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봉독: 고린도후서 12:7-9】(새 번역)
7 내가 받은 엄청난 계시들 때문에 사람들이 나를 과대평가 할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내가 교만하게 되지 못하도록, 하나님께서 내 몸에 가시를 주셨습니다. 그것은 사탄의 하수인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으로 나를 치셔서 나로 하여금 교만해지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이 었습니다.
8 나는 이것을 내게서 떠나게 해 달라고, 주님께 세 번이나 간청하였습니다.
9 그러나 주님께서는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내 능력은 약한 데서 완전하게 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무르게 하기 위하여 나는 더욱더 기쁜 마음으로 내 약점 들을 자랑하려고 합니다.
【핵심 메시지】
우리들에게 닥친 고난과 질고는 하나님을 기억하게 하는 장치입니다. 우리의 관심을 고난에서 주님께 돌리면 주님의 일하심을 경험하게 됩니다.
【말씀 나눔】
한 중년 신사가 비행기를 타고 여행하고 있었는데, 비행기가 난기류를 만나서 심하게 흔들렸습니다. 엔진이 4개나 있는 큰 비행기였음에도 불구하고 난기류 속에서 속절없이 흔들렸습니다. 그 순간 때 옆자리를 보니 아홉 살 가량의 소년이 앉아 있었는데 처음으로 비행기를 타보는 소년은 온통 두려움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떨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소년이 신사를 올려다보며 "아저씨도 무섭죠?”라고 묻습니다. 그러자 신사는 미소를 지으며 "아니, 이건 정말 재미있는 걸 마치 놀이기구 타는 것 같아”라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소년에게 금방 변화가 왔습니다.
두려움과 긴장으로 떨던 소년의 얼굴은 그의 본 모습대로 개구쟁이로 돌아갔습니다. 작은 생각의 차이가 소년의 불안과 두려움을 걷어 갈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인식의 전환으로 인해 어려움을 극복하거나, 반대로 어려움에 처하기도 합니다.
창세기 말씀에 보면, 하나님은 동산에 선악과를 두시고 아담과 하와에게 절대 먹지 말라고 명령 하셨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한 동안 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과는 거들 떠 보지도 않았습니다. 선악과가 있다는 것이 그들의 삶에 아무런 불편이 없었습니다. 달리 말하면 굳이 선악과에 관심을 쏟지 않아도 될 만큼 아름다운 것들이 많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뱀이 와서 그들의 관심을 선악과로 돌립니다. 뱀의 말에 그동안 관심을 두지 않았던 선악과에 눈길을 돌려 보았더니 조금은 달라 보였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먹고 말았습니다. 여기까지 보면, 선악과는 다른 모든 과일들 보다 아름답고 탐스러운 과일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창2:9에 보면,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을 만드시고 그곳에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열매를 맺는 온갖 나무를 땅에서 자라게 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다른 나무들은 볼품이 없고 선악과만 뛰어나게 아름다웠던 것이 아니라 선악과는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 좋은 열매를 맺는 온갖 나무들 중의 하나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그동안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았던 선악과가 이렇게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며, 사람을 슬기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열매로 보인 것은 뱀이 아담과 하와의 관심을 선악과로 옮겨 놓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관심이 동산에 있는 아름답고 좋은 열매 맺는 나무들에게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로 옮겨져 선악과만을 바라보게 되자, 선악과는 사람을 지혜롭게 하고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있게 만드는 과일이 되었습니다.
이단 또한 우리들에게 그럴싸한 이야기를 덧씌워서 우리들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옮기고 그것에 집중하게 만듭니다. 그것에 집중하게 되면 다른 것에 대한 관심이 끊어지고 잊어버리게 됩니다.
아담과 하와 또한 하나님께 집중되어 있던 관심이 이제는 선악과에 집중되었고, 그 순간 하나님을 잊어 버렸습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린 결과는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이었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마음을 그 어떤 것에 빼앗기게 되면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가 단절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대적들은 우리들의 관심을 하나님에게서 다른 것으로 돌려 놓습니다. 다른 것에 우리의 관심을 돌려놓음으로서 하나님을 소홀히 하고, 결국에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게 만듭니다. 그 대상이 일이 될 수도 있고, 자식이 될 수도 있으며, 돈이 될 수도 있습니다.
