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케다 다이사쿠(池田大作) 선생님 스피치
시대는 ‘영원한 생명관’을 희구
오미야광포 35주년 기념대표자회
1986년 12월 21일
사명의 길을 씩씩하게 나아가라
오미야는 고난의 눈보라에도 굽히지 않고 수많은 개가를 올리는 역사를 새겼다. 이른바 ‘연전연승의 땅’이다. 그런 오미야를 오래간만에 방문하여 정말 기쁘기 그지없다.
또 광포의 거점이자 ‘오미야성(城)’인 니시오미야문화회관이 여러분의 신심과 진심으로 이렇게 훌륭하게 탄생했다. 정말로 축하한다. 오늘 만나 뵙지 못한 동지 여러분에게도 부디부디 안부 말씀 잘 전해주시기 바란다.
내가 초등학교 4학년 무렵에 학교 선생님이 어떤 학자 이야기를 해주셨다.
그 학자는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인 데도 세계적인 대전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그는 인류의 복지에 기여하기 위해 분명히 일심불란으로 연구에 몰두했을 것이다. 그러나 ‘세계 대전이 터진 비상시에 무슨 일을 하고 있는가.’ 하고 비난받았다. 게다가 연구에 몰두하다 미쳐버린 사람이라는 모욕을 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계속 연구하여 훌륭히 목적을 이뤄내고 사회에 공헌했다.
나는 이 이야기를 매우 인상 깊게 들었다. 지금도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사회의 움직임에 무관심해도 좋다는 말이 아니다. 그러나 어떤 면에서는 불도수행에 힘쓰고 광포활동을 하는 우리에게도 통하는 이야기라는 생각이 든다.
세간 사람들은 휴일이 되면 푹 쉬기도 한다. 예컨대 텔레비전을 보면서 한가롭게 하루를 보내거나 또는 밖으로 나가 재미있게 여가활동을 즐기는 사람도 많다. 그런 사람들 눈으로 보면 우리가 보내는 일상이 조금은 이상하게 보일지도 모른다(웃음).
우리는 휴일에도 광포활동을 쉬지 않는다. 오히려 여러분은 시간을 만들어서 벗을 위해 달리고 광선유포를 위해 존귀한 땀을 흘린다. 대법흥륭(大法興隆)을 위해 부지런히 힘쓴다. 그런 이유에서 ‘광신(狂信)’이라든지 ‘법화경에 미쳤다’는 말을 들으며 업신여김당한 일도 있었다.
그러나 광선유포운동은 항구평화와 전 인류의 행복을 위한 싸움이다. 이만큼 숭고한 사명은 없고 존귀한 인생도 없다. 경문에 비추어 틀림없이 삼세시방(三世十方)의 부처와 보살이 “매우 좋구나, 매우 좋구나.” 하고 여러분을 깊이 찬탄하시리라고 확신한다.
어떤 일이든 한가지 일을 이뤄낸 사람의 인생이나 생활은 어쨌든 상식 밖으로 비치는 법이다. 나는 일류 마라톤선수가 메이지신궁 외원(外苑)을 달리는 모습을 보곤 하는데, 그 선수의 단련과 진지함은 보통사람과 다른 특별함이 있다. 마라톤선수만이 아니다. 학문이든 업무든 어떤 분야든 한가지 일을 구명(究明)하는 사람은 일심불란으로 연찬과 수행을 쌓고 있다. 그런 이른바 ‘미친’ 듯한 집념이 있어야 비로소 보통사람 이상으로 실적을 쌓을 수 있는 법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들의 단련과 성과는 아무리 훌륭한 것일지라도 내세까지 가지고 갈 수는 없다. 어디까지나 금세에 한정된 것이다. 이 세상에서 얻은 재산이나 명성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불법(佛法)의 묘연(妙緣)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다. 신심의 수행에 따른 복덕은 삼세(三世)에 빛나고 자신의 생명을 장식할 수 있다. 우리가 신심하는 목적은 영원한 자재(自在)이고, 거침이 없는 경지로 유희(遊戲)하는 데 있다. 이 점에 단순한 ‘현세론’을 뛰어넘어 ‘삼세론’으로서 불법의 장대함이 있다. 아무쪼록 앞으로도 이 점을 확신하고 긍지로 삼아 묘법을 유포하는 사명의 길을 씩씩하게 나아갔으면 한다.
묘법은 ‘유락(遊樂)’과 ‘소생(蘇生)’의 대법(大法)
일본도 앞으로는 고령화 사회로 접어든다. 니혼대학교 인구연구소가 발표한 장래의 인구추정에 따르면 35년 후인 2021년에는 네명 중 한명이 65세 이상의 고령자이다.
고령인구 중에서도 75세 이상이나 85세 이상의 고령자가 차지하는 비율이 현재보다 더 높아지고, 남편이 사망하고 혼자 사는 고령 여성도 급격히 늘어난다. 또 자리에 누워 일어나지 못하거나 치매에 걸린 노인의 문제도 심각해진다고 한다. 이러한 경향은 세계적인 추세로서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대성인불법은 ‘태양의 불법’이다. 기나긴 인생에서 활기차고 소원만족한 인생을 살 수 있는 원천이 되는 무한한 힘이다. 인생의 연륜을 새기면 새길수록 자신의 경애를 열고 빛낼 수 있다. 또 새롭게 삼세를 향해 출발할 수 있는 소생의 대법이다. 그것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일이 바로 ‘신심’이다.
그런 의미에서 니치렌 대성인이 어느 노부부를 격려하신 편지를 여기에서 배독하겠다.
대성인이 사도에 유배되셨을 때, 입신한 사람들 중에 나이 많은 고우입도(國府入道) 부부가 있다.
대성인 인생에서 가장 큰 역경이라고 할 수 있는 사도유배 중에 입신해 신심을 끝까지 지켜간 사람들은 역시 그만큼 깊은 결의와 신념을 지니고 있었다. 이 노부부도 그러했다.
대성인이 유배 중이실 때는 부부가 함께 여러가지로 공양하며 외호(外護)에 힘썼다. 또 대성인이 미노부에 입산하신 뒤에도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미노부까지 가서 공양을 드렸다. 부부는 평생 순수한 신심을 관철했다.
