
애썼다.
모친은 한국으로 돌아갔다. 같이 있기
힘든 사람이나 환경을 개선하던가 혹은
적용할 도리가 없으면 빠져 나오도록
하시오. 그런 성가신 것들에 빼앗기긴
인생은 너무 짧아. 기의 말씀이 아니더라도
모친이 기와 함께 살 수만 없는 것이므로
보았다. 엄마, 나는 엄마의 전인생이 될 수
없어. 엄마 혼자 힘으로 서서 어떠게든
행복해 보세요.
모친은 몸을 떨며 울었다. 내 너를
자식이라 생각 않겠다. 그저 이 세상 어디
살고 있겠거니 하고 있겠다, 어쩌면 나는
비행기에서 떨어져 죽어 버리겠다, 내
속에서 난 딸이 어쩌면 이럴 수 있는지.
모친은 떠나고 모친의 웃는 얼굴, 흰 발
같은 것이 떠오르면 진주는 괴로왔다.
그러한 진주의 귀에 기는 속삭였다. 진주,
당신 생의 한 계단이 지난 거요. 끝난
거요. 그 다음은 무엇인가? 당신은 살아
있어요. 당신은 혼자요. 알에서 깨듯
혼자요.
두 사람은 밤바다에 나가 수평선 저쪽
들었다. 보도워크에는 전등이 휘황하고
밤바람 쏘이러 나온 사람들 속에 두 사람은
말없이 누워 무한히 어두운 하늘에
환상같이 흔들리는 별들을 바라보았다.
우거진 숲으로 소풍도 나가고 영화도 보러
가고 멀리까지 굴요리를 사 먹으러도
다녔다. 친구들을 초대하고 밤늦도록
놀기도 하였다.
진주가 살러 왔을 때 기는 진주의
가구들을 창고에 두라고 말하였다.
남보기는 우스울지 몰라도 적어도 이 방에
내 마음에 안 드는 물건은 하나도 없어요.
가구가 달린 아파트에 살고 있었던
진주이므로 책과 레코드와 옷가지, 그릇
외에 옮겨 올 가구도 없었지만 그의 생활의
독립성을 진주는 단단히 확인하였다.
사는 것 같지만 진주 자신은 손님 같았다.
진주는 끊임없는 기의 기분을 살피고 기의
마음에 드는 여자가 되려고 애썼다.
기는 냉장고 옆에 작은 칠판을 하나 사서
걸어 놓았다. 누가 쓰레기를 버리고 누가
접시를 씻고 장을 보는가, 퇴근길에 누가
얼마만큼 식료품이나 가사용품을 샀는가.
약속대로의 권리를 주장하고 다른 사람이
등한하지 않은가 해서 신경을 쓰는 그런
일이 진주에게는 점점 부담감으로 왔다.
무슨 일이든 반씩의 분량을 재기란
어려웠다. 칠판에 딸기 98전, 밀크 49전,
고기 2불 90전 비누 1불 8전하고 적어 넣을
때면, 얼마나 이같이 살아야 할까 진주는
생각했다.
기가 혼자 여행을 떠나 버리든가 외박을
먹었다. 그럴 때 진주는 재미있게 사는 듯
보이는 기를 질투하며 자신을 무시당하고
매력 없고 찌꺼기인 듯 느꼈다. 자기
인생은 자기 것이 아니고 기 또한 물론
자기 것이 아니었다. 자기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듯했다.
이와 같이 자기 연민에 가득 찬 최악의
모습으로 굴러 떨어지다가도 기가 다정히
해주고 보석이 가득 들은 광맥 같은
여자라고 진주를 칭찬해 줄 때 진주는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내일도 보석이 가득 들은 광맥 같은 여자로
기에게 보일지 자신이 없었다. 가끔씩
그들은 다투기도 하였다. 진주는 늘 너무
참고 있었기 때문에 창문을 닫자는 말도
입으로 나올 때는 이미 절망적인 어조였다.
폭풍처럼 밖으로 나가 버리곤 하였다.
기가 없으면 낮은 길고 저녁은 쓸쓸하고
밤은 공허했다. 그래서 진주는 창을 열고
거리의 악사라던가, 무용수, 가수들이
보도에서 공연하는 것을 무료히 내려다
보았다.
