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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이야기(47)*욥기(4)
자료 / 박신배 교수
1. 고난이 하나님 주권임을 인정 하는 욥기
➤“15. 그때에 내 얼굴 앞으로 한 영이 지나가므로 내 살의 털이 곤두섰느니라. 16. 그 영이 가만히 서 있었으되 나는 그것의 형체를 분간하지 못하였느니라. 한 형상이 내 눈앞에 있었고 거기에 고요함이 있었으며 내가 한 음성을 들었는데 이르기를, 17.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이 [하나님]보다 더 의롭겠느냐? 사람이 자기를 만드신 분보다 더 깨끗하겠느냐? 18. 보라, 그분은 자신의 종들을 신뢰하지 아니하시며 자신의 천사들을 어리석음으로 인해 꾸짖으시거늘 19. 하물며 흙집에 거하며 티끌 안에 자기 기초를 두고 좀 앞에서 무너질 자들이겠느냐?”(욥4:15-19 KJV).
욥기는 행복보다는 고난의 이야기를 많이 하고 있다. 인생을 살다보면 좋은 일도 있지만 나쁜 일도 많이 보게 된다. 인생이란 좋은 날도 있지만 궂은 날도 많이 보며 고통을 겪게 된다. 인생에 겪는 고난을 보면서 그 고난을 어떻게 해석하고 삶을 맞이하는가 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이다. 욥은 고난을 멋있게 해석하며 인내하였다. 욥은 자신의 엄청난 고난을 맞아 하나님의 주권 가운데 있는 것을 알고 신앙을 저버리지 않았다. 고난과 축복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있다는 신앙을 가졌던 것이다.
➤“20. 이에 욥이 일어나 자기의 겉옷을 찢으며 머리를 밀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며 21. 이르되, 내가 내 어머니 태에서 벌거벗고 나왔은즉 또한 벌거벗은 채 그리로 돌아가리라. 주신 분도 {창조주}시요 가져가신 분도 {창조주}시니 {창조주}의 이름이 찬송을 받을지어다. 하고 9. ¶ 이에 그의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당신이 아직도 당신의 순전함을 지키느냐?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으라, 하되 10. 그가 그녀에게 이르기를, 당신이 어리석은 여자들 중의 하나가 말하듯 말하니 무슨 까닭이냐? 우리가 [하나님]의 손에서 좋은 것을 받으며 또 나쁜 것을 받지 아니하겠느냐? 하고 이 모든 일에서 욥이 자기 입술로 죄를 짓지 아니하니라.”(욥1:20-21, 2:9-10).
하나님이 복을 주시기도 하시고 또 그 복을 거둬 가시기도 하신다는 사실을 알고, 그 주권(主權)을 인정하는 욥의 모습을 본다. 이 세상의 모든 일과 인간의 일은 하나님의 주권 가운데 있다는 사실을 보며 욥은 고백하고 있다. ➤“4 궁핍한 자를 길에서 몰아내나니 땅의 가난한 자들이 함께 숨는다.”(욥24:4). “네가 만일 하나님을 부지런히 구하며 전능하신 이에게 빌고 또 청결하고 정직하면 정녕 너를 돌아보시고 네 의로운 집으로 형통하게 하실 것이라(빌닷)”(욥8:6).
➤“14. 사람이 무엇이기에 깨끗하겠느냐? 여자에게서 태어난 자가 무엇이기에 의롭겠느냐? 15. 보라, 그분께서는 자신의 성도들을 신뢰하지 아니하시나니 참으로 하늘들이라도 그분의 눈앞에서 깨끗하지 아니하거든 16. 하물며 불법을 물마시듯 하는 사람이야 얼마나 더 가증하고 더럽겠느냐?”(욥15:14-16). 인간의 한계를 알고 절대적 하나님의 관계 속에서 인간의 문제를 보고 절대적 주권을 인정하는 것이 지혜로우며 욥은 하나님을 찾고 정직하게 살아야 가야 할 것을 말하고 있다.
