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 병사와 소녀/ 김 상 직
윤희는 화순역에서 그리 멀지 않은 장전리라는 조그마한 마을에서 아름다운 꿈과 추억을 만들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마을 동남쪽으로는 작은 강이 흐르고 산자락 길게 누운 한가운데에 자리잡은 마을은 그림같은 한 폭의 동양화를 연상케 합니다. 윤희는 남초등학교 5학년으로 좁은 들길을 따라 이웃동네 아이들과 등하교를 합니다. 등하교길에 들려오는 기차의 경적음이 조용한 들녘을 거쳐 긴꼬리를 이어갑니다. 윤희는 가끔 자신도 모르게 계절의 변화를 잊고 살때가 많습니다. 그 넓따란 평야지에는 보리 열매가 누릿누릿 살을 찌우며 익어가고 어느새 뒷그루 논에는 금새 벼가 황금 물결을 일렁이고 길가 옆엔 함초롬히 이슬을 머금고 피어있는 코스모스와 들꽃들이 너무 예뻐 그 곁을 떠날 수 없었던 어느 가을날의 일들을 잊지 못합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농촌 아이들은 윤희와 같이 자연환경 속에서 맑고 깊은 옹달샘처럼 아름다운 동심으로 꿈을 먹고 살아갑니다. 윤희는 오늘도 좁은 들길을 따라 집으로 돌아옵니다. 들과 남녘 하늘이 맞닿은 지평선아래에서 하얀 뭉게구름이 파란 가을하늘 위로 피어오르더니 하늘 높이 윤희의 마음을 싣고 정처없이 어디론가 떠나 버립니다. 몇해전만 해도 같은 또래의 친구들이 서너명이나 되었으나,도회지로 모두 떠나 이제는 윤희만이 홀로 남았습니다. 그런 이유로 윤희는 항상 외롭습니다. 아이들의 소리가 뚝 끊긴 조용한 마을! 이따금 화순역을 지나는 기차의 경적소리가 긴꼬리를 남기며 다시 고요가 찾아듭니다. 어느덧 서녘해가 뉘엿뉘엿 산밑으로 숨어가면 땅거미는 슬그머니 온 마을을 덮어갑니다. 윤희는 하루종일 농사일을 끝내시고 돌아오시는 아빠,엄마의 지친 모습이 가엾게만 느껴집니다. 그리고 재빨리 나아가 반갑게 인사를 합니다. "이제 돌아오세요?" "그래..청소도 깨끗이 하고 밥도 지어놓았잖아?" "정말..우리 윤희 착하기도 하지?" 엄마의 얼굴에 흐뭇한 미소가 피로를 씻어가듯 엷게 번져만 갑니다. "아빠 등목하시는데, 등 좀 밀어드리려무나.." "예!" 윤희는 엄마,아빠가 기뻐하시는 모습에 더욱 즐겁습니다. "아빠! 우리 금년 농사 잘 지었어요?" "그럼~ 잘지었지.." "엄마, 아빠가 열심히 노력해서 우리 착한 윤희 대학도 보내고 유학도 시킬꺼란다.." "정말~?" "그럼,그렇구 말구.." "아이~좋아라!" "윤희야! 아빠의 꿈은 오직 윤희에게 있단다.윤희는 아빠의 희망이고 행복이란다. 이제껏 윤희가 아빠 엄마가 기대하는 것만큼 예쁘고 바르게 자라준 것이 여간 대견스럽지 않아..앞으로도 더욱 밝고 고운 희망의 등불로 무럭무럭 자라주렴..!" 어느덧, 둥근달은 처마 밑까지 떠올라 있습니다. 대나무 숲 향기가 창 틈으로 솔솔 밀려오고 있었습니다. 이따금 나무 잎새가 산들 바람에 살랑 살랑 날립니다. 밤이 깊자 소쩍새가 강건너 솔밭에서 처량하게 울어댑니다. 시골의 밤은 너무나도 고요하기만 합니다. 어둠의 고요속에서 풀벌레의 잔잔한 노래 소리가 그칠줄을 모릅니다. 윤희는 도회지로 떠난 진희와 다정이가 왠지 보고 싶어 집니다. 윤희는 평소 책 읽기와 글짓기를 무척 좋아합니다. 오늘도 윤희는 공책과 연필을 꺼내 이렇게 적어 내려갑니다.
