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치아노(Tiziano Vecellio, 1488?∼1576), '우르비노의 비너스', 1538, 캔버스에 유채, 119 x 165 cm, 우피치 미술관, 피렌체
조지훈 시인 탄생 100주년
‘승무’로 유명한 조지훈(1920~1968)은 박목월 박두진과 함께 청록파로 불린 시인입니다. 그가 다른 두 명과 다른 점은 시인으로서만 활동한 게 아니라 한국의 문화와 멋을 탐구해 한국학의 기틀을 다진 학자이며 한학에 조예가 깊은 교수로 수많은 제자들을 길러낸 점입니다. 특히 두드러지는 것은 빛나는 명문 ‘지조론’(1960년)을 비롯한 각종 논설을 통해 시대의 병리를 질타하며 올곧게 바른길을 추구한 지사적 풍모입니다.
올해 탄생 100주년을 맞아 대산문화재단과 한국작가회의는 6월 18일 심포지엄을 시작으로 문학의 밤, 학술대회 등 ‘2020년 탄생 100주년 문학인 기념문학제’를 열었습니다. 금년 대상자는 조지훈과 곽하신 김상옥 김준성 김태길 김형석 안병욱 이동주 이범선 조연현 한하운 등 열한 분입니다.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는 처음 생존 문인으로 100년을 맞았습니다. 계간 ‘대산문화’ 여름호는 김상옥 이동주 조연현 조지훈의 유가족들이 생전의 아버지를 떠올리는 회고 글을 싣기도 했습니다.
산책 길의 조지훈 / 옷차림과 걸음걸이에서 멋이 우러난다.
이 중 조지훈의 경우 생전에 재직했던 고려대가 탄생일(12월 3일)을 앞두고 ‘지훈 주간’을 설정해 11월 9일부터 다양한 행사를 합니다. 먼저 9일에는 도서관에 조지훈의 기증 자료 등을 전시한 ‘조지훈 열람실’이 개설됩니다. 고려대박물관은 유족이 기증한 친필 원고 등 유품을 공개하는 특별전시회 '빛을 찾아가는 길, 나빌네라 지훈의 100년'을 엽니다. 육필 미발간 시집 '지훈시초'가 처음 공개되는 이 전시회는 내년 3월 20일까지 계속됩니다. 또 11일 ‘조지훈 탄생 100주년 기념강연・추모좌담회'와 12일 '학생들과 함께하는 조지훈 시 낭송 축제', 13일 학술대회 등도 개최됩니다. 아울러 세계시인 동상공원을 조성하고 있는 우크라이나의 키예프국립대에 조지훈 흉상이 세워질 예정입니다. 제막식은 내년으로 예정돼 있습니다.
다른 문인들에 비하면 탄생 100주년 행사가 훨씬 다양하고 풍성합니다. 고려대의 경우 문과대, 국문학과, 민족문화연구원, 박물관, 도서관, 의료원 등이 다 나섰습니다.
지훈은 1947년부터 타계할 때까지 고려대 국어국문학과에서 교편을 잡았습니다. 행사가 풍성한 것은 이 대학의 교풍 덕분이거나 제자들이 많아 그렇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지훈의 인품과 업적이 크기 때문일 것입니다.
조지훈 탄생 100주년 특별전 포스터
그가 남긴 일화를 읽어보면 어느 한 구석 구차스러운 게 없고 당당하며 의연합니다. 6・25 종군작가 시절, 술 마시는 문인들을 본 군인이 총을 휘두르며 심통을 부려 다들 겁먹고 숨죽인 상황에서 홀로 일어나 호통을 쳐 제압하고, “지옥불이 무섭지 않으냐?”며 목사가 담뱃불로 손등을 지지는데도 끄떡하지 않아 상대를 질리게 했다는 이야기가 그런 사례입니다. 한복을 즐겨 입던 지훈이 어느 겨울날 강의를 하면서 “솜바지를 입으니 조지가 훈훈하다”고 농담을 했다는 이야기도 재미있습니다.
6척 장신에 굵은 안경테 속에서 먼 곳을 보며 걷는 사진은 그의 고운 시, 깊은 학문과 매운 지조 등 고고한 지성을 읽게 해줍니다. 이미 노성한 대가와 같아 보였지만, 숨질 때의 나이는 겨우 48세였습니다. 세상을 떠나기 3개월 전 ‘병에게’라는 시를 발표했던 지훈은 “아직도 할 일이 많은데…”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그가 타계하자 같은 문과대의 영문과 교수였던 김종길 시인은 “나라도 경영할 수 있는 큰 인물을 잃었다”며 슬퍼했습니다.
