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 무임승차 하지 말자
자하동천 마애명문 (경기도 과천시 중앙동 산 8-9)
과천향교 주변은 경치가 수려하여 자하동천(紫霞洞天)이라불리던 곳이었으며, 계곡 건너편의 바위절벽엔 빼어난 글씨의 암각문들이 있다
(자하동천 마애명문은 경기삼남길에 포함되지 않는다)
바위에는 4종의 암각글씨가 새겨져 있다
(단하시경 외에는 글자를 확인하지 못하여 Daum 에서 사진을 갈무리 하였음)
- 단하시경 丹霞詩境
"시흥을 불러일으키는 자하동의 빼어난 경치"를 말한다
추사 김정희나 자하 신위의 글씨로 추정되며, 총 4기 바위글씨 중 유일하게 과천시 향토유적 제6호로 지정되어 있다
- 자하동문 紫霞洞門
과천에서 관악산을 오르는 계곡을 남자하동이라 하였는데 과천에서 가장 넓은 계곡으로 들어가는 입구란 뜻으로 자하 신위의 글씨이다
- 백운산인 자하동천 白雲山人 紫霞洞天
자하 신위의 글씨로, 우리 선조들은 경치가 수려한 곳을 찾아다니며 바위에 ○○동천이라고 새겨놓기를 좋아했다
동천(洞天)이란 산천으로 둘러싸인 경치 좋은 곳으로, 가히 신선들이 살만한 곳을 말한다
- 제가야산독서당 題伽倻山讀書堂
최치원의 시로 합천 가야산의 풍경을 바라보며 세속의 일을 잊고 은거하고자 했던 마음을 표현한 것이며, 암각자는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송시열의 글씨로 19세기 전반 합천 해인사 근처에 각인되었 고 과천지역의 유림에 의해 합천의 원본 탁본을 구하여 가야산 풍경 못지않은 관악산 초입에 새겨 놓았다
♤ 신위(申緯) (1769, 영조 45 ~ 1845, 헌종 11)
본관은 평산(平山)이며 자는 한수(漢叟), 호는 자하 (紫霞)·경수당(警修堂) 이다
1799년 30세로 알성문과에 급제하여 초계문신(抄啓文臣)이 되었다
정조, 순조, 헌종에 이르는 3대에 걸쳐 시(詩), 서 (書), 화(畵)로 유명한 삼절(三絶)로서 벼슬은 도승지를 거쳐 이조참판에 이르렀으나 노년에는 관직을 모두 버리고 고향인 북자하동(현 서울대학교 정문쪽에 있던 마을)으로 내려와 여생 을 보냈다
조선후기 삼절로 꼽히는 강세황(1713~1791)과 김정희(1786~1856)도 시만큼은 신위에 크게 미치지 못했다
구세군사관대학원대학교 (경기도 과천시 관악산 길 216, 중앙동 83-2)
오로지 구세군의 성직자만을 양성하고 재교육하는 고등교육기관(대학원대학)이며 교육부 인가를 받은 정식 대학원으로, 석사학위(M.Div, Th.M)를 수여하므로 당연히 입학 자격은 학사(4년제대학 졸) 이상으로 제한된다
구세군은 성직자를 '사관'(Officer)으로, 평신도는 '병사' (Soldier)로 부르는 군대식 체계로 이루어져 있어 구세군 교회(Corps)와 본영(Territory Head quarter/THQ)에서 학습하는 후보생(candidate) 과정을 거쳐 구세군사관학교를 졸업하면 사관이 되어 지역을 떠나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사역할 수 있다
대학원에 입학 즉시 신원이 구세군에 소속된다
자유로운 타교단과 가장 극명하게 갈리는 특징인데 입학과 동시에 본인의사와 상관없이 실습지를 배정 받는데, 구세군답게 이 실습의 명칭이 '전장실습' 이며 대부분은 수도권으로 배정받지만 지방으로 가는 특수한 경우가 있다
♤ 연혁
1908년 대한제국에서 선교를 시작한 구세군이, 대한제국에서 활동할 구세군 성직자(사관)을 양성 하기 위해 서울 종로구에 구세군성경대학을 세운 것이 시초이다
1910년 2월 15일 구세군성경대학 개교(종로구 평동 76)
1912년 8월 1일 구세군사관학교로 명칭 변경
1917년 5월 3일 한국최초로 여자사관학생 (여자 신학생) 교육
1928년 9월 13일 서울시 중구 정동 1-23로 이전
1940년 11월 9일 구세학원으로 명칭 변경
1942년 3월 6일 구세학원 폐교(사유:신사참배 반대)
1947년 10월 15일 구세군사관학교 복교
