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방송에세이(22)】
수신료의 가치 / 김잠출
지난여름 최고의 유행어는 ‘극한(極限)’이란 두 글자였다. 극한의 사전적 의미는 ‘어떤 사물이나 일 따위가 궁극적으로 도달할 수 있는 한계’를 뜻한다. 평소 좀처럼 사용하지 않던 이 말이 올여름 언론이나 일상대화에서 흔하게 등장했다. 더위도 그냥 더운 게 아니고 혹서에 극한 폭염이었고 역대급 태풍에 기록적인 홍수와 장마 그리고 게릴라성에서 도깨비 호우로 바뀌기도 했다. 극한은 이미 뉴-노멀이 됐고 온열, 열대야, 늦장마, 늦더위, 가을 홍수 등 말의 강도가 점점 상승했다. 이 정도면 지구온난화의 시대는 끝났다. 이젠 지구 열대화가 맞는다. 그러니 가을비 우산 속의 낭만은 잊은 지 오래다.
도시에 살면서 사계절이 어떻게 오고 가는지 민감하게 느끼지 못했다. 나도 모르게 무관심했거나 무감각해졌다. 도시의 외곽, 강변으로 이사하고 나서야 서서히 사계를 다시 음미하고 있다. 강과 들, 산과 밭 등 주변의 환경이 자연 친화적이다. 가을비 그치면 그동안 뜸했던 ‘베리끝’ 갱빈길이나 걸어야겠다. 가을비가 멎으면 추위가 온다는 신호다. 곧 겨울이 오고 더 몸을 사리게 된다. 강변 주민에게 그나마 사계의 변화를 느끼게 해 준 가을비, 가을비 우산 속에는 나 혼자이지만 좀 힘있게 더 빠르게 차박차박 걸어야겠다.
에라, 가을이 가기 전에 하모니카나 불어 보자는 심사로 트레몰로 24홀 복음 C조 두 개를 샀다. 풍성한 소리를 내며 반주와 멜로디를 동시에 연주할 수 있는 휴대용 악기다. 매미 소리 사라지고 귀뚜라미 소리를 들으니 내게도 갑자기 ‘지름신’이 내렸다.
귀뚜라미는 60여 년 내게 친숙한 존재다. 누구는 노래다 소리다 하고 누구는 운다고 하지만 나는 때로 연주로 듣는다. 귀뚜라미는 풀잎 속에서만 노래하는 게 아니다. 차가운 아스팔트 보도에서도 울음을 토하거나 풀잎도 없고 이슬 한 방울 내리지 않는 아파트 콘크리트 벽에서도 주차장 바닥에서도 홀로 노래 부른다.
시장실의 귀뚜라미
울산시청을 방문하는 시민들은 청사에서 들리는 청아한 귀뚜라미 소리를 들었다. 시장실을 비롯해 시청 본관 각층 복도에 꾸며놓은 작은 화단에 귀뚜라미가 서식했다. 화단 한 귀퉁이에 작은 숲을 만들어 그 가운데에 작은 집을 지어 귀뚜라미를 사육한 것이다. 가을만 되면 시청에선 바이올린을 켜듯 양 날개를 비비면서 귀뚜라미들의 아름다운 연주가 울려 퍼졌다. 아무도 불평하지 않았던 아련한 추억이다.
귀뚜라미가 시청에 자리 잡은 것은 2005년 3월부터였다. 시장이 한 교수에게 선물 받아 시장실에서 애지중지 키우다 청사 5개 층에 3쌍씩 모두 15쌍을 분양해 청사 전체로 늘렸다. 당시 시장이 귀뚜라미를 좋아하기도 했지만, 울산시는 태화강 르네상스를 외치며 산업수도에서 생태도시로 탈바꿈하고자 안간힘을 쓰던 때였다. 환경과 산업이 공존하는 친환경 생태도시 조성 의지를 다지기 위해 상징적으로 시장이 직접 키웠으니 칭찬할만한 일이었다.
