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 업 회 갑 년
1963년도에 동북고등학교를 졸업을했으니
2024년도 올해가 동북고등학교 졸업 회갑년이다.
학교 연혁을 뒤적여본다.
1953년 6월4일 재단법인 창인학원이 설립 이계하선생 이사장 취임
1953년 8월 1일 동북중학교, 동북고등학교 명칭설립 인가 ,
이창기선생 초대 교장 취임, 조양중고등학교 부산분교 인수 개교.
1953년 9월 10일 서울 본교 개교
1954년 3월 10일 동북중학교 제1회 졸업식
1954년 4월 1일 부산 분교 환도,
서울특별시 장충동2가 166번지에서 본교와 통합.
이곳이 조선반도 전체를 손아귀에 쥐고 한민족을 말살시키던 일제 강점기 시절에
왜놈들이 세운 절간 터전이다.
바로 여기에 동북중고등학교를 창립한 것이다.
교정 안에 있는 동굴속에 해골들이 발견되기가 몇번이던가.
아마도 한민족을 살해하고 묻었던 곳이리다.
1980년 12월 24일 서울 강동구 둔촌동 교사로 신축 이전하고
1981년 5월 31일 지하 1층, 지상 4층 60실 준공한 것이다.
이상으로 개략적인 동북중고등학교 연혁이리다.
1951년 1,4후퇴 피난 나온지 6년이 지난 때이다.
지금은 서울 중구 을지로4가와 5가 사이에 중부시장 자리이다.
가마니를 깔고 서너평 되는 판잣집이다.
부모님 형제자매 모두 여섯식구의 보금자리(?)이다.
곳곳에 판잣집이 30여채가 있었지 않았을까 짐작이다.
변소도 판자로 얽어 놓은 것이다. 그 당시에는 화장실이 아닌 변소라고 한다.
쪼그리고 앉으면 밑에는 대소변이 그득한 통통이다.
지렁이 만큼 커다란 허어연 것들이 꿈틀 거리고 있다. 회충이다.
1년에 한번 국민학교에서 회충약이나 십이지장충약을 배포를 한다.
선생님 앞에서 바로 복용하란다. 아마도 복용치 않고 버릴까 걱정인 모양이다.
1957년에 서울 영희국민학교를 졸업이다.
학교에서 무엇을 어떻게 배웠는지 생각도 없다.
책가방은 언감생심으로 보자기가 고작이다.
국민학교를 졸업할 때 즈음으로 기억한다.
서울 성동구 금호동 4가 1483번지로 이사를 한다.
집이라고 해야 흙집에 지붕은 천막뿐이다.
방 두칸에 부엌 기껏 해야 10여평 정도 되리다.
안방에는 부모님과 맏아들 그리고 남동생의 보금자리이다.
건너 방은 큰 누님과 작은 누나 두분의 거처지이다..
겨울에는 이불을 덮고 숨을 쉬면 하얀 멍개구름이 시야를 가리곤 한다.
머릿맡에 자릿기의 물은 꽁꽁 얼어버린다.
피난 나온지 6년여 지난 때이다. 첫 탄생한 우리 가족 여섯식구의 안식처가 아닌가.
거대한 궁전이 따로 있는게 아니지 안을까.
인간의 형편에 따라 생각은 제각각일게다.
그것도 10대 후반의 외사촌 형의 주도로 지은 곳이다.
여름이면 천막지붕에 콜탈을 입힌것이 줄줄이 녹아 내리기도 몇번이던가.
서울에 있는 중학교 입시를 치른다.
1차로 경동중학교, 2차는 광희중학교 모두 불합격이다.
한달여 후에 아버지에 이끌려 동북중학교에 들어선다.
입학시험은 커녕 무조건 입학이라고 한다.
동북중고등학교라는 곳은 그 당시 최하급(最下級)으로 똥통같은 곳일 게다.
중학교 2학년 년말로 기억하고 있다.
정월 보름달이 화안하게 비추고 있는 밤이다.
집 바로 뒤에 자그마한 산기슭기이다. 그곳에 홀로 오른다.
세찬 겨울바람으로 몸둘바를 모르겠다.
" 하늘에 계신 하느님이시여 ~ ~ ~ , 하느님께 맹세를 올립니다,
공부를 열심히해서 반드시 좋은 고등학교에 입학을 하겠습니다.
거듭 하느님께 빌고 빌며 약속을 드립니다 "
난생 처음 저 높은 곳에 계신분에게 내 소원이자 꿈을 기원드리는 순간이다.
나 홀로의 처절한 다짐이며 앞날을 내다보는 순간이 아니랴.
어찌하여 이같은 결심을 뱉은 것일까.
생각만으로도 신기하고 기특한 녀석이다.
하루 세끼 보리밥이라도 먹으면 다행인 그 시절이다.
내 오마니는 을지로 5가 버스 정류장 앞에 조그마한 나무상자이다.
양담배 몇개 껌 눈깔 사탕 오징어 몇 마리가 전부이다.
여름이면 한말정도 크기의 유리통이다. 수도물을 가득 채운다.
어름 몇조각 수박 서너 덩어리 사카린인지 당원인지도 첨부한다.
한마디로 시원한 냉차 장사의 모습이다.
학교가 끝나면 책보자기를 집어던지고 달려 나가곤 한다.
화 ~ 안한 모습의 오마니는 시원한 냉차도 눈깔사탕 오징어 다리등도 자식들에게 거침이 없다.
아버지는 서울운동장 뒷켠에 조그마한 판잣 가게를 차린 것이다.
토정비결 책을 도매도 하시고 이름도 지어 주시고 1년 신수도 보아주신다.
이북에서 우체국장도 마다 하시던 분이다.
자식을 위한 여섯 식구를 먹여 살리려니 오죽했을까.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무너지고 눈물을 끝없이 흐르곤 한다.
재학시절에 동북중고등학교는 대한민국의 축구명문이었다.
결승과 준결승전에는 전교생이 축구장 서울운동장으로 응원이다.
" 남산에 정기 뻗혀 장충단 위에 희망의 종이 우는 배움의 마을
정의에 길을 밝혀 민족에 등불 나날이 커나가는 대한의 동북
성실한 꽃송이 피고 또 피여 세계에 날리세 길이 빛내세 ~~~ "
나무 딱대기를 치면서 교가를 목이 터져라 부르짖곤 한다.
고등학교를 졸업후 30여년이 지난 때이다.
9회 졸업 동기회장 시절이 아닌가.
40여명이 승차한 관광버스 1대를 대절이다.
동북중고9회 졸업동기들과 경기도 남이섬으로 향한다.
고3때 1반 담임이신 김효경선생님, 2반 담임 오철 선생님은 사정상 불참이시다.
3반 담임의 임순균선생님, 화학 담당인 문홍관선생님,
그리고 강인제 교감선생님 네분을 함께 모신것이다.
선생님들과 함께 축구시합을 한다.
넘어지고 자빠지고 웃음꽃은 끝이 없다.
쐬주도 한잔씩 걑들이며 지난날의 추억에 빠지기도 한다.
시간은 벌써 서산에 해가 스미고있다.
누가 먼저랄것도 없이 서둘러 버스에 오른다.
돌아오는 버스속에서 동기회장이 마이크를 잡는다
" 오늘 1963년도 졸업한 9회 동기들과 함께 해주신 선생님들께 다시 한번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저희들은 물론이며 선생님들께서도 제자들과 오늘같은 모임은 처음이리라 생각합니다.
재학시절을 돌이켜 봅니다.
세계사 담당 김효경 선생님, 수학2 담당 임순균선생님 , 화학담당 문홍관선생님,
강인제 교감선생님 그리고 오늘 이곳에 함께 못한 선생님들
모든분들도 제자들에 대한 관심과 사랑,
학습지도는 대한민국 최고의 스승일 것입니다.
항상 존경하고 마음속으로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지난 날을 돌이켜보면서 선생님들께 여쭤보고픈 것이 있습니다.
첫번째는 중학교 3학년때입니다.
고등학교 진학 입시시험을 왜 경기 서울 경복등 최고 1류중에 최상급 고등학교에만 국한시킨 것입니까.
최하류인 동북중학교에서 아무리 성적이 뛰여난 학생이라도 모두 낙방은 당연지사 아닙니까..
무슨 이유로 어떤 사정이 있었는지 지금도 답답한 심정뿐입니다.
두번째는 학교의 월사금(학비)을 납입을 못한 학생들의 문제입니다.
6,25 전쟁이 발발한지 몇년도 지나지 않은 시절입니다.
출석이름을 부를때는 이름도 부르지 않습니다.
집에 가서 월사금을 갖고 오라고 합니다.
집에 가면 노점상을 하시는 부모님들이 계실리가 없습니다.
그런 학생들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장충단공원 나무 밑에 쪼그리고 앉을 밖에 방법이 없습니다.
흐르는 눈물이 앞을 가리우고 서글픔에 가슴이 무너집니다.
하교(下校)시간에 맟추어 집으로 들어섭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무표정한 행동이 전부입니다.
혹여 부모님이 아시면 얼마나 속이 상하실까.
동네 친구들과 만나 화풀이로 싸움도 합니다.
이상으로 질문을 마칩니다.
어느 선생님이라도 좋습니다.
그 당시의 상황을 구체적으로 말씀을 부탁드립니다."
동기회장인 녀석이 부르짖는 애끓는 질문이다.
어느 한분도 대답이 없으시다.
흔들리는 버스속에는 침묵만이 흐르고 있을 뿐이다.
며칠후에 강동구 천호동 태평양약국으로 김효경선생님이 찾아오신다.
반갑기도 하고 깜짝 놀랍기도 하다.
약국 뒷편에 있는 식당으로 모신다. 알콜도 당연히 한잔하신다.
" 그 당시는 너희들이 실력이 예전보다
괜찮아서 학교 방침대로 전달한게다.
선생님들도 학교방침에 따를밖에 방법이 없었다.
항상 너희들에게 미안하게 생각코 있다.
어쩌겠는가, 이해를 해라, 미안하다."
씁쓸하고 답답한 모습이다.
그리고 또 며칠이 지나 임순균선생님도 찾아오신다.
역시 마찬가지의 답변을 듣는다.
지금은 선생님들이 어느 곳에서 무엇을 하며 지내고(?) 계실까.
그립고 만나뵈고 싶고 안타까움이 지난 날의 추억을 불러오곤 한다.
지금 글을 더듬고 있는 제자는
1951년 1,4후퇴로 이북 황해도 봉산군 문정면 어수리에서 남쪽으로 피난이다.
나이는 만6년하고도 4개월여 정도일 때다.
1944년 7월16일(음)이 생일이니 태여난지 29,239일이 흐른 오늘 2024년 9월21일이다.
오늘로 계산을 하면 만 80세를 넘긴 것이다.
선생님들의 연세는 몇이신가.
우리들 제자들보다 최소한 20여년의 년배(年輩)이시다.
120세 천수(天壽)는 아니시고 상수(上壽)이신 100세 이상은 되리라 본다.
요즘도 장충단공원을 마주하노라면 지난 세월의 아픔이 가슴을 저밀곤 한다.