"여자들이 아내나 어머니로만 살고
싶어하지 않듯 남자도 아버지나 남편으로만
살고 싶지가 않은 거요. 누구나 자유롭게
살 권리가 있어. 외로운 두 인간이 서로를
방해하며 사는 인생방법이 싫어."
기는 분명히 말하고 있지만 진주는 기와
결혼하고 싶었다.
"미스 오, 벌써 이렇게 사는 것도 일
년이 넘었어요. 지금 상태라면 기씨하고는
그저 같은 상자 속에 속해 있다는
가족이란 것을 짐으로밖에 안 느껴요.
기씨는 나보고 애인도 만들고 재미있게
지내라고 하지만 나는 그렇게 못하겠어요.
나마저 충실치 않으면 우리 사이에 뭐가
남겠어요. 아무것도 없어요. 물론 기씨도
뭐 대단히 즐겁게만 사는 게 아니지요.
우선 직장 일이 고되고 집에 오면 다음
날을 위해서 자기 바쁘지요. 나는 언제나
가정 안에서만 살아와서 그런지 결혼이
주는 한계가 좋아요. 뭐는 해야 되고 뭐는
하면 안 된다고 그렇게 정해져 있는 것이."
싸움하고 짐을 나간 경우 기는 며칠이
지나서 진주가 새로 힘을 모두어 자신의
인생을 살고 있는가 마치 검사라도 하려는
듯 가만히 돌아오고는 하였다. 진주가 웃는
얼굴로 맞으면 기는 저으기 안심스러운 듯
나가기도 하였다. 그럴 때면 왕자님과
춤추며 발에서 피를 흘리는 인어공주를
생각했다. 바람이 안 불어도 숲의 나무들은
머리를 빗듯 낙엽을 털어내었다.
어느 날인가 진주는 램프를 거울 앞에
바싹 당겨 놓고 파란 화장 연필로 이마에
실핏줄을 그려 넣어 보았다. 이마를 거의
거울에 대다시피 하고 오랜 시간 걸려
섬세하게 진주는 그 일을 하였다. 에에,
송장 같애. 외출에서 돌아온 기가
말하였다. 진주는 욕실에 가서 세수하였다.
오정섭 씨에게.
보내 주신 편지 잘 받아 보고 스위스로
떠나는 날 케네디 공항에서 마지막 뵌 후로
이 년여의 세월이 흐른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면 이제 만나 뵐 날이 더욱 먼 것
같군요. 저는 떠나실 때와 마찬가지로 그
직장에 그냥 있고 생활도 여전합니다. 물론
아직 시집도 안 갔고요. 진주의 소식을
물으셨는데 진주는 그 주소에서 이사를
했어요. 편지가 도로 돌아간 것도
당연하지요. 진주는 이사를 했을 뿐 아니라
전과는 아주 다르게 살아요. 진주의 얘기를
알고 싶어하시니 말씀드리는 건데 진주는
지금 빌리지에서 기라고 하는 좀 별나고
커다란 목소리로 말 많이 하는 사람과 살고
있어요. 그 집에 가면 전부 기라는 이가
만든 물건들이고 그릇도 잔도 모두 기가
만든 거친 도자기지요. 거기 담아서 홍차와
꿀을 마셔요. 커피도 마시고.
우리 언젠가 바다에 조개 구워 먹으러
그리고 모래 위에 담요들을 펴 놓고
밤늦게까지 놀았어요. 맥주들을 마시고
분위기가 아주 풀리고 재미있었는데 같이
갔던 사람 중 하나가 진주에게 달려들어
입맞췄어요. 진주가 당황하니까 기씨가
누워 올려다 보고 웃으며 당신 에고에 좋은
일이야 하고 말했어요. 그때 있던 사람들은
모두 웃고 말았지요. 그날은 누가 뭐라고
한 마디만 해도 웃고 그런 분위기였어요.
그런데 입맞춘 사람이 나중에 보니까
진주가 바다를 보고 앉아 몰래 울더래요.
그 사람은 지금 진주한테 반했다고 그러고
돌아다녀요.
