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ph Stalin(요시프 스탈린)
"My father died a difficult and terrible death. God grants an easy death only to the just. At what seemed the very last moment he suddenly opened his eyes and cast a glance over everyone in the room. It was a terrible glance, insane or perhaps angry. His left hand was raised, as though he were pointing to something above and bringing down a curse on us all. The gesture was full of menace. The next moment he was dead."
"나의 아버지는 어렵고도 끔찍한 죽음을 당했습니다. 하나님은 정당한 사람들에게만 편안한 죽음을 주십니다. 최후의 순간처럼 보일 때 아버지는 갑자기 눈을 뜨고 방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시선을 던졌습니다. 그것은 제 정신이 아닌 아니면 분노로 가득 찬 끔찍한 시선이었습니다. 아버지의 왼손이 들렸습니다, 마치 허공에 있는 무엇인가를 가르키거나 우리 모두에게 저주를 내리는 같았습니다. 아버지의 손짓은 위협으로 가득했습니다. 다음 순간 아버지는 별세했습니다.“
이번에는 스탈린의 얘기입니다. 그가 마지막 남긴 말은 없고 그의 딸인 스베틀라나가 뉴스위크와 인터뷰한 위의 언급으로 대신합니다.
스탈린은 인류 역사상 인간 살육을 가장 많이 한 인간으로 역사에 기록 되어야 하는 인물입니다. 그는 미치광이 히틀러보다 인간 백정 집단인 징기스칸 군대보다도 훨씬 더 많은 인간을 처형하여 죽이고 굶겨죽이고 전장에서 죽였습니다. 최소 3천만 최대 8천만을 살해한 인물인데 히틀러의 등 뒤에 숨어서 살인광으로서의 그의 면모는 잘 알려지지 않고 있습니다. 2차 대전 때는 약 170,000이나 되는 고려인을 연해주에서 중앙 아시아로 강제 이주 시켰고 2차 대전 후에는 김일성의 후견인이 되어 수 백대의 전차와 전투기 등을 주어 625 남침을 획책한 인물입니다. 이 전쟁에서 희생된 사람들 수 백 만에 이릅니다.
스탈린(1878-1953)은 1920년대 중반부터 1953년 까지 소비에트 연합의 독재자였습니다.
그는 1917년 볼세비키 혁명에 가담하였고 1922년에는 당 중앙 위원회의 총서기가 됩니다.
1924년 레닌이 죽자(스탈린이 독살했다는 설도 유력합니다) 그는 자기의 권력기반을 넓히기 시작합니다. 그는 레닌이 채택한 ‘신 경제 정책’을 폐기하고 ‘중앙 통제경제’로 대신합니다. 신속한 산업화와 집단화를 실시하면서 농경사회의 러시아를 산업사회로 변모시킵니다.
그러나 급속한 산업화를 하면서 수많은 사람을 ‘집단 교화 수용소’에 수용합니다. 많은 사람을 먼 곳으로 강제 이주시키는 잔인함을 보였습니다. 이 때 이주된 소수 민족은 고려인,
독일인, 그리스인, 크림 타타르인, 체첸인 등으로 많은 희생을 치렀습니다.
1932-1933 년간 대 기근으로 민심이 악화되자 1936부터 1939년간 ‘대 숙청’을 일으켜 수십만 명을 죽입니다. 그의 정적인 트로츠키도 멕시코에 자객을 보내어 도끼로 찍어 죽입니다. 1941년 나치 독일이 러시아로 침공하자 스탈린그라드와 레닌그라드를 사수하고 나서 공세를 취하여 1945년 5월 베르린을 점령함으로서 동부전선에서의 전쟁을 끝내었습니다.
이 때 수많은 독일, 폴란드 등의 여성들이 소련군에게 강간당했습니다.
2차 대전이 끝나면서 소련은 미국과 대치하는 공산진영의 대표국가로 미국과 벌였던 각종 경쟁 다툼을 ‘냉전’이라 했습니다. 소련은 미국 다음으로 핵무기를 보유했고 전쟁으로 피폐해진 나라를 복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개인 재산을 인정하지 않는 전체주의 국가에서 각종산업은 향상하지 못하고 오히려 퇴보합니다. 소련도 예외가 아니어서 농토에 곡식은 익어가는데 그것을 운반할 차량이 없어서 그대로 썩어 도회지에 공급 하지 못하고 생산의 목표를 채우기 위해서는 신발의 한 짝만 만들어 출하하는 기맥힌 일들이 벌어졌습니다.