인간의 고난과 행복이 하나님의 주권 속에 있다는 사실을, 욥기는 말하고 있다. 욥기는 고난과 탄식, 항의와 항변, 친구들의 대화를 통해 점점 그 주권을 인정하고 있었다. 욥이 그 주권을 인정하며 고백하는 이야기이다. 이 대화의 전개를 통해 그 하나님의 주권이 드러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지혜의 요소들이 욥기 이야기에서 발견되지만(2:10), 지혜전승이 지배적인 것은 친구들과의 대화 속에 있다.
개별적인 담화에서 그러한 지혜를 더 이상 발견되지 않고 있고, 전도서에서 긴 연설형태로서 보다 큰 범위로 나타난다. 또 다른 공식적 구성형태로 나타나는데 이스라엘 법적인 체계에 친숙한 형태로 나타난다(40:8). “참으로 나는 전능자에게 말씀하려하며 하나님과 변론하려 하노라”(욥13:3). 또 시편으로 알려진다. 탄식시편은 밀접하게 연관되며(욥3;29장), 찬양 주제(모티브)로 표현된다(욥38장). “하나님은 마음이 지혜로우시고 힘이 강하시니 스스로 강퍅히 하여 그를 거역하고 형통한 자가 누구이랴”(욥9:4).
하나님의 주권아래 인간의 불행과 행복이 벌어지는데 인간이 생각하는 대로 나타나지 않는다. 그 인간의 행복과 불행이 원인과 결과가 이어지는 인과론과 같이 주어지지 않고, 하나님의 뜻대로 이뤄진다는 것이다. 전도서에서 나타난 것과 같이, 조금 다른 방식이지만 욥기의 대화 저자는 행동과 결과, 덕과 행복, 잘못과 고통 사이의 연관을 의심한다. “내가 내 헛된 날에 이 모든 일을 본즉 자기의 의로운 중에서 멸망하는 의인이 있고 자기의 악행 중에서 장수하는 악인이 있으니”(전7:15). 욥은 이러한 인과론에 대한 인생관에 대하여 도전한다. 적어도 자신의 경우에는 최소한으로 적용할 수 있다고 본다.
“어찌하여 악인이 살고 수(壽,장수)를 누리고 세력이 강하냐”(21:7). 권선징악의 측면이나 신명기 정통신학에 따르면 이것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착한 사람은 복을 많이 받고 나쁜 사람은 저주받는 것이 전통적인 신앙관이다. 이것은 대체로 인과론적으로 그 현상이 벌어지는데 때로는 세상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진다. 욥의 친구들은 그러한 전통신학의 입장에서 뚜렷하게 엄격한 방식으로 말하며 전제한다(욥8:6이하, 20장). “네 의뢰가 경외함에 있지 아니 하냐 네 소망이 네 행위를 완전히 함에 있지 아니 하냐 생각하여 보라 죄 없이 망한 자가 누구인가 정직한 자의 끊어짐이 어디 있는가”(욥4:6-7).
“그 말에 이르기를 악인은 그 일평생에 고통을 당하며 강포자의 햇수는 작정되었으므로 그 귀에는 놀라운 소리가 들리고 그 형통할 때에 멸망시키는 자가 그에게 임하리니 그가 어두운 데서 나오기를 바라지 못하고 칼날의 기다림이 되느니라”(욥15:20-22). 결국 행한 대로 당한다는 것, 뿌린 대로 거둔다는 인과(因果)법칙을 말한다. 욥의 친구들이나 우리 인생의 대부분의 경우가 다 이러한 생각 속에 이해되어지고 또 그렇게 살아간다. 하지만 욥기의 마지막 부분에서 이 친구들은, 어떠한 인간도 완전히 의로운 자가 없고 하나님의 현존 앞에서 무죄한 자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4:17; 15:14; 25:14). 이것은 욥이 그들과 함께 동의하는 유일한 점이다.