그 기라는 사람은 어디에 있든지 주위에
특별히 영향을 주는 그런 타입의
사람이에요. 엉터리같이 보일 때도 있지만
말을 잘 따르지요. 그런데 그 사람이
진주를 대하는 태도에는 특별한 것이
있어요. 이상하게도 사람들에게 진주가 참
좋은 여자라는 기분을 느끼게 하는 거예요.
그래서 가끔 나는 기는 여자를 만드는
남자인가 생각해 보지요.
전에 우리가 조그만 방에서 살 때,
천장의 석회가 막 떨어져 내리고 쥐가
다니던 그곳에서 살 때 진주가 저녁 해
놓고 부르던 일이며(국 한 가지 밥 한
가지의 저녁), 정섭 씨가 내방 스토브
고쳐주던 일이며 또 우리 두 사람의 성씨가
같아 불과 몇 달 차이밖에 안 나지만 내가
정섭씨를 오빠라 부르고 진주를 올케라
하던 일들이 아주 옛날 같군요. 혹시
뉴욕에 들리실 일 있으면 전화하세요.
문간에 인기척이 있어 몸을 돌려 무심히
내다보던 진주는 거기에 정섭이 서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래었다. 미스 오로부터
정섭에게서 편지가 왔더라는 것과, 그
편지에 의하면 정섭이 외국생활을 청산하고
좋은 일자리를 얻어 귀국하려 한다는
소식을 들은 바 있지만 정섭이 이같이
홀연히 자기 집 문지방에서 있으리라는
것은 생각지 못하였었다.
"어머."
우선 진주는 부르짖었다. 그때 진주는
영화 장면처럼 쎈시한 잠옷차림이 아니고
낡은 반바지와 티셔츠에 비눗물을 튀기며
욕실 청소를 하고 있었다.
"미스 오한테서 대강 들었어."
돌아보았다. 레코드와 책이 나무 궤짝에
담겨 있고 튼튼해 보이는 생나무 의자 위에
거친 천으로 만든 쿠션들이 놓여 있었다.
좋은지 나쁜지 우선 사는 사람의 개성이
첫눈에는 두드러져 보였다.
"기라는 분도 있었으면 좋았을 걸."
정섭은 쳐들어오듯 갑자기 온 것을
사과하고 싶은 듯했다.
"그 사람은 남 노는 날도 일해요. 가게에
나가거든요. 남들 일할 때 놀기도 하고."
진주가 권하는 의자에 정섭은 앉았다.
"요새도 그냥 직장에 나가나?"
"네, 그동안 조금 승진도 했어요. 한 달
됐나. 그동안 결혼했어요?"
"아니."
잠시 쉬었다가 솔직한 어조로,
"색시도 안 보고?"
"봤어. 스위스에 그 아버지와 여행했던
여자인데....."
"아유, 세상 구경 막 다니고 양갓집
규수인가봐. 그렇지요?"
진주는 정섭을 놀렸다. 지금만큼 정신을
차리고 살았더라면 정섭과도 잘 되었지
않았을까, 진주는 생각했다. 그것이
유감스러웠다. 진주가 만든 음식을 먹고
그들은 거리로 나갔다. 현관문을 잠그기전
스토브 개스를 다시 한번 살피는 것을 보고
정섭은 웃었다. "여전하군." 도시 전체에
안개가 자욱하였다. 밤안개 속에 가로등이
빛났다. 여늬 날과 다름없이 노천 까페에는
사람들이 가득 차 있었다.
"우린 뉴욕에 살면서도 한 번도 이런데
"마음이 바빴지요."
--그리고 조그만 여유가 생겼을 즈음에는
우린 서로 미워했지요.
"어머니는 천안 계시다지?"
"네."
"건강하시대?"
"잘 몰라요."
"미스 오와는 여전히 가깝게 지내는 것
같더군. 어제 저녁에 미스 오 만났어."
"전처럼 서로 화낼 일도 생기고 그러지만
그래도 제일 가까와요. 이젠 정말 친해진
것 같아요. 내가 그 약혼했다는 분한테
선물 하나 사도 괜찮아요?"
'온 세계의 장신구'라고 간판을 걸은
상점으로 진주는 정섭을 끌고 들어갔다.
보지도 못한 정섭의 색시를 위해 조그만
중국의 본마누라라도 된 기분이었다.