스탈린은 오늘의 그루지아(현재는 독립국)의 고리라는 읍에서 1878에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구두 수선공이었고 알콜 중독자였습니다. 그는 태어나면서 발가락 두 개가 붙었고 얼굴은 천연두를 앓아 얽었습니다. 그가 16살 때 그루지아 신학교 장학생이 되었습니다.
학업 성적이 좋았는데 마지막 시험을 치지 않아 퇴학당합니다. 그 학교 기록은 그는 학자금을 내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이 무렵 그는 레닌의 책을 읽고 사회 민주 노동자당에 입당합니다. 레닌이 볼세비키를 결성하자 그는 이에 합류하여 암살, 파업을 선동하는 등 행동은 물론 지적 능력도 대단한 인물로 출세의 가도를 달립니다. 그는 유명한 시인이기도 했습니다. 스탈린이 시인이라는 것이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하면 살인마 시인도 더러 있는 것 같습니다. 로마 황제 네로 며 연산군도 시를 잘 지었다고 했습니다. 시적인 감성이 살인의 냉혈함과 일맥 상통하는 모양입니다. 그는 몇 번 체포되어 시베리아 유형을 갔으나 매 번 탈출했습니다. 그의 재능으로 하여 그는 레닌의 인정을 받습니다. 마지막 유형을 마치고 돌아와 그는 공산당 기관지 ‘프라우다’의 편집장을 맡습니다.
백군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레닌이 죽은 후 공산당 총수가 된 그는 그와 레닌의 개인숭배를 국가 행사로 강요했습니다. 많은 공산국가에서 이를 흉내 내어 많은 희생을 치렀습니다.
그는 두 번 결혼했는데 첫 번째 결혼으로 난 아들 야코프가 독소 전쟁에 참전하여 독일군에게 포로가 되었는데 독일측에서 야코프와 독일군 원수로 포로가 된 장군과 교환하자고 제의 하였는데 스탈린은 한 마디로 일축했습니다. 야코프는 독일 군 포로 수용소에서 전류가 흐르는 휀스에 접촉하여 자살했다고 합니다. 스탈린은 두 번 째 부인에게서 아들인 바실리와 딸인 스베틀라나를 얻었습니다. 두 번 째 부인은 자살했는데 유서를 남겼다고 스베틀라나는 훗날 증언했습니다만 스탈린이 목 졸라 죽였다는 소문이 끊이지 않습니다.
바실리는 2차 대전 때 전투기 조종사로 활약하였는데 제대하고 알콜 중독으로 죽었습니다.
냉혹한 스탈린이 가정에서도 잔인하게 굴어 가정이 전멸했습니다.
그런데도 1948년에는 노벨 평화상 수상자 후보에 오르기도 했으니 세상일은 알 수가 없네요. 1953년 그가 죽자 그해 7월 한국 전쟁도 간신히 끝이 났습니다.
스탈린이 죽은 후 그의 심복 베리아(KGB 두목)는 후루시쵸프, 말렌코프등 6명의 상임위원
이 달려들어 방 문짝을 떼어내어 그것을 눌러 죽였답니다. 스탈린을 믿고 갖은 악행을 저지른 자의 말로가 비참합니다. 우리나라 장희빈도 사약이 듣지 않으나까 대문 짝을 떼어 눌러
죽였답니다. 동양이나 서양이나 못되게 군 사람들에게는 이렇게 문짝으로 눌러 죽이는 형벌
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다음은 그가 남기 말들입니다.
1) A single death is a tragedy; a million deaths is a statistic.
하나가 죽으면 비극이고 백만이 죽으면 통계이다.
2) Those who vote decide nothing. Those who count the vote decide everything.
투표하는 사람들은 어떤 결정도 못한다. 투표한 것을 세는 자들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
3) History has shown there are no invincible armies.
역사는 무적의 군대는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4) It is not heroes that make history, but history that makes heroes.”
역사를 만드는 것은 영웅이 아니고 영웅을 만드는 것이 역사이다.
첫댓글 고맙다.친구야.중샘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