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렴의 덕목 사불삼거(四不三拒)
KBS에서 한국의 유산이라는 프로를 진행한 적이 있다.
여기에는 우리 전통 관료사회에 청렴도를 가르는 기준으로 사불삼거(四不三拒)라는 불문율(不文律)이 소개된다.
4가지를 해서는 안 되고, 3가지는 거절해야 한다는 것이다.
청렴을 덕목으로 삼았던 관료들은 ‘사불삼거’를 불문율로 삼았다고 한다.
고위공직자가 재임 중에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할 네 가지와 꼭 거절하여야 할 세 가지를 압축한 말이다.
사불(四不)이라 함은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할 네 가지(四不)로
(1) 부업을 하지 않을 것.
(2) 땅을 사지 않을 것.
(3) 집을 늘리지 않을 것.
(4) 재임지의 명산물을 먹지 않을 것이다.
삼거(三拒)라 함은 꼭 거절해야 할 세 가지(三拒)를 이른다.
(1) 윗사람의 부당한 요구 거절.
(2) 청을 들어준 것에 대한 답례 거절.
(3) 경조사의 부조 거절이다.
여기에 얽힌 조선시대로 들어가 본다.
청송 부사 정붕은 영의정이 꿀과 잣을 보내달라고 부탁하자 ‘잣나무는 높은 산 위에 있고 꿀은 민가의 벌통 속에 있다’ 고 답을 보냈다고 한다.
우의정 김수항은 그의 아들이 죽었을 때 무명 한 필을 보낸 지방관을 벌주었다.
풍기군수 윤석보는 아내가 시집 올 때 가져온 비단옷을 팔아 채소밭 한 뙈기를 산 것을 알고는 사표를 내고 말았다.
대제학 김유는 지붕 처마 몇치도 못 늘리게 했다고 전한다.
이수광의 저서 조선의 방외지사를 보면 청빈 관료 김수팽의 얘기가 나온다.
조선 영조 때 호조 서리를 지낸 김수팽은 ‘전설의 아전(衙前)’이라 불렸는데 청렴하고 강직하여 숱한 일화를 남겼다.
호조판서가 바둑을 두느라고 공문서 결재를 미루자 김수팽이 대청에 올라가 판서의 바둑판을 확 쓸어 버렸다.
그러고는 마당에 내려와 무릎을 꿇고 죽을 죄를 졌으나 결재부터 해주시기 바랍니다. 했다.
그 서슬에 판서도 그의 죄를 묻지 못했다는 얘기가 전해온다.
요즘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부패의 모습들을 보면서 음미해보니 왠지 씁쓸해진다.
연산군 때 풍기 군수로 임명된 윤석보가 처자를 고향에 두고 혼자 부임하게 되자, 고향의 식구들은 궁색한 살림살이를 견디다 못해 집안의 물건을 팔아 밭 한 마지기를 샀다.
이 사실을 뒤늦게 안 윤 군수가 식구들에게 말했다.
옛말에 공직에 있으면서 자신을 위해 한 척의 땅이 라도 넓혀서는 안 된다는 말이 있는데, 이는 국녹 이외에 것을 탐내지 말라는 뜻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내가 관직에 올라 국녹을 받으면서 전에 없던 땅을 장만했다면, 세상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 하겠는가?
그리고는 즉시 밭을 되물리게 했다.
조현명 정승의 부인이 세상을 뜨자 부의금이 잔뜩 들어 왔다.
돈을 접수한 사람이 조정승에게 말했다.
이 기회에 땅을 사시면 어떻겠습니까?
내 큰아들과 상의해 보았소?
예, 큰 상주도 그랬으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조 정승이 즉시 큰아들을 불러 호통을 쳤다.
이 못난 것아!
부조금으로 들어온 재물로 땅을 사려고 하니, 부모의 상을 이익될 일로 알았느냐!
그리고는 매질을 한 후, 부의금으로 들어온 돈을 모두 가난한 친척과 친구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기건이란 분이 연안 부사로 있을 때였다.
연안에는 붕어가 유명해서 원하는 사람이 많은지라, 기건은 재임 6년 동안 붕어를 입에 대지도 않았고, 제주 목사로 3년 동안 있을 때에는 전복을 입에 대지도 않았다고 했다.
딱할 정도로 고지식한 분들의 이야기 같지만, 우리는 이 분들을 ‘바보’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오늘날 시류의 흐름을 잘 타는 몇몇의 사람들일 것이고, 그러나 그렇지 못한 많은 사람들은 오히려 세월을 이어가며 깊은 존경과 흠모를 보낼 뿐이다.
이는 ‘사불 삼거(四不三拒)’라는 어려운 불문율을 철저히 지켜 공직자로서의 모범을 보였기 때문이다.
지금의 우리 공직자들도 명심해 둘 내용이 아닐 수 없다.
당대에는 이런 내용들을 실천하느라 힘들겠지만, 이 아니 청사에 빛날 사람들이 아닌가.
그래서 후대에까지 변함 없는 존경과 흠모의 대상이 되어 후손들에게도 자랑거리가 되어 후손이란 긍지를 느끼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의 공직자들을 떠올려 보면 우리의 선조들이 어떻게 생각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