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월 28일. 하루 전 월요일 밤에 잠 때를 놓친 나는 새벽 4시가 다 되어 잠을 잤었다.
10분 전 8시 휴대폰 알람 시간에 깨어 동생에게 오늘 계획대로 가냐고 물으니 간다고 말했다.
지난 밤 새 눈이 제법 내려 쌓였기 때문이었다.
가요무대를 좋아 하는 엄마는 그날 따라 노래가 시작 되자마자 잠을 자 새벽같이 일어나
아침 7시부터 동생에게 가자고 졸랐다 했다.
둘째 딸 집에 계시던 엄마는 일요일 막내 딸 집에 내려 와 계셨고 답답해서 바람을 쐬러 오신거였다.
막내도 원래 화요일 제주도로 4박 5일 떠나기로 했다가 성수기고 썩 내키지 않아 취소하고
수안보 온천을 가기로 했던 거였다.
날씨가 궂어 어차피 못 갔지만서도.
제부가 또 비용을 따로 주었으니 부담없이 떠나 갈 수 있었다.
출근 길에 미끄러운 길을 막네네 남한강이 훤히 내다보이는 아파트에 실어 주고 갔다.
우린 9시에 출발을 했다.
세종대교를 올라 탈 때 길이 미끄러워 지그재그를 했다.
이내 다리 위길은 길이 나 있었고 서여주를 빠져나온 길은 충주까지 중부 내륙 고속도로가 뻥 뚤려 있다.
김천 까지 가는 고속도로다.
제설이 완벽 하게 되있어 아무런 지장없이 1시간 10분을 달리니 충주 아이씨.
그리고 수안보를 찾아 들었다.
수안보 까지도 새 도로가 나 있었다.
수안보, 충주에서 2년을 살다 이천,여주로 이사 나온지도 97년도 일이니 13년이 그새 훌쩍 지나 있었다.
부산 울산 사이에 있는 덕계에서 2년을 살다 생애 처음 장만한 아파트를 팔고 직업상 이곳 저곳을
옮겨 다니던 덕에 충주까지 오게 된 거였다.
아파트 공사에 반장 일을 보고 있었으니.
처음엔 충주 역전에 빌라로 이사를 해 밤마다 떠나가는 기적 소리를 들으며 아련해 했었고
다음해 충주에서 제일 좋다는 럭키 아파트에서 또 1년을 살았지만
1주일에 광주에서 한번 집을 오가던 때에 난 꼼짝없이 아파트에 갇혀 큰애는 초등 2년,
딸애는 2살이었으니 내 생활이란 안 봐도 비디오, 그림이 그려 질 터였다.
앞집 조차 얼굴도 모르고 문을 닫고 살았고 아랫집 목사댁에선 애들이 씨끄럽다고 종종 주의를 주었다.
내 생각엔 그리 씨끄럽지도 않았는데 유별나게 굴었다.
올빼미 생활은 여전 했으니 새벽 3시 50분에 어김없이 들어 오는 신문을 읽고
매일 같이 넓은 방을 그 새벽에 걸레질을 했고.
가끔 문득 문득 뛰어 내리고 싶은 생각만 몇번 했었고 내 맘이 그렇다고 종종 토로 했었다.
어찌됬든 1년을 창살 없는 감옥에 살다 이천으로 떠나 갔다 .미련없이.
여름 저녁이면 충주댐으로 바람을 쐬러 가고 차를 처음으로 샀었기에 가까운 느티나무 괴자를 쓰는
괴산으로 드라이브를 하루가 멀다 하고 간 적도 있었다.
한번은 돌아 가신 아버지가 뒷 자석에 타고 계시다 6.25때 북한군을 잡던 무용담을 담담히 말씁 하셨지만
실상은 소름 돋는 일이었다. 내가 죽느냐, 네가 죽느냐.
아버지는 유공자로 공주 현충원에 잠들어 계신지도 10년이 되었다.