고대 근동의 지혜문학과 욥기가 대화나 주제(선과 고통)면에서는 유사하다. 수메리아 욥과 바빌론 욥에서 “내가 지혜의 주를 찬양하리라”-소위 바빌론의 신정정치나 바빌론 전도서와 유사하지만 전체의 구조나 신학적인 내용은 아주 다르다. {창조주} 유일 신앙을 강조하고 독창적인 히브리적 사고의 구조에서 여호와 신앙을 나타내는 점에서는 독특하고 독창적이다. 시편 73편은 지혜 시편으로서 욥기와 아주 유사하다. 비록 지혜가 제공하는 대답이 죽음의 경계를 넘어서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시편 73편이 아주 욥기와 가깝다.
➤“12. 보라, 이들은 경건치 아니한 자들이로되 세상에서 형통하며 재물을 불리도다. 13. 내가 내 마음을 깨끗하게 하며 내 손을 무죄함 속에서 씻은 것이 참으로 헛되니 14. 내가 종일토록 재앙을 당하며 아침마다 징계를 당하였도다. 17.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갔을 때에야 비로소 그들의 종말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18. 분명히 주께서 그들을 미끄러운 곳에 두시며 그들을 던지사 파멸에 이르게 하셨나이다. 19. 그들이 어찌 그리 순식간에 황폐하게 되었나이까? 그들이 두려움으로 완전히 소멸되었나이다. 28. 오직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감이 내게 좋사오니 내가 [주] {하나님}을 신뢰하였으므로 주께서 행하신 모든 일을 밝히 보이리다.”(시73:12-14, 17-19,28).
결국 무죄한 자들이 잘되고 형통한 것처럼 보이지만 나중에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 가운데 하나님의 자녀와 의인이 복을 받게 된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섭리가 그의 주권을 인정하는 자에게 보다 은혜로 열릴 것이다.
➤“10. 내 형제들아, [주]의 이름으로 말한 대언자들을 고난당하는 것과 인내의 본으로 삼으라. 11. 보라, 참는 자들을 우리가 행복한 자로 여기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께서는 지극히 동정심이 많으시며 친절한 긍휼을 베푸는 분이시니라.”(약5:10-11).
2. 고난에도 불구하고 {창조주} 신앙을 가진 욥
➤“19. 그분께서 나를 수렁에 던지셨으므로 내가 먼지와 재같이 되었도다. 20. 내가 주께 부르짖으나 주께서 내 말을 듣지 아니하시며 내가 일어서나 주께서 내게 관심을 두지 아니하시나이다.”(욥30:19-20).
욥이 고난을 받으면서 친구들과 대화를 나누는 장면에서 우리는 우리 인생의 삶과 교훈을 보게 된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만나는 친구들, 그리고 친한 친구들과의 대화 속에서 얻는 것이 있다. 그것이 우리 삶의 교훈을 깨닫게 하는 것과 유사할까. 사람마다 다 그 특별한 자신만의 길이 있고 하나님의 섭리하심이 있을 것이다. 그러기에 사람마다 겪는 고난은 다를지라도 하나님의 계획하심은 특별하다. 그래서 삶의 고난이 사람마다 각기 다르게 있을 것이다.
욥은 일반적인 사람들의 고난과는 다른 특별한 고난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하지만 인간이 갖는 일반적인 고난의 의미가 무엇인지 욥기 본문에서 잘 보여주고 있다. 인과응보 사상으로서 욥기의 친구들은 죄를 지었기 때문에 고난을 받고 있다는 기조(基調)를 말하며, 세 친구들은 그 사실을 계속 말하고 있다. ➤“18. 그는 빛에서 어둠으로 내몰리고 세상에서 쫓겨나며 19. 자기 백성 가운데 아들이나 손자도 없고 또 그의 거처에 남은 자가 아무도 없으리라. 20. 그의 뒤에 오는 자들이 그의 날을 보고 놀라되 앞서 간 자들이 무서워한 것 같이 놀라리라. 21. 참으로 사악한 자의 거처들이 이러하며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의 처소가 이러하니라, 하니라.”(빌닷, 욥18:18-21).
