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지니아 울프 독서법 / 버지니아 울프 / 정명진 옮김(3)
책은 어떻게 읽어야 하나? 2)
어둠과 광휘가 교차하는 엘리자베스 1세 여왕(재위 1558~1603) 시대의 런던에서 비틀거리며 손으로 더듬으며 나아가는 것보다 더 매력적인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머무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지요. 윌리엄 템플7)과 조너선 스위프트8), 로버트 할리9), 헨리 존10) 같은 사람들이 우리를 손짓해 부르고, 그러면 우리는 그들의 언쟁들을 풀고 그들의 성격들을 해독하는 데 몇 시간을 보냅니다. 그러다가 그 작가들이 싫증나면, 우리는 다이아몬드 반지를 낀 검정 옷차림의 부인을 지나쳐 새무얼 존슨과 올리버 골드스미스와 데이비드 개릭을 찾아 어슬렁거리거나, 원한다면 해협을 건너가서 볼테르와 드니 디드로, 드팡 부인을 만났다가 잉글랜드로, 트위트넘으로 돌아올 수 있지요.
어떤 장소들과 어떤 이름들은 거듭 나타납니다. 트위트넘은 베드피드 부인이 한때 정원을 두었던 곳이고, 훗날 알렉산더 포프가 살던 곳이지요. 거기서 우리는 스토로베리 힐의 호레이스 월폴의 집으로 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월폴은 새로운 인물들을 우리에게 소개하고, 방문할 집도 아주 많고 눌러야 할 벨도 아주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를 들어 미스 베리의 집문 앞에 서서 저 위쪽에서 새커리가 오는 것이 보이면 잠시 멈칫하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새커리는 월폴이 사랑했던 여인의 친구이니까요. 그래서 단순히 이 친구에서 저 친구로, 이 정원에서 저 정원으로, 이 집에서 저 집으로 옮겨가면서, 우리는 영국 문학의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까지 두루 설렵하다가, 만약에 우리가 지금 이 순간을 그 앞에 흘러간 모든 순간들과 구별할 수 있다면, 긴 여정에서 깨어나면서 자신이 다시 현재로 돌아와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우리가 이 삶들과 편지들을 읽을 수 있는 방법들 중 하나입니다. 우리는 그것들이 과거의 많은 유리창들의 불을 밝히도록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죽은 유명한 인물들이 평소의 버릇대로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가끔 우리 자신이 그들과 매우 가깝고 그들의 비밀을 알고 있다는 공상에 빠지며, 또 가끔은 그들이 쓴 희곡이나 시를 끄집어내서 그 작품들이 저자 앞에서는 다르게 읽히는지 확인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다른 질문들을 불러일으킵니다. 이런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한 권의 책은 그것을 쓴 저자의 삶의 영향을 어느정도 받을까요? 다시 말해, 인간적인 측면이 작가적인 측면을 해석하도록 내버려두는 것은 어느 정도 안전할까요? 또 작가의 인간적인 측면이 우리의 내면에 불러일르키는 공감과 반감을 우리는 어느 정도로 받아들이거나 부정해야 할까요? 단어들이 너무나 섬세하고 저자의 성격을 너무나 쉽게 반영하게 되니 말입니다.
이런 것들이 우리가 삶들과 편지들을 읽을 때 우리를 압박하는 질문들이지요. 이 질문들에 우리는 스스로 대답해야 합니다. 이유는 너무나 개인적인 문제에서 타인들의 선호에 좌우되는 것만큼 불행한 일은 없으니까요.
그러나 우리는 그런 책들을 또 다른 목적으로, 그러니까 문학을 알거나 유명한 인물들과 친숙해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자신의 창의력을 새롭게 되살리고 다듬기 위해 읽을 수도 있습니다. 시가 오른쪽에 열린 창문이 없는가요? 책을 읽다가 밖을 내다보는 것도 얼마나 큰 즐거움인지 모릅니다. 그때 펼쳐지는 장면은 그 자연스러움으로, 그 무관함으로, 그 영속적인 움직임으로 너무나 큰 활력을 안겨주지요. 망아지들이 들판을 힘차게 질주하고 있고, 부인은 샘에서 양동이에 물을 채우고 있고, 당나귀는 머리를 뒤로 젖히고 낑낑 소리를 길게 내고 있습니다. 어떤 서재든 그곳에서 보다 중요한 부분은 남자들과 여자들과 당나귀들의 삶에서 그런 덧없는 순간들을 기록한 것에 지나지 않지요.
