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16일 오늘의 역사
2022년 말레이시아 산사태로 100여명 고립
2021년 <오징어 게임>의 주연배우 이정재 미국 유력 일간지 뉴욕타임스(NYT)가 선정한 올해 문화계의 '샛별'(breakout star)로 선정.
2021년 미국 중남부 폭설에 대형폭풍 발생 40만가구 정전 사상자 발생
2020년 연등회 유네스코 인류유형문화유산 등재 확정, 우리나라 21번째 문화유산
2020년 사상최초로 검찰총장 징계
현직 검찰총장(윤석렬)의 직무가 2개월 동안 정지되는 사상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11월24일 법무부 장관이 검찰총장을 직무에서 배제하면서 징계를 청구한 것이 처음이고 청구에 따라 총장의 징계위원회가 열린 것도 처음인데, 결국 정직 2개월의 중징계가 내려졌다. 징계위는 추미애 장관이 제기한 6가지 혐의 가운데, 4가지 사유가 인정된다고 판단했다. 징계위가 인정한 4가지 징계 사유는 재판부 사찰, 채널A 사건 관련 감찰 방해, 채널A 사건 수사 방해, 정치적 중립에 관한 부적절한 언행 등의 위신 손상 등이다
하지만 언론사 사주와의 부적절한 교류, 감찰에 관한 협조의무 위반 등 감찰 불응의 사유는 부적절하긴 하지만 징계 사유는 되지 않는다고 밝혔다.
이 밖에도 채널A 사건 감찰 관련 정보 유출, 한명숙 전 총리 사건 감찰 관련 감찰 방해의 사유는 증거 부족으로 무혐의 결정했다.
2017년 이대 목동병원 신생아중환자실에서 신생아 4명 차례로 숨짐
2017년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송신도 할머니 도쿄에서 세상 떠남(95세)
2014년 파키스탄 페샤와르의 공립학교에 침입한 파키스탄 탈레반 대원 6명의 무차별 난사와 파키스탄군과의 교전으로 학생과 교사 148명 학살됨
2011년 바다 위 2층 다리로는 처음으로 자동차 전용도로와 보행 및 자전거도로를 나눈 전남 고흥 거금대교(2,028m) 개통
2011년 필리핀 남부지역 열대 폭풍우 와시 700여명 사망 1천여명 실종
2011년 고추장 떡볶이의 원조 마복림씨 91세로 별세
“고추장 맛은 며느리도 몰라, 아무도 몰라.”
며느리한테도 알려주지 않는다는 비장의 고추장맛으로 반세기 넘게 떡볶이 1번지로 불리는 서울 신당동 떡볶이 골목을 지켜온 마복림(사진) 할머니가 최근 91세로 별세한 것으로 16일 알려졌다.
마씨는 과거 일부 언론을 통해서 간장으로 조리는 ‘궁중 떡볶이’ 가 대세였던 1950년대에 고추장을 이용한 붉은 떡볶이를 처음 개발한 인물로 알려졌다.
마씨는 6·25전쟁 직후인 1953년 지금의 서울 중구 신당동에서 떡볶이집을 열었다. 우연히 중국집에 갔다가 자장면에 떨어뜨린 떡을 맛본 후 고추장에 춘장을 섞은 ‘마복림식(式)’ 떡볶이를 개발했다.
마씨는 고추장과 춘장을 섞은 양념으로 특유의 맵싸하면서도 달달한 떡볶이를 개발한 ‘신당동 원조1호 마복림 떡볶이’ 집을 운영하면서 원조 떡볶이집의 명성을 누려왔다. 너무 맵지 않으면서 감칠 맛이 돌아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인기를 끌었다. 요즘도 원조의 손맛을 그리워 하는 시민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한 시민은 "집 주변에도 떡볶이를 파는 곳은 많지만 십수년 전부터 할머니 집에 길들여져 지금도 찾고있다"고 말했다.
