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연금개혁 공론화 과정에 참여하면서 다소 정신없이 지내고 있는데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국민연금을 공적연금이 아니라 민간저축이나 보험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우리 사회에 얼마나 널리 퍼져있고 강고하게 형성되어 있는지를 다시 한번 온몸으로 느낀다. 그리고 이런 시각이 만들어진 데는 정부도 한몫을 했지만 무엇보다 언론의 왜곡보도가 주범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언론의 왜곡보도로 인해 국민연금을 저축처럼 바라보는 시각에 너무나 길들여져서 기금에 거의 목숨을 거는 지경이다. 우리 국민들 중 아마 거의 대부분은 내가 매달 내는 돈이 국민연금에 있는 내 개인계좌에 원금으로 들어가고 거기에 수익이 붙여져서 나중에 돌려받는다고 생각할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니까 기금소진을 이해할 수가 없다. 아니 이렇게 생각하면서도 매달 기여금을 내는 것이 고마울 정도이다.
그런데 국민연금에는 가입자들의 개인계좌가 개설되어 있지 않다. 국민연금에 매달 내는 돈은 그달그달 현재 연금받는 어르신들에게 연금으로 나간다. 즉, 우리나라의 모든 국민연금 가입자들은 매달 국가에 기여금을 내서 현재의 어르신들에게 생활비를 지급하고 있다는 것이다(이런 방식을 부과방식이라고 한다). 물론 국민연금에 가입하지 못한 사람들도 있고 또 연금수급권이 없는 어르신들도 있는데 이건 여기서는 논외로 한다.
그런데 우리나라 국민연금은 기금이 있다. 그리고 아직까지는 기여금을 내는 사람이 연금을 받는 사람보다 많기 때문에 매달 내는 기여금으로 연금을 지급하고도 돈이 남는다. 그래서 그 남는 돈이 기금으로 들어가고 있다. 그리고 이렇게 남는 돈이 기금으로 들어갈 때도 나의 개인계좌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다른 가입자들의 돈과 그냥 섞여서 기금에 들어간다. 그래서 국민연금에서는 가입자가 낸 돈이 원금으로 쌓인다거나 하는 것 자체가 처음부터 성립하지 않는다. 그냥 집단적으로 쌓인다.
국민연금에서 기금은 가입자들의 개인계좌를 모아놓은 것이 아니다. 인구고령화의 충격을 완화하기 위해 집단적으로 모아놓은 것이다. 고령화의 충격을 완화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 국민연금을 처음 설계할 당시에도 인구고령화가 예측되었다. 왜냐하면 베이비붐 세대가 인구가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베이비붐 세대가 퇴직하면 고령화가 나타날 것이고 그러면 매달 기여금을 내서 그걸로 매달 연금을 지급해야 하는 국민연금으로서는 기여금이 올라갈 것인데 그 기여금 올라가는 속도를 천천히 하고자 기금을 쌓게 한 것이다. 이것이 고령화의 충격을 완충한다는 의미이다.
국민연금기금이 가입자들 각각의 개인계좌를 모아놓은 것이라고 생각하면 기금소진이 이해가 되지 않거나 국민연금에 먼저 가입한 선배 세대들이 자기들 개인계좌에는 돈을 조금만 쌓아놓고는 미래세대가 만들어놓은 개인계좌에서 돈을 당겨 쓴다고 생각하게 된다. 이렇게 생각하면 국민연금은 적자를 계속 뒤로 미루는 제도가 된다. 우리 언론은 국민연금을 이렇게 바라보도록 정말 온 힘을 다해 왜곡 선전해왔다. 하지만 국민연금은 개인계좌를 열어두고 그걸 관리하는 제도가 아니다. 만일 국민연금이 거기에 2천 2백만명 가입자들의 개인계좌를 2천 2백만개 개설해두고 그 개인계좌에 가입자들이 각자 낸 돈을 원금으로 적립하고 그걸 운용한 수익을 각자에게 붙여 돌려준다면 그게 바로 연금민영화이다. 연금을 민영화한 나라들이 그렇게 운영한다. 그렇게 운영하면 사실 재분배는 할 수 없다. 왜냐하면 각자 자기 계좌에 돈을 넣었다가 거기에 수익을 붙여 찾아가기 때문이다. 최근에 KDI가 제안한 신연금이 바로 이것이다. KDI는 국민연금이 공적연금이라는 인식이 전혀 없는 것이다. 우리 언론들도 거의 마찬가지다.