정섭이 지하철 층계를 내려가다가 높이 서
있는 진주에게 오빠같이 혹은 아저씨같이
문득 두어 번 손을 흔들었다.
[4]
그 겨울은 춥기도 했지만 눈이 많았다.
한 번의 눈보라 강타로 마비 되었던 도시의
교통이 뚫리기 시작한 즈음 관상대는 다시
제 이의 눈보라를 예보하였다. 길 옆에는
아직도 눈이 산적해 있는데 그 눈더미 위에
다시 몇 십 인치의 눈이 강풍에 실려
들이치리라는 것이었다.
잘 닫히지 않아 잠기지 않은 문 안에서
간지르듯 킥킥킥 웃는 소리를 들었다. 문을
연 진주는 삼십 중반으로 보이는 성숙하게
아름다운 동양 여자를 보았다. 굽실거리는
삼단 같은 머리를 허리까지 늘어뜨리고
여자는 소파에 앉아 있고 기가 무릎을 꿇고
앉아 여자의 긴 장화를 벗겨 주고 있는
참이었다. 기가 잠깐 그 무릎 안쪽을
쓰다듬는 것을 진주는 보았다. 낯선 여자는
진주를 보고 다리를 모두고 앉았다. 기는
당황한 듯,
"진주, 집에 있었군. 필라델피아에
간다고 하지 않았나?"
"눈이 온대요. 지금도 오지만."
진주는 식탁 위에 세탁물 바구니를 올려
놓았다.
여자가 진주에게 인사했다. 양심을
지키고 사회적인 관습에는 타부 사항이
별로 없어 보이는 정직하고 활달한 태도가
있었다.
"중국 여자야, 박물관에서 만났어."
기가 말했다.
"진주, 여기 같이 앉지."
기가 찬장에서 유리잔을 꺼내어 물에
씻었다. 한 마디도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진주는 식탁 의자에 앉아 깨끗이 빨린
세탁물을 개키는 도리밖에 없었다.
"이리 오세요. 같이 마셔요. 내 이름은
아이린."
중국 여자가 친밀히 웃으며 말했다.
여자는 마흔 여섯 살의 기보다 훨씬 더
성숙해 보였다. 이제까지 진주에게 막강한
없이 허송하는 한갖 신경질적인 자유
주의자로 보였다.
"진주, 이봐. 이리 오라잖아."
마침 기의 런닝셔츠를 개키던 진주는
그것을 그대로 뭉쳐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런닝셔츠 한 자락이 대나무로 짠
쓰레기통 변두리에 걸리며 쓰레기통이
넘어졌다.
"셋이 같이 주지육림의 향연이라도
벌이자고요?"
고개도 들지 않고 진주는 이사이로
뱉았다. 뜻밖에 그만한 소리라도 내어
체면을 세워 준 자기의 목청에 대해 진주는
감사하고 싶었다. 그에 힘입어 진주는
앉았던 식탁 의자에서 몸만 돌려 아이린을
보았다.
노세요. 이 방에 아무도 없는 것처럼 날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세요."
영어로 지껄이고 어쩌려고 그러는 가운데
자신도 놀랄 충동으로 진주는 이번에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정말이에요 나를 없다고 생각하세요.
공기같이 그렇게. 그냥 공기라고만
생각하세요."
이번에 진주는 두 팔을 벌려 보았다.
"보세요. 나는 정말 해롭지 않아요.
공기예요."
말을 마치고 앉는다는 것이 의자 자리를
잘못 겨냥하여 진주는 그만 바닥으로 나가
동그라졌다. 엉덩이와 허리가 눈물이 콕
솟게 아팠으나 눈에 고이는 뜨거운 눈물은
반드시 아픔 때문만 아니라는 것이 진주는
"아유 오라잇?"
아이린이 한 발은 신을 신고 한 발은
스타킹뿐인 다리로 절뚝거리며 진주에게
왔다.
"네, 괜찮아요."
아픈 허리에 힘을 주고 의자 다리를
붙잡고 진주는 일어났다.
"재밌게 지내세요. 제발 간청이에요."
힘껏 웃어 보이고 절둑거려지는 자기의
걸음을 저주하며 진주는 그 방을 나왔다.