친구들의 대화를 통해 유지되고 있는 응보사상이 친구들의 대화를 통해 계속 유지되고 그것을 말하고 있다. 욥은 형식적으로 그들과 서로 연관되어 말하고 있을 때조차도 다른 말을 하며 관련되어 간접적으로 그들에게 반박하며 말하고 있다(욥18:2;19:2;욥21, 20장). “허망한 말이 어찌 끝이 있으랴 네가 무엇에 격동되어 이같이 대답 하는고 나도 너희처럼 말할 수 있나니 가령 너희 마음이 내 마음 자리에 있다 하자 나도 말을 지어 너희를 치며 너희를 향하여 머리를 흔들 수 있느니라”(욥16:2,3). 욥이 친구들의 말에 반응하고 있는 것이나 친구들이 욥의 말에 대응하는 것을 분간하여 그 내용을 결정하는 것은 쉽지 않다.
욥기 4장에서는 엘리바스의 연설로 대화가 시작되고 있지만, 이미 욥기 3장에서 욥은 탄식의 독백으로 대화를 시작하고 있다. 이는 일반적인 대화이며 그 응답하는 것과 차이가 있다. 보다 심각한 논쟁의 문제는 욥의 반대자로 서서 하나님과 반대하여 세 친구와 연합하는 동안인지, 그리고 그들의 “인과응보 교리”를 수용하는 것이 또한 각기 그들 자신의 문체를 가지고 있는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즉, 엘리바스는 위엄 있고 신중하며 소발은 무뚝뚝하다. 빌닷의 성격은 어느 정도 그 둘 사이에 있는 위엄스러우면서 퉁명스럽다.
전반적으로 대화는 절정을 향해 움직인다. 친구들은 위로의 말로 시작하고(4:1), 개인적인 고소로 끝맺는다. “하나님이 너를 책망하시며 너를 심문하심이 너의 경외함을 인함이냐 네 악이 크지 아니 하냐 네 죄악이 극하니라”(22:4,5). 욥이 결국 죄를 지었기 때문에 벌을 받는다는 것이다. 욥은 자신의 태어난 것도 저주하는 과정(3:3; 6:8;10:18이하)은 하나님이 약한 사람에게 고통을 주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고소하고, 무죄한 자의 죄를 선언하고 있다(9:20). 하나님은 자신의 돕는 자라는 희망을 가진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욥 자신의 운명에서 첫 번째 계명, 하나님 신앙에 대한 명령을 적용함으로써 오직 하나님만 섬기고 있다고 본다. 그는 하나님에 대한 고난에도 불구하고 여호와 신앙을 가지는 사람이었으며, 이를 통해 거의 역설적인 확신을 가진다. 그는 자신과 하나님 사이에 어느 누구도 중재할 사람이 없다는 깨달음을 갖는다. 그러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호소할 보다 높은 하나님의 중립적 법정이 있으면 좋겠다고 고백한다. 하지만 그런 법정은 없다고 본다. “하나님은 나처럼 사람이 아니신즉 내가 그에게 대답함도 불가하고 대질하여 재판할 수 없고 양척 사이에 손을 얹을 판결자도 없구나. 그리하시면 내가 두려움 없이 말하리라 나는 본래 그런 자가 아니라”(욥9:32-35).
결국 욥은 하나님의 대화 속에 자신의 죄를 찾으려고 한다고 하면, 결국 찾아질 것이지만 하나님과 자신은 질적인 차이가 나기 때문에 자신이 하나님의 상대자가 되지 못한다. 그래서 인간적인 법정으로 하나님은 내려오셔서 인간의 죄를 다룰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고백하며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고 있다. 자신은 본래 그런 파렴치한 범죄자는 아니라는 사실을 고백하고 있다.