일본열도는 사라지리다
대마도(쓰시마)는 일본과 한국을 가르는 대한해협에 있다.
인구는 겨우 29,670명 (2020년 추계)이고 면적은 708.5㎢이다.
한국에서 가장 큰 섬인 제주도의 면적은 1850.3 ㎢ 이며
인구수는 676,832명( 2023년 6월 기준)으로 행정안전부 주민등록인구 이다.
10,000개가 넘는 섬이 있는 일본도 홋가이도, 혼슈, 시코쿠, 규슈 4개의 본섬만이 제주도보다 클 뿐이다.
쓰시마 면적은 708.5 ㎢ ÷ 1850.3 ㎢ = 0.3829 . 제주도의 38%정도이다.
인구 밀도는 29,670명(대마도인구) ÷ 676,832명(제주도인구) = 0.04383으로
제주도의 약 4%에 지나지 않고 있다.
대마도는 5개의 바위섬으로 이루어졌으며, 가미아가타[上縣]와 시모아가타[下縣]가 가장 큰 섬이다.
주요도시는 행정 중심지인 이즈하라[嚴原]와 게치[鷄知]이며 주민 대부분이 어업에 종사한다.
조선시대에는 조선통신사들이 방문한 역사가 비문(碑門)으로 여러 곳에 세워져 있다.
일본 신화에 따르면 창조 신들이 쓰시마를 일본 최초의 섬 중 하나로 만들었다고 한다.
이 열도는 역사상 한국과 일본 사이의 중계지로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마음에 새겨둔 쓰시마 한국전망대이었으나 현재는 공사중으로 오르지도 못한 한국전망대이다.
맑은 날에는 부산광역시 전지역과 경상남도 거제시를 한 눈에 바라 볼 수 있기도 하다.
일본의 한국 문화를 쉽게 접할 수 있는 특성을 갖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별로 볼만한 관광지도 없는 기대 이하의 대마도가 아닌가.
앞으로 20여년 뒤에는 대마도는 어떤 모습이련가. 현재 주민들은 거개가 모두 70세 이상의 노객들이다.
이들의 노객들이 전부 사라지는 날도 오리다.
일본의 젊은이들은 쓰시마가 어드메에 있는지 관심밖이다.
오롯이 99%이상이 한국관광객 덕분에 대마도는 유지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리라.
그나마 한국인 마저 발길를 돌리고 나면 대마도는 무인도(無人島)로 반드시 전락하고 말것이다.
일본은 아시아 대륙의 동쪽에 활 모양으로 늘어서 있는 일본열도(日本列島, the Japanese Islands)이다.
환태평양 조산대(環太平洋造山帶)의 일부로 지질 구조가 복잡하며 지진과 화산 활동이 활발하다.
홋카이도(北海島), 혼슈(本州), 시코쿠(四國), 규슈(九州)의 네 개의 큰 섬과 3,500여 개의 부속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무인도(無人島)까지 합하면 약 10,000여개의 섬으로 구성된 곳이다.
일본열도는 수시로 태평양에서 발생하는 지진이나 태풍이 빠짐이 없이 엄습하는 곳이다.
엄청난 해일을 ( 쓰나미つなみ,津波,津浪 ) 몰고오며 마을 곳곳에는 산사태도 일어나고 도시 전체가 쑥대밭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지기도 한다.
인간의 생명이라도 부지하면 다행이렸다. 수 많은 생명이 추풍낙엽 신세가 아니랴.
최근에 발생한 지진을 다시 들여다 본다.
2011년 3월11일 금요일 오후 2시46분 일본 동북(도호쿠)지방 태평양해역
해저 깊이 24km에서 규모 9.0의 동일본 대지진이 발생한다.
거대한 쓰나미로 후쿠시마 제1원전에서 수소폭발과 방사능 유출 사고이다.
가동중이던 원자로의 핵분열은 자동으로 긴급 억제되지만 전력공급이 중단으로 냉각시스템이 마비돼 핵연료봉이 고열에 노출돼 수소폭발이 일어난다.
방사능 물질이 묻은 수증기가 외부로 유출된 것이다.
1만5890명이 숨지고, 2589명이 실종된다. 정신적 고통으로 인한 자살, 병사 등 직간접 사망자를 합하면 모두 2만명이 넘는 희생자가 발생한다. 해일로 침수된 땅의 면적은 561㎢, 해일 피해를 본 농지 면적은 2만1480ha, 어선피해는 2만 8,600여척으로 집계되고 있다.
2011년 6월 일본이 발표한 피해규모는 약 16조9천억엔(약182조원)이다.
여전히 피난 생활을 이어가는 사람은 전국적으로 17만여명에 달하며 후쿠시마 원전 폐로까지는 40년 가까이 걸릴 것으로 예상된다.
방사능 오염수를 바다로 방류를 하고 있다. 어패류뿐 아니라 바다물 속을 전부 오염시키고 있는 망발이다.
"오염수 방류 계획이 국제 기준에 부합한다"는 최근 국제원자력기구(IAEA)가 일본 후쿠시마 내용의 최종보고서를 발표도 한다.
"나도 (오염수를) 마실 수 있다. 그 안에서 수영도 할 수 있다"고 방한한 라파엘 그로시(62) IAEA 사무총장이 언론 인터뷰에서 주절인 것이다.
한발 더 나아가 "후쿠시마보다 북핵 문제를 더 걱정해야 한다"고 헛소리도 하고 있다.
인근 국가들 거개가 강력히 반대하고 있는 핵오염수 방출이다.
중국등은 모든 수산물을 일본으로부터 수입을 모두 차단하고 있다.
바로 가장 가까운 곳인 대한민국 윤석열 정부의 태도는 어떤가.
여타 한일관계의 첨예한 문제도 한마디로 무릎을 끓고 받아들이고 있는 모습일뿐이다.
" 국민들에게 후쿠시마 오염수에 오염된 해산물을 국민이 먹을 수 있도록 하겠다."고
일본총리에게 약속도 하고 있지 않는가.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일본에 대한 충성심의 극치이다.
대한민국 정부의 대통령으로서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는 어드메로 갔는가.
우왕좌왕 제대로 항의 한번 목청을 높인 적이 보이지도 않는다.
이번 방사능 오염수 방출 문제뿐이 아니지 않는가.
윤석열정부에 검사나 검찰수사관 등 전현직 검찰공무원 136명이 들어가 있다.
1945년 8월15일 36년간의 일제 쪽발이 놈들의 식민지 치하에서 벗어나는 독립기념일이다.
그 이후로 남한의 대한민국이 2023년도 현재 20대 대통령으로 13명의 대통령이 스쳐 지나간 것이다.
이들 중에서 제대로 대통령으로서 국가와 국민을 위한 정부로 내세울만한 사람이 누구이더냐.
이름을 구태여 불러보기도 싫다.
탄핵을 받은 사람이 두명이며 군사쿠테타의 주인공들도 불법 사기등으로 범죄자인 인간도 있다.
1년하고도 반년이 흐른 지금 윤석열정부는 한마디로 " 대한민국은 검찰공화국"으로 생각될 뿐이다.
그들의 놀이터이며 국민은 안중에도 없이 저들끼리 웃고 떠들고 지지고 볶고 검찰공원(檢察公園)인 모양이다.
곧 1년 이내로 저들에겐 또 다시 탄핵이라는 국민들의 올가미를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일본 관동대지진(関東大地震 간토다이지신) 은 1923년 9월1일 11시 58분(일본 표준시)에 일본 도쿄도등을 포함한 미나미칸토 지역을 중심으로 일어난 해구형지진이다.
일본은 계엄령을 선포해 조선인과 사회주의자들이 폭동을 일으키려고 한다는 유언 비어를 꾸며 퍼뜨린다.
이에 격분한 일본인들은 자경단을 조직, 관헌들과 함께 조선인을 마구 체포 · 구타 · 학살한다.
우선 조선식 복장을 한 이는 바로 살해당한다. 학살 사실을 알고 신분을 숨기기 위해 일본식 복장을 한 조선인들을 식별해 내기 위해 어처구니 없는 조치도 한다.
조선인에게 어려운 일본어 발음 한국어에 없는 종종 정확하게 발음되지 않는 (十五円五十銭じゅうごえんごじっせん,쥬고엔 고주센)을 시켜본다. 발음이 이상하면 바로 살해한다.
조선인뿐만 아니라, 중국인, 지방의 일본인들도 발음상의 차이로 조선인으로 오인받고 살해당하는 등,
학살은 마구잡이식이다.
치안 당국은 "조선인들이 폭동을 저지르려고 한다"는 이야기가 헛소문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자경단의 살상 대상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았으며 상당수는 암매장이다.
학살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에는 도쿄에 흐르는 강물에는 시체의 피로 인해 핏빛으로 물들었다고 한다.
학살 사건으로 인한 사법적 책임 또는 도의적 책임을 진 사람이나 정부 부서는 전혀 없다.
한일합방으로 조선인을 12만여명을 노동자로 일본으로 끌어들인 상태이다.
이중에 반 이상이 넘는 6만명 이상이 살해되고도 모자랐을 것이 아니랴.
하지만 일부에서 기록을 보면 피해자가 6,066명이라고 당시 일본정부는 겨우 233명으로 추산되어 있을뿐이다..
일본어도 서틀고 얌전하고 착한 조선인은 저들에게는 인긴도 아닌 개만도 못한 식민지의 노예일뿐이리다.
유관순열사를 비롯하여 수많은 독립투쟁 열사 의사들이 일제치하에서 목숨을 바친 것이다.
그중에 안중근은 1879년 9월 2일 황해 해주부(海州府) 광석동(廣石洞)에서 아버지 안태훈(安泰勳)과 어머니 조마리아(趙마리아) 사이에서 3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난다.
태어날 때 북두칠성과 같은 일곱 개의 점이 가슴에 있다.
북두칠성의 기운을 받고 태어났다는 뜻으로 할아버지 안인수가 응칠(應七)이란 이름을 지어 준다.
아버지 안태훈은 자임(子任)이란 아명을 지어 주기도 했다.
1909년 10월 26일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만주를 찾아온다는 소식을 접한다.
즉각 의거를 추진해 간다.
의병 재기를 도모하던 상황에서 이는 더없이 좋은 기회가 아닐 수 없다.
자신의 활동 지역에 적장(敵將) 이토히로부미가 찾아온 것이나 다름없다.
"여러 해 소원한 목적을 이제야 이루게 되다니 늙은 도둑이 내 손에서 끝나는구나"하며
안중근의사는 남몰래 기쁨의 눈물을 흘렸으리라..
그리고 잠시도 지체 없이 즉각 이토 히로부미 포살의 결행을 위한 준비 작업에 들어간다.
1909년 10월26일 하얼빈에서 이토히로부미(伊藤博文)를 권총 4발로 사살한다.
1910년 3월 26일 하얼빈 의거 사형집행으로 만 30살의 나이인 청년의 삶을 마감한다.
이와같은 애국지사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대한민국이 존재하는 이유이기도 하리라.