진주는 전등빛이 어둠침침한 층계를 난간에
몸을 의지하고 간신히 걸어 내려갔다.
---기는 시종 가만 있었다. 그는 골이
났을까.
일기예보대로 과연 심상치 않은 눈이
내리고 있었다. 센 바람에 실려 과자만큼씩
진주는 휘익휘익 휘파람을 두어 본 불었다.
스스로를 가엾게 여겨 늘 눈물을 보이던
모친이 진주는 싫었다.
현관 입구에 진주는 앉아 있었다. 두
사람이 같은 방을 쓰는데 한 사람이
일방적으로 손님을 끌고 들어올 수 있을까.
내가 어디 간 줄 알았다 하더라도 나중
이렇게 된 경우에는 기는 그 여자를 끌고
모텔이라든가 호델로 갔어야 하지 않을까.
아니면 공원이라던가 숲으로, 눈이 오면
어때, 얼음덩이라도 녹일 만큼
부풀었을텐데, 하여튼 방에서는 나갔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의 사이사이에 기의 손이
여자의 다리를 더듬어 올라가는 상상을
하고 진주는 아픈 신음소리를 내었다.
지금이라도 쳐 올라가서 내 권리를
강조하는, 자기 인생은 자기가 책임지는
성숙한 인간으로 기의 생활과 엉키지 않게
나는 내 즐거움, 내 자유를 찾아 내 인생을
만들어가야 하는가. 그래도 같이 세를 내고
있는 방인데 역시 그 방을 그렇게
뚜장이처럼 선뜻 비워 준 것은 잘못된 것
같았다. 잠시 동안 망설이다가 진주는 다시
층계를 오르기 시작했다. 이제는
걸음걸이가 훨씬 자유로와졌으나 진주는
혼란된 생각을 수습하기 위하여 천천히
층계를 한 계단씩 올라갔다.
이 눈 오는 밤에 어디선가 파티라도 하는
듯 왁자지껄 웃는 소리, 전축 소리가 크게
울려 왔다. 삼층을 다 올라가도록 생각의
갈피가 잘 안 잡혀져서 진주는 복도벽에
등을 붙이고 한동안 서 있었다. 설령 내가
끌어들인 것은 용서할 수가 없어. 내가
없더라도 그 침대의 반은 엄연히 내
것이고---. 바로 앞에 방에서 크윽 재채기
소리가 들려 나쁜 짓을 하던 아이처럼 놀라
벽에 붙었던 등을 떼었다. 소리가 난 곳은
기의 표현대로 하자면 저 죄의식에
사로잡힌 여인이 방문하는 방이었다. 지금
진주가 서 있는 곳 쯤에서 기는 발을 탕
구르며 죽어 버려, 내뱉곤 하였었다.
진주는 짙은 녹색의 그 도어를 가만히
밀어 보았다. 문은 잠기지 않아서 그대로
열렸다. 방문하는 여인도 열쇠를 쓰지 않고
그대로 문을 열고 들어가던 것을 진주는
보았다.
어둠침침한 방안 침대 위에 고목같이
마른 노인이 앉아 있었다. 다음 재채기를
무릎을 짚고 있었다. 가구도 별로 없는
방에 신문지며, 빈 깡통, 옷, 식품봉투,
비닐봉투 같은 것들이 되는대로 어질러져
있었다. 조명은 침대 머리에 있는 독서용
작은 램프 하나뿐이었다.
진주가 살며시 문을 도로 닫고 돌아서려
할 때 방 안의 노인이 고개를 휙 돌렸다.
주름진 백발의 얼굴에 두 눈이 크게 뜨이고
입술이 조금 열려 달싹거렸다. 이 사람이
나를 무서워하는구나. 미안해서 그럼 안
되지. 진주는 거진 닫았던 문을 열고 한 발
방문턱을 넘어 들어섰다.
"나는 해롭지 않은 사람이에요.
공기같이."
이십 구 년 동안 자신을 기체와 같다고
생각해 본 일이 한 번도 없었건만 이 밤
"당신 와이프는 잘 알아요. 여기
방문하는 여자. 나는 당신도 두 어 번 본
일이 있어요. 복도 끝에 나와 창 밖 바람
쏘이는 것을 봤어요. 나는 요 위층에
살아요."
