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산군과 갑자사화
금삼의 피!
박종화가 지은 장편 역사소설로 연산군을 소재로 하여 연산군의 생모인 윤 씨를 복위시키고자 일으킨 갑자사화를 작품화시킨 것이다.
박종화는 이 작품에서 연산군의 상식을 초월한 횡포는 모두 비명에 죽은 어머니의 비참한 최후를 알게 된 데서 비롯되었다고 하였다. 비록 정사(正史)에서는 폭군 연산의 행적이 씻을 수 없는 오욕으로 되어 있지만, 이 작품에서는 연산의 인간상을 낭만적인 문장과 풍부한 상상력으로 모성에 굶주리다 모성을 애닯게 그리워하는 로맨티스트로 승화시켰다.
이 소설 이후 지금까지 연산에 관한 거의 모든 드라마나 영화에서 이 소설 내용을 정설처럼 사용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금삼이란 폐비윤씨가 사약을 받을 당시 입고 있었던 옷을 말한다. 사약을 먹은 폐비 윤씨가 그 옷에 원한이 서린 피를 토해 낸다. 그리고 폐비윤씨는 피가 묻은 옷 부분을 찢어 그녀 어머니에게 전하며 나중에 내 아들이 왕위에 오르며 전해주라는 유언을 남긴다.
폐비윤씨 어머니는 그 금삼을 고이 간직하면서 기회를 엿 보다가 연산이 왕위에 오르고 나서도 십년이 지나서야 희대의 간신 임사홍에게 전하고 임사홍은 연산에게 금삼의 피를 보여주고 그 옷을 본 연산이 거의 반 미치광이가 되어 일어난 사단이 갑자사화라는 것이 이 소설의 내용이다.
이 박종화의 '금삼의 피' 소설때문에 역사적 진실로 굳어진 이 일들이 정말 역사적 사실일까?
갑자사화는 1504년 연산군 10년 연산군의 친모 폐비 윤씨의 복위문제와 관련된 사화는 맞다
성종은 폐비윤씨 문제는 자기가 죽은 후 100년동안 절대로 발설해서는 안된다고 지엄한 명을 내렸다. 폐비윤씨 사사사건은 연산이 아주 어렸을 적 발생한 일이라 당시 연산은 전혀 모르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실록을 보면 연산군은 즉위 초 부터 자신의 친모 폐비윤씨의 억울한 죽음을 대강은 알고 있었고 언급도 자주 한다. 그래서 금삼의 피를 보고 폐비윤씨 죽음을 처음 알고 반미치광이가 되었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고 단지 소설에 불과하다.
연산은 즉위 후 먼저 억울하게 죽은 생모를 다시 중전으로 복위시키고자 했다. 그러나 인수대비나 대신들의 강력한 반대에 부닥쳐 갈등을 겪게 된다.
그러던 중 연산군은 무오사화를 일으키고 왕권을 강화시키지만 폐비윤씨를 중전으로 복위 시키지는 못한다.
무오사화는 훈구파에 의한 사림파 일부를 제거 한 것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폐비 윤씨 사사와 관련있는 훈구파는 여전히 요직에 있었고 조선의 실세로 있었다.
무오사화 이후 6년 동안 왕권이 강화 된 연산은 극에 달한 향락생활과 사치로 인해 국가 재정이 궁핍해졌다. 이에 조정은 이를 제어하려는 훈구 사림파 중심의 부중세력(府中勢力) 과 연산군을 이용하여 자신의 세력을 신장하려는 임사홍, 신수근 같은 궁중세력(宮中勢力) 으로 나뉘어 진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궁중세력(宮中勢力)대표인물 임사홍(任士洪)은 연산군을 사주하여 부중세력(府中勢力)과 공신배척의 음모를 꾸몄다.
폐비윤씨의 생모 신씨(申氏)가 폐비의 폐출·사사의 경위를 임사홍에게 일러바친 것을 이를 다시 연산군에게 밀고하면서 사건이 확대되었고 갑자사화가 된 것이다.
박종화 소설 '금삼의 피'도 여기까지는 같지만 '금삼의 피'를 보고 연산이 눈이 뒤짚혔다는 내용은 실록이나 정사에는 전혀 나오지 않는다. 박종화작가의 역사적 상상의 산물이다.
연산군은 임사홍의 밀고를 받은 즉시 정·엄 두 숙의를 궁중에서 연산이 직접 때려 죽이고 그들의 소생을 귀양보냈다가 사사하였다. 그의 친 할머니 인수대비도 정·엄 두 숙의와 한패라 하여 머리로 인수대비 가슴을 주어박는 난동을 부렸으며 인수대비는 그 화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이 일들도 드라마나 영화에서 나온 이야기이지 실록등 정사에는 나오지 않는다.
정·엄 두 숙의가 궁중에서 죽음을 당하고 인수대비가 갑자사화 이후 얼마 안 되어 죽는 것은 맞다.
진실은 알 수 없다.
요즈음 같이 모든 것이 낱낱이 밝혀지는 세상에도 구중궁궐 청와대에서 일어난 7시간에 대해 별소리가 다 나오고 아직도 정확히 밝혀지지 않는 데 그 당시야 오죽하겠는 가?
