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꽃
오늘은 윤동주 시인의 삶과 시 배웠어요.
윤동주는 1917년 12월 30일, 북간도 명동마을(1899년 세워진 조선인 마을)에서 태어났다. 증조할아버지와 할아버지가 1886년에 두만강을 건너 북간도로 이주했고, 윤동주의 아버지 윤영석과 어머니 김용은 북간도(북간도: 본래 고구려와 발해의 고토로서 우리 선조들의 삶의 터전)에서 만나 결혼하여 3남 1녀를 낳았다. 윤동주는 그들의 첫 아이였고, ‘해처럼 환하게 자라라’는 뜻으로 해환이라 불렸다.
명동마을에서 나고 자란 윤동주는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기독교 신앙과 맑은 심성을 간직하며 자랐다. 1925년 아홉 살이 되던 해에 명동소학교에 입학하여 1931년 열다섯 살에 졸업한다. 명동소학교 시절 어린이 잡지를 구독하며 문학의 꿈을 키웠으며, 5학년 때는 동무들과 《새명동》이라는 잡지를 만들기도 했다.
명동의 ‘인민학교 사건’을 비롯해 명동은 점점 공산화가 되어가고 테러 사태가 심각해졌다. 문익환 목사네는 1931년에, 윤동주네는 1931년 늦가을에 용정으로 이사했다. 명동소학교를 졸업하고는 중국인 학교인 대랍자소학교 6학년에 편입하여 1년을 더 다닌다. 윤동주가 본격적으로 시를 쓴 때는 은진중학교 시절이다. 넉넉하지 않은 환경 속에서도 윤동주는 자라나는 어린 나무처럼 한껏 뻗어갔다.
“은진중학교 때의 그의 취미는 다방면이었다. 축구 선수로 뛰기도 하고 밤에는 늦게까지 교내 잡지를 내느라고 등사 글씨를 쓰기도 하였다. 기성복을 맵시있게 고쳐서 허리를 잘록하게 한다든지 나팔바지를 만든다든지 하는 일을 어머니의 손을 빌지 않고 혼자서 재봉틀로 하기도 하였다.” - 윤일주 교수의 증언
“동주는 재봉틀을 참 잘했어요. 그래서 학교 축구부원들 유니폼에 넘버를 다는 것을 모두 동주가 집에 갖고 가서 제 손으로 직접 박아왔었지.” - 문익환 목사님의 증언
1934년 열여덟 살인 은진중학교 3학년 때부터 시를 쓰고 그 시 끝에 날짜를 적어 보관한다. 이때 〈초 한 대〉, 〈삶과 죽음〉, 〈내일은 없다〉 같은 시를 쓴다. 〈초 한 대〉는 기독교 사상을 토대로 한 시로, 시적 완성도가 높다. 이로 미루어보면 윤동주는 이전에도 많은 시를 썼을 것이다. 습작을 하다가 본격적으로 시를 쓰게 된 것은 그의 사촌형인 송몽규의 신춘문예 당선이 많은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내일은 없다>
내일 내일 하기에
물었더니
밤을 자고 동틀 때
내일이라고.
새날을 찾던 나는
잠을 자고 돌아보니
그때는 내일이 아니라
오늘이더라.
무리여!
내일은 없나니
……
(1934. 12. 24.)
<삶과 죽음>
삶은 오늘도 죽음의 서곡을 노래하였다.
이 노래가 언제나 끝나랴.
세상 사람은-
뼈를 녹여내는 듯한 삶의 노래에
춤을 춘다.
사람들은 해가 넘어가기 전
이 노래 끝의 공포를
생각할 사이가 없었다.
하늘 복판에 아로새기듯이
이 노래를 부른 자가 누구뇨
그리고 소낙비 그친 뒤같이도
이 노래를 그친 자가 누구뇨
죽고 뼈만 남은
죽음의 승리자 위인들!
(1934. 12. 24.)
<초 한 대>
초 한 대 -
내 방에 풍긴 향내를 맡는다.
광명의 제단이 무너지기 전
나는 깨끗한 제물을 보았다.
염소의 갈비뼈 같은 그의 몸,
그의 생명인 심지까지
백옥 같은 눈물과 피를 흘려
불살려 버린다.
그리고도 책상머리에 아롱거리며
선녀처럼 촛불은 춤을 춘다.
매를 본 꿩이 도망하듯이
암흑이 창구멍으로 도망한
나의 방에 풍긴
제물의 위대한 향내를 맛보노라.
(1934. 12. 24.)
1935년 봄, 송몽규는 독립운동을 위해 중국으로 가고 문익환은 평양 숭실중학교로 간다. 그때 윤동주도 숭실중학교로 전학하고 싶어 했으나 학교에서 허락하지 않아, 은진중학교 4학년 1학기를 마치고 9월에 숭실중학교에 편입한다. 문익환보다 한 학년 아래로 다니게 되어 마음이 편치 않았으나, 오히려 창작 활동에 몰두하여 시 10편과 동시 5편을 쓴다.