충주에 속한 수안보도 2년이 살도록 겨울에 한번 일하던 동생들과 빙어 튀김을 먹으러 갔을 뿐.
뜨거운 사우나를 안 좋아 하는 것은 둘 다 같았기에 목욕탕,온천은 당연히 안 다녔다.
10시 20분에 수안보 온천 관광지를 찾아 들어 밥을 먼저 먹어야 했다.
가까운 곳에 보기좋은 식당이 있었다. 그 식당도
'느티나무 집'
아침이라 된장찌개를 보고 들어갔기에 뜻뜻한 온돌 창가에 앉아 우리 식구만, 조카들 까지 여자만 다섯이었다.
산채비빔밥 2개와 된장찌개 2개를 시켜 밥상을 받으니 모든 음식이 다 맛 있었다.
우거지 된장국이 비빕밤에 딸려 나왔고 낙지와 무 말랭이 장아찌, 싸리 버섯볶음,
쥐눈이 콩자반이 버섯대와 신랑각시처럼 한살림 차려 한 접시에 나왔다.
콩나물, 봄동 무침, 김치까지 모두 흡족 했고 된장도 청양고추 맛이 살아 있어 매콤하고 칼칼햇다.
커피를 타러 가서는 음식이 모두 맛 있다고 사장님께 말씀드리니 계산 할 때 온천 팁을 알려 주었고
우리는 원래 파크 온천을 갈려 했었는데 한화 콘도 온천이 새로 지어 깨끗하다며
반 값이 할인 되는 티켓 까지 그것도 파크호텔 반액 할인 표까지 덤으로 주셨다.
우리 다섯명 할인 금액이 21,000원이었다. 원래 입욕료가 성인은 12,000원 애들은 6,000원이다.
밥값으로 24,000원을 냈는데. 거저 밥을 얻어 먹은 일이 되었다,
기분좋게 한화콘도를 찾아 3층에 야외동 온천이 있었다.
오빠가 다니는 한화 계열이라 오빠 생각이 한번 더 생각났고 오기 전날 밝은 목소리로 안부를 물어 왔었다.
18 분 동안 미주알 고주알 동생들, 엄마 얘기를 하고 나는 6개월 동안 죽고만 싶던 심한 우울증을 앓았다면
오빠는 두문불출, 사람 만나기 싫어 하는, 그렇다고 결코 가볍지 않은 마음의 병을 앓고 일어섰기에.
누구나 한번쯤 고비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안락에 사람이 죽고 환란에 사람이 산다 했다.
40도 온천탕이 내겐 뜨거웠다. 다른 사람들은 42도 더 뜨거운 탕에 들어갔고,
그리 넓지 않았고 아담했다.
우리집에서 10분 거리에도 온천이 있어 가까운 원주사람들도 많이 오고 노천탕이 있으며 찜질방까지 있긴 하다.
요번은 온천겸 여행겸 1박 2일은 내게 천재일우 같은 기회이기에.
53도 알칼리수 수안보 온천은 왕의 온천으로 유명했었다.
조선시대 임금이 온천하러 행차하셨던 수안보.
목욕이 얼추 끝날즈음 노천탕으로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아늑한 노천탕은 뜨거웠다.
처음엔 일본 원숭이 처럼 온천을 하다 돌 의자에 허리를 기대고 꼿꼿이 등을 펴고 다리를 꼬고 앉으니
난 이내 황후가 된 기분이었다. 호사스럽고 잠시나마 나의 격을 업그레이드 시킨 시간.
눈발이 점점 굵어졌으며 바람까지 점점 세졌다.
눈보라 치며 나무가 몸부림 치는 광경을 베토벤이 보았다면 작곡을 했을테고
재주없는 나는 그저 감상만 할 뿐이었다.
지압으로 깔아 논 빨간 돌맹이들은 단풍잎이 떨어져 있는 것 같았으며
위쪽엔 목조 지붕을 얹은 스파가 있어 배 한번 등 한번 지압을 했다.
