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댓글왜 없겠습니까, '위정척사'라는 대단한 집단이 있었는데. ㅋ 일제의 식민논리에 우리 지식인들이 그렇게 크고 조직화된 저항을 펼치지 못한 이유는, 바로 일제의 식민 근대화론과 구한말 지식인들이 열변했던 "문명개화" 둘 다 사회진화론에 뿌리를 두기 때문이죠. 개화에 대한 열망이 일제의 식민 근대화론과 같은 곳에서 가지를 치기 때문에 많은 지식인들이 큰 혼란, 그리고 훗날 흔히 말하는 '변절'을 겪었습니다. 이완용이 독립문 설립에 큰 기여를 했다는건 뭐 널리 알려진 스토리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당시 조선을 모르겠습니다만, 아랍 세계에서는 자주적인 근대화, 이슬람적인 개혁을 상당히 많은 지식인들이 주장하고, 또 큰 힘을 얻은걸로 알고 있는데 (hyhn님이 대답해 주실까요;;), 그런 움직임은 구한말 당시 한반도 내에서는 보이는것 같지 않습니다. 사회진화론, 식민논리, 그리고 개화론의 유사성과 결과론적인 영향력에 관해 Schmid 교수는 '근대화'가 당시 전 세계적인 공통된 움직임(collective progression of history)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에 그렇지 않았겠느냐는 설명을 했었는데, 그분이 주장하는게 한국 내에서도 주류의 시각이라고 볼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중앙아시아의 자디디 운동, 아프가니의 범이슬람주의, 인도의 알리가르 학파, 이란 입헌혁명, 오스만의 탄지마트, 이집트의 와프드 당 등 '이슬람과 서구화'를 조화시키려는 노력이 근대 중동 세계에서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양무운동과 다르게 이러한 주장은 서구 문명의 과학과 기술의 도입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슬람 자체의 변혁을 요구했습니다만, 20세기 초 중동을 휩쓴 이슬람 원리주의 운동-민족주의-제국주의 침략의 혼란 속에서 무너져 내렸죠. 이집트의 와프드 당이 20세기 초 정권을 잡는 데에는 성공했습니다만 결국 자신들의 주장의 실현에는 실패하고 나세르에게 길을 내주고 말았죠.
첫댓글 왜 없겠습니까, '위정척사'라는 대단한 집단이 있었는데. ㅋ 일제의 식민논리에 우리 지식인들이 그렇게 크고 조직화된 저항을 펼치지 못한 이유는, 바로 일제의 식민 근대화론과 구한말 지식인들이 열변했던 "문명개화" 둘 다 사회진화론에 뿌리를 두기 때문이죠. 개화에 대한 열망이 일제의 식민 근대화론과 같은 곳에서 가지를 치기 때문에 많은 지식인들이 큰 혼란, 그리고 훗날 흔히 말하는 '변절'을 겪었습니다. 이완용이 독립문 설립에 큰 기여를 했다는건 뭐 널리 알려진 스토리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당시 조선을 모르겠습니다만, 아랍 세계에서는 자주적인 근대화, 이슬람적인 개혁을 상당히 많은 지식인들이 주장하고, 또 큰 힘을 얻은걸로 알고 있는데 (hyhn님이 대답해 주실까요;;), 그런 움직임은 구한말 당시 한반도 내에서는 보이는것 같지 않습니다. 사회진화론, 식민논리, 그리고 개화론의 유사성과 결과론적인 영향력에 관해 Schmid 교수는 '근대화'가 당시 전 세계적인 공통된 움직임(collective progression of history)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에 그렇지 않았겠느냐는 설명을 했었는데, 그분이 주장하는게 한국 내에서도 주류의 시각이라고 볼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중앙아시아의 자디디 운동, 아프가니의 범이슬람주의, 인도의 알리가르 학파, 이란 입헌혁명, 오스만의 탄지마트, 이집트의 와프드 당 등 '이슬람과 서구화'를 조화시키려는 노력이 근대 중동 세계에서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양무운동과 다르게 이러한 주장은 서구 문명의 과학과 기술의 도입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슬람 자체의 변혁을 요구했습니다만, 20세기 초 중동을 휩쓴 이슬람 원리주의 운동-민족주의-제국주의 침략의 혼란 속에서 무너져 내렸죠. 이집트의 와프드 당이 20세기 초 정권을 잡는 데에는 성공했습니다만 결국 자신들의 주장의 실현에는 실패하고 나세르에게 길을 내주고 말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