모든 문학은 연륜이 쌓임에 따라 나름의 쓰레기 더미를 갖게 됩니다. 말하자면, 사라진 어투로 더듬거리며 어설프게 들려주는, 흘러간 순간들과 망각된 삶들에 관한 기록이지요. 그러나 만약에 여러분 자신이 그 쓰레기를 읽는 즐거움까지 받아들이기로 마음을 먹는다면, 여러분은 주형공(鑄型工)에게 던져진 인간 삶의 유물들에 깜짝 놀랄 것이고, 정말로 압도당하고 말 것입니다. 그 유물이 한 통의 편지일 수도 있는데, 그것이 얼마나 멋진 통찰력을 보여줄 수 있는지 모릅니다. 또 그 유물이 몇 개의 문장일 수 있지만, 그것들이 제시하는 전망이 너무나 훌륭할 수 있지요.
가끔은 하나의 완전한 이야기가 마치 어떤 위대한 소설가의 손을 거친 것처럼 아름다운 유머와 비애감과 완전감과 함께 모습을 드러내지만, 그럼에도 그것은 단지 캡틴 존스의 이상한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는 늙은 배우 테이트 윌킨슨(Tate Wilkimson:1739~1803)일 뿐이고, 아서 웰슬리11) 밑에서 복무하다가 리스본에서 아름다운 소녀와 사랑에 빠진 젊은 장교일 뿐이고, 텅 빈 응접실에서 바느질감을 떨어뜨리면서 버니 박사(Dr. Burney)의 훌륭한 조언을 받아들여 리쉬(Rishy)와 달아나지 않았더라면 하고 한숨짓는 마리아 앨런12)일 뿐입니다. 이것들 중 어떤 것도 가치를 지니지 않고 아주 하찮지만, 망아지가 들판을 질주하고 부인이 샘에서 양동이에 물을 채우고 당나귀가 울음소리를 내고 있는 사이에, 이따금 쓰레기 더미를 뒤져 거대한 과거 속에 묵여 있던 반지들과 가위와 부러진 코들을 발견해서 서로 꿰어 맞추는 것도 아주 재미있는 일입니다.
7) 영국 정치가이자 에세이스트(1628~1699)
8) 영국계 아일랜드의 소설가이자 성공회 성직자(1667~1745)
9) 영국의 정치인(1661~1724)으로, 문화계에서 후원활동을 많이 펼쳤다
10) 영국 정치인자 관리, 정치 철학자(1670~~1751)
11) 영국군 총사령관과 총리를 지낸 군인이자 정치가(1769~1852). 나폴레옹 전쟁 때 명성을 얻었다
12) 버니 박사와 리귀, 마리아 앨런은 영국 풍자 소설가이자 극갖가인 패니 버니(Fanny Burney 1752~1840)의 회고록에 등장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우리는 결국엔 쓰레기 읽기에 지치고 맙니다. 우리는 월킨이나 번베리, 마리아 앨런 같은 인물들이 우리에게 제공할 수 있는 반(半)의 진리를 보완하는 데 필요한 것을 찾는 작업에 지칩니다. 그들은 통달하고 제거하는 예술가의 능력을 갖추지 못했지요. 그들은 자신의 삶에 대해서도 완벽한 진실을 말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들은 아주 훌륭할 수 있는 이야기를 꼴사납게 훼손시켰습니다.
그들이 우리에게 제공할 수 있는 것은 사실들이 전부였으며, 사실들은 대단히 열등한 형태의 픽션이지요. 따라서 우리의 내면에선 절반의 진실과 추정을 빨리 정리하고, 인간 성격의 미세한 차이를 찾는 일을 그만두고, 보다 위대한 추상을, 픽션의 보다 순수한 진실을 즐기려는 욕망이 점점 더 커집니다. 따라서 우리는 치열하고 일반적이고 디테일을 모르는 감정을, 또 규칙적이고 반복되는 박자에 의해 강조되는 그런 감정을 갖게 되는데, 이 박자를 자연스럽게 표현하고 있는 것이 시이지요. 그때는 바로 시를 읽을 시간이고, --- 우리가 거의 시를 쓸 수 있는 때입니다.
서풍이여, 그대는 언제나 불어 오려나?
