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곡 혜림(香谷 蕙林1912~1978)선사
향곡스님은 1912년 경북 영일군 신광면 토성리에서 출생. 1927년 경남 양산 천성산 내원사에 입산 성월스님을 은사로 득도. 법명은 혜림(蕙林). 1944년 8월 운봉스님으로부터 깨침을 인가받고 전법게를 받았다.
1947년 성철스님과 함께 봉암사 결사 참여 경남 기장군 월내(月內)에 있는 묘관음사에 주석하며 후학들을 제접 양성. 1978년 음력 12월 18일 입적. 세수 67세 법랍 50세.
스님께서는 임자년 정월 18일에 경상북도 영일군 신광면 토성리의 불심이 매우 깊은 가정에서 탄생하셨으니 아버지는 김원묵이요 어머니는 김적정행이시다.
어린 시절부터 부모를 따라 절에 가기를 좋아하셨다.
16세에 이미 승려가 된 둘째 형의 옷을 전하기 위해 천성산 내원사로 찾아갔다가, 산천경개의 빼어남이 완전히 전생에 머물렀던 곳과 같음을 느끼고 환희하여 집으로 돌아갈 생각을 잊어버렸다.
그리하여 머리를 깎고 출가하여 조성월 선사를 은사로 득도하였으며, 법명을 혜림이라 하였다.
그 뒤에 전국의 여러 선원을 다니며 도를 묻고 참선을 하다가, 23세에 범어사 원효암에서 운봉 대화상을 친견하고 서로의 뜻이 통함을 기이한 인연으로 여겨 십 년을 하루같이 스님을 시봉하였다.
하루는 운봉스님께서 말씀하셨다.
"목침을 목침이라 하지 말고 일러 보라."
스님이 바로 일어나 목침을 발로 차 버리자, 운봉화상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그것은 그만두고 다시 일러라."
"천 마디 만마디의 말이 모두 꿈 속에서 꿈을 설함입니다."
이에 운봉화상께서 '법자향곡자(法子香谷)에 부촉하노라.' 하고 전법게를 내려주셨다.
付香谷蕙林丈室 부향곡혜림장실
西來無文印 서래무문인
無傳亦無受 무전역무수
若離無傳受 약리무전수
烏兎不同行 오토부동행
서쪽에서 전래된 무늬 없는 인장은
전할 것도 받을 것도 없는 것일세
전하느니 받는 이를 모두 떠나면
해와 달은 함께 동행하지 않으리라
이후 법력을 더욱 기르기 위해 자성을 보임하시며 적정 속에 머무셨다.
36세에 문경 봉암사에서 특별선원 공주규약을 마련하고 도반인 성철화상, 청담화상, 보문화상, 자운화상 등과 용맹정진하였는데 하루는 성철 도반이 물었다.
"죽은 사람을 완전히 죽여야 바야흐로 산 사람을 볼 것이요, 죽은 사람을 완전히 살려야 바야흐로 죽은 사람을 볼 것이라는 말씀이 있는데, 그 뜻이 무엇인지 알겠는가?"
이 말 끝에 문득 무심삼매에 들어가니, 삼칠일 동안 마음이 마치 담벽과 마주한 듯하여 잠자고 먹는 것까지 모두 잊고 정진하였다.
하루는 문 앞을 지나다가 홀연히 당신의 양손을 발견하고 확철대오하여 게송을 읊으셨다.
忽見兩手全體活 홀견양수전체활
三世諸佛眼中花 삼세제불안중화
千經萬論是何物 천경만론시하물
從此佛祖總喪身 종차불조총상신
鳳岩一笑千古喜 봉암일소천고희
曦陽數曲萬劫閑 희양수곡만겁한
來年更有一輪月 내년갱유일륜월
金風吹處鶴淚新 금풍취처학려신
홀연히 두 손을 보니 전체가 살아났네
삼세의 불조(佛祖)들은 눈 속의 꽃이요
천경만론이 무슨 물건이었던고
이로부터 불조들이 모두 몸을 잃었도다
확철대오한 스님은 인연 속에서 자재롭고 당당하게 노닐었으며, 천하 총림에서 사자후를 하시고 진리 속에서 자유자재하시었다.
6.25 전쟁이 일어난 직후인 40세에 부산 선암사의 조실로 추대되어 수많은 납자들을 지도하셨고, 그때 다음과 같이 개당설법을 하셨다.
봉암사의 한번 웃음 천고의 기쁨이
희양산 굽이굽이 만겁토록 한가롭네
내년에도 또 있겠지 둥글고도 밝은 달
금풍이 부는 곳에 학의 울음 새롭구나
44세에는 '종단정화' 후 제1세 불국사 주지를 맡아 신라불교 최초의 법흥지인 천경림에 흥륜사를 창건하셨다.
48세에는 월내 묘관음사로 돌아와 길상선원을 창건하고 무차대회를 개설하여 전국의 수좌들을 맞이하시니, 그 가봉이 험준하여 죽이고 살리고 주고 빼앗고 거두고 놓음을 자유자재로 하셨다.
이후 중앙선학원 이사장과 조실로 추대되어 종문의 일을 크게 일으켰으며, 팔공산 동화사에도 초대되어 금당선원 조실로 계시면서 납자들을 지도하셨다.
말년에는 다시 묘관음사로 복귀하여 선사이신 혜월 운봉 노화상의 영각을 신축하고 영정을 봉안하였으며, 선산 도리사에 운봉탑비를 세우는 등 길이 후세의 본보기가 될 일을 하셨다.
67세 때인 무오년 겨울, 용맹정진을 지도하신 다음 며칠 동안 가벼운 병을 보이시더니, 섣달 8일에 문도제자들을 불러 놓고 말씀하셨다.
"생사의 일은 크고 몸음 마치 물거품과 같은데, 너희들의 공부는 어떠한고? 나는 지금 떠나려 하노라."
그리고 게송으로 이르시되,
木人嶺上吹玉笛 목인영상취옥저
石女溪邊示作舞 석녀계변시작무
威音那畔進一步 위음나반진일보
歷劫不昧常受用 역겁불매상수용
목인은 고개 위에서 옥피리를 불고
석녀는 시냇가에서 춤을 추도다
위음왕불 이전으로 한 걸음 나아가니
영원히 밝고 밝아 언제나 수용하리
"알겠는가? 만약 이와 같지 않은 출가라면 각자 노력할지니라."
말씀을 마치고 입적하시니 세수는 67세이시고, 법랍은 50이시다.
제자 혜운, 진제 등이 전국 선원장으로 다비를 행하니 영골사리가 찬연하였다.
이를 수습하여 묘관음사 동쪽 기슭에 탑비를 건립하고 선사의 법등을 추모하였다.
1978년 무오년 12월 22일 후생 일타가 쓰옵니다.
[봉암사에서 한번 웃다]
#향곡선사 #일타선사 #기장묘관음사 #봉암사 #
![](https://t1.daumcdn.net/cfile/cafe/2118824A55CC939633)
![](https://t1.daumcdn.net/cfile/cafe/2140664855CC939820)
![](https://t1.daumcdn.net/cfile/cafe/24375A4E55CC939A09)
![](https://t1.daumcdn.net/cfile/cafe/2372824F55CC939C22)
![](https://t1.daumcdn.net/cfile/cafe/26545B4855CC939E0D)
첫댓글 감사합니다 ()
나모 땃서 바가와또 아라하또 삼마 삼붇닷서! 존귀하신분, 공양받아 마땅하신분, 바르게 깨달으신 그분께 귀의합니다.
덕분입니다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_()()()_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