1936년 1월 신사참배(일제강점기에 일본이 천황 이데올로기를 주입하기 위해 곳곳에 신사를 세우고 한국인들로 하여금 강제로 참배하게 한 일)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숭실중학교 교장이 파면당한다. 신사참배냐? 폐교냐?의 양자택일을 강요한 일제의 비열한 폭력 앞에서, 숭실과 숭의의 경영주인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는 차라리 폐교로써 종교적 순결을 지키기로 결단했다.
신사참배 거부와 함께 잊지 못할 것은 매년 3월 1일의 뭉클한 광경이다. 3월 1일은 몽매에도 잊지 못할 3.1절이었지만 일제가 정한 이른바 애국일(신사참배일)이기도 했다. 숭실학교 학생들은 3월 1일이 되면 모두 교실의 자기 책상 위에 머리를 수그리고 하루 종일 꼼짝도 하지 않은 채 앉아 침묵 시위를 벌였다. 일본인 교사들은 물론 한국인 교사들도 이 숙연한 광경에 압도되어 말 한마디 못하고 그냥 나가곤 했다. - 김두찬, ‘혹독했던 신사참배 강요’
<종달새>
종달새는 이른 봄날
질디진 거리의 뒷골목이 싫더라.
명량한 봄하늘,
가벼운 두 나래를 펴서
요염한 봄노래가 좋더라,
그러나,
오늘도 구멍 뚫린 구두를 끌고,
훌렁훌렁 뒷거리길로
고기새끼 같은 나는 헤매나니,
나래와 노래가 없음인가
가슴이 답답하구나.
(1936. 3.)
이로 인해 학교가 무기휴교에 들어가자 윤동주는 3월에 용정으로 돌아와 광명학원(본래 영신학교였으나 심각한 경영난으로 일본인 일고병자랑에게 매각되며 이름을 광명학교로 변경) 중학부 4학년에 편입한다. 2년 정도의 광명 시절, 윤동주는 시 27편과 동시 22편을 썼다.
<이런날>
사이좋은 정문의 두 돌기둥 끝에서
오색기와 태양기가 춤을 추는 날,
금을 그은 지역의 아이들이 즐거워하다.
아이들에게 하루의 건조한 학과로
해말간 권태가 깃들고
[모순] 두 자를 이해치 못하도록
머리가 단순하였구나.
이런 날에는 잃어버린 완고하던 형을
부르고 싶다.
(1936. 6.10.)
이 시기에 동시를 많이 썼던 이유는 그가 가장 좋아했던 시인인 '정지용'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1935년에 출판된 《정지용 시집》에 실린 동시들을 보며, 동시도 충분히 시로서의 가치가 있음을 인식했다. 또 그가 좋아했던 시인인 '백석'의 시를 필사하여 읽기도 하면서 문학적 소양을 높여갔다.
<조개껍질>
아롱아롱 조개껍데기
울언니 바닷가에서
주워온 조개껍데기
여긴여긴 북쪽나라요
조개는 귀여운 선물
장난감 조개껍데기
데굴데굴 굴리며 놀다
짝 잃은 조개껍데기
한 짝을 그리워하네
아롱아롱 조개껍데기
나처럼 그리워하네
물소리 바닷물소리
(1935. 12.)
<비둘기>
안아보고싶게 귀여운
산비둘기 일곱 마리
하늘끝까지 보일 듯이 맑은 공일날 아침에
벼를 가두어 빤빤한 논에
앞을 다투어 모이를 주으며
어려운 이야기를 주고 받으로.
날씬한 두나래로 조용한 공기를 흔들어
두 마리가 나오
집에 새끼 생각이 나는 모양이오.
(1936. 2. 10.)
<삼월 삼질날>
중, 중, 때때 중,
우리 애기 까까 머리.
삼월 삼질날,
질나라비, 훨, 훨,
제비 새끼, 훨, 훨,
쑥 뜯어다가
개피 떡 만들어
호, 호, 잠들여 놓고
냥, 냥, 잘도 먹었다.
중, 중, 때때 중,
우리 애기 상제로 사갑소.
(정지용, 1926.6.)
윤동주 시인과 늘 함께 했던 송몽규 독립운동가도 잊을 수 없어요. 그들은 한 집에서 석달 간격으로 태어나 대부분의 학창시절을 같이 보냈어요. 같이 유학길에 오르고, 같은 죄목으로 재판을 받았어요. 같은 감옥에서 복역하다가 19일 간격을 두고 옥사했어요. 두 사람은 참으로 생과 사를 나눈 동지였어요.
윤동주의 삶을 살펴보며 1차세계대전과 일제강점기 등 대국의 틈바구니 속의 우리나라와 문장 안에 미처 담기지 못한 그 혹독했던 시절과 신념을 굳게 지켜냈던 뜨거웠던 걸음들 느낄 수 있었어요. 이러한 시기 속에서 소년 윤동주는 어떠한 꿈을 꾸며 자라났을지 앞으로 더 배워가요.^^
말본
지난 말본 시간에 익혔던 단어들을 복습하는 시간 가지고, 오늘은 배움책 99~117쪽 함께 읽으며 <일말, 숲말, 살림말> 속 한자말이나 외국어로 자리잡고 있지만 우리말로 다채롭게 고쳐쓸 수 있는 단어들에 대해 배웠어요.