같은 사도의 동지인 아부쓰보(阿佛房)와 센니치니(千日尼) 부부에게는 훌륭한 자녀가 있었다. 그러나 이 고우입도 부부에게는 자녀가 없었다. 나이 많은 두 사람은 분명히 외로울 때도 있었을 것이다.
대성인은 이 노부부에게 이러한 격려편지를 보내셨다.
“그런 데다가 자식도 없이 단지 어버이뿐이로다. 기중중생실시오자(其中衆生悉是吾子)라는 경문대로라면 교주석존은 입도전(入道殿)과 이부인(尼夫人)의 자부(慈父)로다. 니치렌은 또한 자식이어야 했었으나, 잠시 일본국의 사람을 구하려고 중국(中國)에 있는 것이리라. 숙선(宿善)은 거룩하도다. 또 몽고국이 일본에 난입할 때에는 이곳으로 오시라. 또한 자식이 없는 사람이니 연만(年晚)해진 말년에는 이곳으로 오시도록 생각하시오. 어떤 곳도 정처는 없으며, 부처가 되는 일만이 마지막의 보금자리라고 마음을 결정하시라.”(어서 1323쪽)
- “두분에게는 자녀가 없고 부모뿐이다. 법화경 비유품 제3의 ‘그 가운데 중생은 모두 이는 내 자식이니라.’ 하신 경문대로 라면 교주석존은 고우입도와 부인의 아버지다. 또 니치렌은 여러분의 자식이어야 한다. 다만 당분간 일본 사람을 도우려고 (사도가 아닌) 나라의 중앙에 있다.
여러분이 전세에 쌓은 선업(善業)은 존귀하다. 또 몽고가 일본에 난입할 때는 이곳 미노부로 피난하기 바란다. 또 자식도 없으니 만년에는 이쪽으로 옮기도록 생각하기 바란다. 어느 곳도 정해진 곳은 없는 법이다. 오직 부처가 되는 일이 마지막 보금자리라고 마음을 정하기 바란다.”
자식이 없는 노부부를 진심으로 자애하시는 말씀이다. 또 인생의 미묘한 이치를 통한 따뜻한 가르침이기도 하다.
그중에서도 부부에게 ‘나는 여러분의 자식’이라는 말씀까지 하셨다. 나는 이 어서를 배독할 때마다 참으로 자애 가득한 고마운 말씀이라고 깊이 감격해 마지않는다. 이 편지를 받은 고우 입도와 부인의 마음은 과연 어떠했을까.
청년에게는 준엄한 지도도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나이 드신 분에게는 세심하게 배려하는 따뜻한 격려를 결코 잊지 말아야 한다.
현명한 광포리더는 이 편지를 통해 한사람 한사람을 진심으로 존경하고 진심을 담아 격려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깊이깊이 명심했으면 한다. 왜냐하면 이 점은 불법에서 보더라도, 인간 본연의 자세에서 보더라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또 신심의 조직에서도 간부라면 늘 유념해야 할 중요한 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대성인은 노후에 안주할 곳을 걱정하는 부부에게 ‘마지막 보금자리는 성불(成佛)’이라고 말씀하셨다.
누구나 인생에서 안주할 곳을 찾고 싶어 한다. 특히 나이가 들면 인생의 마지막을 안온하고 만족스럽게 지내고 싶다는 마음이 강하다. 그러나 이 지구상에는 영속적인 만족과 안주할 곳은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왜냐하면 자신의 생명에 변치 않는 황금 같은 궁전을 마련하는 수밖에 진실한 유락도 영속적인 만족감도 없기 때문이다. 즉 ‘성불’이 바로 ‘상(常)’ ‘낙(樂)’ ‘아(我)’ ‘정(淨)’이라는 무너지지 않는 ‘집’이다. 그 집을 자신이 만들고 자신이 즐기기 위한 신심이다. 자신을 대우주의 묘법과 불계(佛界)라는 파괴되지 않는 집에 합치하기 위한 신심이다.
스페인에 ‘오늘부터 100년 후에는 모든 사람이 죽은 사람’이라는 속담이 있다. 100년 후에는 지금 살아 있는 모든 사람은 죽는다. 즉 ‘죽음은 예외 없이 모든 사람에게 찾아온다.’는 의미이다.
분명히 어느 누구든 ‘죽음’을 피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 속담은 죽은 사람을 위로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서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교훈을 준다.
‘장수(長壽)’의 의미는 가치 있는 인생으로
프랑스의 작가이며 계몽사상가인 루소의 작품에 교육소설 《에밀》이 있다. 주인공 에밀의 출생부터 청년기까지 교육 본연의 자세를 서술한 이 소설은 다른 제목으로 《교육에 관해》라고도 일컫는다. 이 책에서 말한 교육방법은 자연에 따르고 아동의 본성을 존중하라는 내용으로서 훗날 교육론과 교육학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교육자이기도 한 마키구치 선생님과 도다 선생님은 《에밀》을 비롯해 루소의 책을 애독하셨다. 나도 도다 선생님과 《에밀》에 관해 수도 없이 대화를 나눴다.
1950년이라고 생각한다. 도다 선생님과 고이와에 있는 어느 댁을 방문했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고이와역 앞에서 선생님이 사주신 초밥을 먹고 차 안에서 《에밀》 등 문학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 메구로역까지 선생님을 모셔 드린 일을 그리운 추억으로 떠올린다. 당시 나는 스물두살이었다. 도다 선생님은 한번 사업에 실패하고 학회의 이사장직도 사임하셨을 무렵이다.
그 《에밀》 가운데 이런 구절이 있다.
“산다는 것은 호흡하는 것이 아니다. 활동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지닌 감각기관과 능력을, 다시 말해 우리에게 존재감을 부여하는 신체의 모든 부분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가장 장수한 사람은 가장 많은 세월을 산 사람이 아니라 인생을 가장 잘 체험한 사람이다. 100년을 살다 땅에 묻힌 사람이라 해도 태어나자마자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인 경우도 있다.”