1985년 11월 27일 경기도 과천시(중앙동 83-2)로 이전
1986년 3월 1일 구세군사관학교 인가
2014년 10월 2일 구세군사관대학원대학교 설립인가
2014년 10월 7일 구세군사관학교 폐지인가
2015년 3월 1일 구세군사관대학원대학교 개교
강득룡 묘 (경기도 과천시 갈현동 산 6)
묘역 입구에는 홍살문과 신천강씨의 시조 신성부원 군의 신단이 있고,
부인 이씨와의 쌍분묘이다
이곳은 원래 안정공의 위토로 1978년에 정부과천 청사 부지로 편입되었다
♤ 위토(位土)
제사 또는 이와 관련된 사항들을 집행하는 데 드는 비용을 충당하기 위한 토지
위토는 주로 논과 밭으로서 각각 위토답(位土沓) ·위토전(位土田) 또는 위답(位沓)·위전(位田)이라 고 구분하여 부르기도 하며, 이따금 임야도 그 수익 이 제사 경비에 충당되는 경우에는 위토에 포함하기 도 한다
묘표는 비문이 마모되어 글자가 확인되지 않고,
1959년에 세운 묘비는 전 성균관부제학 안인식이 비문을 짓고 11대손 강천식이 글씨를 썼다
석물은 15세기 전반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문인석 2쌍만이 원래의 것이고 장명등, 석양 등은 근래에 제작된 것이다
♤ 강득룡
본관이 신천, 시호가 안정이며 태조의 계비 신덕 왕후의 오빠이다(즉 이성계의 손위 처남)
문과에 급제하여 공민왕 때 삼사우사를 지냈으나 조선이 건국되자 관직을 버리고 관악산 연주암에 은거하여 고려의 멸망을 애도하였다 한다
좌리공신 첨의정승을 지냈으며 안릉부원군에 봉해졌다
과천 정부종합청사를 지나면 야트막한 산자락(?)에 보광사가 있다
보광사 (경기도 과천시 교육원로 41, 갈현동 산 126-21)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용주사의 말사다
발굴된 유물로 보아 신라 때 창건되었을 것으로 추측되나
연혁이 전하지 않아 자세한 절의 역사는 알 수 없다
오랫동안 폐사로 남아 있던 것을 1946년에 현재의 자리로 옮겨 중창하고 절 이름도 다시 지었다
♤ 극락보전
♤ 보광사 목조여래좌상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62호)
법당 내에 봉안되어 있는 높이 1.64m의 목조여래 좌상으로 목조대좌를 구비하고 있다
이 불상은 원래 경기도 양평 용문사에 봉안되어 있었는데 한국전쟁 때 어떤 보살이 여주로 옮겼다가 1993년에 이곳으로 옮겨왔다고 한다
전체적으로 금도금이 되어 있는 이 불상은 17세기 말부터 18세기에 유행했던 대량제작으로 인한 경직되고 생략적인 상들보다는 조선 전기의 불상양식을 고수하고 있는 상이므로 17 세기 중엽 경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 문원리 삼층석탑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39호)
고려시대의 석탑으로 문원리에 인접한 관문리의 옛 절터에서 옮겨온 것이라고 전해진다
3층 지붕돌 위에는 모든 소원을 이루어준다는 구슬 인 보주가 놓여 있다
♤ 문원리사지 석조보살입상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77호)
높이 170㎝ 정도의 각석주에 전면만을 간략하게 선각(線刻)한 보살 입상으로 경기도 과천시 관문리사지 또는 문원 4리 산117번지에서 보광사 창건시에 3층석탑과 함께 옮겨 왔다고 전해진다
둔중해 보이는 이 보살상은 간략화된 옷주름과 평평한 얼굴로 보아 고려 후기 또는 조선 전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 사물루
그 외
김영철 기념비 (경기도 과천시 갈현동 635-2)
줄타기의 명인 故김영철과 역대 줄타기 명인들의 업적을 기리는 기념비이다
과천은 줄타기의 명인 故김영철 선생뿐만 아니라 故김상봉, 故최상천, 故김관보 등 당대 최고의 줄광대가 태어났거나 여기서 많은 학습과 기예를 펼친 유서깊은 고장이다