어느 시인은 돌계단 앞에 떨어진 오동잎을 보고 가을을 감지한다지만 산골, 해안, 시골과 농촌에서 살다가 도시에 살고 있는 나는 거의 해마다 귀뚜라미 소리로 가을을 느낀다. 다만 귀뚜라미 같은 미물도 자연 이치에 따라 절로 감응해 나에게 계절의 변화를 알려 주는데 하물며 인간인 나는 감응은커녕 시계나 달력, TV에 의존해 가을을 안다. 자연에 대한 본능과 감응은 귀뚜라미가 나보다 나은게다. 그들은 무슨 할 말이 저리 많은지 사랑의 노래를 밤새 그치지 않는다. 구애나 유혹을 위한 몸부림에서 나오는 소리라 이해는 한다만 밤새 귀뚤귀뚤 우니 무슨 사연이 있는지 궁금하다. 불면을 호소하는 사람도 있지만 나는 밤새 들어도 싫지 않고 듣기에 좋다.
어린 시절, 가을의 전령사들인 풀벌레 소리가 들리고 하늘이 청명해지면 어머님은 어김없이 문을 씻고 새로운 종이를 발랐다. 구멍 난 창호지와 문풍지를 물을 적셔가며 뜯어내는 일은 내가 도왔다. 그런 밤에는 달빛이 영창에 가득하고 새로 붙인 창호지를 통해 대나무 그림자 어슬렁거리고 풀벌레들이 저마다 음유시인이 되어 노랫소리를 읊었다. 한밤에 울어 예는 그들의 마음이 나와 같다고 느낀 날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그중에 가장 친숙한 시인이 귀뚜라미였다. 입으로 시를 읊지 않고 날개를 서로 비벼 사랑의 시를 읊어 대지만 한꺼번에 소리 내다 뚝 그치는 요란한 매미와 달리 언제나 홀로 연주했다. 고독한 solist. 베짱이나 쓰르라미처럼 실실거리지도 않고 개구리처럼 관악기 불듯이 왕왕거리지 않아 좋았다.
수신료의 가치
“소녀들에겐 꿈이 있었다. 너무나 간절해서 더 소중했던 꿈이 있었다.”
그날 시청한 다큐멘터리의 첫 화면은 ‘소녀의 꿈’이라는 내레이션으로 시작됐다. 시간이 갈수록 화면이 흐릿하게 보였다. 어느새 내가 그 냉정하고 무미건조한 TV 앞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가난한 시골의 고향과 15살 어린 나이에 공장으로 가 야간 중고등학교에 다닌 누나와 초등 졸업 후 김해로 마산으로 공장에 간 동네 가시내들이 떠올라 어쩔 수 없었다. 그날의 KBS는 수신료의 가치를 충분히 증명했다.
우리 현대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특수한 성격의 노동자였던 ‘여공’들. KBS 청주 방송이 만든 <양백의 소녀들>(이달의 PD 상, 2023 방송통신위원회 방송 대상작)은 다소 무겁거나 어두운 색깔 또는 뭐 뻔할 것 같은 ‘여공’을 소재로 잔잔하고 세심한 연출로 풀어냈다는 평을 받았다. 그때 그 시절의 진솔한 얘기가 출연자들의 담담한 인터뷰에 잘 녹아났다. 자료화면도 적절히 버무려져 감동과 위로를 준 작품이었다는 평가에 동의했다. 시청하는 내내 나는 감정 과잉에 눈물을 찔끔거렸다. 소재 자체가 그랬지만 청주 KBS의 PD는 덤덤하게 인내하며 작품을 끌고 가는 세련된 연출력을 선보였다. 그들을 지금 시대에 정면으로 내세운 점만으로도 충분히 칭찬받아 마땅한 작품으로 지역방송의 수작이라 여긴다. 지역방송의 존재 이유와 참된 가치를 다시금 알려 준 제작진에게 박수를 보낸다. 자발적 수신료 납부자로 남아야겠다.
