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전쟁사 다이제스트 100 십자군 원정십자군의 중기병과 사라센군 경기병의 격돌(1095년 ~ 1272년)
영원한 인간사랑 ・ 2024. 2. 25. 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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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전쟁사 다이제스트 100
십자군 원정
십자군의 중기병과 사라센군 경기병의 격돌(1095년 ~ 1272년)
요약 이슬람교도들이 크리스트교도들의 예루살렘 성지순례를 금지시키자, 교황은 성지탈환을 위한 십자군 파병을 제창했다. 십자군은 1차 원정에서 승리를 거두었지만, 이후 각국 전사들의 분열과 사라센군 경기병의 우수한 기동성을 활용한 기습공격 등에 당하면서 결국 십자군 원정에 실패하고 말았다.
봉건국가들, 성을 쌓고 의존하는 방어전술에 치중하다
십자군 원정군들의 모습
중세시대 봉건국가들은 대부분 튼튼한 성을 쌓고 그것에 의존하는 방어전술에 치중했다. 평지에서 대규모 전투를 벌이는 일이 드물고 석조성을 파괴하는 적절한 무기도 별로 없었기 때문에 최선의 전략은 성들을 많이, 그리고 견고하게 짓는 것이었다.
교회, 중세 전쟁의 성격과 십자군 원정 발발에 큰 영향을 끼치다
성곽 구축과 더불어 중세 전쟁에 큰 영향을 준 다른 요인은 교회였다. 교회는 같은 크리스트교인들에게 석궁처럼 위험한 무기의 사용을 자제하도록 하고 기사들이 신사도에 입각하여 싸우도록 함으로써 전쟁의 성격을 제한 전쟁화했다. 또한 교황의 허락을 얻어서 이른바 '정의의 전쟁'을 해야만 많은 사람들로부터 지지를 받았다.
그런데 교회가 가장 큰 영향을 주어 일어난 전쟁은 십자군 원정으로서, 유럽인들은 1096년부터 약 200년 동안 모두 10차례의 원정전쟁을 벌였다. 각각 일어난 연도는 1차 1096~99, 2차 1147~49, 3차 1189~92, 4차 1202~04, 5차 1217~21, 6차 1228~29, 7차 1248~54, 8차 1270, 9차 1271~72, 10차 1272~91년이었다.
이슬람교도들, 크리스트교도들의 예루살렘 성지순례를 금하다
유태교, 크리스트교, 이슬람교도들에게 공통의 성지가 있는 예루살렘은 이교도들 간에 성지순례를 하면서 충돌이 벌어지기 쉬운 곳이었다.
1071년 터키 군이 비잔틴 군대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뒤 맹렬한 이슬람교도들이었던 셀주크투르크인들은 크리스트교도들의 예루살렘 성지순례를 금지시켰다.
서유럽, 교황의 십자군 파병 호소에 적극적으로 응답하다
비잔틴 제국 황제 알렉시우스 1세는 교황 우르반 2세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교황은 자기를 지지하는 군대가 게르만 제국 군대와 격돌하고 있어서 지원을 하지 못하다가, 1095년 클레르몽 공의회를 개최하고 성지탈환을 위한 십자군 파병을 제창했다.
알렉시우스 1세
교황에게 성지탈환의 지원을 요청한 알렉시우스 1세.
"크리스트교 왕들은 서로 싸우지 말고 힘을 합쳐 적들에게 칼날을 돌립시다. 신성한 땅과 도시를 구합시다. 크리스트교 왕국의 치욕을 떨치고 일어나 이슬람교도 세력을 영원히 멸망시킵시다. 성전에서 '천벌'이라는 함성을 사용합시다. 성전에서 생명을 잃는 자는 천국을 얻고 죄를 용서받을 것입니다."
교황 우르반 2세
클레르몽 교회회의에서 십자군 원정을 호소하는 교황 우르바노 2세.
교황의 호소에 대한 응답은 굉장했다. 서유럽은 내란을 겪고 있는 독일 지역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국가가 원정군 편성에 가담했다.
농노 신분을 벗어나기 위해, 돈벌이를 위해 십자군에 참여하다
그렇게 큰 호응을 한 데는 종교 외에 다른 이유도 있었다. 서유럽은 100년 이상 인구가 급팽창했다. 한편 농업생산은 제자리걸음이었고, 특히 1094년 흉년 이후 기근현상은 심각해졌다. 농부들은 농노 신분을 벗어나기 위해 군인이 되고, 베네치아와 제노바 상인들은 비잔틴 제국의 붕괴나 십자군 원정을 돈벌이의 호기로 여겼다.
1차 십자군, 불굴의 정신으로 주요 도시를 함락시키다
마침내 1097년 봄 3만 명의 십자군 전사들은 보스포루스 해협(마르마라 해와 흑해 연결)을 건넜다. 이 1차원정은 성공적이었다. 전사들은 보급문제로 고생했지만, 불굴의 정신으로 소아시아를 가로질러 행군했다. 투르크 군대를 무찌르고 안티오크 · 예루살렘 · 자파 등 주요 도시를 잇달아 함락시켰다. 사실상 그들은 적이 분열되어 있었기 때문에 쉽게 승리했다. 사라센 인들은 각 세력이 서로 불신하고 단합을 이루지 못한 상태에 있었던 것이었다.
