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환기(金煥基, 1913~1974), Yellow Fruit, 1950년대
인수봉에 ‘미친’ 사람들
지난 13일~20일 서울 종로구 인사동의 토포하우스 갤러리에서 ‘인수봉 얼굴’ 사진전시회가 열렸다. 한신대 개교 80주년기념특별전으로 열린 이 전시회는 인수봉에 미친 3인의 우연인지 필연인지 모를 기묘한 인연이 만들어 낸 자리였다.
전시회에는 한국일보와 동아일보에서 사진기자로 활약하다 은퇴 후에도 사진작가로 왕성하게 활동하는 전민조(田敏照・76)씨가 1960년대 후반부터 현재까지 50년 넘게 찍어온 인수봉 사진 30여 점이 걸렸다.
이 전시의 단초를 제공한 것은 지난 3월 종로구 안국동 담 갤러리에서 열린 ‘전민조, 인수봉 - 바위하다’ 전시회였다. 산악인이자 시인 겸 소설가인 박인식 씨(69)의 바위에 관한 시에 전민조 작가의 인수봉 사진들을 곁들인 ‘시사전(詩寫展)’이었다.
‘바위하다’ 전시를 기획하기 위해 먼저 산과 바위로 인연이 되어 친구가 된 박 시인과 서지학자 유시건 씨가 전시 몇 달 전 만났다. 박 시인이 시에 어울리는 바위그림이나 사진을 찾고 있다고 하자 유 씨가 안 주머니에서 항상 보물처럼 지니고 다니던 사진첩을 꺼냈다. 사진첩의 사진들은 그가 전민조 블로그에서 발견해 자신의 카메라로 찍어 복제한 인수봉 사진들이었다. 박 시인은 사진의 출처가 전민조 블로그라는 소리에 다시 한 번 놀랐다. 박 시인도 전 작가와는 산이 인연이 되어 이름은 알고 지내는 사이였기 때문이었다.
전 작가는 소장품 중에 15 점을 이 시사전에 무료로 내주었다. 인수봉은 오래 두고 찍어야 할 대상으로만 여겼지, 사진집이나 전시회는 생각지도 않았던 전 작가로선 뜻밖의 계기로 전시회를 연 셈이었다.
여기에 또 다른 인연이 더 보태졌다. 한겨레신문에 보도된 전시회 예고기사가 한신대 연규홍 총장(60)의 눈에 띄었다. 개막식 날 담 갤러리를 찾은 연 총장은 이들 3인의 인수봉에 얽힌 사연과 함께, 전 작가가 소장하고 있는 1만 점이 넘는 방대한 인수봉 사진 얘기를 듣게 됐다.
수유리 인수봉 자락에 있는 한신대 출신의 연 총장은 대학 입학하던 날부터 인수봉을 자신의 ‘큰바위 얼굴’로 삼아 꿈을 키웠고, 그래서 아호도 ‘바위’로 지은 터였다. 그가 인수봉 사진으로 10월의 개교 80주년 기념전시회를 열기로 한 결정은 우연 같은 필연이었다.
전 작가는 이번 전시회에 출품한 34점의 인수봉 사진을 한신대에 기증하기로 했다. 2016년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 열었던 자신의 사진전 출품작 200여 점을 박물관에 기증한 이후 두 번째의 기증이었다.
이들 3인의 ‘인수봉 사랑’은 신앙과 같은 것이었다. 먼저 전민조 작가는 내가 1974년 한국일보에 입사했을 때 이미 이름을 날리던 사진부 기자였다. 신문에서 그의 이름을 볼 적마다, ‘민첩하게 비추다(찍다)’라는 ‘민조’의 뜻이 주는 연상작용 때문이었을까, 그가 타고난 사진기자이겠거니 생각했었다.
한국일보에 그가 찍은 사진들이 대문짝만하게 실릴 적이면 나는 그의 피사체를 대하는 독특한 시각에 감탄하면서 나의 이름풀이가 그럴듯함을 확인하는 기분이었다. 그는 1975년 동아일보로 옮겨 1998년까지 활약하다 은퇴했다.