아무런 노력도 없이 일이 순적하게 잘 될 때 그 형통함에 대해 경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그 일에 빼앗겨 하나님을 잊어 버리게 하려는 사탄의 전략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에게서 눈을 돌려 우상을 바라보게 하는 대적들의 전략을 간파하고 대비하여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선악과 사건과는 반대로 어떤 것에 집중되어 있던 시선을 다시 하나님께로 되돌리는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 또한 우리의 마음을 지키고 우리 안에 심어 주신 생명을 잃지 않도록 분별하는 지혜를 얻는 귀한 시간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사도바울은 몸에 가시, 즉 질병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질병에 관심을 두고 볼 때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이 질병을 고쳐 달라고 간구합니다. 그것도 한두 번이 아니라 세 번에 걸쳐서 꾸준히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 그 기도에 대한 응답을 받았습니다.
9절 상 반절에 보면, 그러나 주님께서는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병을 고쳐주시지 않으신다는 말씀입니다.
사도바울이 주님께 기도응답을 받고 나서 그의 시선이 자신이 가지고 있던 질병에서 그 질병에 담긴 주님의 뜻으로 옮겨지게 됩니다. 사도바울은 자신이 가진 육체의 가시가 사역에 걸림돌이 된다고만 생각했는데, 주님은 그렇게 보시지 않으셨습니다.
사도바울이 자신의 관심을 질고에서 주님께 옮겼을 때 알게 된 것 첫 번째는, 사도바울이 가지고 있는 질고로 인해서 교만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당대 석학인 랍비 가멜리엘의 수제자입니다. 교만이 하늘을 찌를 소지가 충분히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가진 육체의 가시가 사도바울을 교만하지 않도록 깨뜨려 주었습니다.
7절에 보면,
그러므로 내가 교만하게 되지 못하도록, 하나님께서 내 몸에 가시를 주셨습니다 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육체의 가시로 자신을 쳐서 자신이 교만해지지 못하게 막으셨다고 간증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이 자신의 관심을 질고에서 주님께 옮겼을 때 알게 된 것 두 번째는, 하나님 안에서 완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9절에,
내 능력은 약한 데서 완전하게 된다. 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 힘으로 사역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주신 능력으로 사역할 힘을 얻게 되고, 나아가 주님 안에서 완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결국 내가 약함을 알고 주님께 순종할 때 주님의 권능이 내 안에 머물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풀리지 않는 어려움이 있을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질병을 다 고쳐주시는데 한두 가지 흔적을 남겨 주시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저 또한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셔서 with 코로나 시대에 루게릭, 그리고 강직성 척수염과 함께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이 질병으로 고통 받는 환자들 중에 저와 같이 호전되는 사례는 찾아보기 힘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완전히 낫게 해 주시지 않으시고 증상을 조금 남겨 놓으셨습니다. 근전도 검사를 하면 여전히 루게릭 소견이 있고, X-ray 검사만 해도강직성 척수염 소견이 확실하게 드러납니다. 그런데도 저는 일상을 살아가는 것에 큰 제한을 받지 않습니다. 저에게는 이 질병이 하나님을 기억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하나님께 붙들려 살아가도록 묶어주는 역할을 합니다.
우리들이 하나님께 매어 있어야하는 이유는 하나님 안에 있어야 완전해 지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하나님을 떠나면 완전하지 않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5:5에 보면,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이다. 사람이 내 안에 머물러 있고, 내가 그 안에 머물러 있으면, 그는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나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성도는 하나님을 떠나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사도바울의 몸에 남겨 두신 가시는 하나님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상기시키는 장치로 볼 수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이러한 육체의 가시를 통해서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고백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역설적이게도 육체의 가시 덕분에 사도바울은 하나님 안에 거할 수 있게 되었고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사역자가 되었습니다.
