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전쟁사 다이제스트 100 고구려 · 수나라 전쟁: 살수대첩청야입보 전술로 적을 쇠진시키다(612년)
영원한 인간사랑 ・ 2024. 2. 20. 2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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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전쟁사 다이제스트 100
고구려 · 수나라 전쟁: 살수대첩
청야입보 전술로 적을 쇠진시키다(612년)
요약 581년, 중국 천하를 통일한 수나라는 동방의 강대국 고구려를 넘보았다. 수 문제의 원정 실패 후 수 양제가 113만 명을 모아 고구려 침공을 재개했으나 고구려는 청야입보 전술을 사용하여 방어했다. 고구려의 요동성은 쉽게 함락되지 않았고, 을지문덕의 지략으로 수나라 군대가 일시에 무너졌다.
고조선과 고구려, 한민족의 강국으로서 만주를 장악하다
살수대첩에서의 을지문덕 장군
우리나라 역사에서 고조선은 대동강 유역에서부터 흥기하여 한반도뿐만 아니라 북으로 오늘날 중국 땅 상당히 깊숙한 곳까지 세력을 뻗쳐나감으로써 자연히 중국과 국경을 이룬 요하(遼河) 주위 지역에서 전투가 자주 발생했다. 고조선 이후 삼국시대 고구려는 한민족의 대를 이어 강국으로 등장하고, 북방지역의 유목민인 선비족을 몰아내면서 국경지역을 안정시켰다. 나아가 서기 5,6세기에 광개토왕 · 장수왕 · 문자왕 등 걸출한 군주들은 당시 중국이 분열되어 있는 틈을 이용해 줄기차게 영토 확장 정책을 추진한 끝에 요동반도를 포함한 만주 대륙 전역을 확실히 장악, 최대판도를 확보하기에 이르렀다.
중국을 통일한 수나라, 고구려 땅을 넘보다
그러나 581년 중국 천하를 통일한 수나라는 한나라 이래 최대 제국을 건설하고 동방의 강대국 고구려 땅을 넘보게 되었다.
고구려는 급속히 팽창하는 수나라의 위세에 일대 위협을 느끼고 방비를 강화했으나, 영양왕 때 수 문제는 침공 구실을 찾느라고 고구려에 "군신(君臣)의 예(禮)로 조공을 바치라"고 정식 통보했다. 고구려는 오만한 수나라의 요구에 대해 칼로 응답하기로 결의하고 전쟁을 불사했다.
수 문제, 요하 지역을 침공했으나 재해로 인해 실패하다
598년 수 문제는 약 30만 명의 원정군을 편성하여 요하지역을 쳐들어왔으나, 이 침공은 홍수 · 폭풍 · 전염병 등의 재해로 말미암아 대다수의 병력을 잃고 곧 좌절되었다.
수 문제
중국을 통일한 후 고구려를 침략한 수 문제.
수 양제, 막대한 병력과 군비로 고구려 침공을 재개하다
아버지 문제와 형을 살해하고 스스로 황제에 즉위한 수 양제는 대운하와 대장성을 쌓고 대제국 황제로서의 위엄을 떨치더니, 드디어 612년에는 아버지 때 이루지 못한 정복의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 고구려 침공을 재개했다. 아버지가 30만으로 실패했기 때문에 그는 전국 각지에서 무려 113만 명을 끌어 모아 대원정군을 편성했다. 과연 그러한 대병력이 동원되었을까에 대하여는 실증주의 사가들이 의문을 제기하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제가 엄청난 병력과 막대한 군비를 들여 고구려를 침공한 것만은 사실일 것이다.
고구려, 청야입보 전술로 수나라에 대항하다
고구려의 전쟁준비 또한 거국적이었다. 고구려는 기본적으로 군사조직과 행정조직을 일치시켜 성인남자들이 평시에는 농사를 짓다가 전시에 동원되는 민병제에 의존했다. 성주가 행정과 군대를 통괄하는 고구려에는 약 200여 개의 성이 있었고, 그 절반은 만주와 연해주에 있었다.
성주는 견고하게 축성한 성을 관리하다가 일단 유사시에는 주민과 군인들이 식량과 생활필수품을 모두 가지고 성내에 들어가 수성(守城)하고, 적을 지치게 한 다음 반격 · 격퇴하는 작전을 사용했다. 이를 이른바 청야입보(淸野入保, 들을 깨끗이 비우고 성에 들어가 싸운다는 뜻) 전술이라고 부르는데, 이 전술은 제정로마가 도시성곽 중심의 종심방어를 취하고 적을 끌어들인 다음 전투를 벌였던 것과 거의 같은 개념이었다. 다만 고구려 시대 성은 주로 산성으로 군사거점이 목적이었던 데 비해 로마는 도시방어 목적의 견고한 성을 건설했다는 데서 차이가 컸다.