인수봉에 소나무 암각화를 새기듯 찍은 작품
그가 인수봉에 미친 사람인 것을 안 것은 10여 년 전 그와 북한산에 오르면서였다. 사진기자로서 전국 방방곡곡을 다니며 온갖 사진을 찍은 그였지만 북한산에 오는 것은 오로지 인수봉을 찍기 위해서라고 했다.
그는 군 입대 전인 1964년 인수봉을 처음 대했을 때 그 위엄 앞에 숨이 멎는 듯이 압도당한 기억으로 인해, 제대 후 사진기자가 되어 틈나는대로 인수봉을 찍기 시작했다. 인수봉과 온전히 하나가 되려고 그는 등반학교에서 암벽등반을 익힌 뒤 모든 등벽루트를 100회 이상 섭렵했다.
사진들을 보면 그는 전 시간, 전 방향, 전 각도, 전 채색으로 인수봉을 렌즈에 담았음을 알 수 있다. 멀리서 가까이서, 꼭대기에서 밑에서 옆구리에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안개가 끼나, 새벽이건 어스름이건 한낮이건 한밤이건 그의 시선은 인수봉에 꽂혀 있었다.
그에게 인수봉은 언제부턴가 생물체였다. 눈 코 입과 귀가 있고, 암벽의 틈새들은 핏줄이었다. 바위 속에는 오장육부가 들어 있을 것 같았다. 그의 인수봉에 대한 집착은 부인에게는 큰 걱정거리였다.
꿈에 석양을 찍고 있었다. 산 밑으로 사라지는 태양을 가슴졸이며 찍고 있던 순간 거대한 바위가 열리며 광채가 쏟아졌다. 부인에게 꿈 얘기를 하니 “미쳐가는 꿈 같다”고 했다. 그는 부인의 성화에 못 이겨 병원으로 정신과 진찰을 받으러 간 적도 있었다.
진찰을 끝낸 의사에게 부인이 “이 사람 이상하죠?”라고 물었다. 의사가 “이상이 있기를 바랐나요? 이상이 없습니다”라고 하자 “ '그럴 리가 없는데...'라고 해서 웃었죠."
인수봉의 외귀 바위. 시인 박인식은 전민조의 이 작품에서 자신의 한쪽 귀를 자른 반 고흐를 보았다.
박 시인은 산과 바위를 사랑하는 산 사람이다. 산에 관한 잡지의 기자도 했고, 발행인도 했다. 그의 시와 소설도 산과 바위에 관한 것뿐이다. 그에게 인수봉은 이 나라의 ‘어미바위’이다. 그는 인수봉을 이렇게 읊었다.
‘나의 인수봉은/ 억년 세월로 자라난 견고한 무덤/ 청춘의 낭떠러지 꽃잎으로 떨어진 그대/ 상석 제물로 올려질/내 추락의 살점을/ 티벳의 독수리가 / 히말라야 설산으로 물어나르는/ 조장(鳥葬)의 꿈/ 쩡쩡 별빛이 얼어붙는/만년설/ 절대고독을 넘는 그/ 새들의 하얀꿈 - 인수봉 1’
그는 인수봉의 외귀 바위에서 자신의 한쪽 귀를 자른 반 고흐를 보았다. ‘고흐의 얼굴/ 그 예술혼의 얼굴/ 인수봉 큰바위 얼굴/ 고흐, 그림하다/ 예술혼하다/ 산꾼, 인수봉하다/ 바위혼하다 - 예술혼 또는 바위혼’
인수봉을 300회 넘게 등반한 서지학자 어산(於山) 유시건의 인수봉 사랑은 ‘중독’이었다. 42세 때인 1987년 잘 다니던 한국정신문화원을 그만두었다. 더 늙으면 체력적으로 인수봉을 오를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주말의 혼잡 속에서가 아니라 평일에 혼자서 고즈넉이 인수봉을 바라보고 어루만지겠다는 생각도 했다. 그는 인수봉에 관한 것이라면 시서화(詩書畵)를 가리지 않고 사들이거나 복제한 인수봉 수집광이기도 했다.
그는 지난 2005년 인수봉 등정 200회를 기록한 데 이어, 2009년에 300회를 기록했다. 그는 회갑 년이기도 했던 2005년 200회 등정 소회를 이렇게 피력했다.