참으로 많은 것을 함축한 말이다. 장수란 오랜 세월을 살았다는 뜻만이 아니다. 설령 100살까지 살았다고 해도 태어나서 얼마 지나지 않은 갓난아이가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로 가치 없는 세월을 살았다면 그 인생은 의미가 없다고 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가장 가치 있는 인생은 올바른 ‘대법(大法)’을 바탕으로 사는 수밖에 없다. 일생성불과 광포를 위해 나날이 후회 없이 살아가는 인생 그리고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이 바로 진정한 의미로 ‘장수’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노(老)’ 그리고 ‘사(死)’라는 문제와 관련해 떠오르는 말이 있다.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범유럽’ 사상을 제창한 오스트리아의 쿠덴호베 칼레르기 박사의 말이다.
나는 1967년 칼레르기 백작을 처음 만났다. 벌써 20년 전의 일이다. 1970년에도 만나 뵙고 대담을 거듭 나눴다. 그 내용은 이듬해 <산케이신문>에 장기간 연재되고 홋날 《문명 서(西)와 동(東)》이라는 대담집으로 발간되었다.
대담을 나누는 자리에서 박사가 이렇게 말씀하셨다.
“동양에서는 삶과 죽음은 이른바 책의 한 페이지입니다. 그 페이지를 넘기면 다음 페이지가 나옵니다. 즉 새로운 삶과 죽음이 되풀이된다는 사고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유럽에서는 인생은 책 한권과 같은 것이며 처음과 끝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동서양의 생사관을 단도직입적으로 요약한 유명한 말이다. 서양에서는 기독교도 유물론도 이 세상을 사는 인간의 삶은 오직 한번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죽음’에 대한 공포감은 동양인보다 더 격심하고 심각해지기 쉽다.
박사도 이렇게 지적하셨다. “유럽 사람은 평생 죽음에 떨면서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소리를 내어 말하지 않을 뿐이지 항상 죽음이라는 관념에 얽매어 살고 있습니다. 동양 특히 유럽보다 일본에서 죽음에 대한 공포심이 더 적은 이유는 내세관(來世觀) 또는 영원한 생명관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죽음’에 대한 서양인의 이러한 공포심은 늙어갈수록 더욱 심해진다. 또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간으로서 지성이 높으면 높을수록 그리고 인생을 진지하게 바라보면 바라볼수록 죽음과의 대결은 분명히 심각해질 것이다.
돌아가신 아널드 토인비 박사도 죽음을 해결하는 실마리를 찾고자 애쓰셨다. 앙드레 말로 씨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서양의 사상에서는 끝내 죽음을 해결하는 방법을 찾아내지 못한 것이 아닐까. 그래서 동양의 사상에서 그중에서도 대승불교(大乘佛敎)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특히 나는 토인비 박사가 말년에 불법의 생사관을 깊이 지향하신 일을 잘 알고 있다.
토인비 박사를 비롯해 많은 분이 나와 대담을 나누기를 바라고, 대담이 실현된 배경에는 사실 죽음을 본원적으로 해결하는 길을 밝힌 불법의 진수에 대한 뜨거운 주목이 있었다.
칼레르기 박사도 불법이 현대에서 미래에 이르는 인류에게 미칠 거대한 역할에 주목한 사람 중 한 사람이었다. 박사는 대담을 나누는 자리에서 분명히 이렇게 말씀했다.
“저도 불교를 매우 깊이 존경합니다. 왜냐하면 세계의 모든 종교 가운데 이념적으로나 역사적으로나 불교만이 유일하게 평화적인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종교의 퇴폐는 오늘날 세계적인 문제입니다. 그리고 다른 종교가 모두 쇠퇴해갈 때, 일본에서는 새롭게 태어난 불교가 흥륭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매우 기뻤습니다.” 하며 니치렌 대성인 불법이 일본의 민중 속에서 활기차게 약동하는 모습을 칭찬하셨다.
이처럼 세계적인 최고의 영지(英智)는 ‘죽음의 해결’이라는 점을 놓치지 않고 들여다보고 하나의 결론으로서 동양의 불법을 주목하고 있다. 오히려 일본 사람이 인생을 진지하게 구도하지 않고 시종일관 차원이 낮은 비판을 하는 경우가 많은 듯하다(웃음). 이 점은 체험상 여러분도 잘 아시는 바이다.
불법은 ‘생사’의 본원적인 해결을 제시
대성인은 신심을 완수한 경애에 관해 <마쓰노전답서(松野殿答書)>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세상살이가 힘겨울 때도 금생(今生)의 괴로움조차 슬프니 하물며 내세(來世)의 고(苦)에 있어서랴고 생각해서라도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라고 부르시라. 기쁠 때도 금생의 기쁨은 꿈속의 꿈이며 영산정토(靈山淨土)의 기쁨이야말로 진실한 기쁨이라고 생각하시어 또 남묘호렌게쿄라고 부르고 퇴전(退轉) 없이 수행하여 최후 임종(臨終)의 때를 기다려 보시라.”(어서 1386쪽)
즉 ‘세상살이가 힘들고 괴로운 때도 금세에서 느끼는 괴로움이 이렇게 슬픈데 하물며 내세의 괴로움이야 오죽할까 생각하고 강성하게 제목을 부르시오. 또 반대로 기쁜 일이 있어도 금세의 기쁨은 꿈속의 꿈과 같이 부질없으니 성불한 뒤에 영산에서 느끼는 기쁨이 바로 진실한 기쁨이라고 정하여 다시 창제에 힘쓰시오.’ 하는, 깊은 생명관에서 우러나온 말씀이다.
‘슬플 때도 즐거울 때도 창제하는 일 말고 행복으로 가는 길은 없다. 어떤 일이 있어도 항상 용감하게 제목을 끝까지 부르기 바란다. 또 제목을 끝까지 홍통하기 바란다. 마지막 임종하는 순간까지 절대로 퇴전하지 말고 묘법을 수행하기 바란다.’는 가르침이다.
이보다 더한 괴로움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해도 지옥이라는 업고(業苦)에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또 한때는 아무리 행복하고 기뻐서 어찌할 줄 몰라도 영원히 이어지는 행복도 기쁨도 없다. 하늘로 날아오를 것만 같은 신혼의 기쁨도 눈 깜짝할 사이에 싸우고 미워하는 수라투쟁의 나날로 변한다(폭소). 결코 여러 분 댁의 일은 아니지만(폭소) 결코 드문 일이 아니다. 어떤 기쁨도 시간과 함께 빛이 바랜다. 이것이 현실이다.
대성인은 이 글월에 이어 이렇게 쓰셨다.