물살은 세서 맞은 편 동생에게 고고씽 할 뻔 했지만 엄살 떨 순 없는 일.
'스탠바이 미' 노래를 들으며 20분 정도 즐기다 실내로 머리를 감으려 샤워대로 갔다.
머리를 감고 얼굴을 박박 문질러 그동안의 눈물 자욱을 깨끗이 지워 버렸다.
샴푸물과 떠내려가는 어제의 흔적들.
다시는 내게 돌아 오지 않을테지.
1시간 남짓 온천을 끝내고 옷을 입고 밖을 나가니 눈이 어찌나 내리던지 이내 눈사람이 될 지경이었다.
차문을 여니 눈들이 먼저 자리에 냉큼 올라 탔다.
콘도 로비에 있는 산같은 곰 인형들과 일부러 차를 세워 사진을 찍고.
눈이 이렇게 펄펄 내리면 엄마와 난 똑 같은 추억, 아니 기억이 있다.
겨울이면 설악산 입구 물치 덕장에서 명태 떼기를 했던 일이다.
나는 코를 꿰고. 저번에 '령을 넘은 명태' 시에서도 썼지만 하루종일 눈이 지금처럼 내리던 날.
낟가리에 들어 앉아 수 없는 명태 코를 뀄었으니 어찌 잊어 버리겠는가.
그때 얼은 발가락은 10분만 차가운 밖이라면 이내 얼음장으로 변해 버린다.
누가 스키장에 데리고 간다해도 방에서만 놀아야 할 판이다.
다 차갑게 춥게 지나 온 어린 시절 나의 일부이기에 따뜻히 추억 하는 것이다.
농협에서 군것질 장을 봐서 눈 오는 수안보를 빠져 나가기로 했다.
모텔보담 난 황토방 같은 곳에서 자고 싶었기에.
내가 아는 충주 댐으로 차를 달리게 했다.
멀리서 높은 언덕 파르테논 신전 같이 내가 살던 아파트가 보였고 기억을 더듬어 길을 잘 찾아 들었다.
안림동 엘지 아파트에 반장으로 있던 시간을 거슬러 댐으로 올라 갔다.
이내 마즈막재를 고비로 충주호를 옆에 끼고 내리막 길 뿐이라 내 다리에 자연히 힘이 들어 갔다.
거진 다 내려 갔을 때 왼편으로 계명산 휴양림 방갈로가 보였다.
거저 예전에 지나쳤었고 내 기억엔 방이 없었는데 산 위로 차를 빠르게 올라 챘다.
관리실에 들어가니 날이 나빠 방이 몇개 남아 있었다.
충주호가 훤히 창문으로 내려다 보이는 3만원 짜리 전망 좋은 자작나무 방을 큰 조카가 보더니
방이 좁아 6만원 짜리 해당화 방을 보자 했다.
아무렴 아빠가 미국과 대만으로 붕붕 날아 돈을 잘 벌고 있으니.
돌계단을 밟고 올라간 방은 대박이었다.
다락방이 있어 애들이 무척이나 좋아 했다. 물론 나도 다락방은 처음이라 애들처럼 좋았고.
어른들은 판넬 전기보일러를 틀고 잠시 골방에서 쉬어야 했다.
이불이 칙칙해 그게 아쉬웠다.
한숨 쉬고 어둡기전에 밥을 먹으러 도로 마즈막재를 넘어 내려 갔다.
예전 죄인들이 넘었던 마지막 고개라 했다.
식당들이 즐비 했고 '늘해랑' 이란 고깃집이 예쁘게 조명 장식을 하고 우리를 반겼다.
큰조카는 아침에 밥을 먹을 때 쿨쿨 자는 바람에 굶었고 입이 짧은 탓에 햄버거 외에
나처럼 돼지갈비만 좋아해서 조카에게 맞혔야 했다.