‘희게 빛나며 하나로 우뚝 솟은 인수는 내가 사랑하는 님이요, 토템이었습니다. 멀리서 바라보기만 해도 가슴이 뛰었습니다. 고달픈 몸에 원기를 채워주었고, 마음의 속진을 씻어주었습니다. 1987년 마흔둘 바위하기에는 늦은 나이에 그와 한 몸이 되기 시작하여, 회갑을 맞이한 2005년 3월까지 200회 오름에 이르도록 나를 받아준 님에게 깊은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중략) 처음과 같이 이제와 앞으로도 계속 나를 받아주소서 인수여! 나의 님이여, 영원하소서! 2005 3 23’
어산은 ‘인수봉 - 바위하다’ 전시가 끝나던 지난 3월 15일 전 작가와 박 시인을 초청해 만찬을 베풀었다. 그리고 1주일 뒤 홀연히 세상을 떴다. 그가 그토록 사무치게 연모했던 인수의 품에 안겼을 것이다. 향년 75세였다.
[퍼온 글] / 출처; 2020년 10월 27일 (화)에 받은 자유칼럼그룹의 e메일 / 필자소개; 임종건(한국일보와 자매지 서울경제신문 편집국의 여러 부에서 기자와 부장을 거친 뒤 서울경제신문 논설위원 및 사장을 끝으로 퇴임했으며 현재는 일요신문 일요칼럼, 논객닷컴 등의 고정필진으로 활동 중입니다. 한남대 교수, 한국신문윤리위원회 위원 및 감사를 역임했습니다. 필명인 드라이펜(DRY PEN)처럼 사실에 바탕한 글을 쓰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부겐벨리아꽃
정보와 확률, 그리고 확증편향
[이효석의 신호를 찾아서]
‘신호를 찾아서’라는 이름으로 쓰기 시작한 칼럼이 이제 4년이 넘었다. ‘신호를 찾아서’의 의미는 이 세상에는 유용한 정보인 ‘신호’와 그렇지 못한 ‘잡음’이 존재하며, 따라서 유용한 신호를 잡음으로부터 어떻게 하면 구별할 것인가 하는 의미에서 정해진 제목이다. 이후 내용의 범위를 확장해 일상에서의 합리적인 판단에 관한 이야기를 주로 하고 있다.
‘정보’(information)라는 용어는 학문적 용어이기도 하다. 70년 전 클로드 섀넌에 의해 만들어진 정보이론은 오늘날 통신 기술의 기반이 된 이론으로 통신을 전공하는 대학원생들이 배우는 과목이 됐다. 이 이론에서 말하는 ‘정보’는 우리가 일상에서 사용하는 의미와 매우 비슷하지만, 한 가지 차이가 있다면 정보의 양이 수치적으로, 정량적 표현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즉 다양한 정보 중 어떤 것이 더 많은 정보량을 가지고 있는지를, 곧 유용한 정보인지를 제시해 주는 것이다.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보기가 4개인 문제보다 보기가 5개인 문제가 더 어려운 문제이므로 어떤 두 정보가 있을 때 전자의 답을 알게 해주는 정보보다 후자의 답을 알려주는 정보가 더 유용하다는 것이다.
정보의 양이 숫자로 표현되며 그 크기를 말할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일 경우, 우리가 믿거나 예측하는 모든 진술은 확률적으로 참이며, 새로운 정보는 그 진술이 참일 확률을 변화시키는 관계를 가진다는 사실 또한 이해하게 된다.
