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5일 (금) 촬영.
정자각 우측에 준비해 놓은 관세기(盥洗器)입니다.
관세기는 손을 씻는 제기로 안쪽에 물고기를 양각하여 물이 흔들리면 마치 고기가 뛰어노는 모양을 합니다.
관세기는 위는 넓고 아래는 발을 달았으며, 제관들이 제례를 행하기 위하여 각자의 위치로 가기 전에 손을 씻는 제기로,
손을 씻는 것은 제사에서 몸과 마음을 경건하고, 청결히 한다는 깊은 뜻이 담겨 있습니다. - 조선왕릉 제향 봉행 책자에서
소전대가 있는 정자각 좌측에는 망료쟁반(望燎錚盤)과 장화저(長火著)를 준비해 놓았네요.
망료쟁반(望燎錚盤)은 망료 절차에서 사용하는 쟁반이다.
망료는 제사의 마무리 절차로서, 제사에서 사용한 축문(祝文), 축판(祝板)과 폐백(幣帛) 등을 태워 없애는 절차이다.
축문, 축판과 폐백을 미리 마련된 요소(燎所 - 태우는 자리)에서 땔나무로 태우고,
이를 여러 재관(齋官)이 모두 옆에서 엄숙하게 지켜보기 때문에 '망료(태우는 것을 지켜봄)라고 한다.
망료쟁반은 축문, 축판과 폐백을 담아 태우는 자리(요소)까지 운반하는 데 사용되었다. 망료쟁반 대신 광주리를 사용하기도 한다.
축문의 낭독을 담당하는 대축(大祝)이라는 담당관이 망료쟁반을 운반한다. 망료쟁반은 크고 둥글고 오목한 그릇 아래에 짧은 원통형
굽이 달려 있는 형태이다. 쟁반이라고는 하지만, 평평하고 납작한 쟁반보다는 굽다리 그릇에 보다 더 가까운 모양이다.
망료쟁반은 놋쇠, 혹은 주철(鑄鐵)을 섞은 놋쇠로 만들었다.
장화저(長火著)는 화로(火爐)나 솥 등에 꽂아 두고 사용하는 쇠로 만든 긴 부젓가락이다.
부젓가락은 화로 혹은 물품들을 담아 태우는 솥 등에 넣고 불과 재, 물품들을 뒤적여, 불기운을 살리고 물품들이 골고루 빨리 탈 수
있도록 돕는 기능을 한다. 혼전(魂殿)이나 산릉(山陵) 등에서는 화로나 가마솥 등에 장화저를 함께 구비해 두고 사용하였다.
- 조선왕릉 제향 봉행 책자에서
수라간에 준비해 둔 수라기와 탕기입니다.
집례자가 제향 봉행을 선포하고 절차에 따라 진행합니다.
재실의 안향청에서부터 모셔온 향이 도착했습니다.
홍살문 안에서 향과 축을 아헌관이 대축에게 전하는 의식입니다.
제향을 봉행하기 전 제관들이 봉무할 자리로 나아가는 절차.
주청행례와 국궁사배.
아헌관 이하 자리한 사람 모두 네 번 절합니다.
제찬을 올리는 의식으로 전사관이 면을 올리고 능사가 탕을 올리는 절차.
능침이 깔끔해졌습니다.
망료 - 제향의 마지막 절차로 제향에서 읽은 축문을 소전대에서 불사르는 의식.
제향을 마친 후 참석한 모든 사람에게 나누어 준 제수 음식. 떡, 유과 등.
동구릉에는 네 개의 보물이 있습니다.
건원릉(태조)의 정자각, 건원릉의 신도비, 목릉(선조)의 정자각, 숭릉(현조)의 정자각인데요.
이 네 개의 보물은 동구릉뿐 아니라 조선왕릉 전체에서도 더 이상 없는 보물들입니다.
건원릉, 健元凌 정자각 / 보물.
건원릉은 조선을 개국한 태조(1335~1408, 1392~1398 재위)의 능이다.
태조는 1392년에 개경 수창궁에서 왕위에 올랐다. 재위 기간 동안 나라의 이름을 조선으로 정하고, 수도를 한양으로
옮기는 등 조선 왕조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1408년(태종 8)에 세상을 떠나 이곳에 능이 조성되었고, 1899년(광무 3년) 태조고 황제로 추존되었다.
건원릉은 독특하게 억새로 덮여 있다. 이는 태조가 자신의 고향인 함흥의 억새를 심어달라는 유언에 따른 것이라고 전한다.
태조 건원릉 신도비 / 보물
목릉 정자각 / 보물.
목릉 정자각은 원래 건원릉 서쪽에 있던(현 헌종 경릉) 선조의 목릉이 현재의 자리로 옮겨지면서 함께 옮겨진 것이다.
이때 새로 옮겨온 정자각에서 의인왕후 능침까지 신로를 연결하였다.
이후 인목왕후의 능을 조성할 때에도 능침에서 정자각까지 신로만 연결하여 3기의 능이 하나의 정자각을 사용하였다.
목릉 정자각은 조선왕릉 정자각 중 유일하게 다포식 공포로 지어져 있다. - 리플릿에서 -
숭릉, 崇陵 (현종과 명성왕후) / 보물.
숭릉은 조선 18대 현종(1641~1674, 1659~1674 재위)과 명성왕후 김 씨(1642~1684)의 능이다.
현종은 효종의 아들로 조선 역대 국왕 중 유일하게 외국(청나라 심양)에서 태어났다.
왕위에 오른 후 함경도 산악지대를 개척하고, 호남 지방에 대동법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두 차례의 예송논쟁으로 붕당 싸움이 치열한 상황을 겪기도 하였다.
명성왕후는 1659년에 왕비가 되었다. 현종과의 사이에 1남(숙종) 3녀(명선, 명혜, 명안 공주)를 두었다.
숭릉의 정자각은 조선왕릉 정자각 중 유일하게 남은 팔작지붕의 건물로 보물로 지정되었다. - 현지 설명문 -
숭릉 정자각은 1674년(수공 즉위)에 지었으며 유일하게 남아 있는 팔작지붕의 정자각이다.
<산릉도감의궤> 등의 기록에 의하면 영릉(세종), 강릉(명종), 장릉(인조) 등의 정자각이 팔작지붕으로 지어졌으나
후대에 모두 맞배지붕으로 바꾸어 현재는 숭릉만이 팔작지붕 형태로 남아 있다. - 동구릉 리플릿에서 -
나오는 길, 재실에 핀 개나리.
산 목련.
미선나무.
작성자 : 칠복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