공적연금은 퇴직과 연관된 것인데 옛날에는 지금 우리가 보는 퇴직제도가 없었다. 그리고 그때는 자식이 각자 자기 부모를 개별적으로 부양했다. 이런 개별적 부양방식은 인류 역사에서 보편적이었고 또 인간의 삶에서 자연스러운 것이다. 자본주의에서도 처음에는 퇴직제도가 없었고 그래서 개별적 부양방식이 적용되었지만 다른 한편 부모에게 생활비를 못주거나 주더라도 충분치 못한 경우가 발생하게 되었다. 이게 19세기 말 유럽에서 노인빈곤이 심각하게 된 이유이다. 그리고 이것이 그 당시 유럽에서 일반노동자 대상의 공적연금이 도입된 배경이기도 하다. 또 19세기 말에 이르러 자본주의가 독점자본주의로 전환하면서 퇴직제도가 도입되기 시작한 것도 중요한 배경이다. 퇴직제도는 2차 대전 후에 보편화하는데 이로 인해 노후소득보장의 필요성도 커졌다. 그래서 퇴직의 보편화와 함께 공적연금의 보편화가 일어난 것이다(이런 점에서 퇴직은 동작이 느린 고령노동자를 퇴출함으로써 자본이 이익을 사유화한 과정이며 공적연금은 그로 인해 생긴 노후소득보장이라는 비용을 사회화한 것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 그래서 공적연금에 기업이 돈을 내는 이유이기도 하다(물론 전가가 있지만)). 공적연금은 과거 개별가정에서 하던 부양을 사회전체로 확대한 것이다. 모든 자식세대가 매달 돈을 내고 국가는 그걸 걷어서 모든 부모세대에게 연금이라는 이름의 생활비를 지급하는 것이다. 그래서 공적연금이 없던 시절 인간이 부모를 부양하던 방식과 공적연금이 도입된 후 인간이 부모를 부양하는 방식은 근본적으로는 동일하다. 다만 공적연금은 그것을 사회화하고 집합화한 것이다.
그런데 공적연금이 도입된 이후 또다시 사회가 변화했다. 출산율이 떨어지고 그와 함께 고령화가 심화한 것이다. 그래서 자식세대가 부모세대를 부양한다는 방식을 그대로 유지할 경우 자식세대의 부양부담이 너무 커질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여기서 부양방식 변화의 흐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퇴직이 없었던 매우 오랜 기간 동안 개별적 부양이 적용되었는데 자본주의에 와서 퇴직이 보편화하면서 부양방식이 집합적 부양으로 전환되었다는 것이다. 이제 고령화가 더 심화하는 미래에는 어떤 부양방식이 강구되어야 할 것인가?
단지 기금을 쌓으면 되는 것인가? KDI가 말하듯 확정기여형으로 전환하면 되는 것인가? 우리는 이미 거대한 기금을 물려받았기 때문에 기금을 잘 관리해야 하는 것은 맞지만 기금이 미래 고령사회에 대비하는 주축은 아니다. 기금은 고령화의 충격을 완화하기 위한 역할용으로 잘 관리하면 된다. KDI가 말하는 신연금은 연금민영화여서 미래 고령사회에 이걸로는 절대로 견뎌낼 수가 없다.
미래 고령화가 심화하는 사회에서는 공적연금의 성격이 바뀌어야 한다. 지금까지 공적연금은 세대간 부양제도(세대간 집합적 부양제도)로 간주되어 왔다. 하지만 미래 고령사회에는 세대간 부양이라는 성격 외에 계층간 부양이라는 성격이 더해져야 한다. 계층간 부양의 성격을 더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국민연금에 조세를 지원하는 것이다. 근로소득세와 종합소득세 납세액을 계층별로 보면 상위 10%가 총납세액의 75% 이상을 부담한다. 그리고 상위 20%로 확대하면 총납세액의 90% 이상을 그들이 부담한다. 따라서 국민연금에 조세를 넣는 순간 계층간 부양의 성격이 저절로 실현된다. 또 근로소득세와 종합소득세 납세를 연령대별로 보면 이 역시 40대 이상이 70% 이상을 부담한다. 특히 종합소득세는 60대 이상이 2030세대보다 더 많이 낸다. 이런 점에서 국민연금에 조세가 지원되면 그 순간 세대간 차등기여가 실현된다. 이렇게 하여 계층간 부양의 성격이 더해지면 공적연금은 자산이 많은 노인이 그렇지 못한 노인을 부양하는 성격도 갖게 될 것이다. 이러한 개혁과 함께 노인연령조정이 추진될 수 있다(물론 장기적으로).
우리 사회 연금개혁은 미래 고령사회에 공적연금의 성격이 어떠해야 하며 그렇게 해서 공적연금의 보장수준은 어느 정도여야 하는가에 초점을 두어 이루어져야 한다. 기금을 더 많이 쌓자거나 적자가 어쩌고 저쩌고는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소음이다. 국민연금은 공적연금이지 미리 돈을 쌓아두어야 하는 민간보험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