청야입보에 의한 거점방어로 수나라의 수륙 양방향 공격 계획을 저지하다
수나라의 침공계획은 요하를 건너 요동반도를 통해 진격하는 육군과 산동반도에서 황해를 건너는 수군(水軍)이 양방향에서 공격하여 결국 평양성을 함락하고 전쟁을 빨리 끝낸다는 것이었다. 주력부대인 육군이 광활한 요동반도를 경유, 압록강을 넘어 한반도로 진출해야 하는데, 과연 그들이 바라는 대로 신속히 전쟁을 끝낼 수 있을지 여부는 고구려의 방어태세에 달려 있었다. 만일 고구려가 국경방어에만 집중한다면 수나라 계획이 성공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고구려는 청야입보에 의한 거점방어 형태를 유지하는 한편, 적을 한반도 내로 충분히 끌어들이기 전까지는 조기 결전을 피하다가 적이 완전히 지쳤을 때 대반격을 실시하는 전략으로 맞섰다.
수나라의 육군과 수군 모두 고구려를 이기지 못하다
수 양제는 부교까지 설치하여 요하를 건넌 후, 그 지역의 요충인 요동성을 공략, 쉽게 점령할 것으로 생각하고 통치대책까지 준비했다. 그러나 고구려군의 결사적인 저항에 성을 함락시키지 못하고 두 달 동안이나 시간만 끌었다. 또한 황해를 건너 대동강에 나타난 수나라 수군도 본래 육군과 합류하여 공격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육군 진출이 늦어지는 바람에 단독 공격을 하다가 참패당했다.
30만 명의 수나라 별동대, 무리한 진격으로 사기가 떨어지고 굶주리게 되다
수 양제는 요동성이 함락되지 않자, 약 30만 명의 별동대를 따로 편성하여 우중문과 우문술 두 장수에게 신속히 한반도로 진격하도록 했다. 이들은 요하에서 압록강에 이르기까지 고구려군 거점을 피하며 전투 없이 진격했으나, 지칠 대로 지치고 사기가 극도로 떨어져 있었다. 처음에는 귀찮아서 휴대식량을 내버리는 병사도 나타났으나 결국은 현지조달이 어려워 굶주려야 하는 문제가 발생했다.
을지문덕, 계략적으로 적정을 탐지하고 적군을 유인하다
적이 압록강을 건너오기 직전에 고구려의 명장 을지문덕은 항복을 가장하고 적진을 방문했다. 적정을 탐지하기 위해서였다. 을지문덕을 보내고 난 후에야 우중문과 우문술은 고구려의 항복을 의심하게 되었고, 게다가 두 사람은 사사건건 의견을 달리하며 지휘통일을 이루지 못했다.
을지문덕
대한제국 교과서 《초등 대한역사》에 실린 삽화.
을지문덕은 추격해오는 우문술의 군대를 더욱 지치게 하기 위해 접전할 때마다 의도적으로 패주, 살수(청천강) 이남으로 깊숙이 유인했다.
을지문덕, 거짓 항복으로 수나라의 퇴각을 권하다
용맹할 뿐만 아니라 지략이 뛰어나고 문장에 재능이 있었던 을지문덕은 우중문에게 다음과 같은 시 한 수를 지어 보냈다.
그대의 신기한 책략은 천문을 꿰뚫고
기묘한 계산은 지리를 통달했소.
싸움에 이긴 공이 이미 높으니
만족함을 알고 이제 그만두기 바라오.
그리고 을지문덕은 적진에 다시 사자를 보내 거짓으로 항복 의사와 함께 "만약 철수하면 국왕을 모시고 황제를 알현하겠다"고 제의했다.
우문술은 을지문덕의 제의를 진실로 받아들이지는 않았지만 이제 평양성 공략은 무모하다는 것을 깨닫고 총 퇴각을 결심했다.
살수대첩으로 수나라의 후위부대에 엄청난 피해를 입히다
우문술 부대가 철수하기 시작하자 드디어 을지문덕 군은 습격을 시작했다. 특히 적 병력이 살수에서 약 절반쯤 도하했을 때 고구려군은 후위부대를 엄습하여 엄청난 피해를 입혔다. 수나라 군대는 일시에 무너지고 일부 도주병들은 일주일 동안에 압록강까지 약 180km를 내달렸다. 30만 명의 별동대 가운데 요동성으로 살아온 자는 2,700명에 불과했다.
고구려, 거점방어식 청야입보 전법으로 동북아 강대국의 자리를 지키다
고구려는 원정군의 약점을 최대로 활용할 수 있는 거점방어식 청야입보와 같은 훌륭한 전법을 일찍이 개발하여 수적으로 우세한 수나라 군대를 물리치고 동북아 강대국의 자리를 확고히 지켰다.
[네이버 지식백과] 고구려 · 수나라 전쟁: 살수대첩 - 청야입보 전술로 적을 쇠진시키다(612년) (세계전쟁사 다이제스트 100, 2010. 7. 16., 정토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