쉬운 예를 들어 보자면, 월급날에 월급이 나올 것이라는 믿음이나 예측은 월급을 받기 전까지는 확률적으로만 참일 것이다. 월급날이 점점 다가오면서 회사에서 갑자기 해고되지 않거나 또는 회사가 문을 닫는다는 소식이 들려오지 않는다면 당신이 월급을 받을 것이라는 사실은 점점 더 참에 가까워진다. 확률을 1에 가깝게 만든다는 것이다. 한편 정보의 양이라는 개념은 우리가 왜 새로운 정보에 민감한지도 설명해 준다. 월급날이 되기 전에 직원들이 회사의 미래에 대해 불안한 표정으로 한쪽에서 수군거리고 있다면 당신은 그들이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 궁금해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 정보는 당신이 월급을 받을 수 있으리라는 예측의 확률을 낮출 가능성이 크며, 당신의 생존에 중요한 내용일 것이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새로운 정보는 대체로 많은 정보를 포함하고 있으며, 이 새로운 정보들은 인류의 생존에 중요했던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인간은 새로운 정보에 항상 욕심을 내도록 진화돼 왔다. 이를 호기심이라고 한다. 세상에 대한 정보가 부족한 아이들이 세상을 배워 나갈 수 있게 만드는 데 호기심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하지만 인간에게는 호기심과는 반대의 역할을 하는 본능적 편향도 존재한다. 바로 앞선 칼럼에서 이야기했던 확증편향이라는 것이다. 자신이 이미 가진 믿음과 배치되는 증거를 무시하고 이를 지지하는 증거만을 받아들이는 경향을 이야기한다. 확증편향은 인간이 가진 대표적인 오류다. 최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는 인간의 확증편향이 오류를 강화하고 있을 뿐 아니라 정치적 양극화를 강화시킨다는 주장까지 제기되고 있다.
확증편향은 분명히 진실을 찾는 데 방해가 되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확증편향은 왜 생겼으며, 어떻게 하면 이를 줄일 수 있을까? 다음번 칼럼에 이를 이야기해 볼까 한다.
[퍼온 글] / 출처; 서울신문 / 이효석(뉴스페퍼민트 대표) / 2020-10-27 01:16
솔체꽃
똥밭에서 굴러 봐야 사람이다
[조영학의 번역과 반역]
대학교 2학년 때 교직과목 신청을 했다. 늦은 나이에 대학에 들어가 졸업 후 생계 문제도 고민해야 했기에 교직 이수를 해서 교사가 되면 좋겠다 싶었다.
그런데 어느 날 사범대 교학과에서 부르더니 검정고시 출신이 교직을 신청하려면 먼저 이런저런 서류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요는, 중학교, 고등학교를 정상적으로 나오지 못한 내가 어떻게 교사가 돼 중학교, 고등학교 학생을 가르치겠느냐는 얘기였다. 번거롭기는 해도 서류를 준비하지 못할 바는 아니었으나 난 그 자리에서 교직을 포기하고 수강 취소를 했다. 타당한 지적이라고 생각했다. 교육이란 사람을 가르치고 이끄는 일이 아닌가. 나 같은 놈이 함부로 덤빌 일이 아니다.
그런데 “정상적인 교육”이란 과연 뭘까? 40년 가까이 세월이 지난 후 조금씩 회의가 드는 요즘이다. 정상이란 무엇인가? 부모가 이끄는 대로 한눈 한 번 팔지 않고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차곡차곡 학력을 쌓아야 정상적인 교육일까? 능력이나 인격도 좋은 성적, 좋은 대학에 정비례해 생기는 걸까? 나라가 학교가 부모가 정해준 길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비정상이 되는 사회, 그게 정상적인 교육이었던 걸까?
국정농단, 코로나 팬데믹을 겪으면서 기어이 엘리트들의 민낯을 보고 만다. 일류대학, 일류학과가 키워 냈다는 인재들, 검사, 의사, 박사 등, 공부 좀 했다는 사람들의 언행에는 판단 능력이나 합리성은커녕 최소한의 양심도 염치도 없는 듯 보인다. 악에 받친 혐오와 막말, 조금의 특권도 절대 내려놓지 않으려는 아집, 민중 따위는 개ㆍ돼지로 보겠다는 결연한 의지! 온갖 편법과 탈법, 거짓으로 혹세무민하고도 누구 하나 책임지기는커녕 뻔뻔스럽기만 하다. 입으로야 매일 국민을 거론한다지만 정말 우리들의 조소와 조롱이 들리기는 하는 걸까? 아니면 그마저도 개・돼지가 짖는다고 무시하는 걸까? 도대체 어떻게 자라고 어떤 교육을 받았기에 저렇듯 후안무치에 안하무인이란 말인가?