지난 1996년 한 업체의 고추장 광고에 출연, 고추장 맛은 며느리에게도 알려주지 않는다는 광고 문구로 인기를 끌기도 했다. 할머니는 끓여 파는 떡볶이 대신 식탁 위에서 끓여 먹는 ‘즉석 떡볶이’ 도 개발, 떡볶이 한 가지 메뉴만으로 원조의 명성을 누려왔다. 노점상같은 가판대에서 시작한 가게는 ‘며느리도 모르는 장맛’ 으로 성황을 이뤘다. 하루 평균 500여명의 손님들이 찾아오자, 조그맣던 떡볶이 집은 해가 바뀔 때마다 넓어졌다. 그래도 할머니는 변변한 장식도 없이 오래된 가스레인지와 낡은 의자와 테이블을 고수했다.
2010년 대법원, 1974년 선포한 ‘긴급조치 1호’ 위헌 판결
유신헌법에 근거해 1974년 선포된 대통령 긴급조치1호는 위헌(違憲)이라는 대법원의 첫 판결이 나왔다.
대법원 전원합의체(재판장 이용훈 대법원장)는 16일 유신헌법을 비판하고 정부정책을 비난하는 유언비어를 날조한 혐의(긴급조치1호 위반 등)로 징역 3년을 선고받은 오종상(69)씨가 낸 재심(再審)사건에서 무죄를 선고하면서, 대법관 전원일치 의견으로 “긴급조치1호는 위헌”이라고 판시했다.
1·2심은 긴급조치1호가 1974년 8월 해제됐기 때문에, 처벌규정이 존재하지 않을 때 내리는 면소(免訴)를 선고했으나, 대법원은 면소가 아니라 위헌판단에 따른 무죄선고가 맞다고 본 것이다. 대법원은 이와 함께 긴급조치1호가 합헌이라는 취지로 판시한 과거 대법원 판결들을 모두 폐기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1974년 선포한 긴급조치1호는 유신헌법(1972년 제정) 개정 논의와 정부 비판을 금지하면서 이를 어길 경우 영장(令狀) 없이도 처벌할 수 있게 하는 내용 등을 담았다.
대법원은 판결문에서 “국가긴급권에 대한 대통령의 결단은 가급적 존중되어야 하나 법치주의 원칙상 통치행위라고 하더라도 헌법과 법률에 근거해야 한다”며 “긴급조치1호는 국민의 기본권을 제한하는 것이어서 위헌”이라고 밝혔다. 대법원은 또 “긴급조치1호는 국회의 입법권 행사로 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헌법재판소의 위헌심판 대상이 되는 법률로 볼 수 없다”며 “긴급조치의 위헌 여부 심사권은 최종적으로 (헌재가 아닌) 대법원에 속한다”고 밝혔다.
대법원의 이날 판결로 향후 긴급조치1호 위반과 관련한 재심사건에서 법원은 무죄를 선고하게 된다. 하지만 변경된 판례의 적용은 새로운 증거가 나타나거나, 수사·재판과정의 명백한 위법이 판결로 확인돼 법원이 재심신청을 받아들인 사건에만 국한된다.
2009년 멕시코 '마약왕' 아르투로 벨트란 레이바 사살
2009년 12월 16일 멕시코의 '마약왕' 아르투로 벨트란 레이바(Leyba·48)가 멕시코 중부의 쿠에르나바카에서 멕시코 해병대원 200명과 총격전을 벌인 끝에 사살됐다.
레이바는 멕시코 중부가 거점인 '벨트란 레이바 카르텔'이란 마약범죄조직의 두목이다. 멕시코 최대 현상수배자 세 명 중 한 명으로, 230만달러(약 27억원)의 현상금이 붙었다. 미국 정부가 수배한 마약조직 두목 10명 중 1명이기도 하다. 그가 미국에 밀반입한 코카인은 200t에 이르고, 여기서 60억달러(약 7조원)를 벌었다.
레이바는 자신을 '보스 중의 보스'로 칭했고, 잔인하고 대담하기로 악명이 높았다. 레이바의 조직은 작년까지 멕시코 3대 마약조직 중 하나인 '시날로아 카르텔'과 동맹을 맺고, 멕시코와 미국에 마약을 공급했다. 그러나 이후 두 조직은 전쟁을 시작했고, 레이바는 살해된 상대 조직원의 머리를 잘라 공공장소에 버리기도 했다.