<일말> 앞부분에 그 중에 재밌는 내용이 있었는데요.
요리(料理) : 여러 조리 과정을 거쳐 음식을 만듦. 또는 그 음식.
조리(調理) : 요리를 만듦. 또는 그 방법이나 과정.
→ 이런 말풀이를 살피면 "조리=음식을 만듦을 만듦"이 되어요. 거꾸로 "요리=여러 음식을 만드는 과정을 거쳐 음식을 만듦"이 되지요. '시장'도 마찬가지입니다. "시장=시장마당"이 되지요. 한 번쯤 짚어서 생각해볼 일입니다.
1. 일말
세탁기/세탁소 → 빨래통/빨래집
육아 → 아이키우기, 아이기르기, 아이돌보기
수퍼마켓 → 구멍가게, 마을가게
마트/재래시장(재래: 예전부터 있어옴) → 저자, 저잣거리
야근 → 밤일
2. 숲말
수목원 → 숲길, 숲길터, 나무쉼터, 나무키움터
삼림욕 → 숲나들이, 숲기운쐬기
등산 → 산타기, 산오르기, 멧나들이, 멧오름, 숲오름
두유 → 콩물
건멸치/건포도 → 마른, 말린멸치/마른, 말린포도
야채/채소 → 나물, 남새, 푸성귀 (사람이 키우면 남새, 절로 자랐으면 나물, 남새 나물 통틀어 푸성귀)
현미/백미 → 누런쌀/흰쌀
3. 살림말
지도 → 길그림, 땅그림
서점투어 → 책방마실, 책방나들이
고속버스/급행열차 → 빠른버스/빠른열차
출입구 → 나들목, 들고나는 문
차도/인도 → 찻길/사람길
좌회전/우회전 → 왼돌기/오른돌기
버스전용차로/자전거전용도로 → 버스길/자전거길
삼거리 → 세거리
우리말 어원중에 재미있는 것을 함께 살펴보기도 했어요 :)
- 단골
옛날에는 식구가 심하게 아프거나 집에 좋지 않은 일이 생기면, 무당을 불러 굿을 했다. 그런데 무당을 부를 때는 늘 같은 무당을 불렀다. 이렇게 정해놓고 부르는 무당을 ‘단골’ 또는 ‘당골’(무당 혹은 무당집이 있는 골짜기)이라고 했는데, 여기에서 유래하여 늘 정해놓고 찾아가는 가게를 가리켜 ‘단골집’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 뚱딴지
‘뚱딴지’는 돼지감자의 다른 말이다. 돼지감자는 아무데서나 잘 자라고 자라는 속도도 빠른 편이라 뜬금없는 곳에서 갑자기 쑥 자라나 지나는 사람들을 놀라게 한다. 문을 열고 마당에 나갔는데 며칠 전에 없던 돼지감자가 마당 한 켠에 커다랗게 자라있다고 생각해보자. 그래서 상황을 가리지 않고 튀어나오는 사람을 가리켜 ‘뚱딴지 같다’고 하게 되었다.
- 멍텅구리
멍텅구리는 ‘뚝지’라는 물살이의 다른 이름이다. 몸이 통통하고 못생긴 데다 동작마저 굼뜨고 느리다. 그래서 아무리 위급한 때라도 벗어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한번 바위에 붙으면 ‘날 잡아 잡수시오’ 하고 떨어질 줄 모른다. 그러니 사람이 다가가도 도망가지 않고, 어부가 실수로 바위에 떨어뜨려도 몸을 움직여 살 궁리를 하지 않는다. 이 물살이를 보고 ‘판단력이 없어 옳고 그름을 제대로 분별할 줄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이라는 뜻이 생겨났다.
'우리는 우리 삶을 사랑할 때에 우리 이야기를 길어올립니다. 우리 이야기가 얼마나 착하고 참다우며 고운가를 살펴야 즐거운 이야기를 얻습니다. 내가 좋아하면서, 나와 내 동무랑 이웃이 다 함께 좋아하는 착한 이야기인지 아닌지를 돌아봐야 합니다. 내 삶 사랑과 내 동무 사랑이 아리따이 깃든 참다운 이야기인가 아닌가를 짚어야 합니다. 곱게 일구는 삶으로 일구는 넋이며 곱게 즐기는 글입니다.(배움책 112쪽)'
1학년 학생들 새로운 배움터에서 지낸지 벌써 달포가량 되었는데요. 배움터에서 지내며 배움이 나에게, 그리고 동무들과의 관계 안에서 참답게 깃들고 있는지 살피면 좋겠어요. 버릇이란, 습관처럼 내 몸에 베어서 생각해보지 않는다면 쉬이 반응하게 되는 나의 행동인데요. 다음 시간까지는 배움터에서 지낸 나의 말버릇 행동버릇 살피고 돌보아 주면 좋을 것들 나눠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