(영조때에 줄타기를 잘하여 상봉上峯이란 이름을 하사받은 김상봉, 조선후기에 상천上天이란 이름을 하사받은 최상천 명인에 이어 김관보金官甫라는 줄타기의 명인이 과천에 살았다)
♤ 김영철
1920년 경기도 과천면 갈현리 3번지에서 3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고, 9살에 이웃에 사는 줄광대 김관보의 기예를 보고 줄타기를 학습했고, 1937년 (17세)부터 본격적으로 줄타기 공연을 시작한 이후 여러 단체를 거쳐 가며 전국적인 공연활동을 벌였다
김관보의 제자 임상문, 이정업, 이동안 등과 같은 연희계의 명인과 함께 줄타기 및 땅재주를 공연했다
1975년부터 1978년까지 한국민속촌에 정착하여 전속공연을 했고, 1978년 중요무형문화재 제58호 줄타기 예능보유자가 되었다
1988년 작고 후 과천시 갈현동에 안장되었고, 그의 줄타기는 김대균에게 이어졌다
김영철 명인은 음악에도 조예가 깊어 하와이안 기타로 산조를 연주하다가 철현금을 만들고 철현금 산조의 시조가 되었으며, 철현금 산조는 성창순에 전수되고 유경화 교수가 이어서 활동하고 있다
찬우물(가자우물) (경기도 과천시 갈현동 664-4)
정조는 사도세자의 묘원인 현륭원에 능행할 때마다 과천을 지나갔는데, 어느날 이곳에 이르러 심한 갈증을 느끼게 되었고, 이때 한 신하가 근처 찬우물 의 물을 떠다 바치니
이 물을 마시고 물맛이 유난히 좋다 하여 이 우물에 "당상" 의 품계에 해당하는 가자당상(加資堂上) 벼슬을 재수하여 이때부터 찬우물이 가자우물이 되었다(당상이란 정3품 이상의 품계를 말한다)
원래는 암반의 틈새에서 솟아나 많은 샘물로 이루어 져 약수로 유명하였으나 최근에 수량이 많이 줄어들 어 과천시에서 향토유적으로 지정하고 보존하기 위하여 인근의 지하수를 유입해 복원 정비하였다
야사(野史)에 의하면,
정조가 찬우물 물을 마시면서 뒤에 보이는 저 묘소 가 누구의 묘소냐고 묻자 신하가 "좌의정 김약로 묘소" 라고 하자 정조의 얼굴이 순간 일그러졌다고 한다
(김약로는 영의정 김상로의 형으로, 김상로는 사도 세자를 죽음으로 몰아가는데 앞장섰던 인물이다)
이 후 정조는 사도세자 원행길을
● 용양봉저정 → 남태령고개 → 과천행궁 → 인덕원 사거리 → 지지대고개 → 현륭원(융릉)과 같이 김약로의 무덤이 있는 과천을 지나는 않고
● 용양봉저정 → 장승백이 → 시흥행궁 → 만안교 → 현륭원(융릉)과 같이 시흥, 안양을 지나는 길을 택했다
(정조의 원행 총 13회 중 6회는 과천길, 7회는 시흥길이다)
♤ 김약로 묘는 쌍봉산 아래(경기도 화성시 우정읍 조엄리 산24-27)에 있던 김상로 묘와 함께 2017년 김유(부친) 묘역(경기도 의왕시 왕곡동 산 9-3)으로 이장 되었다
청동기유적지 (경기도 안양시 동안구 관양1동 15-3)
인덕원 전철역 8번 출구로 나와 20여미터 걸어가면 유적지 안내표지판이 나온다
(관양동 청동기유적지는 경기삼남길에 포함되지 않는다)
수도권 광역상수도 매설을 위한 조사에서 이 일대 발굴조사(2001~2002)를 통해 확인된 청동기시대 집자리 터이다
구석기시대의 뗀석기부터 조선의 자기까지 여러 시대의 유물이 출토되었으나 중심시기는 청동기 취락유적으로 경사면에 8기의 유구가 발견됐으며 형태와 내부시설이 양호한 3호와 4호는 복원하였다
유구는 선사시대 움막 등을 지었던 집자리나, 고인돌 등의 무덤이나 대지를 파내어 돌 등으로 주변과 구분지어 조성했던 것부터 건축물이나 사원 등까지 폭넓게 의미한다
이곳은 유구를 중심으로 주변에 유리온실을 지어 보존하고 있다
이제 경기삼남길 제1길 - 한양관문길을 마치고, 제2길 인덕원길 시작점인 인덕원역 (4호선) 7번 출입구를 향하여 길 건너 간다
첫댓글 관악산을 오르는 계곡을 남자하동 이리고 하는군요. 이백 님을 통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어 좋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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