지훈의 제자인 시인 오탁번 고려대 명예교수는 어느 인터뷰에서 “조지훈 선생은 4・19를 겪으며 이미 이 땅의 가장 존경받는 스승의 높은 자리에 올라 있어 그의 글과 기백이 캠퍼스 곳곳에 스며 있었다.”고 회고했습니다. 지훈의 3남인 조태열 전 주 유엔대사는 “48세에 돌아가셨지만 사진을 보면 20대 때 이미 40대처럼 중후한 모습이셨고 그 모습이 돌아가실 때까지 이어졌다. 자식이 봐도 범접하기 어려운 근엄함이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일찍 늙으면 중년이 길어 좋다”는 말도 했다고 합니다.
지훈의 집안에는 ‘삼불차(三不借)’ 가훈이 있다고 합니다. 재불차(財不借), ‘재물을 빌리지 않는다’, 문불차(文不借), ‘문장을 빌리지 않는다’. 인불차(人不借), ‘사람을 빌리지 않는다’, 이 세 가지입니다. 남의 재물을 빌리지 않고 남의 문장을 가져다 쓰지 않고 대를 이으려고 인위적으로 양자를 들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조태열 씨는 공직생활을 하는 동안 아버지와 삼불차의 교훈으로 많은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인물을 평가하고 고르는 기준에 신언서판(身言書判)이 있습니다. 첫째 인물이 잘났나, 둘째 말을 잘할 줄 아는가, 셋째 글씨는 잘쓰는가, 넷째 일과 사물에 대한 판단이 옳은가, 이 네 가지가 기준입니다. 이 네 가지에서 조지훈은 어느 것 하나 빠지는 게 없는 인물이었습니다. 맵고 반듯한 선비의 모습 그대로입니다. 술꾼을 부주(不酒)부터 폐주(廢酒)까지 열여덟 단계로 분류한 '주도유단(酒道有段)'이나 '멋 설' '돌의 미학' 같은 글에 드러나듯이 지훈은 호방한 애주가이면서 뛰어난 멋쟁이였습니다.
무녀리 모지리 찌질이 칠푼이 조무래기들이 벼룩 장판 뛰기하듯 설치고 깝치고 찧고 까부는 세상이라서 지훈같이 큰 인물이 더 그리워집니다. 지금 그가 살아 있다면 어떤 논설로 이 비루하고 조야(粗野)한 시대를 헤쳐갈까? 7일이면 벌써 입동, 2020년 한 해의 막바지에 탄생 100주년이 된 큰 인물을 만나고 탐구하는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는 일입니다. 겨울은 자기 속으로 침잠해 스스로 내면을 키워가는 계절이 아닌가 싶어 더욱 그러합니다.
[옮겨온 글] / 출처: 2020년 11월 06일 (금)에 받은 자유칼럼그룹의 e메일 / 필자소개; 임철순(任喆淳, 한국일보 편집국장 주필, 이투데이 이사 겸 주필 역임. 현재 한국언론문화포럼 회장. 한국기자상, 삼성언론상, 위암 장지연상 등 수상. 저서 ‘노래도 늙는구나’, ‘효자손으로도 때리지 말라’, ‘손들지 않는 기자들’, ‘내가 지키는 글쓰기 원칙’(공저) 등)
호랑이와 돌 사이
[이강엽의 고전 나들이]
박지원(朴趾源)의 ‘열하일기’(熱河日記)에 보면 ‘사호석기’(射虎石記)가 있다. 한(漢)나라의 장수 이광(李廣)이 돌을 호랑이인 줄 착각하여 쏘았는데 돌이 화살에 꽂혔더라는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이 작품은 그 돌을 둘러보고 쓴 글이다. 박지원은 “한나라 비장군이 호랑이를 쐈던 곳이다”라는 알림 글귀를 소개하고는, 모년 모월 모일 “조선인 아무개가 보았다”는 짤막한 기록만 남겼다.
대단한 이야기가 되려면 조건이 달린다. 여간해서는 있지 않을 일이고, 또 쉽게 반복되어서도 안 되는 것이다. 실제로 그 뒤로는 이광 자신을 포함하여 그 누구도 그렇게 하질 못했다. 만일 그랬더라면 그 돌은 화살촉이 박혀 고슴도치처럼 되었거나 견디다 못해 가루가 되고 말았겠다. 이 이야기를 전하는 사람들은 그 마음가짐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것 같다. 호랑이라 생각하고 쏘면 호랑이처럼 되는 그 신비한 힘을 믿는 까닭이다. 내가 과연 이 일을 할 수 있을까 의구심을 가지면 되지 않을 일이지만, 비록 잘못 알았더라도 저것은 꼭 된다는 신념으로 일을 하면 이루어진다는 그런 스토리다.
