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 음악의 맛을 알아 빠져들게 되면 필연코 다다를 수밖에 없는 고지가 있다. 바로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칸타타들. 많이 유실되고 200곡 남짓 남아있는데 특별히 사랑받는 곡이 몇몇 있지만 전체를 한 곡처럼 들어도 상관없이 다 좋다. 삶과 죽음의 파노라마. 영성의 갈망과 피조물의 고뇌. 거대한 합창의 물결과 작고 여린 독주악기의 섬세한 흐느낌. 칸타타 안에 음악의 모든 것이 다 들어있는 듯하다. 그중에 내게 아주 특별한 한 곡이 있다. BWV(바흐 작품번호) 106번 ‘악투스 트라지쿠스’다. 우리말로 ‘애도행사’라는 뜻인데 노랫말 첫 줄을 딴 정식 제목은 ‘하나님의 때가 최상의 때로다’이다.
추도곡으로 작곡, 진혼곡의 원조
20대에 생각하던 유치한 죽음의 인식은 50대가 되면서 많이 변모했다. 내가 콱 죽어버리면 이 가슴을 그토록 사무치게 만든 그녀가 얼마나 괴로울까 하는 것이 20대 시절이고 지금 떠올리는 죽음은 그저 무상, 공허, ‘nothing’ 같은 낱말들이다. 그런데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생각보다 별로 두렵지 않다는 것. 다만 시간차에 따른 순서의 문제라는 것. 그래서 신앙을 못 갖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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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은 목제 플루트와 비올라 다 감바의 이중주로 아주 느리고 구슬프게 시작된다. 곧이어 죽음을 ‘최상의 때’라고 외치는 합창, 4중창, 그리고 ‘우리가 죽을 수밖에 없음을 기억하도록 가르치사 우리로 하여금 지혜롭게 하소서’를 노래하는 테너 아리오소, ‘주변 일을 정리하라. 네가 죽고 살지 못하리라’라고 하는 베이스의 목소리, 다시 합창 등으로 이어진다.
사실 곡의 의미가 먼저 왔던 것은 아니다. 카를 리히터(위 사진)의 지휘로 그 많은 칸타타 한 곡 한 곡씩을 챙겨 듣는 와중에 별로 유명하지 않은 악투스 트라지쿠스가 발견됐다. 신경증적으로 예민한 도입부에서 점차 제어할 수 없는 물살처럼 번져 나가는 소리가 저릿저릿한 신체반응을 일으켰다. 그런데 죽음의 시간이라니! 그런 의미였다니! 그 내용은 마침내 내게 교회 찬송가도 백양사 목탁소리도 아닌 실존적 인생론으로 다가왔다. 곡의 마무리 대목이 이렇다. ‘평화롭고도 즐겁게 나는 저곳으로 떠나간다. 나의 마음과 넋은 확신에 차고 평온하며 고요하다. 죽음은 나의 잠이 되리라.’ 참으로 쿨하도다, 바흐여!
카를 리히터 지휘 음반이라야 제격
건방지게 말하건대 죽음 갖고 너무 호들갑스럽지 말자. 어떻게 살다가 결국 죽는다. 그냥 내린 쉬운 결론이 아니다. 일생 가장 가까웠던 세 친구 가운데 둘이 일찍 암으로 갔다. 슬퍼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단지 시간차 혹은 예고 없이 찾아든 카드의 패일뿐. 불쑥불쑥 죽고 싶던 충동도 사라졌다. 억지로 애쓸 필요가 없다. 죽을 때가 가장 좋은 때라고 바흐가 가르쳐 주지 않던가. 바흐 칸타타의 위력을 느껴본 계기가 있다.
지금은 사라진 워크맨 이어폰을 끼고 볼륨을 최고로 높인 채 거리로 나갔었다. 바삐 오가는 사람들과 차들과 컴컴한 콘크리트 건물들. 그 틈새에서 합창의 파도, 아리아의 애소, 통주저음의 속력을 온몸으로 느끼노라니 온 세상에 홀로 비현실 공간에 놓인 자기가 발견된다. 여기가 백양사 청류암이구나. 그리고 문득 암자의 고요가 일러준다. 어떠한 죽음도 잘못이거나 억울함이 아니라고. 죽음은 최상의 때라고.
‘애도행사’를 사랑한 이래 세상의 모든 지휘본을 다 구하고자 노력해 왔다. 꽤 많다. 하지만 이 곡은 오직 카를 리히터가 이끈 뮌헨바흐 오케스트라와 합창단 연주여야 제격 같다. 장쾌하고 당당하며 거침이 없다. 리히터도 그렇게 죽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