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영원한 사랑이란 없다.
사랑이란 통조림 바닥에 찍혀 있는 유통기한처럼 시작과 끝이 있다는, 영화 중경삼림의 대사는 거짓이 아니다.
격렬하던 사랑도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질되고, 처음의 멋진 그이도 종래에는 지겨운 그가 되어버린다.
유통기한을 넘긴 통조림에게 새로운 기회란 주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존재가치를 상실한 채, 쓰레기통에 처박힐 뿐이다.
기한을 넘긴 사랑도 그렇다. 종기를 넘은 사랑은 상대에게 지리멸렬과 지루함을 안겨다 줄 뿐. 그곳에 더이상 환상은 없다.
그렇기에 사랑함에 있어 연인들이 나누는 밀어- '함께 (영원히) 행복해지자'라는 말처럼 거짓인 것은 없다.
사람은 혼자 걷는 길의 고독함을 알고 있기에 '함께 행복해지자'란 주문을 걸 뿐, 영원한 행복은 함께 있어도 오지 않는다. (유통기한을 넘긴 사랑은 버림받아야 할 것이기에) 어쩌면 사랑이란 건, 제조년월일을 며칠 넘기지 않은 싱싱한 상태라는 시간선상에 존재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때의 사랑이란 만개한 꽃과도 같다.
만개한 꽃의 아름다움에 눈을 빼았긴- 아직 낙화의 고독을 알지 못하는 자는 스스로의 환상 속에서 영원한 사랑을 꿈꾼다.
그 단적인 예가 바로 2046의 차우이다.
2046의 차우에게 있어 수리첸과의 사랑은 영원하다.
그것은 그 사랑이 만개한 시점에서 잘려버린 것, 환멸과 부패의 유통기한을 넘기지 않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것은 사랑의 원형이 되어 버렸고, 그는 언제나 사랑의 원형을 맴돌며, 수리첸을 닮은 여인들과의 만남을 반복하며 이별한 사랑의 가장자리를 맴돈다.
그러나 해피투게더의 아휘는 다르다.
그는 사랑의 전 과정을 경험했다. 사랑의 달콤함을 알고, 또 그것의 부패함도 알고 있다.
그렇기에 아휘의 보영에 대한 사랑은 사랑의 원형으로 관념화되지 않고, 지나간 과거로 정리될 수 있었다.
(즉, 차우는 영원한 사랑이 존재한다는 2046을 벗어나지 못하지만, 아휘는 그렇지 않다. 그는 2046을 꿈꾸지도 꿈꿀 필요성을 느끼지도 않는다. 그는 이미 과거로부터 자유롭다.)
그러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남아있는 보영에게 있어 아휘는 그러하지 못했다.
사랑의 속도가 달랐기 때문이다.
아휘는 보영과의 관계에서 모든 사랑의 과정을 경험했지만, 보영은 그러하지 못했다. 보영에게 있어 아휘와의 사랑은 자신이 일방적으로 내던져 버린, 끝을 경험하지 못한 사랑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보영에게 있어 아휘와의 사랑은 지나간 과거의 것이 아니라 현재에도 계속되고 있는 진행형의 사랑이다.
두 영화- 2046과 해피투게더에서 왕가위가 말하는 것은 명확하다.
그것은 사랑이란 속도와 유통기한의 문제일 뿐이란 것.
유통기한을 지난 사랑 속에 영원이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결국 존재란 함께 있어도 행복해지지 않는다는 것.
사람은 본질적으로 혼자일 수 밖에 없다는 것.
p.s.
그러나 삶을 살아나가는 우리는 너무나 춥고. 배고프고. 또한 서글프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을 사랑이라 부르며, 연인을 향해 해피 투게더를 외치며...
오늘도 주문처럼 서로를 향해 '사랑해'란 말을 속삭인다.
사랑이 사랑이 아닐지라도. 존재가 함께일 수 없다고 해도.
함께 나누는 따스한 체온은 사람을 위로한다.
헐벗은 삶에 따스한 온기를 불어 넣어 준다.
공허에 불과할지라도 그것은 외로움을 지연시키고 상실을 은폐하고, 환상을 꿈꾸게 한다.
...거짓이면 어떠한가.
약간쯤 허황되면 또 어떠한가.
관념만큼, 어쩌면 그 이상으로 현실도 중요한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