첼시 FC
설립연도: 1905
연고지: 런던 (London)
구단주: 토드 보얼리
감독 : 마우리시오 포체티노
우승 경력 : 프리미어리그 (6회)
FA컵 (8회)
UEFA챔피언스리그 (2회)
UEFA유로파리그 (2회)
UEFA컵위너스컵 (2회)
UEFA슈퍼컵 (1회)
왕 중 왕을 꿈꾸는 리그의 강자
1904년 건축가 거스 미어스는 런던 시 풀럼에 위치한 운동장을 매입했다.
그는 운동장을 축구장으로 개조하여 풀럼 FC구단에 양도하려 했으나 거절당하자 스스로 첼시 FC(이하 첼시)를 창단했다.
구단명은 홈 경기장이 위치한 풀럼 지역에 풀럼 FC라는 구단이 있기 때문에 풀럼의 옆 동네인 첼시에서 따왔다.
첫 감독으로 스코틀랜드 국가대표 선수인 존 로버츠슨을 앞세운 첼시는 첫 공식 경기인 스톡포트전에서 0:1로 패했다.
프로데뷔를 2부 리그에서 시작한 첼시는 3시즌 만에 1부 리그로 승격했다.
조지 힐스돈, 지미 윈드리지, 닐스 미들보와 같은 슈퍼스타들 덕분에 홈구장 스탬퍼드 브리지는 늘 인산인해를 이뤘다.
창단 10주년을 맞은 1915년에는 사상 처음으로 FA컵 결승전에 올라 기대를 모았으나 셰필드 유나이티드에 0 : 3으로 패했다.
첼시는 1920년 1부 리그 3위에 오르는 등 프로에 정착했으나 2번의 세계 전쟁 탓에 상승세가 한풀 꺾였다.
흔들리는 구단을 다시 잡은 이는 테드 드레이크 감독이었다.
잉글랜드 센터 포워드 출신의 드레이크는 1952년 감독이 되어 구단의 현대화 작업에 앞장섰다.
스타 선수를 영입하는 기존 전략에서 벗어나 존 해리스, 켄암스트롱과 같은 하부 리그의 전도유망한 선수를 영입했고,
동시에 유소년 시스템을 구축해 팀을 리빌딩했다.
이 같은 드레이크 감독의 노력은 1954/55시즌 사상 첫 리그 우승으로 나타났다.
기반이 탄탄해진 첼시는 토미 도허티, 데이브 섹스톤, 존 닐 감독을 거치면서 FA컵, UEFA컵 등 새로운 우승 트로피를 수집했다.
2부 리그로 강등되는 시련이 있었지만 오뚝이처럼 다시 1부 리그에 올라 우승을 노렸다.
팀은 1953년에 바뀐 엠블럼 속 사자처럼 잉글랜드 1부 리그의 팀으로 당당히 거듭났다.
뤼트 훌리트 ∙ 지안루카 비알리 감독은 1990년대 후반에 FA컵 우승을 연달아 이끌며 새 역사를 썼다.
구단은 2003년 6월, 러시아 부호 로만 아브라모비치 회장이 팀을 인수하면서 환골탈태했다.
아브라모비치 회장은 2004년 FC포르투를 이끌고 UEFA챔피언스리그 우승을 이끈 조세 무링요 감독을 선임했다.
그리고 이적 시장이 열릴 때마다 수백억 원을 써서 디디에 드로그바, 아르연 로번, 데미언 데프 등 전 세계의 슈퍼스타를 영입해 전력을 강화했다.
삽시간에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아스널, 리버풀의 아성에 도전하는 강호로 떠오른 것이다.
첼시는 창단 100주년을 맞는 2004/05시즌에 최다승(29승), 최다 승점(95점), 최소 실점(15점)이라는 프리미어리그 신기록을 수립하며 리그를 제패했다.
기세를 몰아 2005/06시즌에도 리그를 제패했으며, 2007년에는 리그컵과 FA컵에서 우승하며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알렉스 퍼거슨 감독의 속을 쓰리게 했다.