달 빛
달빛은 이슬비 밤에만 내리는 비 노오란 실빛살에 들꽃이 활짝 웃고 풀벌레도 좋아라 노래를 해요
달빛은 깍쟁이 창틈 사이로 내모습 엿보러 밤마다 와요 풀잎에 내리는 달빛 얼굴을 간지럽히다 슬그머니 서녘으로 숨어버려요
밤은 윤희의 아름다운 감상을 꽃피우며 잠이 듭니다. 그리고 날이 밝았습니다. 창밖의 하늘은 점점 높아만 갑니다. 파란 가을 하늘 위에는 고추 잠자리가 떼를 지어 한가롭게 원을 그려갑니다. 그 아래로 하얀,분홍,빨강이 뒤섞인 코스모스가 한들한들 춤을 춥니다. 4교시가 끝날 무렵 신작로를 따라 이어지는 군차량의 행렬이 비상등을 켜고 꼬리와 꼬리를 물며 이동하는 모습이 창밖으로 바라다 보입니다. 얼마 후, 일부 행렬이 우리 학교를 향하여 천천히 다가오더니 교문 입구에서 멈춥니다. 맨앞의 지프차에서 장교로 보이는 한 군인아저씨가 내리더니 교무실로 발길을 옮깁니다. 잠시후, 교장 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누더니 군인 아저씨들을 운동장안으로 들어오게 하였습니다. 장교아저씨는 계급이 높아 보이는 몇몇의 군인 아저씨들에게 뭐라고 지시를 합니다. 그리고 학교 인근 야산과 운동장에는 차량과 군 장비들을 여기저기에 풀어놓고 훈련 준비를 갖추어 놓습니다. 6교시를 마치고 각 분단 별로 선생님께서는 지정해 주시는 장소를 청소 합니다. 윤희네 분단은 운동장 청소를 맡았습니다. 운동장 가장자리에는 약 30여년 쯤 되어보이는 플라타너스 나무가 20여그루 서있습니다. 노란 잎, 빨강잎들이 가을 바람결에 무수히 날려만 갑니다. 주워도 주워도 계속 날아 쌓여만 가는 단풍잎들이 짜증스럽기보다는 쓸쓸해 보입니다. "윤희야! 안되겠다..쓸고 주워도 끝이 없어.." 정미가 빗자루를 땅바닥에 내팽겨치며 털썩 주저 앉습니다. "조금만 기다려봐..바람이 자면 좀 덜 떨어질꺼야.그때까지만 좀 참고 기다려 보자"
낙엽들은 제각기 그 모습들을 바꿔가며 포물선과 나선형을 그려갑니다. 군인 아저씨들은 민첩한 동작으로 분주하게 움직입니다. 이때 한 군인아저씨가 윤희에게 다가왔습니다. "얘야, 네 이름이 뭐니?" "네? 윤희라고 하는데요? "윤희?" "참 이름도 예쁘고, 귀엽게도 생겼구나..... 아저씨에게도 윤희 또래의 막내동생 은주가 있지...." 아저씨는 윤희를 보는 순간 동생생각이 불현 듯 떠올랐는지 윤희를 뚫어지게 바라봅니다. 그리고는 가을하늘 높이 흩어져 떨어지는 낙엽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주머니를 뒤척입니다. 어느덧, 손에는 조그마한 하모니카가 들려지고 눈을 지그시 감으며 하모니카를 불기 시작합니다. 가을이라 가을바람/ 솔솔 불어오니 푸른잎은 단풍 치마/ 갈아 입고서 남쪽나라 찾아가는/ 제비 불러모아 봄이 오면 다시 오라/ 부탁하누나
아저씨는 계속 이어갑니다.