새마을 문고와 독서대학
1980년 중반쯤 울산에도 나일론 공장이나 화학공장마다 ‘부설 중학교’가 생겼다. 새마을 독서경진대회를 대비한 ‘독서대학’도 공장마다 부흥했다. 중학교와 대학의 학생은 대부분 ‘공순이’라 불리던 여공들이었다. 내게 여공들은 누이이자 친구이자 한 식구였고 산업역군이었다. 대학 4년 내내 야학을 운영했거니와 손 위 누나도 동네 여자애들도 모두 그 그룹에 속했으니까.
1990년대 초반까지 울산의 각 기업체에서도 부설 중학교와 사내 독서대학이 생기고 형설지공의 학구열과 독서 붐 경쟁에 열을 올렸다. 지역방송은 그들을 리포터로 활용해 퇴근길 공장 소식을 전했고 독서지도와 순회 공개방송을 제공했다. 리포터들은 출연료도 받고 책을 답례품으로 받아 갔다. 일요일마다 녹화 방송되는 노래자랑 공개방송의 제목도 당시엔 세련됐다고 한 것이 ‘일하며 노래하며’였다.
지역방송은 당시 한 도시의 문화전도사였고 기획가이자 첨단과 유행을 선도했다. 조용필 초청 공연으로 도서관 건립 기금을 쾌척하고 오지를 순회하는 이동도서관용 버스를 개조해 기증하면서 각 공장의 독서대학에 독서 붐과 책 읽기 분위기를 조성하고 독려했다. 울산 MBC도 새마을운동의 일환인 독서문화 진작에 혼신을 다했다. 고전 음악 동호회도 만들고 공대만 있는 도시에 음대와 미술대, 인문대와 법대를 유치했다. 시립 교향악단, 시립 무용단, 문화예술회관 건립을 위해 최초 발의하고 여론형성에 많은 힘을 보탰다. 봄가을엔 주부백일장, 여성 문예 대학을 열고 소년소녀가장 지원활동에 나섰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방송사의 추진력과 의지도 한몫했지만, 당시의 시대 환경이 다소 무리해도 방송사가 한다고 해 쉽게 해결된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던 중에 마을문고의 발상지가 울산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방송 소재로도 좋은 나름의 수확이었다.
울산 울주군 웅촌 출신인 간송(澗松) 엄대섭(嚴大燮, 1921~ 200)이 주인공으로 간송은 도서관 운동가로 농어촌마을 마을문고 설치 운동과 공공도서관 운동을 이끌었던 우리나라 마을문고의 창시자이자 도서관 운동의 선구자였다. 70년 역사의 경주시립도서관 초대 관장이었던 그는 가난한 소작농의 장남으로 태어나, 8세 때 부모를 따라 일본으로 이주했다. 공사장 인부로 일하던 부친이 교통사고로 장애인이 되자 14세의 어린 나이에 동생들까지 책임지면서 두부 장수, 세탁소 점원, 방직공장 직공 등 험한 일을 하면서 고등학교를 마쳤다.
1950년 여름 부산의 고서점에서 '도서관의 운영과 실제'라는 일본 고서를 발견한 것이 그의 삶의 방향을 결정적으로 바꾸었다. 1951년에 자신이 갖고 있던 3천여 권의 책을 활용해 울산에 사립 무료 도서관을 열고 농민들에게 책 읽기를 권장했다. 당시 전쟁의 부산물인 탄환 상자를 이용해 50개의 순회문고를 만들었는데 이것이 우리 역사상 최초의 마을문고이자 시발점이라고 한다.
1961년 첫해에 전국 26개였던 마을문고가 1968년에 1만 개, 1971년에 2만 개를 넘었고, 1974년에 3만 개를 돌파하였다. 모두 엄대섭의 공이라 이런 성과를 바탕으로 1980년에 막사이사이상(공공봉사 부문)을 수상했다. 마을문고는 1981년 새마을운동 조직에 흡수되면서 새마을 문고로 이름을 바꾸었고 후신인 새마을 문고 중앙회는 지금도 전국에 지부를 두는 등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다.