그러고 보면 대학원에 들어갔을 때 그 일면을 본 듯도 싶다. 어린 후배들이 민주화 시위하는 모습을 보며 대학원 선배들은 마치 모든 걸 다 안다는 듯, 다 이해한다는 듯 훈수를 하고 지적질을 했다. 결국 타인을 위해 한 번도 아파해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다. 그 혼돈의 시대에도 시위현장에 들어가 보지 않고, 오로지 부모가 이끄는 대로 자기만의 영달을 위해 살아온 사람들, 몸과 가슴이 아니라 머리로만 세상을 이해하고 경험해 본 사람들…. 어쩌면 우리네 교육이란 그런 사람들만을 위해 존재하는지도 모르겠다. 좋은 대학을 나오고 높은 자리에 올라 온갖 특권을 누리는 것이 배움의 목표가 되고 홍익인간(弘益人間) 따위의 교육이념은 고리타분한 도덕론으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교직 수업을 포기했을 때 아쉽기는 했어도 억울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억울은 오히려 요즘의 심정이다. 그런 교육을 하자고 내게서 기회조차 빼앗아버렸다는 말인가? 여전히 이런 교육이, 이런 대학이 정상이라고 확신하는지 되묻고 싶다. 학력(學歷)이 학력(學力)이 되지 못하고 지식이 지혜에 이르지 못하면 교육(敎育)은 교욕(校慾)에 불과하고 대학은 무지한 괴물들을 양산하고 만다. 나이 60이 넘어서야 비로소 깨달은 사실이다.
무엇보다 슬픈 것은, 오로지 자기 영달만을 위해 살아온 사람들답게, 마치 특혜의 고치라도 뒤집어쓴 듯, 자기들 외에 누구의 말에도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엘리트의 옥상에 서서 내려다보면 천하가 다 내 것인 양 우스워 보이겠지만 세상은 그렇게 만만하지 않다. 직접 해 보지 않으면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실패해 보지 않으면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는 게 세상일이다. 우리 동네 텃밭 아저씨도 아는 얘기를 저들만 모르고 있다. 똥밭에서 굴러도 이승이 낫다가 아니라 똥밭에서 굴러 봐야 비로소 사람이다.
[퍼온 글] / 출처; 서울신문 / 조영학(번역가) / 2020-10-27 01:16
솔나리 꽃
마스크가 ‘감정맹’을 만든다
[하지현의 사피엔스와 마음]
환자 얼굴에서 읽는 감정정보 / 마스크 착용에 반도 알기 어려워 /
마스크가 삶의 기본이 되는 사회 / 새로운 소통 방식을 개발해야
정신건강의학과 진료에서 환자의 표정은 중요한 정보원이다. 말하는 것을 들으며 얼굴의 미묘한 변화를 알아채야 한다. 더욱이 내가 조언이나 해석을 했을 때 씨도 안 먹힌 건지, 반감만 준 건지, 제대로 핵심에 다다른 것인지는 표정이 제일 먼저 알려준다. 마스크가 에티켓이 되면서 이런 소중한 정보원을 잃어버렸다. 몇 달만 참으면 될 줄 알았는데, 오래 함께 갈 마음의 준비를 하게 된다. 코와 입까지 얼추 70%를 가리고 있으면 지금 내 앞의 사람이 하는 말의 내용은 들어오나 여기에 실린 감정은 반도 알아차리기 어려워졌다. 이래저래 피로만 쌓인다.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사람이 한여름에도 꼭 마스크를 쓰고 검찰 포토라인에 서는 것은 표정을 노출하기 싫어서이다. 또 주름살을 피기 위해 보톡스 주사를 맞은 사람과 대화하면 묘한 엇박자가 생긴다. 다림질한 듯한 얼굴에서 표정이 싹 사라져서다. 듣는 것보다 보는 것이 참 많은 것을 전달했다는 걸 깨닫는 요즘이다. 입모양을 ‘바’로 하는 화면에서 실제 소리는 ‘다’라고 나오면 ‘바’로 더 많이 인식하는 걸 ‘맥거크 효과’라 한다. 뇌에서 시각을 청각보다 우선해서 받아들여 생기는 현상이다. 입을 보지 않고 소통하니 빠르고 정확한 이해에 어려움이 생긴다. 인간과 침팬지 사이의 결정적 차이가 생긴 것은 얼굴에 털이 없어서 훨씬 복잡한 표정으로 많은 정보가 오간 덕분이라는 학자들의 이야기가 확 와닿는다.