멕시코 정부와 미국 정부는 지난 수개월 동안 레이바를 추적했고, 결국 그를 쿠에르나바카의 한 아파트로 몰아넣었다. 16일 멕시코 해병대는 레이바와 2시간 동안 수류탄까지 던지며 격렬한 총격전을 벌였고, 레이바를 조직원 3명과 함께 사살했다.
2008년 스리랑카 정부군 반군과 교전 120명 사살
2008년 12월 16일 스리랑카 정부군과 타밀반군(LTTE)과의 교전으로 반군 120명이 사살되고 정부군 25명이 숨졌다. 부상자는 반군 250명, 정부군 160명이다.
이날 교전은 스리랑카 북부 자프나반도와 반군 수도인 킬리노치치 외곽에서 벌어졌다. 앞서 지난 11일에는 양측간 교전으로 최소한 90명의 정부군을 사살했다고 반군 측이 주장한 바 있다.
불교도인 싱할라족이 주도하는 현 스리랑카 정부는 노르웨이의 중재로 타밀반군과 맺은 휴전협정을 지난 2008년 1월 깨뜨리고 대대적인 반군 소탕에 나서고 있다.
정부군은 연초부터 계속된 작전을 통해 이미 7천500명의 반군을 사살했으며 최근에는 섬 서쪽에 있는 반군의 주요 거점인 푼네린을 장악하고 반군 수도인 킬리노치치를 3면에서 포위, 막바지 공세를 강화했다.
2008년 '십대들의 쪽지' 발행 김형모씨 별세
24년간 청소년들을 위한 '십대들의 쪽지'를 발행해온 김형모(52)씨가 2008년 12월 16일 오후 10시45분 급성췌장염으로 숨졌다.
서울 장로회 신학대학과 미네소타신학대학원을 졸업한 김씨는 1984년부터 사재를 털어 청소년의 고민 상담 내용과 도움이 되는 글을 담은 책자 '십대들의 쪽지'를 매월 30만부씩 발행, 무료로 전국의 중·고등학교와 청소년 단체에 배부해 왔다
2002년 세계최초로 비브리오균 유전자 완전 해독
비브리오 패혈증 예방 백신과 항균제 등을 개발하는 데 필수적인 ‘비브리오균 유전자 정보지도’가 국내 연구진에 의해 완전 해독됐다.
전남대 의대 최현일(崔賢一) 교수팀은 16일 “비브리오균의 유전체 염기서열을 세계 최초로 완전 해독해 미국 국립보건원 산하 ‘바이오텍 정보센터’(NCBI)의 세균유전체 데이터베이스에 등재했으며, 국립보건원 유전체연구소의 데이터베이스에도 올려 전 세계 연구자들이 이를 무상으로 이용해 백신 개발을 할 수 있도록 했다”고 밝혔다.
일반적으로 질병 원인균의 유전자 지도가 완성된 후 10년 정도 지나면 백신 등 예방약이 만들어진다. 최 교수는 “작년 12월 1일부터 비브리오균 유전체 염기서열 해석에 나서, 1년 만에 4800여개의 유전자를 확인했으며 이를 완전 해독한 결과 100여개의 병원성 유전자를 발견했다”며 “이 병원성 유전자 중 일부가 치명적인 패혈증을 일으키는 것으로 의심된다”고 말했다.
최 교수는 “전남 지방 어민들이 비브리오 패혈증으로 인한 금전적 피해를 많이 보고 있어 이 연구를 시작했다”며 “이 병은 한국과 대만, 스페인에서 많이 발생하고 최근 미국에서도 발병하고 있어 이 지역 연구자들이 백신 개발에 대거 나설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비브리오 패혈증은 비브리오균에 오염된 어패류를 날로 먹었을 경우 발생하는 병으로 피부가 썩어 들어가고 체내 모든 장기가 기능 부전증에 빠져 감염자의 50~80%가 사망하는 치명적인 병이다. 국내에선 79년 처음 발생했으며, 올해엔 전국에서 60명이 감염돼 33명이 사망했고, 작년엔 41명이 감염돼 24명이 사망했다.
