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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고 또 걷기 스크랩 안성 칠장산(492m)/칠현산(516.2m)/덕성산(519m) 산행기
Arusa 추천 0 조회 152 10.03.25 16:10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안성 칠장산(492m)/칠현산(516.2m)/덕성산(519m) 산행기


  칠장산(七長山)은 별로 높지 않은 산이면서도 우리나라 중심부에 위치해 있으면서 한남금북정맥(漢南錦北正脈)이 한남정맥과 금북정맥으로 갈라지는 중요한 분기점이 되는 산으로 유명하다.

  즉 우리나라 13정맥 중의 하나인 한남금북정맥이 속리산 천황봉(1,057.7m)에서 백두대간으로부터 갈라져 나와 한강과 금강을 나누는 분수령이 되는데, 이 한남금북정맥이 북으로 달려와서 칠장산에 이르러 한남정맥과 금북정맥으로 갈라지는 것이다.

                                              칠장산

 

  이후 한남정맥은 계속 북으로 치달아 김포의 문수산(376m)까지 이어진 후 한강 하류에 그 여맥을 가라앉히고, 금북정맥은 안성과 진천 지역을 빼고는 충청남도가 주 무대로서 마지막에 예산의 덕숭산(495.2m)과 가야산(677.6m)을 들어 올린 후 서해에 그 여맥을 가라앉힌다.

  행정적으로 칠장산은 경기도 안성시 삼죽면, 죽산면, 그리고 금광면의 경계를 이루고 있고, 산자락에는 유서 깊은 고찰 칠장사를 품고 있다. 그리고 칠현산과 덕성산은 이 산의 남쪽에 능선(금북정맥)으로 연결되어 이웃하고 있어서 함께 종주 산행의 대상이 되고 있으며, 조금 어색하지만 원점회귀도 가능하다.

                                              덕성산

 

  칠현산은 원래 ‘아미산(峨嵋山)’이라 불렀다. 그런데 고려 때 혜소국사(972~1054)가 수도하던 무렵 이 인근에 포악한 도적 일곱이 있었다. 어느 날 절 아래서 쉬던 이들 중 한 도적이 목이 말라 샘물을 마시러 갔다가 샘물을 뜨려던 바가지가 순금으로 되어 있음을 보고 도적은 얼른 물을 떠 마시고 품안에 슬쩍 바가지를 감추고 돌아왔다. 그런데 두 번째, 세 번째, 일곱 번째 도적까지 그렇게 물을 마시러 갔다가 금 바가지 하나씩을 옷 속에 숨겨 가지고 왔다.

                                                칠장사 전경

 

  그 후 이상스런 일이 벌어졌다. 각자 몰래 가지고 온 금 바가지가 집에 돌아와 본 즉 온 데 간 데 없어진 것이다. 한 도적이 조심스럽게 이 사실을 고백하니, 여섯 도적이 모두 똑같은 사실을 실토하는 것이었다. 이들은 곧 알아차렸다, 혜소국사가 신통력을 부린 것이었다는 것을.

  그래서 이들 선량치 못한 악인 7명이 혜소국사를 찾아가 마주 앉게 되었는데, 이들이 혜소국사의 신묘한 도력에 이끌리어 설법을 듣게 되었고, 설법을 들은 나쁜 놈들은 교화가 되어 일곱 현인으로 변신하였다고 한다.

                                            칠현산

 

  그 때부터 산 이름을 아미산에서 칠현산(七賢山)으로 고쳐 부르고, 절 이름도 칠장사(漆長寺)에서 칠장사(七長寺)로 개명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옛날에는 칠장산과 칠현산을 모두 합하여 ‘칠현산’이라 불렀었다. 그러던 것이 조선 시대에 어느 세도가가 이 산 일대를 임금으로부터 하사 받음으로 해서 사찰 뒤쪽의 산을 분리하여 별도로 ‘칠장산’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칠장사와 관련된 모든 기록에는 옛 이름을 따라서 칠현산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있으며, 칠장사의 현판에도 ‘七賢山 七長寺’로 쓰여 있다.