지금 누가 책 읽기를 함부로 권유할까마는 모름지기 ‘생각하는 백성’이라면 그래도 책을 읽고 생각을 할 줄 알아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읽고 쓰고 듣고 말하는 것’이 국어교육의 목표 아닌가. 보고 듣는 시청각도 중요하지만 읽기가 최우선이고 가장 중요한 기능이다. 지금은 등화가친의 시기, 독서의 계절이다.
가곡과 아리아의 밤
“이럴 때도 있구나, 우리 방송에서 가곡이라니”
퇴근길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가곡을 듣고 여러 생각이 오갔다. 청아한 목소리의 성악가 이름은 생소했지만 1980년대 유행했던 ‘명곡 앨범’ ‘정다운 가곡’ 같은 FM 프로그램이나 ‘가곡과 아리아의 밤’이 떠올랐다. 당시엔 <객석>을 구독하고 엄정행이나 이규도 백남옥 정도는 아는 척해야 문화인이니 교양인 흉내를 냈다. 은은한 클래식 선율이 초가을 밤을 아름답게 수놓으면 관객들은 바쁜 일상을 잠시 내려놓고 음악과 함께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전국을 돌며 수많은 시민을 문화인 교양인으로 만들어 준(?) ‘가곡과 아리아의 밤’이다. 낙엽에 가을꽃, 달밤에 그리움을 담아 부르던 주옥같던 노래를 들으며 얼마나 행복했던가.
엄정행, 신영조, 박인수는 '한국의 3대 테너'로 매년 전국 순회를 한 단골 출연자였다. 미성의 신영조와 카랑카랑한 목소리에 미남이었던 엄정행은 시원시원한 목소리를 자랑한 국민 테너였다. 박인수는 바리톤 쪽에 가까운 목소리를 냈던 것 같다. 가수 이동원과 함께 '향수'를 불러 불후의 명곡으로 남겼다. 1990년 초인가 향수를 녹음한 데모 테이프를 가져 와 경주에서 한잔하며 감상과 평을 요구하며 고칠 곳이 있나 물으며 미묘한 표정을 지었던 장면이 떠오른다. 우리 정서와 고향을 소재로 이 작품보다 더 나은 시는 없을 것이라며 최고의 가곡이 될 것이라 부추겼다. 선생은 가곡이 아니고 김희갑 선생이 작곡한 대중가요라고 전했다.
<향수>는 8~90년대를 겪은 이들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불렀던 명가곡이다. 그냥 읽어도 최고의 시작품이다. 누가 향수란 정서를 이처럼 묘사할 것이며 느릿느릿 고향의 풍경과 추억, 계절별 한국의 미를 이보다 더 잘 표현하겠는가.
이런 가사 이런 곡을 대중가요라 폄하하며 서울대가 문제 삼아 박 선생이 곤란을 겪기도 했는데 그래도 연 200회 공연에 개런티로 집을 샀다. 오페라단에서 제명당하는 등 파문도 컸지만, 결과적으로 전화위복이었고 시대를 앞서갔던 테너 박인수는 올해 미국에서 타계했다. 둘의 콜라보는 일종의 크로스 오버였고 요즘 말로 케미가 찰떡이어서 그야말로 대박을 터뜨리며 공전의 빅히트를 기록했다.
미남으로도 유명했던 엄정행은 가곡 '목련화'가 자신의 브랜드였고 신영조는 시 노래 '산 노을'을 애창했다. 바리톤 오현명은 전 국민에게 '명태'의 가치를 알게 해 준 주인공이다.
들국화를 비롯해 목련화, 그리운 금강산, 성불사, 선구자, 희망의 나라로, 봄이 오면, 동심초, 보리밭, 옛 동산에 올라, 비목, 내 마음은 호수 등이 국민 애창곡이었고 당시 가을 무대를 수놓았던 인기곡이었다.