더 자세히 쪼개서 보자. 감정에 따라 얼굴 부위가 담당하는 영역이 다르다. 아이트래킹 기법을 이용해서 표정을 읽을 때 어느 부위를 주목하는지 분석한 연구가 있다. 눈은 주로 분노ㆍ공포ㆍ슬픔을, 입은 즐거움과 혐오를 인식하는 데 중요했다. 마스크를 쓰고 다니면 잘 알아차릴 수 있는 건 화가 났거나 무서워하는 것 같은 강한 감정뿐이다. 그 사이에 있는 행복 같은 좋은 기분이나 미묘한 불편한 감정은 파악하기 어려워졌다. 그러니 중간에서 상대가 만족하는지, 혹은 부담스러워하며 “쟤 왜 저래” 하는 표정을 지을 때 재빠르게 알아차리고 부드럽게 전환할 기회를 놓치기 쉽다. 말은 길어지고 언성은 높아지나 감정은 이미 상한 다음이다.
얼굴의 어디를 유심히 보는지 개인차가 있다. 성격적으로 예민한 사람일수록 눈을 많이 본다고 한다. 공포와 분노를 빨리 인식해서 피하거나 맞서 싸우는 반응을 판단하려는 것이다. 동서양 문화의 차이도 있다. 표정을 읽을 때 동양인은 상대의 눈 부위에 주로 시선이 가 있고 서양인은 입을 포함한 전체를 보고 파악했다. 문화적 차이로 동양인은 눈만으로 사람을 파악하는 데 익숙해서 감염을 막기 위해 마스크를 쓰는 데 쉽게 따랐다. 서양인들은 그러면 표정을 읽기 어려워져 심정적으로 강한 거부감을 가졌던 것이 아닌가 한다. 비록 그걸 자유의지, 선택의 자유로 멋지게 포장했지만 말이다.
최근 독일 밤베르그대학의 클라우스 크리스티안 카본 교수가 여기에 착안해서 마스크가 표정 읽기 능력에 정말 혼란을 주는지 확인해 보았다. 같은 사람의 6가지 표정을 마스크를 쓴 것과 아닌 것을 비교해 읽게 한 것이다. 중립과 공포는 차이가 없었지만 혐오, 분노, 슬픔, 행복은 마스크를 썼을 때 확연히 오답이 많았다. 마스크를 쓰고 다니는 한 우리는 서로 뭔가 무서운 일이 일어나야 겨우 신호를 정확히 알아챌 수 있는 것이다. 풍부한 감정의 반도 제대로 읽지 못하게 된 감정맹이 된 형국이다.
마스크가 일상화되며 말을 하는 것뿐 아니라 표정을 통해 감정을 읽는 것에서 큰 장벽이 생겼다. 하지만 마스크는 삶의 기본이 될 것 같다. 평소 눈치가 빨라 맥락을 잘 읽는 사람이라면 문제없이 잘 적응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아도 갑갑하던 사람들은 더욱 소통에 어려움을 겪을 양극화가 일어날 것이 분명해 보인다.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살아야 할까?
우리도 이탈리아 사람같이 대화할 때 손짓과 몸짓 제스처를 크게 하는 습관이 생길 거란 상상을 해 보았다. 표정이 주는 정보를 포기한 대신 다른 신호를 늘려서 소통의 밸런스를 맞추려는 노력을 하는 것이다. 모름지기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건 적응을 잘하는 존재라는 것만은 변하지 않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답답한 현실이나 어떻게든 통해야 하지 않겠는가.