연산군은 비명에 죽은 생모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폐비 윤씨를 복위시켜 왕비로 추숭하고 성종묘(成宗廟)에 배사(配祀)하려 하였는데,
응교 권달수(權達手)·이행(李荇) 등이 반대하자 권달수는 참형하고 이행은 귀양보냈다.
또한 성종이 윤씨를 폐출할 때 찬성한 윤필상(尹弼商)·이극균(李克均)·성준(成俊)·이세좌(李世佐)·권주(權柱)·김굉필(金宏弼)·이주(李胄) 등을 사형에 처하고, 이미 죽은 한치형(韓致亨)·한명회(韓明澮)·정창손(鄭昌孫)·어세겸(魚世謙)·심회(沈澮)·이파(李坡)·정여창(鄭汝昌)·남효온(南孝溫) 등의 명신거유(名臣巨儒) 등을 부관참시(剖棺斬屍)하였으며, 그들의 가족과 제자들까지도 처벌하였다. 이 외에도 홍귀달(洪貴達)·주계군(朱溪君) 등 수십명이 참혹한 화를 당하였다.
갑자사화는 훈구, 사림 구별없이 100여명의 대신들이 처참하게 당했다.
지금으로 말하면 3급 이상 고위관료 100여명이 사형 집행을 당했다는 것이다. 당시는 지금처럼 고위 관료가 많지도 않았다. 생각해보면 얼마나 무서운 사건이었는 가?
조선시대 고위관료로 사는 것도 쉽지는 않는 일이었다.
연산 주위에 모인 간신 집단인 궁중세력들의 정권욕과 즉위 십년을 맞이한 연산이 더 강화된 왕권으로 공신들의 재산을 빼앗아서 왕 맘대로 놀아보고 이 기회에 어머니 윤씨의 원한을 풀려고 일으킨 사단치고는 엄청난 파장을 낳았다.
갑자사화는 이후 국정과 문화발전에 악영향을 끼쳤는데, 사형을 받았거나 부관참시의 욕을 당한 사람들 중에는 역사상 그 이름이 빛나는 명신과 대학자·충신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
이와 같이 두 차례의 사화가 거듭되는 동안 연산군의 학정은 더욱 심해졌다.
즉, 자신의 실정에 대한 직간을 멀리하고, 경연(經筵)과 대제학제도를 폐지하였으며, 창덕궁과 담을 사이에 두고 있는 성균관을 연락(宴樂)의 장소로 만들었고, 장악원을 개칭한 연방원(聯芳院)을 원각사(圓覺寺)에 두어 여기(女妓)들의 모임 장소로 삼았다.
뿐만 아니라 전국에 채청·채홍사(採靑採紅使)를 보내 미녀를 선발하였는데 이를 ‘운평(運平)’이라 하고, 그 중에서 뽑힌 기녀를 ‘흥청(興淸)’이라 하여 300명을 궁중에 기거하게 하였다. 2000명이란 설도 있다.
흥청때문에 연산이 망했다고 해서 그런 의미로 흥청망청이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요즘 나온 '간신'이리는 영화도 채홍사역할을 한 임사홍 아들 임숭제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다.
오래 전 공전의 히트를 친 '왕의남자'에서도 갑자사화 상황을 영화화했고 연산의 변태적 성 욕을 주제로 했다.
그리고 연산은 사냥을 위해 도성 밖 30리의 민가를 철거해 민원을 샀으며, 이러한 학정을 비방하는 한글투서 등이 있자 『언문구결(諺文口訣)』을 불태우는 등 한글 사용을 금지하였다. 이후 국문학 발전에 악영향을 끼쳤다.
더욱이 사치와 연락을 계속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내연(內宴)에 나온 사대부의 부녀자를 농락하는 등 황음(荒淫)이 자행되는 가운데 정치는 거의 방기되어 내시 김자원(金子猿)에게 맡겨진 상태였다.
연산은 갑자사화 이후 절대적 왕권을 행사하게 되었다. 만약 연산이 절대왕권을 병든 조선사회를 개혁하고 백성들을 위한 정책을 조금이라도 펼쳤더라면 연산에 대한 역사의 평가는 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연산은 앞서 나열한 것 처럼 정반대로 최악의 정치와 행동을 했다.
연산 재위12년 동안 무오, 갑자 두 번의 사화를 일으켸 수 많은 신하들을 학살하고 혀가 내둘리는 엽색행각으로 국가재정을 파탄 직전에 빠지게 만들었다.
백성들에게는 금표(사람들을 출입금지시키는 지역표시. 연산시절 한양의 절반이 해당되었다 함 )등 여러가지 기이한 정책으로 백성은 도탄에 빠지게 했다.
이러한 연산군의 학정은 궁금세력과 결탁해 이루어졌으므로 그를 축출하려는 움직임이 사림계열에서도 있었다. 그러나 구체적인 거사 계획은 훈구세력에 의해 구체적으로 실행에 옮겨졌다. 바로 중종반정(中宗反正)의 형태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끝내 연산은 조선 최초로 신하들에 의해 쫒겨난 왕이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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