뜸북뜸북 뜸북새/ 논에서 울고 뻐꾹뻐꾹 뻐꾹새/ 숲에서 울제 우리 오빠 말타고/ 서울 가시면 비단 구두 사가지고/ 오신다더니
아저씨는 하모니카를 입에서 뗍니다. 그리고는 플라타너스 나무에 기대 스탠드 위에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코스모스를 바라보며 고향 생각에 잠기고 있는 듯 하였습니다. "아저씨∼" "으응....?" "아저씨는 고향이 어디세요?" "으음... 경기도 이천이란다....." "아저씨는 좋겠다. 서울도 가깝고, 시골이 아니라서 외롭지도 않으실 테고...." "그렇지만은 않단다. 윤희가 생각하고 있는 것 같이 화려한 도회지가 아니란다. 아저씨 고향도 윤희가 살고 있는 이곳과 다를바가 없지. 윤희와 같은 환경속에서 아이들이 공부하며 꿈을 키우고 있단다. 부모님들도 농사를 짓고 있지...." 아저씨와 윤희는 많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금새 친해지고 있었고 알 수 없는 오누이의 정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아저씨∼. 이곳에 며칠이나 머무르고 계실꺼예요?" "군작전이기 때문에 아저씨도 잘몰라. 십분 후가 될지..... 일주일이 될는지.... 아무도 몰라." "저는 아저씨가 오래 오래 이곳에 계셨으면 좋겠어요." "아저씨도 윤희와 같은 생각이란다. 앞으로 윤희와 함께 있는 시간들이 많이 있었으면 좋겠다." 어느덧, 해는 서산으로 기울고 있었고 나뭇가지 사이로 핑크빛 노을은 갈잎을 아름답게 수를 놓고 있었습니다. 아저씨는 윤희와 아쉬운 작별을 하고 막사가 있는 곳으로 총총히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윤희는 아저씨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봅니다. 호리호리한 큰 키에 까무잡잡한 얼굴을 가진 잘생긴 아저씨..... 얼굴에 잔잔한 미소를 가득 머금고 있는 아저씨의 모습이 자꾸 떠올랐습니다. 어느새, 분단 친구들이 청소를 끝내놓고 윤희를 부릅니다. "윤희야∼ 뭐해?" "아.... 아..... 아무것도 아니야∼" 끝내 윤희는 말을 얼버무리며 묻습니다. "벌써 끝냈어...?" "벌써가 뭐야? 해가 저무는데...." 윤희와 친구들은 재잘거리며 어둑어둑한 들길을 걸어 집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길가옆 풀밭에는 이슬이 촉촉이 내리고 귀뚜라미와 배짱이 노래소리는 나지막히 포개지고 있습니다. 늦가을의 초저녁은 싸늘하기만 합니다. 친구들과 헤어져 집에 돌아온 윤희는 불이 켜지지 않은 텅빈 집안이 더욱 쓸쓸하기 그지 없습니다. 윤희는 툇마루와 방안에 불을 켜놓고 청소를 한 다음 저녁밥을 지으려고 할 때, 부모님이 피곤한 모습으로 돌아오셨습니다. "이제 오세요?" "으응....." "너도 늦었나 보구나∼!" "예...." "학교 다니느라 고단할 텐데, 집에 와야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아빠는 몹시 윤희에게 미안한 표정을 지으시며 한편으로는 흐뭇하신지 말을 이으셨습니다. "허......참∼! 세상에 이렇게 이쁜 놈이 또 어디 있나∼!" 옆에 계시는 엄마가 "거∼ 봐요. 우리 윤희 같은 애 보셨수....? 이웃마을 윤씨네 딸은 집안일 거드는 것 전혀 모른댑디다. 딸에게 시킬 생각은 하지 않고 딸이 요구하는 것들은 무엇이든지 들어준대요.... 그렇게 키워서 무엇에 쓴담...." "쯧쯧..." 엄마의 말씀에 아빠는 혀를 차십니다. 저녁식사가 끝나고 창밖을 바라봅니다. 가을 달빛은 왠지 외로워 보입니다, 찬 달빛으로 밀려오는 아저씨와의 즐거웠던 시간들의 그리움을 떠올립니다. 철모밑으로 흐르는 까만 눈동자 속에 맺혀있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애틋해 보였습니다. 