“묘각(妙覺)의 산(山)에 달려 올라가 사방을 쫙 바라보니 아 아, 유쾌하도다. 법계(法界)는 적광토(寂光土)로서 유리(瑠璃)를 가지고 땅으로 하고 금의 밧줄로써 팔(八)의 길에 경계(境界)를 했으며, 천(天)으로부터 사종(四種)의 꽃이 내리고 허공에서 음악이 들리며, 제불보살(諸佛菩薩)은 상락아정(常樂我淨)의 바람에 산들거리고 오락(娛樂) 쾌락(快樂)하시느니라.”(어서 1386쪽)
즉 ‘묘각의 산, 다시 말해 성불이라는 높은 경애에 서서 사방을 바라보면 그곳에는 훌륭한 세계가 넓디넓게 이어져 있다. 전 우주가 모두 적광토가 되어 있다. 지면은 모두 파랑게 빛나는 유리라는 보주(寶珠)로 덮여 있다. 황금 밧줄로 경계 지은 길이 여덟개이고, 하늘에서는 빨간 꽃, 하얀 꽃, 큰 꽃, 작은 꽃들이 너울거리며 떨어지고, 신묘한 음악이 들려온다. 모든 부처와 보살은 상락아정의 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리며 자유자재로 마음껏 즐기고 있다.’는 뜻이다.
장래 언젠가 이 ‘죽음’이라는 문제에 관해 논하고자 생각하는 데, 불법은 생명의 실상을 ‘십계삼천(十界三千)’이라고 설하며 규명한다. 우주에 십계가 있고 우리 생명에도 십계가 있다. 또 우주에 ‘삼천세간(三千世間: 여시<如是>)’이라는 차원이 있고 우리 몸에도 마찬가지로 삼천이라는 차원이 갖춰져 있다. 그 대우주에 갖춰진 십계삼천의 당체(當體)가 어본존(御本尊)이다. 그러므로 어본존에 창제함으로써 우주의 불계라는 최고의 경계(境界)에 우리 생명의 파장을 합치시키는 데에 묘법을 수행하는 근본적인 의미가 있다.
예컨대 우주공간에는 눈에는 보이지 않아도 여러가지 전파(電波)가 있다. 수신기에 따라 각국의 전파에 맞춰 음성을 들을 수 있다. 이처럼 우주의 불계라는, 실재(實在)하는 가장 훌륭한 차원에 우리 생명을 삼세 영원히 융합하고 일체화하는 일이 신심이다. 중요한 점은 그것을 가능케 하는 강성한 신심을 지속하는 일이다.
대성인은 “우리도 그 수(數)에 들어가서 유희하고 즐기게 될 것은 벌써 다가왔도다. 신심이 약해서는 이와 같이 가장 좋은 곳에는 갈 수 없다. 갈 수 없느니라.”(어서 1387쪽) 하고 말씀하셨다.
일생성불의 ‘사(死)’는 모든 부처와 보살들 속으로 들어가 함께 유희하고 즐기는 일이다. 그러나 신심이 약하면 이처럼 굉장한 불계의 엄연한 차원의 세계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러므로 불퇴전의 강성한 신심을 완수해야 한다는 참으로 엄한 가르침이다.
이와 관련된 도다 선생님의 지도를 소개한다. 1951년 초신자(初信者)를 중심으로 한 합동좌담회에서 하신 말씀이다.
“산으로 따지면 가장 높은 산의 봉우리가 성불이요 최고의 공덕이다. 성불은 영원한 생명을 감득(感得)하는 일이고, 언제 어떤 때라도 절대적으로 행복한 상태이고, 성불은 말로 표현할 수 없기 때문에 죽을 때까지 물심양면으로 가득 찬 상태가 그 증거가 된다.
초신의 공덕은 산에 오르는 일이고, 성불은 그보다 더 높은 산에 오르는 일이고 이것은 세법(世法)의 공덕을 얻는 일이 아니다.” 즉 성불이라는 ‘묘각(妙覺)의 고산(高山)’에 오르는 일이 신심의 목적이다. 초신의 공덕은 그 앞에 있는 낮은 산이다.
선생님은 또 “낮은 산에서 가장 높은 산으로 오르는 중간에는 반드시 골짜기가 있는데 여러분은 이 골짜기에서 헤맨다.”고 말씀하셨다. 즉 ‘초신의 공덕 다음에는 삼장사마(三障四魔)와 숙명전환(宿命轉換)이라는 골짜기를 지나가야 한다. 그 골짜기 건너편에 높은 산이 있다. 그런데 이 골짜기에서 의심을 일으키고 만다.’는 뜻이다.
이어서 “이는 귀자모신(鬼子母神)과 십나찰(十羅刹) 그리고 마왕(魔王)에 따른 시련인데 초신의 사람은 이에 놀라서 지고 만다. 이 제육천마왕(第六天魔王)의 시련이라는 벌에 지면 안 된다. 골짜기로 떨어졌을 때, 이래서야 되겠느냐며 가장 높은 산에 오르기 위해 골짜기에 한번 떨어졌다고 믿고, 작은 산에서 거대한 산으로 오르는 골짜기라고 아주 잘 생각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아무쪼록 이 지도를 깊이 음미하여 성불이라는 산을 물러서지 않고 오르시라고 부탁드린다.
어쨌든 다투어 일어나는 장마에 굴복하여 퇴전하는 길을 걷는 일만큼은 없도록 엄히 경계해야 한다.
니치렌 대성인이 <십왕찬탄초(十王讃歎抄)>에서 말씀하셨다.
“타는 불은 끌 수 있지만, 악업(惡業)으로 타는 불은 끌 수 없다.”(쇼와 신정<新定> 《니치렌 대성인 어서》) 즉 ‘타는 불은 끌 수 있지만, 악업으로 몸을 태우는 업화(業火)는 결코 끌 수 없다.’는 준엄한 가르침이다.
이어서 대성인은 이렇게도 말씀하셨다.
“이와 같은 중고(重苦)를 받는 일은 오직 당신의 마음 하나로 일어난다.”(쇼와 신정<新定> 《니치렌 대성인 어서》)
지옥 같은 헤아릴 수 없는 괴로움도 우리가 지닌 ‘생명’ 즉 ‘마음’의 기본자세 여하에 따라 일어난다는, 참으로 깊은 생명의 법리(法理)를 바탕으로 한 지도이다.