약간의 비라도 내린다면,
그리스도여, 나의 사랑이 나의 품 안에 있고
내가 다시 나의 침대에 있다면13)
13) 14세기 또는 15세기의 작품으로 알려진 '서풍(Western Wind) 의 일부
시의 효과는 너무나 강하고 직접적이기 때문에, 당장은 시 자체의 감각 외에 다른 감각은 전혀 없지요. 그때 우리가 얼마나 심오한 깊이에 닿는지 모릅니다. 우리의 몰입은 너무나 신속하고 완전합니다. 여기엔 꼭 붙잡을 것도 없으며, 우리가 비상(飛翔)하도록 만드는 것도 전혀 없습니다. 픽션의 착각은 점진적이고 픽션의 효과는 단계만 거치지만, 이 4행을 읽을 때, 그것은 쓴 사람이 누구인지 묻거나, 존 던의 집이나 시드니의 비서에 대해 생각하거나, 그 행들을 과거의 복잡함과 세대들의 승계 속에 파악하기 위해 일기를 멈추는 사람이 있을까요?
시인은 언제나 우리의 동시대인이지요. 당장 우리의 존재가, 개인적인 감정이 격한 충격을 받을 때처럼 중심 쪽으로 향하면서 수축됩니다. 후에, 감각들이 더 큰 원들을 그리면서 우리의 정신을 뚫고 퍼져나가기 시작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보다 멀리 떨어져 있던 의미들에도 그 물결이 가 닿고, 그러면 이 의미들은 소리를 내며 말을 하기 시작하고, 우리는 반응과 반향을 알게 됩니다. 시의 강렬함은 엄청 넓은 범위의 감정을 건드리지요. 시인의 다양한 기술을 알기 원한다면, 다음에 소개하는 시들을 서로 비교해 보기만 하면 됩니다. 시인은 우리를 행위자인 동시에 방관자로 만들 수있고, 시인은 펠스테프14)나 리어 왕 같은 등장인물 속으로 마치 그것이 장갑인 양 자신의 손을 끼워 넣을 수 있고,시인은 영원히 응축하고 학장하고 언명할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첫 번째 시의 힘과 솔직함과 두 번째 시의 유연함을 비교해 보세요.
나는 한 그루 나무처럼 쓰러져 나의 무덤을 발견하리라
오직 내가 슬퍼한다는 것만을 기억하면서.15)
순간순간이 모래의 떨어짐으로 헤아려지네.
모래시계처럼, 길지 않은 세월이
우리를 마모시켜 무덤으로 몰아붙이는데,
우리는 그것을 방관하고 있네.
흥청대며 낭비하면서 쾌락의 시대가 마침내
절실해지며 슬픔으로 끝나지만,
방탕에 물린 삶은
한숨을 내쉬며 모래를 하나씩 헤아리네.
그러다가 마지막 모래 하나가 떨어지네.
그러면 불행은 끝나고 휴식에 들어가네.16)
15) 존 플레처(1579~1625)와 프랜시스 보몬트(1584~1616)의 희곡 '하녀의 비극' 4막 중에서
16) 영국 시인이자 극작가인 존 포드(1586~1639?)의 희곡 '연인의 우울' 중에서
아니면 다음 시의 명상적인 차분함과 그 다음 시의 끝없는 사랑스러움을 비교해 보세요.
젊든 늙었든
우리의 운명은, 우리라는 존재의 가슴과 고향은
무한과 함께 하네. 오직 거기서만
우리의 운명은 희망과 함께 하네. 절대로 죽지 않는 희망,
노력, 기대, 욕망,
그리고 언제나 생겨나려고 하는 그 무엇과17)
흐르는 달은 하늘 높이 올라가고
그리고 어디에도 머물지 않네
부드럽게 달은 위로 올라가누나
그리고 그 곁을 한두 개의 별이 지키고18)
17) 윌리엄 워즈워스(1770~1850)의 시 '서곡(The Prelude)중에서
18) 새뮤얼 테일러 콜리지(1772~1834)의 '늙은 선원의 노래' 중에서
아니면 이 시의 화려한 공상과 비교해 보세요
그리고 삼림지를 자주 찾는 자는
산책을 절대로 멈추지 않을 것이고
저 깊은 아래 숲속의 빈터
광대한 세상의 타오르는 불길
위로 향하던 부드러운 불꽃 하나가
그에겐 그늘 속의
크로코스(Crocus)19)처럼 보이네20)
19)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인간 젊은이이다. 그는 스밀락스라는 님프와의 연애에 실망한 뒤에 신들에 의해 같은 이름의 식물이 되었다
20) 에베니저 존스(1820~1860)의 시 '세상이 불탈 때'의 일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