여기서 욥과는 다른 인간적인 대화나 사람들의 추측과는 다른 자신만의 변론을 가지고 있으며 하나님께 나가야 할 사람들의 죄의 실존이 있다. 나다나엘 호돈의 주홍 글씨에서는 청교도 사회의 윤리를 보여준다. 죄를 지은 딤스 데일 목사는 늙은 의사의 부인 헤스터와 사생아 펄 앞에서 결국 자신의 죄를 보여주며 죽는다. 사람들 앞에 간통자라고 낙인찍혀 살아가는 헤스터의 불행을 보며 죄를 지은 고독한 딤스 데일 목사의 고뇌를 그린 작품이 주홍 글씨다.
청교도 사회에서 가슴에 간통자(A)라는 주홍 글씨를 붙이고 살아가는 여자의 처절함, 그리고 거룩한 목사의 죄지음의 고뇌는 우리 사회의 한 단면을 잘 보여주는 소설이다. 이는 간음한 여자가 모세의 율법에 따라 돌에 맞아 죽을 뻔 했을 때 그 자리에 있던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은 중요한 교훈을 보여준다. 예수 그리스도가 죄가 없는 자가 먼저 이 여자에게 돌을 던져 죽이라는 말을 한다.
그 항변이 무엇인가? 예수님의 그 대변 속에서 우리 모두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누구든지 어느 누구를 우리가 정죄할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말해주었다. 욥은 인간의 근원적인 죄를 찾아 고백록을 써가야 하는 존재이며 죽을 때까지 죄와 씨름하며 고통 속에 신음해야 함을 가르쳐 주고 있다. “오히려 내 모든 고통을 두려워하오니 주께서 나를 무죄히 여기지 않으실 줄을 아나이다. 내가 정죄하심을 입을 찐대 어찌 헛되이 수고하리까?”(욥9:28,29).
욥은 하나님을 불러 법정으로 간다(13:3,18; 23:4). 욥은 친구들의 충고를 좇아 처음에는 그의 호소(나를 홀로 두소서)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돌아서서 회개하는가? 욥은 사망의 나라에서 하나님의 분노로부터 벗어나게 하나님께 자신을 숨겨달라고 청한다. 그곳에서 하나님이 욥을 친절하게 기억해 달라고 한다. “주는 나를 음부에 감추시며 주의 진노가 쉴 때까지 나를 숨기시고 나를 위하여 기한을 정하시고 나를 기억 하소서”(욥14:13). 다른 말로 그를 핍박하는 하나님에 대하여(16:9;19:6;21장), 나의 의를 빼앗았다고 한다(27:2).
욥은 하나님께 고통과 질곡의 순간에 호소하며 욥의 권리를 위해 서있어 달라고 간구한다. 하나님이 분노하시며 분명히 정의롭지 못하시게 행하셔서 자신에게는 자의적인 하나님이라고 이해하고 있는 욥은 다시 한 번 간구한다. 욥은 자신을 선으로 이끌어 달라고 하나님께 호소한다. “지금 나의 증인이 하늘에 계시고 나의 보호하시는 분이 높은데 계시니라”(욥16:19). “내가 알기에는 나의 구속자가 살아 계시니 후일에 그가 땅위에 서실 것이라”(욥19:25). 욥은 고난 가운데도 하나님의 주권과 하나님의 섭리를 인정하였고, 다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고 신실하게 하나님을 찾았고 힘들지만 경건함을 가지고 나갔던 것이다.
➤“10. 예수님께서 일어나사 그 여자 외에는 아무도 없음을 보시고 그녀에게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자들이 어디 있느냐? 아무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시니 11. 그녀가 이르되, [주]여, 아무도 하지 아니하였나이다. 하매 예수님께서 그녀에게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 하시니라.”(요8:10-11).