그러나 이광의 삶은 그리 순탄치 못했다. 흉노와의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워 명성이 자자했지만, 패배하여 평민이 되기도 했으며 모함을 받아 자결하고 말았다. 적어도 전공에서 그보다 못한 사람들 가운데 제후의 반열에 오른 사람도 있는 데 비하자면 의아한 일이다. 얼마나 날랬던지 날아다니는 장군이라는 뜻의 ‘비장군(飛將軍)’이 별호였지만, 그가 날아다닌 것은 전장에만 국한되었다. 사람들은 그렇게 좌절한 영웅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보이는데, 모르긴 해도 자신의 삶도 얼추 그와 비슷하다고 느끼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보면 왠지 진부하다. 이광은 장신인 데다 팔이 원숭이처럼 길었다고 전한다. 남다른 장력으로 화살의 비거리를 높였겠고, 남들이 닿지 못할 거리에서 ‘원 샷, 원 킬’을 자랑했을 것이다. 한데 쏘는 데 집중하는 것이야 권할 만한 일이지만, 쏘는 맛에만 빠지면 뒷감당이 어렵다. 그저 쏘기 위해 쏘는 자기도취에 빠지기 쉬운 까닭이다. 호랑이를 잡는 데 돌을 뚫을 만한 힘까지 쓸 필요가 있는지는 모를 일이나, 목표물만 보면 쏘아 넘어뜨려야 직성이 풀리는 호승심만으로는 멀리 가기 어렵다. 조선 최고의 글쟁이 박지원도 짤막한 기록만 남기고 길을 떠나는 이유가 어쩌면 거기에 있지나 않을지 조심스레 생각해 본다.
[옮겨온 글] / 출처: 세계일보 / 이강엽(대구교대 교수・고전문학) / 2020-11-05 23:20:08
감자와 다양성
[김홍표의 과학 한 귀퉁이]
11월에 들어섰는데도 돼지감자 샛노란 꽃은 한창이다. 잎도 푸르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땅 아래에서는 탄수화물을 만드는 효소가 부산하게 움직이며 덩이줄기를 살찌우고 있을 게다. 북미가 고향이며 뚱딴지라고도 불리는 돼지감자는 퇴비 없이도, 따로 잡초를 제거해주지 않아도 잘 자라고 추위에도 강하다. 춥고 척박한 지역에서 잘 자라기는 감자도 돼지감자 못지않다. 단위면적당 수확량도 좋아 감자는 인간 집단에 거뜬히 안착했다.
우리에게는 반으로 잘랐을 때 누른빛이 도는 감자가 익숙하다. 비타민A 계열인 카로틴의 색이다. 그러나 동시(童詩)에 등장했던 자주감자도 있다. 자주감자는 왜 보랏빛을 띨까? 딸기나 오디의 붉은색은 자외선으로부터 자신의 씨앗을 지키려는 의도도 있겠지만 눈 밝은 동물을 끌어들여 그 씨앗을 멀리 퍼뜨리려는 목적이 더 클 것이다. 식물의 붉은 색조는 대개 안토시아닌이라는 화합물에서 비롯된다. 자주감자의 색도 마찬가지다. 과학자들은 땅속 곤충이나 세균에 시달리고 물이 부족한 스트레스 상황에서 안토시아닌이 감자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원산지가 안데스산맥 부근인 감자는 가짓과(Solanaceae)에 속하는 식물이다. 과 이름에 태양이 포함된 것으로 보아 적도의 강한 빛을 쬐는 식물들이 가짓과에 포함될 것이라 짐작할 수 있다. 토마토, 가지, 고추, 담배 등이 그런 식물들이다. 감자 열매가 토마토 모양인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닌 것이다. 야생에서 자라는 가짓과 식물들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공통적인 계열의 물질을 생산한다. 예를 들어보자. 감자는 보조개처럼 표면에 박힌 씨눈을 통해 번식한다. 자신의 유전자를 널리 퍼뜨리기 위해 독성을 띤 화합물을 만들어서 제 씨눈을 사수한다. 감자에 푸른빛을 내는 솔라닌이나 토마토의 토마티딘이라는 화합물은 이름조차도 낯설지 않다.