  칠장산 산행 들머리인 경기도 안성의 칠장사로 가는 길목은 교통이 편리하여 대중교통을 이용해도 되지만 승용차로 갈 경우 중부고속도로 일죽 나들목을 빠져 나와 38번 국도와 진천방향의 17번 국도를 이용하면 된다.

  즉 일죽 나들목을 나와 장호원-안성을 연결하는 4차선 38번 국도를 타고 서쪽 안성방면으로 4km 정도 진행하다가 인터체인지가 보이면 표지판 지시대로 진천(광혜원)방향으로 좌회전하여(오른편으로 돌아내려가서 도로 아래를 통과한 후) 17번 국도로 남진해야 한다.

  그리하여 4km 정도 남쪽으로 달리면 ‘안성 컨트리클럽’ 입구가 나오고, 거기를 지나 고개(걸미고개)를 넘으면 곧 칠장사 이정표가 나타나면서 오른편으로 칠장사로 들어가는 작은 도로가 갈라진다.

 

  이후 작은 고개를 넘어가면 칠장사로 들어가는 길이 꼬불꼬불 이어져서 4km 정도 들어가면 버스종점이자 산행 들머리인 칠장사 입구 일주문이 있는 곳에 닿는데, 가는 중간 왼편에 극락마을이 나타난 후, 조금 더 가면 오른편에 신대마을이 나타나고, 일주문에 닿기 300~400m 전방 오른편 산자락에 고색창연한 부도 밭이 있어서 전통 깊은 사찰로서의 내력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일주문이 있는 그 부근은 상가이자 주차장이고, 일주문 안으로 들어가서 칠장사에도 넓은 주차장이 있어서 주차하기에 지장이 없다.    

  그리고 일주문 직전의 왼편엔 11.5m 높이의 철제 원통 당간지주(幢竿支柱)가 하늘 높이 우뚝 솟아 위용을 자랑한다. 당간이란 사찰에 법회 등 의식이 있을 때 부처님의 공덕을 기리는 당(幢;깃발)을 다는 깃대를 말한다.

 

  법장사 당간은 현재 국내에 남아 있는 거의 유일하고 완전한 형태의 것이라고 한다. 지름 50cm 정도인 원형 철통은 현재 14층이 남아 있지만 본래는 28층이었다고 하니, 그 위에 부처님의 공덕을 기리는 깃발이 나부꼈을 터이니 장관이었을 것이다.

  당간지주를 지탱하고 있는 지주석은 매우 소박하고 단아하다. 지주석 사이에 견고하게 끼여 솟아 있는 이 철 당간은 풍수설에 관련된 전설을 지니고 있다. 칠장사의 지형이 마치 배 모양과 같아서 이 당간을 돛대에 비유해 세웠다는 것이다. 땅도 사람 몸과 같이 허약한 부분이 있어서 이 허약한 부분을 보충하기 위해서 보통은 탑을 세우는데 당간도 그 중의 하나라고 한다.

                                                용두사 당간지주(국보제41호)

 

  철 당간은 전국을 통틀어 몇 안 된다. 그 중 충북 청주 용두사 터 철 당간은 조성 연대와 철통의 척 수가 새겨진 명문이 있어 국보 제41호로 지정되어 있으나 칠장사의 철 당간은 조선 중기 작품으로 밝혀졌으나 명문이 없다. 그래서인지 문화재로서는 급이 낮은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39호로 지정되어 있다. 그리고 철 당간 옆에는 칠장사 사적비가 있다.


  칠장사는 경내에 국보와 보물까지 있으나 희한하게 주차비나 입장료를 받지 않는다. 요즘 사찰들은 돈 독이 올라서 돈 되는 일이라면 대중들의 눈총 같은 건 안중에도 없는데, 왜 주차비도 입장료도 받지 않는 것일까? ‘문화재 관람료’라 하면 안 내고 못 배길 텐데 말이다. 절에서 돈 안 받는 게 이상할 정도로 타락한 세상이다.