역시 반찬이 맜있었고 고기가 좋았다.
부드럽기까지 한 게장과 콕 쏘는 해파리 냉채 .파릇한 전이 보기 좋았다.
앙증맞은 된장 뚝배기하며.
처음부터 끝까지 알바생이 고기를 구워 줬으며 반찬도 한번씩 더 갖다 주었기에
동생이 팁으로 배추 색으로 한장을 주었다. 엄마는 오천원만 주라 성화였지만.
나도 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으니.
작년 베트남 가서 첫 한국식당에 가서 저녁을 먹었는데 작고 왜소한 아가씨들이 안쓰러워
나올 때 맘에 드는 아가씨에게 10불을 쥐어 주었었다.
공항에서 1불짜릴 환전 안한 탓도 있지만 그래도 10불을 주었을 거다.
바쁜 관계로 인사만 하고 이내 식당으로 몸을 감춘 아가씨는 일 끝내고 10불을 봤을 때 한번 쯤 행복 했을테니까.
우리들 친구 2명도 팁을 남발했었다. 10불. 20불.젊은 남자에게 맛사지를 받거나 가이드에게.
저녁을 배불리 먹고 따뜻한 방에 들어와 티비를 보며 뒹굴었다.
저녁 9시 뉴스 조금 보고 엄마와 동생은 골방으로 잠을 자러 들어가고.
조카들은 '매리는 외박중' 마지막 회를 보는 동안 난 누워서 밖을 내다 보거나 머리맡에 있는
작은 귤과 팥 앙금이 있는 작은 경주빵과 맛동산을 땅콩이 많이 붙어 있는 것 부터 몇 개 주워 먹었다.
집에서 두번 전화가 왔었고 나 또한 일정을 두번 전화를 넣어 주었다.
테라스엔 눈이 반쯤 하얀 포말 파도 같이 부서져 있었으며 여름밤 모르는 사람들이 앉아 오순도순
얘기 꽃을 피웠을 평상위엔 흰눈이 차가운 미리내로 내려와 있었다.
우리들 얘기는 바람을 타고 멀리 멀리 충주호 너머 날아갔다.
누워서 천정에 배 같은 하얀등 서너개,샹들리에 떼불알을 보거나
밖엔 휴양림 붉은 가로등, 선 불알이 아름답게,
멀리 충주댐 길 가로등도 황홀하게 불을 밝혔다.
눈을 머리에 이고 바람에 춤추는 나무 두 그루.
강심장까지 다 본 조카들은 잠을 자고 나는 마지막 까지 티비를 보고 잠을 청했다.
발 밑이 뜨끈 뜨끈 .오늘 하루는 후회 한점 없이 완벽한 여행이었다.
방갈로 밑으로 펼쳐진 충주호 깊은 물 속을 잠시 가라 앉았다가 이내 떠 올랐다.
새로 떠 오르는 밝은 해를 맞으며 내일 아침 10시에 충주에서 바로 동서울로
건대 병원 옆 무스꾸스에서 여고 친구 모임을 가야 했으므로.
다음날 아침 7시 난 잘 자고 일어났는데 보일러를 너무 세게 튼 죄로 새벽에 누전이 되어 차단기가
내려 가는 바람에 동생이 벌벌 떨면서 방에서 추워 혼났다며 나왔다.
관리 사무실에 전화를 해서 손 보았지만 이내 차단기가 떨어져 밑에 예약이 취소 된
8만원 짜리 무궁화 방에서 2시간 아침을 쉬었다.
나무 냄새가 물씬 코를 간질여 왔다.
무궁화 선배님도 생각 났고.
올라가는 고속버스에서 눈을 붙이고 친구들은 석달만에 만나는 거였다.
구리에 살다 청평으로 이사 간 집들이도 못 갔고 남양주 진접에 입주한 친구 집들이도 못 갔으니.
나의 가을은 격랑, 아니 광풍의 두 달을 정신 없이 보내야 했다.
