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 명절 설이다.
작년에도 그렇더니만, 올해도 설전에 많은 눈이 왔다.
동해안쪽은 많은 눈이 내려 귀성 길에 어려움이 많다고 한다.
작년에 비해 올해는 날이 많이 풀린 덕으로,
큰길의 눈은 모두 녹아 귀성 길에 큰 지장은 없는 것 같다.
결혼하고 이렇게 한갓 진 설을 지내기는 처음이다.
여자로 태어나 한남자의 아내가 되는 날부터, 죽는 날까지 며느리라는 이름표를 단다.
그 며느리가 늙어서 시어머니가 되어도, 시집 식구가 있는 한 며느리라는 이름표를 뗄 수가 없다.
막내 시누 네가 오는 날, 시누남편은 늙은 백년손이기 때문에 나는 늙은 며느리가 된다.
젊은 백년손인 사위는 지난 주에 다녀갔다.
살다보니 이번 설처럼 잠깐 며느리라는 이름표를 떼는 날도 있다.
명절날이면 꼭 다녀가던 막내시누이네가, 명절 다음 주에 다녀가겠다고 연락이 왔다.
집안사정으로 올해부터는 시누네 집에서 제사를 지내므로, 명절당일에 못 온다는 것이다.
아들네도 명절날 떠난다고 하니, 미리 음식을 준비할 일이 없다.
내가 아무 것도 하지 않으니 집안 일에 무관심해보이는 남편이 다 궁금한지,
동태 포인지, 지짐이 부치는 거 안 사러 가느냐고 묻는다.
성당에 미사예물도 넣을 겸, 토요특전미사도 드릴 겸,
이발과 시장도 볼 겸, 겸사겸사 해서 읍내에 나갔다.
성당에 가서 오후세시에 봉헌되는 특전미사부터 드리고 미장원에 갔다.
언제나 손님들로 북적거리던 미장원에는, 염색을 하러 온 아주머니 한 명뿐이다.
남편도 이발을 하고, 나도 긴 머리를 다듬었다.
시장에 가니 상인들은 며칠 동안 계속해서 날이 궂어 비와 눈이 오는 바람에,
장사가 안 된다고 모두가 울상이다.
쇠고기 불고기 감과 돼지고기 수육 감, 동태 포, 낙지, 오징어, 조기를 사 가지고 왔다.
물건을 산 짐 보따리가 달랑 두 개로, 지금껏 살도록 이렇게 조금 사본 적도 없는 것 같다.
남편에게 우스개 소리로 이제는 이것조차하기 싫으니,
다음부터는 우리가 올라간다고 할까봐 하니, 남편은 그게 좋겠다고 한다.
편한 것 좋아하다, 이러다 완전히 뒷방신세 되는 거 아닌지 모르겠다.
설날아침, 떡국을 끓여 단둘이서 먹기는 난생 처음 있는 일이다.
그래도 외롭거나 쓸쓸한 생각이 들지 않는 것을 보면,
며느리에서 벗어나기를 너무도 바랬던 일이었기 때문인 것 같다.
지난 수십 년 동안 명절날이면 음식을 만드느라 지지고 볶으며,
며느리 노릇이 지겹다는 생각을 한 적이 얼마나 많았는지.
아침을 먹은 후 미쳐 못 다 치운 집안청소를 하고,
한 접시만 부치면 되는 동태 전을 부치고 있는데 아들한테서 점심 때 떠나겠다는 전화가 왔다.
오전 중에 도착하면 점심준비를 해야하는데, 오후에 도착한다니 잘 됐다는 생각이 든다.
점심 겸 저녁 한끼만 해 먹이면 되니 천천히 준비해도 된다.
애들이오면 함께 먹으려고 점심을 따로 먹지 않았는데, 남편은 점심때가 지나니 조금 시장한가보다.
애들 언제 오느냐고 짜증 섞인 말투로 묻는다.