예루살렘 전투
임무 완수 후 점령 도시를 지키고 봉건체제를 도입하다
임무를 완수한 후 십자군은 이제 성지와 점령지를 방어해야 했다. 대부분의 원정군은 고국으로 돌아가고 일부는 남아서 점령 도시를 지키고 지배했다. 토착주민과 좋은 관계를 맺기 위해 애쓰고, 유럽에서처럼 성을 짓고 군사귀족에 의한 봉건체제를 도입했다.
십자군은 분열되고 이슬람 측은 조직적인 세력을 구축하다
십자군 원정은 2차 때부터는 실패로 돌아갔다. 1차 때와 같은 정열이 식고 각국 전사들의 이해관계가 엇갈리는 가운데 계속적으로 분열되었다. 한편 이슬람 측은 살라딘과 같은 강력한 지도자가 나타나 이집트와 시리아를 통일하고 조직적인 군사세력을 구축했으며 지하드, 즉 크리스트교와의 성전을 보다 철저히 준비했다.
살라딘
프랑스의 삽화가 귀스타브 도레가 그린 살라딘의 삽화.
십자군 기사들, 용병들로 보충되고 무장이 무거워지다
십자군의 중추인 기사들은 점차 점령지 인근 지역의 용병들로 보충되었다. 그들의 무장은 보다 복잡하고 무거워졌다. 쇠미늘 갑옷은 무릎까지 내려오고, 다리와 양손은 별도의 사슬 갑옷으로 보호하고 장방형의 방패를 휴대했다. 투구는 꼭대기가 편평한 철제 원통형으로 머리 전체를 덮고 안면 쪽에 내다보고 숨 쉴 수 있는 구멍만 열어놓았다. 말은 특별히 양육된 것으로 쇠미늘 갑옷으로 보호되었다. 주무기인 창은 보다 길어졌다. 이와 같이 중무장한 중기병은 집단보다는 개인적으로 공격했다. 보병은 보조역할을 했고, 보병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궁수와 석궁수였다.
사라센 군대, 우수한 기동성의 경기병으로 적을 괴롭히다
사라센 군대의 주력은 경기병으로서 십자군 기병보다 가볍게 무장하고, 말은 더 빠르고 몰기가 쉬웠다. 주무기로 활을 사용하고 그밖에 작고 둥근 방패와 짧은 창과 칼을 소지했다.
사라센군은 우수한 기동성을 활용하여 행군 중의 십자군에 대하여 끊임없이 기습공격을 펼쳤다. 십자군의 중기병과는 격돌을 기피하면서 퇴각하고, 또 다시 돌아와 적을 괴롭혔다. 십자군을 험한 지형으로 유인하거나 지치게 하기 위해서였다. 사라센의 활은 쇠미늘 갑옷을 뚫을 만큼 강력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가끔 적의 말들을 과녁으로 삼았다.
십자군, 오랜 경험으로 승리의 원리를 터득하다
십자군은 적에게 주도권을 빼앗긴 상태에서 방어에 치중했으나, 사라센과의 전쟁에서 오랫동안에 걸친 경험을 축적함으로써 보병과 기병이 공조할 경우 성공할 수 있다는 원리를 터득했다. 그리고 성에서 멀리 떨어진 야전의 위험을 피하는 것이 유리한 전략이었다.
십자군의 황금기가 지나고 200년에 걸친 원정 전쟁이 실패로 끝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187년 갈릴리의 하틴 싸움에서 기드 뤼지냥이 지휘한 십자군은 살라딘에게 결전을 시도하다가 참패하고 말았다.
기 드 뤼지냥
19세기에 그려진 상상도.
이후에도 십자군 원정은 계속되고, 어느 때는 예루살렘을 재탈환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미 십자군 원정의 황금기는 지나고, 원정의 목적을 망각한 채 콘스탄티노플에 군대를 끌고 가서 황제의 자리를 빼앗는 등 정상에서 벗어난 행태를 보이기도 했다. 약 200년에 걸친 원정전쟁은 결국 실패로 끝이 났다.
십자군 원정, 군사적 개혁으로 이어지지 못하다
십자군 원정은 경제 및 문화적으로는 유럽인들이 새로운 세계에 대해 눈을 뜨게 하는 데 기여했으나, 군사적으로는 임시방편적인 것 외에 어떤 획기적 개혁을 위한 시도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전장에서 기병의 위치가 크게 흔들렸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극복하려는 큰 노력은 보이지 않았다. 귀족과 기득권층은 말을 타고 싸움으로써 사회적으로 그들이 누리는 특권을 계속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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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지식백과] 십자군 원정 - 십자군의 중기병과 사라센군 경기병의 격돌(1095년 ~ 1272년) (세계전쟁사 다이제스트 100, 2010. 7. 16., 정토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