색상과 화합물이 다양하듯 감자의 종류는 전 세계적으로 3000종이 넘는다. 안데스산맥에 터전을 일구었던 잉카인들이 변화무쌍한 환경에 맞춰 여러 종류의 감자를 키웠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잉카인들은 식물의 ‘진화적 발언권’을 무시하지 않고 감자의 다양성을 존중했다. 하지만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배를 모토로 하는 과학혁명 사조가 무르익으면서 우리는 감자의 유전자에 손을 댔다. 최근 생화학 제조업체 몬산토 연구진은 살충제를 생산하는 세균의 유전자를 감자에 이식하고 널리 보급했다. 감자잎벌레가 잎을 갉아먹으면 바로 독성 물질이 분비된다. 특정 지역에 감자잎벌레를 옥죄는 유전자가 퍼짐에 따라 진화적으로 막다른 골목에 몰린 저 벌레가 취할 방도는 딱 두 가지다. 멸종하거나 변신하는 것이다. 자신을 탈바꿈한 벌레는 새로운 종으로서 살충제의 공격에도 끄떡없이 버틸 무기를 틀어쥐게 된다. 상황은 급변해서 이제 감자가 뭔가 수를 내야 할 상황에 부닥쳤다.
우리는 단일한 유전 계통에 철퇴가 가해진 쓰라린 경험을 기억한다. 유럽에서 가장 먼저 감자를 전격 도입한 아일랜드인들이 겪었던 처절한 굶주림과 아사도 이들이 ‘럼퍼’라는 한 종류의 감자만을 경작한 탓이 컸다. 단 한 종의 곰팡이균에 아일랜드가 쓰러진 것이다. 1847년 당시 800만명에 달하던 아일랜드의 인구 거의 절반이 죽거나 미국으로 향했다.
인간은 식물의 순환성에도 손을 댔다. 장차 식물로 자랄 씨앗의 번식 능력을 원천 봉쇄한 ‘터미네이터’ 씨앗이 등장한 것이다. 1998년 미국농무부와 면화종자 기업인 델타앤드파인랜드가 ‘식물 유전자 발현 제어’ 특허를 받았다. 이제 농부들은 씨앗의 수급을 대기업에 의존해야 한다. 하지만 더 심각한 문제가 있다. 농업은 속성상 ‘축소지향’적이다. 인간의 필요에 적합한 극소수 종을 제외하고는 모두 제거할 뿐만 아니라 선택한 종을 쉽게 알아보기 위해 한 가지 식물만 줄지어 심는다. 야생에서는 절대 벌어지지 않는 일들이 인간이 경작하는 땅에서는 가차 없이 진행된다. 농업이든 인공지능 분야든 인류를 위한다는 명목의 단일 대오 아래 결집한 거대 자본은 일관되게 획일화를 꾀한다. 그들은 생명을 줄 세우고 솎아낸다.
[옮겨온 글] / 출처: 경향신문 / 김홍표(아주대 약학대학 교수) / 2020.11.05 03:01
가을바람의 소리
[유광종의 차이나 別曲]
“… 쟁그랑쟁그랑, 쇠붙이가 모두 울리는 듯. 또한 적진을 향해 다가서는 병사들처럼 재갈을 입에 물고 빠르게 달리는데, 호령은 들리지 않고 그저 사람과 말이 달리는 소리뿐(鏦鏦錚錚, 金鐵皆鳴. 又如赴敵之兵,銜枚疾走,不聞號令,但聞人馬之行聲).”
가을밤에 책을 읽다가 문득 뜰로 나선 북송(北宋) 문인 구양수(歐陽修)의 귀에 들어온 소리 묘사다. ‘추성부(秋聲賦)’라는 제목의 이 글 속에서 그에게 가을은 우선 날카로운 쇠붙이 소리로 다가온다. 아울러 조용하며 빠르게 행군하는 군사들로써 드러내는 숙살(肅殺)의 분위기다.
가을은 그렇다. 음양오행(陰陽五行)을 굳이 따지지 않더라도 북반구에 가을이 오면 식생(植生)은 차츰 말라가다가 잎을 떨군다. 겨울을 견디기 위한 식물 나름의 생존 대응이다. 그런 식물의 조락(凋落)을 부추기는 가을바람은 ‘쓸쓸’하다.
큰 거문고 슬(瑟)은 “쓰윽~ 쓱” 소리를 낸다. 그 둘을 합친 ‘슬슬’이 우리말 ‘쓸쓸’로 변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래서 가을바람의 형용에 잘 등장한다. 소슬바람의 ‘소슬(蕭瑟)’도 같은 맥락이다. 메마른 잎과 가지를 스치는 으스스한 가을바람의 의성(擬聲)이다.