올 테면 빨리 오지 왜 그리 늑장을 부리느냐고 한마디 하고싶은 걸,
다 큰자식이라서 대 놓고 말은 못하고 만만한 나에게 성질을 부리는 것이다.
누구 편을 들랴. 이럴 때는 제 풀에 풀리게 가만히 있는 게 상수다.
오후 두시 반쯤 아들한테서 또 전화가 왔다.
평택항 근처에서 갓 바위굴을 사려고하니 10kg 한 망에 이만 오천 원을 달라는 데,
값이 맞느냐고 묻는 전화였다.
여기서는 일만 칠천 원 정도 한다고 하니, 값이 틀려 그냥 오겠다고 한다.
명절날 무슨 조개구이냐 하고 물었더니,
지윤 엄마가 조개구이를 먹고 싶어해서 사려고 한다는 말에 아무소리도 못했다.
전화를 끊고 생각해보니, 지윤 엄마가 조개구이를 먹고 싶어한다는 말이 종내 마음에 걸린다.
이제 한 달만 더 있으면 돌이 되는 지후는 제 엄마를 유난히 밝힌다고 한다.
지윤 엄마는 오후에 직장을 나가야함으로, 오후 시간은 외할머니가 지후를 돌봐준다.
지후는 저를 봐주는 외할머니의 수고도 모르고,
배은망덕하게도 외할머니를 잘 따르지 않아 외할머니가 섭섭해한다는 것이다.
그 얘기를 들으며 나 같아도 섭섭할 것 같았다.
바깥 일하느라고 힘이 든 데다 집에 오면,
제 엄마에게 매달려 떨어지지 않는 지후에게 시달려 ,
지윤 엄마는 알게 모르게 스트레스가 많이 쌓일 것이다.
지윤 엄마가 먹고싶어하는 조개구이를 해주어야겠다는 데 생각이 미치자,
더 망설이지 않고 당진 시장으로 달려갔다.
운전을 해주는 남편은 명절날 가게문을 열었을 까하고 걱정을 한다.
그러나 남편의 생각은 기우에 불과해,
문을 닫은 곳은 몇 집 안되고 여느 날 과 다름없는 시장분위기여서 나도 놀랐다.
금방 들어온 싱싱한 굴이 어물전마다 가득 차 있다.
단골 어물전에 가서 갓 바위굴 한 망과 피조개, 바지락을 사며 ,
명절날에 왜 쉬지 않고 문을 여느냐고 물었더니 주인의 말이 걸작이다.
처갓집에 다니러 오는 사위가, 선물로 사가기 때문에 명절날이 더 장사가 잘된다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듣고 보니 수긍이 가서, 나도 모르게 그렇구나하고 고개가 끄덕여졌다.
애들 오기 전에 와서 숯불을 만들어 놓으려고, 발바닥에 불이 날 정도로 갔다 왔다.
애들이 도착할 시간이 지났는데 오지 않는 것을 보니,
퍼뜩 조개구이 감을 사러 당진 시장에 들렀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남편에게 숯불을 피우라고 이르고, 아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당진 읍내에 들어오고 있다는 아들은,
삽교천에 들러 조개구이 감을 사 가지고 오는 길이라고 하는 것이었다.
제 아내가 먹고 싶어하는 것을 들어주고 싶은, 아내를 사랑하는 마음이리라.
남편은 아들에게 물어보고 사오지,
그냥 덥석 사오기부터 했다고 나의 경솔함을 나무란다.
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나지만 그 부분에는 어쩔 수없이 시인을 해야하니,
남편에게 할 말이 없다.
조개구이 감을 바리바리 사들고 온 아들도 어이가 없는 표정이다.
그러나 언제나 집안의 소방수 역할을 하는 아들은,
밤새도록 구어 먹고 놀자며 어색한 분위기에 중재를 한다.
주방 안에서 숯불에 구운 조개구이는, 돼지 고기 굽는 것 보다 연기가 훨씬 덜 난다.