 

  일주문을 지나 올라가면 소박하면서 고즈넉한 칠장사의 색다른 모습이 시야에 들어온다. 칠장사는 신라 선덕여왕 5년(636년)에 자장율사가 창건했다는 유서 깊은 고찰이다. 그리하여 신라 47대 헌안왕(재위 857~861) 때는 그의 서자 궁예가 13세가 될 때까지 유년기를 이 칠장사에서 보내며 학문과 무술을 연마했다고 한다.

  궁예는 스스로 미륵으로 자칭하였다는데, 그가 유년기를 보냈던 안성은 미륵이 많기로 유명하다. 특히 삼죽면의 국사암 궁예미륵은 궁예가 좌우로 문관과 무관을 거느린 형상을 하고 있다.

                                            국사암 궁예미륵

 

  궁예와 인연이 깊었던 칠장사는 고려 시대에 들어와서 퇴락한 것을 고려 현종 5년(1014)에 왕명으로 이곳 안성 출신인 혜소(慧炤:927~1054)국사가 중수하였다. 그래서 칠장사에는 창건주인 자장율사보다 혜소국사의 자취가 더 짙게 남아 있다. 

  그리고 1389년(공양왕 1)에는 왜구의 침입으로 절이 다시 전소되었던 것을 조선 중종 때(1506년) 중건하였다.

  그리하여 조선조 명종 때에는 양주 백정 출신의 의적 임꺽정이 스승 병해스님의 가르침을 받으며 10여 년간 이곳에 머물러서 벽초 홍명희(碧初洪命憙)의 역사소설 ‘임꺽정’ 이야기의 발원지가 되었고, TV 드라마 ‘여인천하’에서는 갖바치 스님과 그의 제자인 임꺽정에 얽힌 이야기가 전개되기도 한 현장이다.

  이런 사연이 있어서 임꺽정이 구월산에서 체포되어 처형되기 직전까지 스승 갖바치 스님을 찾아뵙기 위해 자주 안성 땅에 모습을 드러냈다고 한다.

  갖바치 스님 역시 가죽신을 만드는 백정 출신으로 칠장사에 은둔해 있으면서 주민들에게 가죽신 깁는 법을 가르쳐 마침내 가죽신은 안성유기와 더불어 안성의 특산물이 되는데 한몫을 했다고 한다. 도력이 높았던 갖바치 스님은 주민들에게 병해대사로 불리며 추앙을 받다가 85세에 입적했다.

                                        국보제296호 오불회괘불탱화

 

  그리고 인조 원년(1623)에는 인목대비가 아버지 김제남(金悌男)과 아들 영창대군의 명복을 비는 원찰로 삼기도 하였다. 그래서 국보 제296호인 ‘오불회괘불탱화(五佛會掛佛幀畵)’는 광해군에 의해 비극적인 죽음을 당한 영창대군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인목대비가 시주한 것이라고 한다. 이 탱화는 보존에 문제가 발생할까봐 외부에 좀체 공개 하지 않고 있다. 괘불이란 절에 큰 법회나 의식을 행하기 위해 법당 앞뜰에 걸어놓고 예배를 드리는 대형 불교 그림을 말하며, 칠장사에는 숙종 36년(1710년)에 그려진 삼불회 괘불탱(보물 제1256호)도 전하고 있다.

  헌데 칠장사 터가 명당이어서 1674년(현종 15)과 1694년(숙종 20)에 걸쳐 어떤 세도가가 이곳을 장지(葬地)로 쓰기 위해 절을 불태운 그런 비극적인 사건이 있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재건하여 지금에 이른다고 한다.

                                               대웅전

 

  경내에는 대웅전과 원통전을 비롯한 12동의 건물이 있으며,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14호인 대웅전은 조선조 말에 중창한 것으로 아담한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의 건물이며, 대웅전 기단은 장대석을 5단으로 세웠고, 원형의 초석위에 약간의 배흘림이 있는 기둥을 세웠다.