그후로 우리 가곡은 철저히 외면당했다. 다른 장르에 비해 음악적 가치가 뛰어나지만, 존재 자체가 너무 미미해졌다. 트로트로 국론 통일, 국민 총화와 단결을 이루려는 듯한 지금 세태에 젊은이들은 과연 가곡이란 단어를 알기나 할까.
트로트 천국, 오디션 남발... 지역방송은 제발 그런 흉내 내기 유혹에 빠지지 말았으면 한다. 따라해 봐야 일단 어설프고 인프라와 소프트웨어가 원작에 못미친다. 낮은 수준의 프로그램은 보기에 민망할 뿐이다. 지역 전문가답게 자부심을 품고 지역 소재로 승부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KBS 청주의 ‘양백의 소녀들’, MBC경남의 ‘어른 김장하’, 안동MBC의 라디오 드라마 ‘존애원, 낙강에 뜬 달’! ‘만인소’... 귀하고 귀한 지역방송을 만드는 지역 PD들이 많아졌다. 지역방송의 존재 이유와 가치를 돋보이게 하는 이들이다. 숨어 있는 지역 소재를 발굴해 콘텐츠로 만들면서 지상파방송, 공영방송의 공익적 가치를 실현하고 대한민국 방송 산업을 견인해 갔으면 좋겠다. 이들 때문에 지금까지 지역방송이 살아남은 게 아닐까.
지역방송도 자기 PR을
최근 KBS가 달라졌다. 공세적이고 적극적으로 자기 PR을 하는 시간이 엄청나게 많아졌다. 프로그램마다 “여러분의 소중한 수신료로 만들었다.”는 겸손의 말을 하고 수신료의 가치를 증명하겠다는 자막이 생강시럽다. 매일 9시 뉴스 직전에 수신료의 가치를 강조한다며 명품 다큐 방송을 예고하거나 공영방송의 가치를 강조하는 스파트를 자주 송출하며 자사 홍보를 수시로 한다. 수신료 분리 징수가 결정된 이후 보이는 변화된 모습이다. 꼴 보기 싫다거나 불편하다, 정도가 심하다는 불평도 있지만 나는 긍정적이다. (공영방송이 포화상태라 구조조정이 필요하지만, KBS 하나는 존재해야 한다는 의견에 동의)
방송가에도 공영방송 위기론이니 수신료 분리 징수 같은 충격요법을 가해야 시청자들 복지가 커진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일요일마다 KBS UHD 명품관을 다시 방송하니 나로선 채널 고정이다. 역시 KBS답다.
<슈퍼 피쉬>,<바다의 제국>,<이카로스의 꿈>,<누들로드>,<차마고도>, <도자기> 등 기존에 방송했던 HD 대형 명품 다큐 30편을 UHD 리마스터링해 준다니 앞으로 일요일 저녁이 심심하지는 않겠다. ‘웅장한 대화면의 감동과 선명한 색감을 통해 KBS의 명품 대형 다큐멘터리 진정한 가치를 시청자에게 다시 한번 선사한다.’라는 홈페이지 프로그램 안내 문구가 명실상부해졌다.
20세기 방송사의 홍보 심의부서는 누구나 기피하는 자리였다. 그때 방송인들은 심의나 홍보에 관심이 없었고 그리 괘념치 않았다.
서울에서 온 김 사장은 달랐다. 21세기를 앞둔 시점에 나에게 홍보심의실장을 맡겼다. 난 아직 젊은데, 필드에 더 뛰어야 하는데…. 어이가 없어 불만을 나타내니 대외 홍보를 공세적으로 하고 전국의 신문 방송 잡지를 가리지 말고 프로그램, 행사, 기획물과 사업을 알리라는 미션을 던졌다. 심의는 규정에 따라 알아서 하라고 틈을 주었다.