굴이 거의 익을 때면 살짝 뚜껑이 벌어지는데,
칼로 입을 벌려 굴을 먹고 굴 국물을 마시면 향긋한 굴 향이 입안에 가득하다.
피 색깔이 나는 피조개와 백합, 소라, 동죽, 바지락 등 여러 종류의 조개를 구어 먹는 재미도 쏠쏠하다.
맛있는 것을 참 잘 아는 아들은 겨울에는 갓바위 굴 구이가 제격이라며,
아주 맛있게 먹는다.
입이 짧은 지윤 엄마도 몇 개나 먹고 지윤이는 굴 껍질에 붙은 관자를 껌이라며 질겅질겅 씹는다.
우리 먹자고 굴을 사게되지는 않는데 원님덕분에 나팔 분다고,
지윤 엄마 덕분에 우리도 오랜만에 굴 구이로 포식을 했다.
차례를 지내지 않기에 차례음식 대신 별식으로,
온 가족이 즐거운 식사를 한, 우리만의 특별한 한 설이었다.
첫댓글 조개구이로 보낸 설이 멋지다는 생각이 듭니다. 틀에 짜여진 것에서 벗어나는 자유로움이 엿보입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지석시인님,감사합니다.
설명절 잘 쇠셨는지요?
봄바람이 분다는 우수입니다.
동장군의 기세가 수그러질 때가 되었는데,아직도 심술이 대단합니다.
그래도 창호지 바른 방문을 통하여 들어오는 햇살이 참 밝은 아침입니다.
행복한 하루되십시오.
한가한 명절 보내신것 축하드려야 하는것 맞지요?? 며느리의 스트레스 생각에 한걸음으로 조개사러 달려가신 하모니 님의 며느리 사랑이 넘치시는 글 잘 보았습니다. 조개구이로 특별한 명절을 보내신 것도 멋지시구요. 항상 행복하시고 강건하십시요.
다녀가심 감사합니다.
사과향기님도 명절 잘 쇠셨는지요?
이 나라의 며느리들은 모두 명절증후군을 앓고 있는 것 같습니다.
기분좋은 하루되십시오.
명절날 저도 떡국 먹고 여러가지 음식을 만들어 먹었습니다. 기름에 지지는 음식보다 때로는 달콤하게 조개 구이 먹는것도 괜찮을것 같습니다. 며느리를 때고 싶다는것. 저도 한 사람의 며느리가 되보고 싶기도 합니다. 좋은글 감상하고 갑니다. 건안 건필 하세요!
어머니 댁에 가셨나봅니다.잘하셨습니다.
며느리가 되고싶다는 님의 말씀에 여운이 남아 맘이 짠합니다.
겨울이 아무리 가기 싫어 발버둥을 쳐도 , 다가오는 봄 을 이기지 못합니다.
우리네 인생에도 늘 겨울만 있는 것은 아니더군요.
희망의 봄이 오는 가하면, 꿈을 맘껏 펼칠 여름도오고,
내가 한 일에 대하여 결실을 맺는 가을도오고,
조용히 자신의 삶을 되돌아 보는 겨울도 오고 말입니다.
새로운 도약을 위한 침잠의 계절, 겨울이 가고 있습니다.
님의 마음에 희망의 꽃이 피어나는 따뜻한 봄이 어서 오기를 바랍니다.
특별한 만찬의 설에 모인 가족들이 행복하고 다복 해 보입니다. 고운 밤 되십시요.*^^
해청솔 시인님도 명절 잘 쇠셨지요?
큰 집이 있지만 집안이 날라리(죄송) 집안이다 보니, 몇 년째 차례도 안 지냅니다.
장조카가 형편이 어려워 못 지내겠다는군요,
작은 집들이 대부분의 경비를 조달해 주는 데도 못 지낸다니 어쩔 수가 없습니다.
명절 때나 만나던 형제들인데,
그나마 못 만나니 몇명 안되는 친척들이 점점 멀어지게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