  헌데 건물은 근세의 것이지만 배흘림이 느껴지는 기둥은 전부 같은 시기의 것이 아니고, 원래의 전각에 쓰였던 600년 전 것으로 보이는 기둥도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대웅전은 단청이 벗겨져 있고, 끌질을 하고 지나간 흔적이랄 수 있는 목질의 무늬가 그대로 드러나 있어서, 마치 구례 화엄사의 각황전처럼 고풍스러움과 청빈이 밴 해맑은 인상을 보여준다.


  대웅전 옆에는 보물 제983호인 석불입상이 서 있다. 이 불상은 원래 고려시대에 번창했던 죽산 봉업사(奉業寺)의 부처로 죽산중학교에 있다가 칠장사로 옮겨왔다. 불상을 빚은 조각솜씨가 매우 곱고 섬세하다. 오른손을 살포시 가슴에 얹고, 왼손은 차분히 내려 무릎 아래로 늘어진 옷자락을 잡고 있으며, 그 자태가 매우 뛰어나서 통일신라시대 양식의 우수한 수작으로 꼽힌다. 다만 아쉬운 것은 이 석불입상이 죽산중학교에 있을 때 학생들에게 훼손을 당해 얼굴의 마모가 심하여 그 인상이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고 있는 점이다.


  대웅전 옆 원통전 왼쪽으로 비탈길을 조금 올라가면 보물 제488호인 혜소국사비가 안치된 전각이 있다. 고려 문종 때 혜소국사를 기리기 위해 세운 비이다. 비신 높이는 3.15m, 폭은 1.42m이다. 

  임진왜란 때 가토 기요마사가 북상하다가 칠장사에 들어와서 부하들을 시켜 절을 뒤지고 무례하게 굴었는데, 한 노승이 나타나 신성한 법당을 더럽히지 말고 썩 물러가라고 크게 나무랐다는 것이다. 이에 화가 치민 가토가 칼을 빼어 노승을 치니 노승은 홀연히 자취를 감추고 비석이 갈라지면서 피를 흘렸다고 한다. 놀란 가토는 혼비백산해 달아났고, 지금 혜소국사 비신은 그 내력을 증명이라도 하듯 가운데가 갈라져 있다.


  혜소국사비 전각 왼쪽엔 나한전이 있다. 사방 2미터정도 밖에 안 돼 보이는 작은 건물이지만 엄연히 한 채의 집이다. 지붕 위에 나옹선사가 기념으로 심었다는 600년 묵은 노송의 가지가 운치 있게 뻗어 있다. 나한전 안에는 혜소국사가 일곱 명의 도적을 교화하여 모두 도를 깨쳤음을 상징하듯 일곱 분의 나한을 모시고 있다.

  조선시대 유명한 어사였던 박문수(朴文秀)가 이곳 아랫동네인 천안 병천 출신이라서 한양으로 과거시험 보러 가기 전 이곳 나한전에서 어머니가 만들어준 조청유과를 부처님께 올려 기도를 드리고, 그날 밤 여기에 머물다가 꿈에 과거시험문제를 현몽하였다고 한다. 그 결과장원급제를 했다는 일화가 전한다. 그래서 지금은 수능을 앞둔 수험생 부모들의 기도처가 되어 있단다.


  나한전 옆의 오솔길에 들어서면 곧 이어 등산로는 산죽 밭으로 이어지면서 가파른 길로 바뀐다. 산죽(조릿대)이란 대개 고산지대에 많은데, 이곳은 별로 고도가 높지도 않은 곳임에도 산죽 밭이 무성하다. 

  월출산(809m) 천황사 쪽의 산죽처럼 키를 넘게 큰 것도 아니고, 계방산(1,577.4m)의 산죽처럼 키가 아주 낮은 것도 아닌 중간 크기의 산죽으로 복조리 만들기에 알맞은 그런 산죽이다. 그래서 이 고장이 복조리 고장인가보다. 