일제 식민지로 36년간 저들의 군화발에 짓이겨 인간도 아닌 노예로 살아온 치욕의 역사이다.
1945년 8월15일 대한민국으로 독립된 날이다. 흐른 세월도 78년이나 된다..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이 아직도 식민지 노예로 착각하고 있는 계다짝의 일본 쪽발이 들이다.
일본이라는 섬나라 쪽발이들은 배상은 커녕 " 잘못했습니다. 미안하나이다 "라는 한마디 사과도 없지 않는가.
이 지구상에 둘도 없는 인간 이하의 동물보다도 더 못한 나라도 아닌 집단이리다.
정의의 편에 서서 천체의 모든 자연생태적 만물에게 삶과 죽음을 관리주도 하고 계시는 하느님이시다.
권선징악(勸善懲惡)의 실권자 하느님은 절대로 일본 쪽발이들을 용서치 않으리다.
언젠가는 일본열도 전체가 지진과 태풍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쾌거(快擧)의 순간도 반드시 오리라 믿고있다.
비운(悲運)의 덕혜옹주(德惠翁主)
덕혜옹주는 1912년 5월 25일에 조선 경기도 경성부 덕수궁(현재 서울 중구 세종대로 99)에서 태여난다.
고종이 59세일 때 얻은 늦둥이이자 고명딸이며 생모는 복녕당(福寧當) 귀인 양씨이다.
순종 의친왕 영친왕의 이복 여동생이다.
덕혜(德惠)는 1921년 이복오빠 순종이 내려준 작호이다.
고종에게는 일찍이 9남 4녀의 자식이 있었지만 대부분 어렸을 때 죽는다.
장성할 때까지 생존한 사람은 복녕당 양씨 소생의 덕혜옹주까지 3남 1녀뿐이다.
덕혜옹주는 고종의 지극한 사랑을 받으며 애지중지 키워진다.
덕혜옹주는 일제의 식민지가 되어 희망을 잃고 살아가던 한국인들에게
조선의 추억을 일깨워주는 상징이기도 하리다.
하지만 그녀는 발랄하던 어린 시절 아버지 고종이 의문의 죽음을 당한 뒤부터 공포에 휩싸여 살았다.
신식 여성교육이라는 명목으로 일본에 끌려간 뒤에는 우울증에 고독감까지 겹쳐 실어증(失語症)에 걸린다.
몇년뒤 어머니 귀인 양씨의 죽음으로 덕혜옹주의 심리 상태는 벼랑 끝까지 몰린다.
등교를 거부하고 심한 불면증 증세를 겪어 영친왕 저택과 별장에서 요양을 한다.
결국 9월 정신장애인 조현병 진단을 받게 된다.
1930년 10월 소 다케유키와의 결혼이 결정되었다.
소 다케유키는 옛 쓰시마번주 송의달(宗義達)의 양자로 들어가 백작의 지위를 계승한 화족이다.
혼인이 결정될 무렵 도쿄교육대학 영문과 3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같은 해 5월8일 도쿄에서 결혼식이 순일본식으로 거행된다.
정신분열증으로 비화되고 냉혹한 일제는 정략결혼을 통해 그녀를 더욱 비좁은 새장 속에 가두어 버린다.
그 때문에 병세가 심화된 그녀는 딸과 생이별을 한다.
말년에 고국으로 돌아와 창덕궁 낙선재에 안주를 한다.
이미 영혼이 떠나버린 그녀의 육신이다.
아득한 유년의 기억만을 남긴 채 파랑새처럼 저 세상으로 훌쩍 날아가 버린 것이다.
이후 옹주는 1930년 봄 무렵 신경쇠약 증세를 보이기 시작한다.
등교를 거부하고 심한 불면증 증세를 겪어 영친왕 저택과 별장에서 요양을 한다.
결국 9월 정신장애인 조현병 진단을 받게 된다.
옹주는 결혼 당초부터 거의 완전한 실어증 증상을 보인다.
그녀의 조현병은 상당히 진행되어 있었다.
전혀 말을 하지 않고 고개만 숙이고 있을 뿐이다.
계속 소리내어 실소하는 병적인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1931년 증세는 호전되었고 같은 해 여자학습원 본과를 졸업한다.
이후 옹주는1932년 8월4일에는 외동딸 송정혜(宗正惠)를 낳는다.
병세가 심화된 그녀는 딸과 생이별을 한다.
출산 이후 조현병(정신병)이 더욱 악화되어 1946년부터 마쓰자와 도립 정신병원에 입원한다.
1947년 10월 평민이 되면서 자금 지원은 중단되어 생계와 치료에 곤란을 겪게 된다.
덕혜옹주의 입원비는 영친왕이 부담한다.
입원이 장기간 지속되자 소 다케유키는 덕혜옹주와 이혼한다.
사방이 가로막힌 정신병원에서 청춘을 흘려보내다 남편에게 버림도 받는다.
1956년 딸 마사에가 산에서 자살하겠다는 유서를 남기고 실종된다
옹주는 1962년 1월26일 38년간의 일본 생활을 끝내고 대한민국으로 영구 귀국한다.
대한민국 국적 회복하고 같은 해 2월8일 ‘이덕혜’로 대한민국 국적을 회복이다.
이후 창덕궁 낙선재 내의 수강재로 옮겨 기거한다.
옹주가 환국하고 나서 10여 년이 지나 덕혜옹주의 전 남편 소 다케유키가 창덕궁 낙선재를 방문한다.
지배인 이공재에게 전 부인을 만나게 해달라고 간청을 한다.
"고종의 딸하고 원치도 않는 정략결혼을 강행하고, 끝내 정신병원에 집어넣고 이혼한 당신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 옹주가 당신을 만나게 된다면 오히려 옛 생각이 나서 병세가 더 악화될 것이다. 그러니까 당신 같은 사람은 면회를 일절 허용치 않으니까 돌아가라." 하고 지배인은 매몰차게 거절해 버린다.
이미 영혼이 떠나버린 그녀의 육신이다.
1989년 4월21일 오전에 서울 종로구 와룡동 창덕궁 낙선재에서 77세로 영면(永眠)에 들어간다.
아득한 유년의 기억만을 남긴 채 파랑새처럼 저 세상으로 훌쩍 날아가 버린 것이다
4월 25일 창덕궁수강재(壽康齋)에서 장조카이자 둘째 오빠 의친왕의 종손이 상주가 되어 영결식을 치른다.
유해는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의 홍유릉 부속림에 안장된다.
조선 마지막 비운의 옹주 "덕혜옹주 결혼기념비' 영빈관터였던 '조선통신사접우비'가 있다.
망국(亡國)의 한(恨)을 품은 채 비운(悲運)속에서 삶을 살다 역사속으로 사라진 덕혜옹주이다
덕혜옹주는 동요를 짓는데에도 능하였는데,
소학교 재학 시절 지은 동요 한 편의 가사는 다음과 같다.
飛行機
南の空から飛んできた
大きなおはねの飛行機が
たくさんビラをまいている
ビラは金ビラ銀ビラ
わたしはそれがほしいけれど
風の神様つれてゆく
どこへ行くかと見ていれば
とんびの所で遊んでいる
비행기
남쪽 하늘에서 날아온
커다란 날개 단 비행기가
삐라를 잔뜩 뿌리고 있다
금색 삐라 은색 삐라
나는 그 삐라가 갖고 싶은데
바람의 신이 데리고 간다
어디로 가는지 보고 있자니
솔개가 있는 데에서 놀고 있다
고 종 명(考 終 命)
“ 내가 아직 못 해 본 것은 고 종 명(考 終 命)이야 ”
“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는데 그게 어디 내 마음대로 되겠는가. “
어느 날 무심코 지나치던 TV 화면에서 흘러나오는 느릿 느릿한 목소리의 주인공에 시선이 고정되고 만다.
배경은 어느 산골 오지로 사면은 산으로 에워 쌓이고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깊이 패인 주름살이 크로즈엎이 되고 있는 순간이다.
두 분이 부모님의 중매로 백년가약의 혼례를 맺은지 60년이 넘는다.
회갑혼(回甲婚)을 치른지도 4년이 지난 80대 중반에 접어든 세월이다.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사는 이야기가 잔잔하게 이어지고 있다.
“흙으로 지은 집이 처음엔 그렇게도 대견하고 대궐 같더니 60년이 지난
지금은 이렇게 오막살이로 형편 없이 되어 버렸으니 내 ~ 원 ~참 ~ ”
할머니의 넋두리는 계속되고 있다.
사실은 가난이 너무 지겹고 사람이 그리워 보따리를 수 없이 싸기도 했으리다.
허나 친정 아버지가 너무 무서워 한 번도 마음 내킨대로 해본 적은 없었다고 .
자식들은 줄줄이 여섯이나 낳아서 제대로 먹이지도 입히지도 공부도 못 시켰지만
지금은 모두 도회지로 나가 손자 손녀들 잘 낳고 다 잘 살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저희들이 바빠서 못 오니 일년에 한번 보기도 힘들다는 가슴을 치며 할 말도 없다.
어느새 할머니의 주름진 눈가엔 알게 모를 원망같은 눈물이 거칠은 뺨을 적시고
긴 한숨소리에 가슴은 무너지고 만다.
쓸 데 없는 소리한다며 면박을 주는 할아버지의 얼굴엔
아내에 대한 연민과 미안하고 안스러움이 그대로 배어나고 있다.
“ 그래도 나와 님자는 오복을 타고 난 사람들이야 ”하며 분위기를 바꿔 보기도 하지만
아내는 돌아앉아 하염없는 눈물로 마음을 추스르려 애쓰는 모습이다.
아마도 남편의 마음도 무너지나 보다.
아내는 치마 폭을 훔치며 텃밭으로 훌쩍 나가 버린다.
할아버지의 삶에 배어나는 절절한 이야기는 대학 강단에선 들을 수 없는
살아 숨쉬는 잔잔한 감동으로 닥아 오고 있다.
나는 이런 산골짜기에 살지만 오복중에 네 가지는 갖고 있으니 복에 겨운 사람이 아닌가.
한 가지 남은 고종명(考終命) 이것은 나도 모르고 마누라도 모른다는 말씀이다.
“오복이 무엇이냐면 말이야
壽 富 康寧 攸好德 考終命
나는 팔십이 넘게 살고 있으니 수(壽)를 누렸고 자식도 많이 낳고 부족한게 없으니 부(富)도 가진 것이다,
이렇게 팔 다리 멀쩡해서 나무도 패고 산 나물을 캐러 산에 오를 정도면 강녕(康寧)한 게고,
나는 스스로 남에게 베푼 것은 없으나 선비 정신으로 자식들에게 덕(德)을 쌓으라 강조하고 살고 있으니,
이 또한 유호덕(攸好德) 하달 수 있는 게다.
허지만 아직 못 다한 것은 고종명(考終命)일 뿐이지 - - - ”
자기 수명대로 천수(天壽)를 다 하고 편안히 눈을 감고 삶을 마감할 수만 있으면
그 때야 고종명(考終命)으로 오복(五福)을 다 가진 것이리라.