[퍼온 글] / 출처; 서울신문 / 하지현(건국대 의학전문대학원 교수) / 2020-10-27 01:16
성인지 감수성
[아투 유머펀치]
오래전의 일이다. 인물이 반반한 시골마을 아낙네가 간통(姦通)을 했다는 죄목으로 경찰서에 붙잡혀왔다. 힘깨나 써보이는 건넛마을 노총각과 그만 눈이 맞아 몇 차례 정을 통하다가 남편의 눈에 띄고 만 것이었다. 그런데 경찰서에 불려나온 여인의 표정이 시종일관 불만스러운게 예사롭지 않았다. 경찰관이 간통에 대한 형법상 처벌 조항을 코앞에 펼쳐보여도 시큰둥한 반응이었다.
“남편이 있는 부인네가 왜 간통을 했느냐”는 경찰관의 고압적인 질문도 법 조문 따위도 대수롭지 않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여인이 되레 항변의 목소리를 높였다. “내 몸에 있는 것도 내 맘대로 못하는 법이 어디 있어요” “그게 언제부터 정부관리로 바뀌었나요” 경찰관의 말문을 막히게 한 이 여인의 자기 변론이야말로 오늘의 유행어인 성인지 감수성의 발단이 아니었을까 하는 재미있는 생각을 해본다.
문 정권 출범과 더불어 이른바 ‘미투(MeToo)’가 빈발했다. 더불어민주당 소속 광역 단체장들이 성폭력과 성추행 사건에 잇따라 연루되면서 ‘더듬어만지당’이란 비아냥까지 나왔다. 전도유망했던 안희정 전 충남지사에 이어 오거돈 전 부산시장, 그리고 박원순 전 서울시장까지 낙마하거나 유명을 달리한 연이은 성추문 악재가 보궐선거는 물론 대권가도에도 적잖은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성인지 감수성이란 익숙하지 않은 용어가 자주 등장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더불어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사회 전반에 대한 성인지감수성 교육을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아졌다. 그러다 보니 이런 유머까지 생겨났다. 병원마다 ‘성적욕구를 더 낮춰달라’고 요구하는 노익장들이 많아졌다는 것이다. 머리에만 잔뜩 올라가 있는 성적 욕구를 아래로 내려달라는 얘기다. 역설인지 횡설인지...
성인지 감수성은 북유럽 정치판까지 강타했다. 덴마크 수도 코펜하겐 시정을 10년간 이끈 프랑크 옌센 시장이 최근 성추행 사실을 공개 사과하며 사퇴를 선언했다. 그가 하필이면 서울시의 우호도시 시장으로 명예시민증을 받았다는 것도 께끄름하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성적인 도덕성은 상식과 교양과 품격의 문제다. 그 무슨 난해한 용어와 뜬금없는 교육까지 필요한가.
[퍼온 글] / 출처; 아시아투데이 / 조향래 / 2020. 10. 26. 05:00
인류를 구한 곰팡이, 페니실린의 발견
인류 최초의 항생제는 영국의 알렉산더 플레밍이 찾아낸 ‘페니실린(Penicillin)’이라 할 수 있다. 플레밍은 1881년 스코틀랜드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세인트 메리 의과대학에 들어가 미생물학자가 됐다. 그는 페트리접시라는 특수한 배양접시에 미생물을 키우면서 미생물의 성장을 억제하는 물질을 찾아내는 일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연구를 통해 눈물에서 추출한 라이소자임(Lysozyme)이라는 효소가 몇몇 박테리아의 성장을 억제한다는 사실을 밝힌 바 있다.
우연이 가져다 준 발견
종종 위대한 발견에는 행운이 따르는 법이다. 플레밍이 일하던 실험실의 아래층에서는 곰팡이를 연구하던 라투슈가 실험을 하고 있었다. 1928년 여름 플레밍은 포도상구균을 기르던 접시를 배양기 밖에 둔 채로 휴가를 다녀왔다. 휴가에서 돌아온 플레밍은 페트리접시를 확인하던 중 푸른색 곰팡이가 페트리 접시 위에 자라있고 곰팡이 주변의 포도상구균이 깨끗하게 녹아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그냥 재수 없는 일이라고 넘길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곰팡이가 포도상구균의 성장을 막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나중에 알려진 사실이지만, 푸른곰팡이의 대부분은 페니실린을 만들지 못하고 오직 페니실리움 노타툼(Penicillium notatum)만이 페니실린을 만든다. 그리고 이 특별한 곰팡이는 아래층의 라투슈의 연구실에서 올라와 플레밍의 페트리 접시에서 자리를 잡고 자란 것이었다.