 

  산죽 밭이 끝날 즈음 등산로는 완만해지면서 금북정맥인 능선 삼거리에 닿는다. 칠장사에서 20여분 걸린다.

  오른쪽으로 가면 칠장산 정상이고, 왼쪽 능선으로 가면 칠현산으로 이어진다. 때문에 칠현산으로 향하려면 오른쪽 칠장산을 올랐다가 다시 여기로 되돌아 와야 한다.


  칠장산으로 가는 길은 노송이 더러 눈에 띄는 짙은 숲속의 기분 좋은 산길이 이어진다. 능선 삼거리에서 5분 정도 올라가서 3정맥 분기점을 지나 다시 5분 정도 올라가면 아담한 정상 표지석이 반기는 헬기장이다. 그러나 진짜 칠장산 정상은 헬기장에서 3분 정도 더 가야한다.

 

  칠장산 정상엔 삼각점(308 재설, 79,9 건설부)이 있으나 수림에 가려 전망이 없어서 표지석을 헬기장에 세워놓았다. 헬기장은 북쪽을 제외하고는 삼면의 조망이 시원스럽게 열려 있다. 칠현산을 포함한 안성 일대의 산들이 잘 보이고, 서쪽 산 아래 자리 잡은 골프장이 눈에 거슬리면서도 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남서쪽으로는 금광저수지가 내려다보이고, 남쪽으로는 가야할 칠현산 능선 너머로 많은 산들이 일렁이고 있으며, 동으로는 한남금북정맥으로 연결되는 산줄기가 끝없이 펼쳐져 있다. 중부 지방엔 들이 넓어서 산이 적을 줄 알았으나 여기도 산 너머 산이다.   


  헬기장에서 조망을 즐기고 3정맥 분기점을 지나 칠현산을 향하면 일반 등산객들도 많이 다니는 완만하고 널찍한 숲길이 이어진다. 그리하여 봉우리 두 개를 오르내리면서 약 1km, 30여분 전진하면 널찍한 헬기장(433m봉)에 닿는다. 이곳에서 남쪽을 바라보면 칠현산이 가까이 다가선다. 

 

  헬기장에서 내리막을 5~6분 내려서면 잘록한 안부 사거리에 닿는다. 이곳에는 칠순부부탑이라는 돌탑이 있다. 아마 칠순을 맞이한 어느 노부부가 쌓은 것으로 보이는 이름 그대로 공든 탑이다. 이어서 가슴까지 차는 산죽이 무성한 길을 올라간다.

 

  17번 국도에서 갈라져서 칠장사로 들어오면서 오른편에 있었던 신대마을이 조선 중기 때부터 복조리를 만들어온 우리나라 대표적인 복조리 마을이다. 칠장산과 칠현산에 질 좋은 산죽이 무성하게 자생하고 있어서 주민들이 농한기를 이용해 복조리를 만들기 시작한 게 지금까지 명맥을 이어오고 있는 것이다.

 

  이 신대마을이 ‘농촌마을 가꾸기 우수상’을 탄 환경 친화적인 <구메농사마을>로 지정이 된 곳이다. ‘구메’란 구멍을 뜻하는 옛말이니 ‘구메농사’라 하면 작은 지역의 조그마한 농사를 뜻하는 말이다. 주민들의 노력에 의해 국산 복조리의 80~90%를 생산하여 국민들에게 행운을 주며, 주민 소득향상에도 기여하고 있는 복덩이로 자리매김함으로써 자그마한 농사나마 알뜰히 짓고, 복조리로 농가소득을 올리는 복된 마을이 되었다.

 

  칠순부부탑에서 산죽 길로 30여분 올라가면 칠현산 정상에 서게 된다. 돌탑 위에는 까만 오석(烏石)으로 만든 표지석이 놓여 있고, 그 앞에 삼각점(22 재설, 1976 건설부)이 있다. 칠장산 정상에서 1시간~1시간 10여분 걸린다. 정상은 숲에 막혀 조망은 시원치가 않다.