할머니가 깻닢을 한 소꾸리 따다가 한 묶음씩 묶으면서 하는 말씀은
“ 이걸 읍내에 장날 갖다가 팔아야 할아버지가 좋아 하시는 고등어랑 막걸리를 사다 드린다 ”고
함박 웃음을 머금으시고 있다.
시장 상인들은 40개씩 묶어서 3개 천원을 받는다,
할머니는 시장엔 40개씩 묶어 4개씩 팔곤 하는데 그런대도 어떤 사람은 5개씩 집어 가지고 간다고 한단다,
하지만 밑지지는 않으니 다 팔고 집에 돌아올 때가 좋다는 웃음이다.
사람이 죽으면 아무 것도 못 갖고 가는데 웬 욕심들이 많은지 모르겠다고 한다.
“ 인간은 말야 ! 공수래(空手來) 공수거(空手去)야 ” 하며 옆에 있는 남편과 약속이나 한 듯이
앞에 놓인 깻잎 보따리를 한사코 들려주시면서 하시는 한 말씀이 가슴에 와 닿는다.
“ 신노심불로(身老心不老) ” 마음은 아직 이십 삼십대 청춘인데
몸이 말을 안들으니 나이는 어쩔 수 없나봐”
어서 가라고 손을 흔들며 파아란 하늘 쳐다보시는 모습이 아마도 사람이 그리워 못내 아쉬워 하시는가 보다.
화면속에서 하신 할머니의 말씀이 내 어릴 때 어머님이 내 아버님께 하시던 그 모습이 가슴을 흔들고 있다.
언제나처럼 하얀 모시옷을 빳빳이 풀을 먹여 정성껏 아침마다 다려 아버님께 입혀 주시곤 한다.
그 손길과 눈길에서 말은 없어도 흐뭇해 하시던 어머님 모습에서 우리 한국의 전형적인 어머니 상을 보곤 한다.
그리고 아버님이 그 토록 즐기시던 막걸리와 녹두 빈대떡의 향수가 묻어 난다.
“ 님자 ! 또 섞었군 ” 하시며 어머님을 매몰차게 나무라시지만 내 어머님은 한 마디 대꾸도 없으시다.
한 입 잡수시곤 늘 하시던 불만 섞인 한 말씀이 오늘 따라 가슴을 적시고 있다.
이럴 땐 제 어린 마음에 무척이나 속상했고 어머님이 야속하기도 하고 아버지가 밉기도 했으리다.
내 아버지는 순수 녹두로만 빈대떡을 원하시지만 우리 오마니는 한번도
남편의 말을 절대로(?) 들으신 적이 없나 보다.
다른 모든 일에는 절대 복종하면서도 식구가 많으니 비싼 녹두만으론 감당이 않됐다고,
이 말씀도 우리가 훌쩍 커버린 다음에야 들려준 이야기이다.
화면속에 두 분을 보며 나를 낳아 키워주신 부모님과 머지 않아 닥쳐올 내 모습과 과연 저렇게 아름답고
애틋한 모습으로 내 후손 자식들에게 비춰 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뇌리를 스치고 ---
“ 수(壽) 부(富) 강녕(康 寧) 유호덕(攸 好 德) 고종명(考 終 命) ”
추석 명절 며칠 전 부모님이 계신 공원 묘지에 가서 너무나 몰라 보게 뒤덮여 버린 잡초를 뽑으며
살아 생전에 항상 하시던 말씀이 가슴을 흔들곤 한다.
“ 내가 죽으면 너희들이 어떻게 먹고 살며 어떻게 고향을 찾아 가겠느냐 ” 며
하염 없이 눈물을 흘리시던 그 모습이 이 못 난 아들을 더욱 초라하게 하고 있다.
그래서 난 언제부터인가 추석이나 구정 명절이 돌아오면 그토록 답답하고
고향 찾아 몇 시간씩 고속도로를 메우는 차량을 보며 얼마나 부러워 했는지---
실향민의 아픔을 그 누가 그 언제나 어루만져 줄 수 있을까 하는 서러움에 밤 잠을 설치곤 한다
입 학 60 주 년
대한민국에서 최상위권인 S공대를 두번이나 낙방을 한다.
보잘 것 없는 인간이 갈곳은 어디이더냐.
대학이고 뭐고 삶 자체를 포기할 뿐이다.
앞이 안보일 정도로 눈보라가 엄청 퍼붓고 있다. 발길은 한강이다.
" 어서 들어오너라 " 파아란 물결이 손짓이라도 하는 모습이다.
한강 난간으로 오른다.
" 정나마 ~ 야 ~ 네레 어드메 있는건가. 배가 고프겠구나 야 ~ "
애절한 오마니의 한마디이다.
정신이 버쩍든다. 돌아설 밖에 어쩔 수 없다.
" 정남아 ~ 성균관대학교 약학대학이 서울 공대보다 훨씬 좋은 곳이야," 몇번씩 누님의 부탁이다.
성대약대 입학시험 때이다. 경쟁률이 15대 1이나 된다.
" 이게 뭐야, 여기도 또 낙방이란 말인가 "
합격자 발표날이다. 평생 처음 오마니가 함께 하신다.
이름을 확인하노라 수 많은 사람들이 엉켜 있다. 비집고 들어간다.
" 四三三 崔正南 " 합격이다.
" 오 마 니 ~ 내레 붙었수다래 ~ " 그렇게 환한 내 오마니의 모습 처음이다.
순간의 선택이 인간들의 삶의 전체를 흔들고 바꾸는 것이다.
숙명적인 운명의 찰나가 아니랴.
세월은 흘러 흘러 어느듯 성균관대학교 입학 60주년이 되는 해이다.
고교동문도 없고 오롯이 이 잘난 녀석뿐이 아닐까.
약학이란 무엇이며 공부에는 관심도 없고 강건너 주마등이리다.
6.3 데모에 휩쓸려 서대문 큰 집에도 며칠 관람(?)도 한다.
입학 1964년부터 약사국가고사 치르기 전까지는 공부란 단어가 싫고 잊고 있다.
루비콘강의 뗏목 위에 주저앉은 처량함이 아닐까.
내 오마니의 환한 모습이 가슴을 흔들곤 한다, 이곳에서 포기는 없다.
루비콘강을 헤엄쳐 되돌아온다.
약사고시 공부를 두어달만에 합격의 영광(?)을 가슴에 품는 순간이다.
입학 회갑일인 2024년 오늘도 병원 약제실 근무약사로 출근하고 있는 무무의 일상이다.
무무는 누구를 뜻하며 어느 누구 인간을 말하는가.
무무라는 단어가 가슴에 박히는 세월이 있다. 1990년대 후반일게다.
동북고교 동기생의 등산대장을 자처하며 나선다.
그때 등산회의 참석인원은 20여명 전후이리라.
20여년 이상 한반도의 유명산은 물론이고 제주도부터 38선 이남까지 산세는 거의 훑는다.
등산회원들은 오롯이 제대로된 등산로가 선택 기준이다.
등산대장이라는 명물아닌 맹물같은 녀석은 어떨까.
길도 없고 길이 아닌 곳을 홀로 헤매는 것이 습관화 되기도 한다.
언제이던가 어느 험준한 산을 오르내릴 때이다.
" 등산로 없음 " 이라는 팻말이 보인다. " 미친 놈들아 ~ 등산로 없는 곳이 어디에 있는가 "
" 없으면 돌아가던가 비켜가면 등산로가 되는 것이 아니냐 ~ ~ ~ " 거친 숨소리만이 산골짜기를 흔들고 있다.
지쳐버린 몸둥아리를 하늘같이 치솟은 바위 위에 걸터 앉는다.
" 不路有 無路無 "라는 글귀가 머리속을 환히 비춰주고 있다.
한 마디로 " 아닌 길은 있어도 없는 길은 없다 "가 아닌가.
수년간 길을 잃고 헤매고 나뒹글며 터득한 산행의 정답이리라.
순간적으로 무로무(無路無)에서 무무(無無)가 아호(雅號)로 탄생하는 명작명(名作名)이기도 하다.
순간의 선택이 숙명적인 운명을 바꾸는 찰나이기도 하는 선물이 분명하다.
입학한 세월이 60년 하고도 2개월 그리고 20여일이 흐른 오늘이다.
2024년 5월21일(화)부터 23일까지 남해안을 순회 관광하는 날이다.
엄밀히 따지면 60주년인 이순(耳順) 육순(六旬)이기도 하다.
육십갑자의 갑(甲)으로 되돌아오고 있는 환갑(還甲), 회갑(回甲)이라고 함이 좋을게다.
입학 60주년이든 입학 회갑, 환갑이든 편한대로 부르리라.
만물(萬物)의 우두머리인 인간들의 나이를 들여다 본다.
60세를 듣는대로 이해한다는 이순(耳順), 육순(六旬)이라고도 한다.
61세는 만60세로 환갑(還甲), 회갑(回甲) 즉 육십갑자의 갑(甲)으로 되돌아왔음을 의미한다.
70세 고희(古稀)는 예로부터 드물다는 뜻이다. 사람의 나이 일흔 살 또는 일흔 살이 되는 때를 뜻한다.
당나라 두보(杜甫)의 곡강시(曲江詩)에서 인생칠십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라는 구절에서 온 말이다.
요즘은 별 의미가 없으리다.
77세를 희수(喜壽), 80세는 팔순(八旬) ,산수(傘壽)라고도 부른다.
산수라는 표현은 일본 쪽발이들이 만든 단어이다. 팔순(八旬)이라는 한국식 단어를 사용함이 타당하다 할게다.
88세는 미수(米壽)로 여든여덟 살을 이르는 말,
99세는 백수(白壽)로 일백 백(百)에서 하나(一)을 뺀 백수(白壽)이다.
100에서 하나가 모자라는 99세를 가리키는 말이다.
100세 이상은 상수(上壽)로 인간 수명중에 상급(上級),
120세를 천수(天壽)로 하늘에 오르는 타고난 수명(壽命)이다.
몇년을 살든 인류가 살고얐는 지구의 둘레는 과연 얼마일까.
정확한 수치는 약간의 차이는 있으나 40,075 Km 정도이라네요.
지구가 태양을 1회 공전하는 시간은 365.25일이라 한다. 대략 1년 정도이다.
공전하는 속도 시속은 107,000Km이라고 한다. 1회 공전하는 거리는 얼마나 될까.
107,000 Km /시간 X 24시간 /일 X 365.25일 /년 = 937,962,000 Km 이다.
80년을 살아온 팔순(八旬)인 나이 우리들은 지구와 함께 움직인 거리는 몇 Km인가.
937,962,000Km / 년 X 80년 = 75,036,960,000Km가 아닌가. 750억Km가 넘는 거리이다.
사람마다 하루에 걷는 걸음수도 다를 게다.
나 자신을 생각해 보자. 하루에 25,000보를 걷는다고 가정을 한다.
보통 1Km를 걷는 걸음수는 우리 연세에는 1,450보 정도로 잡아본다.
하루에 걷는 거리는 25,000보 ÷ 1,450보/Km =약 17.24Km이다.