즉 신심에서는 선악(善惡)이 모두 ‘마음’으로 결정된다. 어본존을 찬탄하고 불도수행에 힘쓰려는 마음은 성불로 가는 길을 연다. 반대로 정법을 비방하고 화합승(和合僧)을 부수는 마음은 무간지옥으로 가는 문을 연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만이 중요하니라.”(어서 1192쪽)라는 금언을 가슴 깊이 배독하며 광포를 위한 왕도(王道)를 더욱 전진했으면 한다.
아쓰하라법난에서 보는 반역의 구도(構圖)
이쯤에서 신심하지 않는 가족이나 친척이 있을 경우 어떻게 해야 하는지 조금 말씀드리겠다. 이런 경우에는 친척 중에 신심을 반대하는 사람이 있다든지 또는 부모나 형제 등 가족 중에서 누군가가 퇴전하는 경우 등 여러가지 상황이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여러분 중에도 이런 경우에 맞닥뜨려 고민하며 힘들어하는 분이 있을지도 모른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이는 모두 각자 개인이 책임져야 할 문제이다.
이를테면 형이 퇴전했을 경우, 아우는 아우로서 진심을 담아 충고한다면 훌륭히 책임을 다한 것이다. 나머지는 본인의 문제이다. 모든 문제가 이에 준한다고 해도 좋다.
니치렌 대성인 재세 당시 일어난 아쓰하라법난은 여러분도 잘 아시리라고 생각한다. 아쓰하라 삼열사인 진시로, 야고로, 야로쿠로 삼형제에게는 야토지입도라는 맏형이 있었다. 이 형은 류센사(瀧泉寺) 주지대리인 교치(行智)라는 악명 높은 승려의 꾐에 빠져 반법화당(反法華黨)의 무리가 되어 정법(正法)에 적대한 인물이다. 하필이면 야토지는 피를 나눈 아우들의 죄를 날조해 막부에 일러바친 고소인이었다. 그 때문에 진시로를 비롯해 아쓰하라의 농민 스무명이 가마쿠라로 연행되어 아우 세명이 참수를 당하는 대법난으로 이어졌다.
니치코 상인(日享上人)은 《아쓰하라법난사》(주고쿠보 편집실)에서 형인 야토지를 이렇게 평하셨다. “욕심이 많고 간사한 꾀를 부리는 이상한 인간으로서 마을의 중개인(담판 등에 개입하는 인물)이다.”
‘욕심이 많고 간사한 꾀를 부리는 이상한 인간’이라는 표현은 참으로 반역자의 본질을 예리하게 간파한 말이다.
어떠한 세상에도 선량한 사람들을 악연(惡緣)에 끌어들여 분동시키고 교묘한 말로 조종하는 무리가 있는 법이다. 학회에도 온갖 책모를 부려 화합승의 단체를 파괴하려던 무리가 있었다. 이것도 크든 작든 모두 같은 방정식이었다.
어쨌든 야토지는 이러한 사람이기 때문에 순수하게 홍교에 힘쓰고 진지하게 신심을 관철하는 진시로를 비롯한 아우들과 타고난 기질이 맞을 리 없는 것도 당연하다. 신심의 생명선은 바로 진지함이다. 진지한 사람이 아니면 신심을 끝까지 이어갈 수 없다. 이것은 어떤 일이든 마찬가지 도리다.
야토지의 비방은 진지하게 신심하는 진시로 등 아우들에 대한 질투에서 비롯되었다고 여겨진다. 정법을 믿고 홍교에 힘쓰는 아우들이 순수하면 순수할수록 야토지는 집안을 이끄는 맏형이라는 권위로 본디 믿고 있던 염불신앙으로 되돌리려고 기를 쓰고 비방하며 중상했다. 그러나 불법의 도리에 따라 차근차근 형을 타이르는 아우들에게는 마주 보며 논쟁한들 당해낼 수 없었다. 그는 그런 분함과 질투 때문에 어떻게든 아우들을 퇴전시키고자 획책하고 그럴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더 나아가 야토지가 꾸미는 간계의 배후인물로 교치라는 파계승이 있었다. 대성인은 이 점을 <호키전등답서(伯耆殿等答書)>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다이신보(大進房), 야토지입도(彌藤次入道) 등이 행패한 일에 이르러서는, 근원(根源)은 교치(行智)의 권고에 의해서 살해(殺害)·인상(刃傷)을 한 데 있으며”(어서 1456쪽)
즉 ‘(삼열사를 비롯해 법화신도에 대한) 다이신보와 야토지입도를 비롯한 무리가 벌인 폭행과 살해는 교치의 권유에 따른 것이다. 야토지가 광분한 까닭도 그 근원은 교치였다.’고 엄하게 간파하셨다.
니치코 상인은 배후에서 조종하는 교치의 획책에 관해 “야토지입도가 난폭한 까닭도 술로 죽여 같은 편을 만들어서 법화신자를 학대하도록 만들었다.”(《아쓰하라법난사》)고 표현하셨다.
‘술로 죽인다’ 다시 말해 퇴전자나 반역자의 무리로 끌어들이는 방정식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는다.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요약하면 술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금전욕과 명예욕에 꼬드김을 당해 정상적인 마음을 죽이고 반역과 퇴전의 길로 달리는 구도이다.
인생을 승리와 영관(榮冠)으로 장식하라
그리고 니치렌 대성인은 난조도키미쓰에게 보낸 편지에서 말씀하셨다.
“명심(銘心)하고 명심하여 자타(自他)의 생사(生死)는 알 수 없지만, 임종의 시각(時刻), 생사(生死)의 중간에 니치렌이 반드시 마중하러 나갈 것이외다.”(어서 1558쪽)
즉 “자신도 다른 사람도 언제 죽을지 모르겠지만, 임종할 경우 ‘생’에서 ‘사’로 이동하는 순간에 대성인이 반드시 마중 나갈 것이다.” 하고 신심 있는 사람의 성불을 약속하셨다.
또 대성인은 아쓰하라법난이 일어났을 때 집필한 <성인어난사(聖人御難事)>에서도 이렇게 말씀하셨다.