1999년 LG화학 퀴놀렌계 항생제 `팩티브(factive)` 신약 발표회
1998년 이소정양, 미국 브로드웨이 뮤지컬 `미스 사이공`에 첫 한국인 주역
뮤지컬 본고장 미국 뉴욕 브로드웨이에 사상 첫 한국인 주역이 탄생했다. 1998년 12월 16일 브로드웨이 극장. 뮤지컬 `미스 사이공`에서 한국인 이소정씨가 주인공 킴으로 등장해 열연, 많은 기립박수와 호평을 받았다. 한국을 떠난 지 꼭 7년만에 이룬 쾌거였다.
이소정은 1991년 뮤지컬 스타의 꿈을 안고 단돈 1천2백달라를 들고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넉넉하지 않은 집안 형편에 식당 막일을 해가며 힘든 유학생활의 홀로서기를 시작했다. 하와이 브리검 영 대학 재학중 `미스 사이공` 미국 순회공연팀 오디션에 참가, 수천명의 지원자들과 겨룬 끝에 최종합격했다.
`미스 사이공`은 베트남전을 배경으로 참전 미군과 사랑에 빠진 베트남 여인 킴의 비련을 다룬 작품이다. 이소정은 1995년 3월부터 1997년 10월까지 순회 공연에서 주인공 킴을 맡아 미국 전역을 누비며 공연했다.
1997년 환율변동제한폭 철폐
1997년 위안부 참상 첫 증언한 김학순 할머니 별세
16일 별세한 일본군 위안부 출신 김학순(73) 할머니는 1940년 만16세의 나이로 일본군에 끌려가 낮에는 탄약을 나르고 밤에는 위안부 노릇을 했다.
5개월 만에 간신히 수용소를 탈출한 김 할머니는 1946년 서울로 돌아왔으나 6·25 전쟁 등으로 남편과 자녀를 잃었다.
그 후 행상과 날품팔이로 간신히 살아오던 할머니는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의 도움으로 1991년 제네바에서 일본군 위안부의 참상에 대해 첫 증언을 했다.
김 할머니는 1992년 정신대 관련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일본 법정에 제기했으며, 매주 수요일 일본 대사관 앞에서 열리는 ‘수요 집회’에 빠짐없이 참가했다.
1994년 일본에서 하타 쓰토무 총리와의 면담을 통해 위안부 문제 해결을 촉구하기도 했다.
김 할머니는 숨을 거두기 전 “일본 정부의 공식사과를 꼭 받아내라”는 말을 남겼다고 교우들은 전했다.
1996년 서울고법 형사1부, 12.12 및 5.18사건 항소심에서 전두환 전대통령에게 무기징역, 노태우 전대통령에게 징역 17년을 각각 선고
1995년 축구 응원단 ‘붉은 악마(Red Devils)’ 탄생
1995년 12월 16일 오후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 응원단 `붉은 악마(Red Devils)`의 `전설`이 시작됐다. 서울 대학로의 한 카페 `칸타타`에서였다. PC통신 하이텔의 10여개 `축구동호회` 운영자 10여명은 이날 축구 응원문화의 개선을 위한 회의를 갖고 이른바 `칸타타 선언`을 채택했다.
선언 참가자들은 30∼40대 직장인과 교사 등이 주축이었다. 이들은 평균 관중 1만명을 넘기지 못하고 비인기 스포츠로 전락한 프로축구의 `복권(復權)`을 꿈꾸며 모인 동호인 집단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이후 국가대표팀 경기마다 300∼400명 단위로 한국팀 유니폼을 입고 자신들을 `서포터`라고 부르는 `단관`(단체관람:붉은 악마들끼리 사용하는 말임) 모임이 등장했다.