1년에는 17.24Km/일 ×365일/년 = 6292.6Km를 걷고
6292.6Km × 80년=503,408Km를 80년 동안에 걸은 거리이다.
지구가 1년에 태양을 1회 공전하는 거리는 75,036,960,000 Km이다.
무무는 1년에 6292.6Km를 걷고 있다고 생각한다.
지구 둘레 40,075Km를 자신이 걷는다면 40,075 ÷ 6292.6/년 = 약 6.368년이다.
지구가 1년에 1회 태양을 공전한 거리를 내 자신이 걸으면 몇년이 걸릴까.
75,036,960,000 Km ÷ 6292.6 Km/년 = 11,924,635년이 걸리는 것이다.
일상생활을 접고 하루종일 걷기로 도전한다면 위의 수치는 다른 결론이 나올 것이다.
계산도 복잡하고 생각하고 있는 자신이 바보 아니면 멍청둥이가 아니랴.
환갑날 아침 일찍 환갑을 맞는 사람은 사당에 들어가 조상의 신위에 환갑을 맞은 것을 고한다.
환갑상은 성대하게 차리며 하객들이 볼 수 있는 앞쪽에 여러 음식을 올리곤 한다.
상 앞에 환갑 맞는 사람이 앉는다. 맏아들, 둘째 아들, 맏딸, 둘째 딸의 순으로 부부가 나란히 선다.
잔을 올리고 남자는 재배(再拜)를 여자는 4배하여 헌수(獻壽)를 한다.
헌수(獻壽)란 환갑잔치에서 오래 살기를 비는 뜻으로 주인공에게 술잔을 드림을 뜻한다.
오늘날은 다같이 재배하거나 1배만 한다. 그 다음은 차례로 잔을 올린다.
어머니의 환갑이라도 아버지에게 먼저 잔을 올린다.
부모 중에 한 분만 살아 있다면 1잔만 올린다.
악공(樂工)과 기생을 불러 풍악을 하고 권주가(勸酒歌)를 부르는 등 매우 성대하게 치른다
환갑잔치는 예전에 우리들 부모님 시절 이전까지는 거창하게 치루어졌을 게다.
가족뿐 아니라 일가친척 동네 사람들도 모두 참석을 했으리다.
평균수명이 길어지면서 차츰 환갑 칠순 팔순의 의미가 없는 모양이다.
우리들의 세대부터는 회갑도 칠순도 팔순도 별로 관심이 없지 않은가.
가족끼리만 모여서 간단히 회식하면 전부일 따름이다.
자녀들로부터 두툼한 축하금을 받지만 그것도 전부 아내의 몫이리다.
1988년도에 성균관대학교 졸업 20주년 축하모임을 갖는다.
장소는 서울 강남구 라마다르네쌍스호텔에서 개최를 한다.
부부동반으로 100여명이 참석한 것으로 기억한다. 미국으로 이민을 간 동기들도 몇명 참석이다.
좌석이 꽉 차고 빈자리도 없다. 그 당시 회장은 무무이며 총무는 박병구이다.
이날 사회자는 유명한 코메디안이다. 계속 자신의 얘기만 주절이는 코메디안을 끌어내린다.
동기중에 한명을 다시 사회자로 진행이다.
내 아내도 모처럼 처음 부부동반에 함께 한 것이다.
회장으로 동기들을 일일이 찾아가며 술잔을 주고 받는다. 잠시 후에 아내 모습이 보이지를 않는다.
거나해진 남편 모습이 보기도 싫어서 그냥 집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동기들과 졸업후에 부부동반은 처음이자 마지막이 아닌가.
총무이던 병구는 지금 어드메에 어떤 모습인가.
2년 6개월전부터 뇌출혈로 쓰러져 병원을 오가며 넋을 놓고 있다.
요즘은 경기도 하남인가 하는 요양병원에서 눈만 뜨고 있다고 한다.
답답하고 안타까움으로 방법이 없다
하루 빨리 동기들 곁으로 회귀하기를 기원할 뿐이다.
한동안 지지부진한 동기회이다.
홍구 병구 길군 정남 네명의 합의로 2018년부터 매월 세번째 토요일 정기월례회가 새 출발이다.
성대약대 입학60주년 기념회비를 매월 갹출을 한다.
동기들의 정성으로 2024년 5월 21일(화)부터 23일(목)까지 입학60주년기념 남해안 관광이다.
기껏해야 전부 10여명 정도 되리라 생각을 한다. KOMERICAN 3명의 동기들이 합류를 하겠단다.
그것도 태평양 너울를 헤엄이라도 쳐서라도 참석한단다.
시간도 시간이지만 여객기 비용만으로도 얼마이던가.
뉴욕(LA)에서 대충 짐작으로 왕복 300 몇십만원일테고 시간도 30여시간은 소요되리다.
한정숙 이종환 이주혁이 바로 주인공이다. 너무 반갑고 신기하고 고마울뿐이다.
또 오랫만이고 그립고 보고픈 두명의 여성동기들이 있다.
국내에 있으나 여러가지 복잡한 사연들이 얽혀 있어 몇년간 뜸하던 여성들이다.
그녀들 이름은 김계주 김양자 두명이다. 함께 한단다.
수년전부터 남편이 건강악화로 시름에 젖은 생활이다. 최근에 부군이 세상을 등지고 떠나신 것이다.
얼마나 애처럽고 슬픈 이별인가. 양자님의 남편으로 서울의대 출신 의사이기도 하다.
이 세상에서 온 몸을 다 주어도 아까울 게 없는 존재가 무엇이던가.
한마디로 자신이 낳고 기른 아들 딸 자녀이리라.
맏딸내미가 몇달전에 하늘로 솟은 것이다. 바로 계주 동기생의 맏딸이다.
일본에서 대학원도 마친 딸이다. 항상 밝고 적극적인 자녀이다.
방법은 무엇인가. 그저 받아들임이 아닌가.
종환이는 그의 평생 삶의 동반자이며 첫 사랑 첫 여인인 하나뿐인 아내이다.
2024년 3월 20일 붙잡지도 막지도 못하고 영원한 석별의 종을 맞은 것이다.
그의 아내는 경기여고를 졸업한 수재이고 성대약대 12회 동기이기도 하다.
그녀의 이름은 똑똑하고 어여쁜 김공자이다.
우리들의 동기들의 곁을 떠난 동기생들도 있다.
그들의 이름을 거론해 보면 어떨까. 최근에 홀연히 떠난 오승홍이다.
이번 입학60주년 기념 관광에도 합류한다며 회비도 보낸 동기이다.
그의 아내에게 회비를 반환하려 했으나 돌아온 답은 " NO THANK YOU "이다.
정낙소, 이효령, 유경한, 신충웅, 계충의, 나의 재학시절 실습 파트너인 김영한이다.
그 이외에도 몇명이 더 있을런지도 모르겠다.
위에 거명한 동기 여러분께 무어라 드릴 말씀도 없다.
그저 머나먼 그곳에서나마 건강하고 편안한 영원한 새 삶이기를 기원드린다.
서울 수서역에서 5월21일 오전 9시 열차인 SRT 특실을 예약이다.
출발하는 좌석의 숫자는 14명이다.
동기들에게는 오전 8시 29분까지 수서역 매표소 대합실에서 만나기로 한다.
총무인 무무도 그전에 도착이다. " 아직 아무도 없지 않을까 "혼자만의 생각이다.
동기들 모두가 벌써 대합실과 열차 타는 곳에도 있다.
그중에 한 여성이 낮에 익기도 하지만 누구이던가.
" 혹시 ~ 동기생 한 ~정 ~ ~ ~ " " 그래 내가 한정숙이야 ~ " 말이 끝나기도전에 대답이다.
" 아니 ~ 어찌 체중이 많이 줄었구나, 당뇨병이라도 문제가 있는가 "`
반갑기도 보고픈 한정숙이다. 역시 그런 문제가 있단다.
그녀의 학창시절을 돌아보자. 약간 통통하면서도 활달한 여학생 숫처녀이다.
성균관대학교 신문 발간에도 노력을 아끼지 않은 경기여고 출신이 아니던가.
60여년이 흐른 오늘은 어떤가. 어깨도 약간 꺼부정하고 걸음걸이도 시원치 않다.
여타 동기들도 마찬가지의 세월이 아닌가.
파아랗던 은행닢이 누렇게 낙엽으로 떨어진다.
오가는 행인들의 발밑에 짓이겨지기도 한다. 바람에 휘날리는 낙엽이다.
저 머나 먼 하늘 위를 스쳐지나고 있는 구름이기도 하다.
인간백세여몽중(人間百歲如夢中)이란 한 마디가 실감이 난다.
누가 누구를 탓하리까.
출발 20여분 전에 일일히 거명을 하며 특실에 배치를 한다.
오전 9시에 부산역으로 출발이다. 2시간 10분 후 11시 10분에 도착이다.
부산역에는 전세로 2박3일 대절한 28인승 우등 고속버스가 대기중이다.
부산역 구내에 부산의 여행 가이드인 강주수 이명언이도 기다린다.
삼천포에는 시의원도 몇번 의장 감사도 거치고 고문으로 거물급 인사인 김태웅 동기이다.
지금도 그곳에서 삼일 온누리약국을 개설코 있는 현직 약사이다.
진도에는 그 곳의 매력에 푹 젖어있는 동백섬의 주인이자 관리인인 박 영동기이다.
진도에서 펜션업소 10여개 이상 경영하던 것을 모두 타인에게 대여를 한다.
이곳중에 하나를 동기들 숙박장소로 추천한 박 영이다.
1964년 3월 입학동기이나 1학년 2학기에 군복무가 우선이다.
같은 실험 PLATE에 함께 하던 녀석이 그의 이름도 얼굴도 가물가물이란다.
졸업은 1972년도라고 한다. 아내는 그곳에 약국을 경영하고 있는 약사라고 한다.
남해안 관광여행에 관여한 동기들 인원은 18명이다. 십여명도 아니될줄 알았는데 예상외이다.
참석 인원의 이름을 목청껏 거명해도 좋지 않은가. 오롯이 마음속 깊은 곳에 담아드리다.
"아 ~ 차 아 암 ~ " 규상이도 이번 관광에 합류하겠딘다.
임규상은 수년간 동기회 두문불출이다. 자신과 마음에 들지 않는 녀석들 때문이라고 한다.
이 나이 요즘 세월에 너와 나는 어찌 되었든 동기동창이다.
끊을래야 끊을 수도 잊을려고 해도 잊을 수 없는 불가항력의 관계이다.
누가 누구를 탓하며 무슨 이유 변명이 자존심이 필요한가.
만나면 마시고 웃고 떠들고 영원한 마음의 고향이 아니랴.
부산역에 11시10분 정시에 도착이다. 잊은 물건없이 다시 확인을 한다.
주수 명언이가 환한 모습으로 동기들을 끌어안고 반기고 있다.
부산갈매기 주수 명언이 두마리가 동기들이 도착하자 마자 점심식사를 하잔다.
" 점심은 오후 1시경이 지나야 하면 좋을거다 " 한 마디로 거절이다.