우선 회사의 기획과 정책업무를 넘겨달라고 요구해 홍보업무와 함께 실장이 맡고 심의는 라디오와 TV를 나눠 두 부장에게 전권을 넘겼다. 우선 시청과 구군 기자실을 찾아 친밀감을 높이고 매달 또는 무시로 출입하겠다며 스킨십을 강화했다. 지역 문화부 기자들도 같은 방식으로 접근해 시시때때로 보도자료를 전했다. KTX 열차와 매거진에 광고와 기사를 게재하며 월 1회는 서울에 가 메이저 신문 문화부를 들락거렸다.
신년에 선보일 캠페인 주제와 10대 기획을 선정하라고 전 사원을 독려했다. 이 부서 저 국에서 월권 운운하며 반발도 있었지만, 선의와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을 함께 가자고 설득해 잘 무마했다. 홈페이지도 완전히 리모델링하고 지역 신문에 창사 기념 광고나 특집물 광고를 게재하니 신문 사주가 고마워했다. 대표 행사나 이벤트는 자체 스파트로 충분하다는 자만심을 버리고 사옥의 외벽 사방에 대형 걸개그림을 걸고 육교나 빌딩의 광고판, 공항과 터미널에 TV 모니터를 기증해 설치해 주며 MBC PR을 강요하기도 했다.
울산 서머페스티벌, 천년 불사의 꿈 비단벌레, 국토종단-천사 릴레이 희망 마라톤, 간절곶에 해가 떠야 한반도에 아침이 온다, 21세기를 쏘다 등의 기획은 그렇게 탄생했고 전국에 홍보했다.
홈페이지도 시청자들에게 개방했다. 당시 인터넷이 그렇게 위력이 없었지만, 전문가들에게 맘대로 놀도록 하는 코너를 주고 아나운서나 피디, 기자들의 개인 블로그를 개설해 개인 홍보나 팬들과 마음껏 조잘거리라고 떠맡겼다. 비방송 분야 직원들도 원하면 끼와 특기를 자랑하라고 멍석을 깔아주니 고래와 야생화를 특화한 기술국 직원의 블로그가 폭발적이었다. 지금 웬만한 연예인 팬덤 못지않게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나도 향토사 현장을 소개하고 함께 답사하고 오류를 수정해 주는 코칭 스타일의 블로그 ‘나무와 숲’을 운영해 지역민과 소통했다.
조회 수와 방문자를 매일 체크하고 사내에 공개해 긴장감을 높이고 시청자게시판도 매일 점검해 무플에 대해선 담당 PD나 책임자들을 경고하는 악역은 사장이 맡았다. 시청자는 왕이니 궁금하다거나 질문을 하면 즉시 답변하도록 분위기를 바꿔 미지근하거나 어정쩡하지 말고 방송사가 뭔가 좀 뜨겁거나 차갑거나 하길 바랐다. 캠페인도 시민 대상으로 공모해 동참 열기를 끌어냈는데 반드시 당근을 동원했다. 시청자미디어센터도 건립해 시민들 미디어 교육을 맡았다. 지역방송의 자기 PR은 이 정도는 해야 한다고 믿었고 행동했다. 지금은 누구나 다 하는 일이고 개인도 이보다는 더 잘하지만 그땐 그랬다.
아직도 그런 경향이 좀 있는데 지역 언론은 스스로 자랑하는 걸 꺼린다. 겸손인지 홍보나 PR이 필요 없다 자만인지 그리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다. 이건 착각이다. 시청취자와 독자와의 커뮤니케이션에 왜 그리 인색한지 모르겠다. 자기 내부의 이야기를 공개하거나 드러내는 걸 대단히 꺼린다. 지역방송 홈페이지는 교과서적인 인사 정도만 있고 어떠한 자사 소식이나 정보도 알 수 없다. ‘알립니다’ 코너나 시청자게시판 또는 자유게시판은 연간 내내 개점휴업 상태로 문패가 썩어가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 없다. 주인이 그러한데 나그네나 손님이 발길을 들일 리 만무하다. 겨우 행사 공지나 신규 프로그램 홍보 정도로 운영되고 프로그램별 방문 흔적이 거의 없어도 오불관언이다. 안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