1996년 여름 한국―중국 국가대표팀의 축구경기가 열린 서울 잠실종합운동장. 3만여명의 관중들 틈새에서 300여명이 될까말까한 일단의 `무리`가 붉은 색 국가대표팀 유니폼을 입고 섬처럼 떠있었다. 당시엔 `붉은 악마`란 이름도, `대∼한민국`이라는 구호도 없었다. 수만명 관중들 틈에서 이들의 존재를 알아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목놓아 `아리랑`과 `애국가`를 불렀다. 이날이 PC통신에서 한국팀 응원단을 모은다는 공고를 보고 `붉은 악마`가 처음 국가대표팀 경기에 나간 날이었다.
`붉은 악마`라는 이름은 조직 탄생 1년 반만에 지어졌다. 처음 이름은 `그레이트 한국 서포터스`였다. 그러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을 한 해 앞둔 1997년 5월 1일 하이텔 축구동호회를 통해 `공식적으로 한국 대표팀을 만들겠다`는 공지와 함께 명칭을 공모했다. `레드 일레븐` `레드 맥스` `꽹과리 부대` `쿨리건` `레드 워리어즈` 등 아이디어가 나왔다. 이름에 `레드`가 들어가는 것이 가장 큰 공통점이었고, 그 중 1983년 멕시코청소년축구대회 이후 우리 대표팀의 별명으로 사용되곤 했던 `붉은 악마`에 대한 호응이 가장 컸다.
1994년 국회, WTO가입 비준동의안 통과
세계무역기구(WTO) 가입 비준동의안이 1994년 12월 16일 출석의원 2백11명 중 찬성 1백52, 반대 58, 기권 1로 국회에서 표결 통과됐다. 비준동의안은 전날 국회 외무통일위 표결에서 전체 의원 21명 중 찬성 18명에 반대 3명의 표결로 상임위를 통과해 이날 국회 본회의에 상정됐다.
비준동의안과 함께 국회 본회의에 상정된 WTO 이행 특별법도 표괄 통과됐으나 이 법 가운데 `국내법 우선원칙`은 위헌이라는 이유로 법사위 심의단계에서 삭제돼 반영돼지 못했다. 세계무역기구는 1995년 1월 1일 출범해 제1회 창립총회가 그해 1월 31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렸다.
1993년 록히드사건의 중심인물인 다나카 가쿠에이 사망
1990년 해방신학자 아리스티드, 아이티 대통령에 당선
1990년 12월 16일 실시된 아이티 대통령선거에서 장 베르트랑 아리스티드(37)가 당선됐다. 그는 오랫동안 지속돼 온 독재의 청산과 부의 재분배를 공약으로 내건 로마 가톨릭 신부로 해방 신학자이다. 그의 대통령 당선은 1인당 국민소득 3백60달러 수준인 서반구 최빈국인 아이티의 대다수 국민들에게 ‘빈곤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일말의 희망을 던져주었다.
1953년 7월 15일 아이티 남부 해안도시 포르살뤼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아리스티드는 아이티를 비롯, 도미니카 이스라엘 이집트 영국 캐나다 그리스 등 7개국에서 신학과 심리학을 공부, 6개 국어를 구사하고 8개 국어를 해독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
그는 어린 나이에 자국의 구조적 빈곤에 눈을 떠 빈곤 추방을 자신의 사명으로 확신하게 됐고, 지난 1982년 로마 가톨릭교회로부터 신부 서품을 받은 뒤부터는 이 나라의 빈민가를 돌아다니며 빈민들에게 복음을 전해주면서 이들과의 교감을 가져왔다.
아리스티드는 1980년대 중반 독재자 장 클로드 뒤발리에에 대항하는 설교를 해 반뒤발리에 운동의 기수로서 또 민주운동의 지도자로서 아이티 국민들에게 알려지게 됐다. 그의 반독재운동은 지난 1986년 뒤발리에가의 29년에 걸친 독재를 종식시켰다.