“우리들은 현재는 이 대난(大難)을 당할지라도 후생(後生)은 성불하리라. 비유컨대 뜸과 같으니 당시는 아플지라도 후에는 약(藥)이 될 것이니 아프면서도 아프지 않느니라.”(어서 1190쪽)
즉 ‘우리는 현재는 불법 때문에 커다란 난을 만나고 있지만 후생은 반드시 부처가 된다. 그것은 이를테면 뜸과 같은 것으로 그때는 뜨겁고 아프지만, 나중에는 약이 되기 때문에 아파도 사실은 아프지 않다.’는 말씀이시다.
또 아쓰하라 삼열사가 처형(1279년 10월 15일)되고 아홉달쯤 지나 아직은 여러가지로 고난을 겪고 있는 난조도키미쓰를 이렇게 격려하셨다.
“잠시의 괴로움이 있다 해도 드디어는 안락(安樂)하게 되리라. 국왕(國王)의 일인(一人)의 태자(太子)와 같으니 어찌하여 왕위(王位)에 오르지 않겠는가 하고 생각하시라.”(어서 1565쪽)
‘얼마 동안은 괴로운 일이 있을지라도 미래는 반드시 즐거움이 된다. 그것은 국왕의 오직 하나뿐인 태자가 반드시 왕위를 계승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법난이 일어났을 때에 분투하고 광선유포를 위해 힘쓴 도키미쓰가 어찌하여 성불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반드시 성불한다고 확신하고 나아가기 바란다.’는 격려였다.
도다 선생님이 서거하시기 전해(1957년)는 내게도 참으로 다사다난한 시기였다. 그럴 때에 도다 선생님이 “사람의 생명이기에 이기기도 하고 지기도 하지만, 마지막 승리는 부처에게 기원하라.”라는 시를 주셨다.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을 다한 다음에 ‘최후의 승리’는 어본존에게 기원하는 수밖에 없다.
대성인의 문하로서 또 불자(佛子)로서 광포와 신심에 힘쓰는 우리는 반드시 성불하고,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있다. 그러므로 신심으로 이 인생의 마지막 장을 빛나는 승리와 영관으로 장식했으면 한다.
다음은 신심의 회합이 지닌 중요성을 말씀드리겠다.
대성인이 사도로 유배 가는 도중, 에치고지방(니이가타현) 데라도마리에서 도키조닌에게 보낸 <데라도마리어서(寺泊御書)> 첫 머리에 이렇게 말씀하셨다.
“신심이 있는 제인(諸人)은 한자리에 모여서 청문(聽聞)하시라.”(어서 951쪽) 즉 ‘신심에 뜻있는 사람들은 한곳에 모여 이 글월의 법의(法義)를 청문하기 바란다.’는 말씀이시다.
또 <사도어서(佐渡御書)>에서도 “이 서신(書信)을 뜻있는 사람들은 함께 모여서 보시고 사색(思索)하시어 마음을 위로(慰勞)하시라.”(어서 961쪽)라고 말씀하셨다. 즉 ‘뜻있는 사람들은 모여서 이 편지를 읽고 잘 이해하며 마음을 위로하기 바란다.’는 말씀이시다.
그리고 사도에 계신 대성인 슬하로 찾아온 시조깅고를 통해 시조깅고의 부인에게 보낸 편지로 유명한 <동생동명어서(同生同名御書)>에서도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 글월은 도시로전(藤四郎殿)의 부인(夫人)과 항시 자리를 같이하여 보도록 하시라.”(어서 1114쪽) 즉 ‘이 글월은 도시로전의 부인과 항상 한곳에 모여 보시기 바란다.’고 가르치셨다.
이처럼 여러 글월에서 ‘동지와 함께 모여 어서를 배독하고 서로 법의를 배우며 모두 함께 격려하기 바란다.’고 이체동심(異體同心)으로 전진하는 일의 중요성을 가르치셨다.
어쨌든 나는 신심 있는 동지나 광포라는 목적을 위해 사는 조직에서 벗어나 쓸쓸하게 자기 혼자만 좋다고 믿으면서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인생을 살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신심의 기준이 없어지는 일은 두려운 일이다.
거점과 이웃을 세심하게 배려
화제가 바뀌지만, 대성인 재세 당시 스루가지방의 후지군에는 이 지역의 홍교를 중심적으로 추진한 다카하시로쿠로효에입도라는 분이 있었다. 그의 아내는 닛코 상인의 숙모이고, 그런 인연으로 닛코 상인에게 화도(化導)받아 일찍이 입신하여 강성하게 신심하고 있었다.
또 다카하시로쿠로효에입도는 집을 후지지방의 홍교를 추진하는 거점으로 제공했다. 1278년 3월, 닛코 상인이 헤이노사에몬노조의 박해로 절 내에서 쫓겨난 ‘시주쿠인(四十九院)법난’ 때도 그 뒤로 이어진 ‘아쓰하라법난’ 때도 후지방면에서 활동하는 대성인 문하를 외호하는 거점이 되기도 했다. 참으로 지역광포를 책임지고 가장 앞장선 집안이었다.
대성인의 편지 가운데 “그 지방의 불법은 귀하에게 맡기겠소.”(어서 1467쪽) 하는 구절이 있다. 이 편지는 지금 조각조각 나누어졌기 때문에 언제 누구에게 보낸 편지인지는 단정할 수 없다. 다만 앞뒤 내용으로 보아, 또 “그 지방의 불법은 귀하에게 맡기겠소.” 하신 말씀에서 신심에서도 사회에서도 힘이 있는 분이었다고 짐작할 수 있고, 다카하시로쿠로효에입도가 아닐까 추측할 수 있다.
왜냐하면 다카하시로쿠로효에입도는 대성인이 후지 지방 일대에서 불법을 유포할 사명과 책임을 ‘맡기겠소’ 하고 말씀하실 정도로 신뢰도 두텁고 그 지역 공로자임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학회에서는 각 부회장을 비롯해 현과 권의 간부 여러분이 각자 맡은 지역의 모든 일을 책임지고, 광선유포운동도 한층 더 다각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이것도 어서 말씀 그대로의 방정식이라고 생각하면 감사하겠다.
지금으로 말하면 지역광포의 커다란 공로자라고 할 수 있는 다카하시로쿠로효에입도가 병에 걸린다. 게다가 중병이라는 보고에 대성인이 매우 걱정하며 <다카하시입도전답서(高橋入道殿答書)>를 집필하셨다.