플레밍은 문제의 곰팡이를 배양했다. 그리고 배양된 곰팡이를 새로운 액체 배지에 옮기고, 다시 1주일이 지난 뒤 배양액을 1000분의 1까지 희석했는데도 포도상구균의 발육이 억제됐다. 이로써 곰팡이가 생산해 내는 어떤 물질이 강력한 항균작용을 나타낸다는 점이 확실해졌다. 그 곰팡이는 페니실리움(Penicillium)속에 속했으므로 그 이름을 따서 곰팡이가 만든 물질을 페니실린(penicillin)이라고 불렀다.
페니실린은 포도상구균 외에도 여러 종류의 세균에 대해 항균작용을 나타냈다. 특히 연쇄상구균, 뇌수막염균, 임질균, 디프테리아균 등 인간과 가축에 무서운 전염병을 일으키는 병원균들에 효과가 컸다. 이와 더불어 페니실린은 다른 약물들에 대체로 취약한 인간의 백혈구에 전혀 해를 끼치지 않는다는 점과 페니실린을 생쥐에 주사해도 거의 해가 없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플레밍은 이듬해인 1929년 연구결과를 ‘영국 실험병리학회지’에 발표했다.
페니실린의 약제화
그러나 페니실린 상용화에는 중요한 장애물이 있었다. 곰팡이를 직접 인간에게 투입할 수는 없기 때문에 페니실린을 약품으로 정제해야 하는데 플레밍에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사진. 페니실린의 원료인 곰팡이, 페니실리움 노타툼. (출처: wikipedia)
다행히 플레밍의 위대한 발견은 오스트리아 출신 플로리와 유대계 독일인 체인 덕분에 사장되지 않고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1935년 옥스퍼드 대학의 병리학교수로 발령받은 플로리는 곧 체인을 화학병리학 실험 강사로 채용했다. 플로리는 전부터 눈물과 침 등 점액에 들어있는 라이조자임에 관한 플레밍의 논문에 관심이 있었다. 플로리는 1937년 체인과 공동으로 라이조자임을 정제하는데 성공했다. 그들은 라이조자임을 연구하는 동안 항균물질에 대한 논문을 많이 읽었는데 특히 플레밍의 페니실린 논문을 읽고 흥미를 느꼈다.
1939년 플로리와 체인은 페니실린 연구에 착수했고 반년 동안의 노력 끝에 페니실린을 정제해 결정을 얻는데 성공했다. 그들은 정제된 페니실린으로 동물실험을 거듭해 1940년 의학 저널 ‘란셋’에 페니실린이 강력한 전염병 치료 효과를 갖고 있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이제 남은 것은 인간 대상의 임상시험이었다. 이듬해인 1941년 인간에게 최초로 페니실린이 투여됐다. 패혈증으로 회복 가능성이 전혀 없는 앨버트 알렉산더에게 페니실린 200mg이 투여된 것이다. 페니실린은 3시간 단위로 투여됐는데 그 효과는 놀라웠다. 24시간도 안 돼 알렉산더의 상태가 눈에 띄게 좋아진 것이다. 체온이 정상으로 떨어지고, 곪아가던 상처가 낫기 시작했으며 입맛도 돌아왔다. 사람들은 기적이 일어낫다고 생각했다. 엿새 만에 임상약이 떨어지는 바람에 알렉산더는 사망했지만, 이 임상시험 페니실린의 효능을 세상에 확실하게 알린 사건이었다.
페니실린은 제2차 세계대전 중 상용화에 성공해 1943년부터 사용되기 시작했다. 1944년부터는 민간에도 사용돼 수많은 전염병 환자의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플로리와 체인은 페니실린의 개발자인 플레밍과 함께 1945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했다. 이렇듯 페니실린의 발견은 인간이 미생물과의 싸움에서 엄청난 무기를 획득하게 된,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사건이다.
[퍼온 글] / 출처; KISTI의 과학향기 제3587호 / 글 : 서홍관(과학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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