사도바울이 자신의 관심을 질고에서 주님께 옮겼을 때 알게 된 것 세 번째는, 가치관이 바뀌게 된다는 것입니다. 9절에 사도바울은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무르게 하기 위하여 나는 더욱더 기쁜 마음으로 내 약점들을 자랑하려고 합니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문제에 관심이 집중되어 있을 때는 창피하게 생각되었던 자신의 질병이 주님께로 관심을 옮기고 나니 오히려 자랑이 되었습니다.
반대로 사도바울이 육신적으로 자랑으로 여기던 모든 지식은 배설물과 같이 여기게 되었습니다.
사도바울이 자신의 관심을 질고에서 주님께 옮겼을 때 알게 된 것 네 번째는,하나님을 기억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의 몸에 육체의 가시를 남겨 두었습니다.
육체의 가시가 얼마나 사도 바울을 힘들게 하였든지 그 질병을 ‘사탄의 하수인’이라고 말할 정도입니다.
자신을 고통으로 끌고 들어가는 육체의 흔적은 사도바울에게 하나님을 기억하게 하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도저히 이해 할 수 없는 힘든 일들이 일어날 때, 감당할 수 없는 일들이 나에게 닥치면 하나님께 매달리게 됩니다. 어려운 일을 당하면 대부분의 성도들은 기도의 자리에 나오게 됩니다. 문제로 인해서 잊고 있었던 하나님을 기억하였기 때문입니다.
결과적으로 사도바울의 마음을 낙심하게 하는 고난과 질병은 하나님이 살아 역사하심을 기억하게 하며, 하나님께 더욱 단단히 매어 줄 끈이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들 또한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이해 할 수 없는 고난을 당할 때도 있습니다. 생각지도 않은 질병에 걸렸거나 하던 일이 실패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의 시선을 고난과 실패의 자리에 머물게 하지 말고, 우리의 눈을 들어서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베드로가 물 위를 걸었다는 것을 알 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의 명령으로 물위를 걷다가 물에 빠지게 되었던 원인이 무엇이었습니까?
예수님께로 가려고 물위를 걸어가던 베드로의 시선이 예수님이 아닌 다른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마14:29-30에 보면(새번역),
29 예수께서 "오너라!" 하고 말씀하셨다. 베드로는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갔다.
30 그러나 베드로는 [거센] 바람이 불어오는 것을 보고, 무서움에 사로 잡혀서, 물에 빠져 들어가게 되었다. 그 때에 그는 "주님, 살려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베드로의 시선은 예수님이 아니라 자신들을 곤경에 빠뜨린 바람을 보았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의 권능을 의심하게 되고 결국은 물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문제에 사로잡혀 있던 우리의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기 위해서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우리의 시선을 들어 주님을 바라보면 보이는 것들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 없이 내 힘으로 잘 살 수 있다는 교만한 마음입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것이 내 힘으로 살아왔다고 착각하고 이후로도 내 마음 먹은 대로 이곳저곳에서 이런 저런 일을 하며 잘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교만입니다. 하나님의 자리에 내가 앉아서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는 것이 교만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볼 때 비로소 교만한 마음이 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을 바라보면 보이는 것이 또 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나는 너무나 보잘 것 없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 앞에 나는 감히 얼굴을 들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나를 귀하다 하십니다.
나의 약함을 알게 되면, 약한 나를 강하게 하시고, 보잘 것 없는 나를 여기까지 인도하여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알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힘을 주셔서 지금까지 살아 올 수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내가 이룬 모든 성과들도 내 힘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통해서 일하신 것이라는 것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고백하고 찬양하게 됩니다.(찬양ppt)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주님의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주님의 지혜가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못합니다. 주님의 능력이 없으면, 나는 한 순간도 못 삽니다. 주님의 생명이 없으면 ...’