가을바람의 별칭은 더 있다. 방위로 표현하는 서풍(西風), 깎고 잘라낸다는 오행상의 쇠붙이 바람 금풍(金風), 쌀쌀하고 차갑다는 의미에서 처풍(凄風)이다. 곧 한 해가 저문다는 아쉬움 때문인지 비풍(悲風)이라는 이름도 얻었다.
요즘 중국에서는 ‘내권(內捲)’이라는 말이 새 유행어다. ‘안으로 쪼그라들다’의 뜻이다. 긴 정체(停滯)와 퇴보(退步)를 지칭한다. 미국과 겪는 심각한 마찰, 경제의 전반적 하강에 따라 혹독해지는 환경을 가리킨다. 어쩌면 이 가을에 불어대는 바람에 잘 어울리는 언어다. 그나마 다가오는 ‘겨울’을 내다보기라도 했으니 낫다. 혹심한 추위를 맞이할지 모를 우리의 채비는 어떨까.
[옮겨온 글] / 출처: 조선일보 / 유광종(중국인문경영연구소장) / 2020.11.06. 03:00
괭이밥
최고령 미국 대통령
1841년 미국 9대 대통령 해리슨이 68세로 취임했을 당시 역대 최고령이었다. 아직 젊다는 걸 과시하려고 춥고 비 내리던 취임식 날 외투를 벗고 1시간 반 넘게 연설했다가 급성 폐렴에 걸렸다. 한 달여 만에 사망해 임기가 가장 짧았던 미 대통령으로 기록됐다. 12대 테일러 대통령도 66세 때 불볕더위 속 행사에 참가했다가 식중독으로 급사했다. 의료 수준이 낮았던 19세기엔 대통령 나이도 업무 수행의 요건으로 꼽혔다.
▶요즘 국가 지도자의 나이는 ‘숫자’에 불과한 경우가 많다. 현 이스라엘・일본 총리, 이란・칠레 대통령 등이 70대다. 카메룬・레바논 대통령은 80대이고 말레이시아 총리는 올 초 95세에 물러났다. 미 정가에서도 서열 3위인 펠로시 하원의장이 80세이고 어제 7선에 오른 매코넬 공화당 상원 원내대표가 78세다. 상원의원 14명이 75세 이상이라고 한다. 워싱턴・뉴욕의 남성 기대 수명은 1990년보다 13.7년이나 늘었다. 대졸 이상 백인일수록 더 오래 건강을 유지하며 활동적으로 산다는 연구도 있다.
▶78세인 조 바이든 민주당 후보의 당선이 확정되면 역대 최고령 미국 대통령이 된다. 4년 전 트럼프의 70세를 깬다. 73세에 재선한 레이건보다 많다. 43세 최연소 당선자였던 케네디와는 35세 차이다. 이번에 바이든의 나이가 논란이 된 건 신체적 건강 문제가 아니라 잦은 말실수 때문이다. 도널드(트럼프)를 자꾸 조지(부시)라고 부르고 손녀를 소개할 때 죽은 아들의 이름을 댔다. 대통령이 아니라 상원의원에 출마한다고도 했다. 74세 트럼프는 이런 바이든을 ‘치매’라고 공격했다. “졸린(sleepy) 조”라고도 놀렸다.
▶바이든은 ‘나이 약점’을 보완하려고 22세 어린 해리스 상원의원을 부통령 후보로 선택했다. 미국 첫 여성 부통령이자 첫 유색 인종 부통령이 된다. 미 언론은 “대통령직 수행이 어려울 경우 국정을 이어갈 수 있는 대통령감을 부통령으로 지명해야 한다”며 “해리스가 그 자격을 갖췄다”고 했다. ‘대통령감’이라는 것이다. 바이든은 자신을 ‘전환기 후보(transition candidate)’라고 표현한 적이 있다. 4년 뒤면 82세라 재선 도전이 어려울 수도 있다는 뉘앙스로 들렸다.
▶미 부통령은 대통령으로 가는 ‘징검다리’다. 바이든도 오바마의 부통령이었다. 50대의 야심만만한 해리스가 바이든 백악관에서 목소리를 키울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하지만 바이든이 재선에 성공할 가능성 역시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얼마 안 있으면 ’78세 대통령'도 특별하지 않은 세상이 될 것이다.
[옮겨온 글] / 출처: 조선일보 / 안용현(조선일보 논설위원) / 2020.11.06 03:18
폴 고갱(Paul Gauguin, 1848~1903) 작