3. 시지프스의 고난과 같더라도 소망을 잃지 않는 욥기
➤“1. 그때에 {창조주}께서 회오리바람 속에서 욥에게 응답하여 이르시되, 2. 지식이 없는 말들로 이치를 어둡게 하는 이자는 누구냐? 3. 이제 남자답게 허리를 동이고 내가 네게 물을 터이니 너는 내게 대답할지니라.”(욥38:1-3)
욥기의 세계는 인간이 누구이며 인생의 무엇인지 말해준다. 욥기는 인생을 고난의 시각에서 보며, 또 고난의 세계를 밝히는 책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욥기는 신약 성경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이해할 수 있게 하고, 진리로 인도하는 지도와 같은 책이라 말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신약 성경을 이해하는 데에 욥기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중요하며 신약을 푸는 결정적인 열쇠가 된다. 욥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소명과 십자가, 예수님의 고뇌, 예수님의 내부를 깊이 있게 이해하게 한다.
욥기는 두 가지 질문에 대한 답을 보여준다. 의인은 왜 고난을 당하는가? 의인이 왜 고난 속에도 경건한가? 욥은 이 신앙의 세계를 통해 믿음의 연단을 보여주며, 정금 같은 신앙을 얻는데 있어서 고난의 유익을 말하고 있다. 욥은 고난과 절망, 죽음 앞에서 인간이 희망의 빛이 고난 속에서 볼 수 있으며 그 빛이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고 말한다. 하지만 욥은 마지막에 가서 하나님을 보았다.
➤“1. 또 욥이 계속해서 자기의 비유를 말하되, 2. 나의 공정함을 빼앗아 가신 [하나님] 곧 내 혼을 괴롭게 하신 [전능자]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3. 내 숨이 내 속에 있고 [하나님]의 영이 내 콧구멍에 있을 동안에는 4. 내 입술이 결코 사악한 것을 말하지 아니하며 내 혀가 속이는 것을 말하지 아니하리라.”(욥27:1-4).
비록 친구들이 욥을 의로운 사람이라고 보지 않고 고통 받고 있는 사람으로만 볼 때에도 욥은 자신이 무죄함을 계속 주장한다(6:24,28; 9:21; 10:7). “그러나 내 손에는 포학이 없고 나의 기도는 정결하니라”(욥16:17),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23:10). 욥은 심지어 앞으로, 자신의 인생 끝 날에도 자신은 순수할 것이라고 맹세하고 있다(27:4). 그는 과거나 현재에도 어떤 죄도 짓지 않았음을 확신하고 맹세하며 대화를 끝맺는다(31장).
➤“33. 혹시 내가 내 불법을 내 품에 숨김으로 아담같이 내 범법들을 덮었던가. 34. 내가 큰 무리를 두려워하거나 가족들의 멸시를 두려워하였으므로 잠잠하고 문 밖에 나가지 못하였더냐?”(31:33-34). 비록 하나님이 욥 자신의 도움을 위해서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시지 않았다고 불평한다. 그리할지라도 욥은 무죄하다는 것을 말한다, 그 자신의 항거로서 탄식하며 부르짖는다(욥30:20). “전능하신 하나님이 나에게 대답하시리라!”
욥기의 오래된 이야기는 이제 새로운 엘리후 연설을 삽입하여 새 이야기를 진행한다. 욥의 도전은 즉시 하나님의 대답이 뒤따르게 된다. “폭풍 가운데서 하나님이 말씀하신다(38:1).” 그 대답은 간접적으로만 욥의 몫이 된다. 그 질문은 이렇다. “내가 땅의 기초를 둘 때에 네가 어디에 있었느냐?” 네가 하나님과 같이 팔이 있느냐?”(38:4;40:9) 이 질문을 통해 욥은 창조의 하나님 기적을 깨닫고 세상을 창조하신 분과 같이 자신은 창조할 수도 없고, 그 창조 세계를 보전할 수 없는 유한한 인간임을 인식하게 한다.
인간은 하나님과 질적 차이가 나는 존재로서 감히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견주어 볼 때 자신은 ‘새 발의 피’와 같은 존재로서 감히 비교할 수 없이 초라하고 보잘 것 없는 존재인 것을 안다. 창조질서를 운행하시는 분을 찾을 수 있을까? 이 자연 속에서 찾을 때, 그 무엇이 인간에게 가까운 것인가? 그 존재가 인간과는 멀리 떨어진 존재(별들, 날씨, 짐승, 우주)인가? 이 우주 세계를 유지하는 분은 하나님이지 제한된 인간의 지식과 능력은 아닌 것이다.