2007년 9월 성공의 ‘일등공신’ 무링요 감독이 팀을 떠나면서 지휘봉을 잡은 아브람 그랜트 감독은
사상 처음으로 UEFA챔피언스리그 결승에 올려놓았으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패해 우승에 실패했다.
브라질 출신 명장 루이스 스콜라리 감독은 2008/09시즌 도중 성적 부진을 이유로 경질되었고, 거스 히딩크 감독이 소방수로 나서 FA컵 우승을 차지했다.
2009년 여름 부임한 카를로 안첼로티 감독은 리그 우승과 FA컵을 따내며 팀 역사상 최초로 ‘더블’ 우승을 기록하며 무링요 시대에 이어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다.
2011년 6월 ‘제2의 무링요’ 안드레 빌라스 보아스 감독이 팀에 적응하지 못하고 전술 운용에도 실패하며 물러난 뒤,
새롭게 사령탑에 앉은 로베르토 디 마테오 감독은 2012년 5월 19일 FC 바이에른 뮌헨을 제압하며 사상 첫 UEFA챔피언스리그 우승 트로피를 거머쥐었다.
2013년 6월 3일 조세 무링요가 다시 감독으로 부임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엠블럼 변천사
엠블럼 스토리
첼시의 엠블럼은 창단 후 100년이 넘도록 네 차례 바뀌었다.
첫 작품은 연금 수령자라는 뜻의 ‘펜셔너(Pensioner)’. 닉네임에서 읽을 수 있듯이 휘장 정중앙에는 푸른 제복을 입고 군모를 착용한 노인이 보인다.
원 테두리에는 첼시 풋볼 클럽(Chelsea Football Club)이라고 적혀 있다.
이 문장은 1952년 테드 드레이크 감독에 의해 바뀔 때까지 근 반세기 동안 유지되었다.
드레이크 감독은 옛것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인물이었는데 새 닉네임 ‘블루스’에 걸맞은 참신하면서도 현대적인 문장을 고안했다.
시행착오 끝에 1953년, 첼시 지역 자치구 문장에서 모티브를 따온 문장이 공개됐다.
당시 회장이었던 앨 캐도건 경의 가문 문장에서 사자를 따왔고, 웨스트민스터 사원 수도원장의 지팡이를 엠블럼에 넣었다.
장미는 잉글랜드와 축구를 상징하는 이미지이기에 새겨넣었다. 33년간 큰 인기를 누린 이 엠블럼은 1986년에 바뀌었다.
장미와 지팡이를 문장에서 빼고 사자의 얼굴 방향도 바뀌었다.
그러나 2005년, 팬들의 요구 때문에 다시 예전의 엠블럼과 유사한 지금의 문장으로 되돌아왔다.
스페셜 : 귀족 클럽과 어울리지 않는 훌리건들
첼시 헤드헌터스(Chelsea Headhunters).
이들은 1960~80년대 웨스트햄 유나이티드의 ‘인터 시티 펌’, 밀월의 ‘밀월 부시워커스’와 함께 악명 높은 훌리건으로 그 명성(?)을 떨쳤다.
응원 도구 대신 쇠몽둥이와 군용 무전기를 동원하여 전략적으로 상대 서포터스를 기죽이던 그들은 거사(?)를 치른 뒤 “당신을 택해서 손봐줬다”라는 메모를 남기기도 했다.
1989년 리버풀과 노팅엄 포레스트와의 경기에서 일어난 난동 사태로 95명이 사망하는 일이 있은 이후
전국적으로 ‘훌리거니즘 뿌리 뽑기’ 운동이 진행되면서 훌리건들이 잠잠해졌다.
그러나 2009/10시즌에 첼시 훌리건 126명이 폭력 관련 범죄로 구속되는 등 첼시는 여전히 다른 구단이 벌벌 떠는 구단 중 하나다.
2012년 전(前) 리버풀 감독 라파엘 베니테스가 임시 감독으로 임명될 때에도 그들은 한목소리로 퇴출 구호를 외쳤다.
그만큼 그들의 단결심이 강하다는 증거다.
-류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