손가락 한 개를 펴서 진주는 천정을
똑바로 가르켜 보였다. 진주는 자신의 짓이
미치광이처럼 느껴졌지만 그냥 나오기도
어색하여,
"뭐 도와드리고 싶어요."
노인은 한 차례 기침을 하더니 진주에게
보냈던 시선을 자신의 앙상한 무르팍으로
떨어뜨렸다.
"아무 일도 없으세요? 그럼 전 가요.
빠이빠이."
손바닥을 보이게 흔들고 진주는
"더운 차 좀 만들어 주겠소?"
노인은 처음으로 우물거리는 목소리를
내었다. 진주는 귀를 의심하며 발걸음을
멈칫하였다. 유리 같은 노인의 눈에 한
줄기 교활한 빛이 반짝 떠올랐다 사라졌다.
"커피로요?"
"아니, 홍차. 거기 그릇장 안 어디 있을
거요."
스토브는 지저분했다. 물소리에 커다란
바퀴벌레가 열 마리쯤 재빨리 흩어져
달아났다.
"당신 결혼했소?"
노인이 물었다.
"네."
"아이도 있소?"
바람이 창을 드르릉 흔들고 지나갔다.
진주는 창가로 가서 낡고 찌든 두터운
커텐을 걷어 보였다. 방 안의 모습이 깊은
거울로 비치는 유리창 어두운 밖에 눈이
빠르게 흐르듯 내리고 있었다. 노인은 다시
기침을 했다. 진주가 커텐을 놓고 스토브
앞으로 돌아가자 방 안은 도로 고인
웅덩이같이 되었다.
"설탕을 몇 넣을까요?"
스토브 주변에 어지럽게 놓여진 조미료며
그릇들 속에서 진주는 설탕그릇을 찾아내어
커피 테이블에 갖다 놓았다. 찻잔과 수저는
더운 물에 오래도록 씻었다.
두 잔의 홍차를 만들어 램프를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은 마셨다. 사나운 바람소리를
들으며 진주는 지금 방안에 있는 기와
여자를 괴롭게 떠올렸다.
식료품도 다 떨어지고 냉장고 안에 배가
하나 있을 거요. 그거 먹어요."
"괜찮아요."
이 방을 기와 여자 앞에 또 내가 공기
같은 인간이라고 선언하고 버티고 앉아야
할까 아니면 나의 시간을 이 방에서 이
사람과 어줍잖게 보내어 기 앞에 그와
무관한 나의 인생으로 내세울까.
"당신 와이프 자주 봤어요. 한 번은
우리집에 성냥 빌리러도 왔어요."
"아, 저 스토브 때문이지. 어떤 땐
성냥을 그어야 돼. 낡아서 가스 구멍이 다
맥힌 모양이야. 동양 여자들은 친절하지.
당신 어느 나라에서 왔소?"
왁자지껄 떠들며 한 무리의 사람들이
층계를 올라와 방 앞을 지나갔다.
진주는 다시 물을 덥혀 차를 만들었다.
"캐시는 내가 뭘 요구하면 화를 내요.
다음 잼을 살 때는 마말레이드로 하지 말고
포도로 해 달라고 해도 화를 내요."
죽어버려, 기는 저 사람에게 말했었지.
진주에게 비로소 노인에 대한 부드러운
감정이 솟았다.
"남편은(남편이 아닌 기는 그러면
친구인가? 적수인가? 아니면 원수인가?)
당신 와이프 얘기를 많이 해요. 당신
시장을 봐 오고 목욕을 시키고....."
"캐시 그년이 제 입으로 말했겠지."
노인의 얼굴이 노여움으로 일그러졌다.
"아무것도 아닌 나 같은 인간을 돌봐
주는 자기는 얼마나 고매한 인간인가
하고."
우울하고 말이 없던 것을 생각했다.
성냥을 빌리러 와서도 웃지 않았다.
"그래, 그 고매한 희생 정신의 인간이
어째서 마말레이드 말고 포도젤리를 사
달라면 화를 낸단 말이요? 자기가 해 주는
것은 신이 주는 것으로 알고 고맙게 받고만
앉았어라 이런 태도란 말이요."