1988년 강영훈 제21대 국무총리 취임
1987년 제13대 대통령선거 실시, 노태우 후보 당선
여야합의개헌결과 제13대 대통령선거가 1987년 12월 16일 실시됐다. 민정당의 노태우, 민주당의 김영삼, 평민당의 김대중, 공화당의 김종필 후보 등 이른바 `1노3김`간의 대결끝에 민정당의 노태우 후보가 총유효투표의 36.6%에 해당하는 8백28만여표를 획득, 차점자인 민주당 김영삼 후보를 약 1백90여만표차이로 누르고 당선이 확정됐다.
이번 선거는 야당이 60%를 넘는 득표를 하고서도 후보 단일화에 실패함으로써 패배를 자초했다. 이날 당선된 노태우 민정당 후보는 1988년 2월 25일 국회의사당 광장에서 취임식을 갖고 취임선서를 함으로써 제6공화국을 출범시켰다.
1984년 여수 돌산 연육교 개통
1984년 프랑스, 북한통상대표부의 일반대표부 격상 시인
1982년 정부, 복역중인 김대중의 서울대학병원 이송과 도미 허용 발표
정부는 1982년 12월 16일 국가보안법 및 계엄법 등의 위반으로 형이 확정돼 복역중이던 김대중씨를 병원으로 이송 치료받도록 허용하고, 본인이 원한다면 도미치료도 허용하겠다고 발표했다.
김씨는 정부의 형집행정치결정에 따라 23일 가족과 함께 신병치료를 위해 미국으로 떠났고 이어 24일에는 내란음모사건 관련자, 광주사태 관련자 등 제5공화국 출범 이전의 사건관련자를 형집행정지로 석방했다.
1981년 폴란드 교회, 계엄당국의 군사탄압 반대 선언
1980년 유엔,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 독립창설 촉구하는 결의안 채택
1978년 카터 미국 대통령, 중국과 수교하고 대만과 단교한다고 발표
1977년 국회, 12해리 영해법안 통과
1975년 부주석 강생(康生) 사망
1975년 중국, 제5호 인공위성 발사
1969년 영국 하원, 사형폐지법안 통과
1965년 영국의 소설가 윌리엄 서머셋 몸 사망
1965년 국내 최초로 텔렉스 개통(400회선)
1963년 최고회의 해체
1960년 미국 민간여객기 뉴욕 상공서 충돌. 134명 사망
1959년 한국여성단체협의회 발족
1958년 콜롬비아의 보고타시 대화재 93명 사망
1957년 김병로 초대 대법원장 정년 퇴임
1950년 ‘국민방위군 설치법’ 발효
중공군이 참전하고 전황이 악화되어가자 1950년 12월 16일 ‘국민방위군 설치법’이 국회에서 통과돼, 이날 공포ㆍ발효됐다. 만17세에서 40세 미만의 장정 50여만명이 제2국민병으로 소집됐다. 전국 각지의 51개 교육연대에 분산ㆍ수용됐으나 민간조직인 대한청년단 간부들이 지도부를 맡는 바람에 조직관리가 허술했다.
이들이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된 것은 1·4후퇴 때였다. 군복은 커녕 변변한 옷하나 없이 굶주린 채 도보로 후퇴하다보니 아사자·동사자가 속출했고 더구나 그 시체들이 길거리에 방치되는 바람에 민심도 흉흉해졌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국회가 진상조사에 나섰다. 조사가 진행될수록 고구마 줄기처럼 감춰진 비리들이 드러났다. 군수뇌부가 쌀, 피복 등 군수품을 횡령하는 바람에 2만여명(생존 방위군 주장)이 전선에서 추위와 굶주림으로 죽어간 것으로 파악되자 이시영 부통령이 개탄속에 사임하고 사건을 축소은폐한 신성모 국방장관이 경질됐다. 김윤근 방위사령관을 포함한 5명의 간부는 24억환어치의 금품을 착복하고 5만2000섬의 양곡을 부정 처분한 혐의로 총살형에 처해졌다. 국민방위군은 이듬해 5월 12일 해체됐지만, 이 사건은 우리 군 부패의 최대 치부로 기록됐다.