결국 인간의 의는 하나님의 존재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비록 인간이 올바르게 살았어도 하나님의 존재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것임을 보여준다. 인간과 하나님은 질적 차이가 나는 존재로서 하나님은 존재의 차원이 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네가 하늘의 법도를 아느냐 하늘로 그 권능을 땅에 베풀게 하겠느냐? 누가 지혜로 구름을 계수하겠느냐 누가 하늘의 병을 쏟아 티끌로 진흙을 이루며 흙덩이로 서로 붙게 하겠느냐”(욥38:33,37-38).
폭풍 속에서 말씀하시는 모습은 바로 출애굽기 19-20장에서도 나타난다(시8편; 겔1:4).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십계명을 수여할 때, 하나님이 빽빽한 구름 속에서 임재하며 우레와 번개, 불 속에서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임재와 말씀이 특이한 자연 현상 속에서 나타나는 모습은 다르다. 하나님이 보이시는 것은 바알 종교에서 보이는 것과 다름을 보여준다.
하나님이 욥기 서론과 결론부에서는 [야웨]와 [엘로힘]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본론의 대화 부분에서는 신명을 ‘엘로아, 엘, 샤다이’로서 사용한다. 이는 창세기 1장에서 [엘로힘]의 창조신학과 유사한 것으로서 욥기 1-2(1:7-12;2:2-6)장의 야웨 하나님이 결론 부(38:1-42:6)에서도 나타나서 야웨 이름(38:1;40:1,3,6;42:1)으로써 지속적으로 사용된다.
➤“7. ¶ {창조주}께서 욥에게 이런 말씀들을 하신 뒤에 {창조주}께서 데만 사람 엘리바스에게 이르시되, 내 진노가 너와 네 두 친구를 향해 타오르나니 너희가 내 종 욥과 같이 나에 대하여 옳은 것을 말하지 아니하였느니라.”(욥42:7). 욥은 산전수전 다 겪고, 파란만장한 고난의 삶을 다 살고 나서 마지막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결과를 보인다.
이는 마치 시지프스의 신화(바위)처럼 우리의 일상이 부조리한 고난의 연속일지라도 행복한 것이다. 욥의 결말을 가진다면 결국 행복한 것이다. 우리는 계속해서 굴러 떨어지는 바위를 다시 이고 시지프산 정상을 향하여 올라가야 하는 운명이다. 우리는 매일 그러한 일상을 살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현실에서 벌어지는 이해할 수 없는 현상, 매일 되풀이되는 삶의 쳇바퀴 돌 듯 사는 삶, 희망 없이 반복되는 일상이 시지프스의 고뇌, 짊어진 바위같이 무거운 짐이다.
그러할지라도 욥과 같이 하나님을 볼 수 있는 희망이 있다고 하면 견딜 수 있는 것이며, 그리고 끊임없이 반복되는 무거운 바위를 나르는 일이라 할찌라도 우리는 힘겹게 희망의 바위를 지고 다시 시지프스 산을 오를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다면 이렇게 고백할 수 있을 것이다. 십자가의 신앙이 있다면 이제 고난이여 오라. 주가 계시니 두렵지 않다. 내가 하나님을 보고 있도다.
➤“2. 주께서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사오며 어떤 생각도 주께 숨길 수 없음을 내가 아오니 3. 지식도 없이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나이까? 그런즉 내가 깨닫지 못한 것을 말하였으며 내게는 너무 놀라운 일들 곧 내가 알지 못한 일들을 말하였나이다. 4. 내가 주께 간청하오니 들으소서. 내가 말하겠나이다. 내가 주께 묻겠사오니 내게 밝히 알리소서. 5. 내가 귀로 듣는 것을 통해 주께 대하여 들었사오나 이제는 내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욥42:2-5)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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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예수님좋다오 원문보기 글쓴이: (一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