그것만 빼고는 부산가이드 니들 뜻대로 해라고 일임이다.
우선 영도다리로 향한다. 평생 영도다리는 잊을 수가 없다.
마음의 상처이자 이북고향이 생각나곤 하는 곳이다.
" 금순아 ~ 어데를 가고 길을 잃고 헤매였더냐 ~ 영도다리 난간 위에 ~
초생달만 외로이 떴다 ~ ~ ~ " 1951년 1월4일 1.4후퇴로 이북 고향을 등진다.
3일후면 1주일후에는 아니면 한달후에는 반드시 고향땅으로 돌아간다는 풍문뿐이다.
아무 것도 없이 맨손으로 고향에 계신 할머님을 홀로 두고 떠난 것이다.
지금 세월이 73년이 흐른 요즘이다. 가슴에 맺힌 절절한 사연도 실감이 나지도 않고 지워지고 있는 오늘이다.
50살이 되는 자녀들도 손주들은 더 더욱 이북 고향은 관심밖이다.
" 내가 죽으면 너희들은 무엇을 먹고 살건가, 고향땅을 찾기나 할건가 "
해마다 명절이면 대성통곡을 하시던 아버지가 그립다.
오마니 아버지 부모님도 저 멀고 머언 하늘로 떠나신지도 50년이 훌쩍 넘은 것이다.
답답한 마음은 접을 밖에 방법이 없다.
영도다리 근처의 롯데몰 옥상으로 오른다.
국제여객터미널과 영도다리 부산 시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걸어서 남포동을 스치고 자갈치시장에 있는 횟집으로 들어선다.
푸짐한 회와 온갖 부식 반찬들이 식탁에 가득이다.
주고받는 오가는 술잔속에는 동기회 사랑의 이슬이 맺힌다.
회식비 550,000정도로 주수와 명언이가 분담이다.
송도케이블카, 용궁구름다리, 태종대 등등을 거친다.
해운대 숙소인 송도탕(송도각) 도착이다. 짐을 풀고 저녁은 유명한 해운대 우육(牛肉)불고기집이다.
저녁을 마치고 해운대 백사장으로 직행이다.
밤 하늘에 깜빡이는 별들과 바다의 야경(夜景)이 새롭기도 하다.
하얀 물거품을 품고 밀려왔다 쓸려나가는 바다 물결이다.
바다 저 멀리에는 많은 선박들의 불빛이 아롱아롱 거리고 있다.
근처에는 103층이나 되는 아파트가 시선을 끈다.
바닷물에 밀려서 주차장이 물바다가 되기도 했단다.
서울에도 기껏 높아야 45층 정도이다.
103층에 인간들이 주거지로 살고 있을까. 생각만으로도 어찔 어찔하다.
인구는 세계에서 출산율이 0.76인가 가장 낮은 대한민국이다.
3~40년 후에는 주거지의 20% 이상은 빈집으로 전락하리라 믿는다.
그래도 자꾸 아파트도 상가도 신축하는 방망이 소리가 귀찮을 정도이다.
2~30대 젊은이들이 결혼은 뒷전이다. 걸으면서도 스마트폰에 빠져 헤매고 있다.
이 모습이 진정 청소년들의 미래이며 대한민국 국가의 주인공이련가.
앞날이 걱정뿐으로 노객의 마음을 추수릴 수도 없다.
개새끼들을 비좁은 아파트에서 한 마리뿐이 아니고 두세마리 큰 놈들도 기르고 있다.
밤이면 개짖는 소리에 화들짝 놀래기도 한다. 똥 싸고 오줌싸는 똥개들을 품에 안고 기른다.
아침마다 한강가로 들어선다. 여기 저기에 개들을 끌고 안고 다니고 있다.
노인네들도 가끔 보인다. 거개가 젊은 청소년 소녀 젊은이들이다.
학교도 출근도 아니하고 결혼은 더욱 요원한 모습이다.
이런 인간들도 똥개에 불과하리다. 개인 주택 마당이 있으면 얼마든지 찬성이다.
언제이던가. " 정나마 야~ 네래 정말로 갈꺼가 " 오마니 한마디이다.
미국 이민의 계획을 접을 밖에. 제약업계 근무도 접는다.
주택도 동생에게 물려준 상황이다.
중구 필동에 전세로 살며 청계천4가에 약국개업을 하고 있을 때이다.
거리상으로도 3Km 정도는 되리라.
자녀들이 3살 다섯살때로 생각되고 있다.
어느 날 4~5Kg쯤 되는 개를 안고 아들 딸이 약국으로 들어선다.
온몸은 땀으로 범벅이다.
" 아니 ~ 얘들이 도대체 ~~~ " 아내가 화들짝 놀랜다.
" 엄 마 ! 멍진이도 우리 가족이야 ~ " 할 말이 없다.
개인주택 2층 양옥집에 살때가 생각난다. 자녀들이 초등학교 초년생 때일 게다.
" 멍진이 또진이 " 암놈 숫놈의 이름이다. 이 녀석들이 새끼를 네마리를 낳는다.
초등생 아들 딸이 강아지를 너무 좋아하고 사랑한다.
맛있는 것이 있으면 우선 녀석들에게 거침없이 던져주기도 한다.
일기장에 그런 내용을 아들이 쓴 것이다.
" 어머님 ~ 강아지 한 마리를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담임선생님의 부탁이다.
시골에 시어머님 홀로 사시느라 외로워서 보내주려고 한다고,
흔쾌히 보내준 아내이다. " 엄 ~ 마 ~ ~ ~ 강아지 한 마리 어디 갔어 , 응 "라는 아들녀석이다.
아내는 사실대로 얘기할 밖에 어쩌나.
" 강아지 돌려주세요 " 다음 날 학교에 가서 담임선생님에게 거듭 울며 재촉하는 아들이다.
" 얘야 ~ 지니야 ~ 시골에 계시는 시어머니께서 ~ ~ ~ ' " 안돼요, 꼭 돌려주세요 "
담임선생님 말씀에도 거절코 마이동풍이다. 선생님도 두손 두발 들수 밖에 없다.
" 여보 ! 야는 하고픈거는 꼭 해야되는 아이니까네 ~ 어떻게든 해줍시다래 "
수업료가 없으니 휴학하라는 아버지 말씀에 오마니가 하신 말씀이다.
1964년도 대학교 1학년 2학기 때이다. 나딩굴며 울며 보채기를 몇번이던가.
그 아들의 아들도 지애비를 꼭 닮은 꼴이 아닌가..
피는 속일 수도 바꿀 수도 없는 유전자이려나.
이 순간이 없었으면 내 삶은 어떤 모습일런지 생각키도 싫다.
추억이 추억을 낳고 새록새록 새롭기도 하다.
어제도 오늘도 침대 위에 모셔둔 영정 사진을 바라볼 때 마다 가슴이 미어진다.
살아 생존에 부모님께 비행기는 커녕 용돈 한푼 쥐여드리지 못한 불효식일 뿐이다.
5월 22일 아침을 미포복국할매집에서 식사를 한다.
아침 8시 30분경에 삼천포 김태웅 동기에게 버스로 이동이다. 삼천포 경찰차가 앞에서 안내를 한다.
점심을 먹고 오후 2시경에 유람선을 1시간 반 정도 승선한다.
태웅이는 건강이 좋지않아 어지럽기도 하여 승선은 불가하단다. 체중도 많이 빠진 것이다.
일렁이는 다도해 파도에 유람선 승선은 얼마만인가. 난생 처음이렸다.
태웅이 자택도 경유하여 단체사진도 몇컷 찍는다. 아내도 친절하게 맞이 한다.
점심식대가 88만으로 푸짐한 점심뿐 아니라 일일이 동기들에게 선물을 한 팩씩이다.
팩속에는 일상에 필요한 의약품과 " 삼천포 예찬 "이라는 수필 한편도 있다.
고맙고 반가울 뿐이다. 오후 네시 조금 넘어 다시 버스에 오른다.
진도에 박 영 동기가 저녁은 진도가 아닌 목포 북항에서 베푼단다.
아마도 수시로 들리는 단골식당인 모양이다.
17명의 식탁이 신선한 회를 비롯하여 갖가지 곁들인 반찬이 넘쳐난다.
식대는 660,000원으로 특별히 김병선이 전액 희사를 한다.
밤 11시경에 진도 숙박지인 진도펜션골드마운틴하우스로 올라선다.
1층 2층으로 각자 취향대로 침실을 잡는다.
앞에는 바닷가 물결이 밤새껏 쉬지 않고 넘실넘실 춤을 추고 있다.
아마도 처음 접하는 동기들을 환영하고 있는 사랑의 찬가이리라.
진도에는 생애 첫 방문이고 숙박이다.
진도군(珍島郡)은 전라남도 서남부 진도와 부속 섬을 관할하는 군(群)이다.
진도는 대한민국에서 세번째로 큰 섬이다. 45개 유인도를 포함하여 256개 섬으로 되어있다.
팽목항에는 세월호 참사의 그늘이 드리워져 있는 곳이다,
2024년 4월 16일 세월호 참사로부터 10년이 흘렀다.
2014년 4월15일 오후 9시 세월호가 인천에서 제주도를 향해 출발이다.
탑승자는 제주도 수학여행을 가는 경기도 안산 단원고 2학년 학생 325명,
교사 14명 인솔자 1명이며 일반탑승객 74명이다.
화물기사 33명 승무원 29명등 모두 476명이다.
4월 16일 오전 8시49분 전남 진도군 앞바다 조류가 거센 맹골수도에서 급격하게 침몰이다.
" 가만히 기다려라 "는 선장님(?)의 개짖는 소리에 그저 배와 함께 침몰이다.
" 엄마 ~ 아빠 ~ 죄송해요 ~ ~ 어~ 어 ~ 엄 ~ 마 아 ~ ~ ~ " 한마디 인사도 없다.
그대로 컴컴한 바다속이 학생들에게 마지막 행선지이다.
승객들을 버리고 이● # 이라는 선장등 선원 15명이다.
먼저 뛰쳐나온 선장인지 개장인지 된장인지 하는 인간도 아닌 무슨 동물이더냐.
사람도 아닌 어쩌면 개새끼보다도 못한 똥개녀석이 아닌가.
젖은 지폐를 말리노라 정신이 없다. 학생들은 뒷전으로 몇푼 돈이 우선이다.
희생자는 295명, 실종자는 9명이다.
세월호는 1994년 일본 나가사키에서 건조돼 18년 이상 운항한 것이다.
이것을 2012년에 일본에서 수입된 중고품 선박이다.
제대로 선체복원을 부실하게 한 것도 큰 원인이기도 하리다.
세월호 선체 인양작업은 2017년 4월11일 참사 1,089일만에 목포신항 부두로 올라온다.
세월인지 네월인가 10년이 훌쩍 흐른 오늘이디. 위대하신 대통령도 세분이나 스쳐지나고 있다.
그 누구도 참사 발생원인도 책임소재 진상도 제재로 밝히지 못하고 있는 상태이다.
이게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국가인가. 나만을 위한 나라이던가.