대성인은 사도유배에서 사면되고 나서 가마쿠라로 되돌아가셨다. 그리고 헤이노사에몬노조를 만나 세번째 국주간효(國主諫曉)를 하신 다음 고사(故事)에 따라 미노부산으로 들어가셨다. 이 편지는 그곳에서 집필하신 듯하다.
“가마쿠라에 있어서는 안 되겠기에, 발길 따라 나와버렸는데 지나는 길이기에, 설령 여러분은 꺼려하실지라도 다시 한번은 만나 뵈어야 하겠다고 몇번이나 생각해보았으나 마음속으로만 괴로워하다가 지나쳐버렸나이다. 그 까닭은 스루가란 지방은 고전(守殿)의 소령(所領)이며, 특히 후지(富士) 같은 곳은 미망인님의 집안 사람들이 많아, 고사이묘사전(故最明寺殿) 고쿠라쿠사전(極樂寺殿)의 원수라고 분노하시니 듣게 되신다면 여러분께 폐단이 되리라고 생각하는 마음뿐이었소이다.”(어서 1461쪽)
- “다카하시로쿠로효에입도의 집은 가마쿠라에서 미노부로 가는 길에 있기 때문에 여러분에게 폐가 되더라도 무거운 병에 걸린 다카하시로쿠로효에입도를 지금 한번 뵙고 싶다고 셀 수 없을 만큼 생각했건만, 마음속으로 싸우다 뵙지 못하고 지나쳐 버리고 말았습니다. 스루가지방은 사가미노가미전(가마쿠라막부의 싯켄인 호조도키무네)이 직접 관할하는 영지입니다. 특히 후지지방 등에서는 고(故) 사이묘사전(호조도키요리)이나 고쿠라쿠사전(호조시게도키) 등의 미망인과 인연이 있는 사람들이 많이 삽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람들은 니치렌을 호조도키요리나 호조시게도키의 적이라고 분개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만일 내가 다카하시전 댁에 들렀다는 말을 들으면 근거 없는 이유를 붙여 다카하시입도 집안을 박해하고 탄압할지도 모릅니다. 여러분에게 폐를 끼칠 것이 뻔하므로 들르지 않았습니다.” 하는 말씀이다.
즉 대성인은 무엇보다 상대방의 처지를 생각하여 일부러 방문하지 않으셨다. 제자문하들이 잘못되지 않도록 이리저리 고려하는 이러한 뜨거운 심정을 우리는 잘 헤아려야 한다.
우리는 광선유포를 위해 자신의 집을 개인회관으로 또 그 지역의 거점으로 제공하는 분에게도 이와 같이 자상한 정신으로 배려해야 한다. 이를테면 밤에 회합을 마치고 난 다음에 길에서 큰 소리로 이야기하거나, 담배꽁초를 아무 데나 버리거나, 한꺼번에 자동차 시동을 걸어 이웃의 빈축을 사거나, 그 댁에 폐를 끼치는 일이 있거나 하면 결코 안 된다. 또 특히 간부는 회합 장소를 제공한 집의 가족에게 진심으로 감사하며 최대로 지켜야 한다고 말씀드린다.
성불은 강성한 신심에
오늘은 노후문제부터 꺼냈으니 사후문제도 말하지 않으면 이야기가 끝나지 않는다(폭소). 그래서 ‘성불’에 관해 조금 말씀드리겠다(박수).
대성인이 아부쓰보에게 주신 어서에 “이미 생(生)을 받아서 나이 육순(六旬)에 이르니 노(老)도 또한 의심하지 않으며, 다만 남은 바는 병사(病死)의 이구(二句)일 뿐”(어서 1317쪽)이라는 글월이 있다.
즉 ‘니치렌도 태어나서 벌써 예순 살이 된다. 의심할 여지없이 노년기에 있다. 생로병사 중에 다만 남은 것은 병(病)과 사(死) 둘뿐’이라는 말씀이시다. 나는 이 글월을 배독할 때마다 생사의 실상을 달관하신 어본불의 경애에 크게 감동받는다.
그런데 니치칸 상인은 《임종용심초》에서 “타종방법(他宗謗法)의 행자(行者)는 설령 선상(善相)이 있을지라도 지옥에 떨어진다.”며 이렇게도 말씀하셨다.
“중정론(中正論) 팔 육십에 이르기를, 설령 정념칭명(正念稱名)하고 죽더라도 법화방법(法華謗法)의 대죄(大罪)가 있으므로 아비옥(阿鼻獄)에 들어가는 일은 의심할 바 없다고 운운. 내가 말하기를, 선종(禪宗)의 삼계(三階: 중국 삼계교의 시조 신행<信行>을 일컬음)는 현실로 목소리를 잃고 죽었으며, 진언(眞言)의 선무외(善無畏)는 살가죽이 검게 되었으며, 정토(淨土)의 선도(善導)는 전도광란(顚倒狂亂)했으며, 다른 종파의 조사(祖師) 이미 그와 같으니 말제(末弟)의 무리 그 뜻을 알아야 하며, 스승 은 바늘과 같고 제자단나는 실과 같나니, 그 사람이 명종(命終)하여 아비옥에 들어간다 함은 이것이니라 운운.”
즉 정법을 비방하는 자는 그 조사(祖師)가 아비옥에 들어가 있으므로 비록 임종의 상이 좋게 보여도 분명히 지옥에 떨어지고 만다는 말씀이시다.
그리고 니치칸 상인은 “법화본문(法華本門)의 행자는 선상(善相)이 아닐지라도 성불은 의심할 바 없다.”고 말씀하셨다. 즉 어본불 니치렌 대성인의 문하로서 불법을 홍통하는 사람들은 비록 임종의 상이 좋지 않을지라도 성불한다는 점은 의심할 바 없다고 잘라 말씀하셨다. 기나긴 광포의 도상에는 틀림없이 교통사고 등 뜻밖의 사고나 병 등으로 돌아가신 분도 있다. 그러나 니치칸 상인은 신심이 있는 사람은 성불하는 데 의심이 없다고 단언하셨다. 그러므로 한평생 강성하게 신심하는 일이 중요하다. ‘신심의 마음이 중요하니라.’이다. 아무리 재산이나 사회적인 명성이나 지위가 있을지라도 그 점을 잊으면 성불할 수 없다.