 

  칠현산에서 동쪽 능선 길로 하산하면 명적암(明寂庵)을 거쳐 칠장사로 원점회귀 할 수 있다. 하산하려면 1시간 남짓 소요되지만 칠장사 가기 전 차도로 15분 정도 걸어가야 한다.

 

  하지만 이곳에서 덕성산으로 향하려면 계속해서 남쪽으로 주능선을 타야 한다. 그리하여 조금 아래로 내려가면 가을엔 억새가 무성해지는 헬기장이 있고, 헬기장을 내려가면 참나무 숲이다. 칠현산까지는 능선 오른편 자락이 계속 골프장이었으나 칠현산을 지나면 골프장도 없고, 능선 양쪽은 경사가 급해지면서 칠장산 쪽보다 원시 자연이 잘 살아 있다. 사람들이 대개 칠현산에서 명적암 쪽으로 하산을 하므로 이쪽으로는 등산객이 덜 다녀서 길도 한결 더 호젓하다.

 

  헬기장에서 살짝 내려갔다가 올라가면 봉우리 정상에 못 생긴 자연석에 ‘곰림정상’이라 적힌 표지석이 서 있다. ‘곰림정상’이란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그리고 10여분 전진하여 고압선 철탑이 서 있는 곳에 닿으면 앞쪽으로 덕성산이 꽤 우람하게 다가선다. 거기서 2분 정도 내려간 안부에는 임도가 지난다. 아마 고압선 철탑을 세울 때 닦은 길인 듯하다.

 

  이후 20여분 오르막을 올라가면 덕성산 삼거리이다. 거기 이정표에 ‘무술마을 2.2km, 병무관 3.5km, 칠장사 5.2km’라 적혀 있고, 기둥에 ‘생거진천’이라 적혀 있다. 살기 좋은 진천이라는 뜻으로 이 고장엔 ‘생거진천(生居鎭川) 사거용인(死居龍仁)’이란 말이 전한다.

 

  옛날 용인에 사는 한 여인이 남편이 죽자 진천으로 개가를 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용인에 두고 온 아들이 장성하자, 진천에 사는 어머니를 모셔가기 위해 찾아갔으나 진천에서 낳아 키운 아들이 완강히 반대하는지라 난처하게 되었다.

  그래서 고을 원님을 찾아가서 판결을 요청했던 바, ‘살아 있는 동안에는 진천의 아들이 모시고, 죽어서는 용인의 아들이 모셔라’ 하고 판결을 내렸다는 데에서 그런 말이 유래되었다고 하지만 그 외에도 여러 설화들이 전한다. 

  아무튼 진천은 옛날부터 땅이 넓고 비옥하여 살기 좋은 곳이기에 ‘생거진천’이요, 용인은 산자수명하며 산세가 순후하여 사대부가의 유명한 산소가 많으므로 죽어서 묻힐만한 곳이라 하여 ‘사거용인’이라 한 것 같다.


   덕성산(德城山) 정상은 금북정맥 라인에서 동쪽으로 조금 벗어 나 이정표가 서 있는 삼거리에서 동쪽으로 100여m 거리에 있다. 칠현산에서 여기까지 5~60분 정도 걸리고, 칠장사에서 5.3km, 2시간 30분 정도 걸린다.

  소나무가 몇 그루 서 있는 덕성산 정상은 조망도 괜찮은 편이어서 지나온 능선과 이어지는 금북정맥도 한눈에 들어온다. 정상엔 표지석과 돌탑이 있고, 거기에도 ‘생거진천’이라 쓴 이정표가 있어서 ‘병무관 3.5km, 칠장사 100m 후방 5.3km’라 적혀 있다.

 

  여기서 칠장사 쪽으로 원점회귀 하려면 일단 칠현산까지는 왔던 길로 되돌아가서 칠현산에서 명적암 쪽으로 원점회귀 해야 한다. 따라서 좀 어색한 원점회귀가 되는 셈이다. 

