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건에 나선 독일 해군
독일은 전통(傳統)의 육군 강국(陸軍强國)이지만 한때 엄청난 해군(海軍)을 보유(保有)하기도 했습니다.
야심가(野心家) 빌헬름 2세(Wilhelm II, 1859.1.27.~1941.6.4.) 뒤늦게 통일(統一)을 달성(達成)한 독일이 제국주의 경쟁(帝國主義競爭)에서 뒤처지지 않으려면 강력한 해군이 필요하다고 판단했습니다.
이에 따라 틸피츠(Großadmiral Alfred Peter Friedrich von Tirpitz, 1849년 3월 19일~1930년 3월 6일) 제독(提督)의 지휘(指揮)로 19세기 말부터 대대적(大大的)인 해군력 확장(擴張)에 나섰는데, 이는 영국을 자극(刺戟)했고 결국 양국(兩國)은 무한정 국력(無限定國力)을 쏟아붓는 치열(熾烈)한 건함(建艦) 경쟁을 벌였습니다.
↑20세기 초 전성기 당시에 일렬로 항해 중인 독일 해군의 거함들
그 결과 제1차대전 발발 직전(勃發直前)에 이르러 독일은 세계 2위로 평가(評價)되는 강력(强力)한 해군력 구축(海軍力構築)에 성공(成公)했습니다.
그러나 1위와 2위는 숫자상으로는 단지 하나의 차이(差異)였지만 300여 년 동안 바다를 지배(支配)해 온 영국 해군에 견주기에는 부족(不足)한 것이 많았습니다.
결국 전통(傳統)의 영국 해군을 넘을 수 없었던 독일은 1916년 유틀란트 해전(Battle of utland/Skagerrakschlacht)을 끝으로 전쟁 중에 더이상 별다른 역할(役割)을 하지 못했습니다.
↑엄청난 배기 연기를 내뿜으며 전속 항진 중인 대양함대의 모습. 그때는 몰랐지만 유틀란트 해전은 거함거포 시대의 최대 해전이면서 종말이 시작된 시점이기도 했다. 유틀란트 해전을 끝으로 독일 해군은 대해로 나가지 못했습니다
독일이 전쟁에서 패(敗)하자 이렇게나마 보존(保存)된 전력(戰力)마저도 연합군(聯合軍)의 전리품 대상(戰利品對象)이 되어버리거나 나포(拿捕)의 굴욕(屈辱)을 피하고자 자침(自沈)시켜 버리면서 하루아침에 사라져 버렸습니다.
이렇게 연안(沿岸)이나 겨우 경비(警備)할 수 있는 수준(水尊)으로 추락(墜落)한데다가 철저하게 독일의 무장(武裝)을 제한(制限)시켜 버린 베르사유 조약으로 말미암아 독일 해군이 전성기(全盛期) 수준으로 되돌아가 간다는 것은 요원(遼原)해 보였습니다.
↑전후 노획을 피하기 위해 자침한 독일의 전함
그러나 정권(政權)을 획득(獲得)한 히틀러가 1935년 독일의 재무장(再武裝)을 전격 선언(電擊宣言)했습니다.
총 10만으로 제한받던 독일군은 기하급수적(幾何級數的)으로 늘어났고 이를 무장시킬 무기도 양산(量産)에 들어갔습니다.
독일 해군 또한 재건(再建)에 나섰지만 육군, 공군에 비해 더뎠습니다.
개발(開發)과 생산(生産)에 시간이 필요한 것은 모든 무기가 마찬가지이나 군함(軍艦)은 유독 많은 비용(費用)과 시간(時間)이 필요(必要)합니다.
따라서 해군력은 쉽게 증가(增加)시키기 어렵습니다.
↑히틀러도 해군력을 급격히 증강시키기는 어려웠습니다
히틀러는 당장 전쟁을 원했지만 독일 해군은 부족한 것이 너무 많았습니다.
이후 제2차 대전이 발발(勃發)한 1939년에 작성(作成)된 Z계획에 따르면 독일 해군은 1945년에 이르러서야 영국에 겨우 맞설 수 있는 최소한(最小限)의 전력(戰力)을 갖출 수 있을 것으로 예상(豫想)되었을 정도였습니다.
이처럼 상황(狀況)은 암담(暗澹)했지만 그렇다고 포기(抛棄)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현존(現存)하는 모든 적함(敵艦)을 제압(制壓)할 수 있는 강력한 전함(戰艦)의 보유를 고려(考慮)했습니다.
↑독일 해군은 부족한 상태로 전쟁에 뛰어들어야 할 운명이었습니다
당장 영국과 해전(海戰)을 벌일 수 있을 만큼 충분한 군함(軍艦)을 확보(確保)하기가 현실적(現實的)으로 어려우므로 질(質)로써 양적 격차(量的隔差)를 메우려는 차선택(次選擇)을 택(澤)한 것이었습니다.
영국 해군의 전술상(戰術上) 절대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일 일대일 대결(一對一對決)에 나섰을 때 충분히 이길 수 있는 전함을 보유(保維)한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은 엄연(奄然)히 차이가 있었습니다.
독일은 바이에른급(Bayern Class) 전함(戰艦)을 기초(基礎)로 하여 1934년 설계(設計)에 착수(着手)했습니다.
↑비스마르크의 개발 기반이 되었던 전함 바이예른
독일은 영국과 합의(合意)한대로 보유 군함의 배수량 제한선(排水量制限線)인 39,000톤 급의 전함을 건조(建造)하겠다고 공표(公表)했습니다.
하지만 처음부터 이를 따를 생각이 추호(追呼)도 없었고 당시에 영국이 보유한 순양전함(巡洋戰艦) 후드(HMS Hood 51)보다 더 큰 전함을 만들 계획(計劃)이었습니다.
거대한 주포(主砲)가 상징(象徵)인 전함은 크기가 클수록 공격력(攻擊力)도 강할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처음부터 최강(最强)의 전함을 고려(考慮)하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취역 직후에 촬영된 강인한 인상의 비스마르크
1936년 함부르크의 블롬-포스(Blohm und Voss) 조선소(造船所)에서 건조가 시작되었고 1939년 2월 14일 히틀러의 참석(參席) 하에 철혈재상(鐵血宰相) 비스마르크(Bismarck)의 이름으로 진수식(進水式)이 성대하게 벌어졌습니다.
여전히 배수량이 39,000톤이라고 했지만 실제로는 50,995톤이었습니다.
비스마르크는 이듬해 야마토(大和)에 밀려 1년 만에 세계 타이틀은 내주었지만 유럽에서 활약한 역사상 최대 규모(歷史上最大規模)의 전함이었습니다. ( 계속 ) [ august 의 軍史世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