니치칸 상인은 1726년 3월, 에도에서 포교를 마치고 다이세키사(大石寺)로 되돌아가셨다. 그 뒤로 왠지 모르게 건강이 좋지 않아 하루하루 쇠약해지셨다.
같은 해 5월 26일, 닛쇼 상인(日詳上人)에게 법등(法燈)을 부촉(咐囑)하고 뒷일을 모두 맡기셨다. 6월에 들어와서는 하루하루 더욱 쇠약해지셨지만 병의 고통은 전혀 없었다.
니치칸 상인은 자신의 병을 닛쇼 상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당산(當山: 다이세키사)은 지금 해가 지날수록 번영하고 관해(觀解: 어본존을 향해 제목을 부르는 일과 대성인의 가르침을 배우는 일)가 배증하고 있다. 참으로 삼류강적(三類强敵)이 다투어 일어날 것이다. 나는 이번 봄 이래로 재난(災難)을 몰아내는 일을 삼보(三寶)에게 세번 기원했다. 그러므로 불천(佛天)은 가엾은 생각을 베풀어 내 자신의 병마(病魔)로 법적(法敵)을 대신하셨다. 이야말로 ‘전중경수(轉重輕受)’이므로 결코 염려하면 안 된다.”(취지. 《후지종학요집》 제5권 ‘니치칸상인전’에 수록)
즉 ‘정법이 번영하고 있으므로 더욱 커다란 삼류강적이 일어날 터인데, 자신 한 사람이 병이라는 화를 입음으로써 커다란 난을 막고 본산도 모두 지키고 있다.’는 말씀이다. 덧붙여서 말하면 이해 4월에 이른바 가나자와법난의 발단이 일어났다.
니치칸 상인은 천화(遷化)하기 이틀 전에 법의(法衣)를 입고 가마를 탄 채 작별을 고하려 침소에서 나오셨다.
먼저 본당(本堂)에 참배하고 독경(讀經)과 창제(唱題)를 한 다음 대성인의 묘소를 참배하셨다. 그리고 은거중인 니치유 상인(제25세)과 학두(學頭) 숙소에 있는 닛쇼 상인의 처소에 들러 가마 안에서 공손하게 작별을 고했다고 한다.
니치칸 상인은 그 뒤로 삼문(三門) 앞에서 스승 니치에이 상인(제24세)의 여동생에게도 작별을 고하고, 문 앞의 거리를 지나 다이보(大坊)로 돌아오셨다. 길가에는 사람들이 엎드려 작별을 애석하게 여겼다고 한다.
그리고 돌아오자마자 관을 짜는 목수에게 서둘러 장례도구를 만들게 하고, 직접 붓을 들어 관 덮개에 시를 한수 쓰셨다.
8월 18일, 한밤중에 침상 앞에 대만다라를 걸게 한 다음 향과 꽃 그리고 등불을 바치고, 시중드는 사람에게 ‘나는 곧 죽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반드시 죽은 뒤에 주위에 알리라고 하고, 임종할 때는 한두 명만 남아서 시중들 것, 또 독경과 창제할 때 주의사항 등 자신의 임종을 상세히 지시하셨다.
그 뒤로 마지막 시 한 구절을 쓰고, 마치자마자 바로 좋아하는 메밀국수를 먹고 싶다고 하셨다. 시중드는 사람이 즉시 만들어 올리자 일곱 젓가락을 들고 활짝 웃으며 “아, 적광의 도읍은 즐거웠다.”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참으로 삼세의 생명을 널리 내다보는 경애였다.
그 뒤에 양치를 하고 대만다라를 향해 오직 한마음으로 합장하여 제목을 부르며 반안반구(半眼半口)의 모습으로 잠자듯 천화하셨다. 때는 1726년 8월 19일 진시(오전 8시), 예순둘이었다.
니치칸 상인의 이런 행동을 보면 과연 ‘죽음’이 ‘슬픔’인지 ‘기쁨’인지 생각해보게 된다. 세간에서 ‘죽음’은 슬프고 괴로운 일이다. 그러나 니치칸 상인은 삼세의 생명관에서 보면 묘법에 비춰진 ‘죽음’은 ‘기쁨’이 되기도 한다는 사실을 가르쳐주셨다고 짐작할 수 있다.
광포의 영광은 ‘한걸음 또 한걸음’에서
다음은 에도시대 후기에 본격적으로 일본지도를 완성한 이노 다다타카를 소개하겠다. 그는 쉰살에 은거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역학(曆學)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일본지도를 만들기 위해 쉰여섯살 때부터 17년 동안 전국을 측량하러 돌아다녔다. 그 한걸음 한걸음이 무려 사천만보에 이른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이노즈(伊能圖)’라고 일컫는 ‘대일본연해여지전도(大日本沿海與地全圖)’는 이노 다다타카가 죽고 3년이 지나 겨우 완성되었다. 참으로 피나는 노력으로 애써 만든 지도였다.
이노 다다타카의 생애와 업적에서 ‘인생은 50대, 60대부터’라는 점을 생각하게 된다. 또 한걸음 한걸음 자기 발로 땅을 힘껏 밟으며 걸어야 비로소 승리의 영관이 있다는 사실이다.
이곳 오미야광포의 승리도 우리 창가학회의 승리도 전 세계 광선유포의 승리도 이와 같은 방정식으로 한걸음 또 한걸음 걸어서 구축했다. 지금까지 이룬 광포의 발전은 이렇게 단단한 터전 위에 쌓아올렸기 때문에 강하다.
그것은 결코 단순히 텔레비전이나 출판물 그리고 강연 등으로 쌓아올린 것이 아니다. 한사람 한사람을 또 한집 한집을 구석구석 걸으며 법을 설하고 지도와 격려에 도전한 여러분의 존귀한 활동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렇게 ‘한걸음 또 한걸음’ 끈질긴 인내로 신심이라는 대도(大道)를 지금까지 걸어오신 여러 분에게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마지막으로 ‘상락(常樂)과 확신이 넘치는 오미야가 되기 바란다.’고 말씀드리고, 오늘 이야기를 모두 마치고자 한다.
(니시오미야문화회관)
선집 106~137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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