스산한 가을밤은 깊어가고 윤희는 그만 잠이 들고 맙니다. 윤희는 일찍 일어나 마당도 쓸고, 엄마의 부엌일도 도와드립니다. 여느때보다도 상쾌한 아침을 윤희는 맞습니다. 아저씨를 만난다는 생각에 등굣길은 마냥 즐겁기만 합니다. 좁은 들길을 지나 박석고개를 넘으면 학교가 훤히 바라다 보입니다. 아이들이 삼삼오오 짝을 지어 등교를 합니다. 교문을 들어서자, 운동장에는 일렬 횡대로 군차량들이 수십대가 주차되어 있었고 군인 아저씨들은 분주히 오가고 있었습니다. 수업시간이 끝날때마다 윤희는 아저씨와 처음 만났던 나무 벤치로 달려갑니다. 그러나 아저씨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방과후, 윤희는 그곳을 또 찾았습니다. 마침 훈련을 나갔던 아저씨들이 돌아오고 있었습니다. 혹시나 하는 윤희의 마음은 설레이기 시작했습니다. 군복은 흙먼지와 땀으로 얼룩져 있었고 몹시 지친 모습들이 여전하였습니다. 잠시후, 지휘관으로부터 훈련 종료 지시를 받고 각자의 임무에 들어갔는지 뿔뿔이 흩어집니다. 운동장 맨 끝쪽에서 한 병사가 윤희가 있는 곳으로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윤희야∼!" "아저씨....!" "집에 가지 않고, 왜 여기 남았어....?" "혹시나 아저씨를 만날까 해서요... 어제 집에 돌아가 공부를 하려고 하니까, 저도 모르게 아저씨가 떠오르더라구요.... 처음인데도, 처음 같지도 않고, 또 친오빠같은 생각이 문득문득 들더라구요.... 저도 모르게 아저씨가 마냥 좋아보여요....." "아저씨도 너와 함께 있는 시간이면, 막내 동생을 보는 것만 같아 무척 좋았단다.때로는 업어주기도 하고, 들녘을 함께 줄달음치며 메뚜기도 잡고 냇가에서 물고기도 잡고 공부도 도와주며 행복한 날들을 보냈단다." 그러면서 아저씨는 땀에 젖은 군복 주머니에서 사진 한 장을 꺼내 보이며 말을 했습니다. "이 아이가 내 동생 은주란다.." "참 예쁘게도 생겼네요." 윤희는 은주가 은근히 부러워졌습니다. "아저씨~저도 아저씨처럼 좋은 오빠가 있었으면 좋겠어요..저는 외동딸이거든요.그래서인지 오빠가 있는 친구들을 보면 부러워요." "그럼 은주처럼 오빠라고 부르렴! 동생이 한명 있는 것보단 둘이 있는 것이 더욱 좋지않겠어?" "정말요?" "그럼~!" "이제부터 오빠라고 부를께요." "오..오.빠!" 윤희의 귀여운 양볼이 불그레 해졌습니다. 땀에 젖은 군복이 마르자, 염분 찌꺼기가 하얗게 얼룩진 흔적들이 군데군데 드러나기 시작합니다.오빠에게서 묻어나는 땀냄새와 담배 연기냄새가 함께 섞여 갈바람에 솔솔 코 끝에 와 머무릅니다. 윤희는 아빠에게서만 느껴보던 따스한 감정을 느꼈습니다. "윤희야 이제오빠는 돌아갈 시간이 되었나봐! 윤희와 같이 하는 시간이 정말 즐거웠단다. 낼 만나게 될지는 모르지만 혹시 못만나더라도 오빠에게 편지하렴!" 오빠는 수첩을 꺼내 주소를 적어 윤희에게 건네주었습니다. "윤희야! 군생활에 있어 가장 행복한 시간은 편지를 받을 때란다. 너희들이 정성껏 보내주는 한통의 편지는 아저씨들에게 많은 용기와 위안이 되고 있단다. 아주 편지하렴!" 오빠는 오른손을 치켜 흔들며 "공부 열심히 하고, 더욱더 예쁜 윤히로 자라주길 바랄게 안녕!"
싱긋 미소를 지으며 오빠는 막사가 있는 곳으로 일자 걸음으로 걸어갑니다. 윤희는 오빠의 쓸쓸한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다 봅니다. 낙엽이 뚝뚝 무심히 운동장에 날려만 갑니다. 다음날에도 낙엽은 흩날리고 병사들이 떠난 운동장에는 허전한 윤희의 가슴만큼이나 텅 비어 있었고 이따금 가을 바람에 실려오는 듯한 오빠의 하모니카 소리가 들리는 듯 했습니다. 까무잡잡하게 잘생긴 오빠! 지금도 윤희의 눈앞에는 오빠의 잔잔한 미소가 자꾸자꾸 어려만 가고 있었습니다.
*본 작품은 월간 아동문학에 상재되어 있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