다 마신 찻잔을 씻어 엎어 놓고 진주는
어질러진 신문을 대강 개어 놓았다.
"당신은 정말 착한 여자요."
---그렇지 못해요. 의무가 아니니까 착한
짓 할 수 있어요.
진주는 TV를 틀었다. 영상이 제대로 안
잡히는 흑백 TV는 일기예보를 하고 있었다.
알라바마 근처에서 생긴 폭풍은 해안을
끼고 북상하여 메트로폴리탄 지역에 적어도
이 겨울, 눈 때문에 도시는 수백만 불을
이미 지불하였다. 밤이 지나기도 전에 벌써
도시의 교통은 마비되고 시내의 호텔은
만원이고 식당과 바는 큰 혼잡을 이루었다.
이번가(二番街)에서 누가 스키이를 타고
있다고 아나운서가 말했다.
"이렇다면 내일 캐시가 못 오겠는데."
노인은 가식 없는 초조함을 보였다.
"염려 마세요. 집에 사다 놓은 식품 좀
드릴께요."
그러나 노인의 관심은 단지 식료품에만
있는 것은 아닌 듯 진주의 말을 듣고도
얼굴을 펴지 않았다. 또한 진주 자신도 눈
때문에 모든 교통이 두절되듯 이 방에 꽉
갇혀 다시 자기 집의 냉장고를 여는 일이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코리안이겠지."
"네, 아이들이 있으세요?"
"있지, 아들 둘이. 다 커서 멀리서들
살고 있지. 이봐요 아가씨, 저쪽 벽에 붙여
놓은 종이가 보이는가? 스위치를 올리고 좀
읽어보아."
그의 말대로 진주는 스위치를 올리고
벽에 가 보았다. 거기에는 네모난 종이가
붙어 있었다. 푸른 잉크로 프린트된 그
글씨를 진주는 읽어 보았다.
로빈새의 생활
아빠 로빈과 엄마 로빈이 사과나무
가지에 둥우리를 만든다. 아빠 로빈이 풀을
가지고 오면 엄마 로빈이 튼튼하고 안전한
보금자리로 엮는다. 보금자리가 지어지면
푸른 빛이 섞인 알들은 대단히 예쁘다.
엄마 로빈은 자기 몸으로 알을 따뜻이
지킨다. 엄마 로빈이 알을 품고 있는 동안
아빠 로빈은 먹이를 가져 온다.
새끼 로빈이 알로부터 나오면 엄마
로빈은 부지런히 먹이를 갖다준다. 새끼
로빈은 언제나 배가 고프기 때문이다. 로빈
새끼들이 튼튼해지면 엄마 로빈은 그들에게
나르는 법을 가르친다. 때로 엄마 로빈은
새끼를 둥우리로부터 밀어내어 나르도록
한다. 새끼 로빈은 일단 날게 되면
둥우리를 떠나 돌아오지 않고 아주 훨훨
날아가 버린다.
"다 읽었어요."
진주는 뒤돌아섰다. 노인은 무표정히
"로빈새의 얘기지요?"
"어디까지 읽었소?"
진주는 프린트된 글씨의 마지막 부분을
인내심을 가지고 읽어 주었다. 새끼 로빈은
일단 날게 되면 둥우리를 떠나 돌아오지
않고 아주 훨훨 날아가 버린다.
"아, 그것 말고 그 밑에 뭐라고 연필로
쓴 것이 보이지 않소?"
가까이 눈을 대고 진주는 들여다 보았다.
남의 집 가족 사진을 볼때처럼 지루하였다.
이거 보세요. 난 지금 이런 거 들여다보고
당신하고 얘기하고 그럴 여유가 없어요.
"거기 연필로 뭐라고 쓴 거 안 보여?"
"네. 있는 것 같애요."
"그게 내 작은 아들이 생물시간에 배운
교재요. 국민학교 이 학년인가 삼
뭐라고 썼는지 아오? 슬프고 슬픈
스토리라고 적었어. 날게 되자마자 새끼
로빈이 둥우리를 아주 떠나는 것이
슬프다는 얘기지."
듣고 본즉 연필 흔적은 Sad, Sad Story
인 것 같았다.