1950년 트루먼, 국가비상사태 선언
트루먼 미국 대통령이 1950년 12월 16일 미국 전역에 국가비상사태를 선언하고, 모든 국민들에게 공산제국주의와 맞설 것을 촉구했다.
트루먼은 권리장전으로 보장된 만족스럽고 부유한 생활이 공산주의의 침략으로 위협받고 있다고 경고했다. 트루먼은 방위를 위한 무기생산에 주력할 것이며, 자유를 위해 유럽을 방위하겠다고 약속했다. 미국 정부는 크라이슬러, 포드, GM사들의 가격인상 조치를 취소시켰다. 물가인하정책을 반대해 왔던 자동차 회사들도 정부에 지지를 약속했다. 노동조합 역시 트루먼을 도와 철도파업 노동자들을 직장에 복귀시켰다.
이같은 트루먼의 결정은 북한에서의 맥아더 군대의 패배에 따른 후속조치였다. 6주 전 한국전역이 UN군 통치하에 있어서 승리가 눈앞에 있었지만 중국군의 개입으로 UN군은 평양을 빼앗겼고, 중국군은 전력을 다해 그들을 38도선 이남으로 밀어부쳤다
1949년 페루, 한국정부 승인
1947년 북한, 화폐개혁 실시
1946년 맥아더원수, 극동군사령관에 임명
1945년 미군정장관 러치 소장 임명
1945년 모스크바 삼상회의 시작(~25일)
1941년 세계최대 일본 전함 `대화(大和)` 진수
1920년 국제연맹총회, 상설 국제사법재판소규약 채택
1920년 중국 칸수 대지진으로 18만명 사망
1912년 발칸전쟁에 관한 1차 런던강화회의 개막(~1913.5.3)
1902년 독립운동가 유관순 출생
3·1만세운동의 상징적 인물인 유관순 열사가 1902년 12월 16일 충남 천안에서 출생했다.
이화학당 재학 중 만세운동을 벌이다가 일제가 학교 문을 닫자 고향인 충남 천안으로 내려가 아우내 장터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유열사는 아우내 장터에 모인 군중에게 태극기를 나눠주며 앞장서서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고, 그녀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일본 헌병에게 살해되었다. 일제의 가혹한 고문을 받았으나 끝내 굴복하지 않고, 옥중에서도 만세를 부르며 동지들을 격려하다가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사했다. 그때가 1920년 10월 12일, 그녀의 나이 19세였다.
옥중에서도 굳건한 독립의지를 꺽지 않았기에 지금까지 여성독립운동가로 추앙되고 있다.
1901년 미국의 인류학자 마가렛 미드 출생
1888년 유고슬라비아의 왕 알렉산다르 1세 출생
1882년 헝가리 민속음악의 권위자인 대표적작곡가 졸탄 코다이 출생
1869년 미학.사변철학.문학비평 분야에 중요한 공헌을 한 미국의 철학자 조지 산타야나 출생
1866년 프랑스 화가 위슬리 칸딘스키 출생
1863년 미국의 고딕 복고양식의 건축가 랄프 아담 크램 출생
1859년 독일의 형제작가 빌헬름 그림 사망
1857년 천체사진술의 선구자인 미국의 천문학자 에드워드 에머슨 바너드 출생
1850년 알렉신이라는 살균제를 발견한 독일의 세균학자 한스 부흐너 출생
1790년 벨기에 첫번째 왕 레오폴 1세 출생
1773년 보스턴 차(茶)사건 발발
1773년 12월 16일 밤, 인디언으로 가장한 150여명의 괴한들이 보스턴 항구에 정박 중인 영국 동인도회사 소속 무역선 3척을 급습, 배에 실려있는 324상자의 인도산(産) 차(茶)를 바닷속에 내던졌다. ‘보스턴 차(茶)사건’으로 불리는 이 사건은 현미경으로 보면 영국의 차(茶)조례에 반발한 아메리카 식민지인들의 소행에 불과하지만 ‘역사’라는 망원경으로 보면 미국 독립전쟁을 향한 예정된 수순이었다.