초밥 위주의 무스꾸스는 사람들로 꽉 차 있었고 의자에서 기다리는 사람들.
총무를 맡은 친구도 한달 전에 예약을 했다니.
1인분에 25,000원 꼴이었고 서너 번 갔다 와야 다 먹을 수 있을 만큼 가지수가 많았다.
구석에 우리들은 앉아 밀린 얘기를 했으며 에머랄드빛의 잔에 물을 마셨다.
오후 2시 반까지 점심시간이라 쫒겨나다시피 일어섰고 아쉬워
건대병원 로비에서 한 30분 얘기 꽃을 더 피우다 헤어졌다.
뚝섬유원지 사는 친구는 대구에 계시던 시어머니가 사우나를 마치고 락커앞에서 뇌출혈로
지난 15일 아주 춥던날 70세에 돌아 가셨으며 저녁엔 부부 동반으로 명동으로 모임이 있으며
수락산에 사는 친구도 부부 동반으로 지인의 자제가 에술의전당에서 발표회가 있어
집에 가서 옷을 갈아 입고 간다 했다.
그때도 까만 토끼털이 달려 있는 외투를 입고 왔는데 다른 드레스코드는 무엇인지
엔예인 같은 년말을 모두 보내고 있었다.
우리처럼 부부동반 한번 없는 집도 물론 있을테고 또 외롭게 홀로 계신
할머니 할아버지도 많음을 나는 알고 있다.
우리들의 얘기꽃은 병원의 아픈 사람들에게 꽃다발이 되어 줄 것이다.
아름다운 얘기와 아름다운 우리들이기에.
여주에 떨어지니 퇴근하는 시간이라 같이 집에 들어 갔다.
어제 아침 8시에 출발 해 다음 날 저녁 6시 반에 집에 들어 간 이틀이 두달처럼 길게 느껴졌다.
이틀만에 많은 추억과 친구들을 만났으니.
좋은 일이 오려고 힘든 일이 지나 간 것인지.
또 둘이 앉아 하루 두시간 남짓 고스톱을 치기 시작했다.
본전치기. 허리는 아파도 연애만큼 재밌고 시간 가는줄 모르는 맞 고스톱.
밤 열시에 하는 가요대전 즐겁게 보고 오늘도 우체국, 군청으로 볼 일을 보러 갔다왔으니 바빴다.
내일도 무척 춥다는데 마지막 날이니 나의 의식을 치루는 밤.
카프리 한병 안주도 없이 목 넘김 좋게 힘들고 아팠던 일들을 꼴깍꼴깍 넘길 일이다.
사람은 즐거운 일 보담 힘든 일을 다섯배 크게 부풀려 기억하고 저장한다 했으니
그래서 상처가 자꾸 떠오르고 영원히 잊혀지지 않는가 보다.
즐거운 일만 있다면 무슨 재미있겠냐만은 앞으론 내가 감당 할 수 있을 만큼의 슬픈일만
콜~~~~~~~~~~~~~~~~~~~~
우리 청호 회원님들 모두 새해엔 흰눈 같은 축복이 내리길 빌면서.
아, 고스톱 쳐야 합니다.
지금.
따면 곰을 살 수 있으니까요.
.
|
첫댓글 한해의 겨자씨만큼의 배려에도 행복할 수 있었음에 감사하고
문득. 외롭고 고독한 뒤안길의 그리움 소매자락에도 감사하고
구성진 노랫가락에 서린 눈빛 마주할 수 있음에도 감사하고
.. 이야기로 끝이없는 우리 모든 사랑에 감사의 조건으로 채워지기를 소망합니다.
후배님글 읽느노라니,예전에 25년전 충주에 현재 충주산업대학공사로 인해서 일년정도 가있으면서
수안보 온천을 부지런히 다니었던 옛 생각이 나는군요, 정말 그때는 젊음이 넘치는 시절이였는데,
그립군요,내가살았던 그곳 충주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