답답한 마음을 추스리며 사고 현장인 팽목항을 향하려 한다.
하얀 장미꽃 한송이라도 명복을 빌고 싶었으나 시간관계로 포기할 밖에 방법이 없다.
다음날 5월23일 마지막 날 아침이다.
박 영동기가 안내하는 식당으로 아침 허전한 뱃속을 채운다. 식사비는 박 영동기 몫이란다.
진도 운림산방(雲林山房)으로 들어선다.
운림산방이란 이름은 첨찰산(485m)을 지붕으로 사방으로 수 많은 봉우리가 어우러진 곳이다.
깊은 산골에 아침저녁으로 피어오르는 안개가 구름 숲을 이루었다고 붙여진 것이다.
첨찰산은 바위산으로 백제시대로 추정대는 산성(山城)이 있다. 조선시대 설치한 봉수대 유적도 있다.
산 밑에 운림산방이 있다. 1981년 명승 제 80호로 지정된다.
조선후기 서화 예술가 소치 허련(小痴許鍊)이 말년에 고향으로 귀향이다.
이곳에 거처하며 그림을 그리던 화실의 당호이다.
화실 안에는 허 씨 집안 3대의 그림이 복제된 상태로 전시되어 있다.
새로 지어진 소치기념관에는 운림산방 3대의 작품과 수석 도자기등이 전시되어 있다.
" ㄷ "자 기와집인 운림산방 본채와 초가로 된 사랑채도 있다.
신축된 유물보존각등 건물과 연못이 있다.
오각으로 만들어진 연못에는 흰 수련꽃이 피어 있다.
가운데는 직경 6m 크기의 원형으로 된 섬에는 배롱나무도 있는 곳이다.
운림산방은 분위기 전체가 조선시대로 회귀하고 있는 차분한 느낌도 든다.
진도대교를 건너서 대교 밑으로 내려선다. 명량대첩지인 울돌목이다.
명량해전(鳴梁海戰)은 어떤 곳인가.
조선 선조 30년(1597)에 이순신이 이끄는 수군(水軍)이 명량에서 적을 쳐부순 싸움이다.
10여척의 전선(戰船)으로 왜놈들 함대 133척을 맞아 싸운다.
이놈들의 배 31척을 격파하여 대승을 거둔다.
울돌목 바닷물 기슭에 이순신장군이 보인다. 군복도 철모도 아닌 일반인들이 입는 복장으로 서있다.
손에는 무슨 책을 갖고 있는 모습인데 무엇일까. 무척 궁금하지 않으신가.
아마도 부산 갈매기는 당구책일 터이다.
JLPT N1 한권으로 왜놈들의 언어를 끝내는 학습지가 아닐까.
상대를 알아야 무엇이든 이길 수 있으니까. 이순신의 머릿 속은 복잡키도 했으리라.
또 다시 침범할 때는 무조건 단칼에 일본열도를 휩쓸어 버릴 다짐일지도 모른다.
바닷물이 밀려왔다 쓸려나가는 파도가 왜놈들과 싸우다 스러져간 군졸들로 보이는 모양이다.
이순신장군의 가슴 속엔 피눈물이 넘치고 있다.
" 나라를 지키려다 순국(殉國)한 군졸들이여 !
너희들의 희생을 지켜주지도 못한 이몸을 절대 용서치 마라 "
먼저 간 병졸들의 명복을 빌고있는 애처로운 애조사(哀弔辭)이리라.
울돌목 주차장에 있는 버스에 올라 목포 북항으로 향한다.
북항에서 무조건 케이블카에 올라 고하도로 향한다.
고하도 전망대는 이충무공이 명량대첩에서 승리 후 전열을 가다듬었던 곳이기도 하다.
고하도에 13척의 판옥선 모형을 격자형으로 쌓아 올린 전망대다.
고하도에 아름다운 해상 풍경을 감상할 수 있는 명소이다.
1층은 휴게공간, 2~5층은 전망대 및 목포 관광을 소개하는 전시공간이다.
1597년 10월 29일부터 이듬해 2월 17일까지 주둔한 고하도이다.
"서북풍을 막음 직하고 전선을 감추기에 아주 적합하다.
섬 안을 둘러보니 지형이 대단히 좋으므로 머물 것을 작정했다"고 난중일기에 고하도를 기록하고 있다.
107일간을 고하도에 머물며 53척의 배를 건조하고 수군을 2천 명으로 늘린다.
수군재건의 토대를 마련하여 왜란을 끝내게 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용이 하늘로 오르기 전 웅크리고 있는 모습이라 하여 ‘용오름’이라고 부르고 있다.
고하도 용오름길은 이순신 장군이 걸었던 길이기도 하다.
이순신장군이 걸어온 역사현장을 간단히 정리를 해본다.
1545년 4월 28일 새벽에 서울 마르내골(건청동: 안형동)에서 태어난다.
10세 전후에 아산 백암리 외가로 이사한다. 22세에 본격적으로 무예를 시작이다.
23세에 장남을 낳고 27세에 차남, 33세에 3남을 가슴에 품는다.
그 이후로 47세까지는 우여곡절의 길을 걷는다.
48세인 1592년 4월12일 거북선을 완성이다. 그 다음날 4월13일 임진왜란이 일어난다.
5월부터 옥포. 합포해전, 사천해전에 거북선 첫 출전,
6월에 당포해전, 당항포해전, 율포해전이때 어깨에 총탄을 맞는다.
7월에 한산도해전, 견내량해전, 안골포해전, 9월 부산포해전으로 적선 130여척 격파를 한다.
1593년 49세에 2월 옹포해전, 7월 본영을 여수에서 한산도로 옮긴다.
1594년 50세 3월 당항포해전, 9월 장문포해전, 10월 영등포해전과 장문포해전
1597년 3월 서울로 잡혀가 감옥에, 4월 감옥에서 나온다.
9월 명량해전 1598년 54세 2월 수군진영을 고금도로 옮긴다.
3월 고금도에 침입한 왜선을 격멸한다. 12월 16일 새벽 노량. 관음포해전에서 전사한다.
한산도대첩(閑山島大捷), 명량대첩(鳴梁大捷), 임진왜란의 마지막 해전(海戰)인
노량대첩(露梁大捷)이 바로 이순신이 거둔 3대 대첩인 것이다.
" 필사즉생 필생즉사( 必死即生 必生即死) " 명량해전 시작전에 군졸들에게 부르짖으신 경고가 아닌가.
" 내가 죽은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 " " 사망은 해도 정신은 살아있다 "
마지막 죽음의 문턱에서 끝까지 눈을 부라리며 부르짖은 말씀이다.
오늘도 서울 광화문 세종로 한복판에 눈을 부릅뜨고 남쪽을 응시하고 계신다.
남해안에서 또 다시 왜군녀석들이 침범하면 어떨까.
단칼에 일본열도를 쓸어버릴 것이라는 다짐에 다짐이 아닐까.
그 당시 사용턴 장검을 들고 철모 철갑의 군복을 영원히 함께 하시고 계신다.
목포 시내에서 약 2km 떨어진 곳에 있는 고하도는 유달산(높은 산) 아래 있는
섬이라 하여 고하도(高下島)라 불렸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나주목(羅州牧)에 속했는데 비문에는 고화도(高和島), 난중일기에는 보화도(寶花島)라고 표기했다, 그밖에 고하도(高霞島), 칼섬이라고도 불리는데 목포사람들은 친근하게 용섬이라 부른다.
목포해상케이블카는 2019년도 개통이다.
북항에서 승차하여 유달산스테이션을 경유하여 고하도스테이션에 도착한다
거리는 약 3.23Km이며 왕복운행시간은 약 40여분이 걸린다.
객실 정원은 10명으로 일반캐빈 왕복 어른은 24,000원 크리스탈 캐빈은 왕복 29,000원이다.
크리스탈캐빈으로 할 것을 서두르노라 일반캐빈이다.
크리스탈캐빈에 오르면 발밑이 훤하게 내려다 보이는 유리발판이다.
고하도로 향할 때 허공에 뜬 느낌이다.
발아래 일렁이는 파도속으로 빨려드는 쩌릿 쩌릿한 기분은 당해본 당사자만 알리라.
고하도에 내리자 곧 북항으로 향하는 케이블카에 오른다.
오후 1시에 목포의 민어맛집거리의 식당을 예약한 것이다.
용오름길 왕복 산책은 커녕 20여분이면 오를 전망대도 생략할 밖에.
목포의 가이드는 차기봉이다. 이곳을 떠나온지도 몇십이 지난 오늘이다.
맛집은 커녕 졸업한 목포고등학교가 어디에 있는지도 기억 밖이 아닐까.
일가친척에게 묻고 물어서 예약한 민어거리의 맛집 식당이다.
어제까지 부산 삼천포 목포에서 연달아 횟집 회식이다.
생선회를 비롯하여 반찬들도 여러가지로 식탁을 가득이다.
오늘 또 목포에서 회를 접하니 질릴 수도 있으리라.
식당은 별로 넓지도 않다. 16명 동기들이 밀착해 앉는다.
민어회를 비롯하여 튀김 조림 기타 여러가지 곁들이는 것들로 여전히 그득하다.
민어는 여타 생선회와는 느낌이 다른 것인가 보다.
실컷 마시고 들이키고 내키며 먹고 일어선다.
서정식이가 지방 명문인 목포고 1년 후배이기도 하다.
두 동기들은 전교 1등으로 졸업한 수재들이란다.
DB고등학교 성적표와 비교하면 좋을텐데 마음만이 앞선다.
버스에 올라 유달산(228.3m)의 노적봉으로 향한다.
유달산은 전라남도 목포시 유달동·대반동·온금동·북교동에 걸쳐 있는 산이다.
그리 높지 않으나 산세가 험하고 층층기암과 절벽이 많아 호남의 개골(皆骨)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유달산은 예부터 영혼이 거쳐가는 곳이라 하여 영달산이라고도 부른다.
동쪽에서 해가 떠오를 때 그 햇빛을 받아 봉우리가 마치 쇠가 녹아내리는 듯한 색으로 변한다.
그리하여 유달산(鍮達山)이라 한다. 지방 선비들이 유달정(儒達亭) 건립을 논의를 한다.
그 때부터 산 이름도 작금의 유달산(儒達山)이 되었다.
노령 산맥의 맨 마지막 봉우리이자 다도해로 이어지는 서남단의 땅 끝에 자리한 산이다.
유달산 전체가 화강암이며 경사가 급하지만 일주도로를 따라 일부 완만한 지형이 형성되어 있다.
유달산의 대표 수종은 소나무(곰솔)이고 왕자귀나무, 신갈나무, 굴참나무 등이 있다.
식생 구성으로 볼 때 인공 조림 수종을 제외하면 토양 조건은 척박한 편이다.
언제이던가 처음 유달산을 첫 접하는 때이다.
멀리서 바라보는 유달산은 강원도 설악에 있는 울산바위를 축소해서 옮긴 모습이다.
그때부터 목포가 그립고 정이 들기 시작이다.
1970년대 중반에 미국 Upjohn제약사 근무할 때이다.