그런대로 순탄했던 영국과 아메리카 식민지 관계에 금이 가기 시작한 것은 7년전쟁으로 고갈된 재정을 메우기 위해 영국이 식민지에 관세를 강화하고, 그동안 묵인해주던 밀무역을 단속하면서부터였다. 식민지인들은 “대의(代議)없이 과세없다”며 반발했지만 영국은 고삐를 더욱 조여나갔다. 이런 상황에서 차조례가 또 제정됐다. 파산지경에 이른 동인도회사에 낮은 관세의 차수입 독점권을 주어 회생시킬 목적이었지만, 식민지인들 입장에서는 울고싶은 사람에게 뺨을 때리는 격이 됐다. 차(茶) 사건이 일어나자 영국은 보스턴항을 봉쇄하고 매사추세츠주의 자치선거를 금지하는 등 강경책을 썼지만 되레 반발만 키웠다.
1770년 독일 작곡가 루드비히 베토벤 태어남 ‘운명’ ‘합창’ ‘영웅’
1717년 영국 시인 엘리자베스 카터 출생
1707년 일본, 후지산(寶永) 대분화
1689년 영국 권리장전(‘신하와 백성들의 권리와 자유를 선언하고 왕위계승을 정하는 법’) 공포
권리장전은 영국의 헌법으로 나라를 다스리기 시작한 역사상 중요한 뜻이 담긴 의회제정법. 권리청원=청교도혁명과 관련된 인권선언/권리장전=명예혁명의 결과 이뤄진 인권선언
주요 내용 ; 제임스 2세의 불법행위를 12개조로 들고 의회동의 없이 왕권에 의해 이뤄진 법률이나 집행 및 과세를 위법이라 규정. 의회동의 없는 평화시 상비군징집 및 유지 금지, 국민의 자유로운 청원권 보장, 의원선거의 자유 보장, 의회에서의 언론 자유 보장 등
1631년 이탈리아 베수비오 화산 폭발로 4천명 사망
1598(조선 선조 31) 이순신 장군(1545-1598) 노량해전에서 세상 떠남(음력 11월 19일)
1568년 이황, `성학십도`를 지음
1515년 포르투갈령 인도 총독 아폰수 데 알부케르케 사망
1504(조선 연산 10) 이두 사용금지
1485년 잉글랜드 왕 헨리 8세의 첫번째 왕비 아라곤 캐서린 출생
705년 중국 유일의 여황제 측천무후 사망
중국 역사상 유일하게 여자 황제에 오른 당나라 고종의 비
측천무후가 705년 12월 16일 사망했다. 80세였다. 본명은 무조로 산동성 문주현 출신이었다. 당나라 고종의 비로 들어와 황후의 자리에까지 올랐으며 40년 이상 중국을 실제적으로 통치했다.
무후는 638년 13세에 당 태종의 후궁으로 궁중에 입궐했다. 이때는 당조가 태종의 노력으로 중국을 막 재통일한 시기였다. 태종은 당나라 2대 왕으로 형과 동생을 살해하고 왕위에 오른 이세민이다. 태종이 병사하자 관습대로 비구니가 되었으나 태종 생존시부터 깊은 관계를 맺어 왔던 고종에 의해 다시 궁궐로 들어와 소의 자리에 올랐고 32세인 655년에는 황후로 책봉됐다.
고종 사후에도 후임 황제를 자주 바꿀 정도로 절대권력을 행사했다. 소정방을 통해 백제를 멸망시킨 것도 측천무후였다. 마침내 690년 혁명을 단행하여 65세 나이로 스스로 황제 자리에 올라 국호를 주(周)로 변경하고 천수라는 연호를 썼다. 적인걸(狄仁傑)·위원충(魏元忠) 등 명신을 등용하기도 하였지만 악랄한 책략과 가혹한 탄압 정치를 하였고, 요승 회의(懷義) 및 장역지(張易之) 형제 등과 추문을 남기는 등 많은 비난을 받았다. 16년간 여제(女帝)로 군림하다 705년 정변으로 중종이 복위되고 당나라가 재흥된 얼마 뒤 병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