  그러나 병무관 쪽으로 하산하려면 그쪽은 경기도와 충북의 도계 능선으로 이 동쪽 능선을 따라 20여분 내려가면 나오는 갈림길에서 오른쪽 지능선, 역시 이정표의 병무관 방향으로 내려선다. 이 능선을 끝까지 내려서면 산행 종료지점인 광혜원 성당이 나온다. 덕성산에서 1시간 40여분 소요되고, 터미널까지 걸어가려면 20여분 걸린다.

  그런데 기왕에 여기까지 온 김에 옛 화랑의 터전이었던 무술마을을 가보려고 하면 덕성산 삼거리에서 남쪽 금북정맥 능선을 타야 한다. 

 

  그리하여 덕성산 삼거리에서 남쪽으로 20여분 내려가면 왼편으로 희미한 능선 길이 보인다. 이쪽으로는 사람들이 많이 다니지 않아서 길이 희미하다. 그러나 길 잃을 정도는 아니다.

 

  이후 편안한 능선 길로 20여분 내려가면 임도를 만나면서 거기 등산안내판과 ‘생거진천’의 이정표가 서 있다. 이정표엔 ‘덕성산 1.7km, 병무관 6.2km, 신계리, 고개새울 12.5km’라 적혀 있다. 칠장사에서 이곳까지 7km, 3시간~3시간 30분, 쉬는 시간 포함하면 4시간 정도 걸린다.

 

  이후 임도를 따라 10여분 내려가면 차단기가 설치되어 있는 곳에 이르고, 그 바로 아래에 큰 느티나무가 서 있다. 400년 된 보호수이고, 그 옆에 ‘지명으로 본 화랑벌 유적’이라 적힌 안내도가 서 있어서 깊은 감회가 인다. 삼국시대 신라의 화랑들이 백제와의 국경에 가까운 이 지역에서 수련을 했었구나 하는 역사의 향기를 느끼게 된다.

  안내도엔 신라의 화랑도들의 수련에 연관된 유적들이 지명으로 남아 있음을 지도와 더불어 그 내용을 기술하고 있다.  


  댓골(竹洞)---화랑들이 사용하는 활과 화살통을 만들던 곳.

  병무관(兵武館)---화랑의 연무대와 병기고가 있던 곳.

  무술(武術)---화랑들이 무예를 닦던 곳.

  비들목---비둘기를 통신 전령으로 훈련시키던 곳.

  중암석굴(장수굴)---김유신 장군의 수련처.

그 외에도 군량골, 화랑궁전지 등 여러 지명에 대한 설명이 나열되어 있다. 말하자면 지금의 진천군 광혜원면 일대가 삼국시대에는 화랑들의 수련 장소였던 것이고, 조선시대에 와서는 지나다니는 관리나 나그네들의 숙소인 원(院)이 설치되었던 것이다.

 

                                               무술마을

 

  그리고 안내판에서 북쪽을 올려다보면 산자락에 마을이 보인다. 그 마을이 바로 화랑들이 무예를 닦았다는 구암리 무술마을이다.

  이런 색다른 경험을 할 수 있어서 의미 있는 산행이 된 것까지는 좋은데, 그 다음이 문제로 남는다. 즉 광혜원까지 거리가 5km 정도 되며, 이 거리를 걸어 나가자면 1시간 정도 걸리는 것이다.

  걸어 나가는 것이 부담이면 지나가는 차를 만나서 편승을 부탁하거나 버스를 기다려야 한다. 하도 깊은 산골 마을이라서 버스는 오후 2시 뿐이다. 그렇게 하여 일단 광혜원으로 나간 다음 칠장사 주차장까지는 택시를 이용해야 한다(택시비 1만원).


글쓴이 - 둘 산악회   아미산(이덕호)

*스크? 해 가시는 분은 출처를 분명히 밝히며 이용해 주세요.

  아니면 저적권법에 저촉됩니다. 감사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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