"그랬던 죠지도 로빈새처럼 떠났지.
떠나면서 조금도 슬퍼하지 않았거든. 그도
지금은 벌써 외손자를 보았어. 요새
아이들은 빨라. 그 딸이 열 네 살인데
아이를 낳았어요."
노인의 기분을 살펴서 진주는 프린트물을
좀더 들여다 보는 체하다가 전등을 껐다.
다시 침침한 방이 되었다.
"굉장한 폭풍이군. 망할 놈의 세상, 전부
눈구덩이에 묻혀라."
했다.
"묻힐 거예요. 일기예보가 그래요."
"아무리 심한 폭풍도 이틀을 가는 법이
없어. 알겠소?"
진주는 누우려는 노인을 부축하여
주었다. 오줌이 찌든 습한 체취가 진주의
코에 닿았다.
"멸 살이세요?"
"예순 둘이요."
"내 어머니와 같은 나이에요."
노인은 곧 잠이 들고 진주는 남의 방,
별로 편안치도 않은 의자에 둥그랗게 올라
앉아 있었다. 이까짓 세상 눈이 펑펑
퍼붓고 또 퍼부어 종말이나 오라. 진주는
온 세상 사람들이 모두 제 구멍이 아닌
다른 구멍에 박혀 다른 짓들을 하고 있는
나는 윤마나 정신병원에 있다는 그
뒷여자처럼 결코 되지 않으리라. 진주는
몰래 눈물을 씻었다. 미스 오처럼 울지
않으리라. 기가 내 앞에서 기는 날이 있게
하리라. 앉으라면 앉고 서라면 서는 날이
있게 하리라. 질투로 온 몸이 초록색이
되는 날이 있게 하리라. 어떻게? 그건
생각해 봐야지. 차차 잘 생각해 봐야지.
하여튼 내 꼭 그런 날을 보고 말리라.
정섭이 떠날 때 천지가 없어지는 줄 알고
길거리를 울며 다녔던 내가 드디어 정섭
앞에 웃으며 설 수 있었듯 그렇게 기와
대적할 힘을 기르리라.
세벽 네 시에 진주는 노인의 방을 나와
층계를 올라갔다. 전등이 호젓한 층계
그도 또한 지옥을 지나온 듯 핼쓱하고
창백한 쌍통을 하고 있었다. 주위는 죽은
듯 고요하였다. 기는 진주를 보고 펄쩍
뛰듯 일어났다.
"어디 갔었어?"
아무 대답 없이 진주는 현관문을 열었다.
기는 바싹 진주 뒤를 따라 들어왔다.
"눈보라가 심한데 어딜 갔었어? 코트도
없이. 나는 어디가서 영 죽어버린 줄
알았지."
"내가 갈 데가 없을 줄 알구?"
진주는 비뚤어진 웃음을 띠웠다. 여자가
있을 때 꺼내었던 컵들도 다 치워주고
진주가 만지던 빨래도 안 보이고 방안은
깨끗이 정돈되어 있었다.
"진주, 지금은 지하철도 기차도 막히고
죽을뻔 했어. 내가 너를 학대하는가.
아이린이 나를 그렇게 비난했어. 화를 내고
가 버렸어. 우리는 둘이 행복하지 않았어?
진주 그렇지?"
기는 진주를 껴안았다. 진주는 기의 품에
안기며 왕자님과 춤추며 발에서 피 흘리는
인어 공주를 또 생각했다.
"아, 진주 정말 걱정했어. 윤마와
경애처럼 나는 또 너마저 어떻게 되는가
했지. 내가 주변을 망치고 돌아다니는
사람이 되는가 했지."
어둠에 눈이 익자 방 안은 이상한
밝음으로 차 있었다. 쉐이드를 올린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희뿌연 빛의 하늘이 낮도
아니고 밤도 아닌 환상의 세계로 세상을
이끌고 가는 듯했다.
너는 행복하라. 기쁜 생활을 이루라."
폭풍은 이틀도 가지 않아요. 위잉위잉
회초리같이 우는 바람 속에 진주와 기를
싣고 방은 하나의 애드벌룬인 양, 손바닥에
받아보면 금방 녹아 버리는 한 송이 눈인양
공중에 떠 휘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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