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고 오지 못한다는 말을
철없던 내 귀로 들었노라.
만수산(萬壽山)을 나서서
옛날에 갈라선 그 내 님도
오늘날 뵈올 수 있었으면.
나는 세상 모르고 살았노라,
고락(苦樂)에 겨운 입술로는
같은 말도 조금 더 영리(怜悧)하게
말하게도 지금은 되었건만.
오히려 세상 모르고 살았으면!
돌아서면 무심타는 말이
그 무슨 뜻인 줄을 알았스랴.
제석산(帝釋山) 붙는 불은 옛날에 갈라선 그 내 님의
무덤에 풀이라도 태웠으면!
*** 만수산(萬壽山) : 개성 송악산의 다른 이름. 중국 북경시 북서쪽 교외에 있는 산. 경치가 아름답기로 유명한 명승지로서 완소우산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태종 이방원의 시조에도 만수산이 등장한다. 소월의 고향 근처 산을 지칭한다는 견해도 있으나, 정주 근방의 산이름에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제석산(帝釋山) : 높이 218m의 잔구(殘丘)로서 정주평야에 있는 작은 산.
(해설)
이 시는 '옛날에 갈라선 그 내 님'(5행)을 추억하는 동시에, 다시 만날 수 없음을 안타까워하는 노래이다. 이 시의 님은 단순히 헤어진 님이 아니다. 소월시의 많은 경우가 그렇듯이, 이 시에 등장하는 님도 무덤 속의 저 세상 사람이다.
그러나 다른 소월시에서와는 달리, 이 시 속의 님은 좀 독특한 점이 있다. 즉 떠나기 직전에, '가고 오지 못한다'(1행) '돌아서면 모심타'(11행)는 말을 남겼던 것이다. 아무런 말도 없이 무시로 떠나버리던, 다른 시 속의 님의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이런 말은 나에 대한 최소한의 님의 배려로 읽힌다. 미리 정을 떼려는 의도가 숨어 있는 말이라고나 할까?
임과 함께 였을 때, '나는 세상 모르고 살았'다. 그만큼 임의 울타리는 든든하였다. 그리고 임이 떠난 지금, 화자인 나는 수많은 세상 고락(苦樂)을 경험했고, 그만큼 세상을 잘 알게 되고, 또 세상에 대해 영악해진 것이다. 하지만 임과 함께 하던 옛날이 그립다. 세상 모르고 살던 그 때가….
그런데, 3연의 마지막 두 행의 의미는 무엇일까? '제석산(帝釋山) 붙는 불은 옛날에 갈라선 그 내 님의 / 무덤에 풀이라도 태웠으면!'(13, 14행) 그 의미가 참으로 모호하다. 소월의 다른 시 <금잔디>에 '심심산천에 붙는 불'이라는 구절이 나온다. 이를 고려한다면, '제석산에 붙는 불'도 역시 황금빛 봄산의 봄빛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겠다. 이는 떠나기 직전 나에 대한 따뜻한 배려를 잊지 않았던 님에 대한 나의 배려인 것이다. 님의 무덤에 따스한 봄햇살이 비쳐들어 봄꽃이 만발하기를 바라는 화자의 마음이라고 보면 무리가 없을 것 같다. (해설 : 장노현)
***김소월 金素月 [1902.8.6~1934.12.24]***
(개요)
한국 서정시의 기념비적 작품인 《진달래꽃》으로 널리 알려진 시인.
본명 : 정식
활동분야 : 문학
출생지 : 평북 구성
주요작품 : 《진달래꽃》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금잔디》 《산유화》
(내용)
본명 정식(廷湜). 1902년 8월 6일 평안북도 구성(龜城)에서 출생하였다. 오산학교(五山學校) 중학부를 거쳐 배재고보(培材高普)를 졸업하고 도쿄상대[東京商大]에 입학하였으나 관동대진재(關東大震災)로 중퇴하고 귀국하였다. 당시 오산학교 교사였던 안서(岸曙) 김억(金億)의 지도와 영향 아래 시를 쓰기 시작하였으며, 1920년에 《낭인(浪人)의 봄》 《야(夜)의 우적(雨滴)》 《오과(午過)의 읍(泣)》 《그리워》 등을 《창조(創造)》지에 발표하여 문단에 데뷔하였다.
이어 《먼 후일(後日)》 《죽으면》 《허트러진 모래 동으로》 등을 《학생계(學生界)》 제1호(1920.7)에 발표하여 주목을 끌기 시작하였다. 배재고보에 편입한 1922년에 《금잔디》 《엄마야 누나야》 《닭은 꼬꾸요》 《바람의 봄》 《봄밤》 등을 《개벽(開闢)》지에 발표하였으며, 이어 같은 잡지 1922년 7월호에 떠나는 님을 진달래로 축복하는 한국 서정시의 기념비적 작품인 《진달래꽃》을 발표하여 크게 각광받았다.
그 후에도 계속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못잊어 생각이 나겠지요》 《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 등을 발표하였고, 이듬해인 1924년에는 《영대(靈臺)》지 3호에 인간과 자연을 같은 차원으로 보는 동양적인 사상이 깃들인 영원한 명시 《산유화(山有花)》를 비롯하여 《밭고랑》 《생(生)과 사(死)》 등을 차례로 발표하였다. 1925년에 그의 유일한 시집인 《진달래꽃》이 매문사(賣文社)에서 간행되었다.
그후 구성군(郡) 남시(南市)에서 동아일보사 지국을 경영하였으나 운영에 실패하였으며, 그 후 실의의 나날을 술로 달래는 생활을 하였다. 33세 되던 1934년 12월 23일 부인과 함께 취하도록 술을 마셨는데, 이튿날 음독자살한 모습으로 발견되었다. 불과 5, 6년 남짓한 짧은 문단생활 동안 그는 154 편의 시와 시론(詩論) 《시혼(詩魂)》을 남겼다.
평론가 조연현(趙演鉉)은 자신의 저서에서 “그 왕성한 창작적 의욕과 그 작품의 전통적 가치를 고려해 볼 때, 1920년대에 있어서 천재라는 이름으로 불릴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시인이었음을 알 수 있다”라고 지적하였다. 7·5조의 정형률을 많이 써서 한국의 전통적인 한(恨)을 노래한 시인이라고 평가받으며, 짙은 향토성을 전통적인 서정으로 노래한 그의 시는 오늘날까지도 계속 많은 독자를 확보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