우리가 진심으로 이 찬양을 부르며 이 찬양에 공감한다면, 여러분은 최소한 여러분의 약함을 아는 성도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앞에 급작스럽게 고난이 닥치면, 이런 생각을 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혹시 내가 하나님 앞에 무슨 잘못을 하여서 하나님이 나를 혼내시는 것일까? 이러한 생각을 하는 성도들에게 너무 민감한 것 아니냐 책망하는 경우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이 드는 것만으로도 우리에게 닥친 고난은 의미가 있다고 말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어려움으로 인해서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도움을 구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원인을 알 수 없는 질병에 걸렸을 때, 갑작스럽게 난관을 만났을 때, 자녀에게 문제가 생겼을 때 이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징계라고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지만, 혹시라도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시는 경고가 아닐까? 생각하며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나아가는 것은 성도에게 필요한 자세라 말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보면 우리에게 닥친 어려움들은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대한 증거가 됩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기억하기 위한 여러 가지 장치들이 있습니다. 다시는 물로 세상을 심판하지 않으시겠다는 약속을 상기하는 무지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너게 하셨음을 기억하기 위해 길갈에 세운 돌 등 등 하나님의 일하심을 기억하게 하는 장치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에 걸림돌과 같이 보이는 어려움들도 우리 삶에 하나님의 일하심의 흔적이 되고 하나님의 일하심을 기억하는 장치가 됩니다.
내 삶에 하나님이 일하심을 기억하고 경험하는 삶을 살아가는 성도는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완전히 달라지고 삶이 달라집니다.
이전에는 그렇게 좋아 했던 것이 싫어지고, 이전에 듣기 싫던 찬양이 너무 은혜가 됩니다. 차를 타서 라디오를 틀었다가 극동방송이 나오면 재빨리 다른 방송으로 채널을 돌리던 사람이 이제는 다른 방송이 나오면 기독교 방송으로 채널을 바꾸는 일이 생깁니다.
이전에는 최신 유행가를 흥얼거리던 사람이 이제는 나도 모르게 찬양을 흥얼거리됩니다. 이전에 교회에 헌금 내는 것을 이해 할 수 없었는데, 이제는 당연한 것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더 중요한 것을 분별하는 지혜를 얻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우선으로 하다 보니 버는 것은 이전보다 적은데 오히려 더 여유롭고 더 많은 평안을 누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아등바등 살던 내 자신을 되돌아보면 왜 그렇게 살았는지 그때는 참 미련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지금까지 살아온 모든 시간들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함께 하심을 발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 가장 행복한 순간이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에 있을 때 라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과 관계를 놓지 않도록 고난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고 귀하게 여기시기 때문에 육체의 가시를 주십니다. 세상이 볼 때 우리의 질고와 고난은 징계일 수 있지만, 주님 안에 있는 성도들에게는 복이 되는 것입니다.
고난과 질고가 징계가 될지 복이 될지의 차이는 단 하나입니다.
바로 하나님께 집중하고 있는가? 여부입니다. 하나님께 집중하는 성도들에게 고난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러한 믿음을 가진 성도는 고난이 닥치면 문제에 집중된 눈을 들어 우리의 구원자 되시는 주님을 바라보게 됩니다.
오늘 바울에게 주님께서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하심을 듣고 주님을 바라보았던 사도바울처럼 이번 한 주간도 문제가 아니라 문제보다 크신 하나님께 우리의 관심을 돌리고 집중하며, 오직 하나님을 신뢰하며 사랑의 하나님을 찬양하는 날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찬양】
크신 내 주님, 오직 주의 사랑에 매어, 주 사랑이 나를 숨 쉬게 해, 은혜, 주 만 바라볼지라.
그 사랑, 감사, 시선, 아침 안개 눈 앞 가리 듯, 감사함으로, 괴로울 때 주님의 얼굴보라.
예배 찬양: 272 고통의 멍에 벗으려고, 300장 내 맘이 낙심되며, 301장 지금까지 지내 온 것
436장 나 이제 주임의 새 생명 얻은 몸
【설교영상】
첫댓글 나의 생각, 나의 마음, 나의 눈으로 바라보면 눈을 뜨고 있어도 장님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오직 말씀 안에서 생각하고 말씀으로 보고 말씀의 눈으로 바라보기를 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