난생 처음 전라남도 광주에 영업소장으로 발령이다. 낮설고 물설은 전라도이다.
" 했당께, 했지라우 그렁게 말이요 잉 ~ " 듣기도 쳐다 보기도 싫은 전라도 토박이 사투리이다.
영업소장으로 광주 목포 여수 순천 전라남북도와 제주도까지 담당지역이다.
가끔 거래선을 영업담당 직원과 함께 하기도 한다.
목포이건 여수이던지 유달산 무등산 모두가 마음 밖이었다.
몇달이 흐르고 보니 그 말투가 거스르지도 않고 곳곳이 괜찮은 느낌이 되더라.
사무실이 충장로 1980년도 518민주회투쟁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그당시 그때 그곳에 있었으면 어떤 모습일까. 최루탄에 범벅으로 군졸들에게 끌려갔을지도 모른다.
노적봉(露積峯)은 전라남도 목포시 대의동 유달산 기슭에 있는 매우 큰 돌이다.
임진왜란 때에 이순신 장군이 왜군에게 노적가리처럼 보이게 한 속임수이다.
산꼭대기와 큰 바위를 짚과 섶으로 둘러씌운 데서 생긴 이름이다.
유달산 곳곳에 이엉을 만들어 씌우느라 백성들이 넋이 나간 모양이다.
보리밥 하루 세끼를 먹을 수 있으면 좋으련만 한끼 정도가 고작일 게다.
메말라 버린 엄마 젖가슴을 파고드는 갖난 애기이다. 젖 한방울도 없다.
계속 울어대다 지쳐 잠에 빠진다. 슬며시 다가와 애기를 가슴에 꼭 품어준다.
건너 편에서 바라보고 있던 이순신장군이 아닌가.
오늘 동기들 몇명이 노적봉에 오른다. 조금 높은 곳에 이순신동상이 보인다.
아직도 예전처럼 노적봉을 바라보는 그모습 그대로가 아닐까.
조금 내려오노라니 여자나무라는 팻말이 있다. 여자나무(?) 무슨 사연이 있을까.
그냥 스친다. 관심 밖이다.
서울 수락산에 오르면 바위 봉우리들이 수없이 많다.
여성바위 치마바위 남근바위 철모바위 기차바위 안꼬바위 탱크바위 곰바위 피아노바위 등등이다.
살아가노라면 자연생태계에서도 가장 매혹적인 존재는 무엇일까.
남정네들을 걷잡을 수없이 불끈 솟구치게 하는 바로 여성바위가 아닌가..
향기로운 샘물로 가득찬 여성의 중심부가 남성들을 유혹하는 순간이다.
조금 더 높은 곳에 하늘로 뻗어있는 남근(男根)바위이다. 슬며시 찾아와 무작정 삽입이다.
흘러 넘치는 양수(陽水)와 음수(陰水)가 주위의 모든 바위를 마비시키고 있다.
유달산뿐 아니라 곳곳에 노적봉이라는 이름을 가진 산들이 있다.
부산 봉화산(377m)에, 북한산에도 노적봉(715.5m), 대구의 진산(鎭山) 팔공산(1192.3m)에도
노적봉(891m)이 있다. 팔공산은 중악(中岳)·부악(父岳)·공산·동수산(桐藪山)으로 불리기도 한다.
외설악에 제1봉부터 7봉이 있으며 4봉을 노적봉(720m)이라 부른다.
바위를 맨손으로 기어오르기를 몇십번이더냐. 손바닥 지문이 모두 삭제된 것이다.
최근에는 쳐다만 보아도 쩌릿쩌릿 하다. 어찌 이런 바위들을 섭렵했을까.
역시 연세는 속일 수가 없나 보다.
주차장에 있는 버스에 다시 오른다.
목포 유달산의 마지막 코스가 동기들을 부르고 있다.
" 어서 오세요, 성균관대학교 약학대학 12회 동기생 여러분 !
제가 바로 " 목포의 눈물" 이난영입니다 ."
" 사공의 뱃노래 ~ 가물거리며
삼학 ~ 도 파도 깊이 스며드는데 ~ ~
부두의 새악시 ~ 아롱 젖은 옷 ~ 자락
이별의 눈물이냐 ~ 목포의 설움"
가슴을 파고드는 이별의 눈물이 애닲프고 서럽게도 목포시내를 휘젓고 있다.
이난영 ( 1916년 6월6일 ~ 1965년 4월11일 )은 일제 강점기에 전라남도 목포 출생이다.
본명은 이옥례(李玉禮)인데 호적에는 이옥순이다.
배우자는 김해송으로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의 가수겸 대중음악 작곡가이다.
6.25로 남편이 납북된다. 납북후에는 자식들과 조카를 혹독히 연습시킨다.
그들이 바로 김시스터즈와 김보이즈이다.
경상도의 남인수와 사랑이 싹트지만 남인수의 폐결핵으로 사랑은 얼마 가지못하고 1965년 서거한다..
자녀는 4남 3녀가 있다. 트로트가수로 대표곡은 " 목포의 눈물, 해조곡 ,목포는 항구다 "
나라를 강탈 당한 일본 식민지 시대이다. 입으로 제대로 말로 표현도 못한다.
쪽발이 놈들의 군화발에 짓이겨져 눈치만 본다.
이난영이가 부른 " 목포의 눈물 "을 들으면 애잔하고 애처로운 감정에 빠진다.
식민지시대의 슬픔을 쓸어주고 있는 말 못할 느낌이 아닌가.
아쉽게도 길을 잘못 들어 이난영의 노래비를 포기할 순간이다.
오후 4시 40분에 서울 수서역으로 향하는 SRT열차의 기적소리를 늦출 수는 없다.
서둘러 목포역으로 들어선다.
" 성균관대학교 약학대학 12회 동기생 여러분 !
2024년도 올해가 입학60주년입니다.
기념으로 2박3일 부산, 삼천포, 진도, 목포를 순회하고 이제 떠나야 합니다.
이별은 언제나 아쉬움으로 가슴을 메우곤 합니다.
헤여지면 또 다시 만남이 기다리고 있지 않는가.
여러가지로 부족하고 기대에 어긋나는 순간도 있었을런지도 모르겠습니다.
집행부의 한 사람 총무로서 사과를 드립니다.
너그러이 용서해 주시고 다음을 기약함도 좋으리라 생각코 있습니다.
특히나 멀고도 머어언 바다 건너 USA에서 찾아주신 한정숙, 이종환, 이주혁 세분 동기들께
다시 한번 감사의 인사를 올리나이다.
모쪼록 조국(祖國)인 대한민국(大韓民國)을 떠나더라도 그곳에서도
항상 건강하고 행복이 가득한 나날이기를 기원합니다.
동기들의 만남은 삶의 샘물이며 행복과 기쁨이 충만한 마음의 고향이 있습니다.
그곳이 과연 어드메입니까. 바로 그곳은 명륜동 캠퍼스이리다.
정문에 들어서면 바로 오른쪽에 대성전과 명륜당이 있지요.
이곳은 서울 문묘 일원이라고도 불립니다.
대성전은 1964년 사적 제 143호로 지정된 곳이기도 하다.
공자와 유학자들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대성전입네다.
그 바로 앞에는 학문을 공부하는 명륜당입니다.
이곳에 자리잡고 있는 은행나무 4그루도 있습니다.
5백여년 가까이 이곳 성균관을 지켜온 수호신(守護神)이 아닐까요.
천연기념물 59호로 1962년 12월 7일에 등록된 곳입니다.
새봄이 오면 연초록빛 은행닢이 캠퍼스에 숲을 이루고 있지요.
어느새 샛노오란 단풍으로 익어가고 있다.
서늘한 가을 바람이 불어오면 샛노오란 단풍닢은 낙엽이 되어 명륜당을 가득 채웁니다.
어느 때부터인가 서울 단풍명소 BEST4에 이름이 오릅니다.
서울숲(서울숲역), 덕수궁(시청역), 명륜당(혜화역), 서울창포원(도봉산역) 네곳이 BEST4입니다.
재학시절에는 무심코 별 관심없이 스쳐지나 다니던 곳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졸업 60주년 기념일이 곧 다가올 것입니다.
그날은 이곳을 출발하여 가일층 멋진 여행을 가슴에 담아 봅니다.
성균관대학교 약학대학 12회 동기생 여러분 !
오늘 입학60주년 관광을 마치면서 건의사항을 올립니다.
입학120주년이 오는 그날까지 우리 모두 건강해야 하겠습니다.
그때는 지구 자체가 오염으로 떠나야 할 세월이 올런지도 모릅니다.
오염시킨 주범은 너와 나 지구상의 인간들 모두가 아니겠습니까..
천체에서 지구는 첫 번째로 자연생태계가 소멸되고 쓰레기 적치장이 아닐까.
걱정도 되고 있습니다. 후손들이 행복하게 살아야 할 고향이 아닙니까.
불행하게도 언젠가는 숨도 제대로 쉴 수가 없는 곳을 떠나야만 할게다.
밤마다 뜬눈으로 설치곤 한다. 어디로 가야 하나.
" 어디로 가야 하나 구름같은 내 인생
바람이 부는대로 흘러가네
아 ~ 아 ~ 이것이 세상이란 말인가
어릴 때 보았던 그 모습이 아~니~야 ~
가슴 적시던 저 노을 빛이
오늘은 나를 울리네 어디로 가야 하나
구름같은 내 인생 바람이 부는대로 흘러가네 "
노래를 흥얼거리다 보니 번쩍하는 환한 빛이 머리속을 스치고 있다.
인공위성을 대절하여 달나라(月國)에서 1년 365일 10년을 살아봅니다.
자동차도 버스가 아닌 열차도 없는 인공위성만이 교통 수단이 될것입니다.
탑승비용은 오늘 우리 동기들이 이용한 SRT 특실요금이면 충분하리라 봅니다.
그 다음부터는 화성(火星)인 화국(火國)에서 10년, 수성인 수국(水國)에서도 10년,
목성의 목국(木國), 금성의 금국(金國). 토성의 토국(土國)에서도 각각 10년씩을 지냅니다.
10년을 살리오까 ㅡ 100년을 살리까 ㅡ 천년 ㅡ 만년 ㅡ 억만년을 살리오.
마지막 국가는 태양인 일국(日國)의 불랙홀로 빨려 들어가서 영생(永生)을 누리는 곳입니다.
월국(月國) ~ 화국(火國) ~ 수국(水國) ~ 목국(木國) ~ 금국(金國) ~ 토국(土國)
최종정착지는 일국(日國)인 태양이 마지막 정착지가 될것입니다.
그날이 올때까지 매월 정기월례회에 참석하셔서 회비 2만원씩 납부도 부탁합니다.
함께 하실 동기들의 존함을 다시 한번 크게 불러 볼까합니다.
이번 입학60주년 기념관광에 어깨를 함께 어루고 이마를 맞댄 주인공들이 아니랴.
또 추가하실 동기들은 손을 번쩍 드세요. 기꺼이 맞이할 것입니다."
약사 수필가 최 정 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